한국내의 美CIA(2)
10·26 뒤 감 빨리 잡은 CIA
이런 한국통이 미8군 주변에 있었지만 10·26이후 제5공화국 출범까지 미국의 對韓정책은 미군의 의도보다는 CIA의 노선에 더 가깝게 추진됐음이 확실하다. 5·16뒤에 매그루더 사령관 휘하 주한 미군의 강경정책이 국무성과 CIA의 온건노선에 밀린 것과 흡사한 경과였다. 미군 정보기관에 대한 CIA의 이런 우세는, 정변 이후 권력의 향방에 대한 감을 제대로 잡았고, 한국의 정치질서를 안정시키는 쪽으로, 또 기성사실화하는 쪽으로 현실적인 정책을 건의했기 때문이었다. 10·26에서 12·12까지는 권력의 공백기였다. CIA는 이 중요한 시기에 새로 대두될 세력에 대한 탐색작업을 진행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브루스터씨는 이미 확실한 채널을 갖고 있었다. 미국본부에서도 한국통을 가동시켰다.
10·26사태 5일 뒤인 10월31일 워싱턴에선 흥미있는 모임이 있었다. 그때 현대건설 대표이사로 있던 장우주(張禹疇)씨(59·前국방부관리차관보·예비역 소장)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워싱턴에 와 있었다. 張씨는 주한 미국대사관이나 주한미군 사람들과는 수십년 동안 교분이 두터운 미국통이다. 그는 워싱턴에서 두 CIA본부 간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1976∼78년 사이 CIA한국지부장이었고 그땐 극동담당국장이던 로버트 그리릴(Robert Grealy)씨와 73∼75년 사이 한국지부장이었고 그땐 국가안보회의에 파견 나가 있던 도널드 그랙씨(Donald Gregg)는 張씨에게 10·26이후의 사태진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張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3金씨가 거론되고 있지만 집권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집권하기엔 어려울 것이다. 권력이란 것은 집권 의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권능력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선 그런 능력이 군부의 지원 아래서만 나올 수 있다』 張씨는 이어서 정규육사출신 장교집단의 부상(浮上)과 세대교체의 조짐, 그리고 全斗煥장군의 리더쉽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그랙은 全장군의 이름을 메모할 만큼 열심이었다고 한다.
11월1일치 일본 마이니찌 신문은 일본 외무성 소식통을 인용, 「全斗煥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란 좀 성급한 기사를 썼다.
「…이 소식통은 비상계엄령 하의 한국에서는 군부가 치안·국정 전반을 장악하고 鄭昇和계엄사령관·金鍾煥합참의장·全斗煥보안사령관 등 군수뇌가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全사령관에 대해서는
①朴대통령을 사살한 金載圭 전 중앙정보부장이 군부를 끌어들이려 했을 때 보안사령부를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고 평온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
②군의 젊은 엘리트를 배출한 육사11기생의 실력자로서 동기생들이 실전부대의 사단장으로 있다
③사건 수사의 최고책임자로서 군의 질서유지에 있어서 중심인물이라는 점등을 들어 군의 실권은 鄭계엄사령관 등 군의 장로들이 아니라 全사령관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뒤에 정확한 예측으로 판명된 이런 기사에도 불구하고 위컴 사령관측에선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군의 서열질서가 유지될 것으로,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한 미군의 정보 안테나가 한국군의 장로들 쪽으로 편향돼 있어서 군 내부의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뒤에 받게 된다.
암과 투병, 격동기 치른 CIA맨
12·12사태가 났을 때 CIA 한국지부는 10·26때보다, 또 미8군보다도 훨씬 덜 당황했던 것 같다. 따라서 12·12 사태 뒤의 대한(對韓)정책도 서로가 약간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위컴 사령관은 5·16때의 매그루더처럼 권위의 손상을 당한 입장에서 강력하게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12·12사태의 당일 밤 위컴은 8군 영외로 차를 타고 나왔다가 한국 계엄군으로부터 총격을 받아 안테나가 부러지는 등 혼이 난 개인적 체험도 했으니 감정도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브루스터씨는 기정사실화 쪽으로 나갔고, 결국은 CIA노선이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한국의 미국통 인사들이 그리릴, 그랙, 클리블랜드씨(주한 미 대사관의 한국과장)등 CIA와 국무성의 한국인맥을 설득, 한미간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암을 앓고 있었던 브루스터씨는 재임 중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네 번이나 바뀌고, 한국 대통령을 세 명이나 겪는 격동의 시절을 보냈다. 재임중 암이 재발, 일시 귀국하여 2차 수술을 받고 돌아와 다시 근무에 임해야 할만큼 격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병색을 일체 내보이지 않고서 의연하게 임무를 해내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국 고위층과의 인간적 유대도 더욱 돈독해졌다.
CIA본부의 뜻도 그러했지만, 본인이나 한국정부도 그의 계속 근무를 희망했었다고 한다. 미국 CIA지부장들 가운데는 자기가 주재하는 나라의 정계 실력자와 특별히 깊은 인간관계를 맺어, 주요한 시기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딘디엠과 막사이사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지하 공작을 지휘한 에드워드 랜스데일, 낫셀 대통령과 너무 친해져 독이 든 담배에 의한 독살명령을 무시한 카이로지부의 마일즈 코플랜드, 태국의 크라이앙사크 장군과 친한 아놀드 같은 사람이 그런 맨 투 맨의 인맥을 가진 CIA맨이었다. CIA에선 브루스터씨를 그런 지부장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브루스터씨는 그러나 80년 말 암이 악화돼 본국으로 후송됐다. 그 얼마 뒤 그는 사망했다.
지부장의 두 유형―공작형, 분석형
CIA본부의 관점에서 한국지부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중요한 거점이다. 공산국과 대치하고 있는 민감한 군사분쟁 지역인데다가,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지정학적으로도 미국 중공 소련 일본이 각축하는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으며, 국내 정치정세가 격동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성을 반영하여 CIA 한국 지부장으로는 대체로 거물들이 왔다. 12명의 역대 지부장 중 한두 명을 빼고는 전부가 50대의 나이에 부임했다. 2차대전중 OSS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20∼30년의 공작경험을 가진, 원숙한 첩보원들이었다.
한국지부장들의 유형은 행동파적인 공작전문가와 냉철한 분석형으로 나눌 수 있다. 70년대 초까지는 대체로 공작베테랑들이 주류였다. 실버나 리차드슨 같은 CIA 안에서는 신화적인 인물들이 대표적인 행동파 지부장들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엔 분석형 지부장들로 바뀌었다. 그것은 CIA간부들의 세대교체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윌리엄 케이시 CIA부장의 한국방문 때, 그를 수행한 사람은 극동 담당국장 로버트 그리릴씨였다. 76∼78년 사이 한국지부장으로 일하다가 필리핀지부장으로 옮겼던 사람이다. 그는 지난해 11월에도 조용하게, 한국을 찾아왔다. 박정수(朴定洙)씨 등 미국통 인사를 비롯, 각계 각층의 중요 인물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2·12총선 이후에 격동하는 한국정세를 현장에서 좀더 가깝게 느껴보려는 출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격동하면 전직 CIA지부장들이 홀연히 서울에 나타나는 일들이 가끔 있다.
이들이 어떤 밀명을 받고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광여행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릴씨의 재임시절은 한미관계가 가장 불편했던 때였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청와대 도청설이 연일 매스컴을 탔다. 카터 행정부의 등장과 미군철수문제, 한국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의 신경질적 반응 등 악재(惡材)가 겹쳤다.
특히 미국 언론의 청와대 도청설 보도는 한국정부의 분노에 찬 성명을 부르는 등 CIA한국지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서울시청은, 미 대사관이 한국일보 맞은편에 있는 직원관사촌에 건물을 신축하려고 하자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한국지부 직원들은 사석에서 『우리가 청와대 도청을 꼭 하고 싶다면 그런 방법(건물신축에 의한 시설)으로 하겠느냐』고 냉소하기도 했다.
포터 대사도 청와대도청 시인
문제의 발단은 1970년 가을 청와대에서 있었던 밀담내용을 미국정부기관이 어떻게 알아냈느냐 하는 점이었다. 이 회담은 朴正熙대통령이 주재했고, 고위 청와대 간부들이 참석했다. 밀담의 주제는 대미(對美)로비활동 채널을 朴東宣씨 아래로 일원화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밀담의 내용은 미국 언론의 보도 이후 미국정부에 의해 미 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제출됐다. 미국정부는 이 정보의 원천을 밝히지 않았다.
미정부의 자료는 청와대 1차 밀담에서 토의된 로비계획이 2차 밀담에선 보류된 과정도 자세히 담고 있었다. 청와대 도청설을, 76년10월15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특종으로 보도한 것은 사교란 담당의 맹렬 여기자 맥신 체사이어씨였다. 체사이어 기자는 朴東宣씨에 관한 정보를, 미국 정부가 청와대와 주미 한국대사관 내부에 있는 정보원(源)으로부터 빼냈다고 보도했다. 이 정보원(源)은 첩자, 도청장치, 또는 전파감청 등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체사이어 기자는 취재기에서 이 사실을 전직 국무성 관리에게 확인했다고 썼다. 이 관리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한국 담당관이었음은 인정했다. 국무성 한국과장을 지내고 70년대 초에 퇴직한 도널드 레이나드씨가, 체사이어 기자가 말하는 확인자란 추측도 있었다.
1978년 4월3일 미국 CBS방송은 윌리엄 포터 전 주한미국대사와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포터씨는 『미국정부가 청와대에 도청장치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 그것(필자 주:도청장치를 의미)이 중단됐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새로 가동시키지 말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포터대사의 이 실토는 그 전해인 1977년8월10일에 터너 CIA부장이 워싱턴 포스트지 기자에게 했다는 말과 상충되고 있다. 터너는 『청와대에는 녹음테이프나 도청장치가 없었다. 나는 CIA, NSA, 그리고 다른 모든 미국 정보기관을 대표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고 했었다.
도청 전문가였던 실버 지부장
포터대사가 한국에 부임한 것은 67년8월9일이었다. 포터 대사와 터너부장의 말을 『67년 이전엔 도청장치가 있었으나 그때(1970년 가을)는 도청장치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두 사람의 증언은 상충되지 않게 된다. 적어도 포터대사의 증언을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67년 이전에 CIA한국지부장으로 부임했던 넬슨, 실버, 나오시스, 에드워드, 라자스키 등 다섯 명에게 도청의 혐의가 돌아가게 된다. 이들 가운데 실버씨는 CIA를 물러난 뒤인 1978년에 회고록을 썼다. 「서브 로자(Sub Rosa)」(라틴어로 비밀이란 뜻)란 이 책에서 그는 여러번 자신의 도청공작을 소개하고 있다. 도청전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공작기술은 다양하다. 그의 체험담을 소개한다.
사례1 : KGB 지부장 집 도청
195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지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나는 잘츠부르크의 어느 호텔에 某 중립국의 대표단이 투숙할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이 사절단은 고위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었다. 사절단이 호텔에 도착하기 며칠 전 나는 첩보조장 부부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사절단이 묵을 특실에 투숙시켰다. 그 부부는 탁자다리에 송신기를 설치했다. 그들의 대화를 수신하여 우리는 그 중립국이 다가올 회담에서 소련에 대하여 철강기술의 지원 등을 요구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 정보를 우리는 워싱턴으로 보고했다. 그 중립국에서의 전략계획수립에 적절하게 활용됐다.
사례2 : 공중전화 도청
빈의 소련 대사관 앞에는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다. 우리는 전화박스 천장에다가 도청용 송신기를 몰래 붙여놓았다. 우리는 기다렸다. 낯이 익은 KGB요원이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스트리아인 첩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첩자의 사는 곳을 알아냈다. 우리 요원들이 그를 협박하여 우리의 첩자로 만들었다. 그는 KGB에 박힌, 우리를 위한 2중첩자가 된 것이다.
사례3 : KGB 지부장 집 도청
우리와 협력하는 부동산 중개인이 빈의 KGB책임자가 캐나다 외교관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란 정보를 갖고 왔다. 캐나다 외교관이 집을 비우고 KGB책임자가 이사를 오기까지의 어느 날 밤 나는 요원들을 그 빈집에 들여보냈다. 서재의 창문 쪽에 붙은 장식판자를 뜯어내고 콩알만한 송신기를 붙였다. KGB책임자는 그 서재에서 가끔 작전회의를 열었고, 우리는 죄다 그 내용을 듣게 됐다. 배터리가 소모되어 가동이 중단될 때까지 여덟 달 동안―.
우방국 원수 도청은 관례
실버씨는 지난 59∼62년 7월까지 한국지부장으로 일했다. 그가 경무대(뒤에 청와대)에 도청장치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확실한 것은, 그가 만약 그런 장치를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빈에서보다는 아주 쉽게 할 수 있었으리란 점이다. 행동의 자유, 접근의 용이함, CIA커넥션의 풍부함 등에서 한국은 CIA가 활동하기에 가장 편한 나라일 것이다(더구나 60∼70년대의 놀라운 전자기술 발전을 생각해 보라). 그런 점에서 우리와 비슷했던 월남의 도청사례를 참고해 본다.
사례1 : 티우집무실 도청
사이공 함락 직전 CIA사이공 지부에 분석관으로 근무했던 프랭크 스넵씨는 77년에 「Decent Interval」이란 책을 써 CIA공작을 폭로했다. 그에 따르면 티우 대통령의 집무실뿐 아니라 거실도 도청됐고, 그의 정적이던 민 장군의 집도 도청됐다. 75년4월21일 티우 대통령은 수상과 부통령을 불러 사임의사를 밝혔다. 도청장치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CIA지부장 폴가씨는 『월남정전 이후 최대의 특종을 했다!』고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사례2 : 도청기술
14년간 CIA간부로 일했던 빅터 마체티씨가 쓴 「CIA와 정보숭배」란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날 CIA 및 기타 정보기관은 출입금지 구역에 도청장치를 하거나 전파도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경호원이나 수위를 찾고 있다. 다른 나라의 전화전신회사도 CIA의 표적이 되어왔다. 외무성 및 국방성 침투 이외에도 CIA 공작원들은 당사국가의 전신조직에 침투하려 한다. 이 작업은 때로 미국 회사 특히 국제전신전화회사(ITT)의 도움을 받는다. 우편업무도 첩보 목적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CIA 공작원의 대부분은 도청에 관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도청장치를 하는 것은 CIA 본부나 지부에서 온 기재과 전문요원들이 대부분 맡고 있다.
작업이 복잡하면 할수록 CIA 본부의 전문가들이 더욱 많이 동원된다. 어떤 경우에는 CIA 요원 및 책임자급 까지도 이러한 장비설치 기술에 관해 기재과 전문가의 특별훈련을 받아야 한다. 물론 가청(可聽) 주파장치는 복잡하고 어렵다. 고도로 위험이 수반되는 작업은 광범위하고도 상세한 조사가 끝난 후 엄청난 사전 계획을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건물 및 바닥에 대한 계획은 1차적으로 눈으로 감식한다. 건물 벽의 구조, 방 내부의 색깔 및 이와 유사한 사실도 신중히 결정되어야 한다. 이 장비가 설치될 건물이나 방 혹은 사무실내의 활동이 관찰, 기록되어 그 지역에 언제 접근할 수 있느냐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의 움직임과 순찰 상황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후에라야 어디에 언제 도청장치를 할 것이냐가 최종 결정된다. 보통 문제의 장소는 밤이나 주말에 침투하며 주의 깊게 사전 계획된 시간에 도청장치가 설치된다. 속력 빠르고 소리나지 않는 고속 착공기로 벽을 뚫고 도청장치를 한 뒤 손상된 부분은 빨리 응고하는 도벽제로 막고 처음과 똑같은 페인트칠을 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 장치는 옆방 혹은 아래 윗방으로부터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천장이나 마루바닥이 있는 경우).
CIA가 도청에 성공한 나라는 보통 국내 안보체제가 해이해서 이 장치를 하는 데 필요한 CIA 활동의 자유를 용인하는 비공산국가에 한정되어 있다. 일부 동맹국에서 CIA는 당사국 정보기관이 설치한 도청장치로부터 얻은 정보를 같이 쓰고 있다. 당사국 정보기관은 CIA로부터 기술적 원조를 받으며 이 과정에서 CIA가 침투할 수도 있다」
FBI는 케네디 대통령의 백악관 전화까지 도청, 케네디 대통령이 마피아 단원의 정부와 정을 통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낸 적도 있다.
에드가 후버 국장이 식사시간에 조용히 이 사실을 대통령께 통보, 관계를 끊도록 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증거로 보아 청와대가 CIA에 의해 도청된 적이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朴대통령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집무실에서 정원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CIA가 사람에 의한, 또는 외부로부터의 전파발사에 의한, 도청을 했다면 그런 회피 방법은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계속>
한국 내의 美CIA(2)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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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2-15, 1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