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내의 美CIA(3)

정보는 어디까지나 정책의 도구이지, 그 주인은 아니다. 정보가 주인이 되면 권력자는 정보의 노예가 돼 버린다
한국내의 美CIA(3)



분쟁지역만 쫓는 8대 지부장

75년 봄에 태국으로부터 부임, 아홉 달만 있다가 다시 태국으로 돌아간 다니엘 C 아놀드 지부장(8대)은 해병대 장교 출신이었다. 행동이 절도가 있고 약간은 딱딱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분쟁지역만 찾아다닐 정도의 지하공작전문가였다. 그가 부임했을 땐 한국의 국내정세는 긴급조치 9호의 공포 이후, 비교적 잠잠한 때였다. 그는 『너무 조용하니 아마도 오래 있게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우스개를 했다. 그의 우스개는 적중했다.
76년에 들어서자 태국의 쿠크리트 수상 내각이 하원에서 불신임을 받았다. 쿠크리트씨는 의회를 해산, 선거전에 들어갔다. CIA는 태국사정에 정통한 아놀드씨를 다시 뱅콕으로 보냈다. 아놀드씨는 그 뒤의 혼란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크리트 수상이 선거에서 참패한 뒤, 좌익계 학생데모가 유혈사태로 치닫자 태국군부는 76년10월6일 쿠데타를 일으켰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군부가 추대한 새 수상은 크라이앙사크 차마난드 총사령관이었다. 크라이앙사크의 뒤에는 아놀드씨가 있었다. 두 사람의 깊은 개인적 인연은 태국정치 역학의 중요한 함수로 지적될 정도였다. 아놀드씨와 가깝게 지낸 한국인으로는 백두진(白斗鎭)씨(당시 유정회 의장)가 있다. 白씨는 78년3월에 태국을 방문, 아놀드 지부장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아놀드씨는 『스나이더 주한 미대사의 후임으로는 글라이스틴씨가 확정적이며 카터 대통령의 철군계획은 결국 좌절되고 말 것이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예언은 1년 뒤에 모두 적중했다.


『金大中씨는 CIA가 살렸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金大中씨 납치에 관련했다는) 정보를 얻는 데는 강대국이 관계됩니다. 세계제일의 강대국의 정보가 8일(납치 당일) 저녁 무렵에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죠. 미국의 CIA가 한국 중앙정보부에 지령을 한 것이죠. 강대국은 「죽여서는 안 된다」고 지시를 내렸죠. 나는 金씨가 그렇게 해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작은 배에서 큰 배로 金씨를 옮기기 전에 배에 직접 지령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요. 계획을 사전에 알고서 바다 속에 던져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그런 지시를 내렸겠죠.
어쨌든 죽이지 말라고 하니 엄청나게 당황했겠죠. 그래서 큰 배가 출항해서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우스노미야씨가 사건직후에 나를 찾아 왔을 때 나는 「金大中씨는 절대로 살해되지 않습니다. 제게 믿는바가 있습니다」고 안심시켰죠』(73년8월8일 金大中씨 납치사건 당시 일본 법무장관이었던 다나까 이사마씨가 78년 8월에 마이니찌 신문기자에게 털어놓은 이야기)
「당시 미 국무성 한국과장 레이나드씨에 따르면 사건 직후 서울주재 CIA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랙씨가 한국중앙정보부에 문의하여 金大中씨 납치는 한국중앙정보부가 했다는 것과 범행을 실행한 정보부 공작원 몇 명의 이름까지 확인, 그랙씨는 그것을 미국에 보고했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한 8월8일 직후부터 2∼3주간 동안 레이나드 한국과장의 책상 위에는 연일 서울과 도쿄의 미 대사관과 CIA에서 올라오는 방대한 보고서가 싸였다. 특히 CIA는 한국 중앙정보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레이나드씨에 의하면 「한국 정보부 내부에 미국 측에의 통보자가 많아 사건의 내용을 그 계획단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상세하게 전달했다」고 한다.
미 CIA의 극비보고서는 사건 후 2∼3주간만에 범행에 가담한 주요인물, 범행방법, 金씨가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연행된 과정, 오사카 부근에서 金씨가 『안전가옥』에 잠시 감금된 사실, 그곳에서 배까지 운반된 상황 등을 전해 왔다고 한다」(1977년 11월4일자 아사히신문 조간의 레이나드 인터뷰 기사). 「駐韓, 駐日 CIA의 비밀보고에 의하면 한국에서의 공사계약을 둘러싸고 일본의 회사들이 한국측에 뇌물을 제공했다고 레이나드씨는 밝혔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의 對韓(대한)로비스트로서 기시 前 수상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마이니찌 신문 1977년 1월28일치 인터뷰 기사).


李厚洛씨를 밀어낸 그랙 지부장

이상의 인용문에 나오는 CIA보고의 당사자는 金大中씨 납치사건 때 CIA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P 그랙씨(Donald P Gregg)다. 그랙씨는 미국의 명문 윌리엄스 칼리지를 나온 엘리트다. 지금(1986년 2월)은 50대 후반의 나이에 부시 부통령의 국제문제 담당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다. 부시씨가 차기 대통령이 되면 제2의 키신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란 평을 벌써부터 듣고 있다. 그는 75년에 한국에서 본부로 돌아가 백악관의 국가안보위원회(NSC)에 파견됐다가, CIA부장 출신인 부시 부통령에게 발탁된 것이다.
국무성과 CIA에 있는 한국통 실무 관료들의 총수 격으로 뒷무대에서 조용하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평이다.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조지 타운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는 학구파다. 역대 CIA한국지부장 가운데서 그랙씨 만큼 좋은 인상을 심고 간 사람도 드물 것이다. 白斗鎭씨는 『부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대만의 고아를 양자로 기르고 있었다. 친자식보다 더 귀여워했고, 식탁에선 기도를 열심히 해 밥이 식을 정도였다』고 했다. 장우주(張禹疇)씨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파워보다는 머리를 쓰는 타입이었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평했다.
李厚洛씨와 CIA의 관계는 그랙씨의 전임자인 리차드슨씨의 재임 후반기에 와서 급속히 냉각하더니 그랙씨의 시절에 와선 파탄되고 만다. 독실한 천주교인의 윤리관을 가지고 있던 그랙씨는 李厚洛씨의 돈 관계를 소상히 알고 있었고, 그를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李씨는 그랙씨에게 金日成을 만난 인상을 이야기하면서, 『상당한 인물』(Quite a Character)이란 표현을 썼는데, 그랙씨는 정보부장으로선 너무 경솔한 이야기란 표정이었다고 한다. 李씨에 대한 그랙씨의 이런 평가는 金大中씨 사건을 계기로 하여 李씨의 실각 쪽으로 작용하게 된다. 레이나드씨의 증언은 金大中씨 사건에 있어서, CIA의 역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증언이다.
사건당시의 국무성 한국과장이었으므로, 신문사에 비유하면 사회부장이었다는 얘기다. 다만 그의 신빙성이 문제다. 레이나드씨가 77년 1월28일자 마이니찌 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일본회사의 뇌물제공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일본 정부나 기시 전 수상은 근거 없는 중상이라고 일축했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돼 일본 의회에서 일본의 상사연합이 서울지하철 공사를 맡으면서 공화당 정권에 뇌물을 주었고, 기시 前 수상이 이 공사를 따내는 데 로비스트로 뛰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레이나드씨의 증언과 CIA 한국지부의 보고가 정확했음이 입증됐었다.
레이나드씨의 증언에는 金大中씨 사건 때 CIA 서울지부가 한국정부안의 정보망을 통해 진상을 알아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런 방법보다는 통신도청에 의한 정보수집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미국 정보기관이 서울과 납치선 사이를 오가는 무선을 가로채 납치의 진행과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 법무장관이 벌써 납치 당일 저녁에 『金씨가 무사할 것이다』는 CIA정보를 접수했다면, CIA의 개입은 즉각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순발력은 CIA의 정확한 정보입수와 이에 따른 키신저의 강력한 경고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NSA의 통신도청, 청와대까지?

미국 측의 통신도청 기술에 참고가 될 기사가 78년 5월26일자 워싱턴 스타紙의 1면 머리에 실린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미국의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가안전국(NSA)이 주미 한국대사관과 한국정부 사이의 암호 전신문을 모니터했다고 전했다. 암호 해독반은 그 전신문을 풀어서 金東祚 대사가 미 의회를 상대로 벌인 로비활동의 진상을 낱낱이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전파 도청을 전문으로 하는 이 NSA에 대해선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푸에블로호 납치, EC-121 정찰기 피격, KAL007피격 사건 때마다 NSA란 이름이 등장했다. 그리곤, 곧 비밀의 장막 너머로 사라지곤 했었다. NSA의 주임무는 엘린트(Elint=Electroric Intelligenec), 즉 전자기술을 동원한 첩보활동이다. NSA는 너무나 비밀에 쌓여 있어 NSA에 대해 쓴 책이 NASA, 즉 우주항공국에 대한 책으로 잘못 선전될 정도이고, NSC 즉 국가 안보위원회와 혼동되는 일도 있다.
NSA는 세계 곳곳에서 약 2천 개소의 통신 모니터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가까운 메릴랜드주의 포트 미드에 있는 본부에선 매일 40톤 씩의 극비 자료를 생산한다고 한다. 암호 해독 이외에도, 대용량 컴퓨터로써 상대국의 통신을 분석하여 그 내용을 알아내고, 「트랙킹 어낼리시스」란 방법을 쓰면 국내배치의 변경상황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때 아르헨티나 군의 암호를 해독, 영국에 정보를 제공한 것도 NSA였다. 카터 대통령이 한국 주둔군의 철수계획을 포기한 것도 NSA의 북괴군 배치상황 정보에 의한 결단이었다고 전한다. 1년 예산이 약 1백억 달러나 돼 CIA를 비롯한 다른 정보기관의 예산을 합친 것보다도 많다. KAL 007 사건 때 소련 요격기와 관제소 사이의 대화를 녹음한 것도 북태평양의 미국령 시미아 섬에 있는 NSA기지였다. 일본의 아오모리와 가나까와 지방에 있는 NSA기지도 007 피격상황을 모니터했다.
물론 한국에도 여러 군데에 NSA기지가 있는 것으로 보도됐다. CIA 한국지부장은 NSA의 업무를 지도하는 자리에 있고, 매일 중요한 보고를 받는다고 한다. 金大中납치 사건 때 NSA의 「전자 귀」가 동원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자연스런 추리겠다. 청와대 도청에 관계한 시설은 미 대사관 안테나가 아니고 NSA란 설도 있다.


朴鐘圭 채널을 통한 李厚洛 거세

이후락(李厚洛)부장에 대한 미CIA의 「비토 선언」은 1973년 8월17일자 미국무성의 내부 회람 메모랜덤에 나온다. 5년 뒤 프레이저 위원회에 제출된 이 문서는 미국 내에서 이뤄지고 있는 한국 교민에 대한 한국정부기관의 활동을 지적하여 FBI에 수사를 의뢰했음을 밝힌 다음 이렇게 못박았다.
「…우리(국무성)는 이 문제로 CIA측과 협의했다. 그들은 李厚洛씨와의 관계에 대해 신중한 검토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내의 불안정을 우려하고 있는 CIA는 금명간 李씨를 겨냥한 조치(action directed against him)를 취할 생각이다」
미 하원 보고서에 따르면 주한 미 대사관은 李厚洛씨에 의한 金大中씨 납치, 反정부 대학생들에 대한 강경 진압, 어느 교수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또 위의 국무성 문서에 적힌 대로, 미국 측(CIA)은 朴鐘圭 경호실장을 통해 朴대통령에게, 李 부장의 행동에 대한 불만과 그것이 한미 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점을 전달, 그를 제거시켰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 측의 관점에서만 李厚洛씨의 실각을 해석하고 있는 듯하다. CIA의 압력은 李씨 실각의 한 원인이었을 뿐이다. 7·4성명 이후 李씨의 독주가 朴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尹必鏞씨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대통령으로부터 받았으며, 金씨 납치사건으로 나라를 망신시켰다는 점등으로 해서 대통령의 불신임이 깊어 가고 있을 때 CIA의 제거요청이 왔던 것이다. CIA에선 이처럼 李씨의 기반이 약해지는 시점을 택해서 펀치를 날린 것인지도 모른다.
CIA가 李씨 제거공작을 朴鐘圭씨를 통해서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李厚洛씨와 미 CIA의 밀착은 잘 알려져 있지만 朴鐘圭씨도 역대 CIA 지부장들과 친밀했었다. 5·16당시의 지부장 실버씨와 10·26당시의 브루스터씨가 다 같이 朴鐘圭씨를 통해 정변의 진상과 주동세력의 성격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CIA는 朴대통령 측근 2대 권력자와 직통 채널을 갖고 있었다. 그 한 채널을 가동하여 다른 채널(아마도 쓸모가 없게 된)을 제거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CIA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랙 지부장 시절에 李厚洛씨뿐아니라 朴鐘圭씨도 8·15저격사건으로 물러나 CIA의 2대 채널이 끊어져버렸다. 이와 함께 한미간의 불편시대가 시작된다. 정보기관이 하는 역할은 무대 위의 마찰을 막후의 교섭으로 해결하는 일인데, CIA의 고급 채널이 끊어짐으로써 해결사의 기능이 약화됐다. 李, 朴씨의 후임이 된 申稙秀, 金載圭, 車智澈은 CIA와의 관계나 정치역량에서 앞의 두 사람에 미치지 못했다.
金載圭는 중정부장 취임 이후, 한국의 핵개발 정책에 반대하는 등 친미적인 경향을 보였으나 朴대통령의 신임쟁탈전에선 車智澈에게 밀렸다. 車실장은 이 조직을 통해 金載圭가 올리는 정보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 朴대통령에게 金부장의 보고가 엉터리란 쪽으로 몰고 가기도 했다. 이에서 비롯된 車실장에 대한 金부장의 증오심이 10·26의 가장 중요한 동기였다. 국가정보의 채널을 지도자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때는 재앙이 생길 수도 있다는 교훈을 준다.
CIA가 아무리 막강해도, 미국 대통령은 CIA의 정보를 정책의 참고자료로 쓸 뿐이다(CIA 이외에도 다섯 개의 주요 정보기관이 더 있다). 정보의 수집, 평가, 판단, 실행을 한 기관이 독점해버리면 「정보의 객관화」가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CIA의 기능을 정책결정이나 실행에서 멀리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정보는 어디까지나 정책의 도구이지, 그 주인은 아니다. 정보가 주인이 되면 권력자는 정보의 노예가 돼 버린다.


가장 막강했던 리차드슨

CIA한국 지부장의 임기는 2년이 원칙이다. 급박한 사태가 발생하면 이 기간이 단축되거나 연장된다. 제6대 지부장 존 리차드슨씨는 69년부터 73년5월까지 4년을 근무했다. 역대 지부장 가운데 최장기 근무자다. 그의 시절에 3선개헌, 대통령선거, 남북회담, 유신선포가 있었다. 격동기에 오래 근무했기 때문인지 얼굴이 가장 널리 알려진 지부장이다. 부임할 때 56세의 대머리 노인이었다. 허리가 꾸부정한 그는 어떤 사람과도 만나는 화통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딸을 데리고 나이트 클럽에 가서 고고 춤도 곧잘 추곤 했다. 그는 한국이 마지막 근무처였다. 즉, 한국에서 60세를 맞아 정년은퇴한 것이다. 지금은 멕시코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IA의 직원들 이름은 거의 활자화되지 않는다. 부장이나, 가끔 국장급 정도가 공개될 뿐이다. 그런데도 리차드슨씨의 이름은 웬만한 CIA관계 서적에는 반드시 나온다. 세계적인 대사건의 현장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상한 영감처럼 말도 나지막하게 하던 리차드슨씨는 2차대전 때 이미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 몸 담았다. 윌리엄 콜비, 리차드 헬름즈씨 등 뒤에 CIA부장이 된 사람들과 같은 그룹이었다.
戰後에 그는 그리스의 국가정보기관 KYP를 조직하고, 훈련하고, 자금을 대주는 데 깊이 관여했다. 1956년 하바드 대학 교수이던 키신저씨는 그리스를 여행했을 때 CIA지부장이던 존 리차드슨씨의 영접을 받았다. 리차드슨씨는 그리스의 유력 언론인을 키신저씨에게 소개시켜 주는 등 안내를 잘 해주었다고 한다. 이 여행에서 키신저씨는 미 CIA가 그리스 군부를 지원하는 구심점이란 선입견을 갖게 됐다고 한다. 60년대에 그리스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군부 독재체제가 들어섰을 때도 키신저씨는 CIA와 군부의 유착을 계속 뒷받침하게 됐는데, 그리스 여행 때의 인상이 아주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차드슨씨와 친했던 한국인들은 역대 지부장 중 가장 막강했던 인물로 그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직급도 역대 지부장 중 가장 높았다. 한국에 왔을 땐 이미 산전수전 다 격은 첩보원으로서, 어떤 공작을 조직하고, 조종하는 데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더구나 리차드 헬름즈나 윌리엄 콜비 등 그의 친구들이 CIA의 지휘부에 있어 미국 본부에 대한 그의 발언권도 컸었다.
71년 대통령선거 직후, 청와대에서 朴대통령, 李厚洛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또 다른 정보기관장이 비밀회합을 가졌다. 유신에 대한 기본 구상이 토의됐다. 그 며칠 후 리차드슨씨가 모 정보기관장을 찾아가 그 토의내용을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리스 정보기관의 후견인이었던 리차드슨씨는 월남의 고딘디엠 대통령 시절 사이공 지부장이었다.
여기서도 그는 대통령의 동생 고딘누가 대장으로 있는 비밀경찰을 조직, 훈련하고 자금을 대는 대부(代父)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 CIA는 우방국의 정보기관을 강화하는 정책을 오랫동안 추진해왔다. 그런 지원을 통해 상대국의 정보기관을 친미화 시키고, 그 내부에 CIA의 협력자를 박아 놓는다. 우방국의 정보기관이 막강할수록 그 상대역인 CIA도 일하기가 편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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