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혁명과 美CIA

한국 내의 美CIA(6):'우리는 張총리에게 군사혁명 가능성을 보고했다. 張총리는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내의 美CIA(6)


張勉박사와 절친해진 지부장

실버씨는 곧 張勉부통령에게 접근, 아주 친숙하게 됐다.
「1959년 연말에 한국정부가 반도호텔 대연회장에서 주한 외교관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었다. 張勉박사가 참석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한 채 홀로 서 있었다.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미국 정부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으니 집으로 찾아올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실버씨에 따르면 張勉박사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권력남용 등의 실태를 소상히 이야기해주었다고 한다. 실버씨는 적어도 1주일에 한번씩, 張박사의 집에 가든지, 자기 집에 그를 초대하여 만났다고 한다. 4·19까지의 격변기에 張박사와 지속적인 대화채널을 유지했던 대사관 직원은 실버씨뿐이었다. 실버씨는 미군들사이에 마이크 김이란 애칭으로 알려진 金貞烈 당시 국방장관과도 특별히 두터운 우정을 맺게 됐다고 썼다.
4·19를 전후하여 그는 분주했다. 시위대를 쫓아다니고, 내무장관을 만나면서 그는 사태의 추이를 관찰했다는 것이다. 60년 4월26일 李承晩대통령이 하야결심을 한 뒤, 이를 통보해주기 위해 매카나기 대사를 불렀을 때 실버씨는 대사, 매그루더 사령관과 함께 경무대로 갔다.
「…회담은 15분 가량 계속됐다. 李대통령은 과도정부로 하여금 새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이 나라를 이끌어가도록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매카나기 대사도 찬동했다. 金貞烈장관은 대통령이 기진해 있으므로 호놀롤루의 미육군 종합병원에서 일정기간 요양할 수 있도록 조처해줄 것을 요청했다」
실버씨는 李承晩박사가 하와이로 출국하는 준비작업에도 관계했다. 張勉박사가 총리가 되자 실버씨는 휴가신청을 냈는데 본부에선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새로운 정부를 영도하는 張勉박사와 당신의 특별한 인간관계에 비추어 휴가를 1년간 늦추라」는 지시가 내렸다는 것이다. 張勉총리의 집권은 미국 정부나 CIA가 바라던 바였다. 그 적극적 후원자의 한 사람인 실버씨가 張勉 박사 곁에 있기를 CIA에선 바랐던 것이다. 이 무렵 張박사에 대한 실버씨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은 중앙정보위원회의 설립에서 잘 드러난다.
실버씨는 李厚洛씨를 실장으로 앉히는 조건으로서 중앙정보위원회의 조직, 훈련, 운영에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張박사에게 제의했다. 측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張박사는 실버씨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우방국에 친미적이고, 강력한 정보기관을 만들어주는 것은 CIA의 확립된 정책이다. 잘만 관리하면 그 정보기관은 그 나라에 박아놓은 CIA의 협력자가 되기 때문이다. 張勉 국무총리는 이때 흥미로운 미국인을 정치담당 고문으로 썼다.
그는 도널드 위터카씨였다. 위터카씨는 해방직후 미군이 한국에 상륙할 때 따라왔다. 정보처(G2)에서 문관으로 북한반장을 했다. 당시 그의 밑에서 일했던 高貞勳(고정훈)씨에 따르면 위터카씨는 중국어, 한국어도 곧잘 했다고 한다. 아마도 2차대전 때 한국문제 전문가로 군에 차출된 사람인 듯했다고 한다.
위터카씨는 張勉총리의 고문으로서 ①영문으로 된 문서의 작성 ②미국기관과의 연락을 주임무로 했다. 정보처 문관 출신이란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한국내 미국 정보기관과 張勉총리 사이의 연락인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역대 정권 가운데 張勉정부처럼 미 대사관이나 CIA와 친밀했던 정권은 달리 없다. 그때 미 대사관의 매카나기 대사, 그린 부대사, 도날드 레이나드 정치담당 영사, 그레고리 핸더슨 문정관 등은 모두 張勉씨와 개인적으로 가까웠고,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밀월시대는 짧게 끝나고 만다


KGB에 노출됐던 실버 지부장

실버씨는 빈이나 한국에서 자기 신분을 드러내 놓고 활동했다. 그는 1955년 이후엔 자신의 신분이 소련 KGB에 알려졌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CIA간부란 사실이 알려졌다고 해서 그의 효용이 끝나는 건 아니다. 어차피 CIA고위직으로 오르면 비밀공작에 몰두할 기회가 적어진다. 그 대신 신분이 은폐된 비밀공작원을 지휘하는 일이 많아진다. 훌륭한 CIA간부는 비밀공작을 하면서도 평범하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 이 책략은 이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분이 노출된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실버씨가 자신을 노출된 첩보원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다. 킴 필비는 한국전쟁 때 미국에 파견된 영국정보기관 현지 책임자였다. 영국정보기관의 서열3위까지 올랐던 사람인데, 1930년 이후 KGB의 첩자였다. 그는 영국 정보기관 사람들이 사촌이라고 부르는 CIA를 무상출입했다. CIA국장인 알렌 덜레스씨 등 간부들도 자주 만났다. 두 기관의 정보교환에도 관계했다. 더구나 필비와 같이 KGB첩자였던 매클린은 그때 영국정보기관의 본부에서 미국담당과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필비―매클린 루트를 통해 CIA간부들의 신상명세뿐 아니라 한국전쟁에 대한 주요 전략 정보가 모조리 소련권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중공군이 참전해도 미국은 원자탄을 쓰지 않고, 중공본토로 확전하지 않는다는 계획도 필비를 거쳐 소련을 경유, 중공으로 새나갔다는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우리 작전계획을 죄다 미리 알고 있다』고 불평했었다.
5·16쿠데타는 CIA한국지부와 미군, 그리고 미대사관에겐 잊을 수 없는 참패였다. 사전에 알지 못했고, 사후에 진압하지 못했고, 수습에서도 워싱턴 당국에 기선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다. 실버씨는 회고록에서 5·16주체세력 등장을 눈치채지 못했던 점을 자가비판하고 있다. 「미국․한국장성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골프, 테니스, 포커, 칵테일 파티 등을 통해 미국은 한국장성들이 한국의 전통과 문화와 소망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국 군부 내에선 미국 고위층이 주최하는 사교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않는, 소외되고 알려지지 않은 일단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 5·16은 실버씨에겐 「가장 긴 날」이었다.


CIA, 5·16쿠데타 정보 입수

그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우리는 朴正熙 직속참모의 일원인 어느 한국군 장교로부터 며칠 전에 군사혁명에 관한 사전제보를 받았었다. 그 장교는 우리 분실의 요원과 친한 사이였다. 나는 매카나기 대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는 이 보고를 확인해 볼 방법이 없으므로 당분간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는 내가 張총리에게 통보해 주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행동개시 일자만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알려 주었다. 張총리는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몇 달 전부터 군사혁명에 관한 루머들이 있었다. 군사혁명의 가능성이 짙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사관 사택 제2단지 내에 있는 내 집에 소형 송수신 무전기를 설치하여 대사관 건물 옥상에 있는 전용 통신실과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전용 통신실에는 2명의 무전사들이 밤낮없이 24시간 근무하도록 했다. 문제의 그날 새벽 2시30분경, 나의 무전기가 삑삑 울려 잠이 깼다. 대사관 옥상에 있는 나의 무전사는 남산 기슭에서 예광탄이 무지개를 그리고 있으며, 한강다리가 있는 지역으로부터 총성이 들려오고 있다고 긴급히 보고를 했다. 어떤 군부대가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나는 몇 군데 전화를 건 후, 우리 분실 요원들에게는 각자의 집에 설치된 무전기를 통해 비상을 걸었다. …대사관으로 가자면 중앙청과 덕수궁 사이의 큰길을 지나가야 했다. 우리 대사관은 덕수궁에서 왼쪽으로 약 1백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내가 큰길로 나왔을 때에는 여러 대의 한국군 트럭과 지프들이 평상시에는 늘상 붐비던 교차로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으며 30㎜와 50㎜ 구경의 기관총을 세워놓고 있었다. 나는 내 세단의 차안에 있는 등을 켜고 차의 속도를 줄였다. 신경이 곤두선 보초들에 의해 총격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가까운 거리를 가는 동안 나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몇 번이나 저지를 당했다. 그들은 내 차로 다가와서 나의 신분을 확인한 후 가라고 손짓했다. 張勉의 행방과 안전이 걱정되었다. 2명의 무전사 중 한 명이 내 사무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무전 傍受(방수) 수단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나는 워싱턴에 쿠데타의 발생을 알리는 전문을 쳤다. 그리고 대사관 직원 중 누가 없는가 찾아보았다. 대사관에는 당직직원인 정치과의 말단직원 한 사람 밖에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직원이 직속상관을 통해 대리 대사에게 사태를 보고했을 것이다. 유엔군 사령부 및 미8군 사령부와는 아직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다가 문득 張총리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그의 비밀 전화번호를 돌렸다. 그는 길 건너 반도호텔에 방을 하나 마련하여 시내에서 늦게까지 일을 할 때에는 거기서 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응답을 해왔다. 내가 영어로 말하자 상대방도 영어로 대답했다. 나는 내 이름을 대고 길 맞은편 미대사관에 있는데 張총리가 그곳에 있는지 물었다. 상대방은 긴장된 목소리로 張총리는 실각했으며, 그곳에 없고, 도주중이며, 혁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상대방의 이름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朴鐘圭 소령입니다. 혁명군을 대표합니다』
나는 호텔 객실로 가서 그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 후 대답을 듣지 않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朴鐘圭 통해 金鍾泌 만난 실버

이때가 새벽 5시경이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서 해병 경비 데스크를 지나 반도호텔 쪽으로 길을 건넌 후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한떼의 서양인들이 잠에서 깨어나 잠옷과 실내복을 급히 걸치고 나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로비에는 한국군 공수단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걸어가자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와진 호텔 직원이 나의 이름을 대라고 고집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키가 큰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내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한국어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으나 그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서 총리실이 있는 8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 사병이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는 스르르 닫혔고 윗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8층으로 올라와 오른쪽 張총리의 방으로 갔다.
문을 두드리자 마른 얼굴에 호리호리한, 잘 생긴 한국군 소령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기진맥진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무장은 철저했다. 무기를 든 채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다른 공수단원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모두가 초긴장 상태였다. 내가 朴鐘圭 소령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볼멘 목소리로, 그가 도착했을 때 張勉과 그의 측근 보좌관들은 이미 도주했더라면서 朴장군을 찾아서 보고하려던 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대사관 직원용 명함 한 장을 꺼내어 그 뒤에 나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은 후 그에게 건네주면서 어떤 경우든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대사관으로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라고 말했다. 나는 길을 건너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朴正熙와 朴鐘圭에 관한 전체자료를 알려 달라고 본부에 요청했다. 이들은 내가 그 시점에서 알고 있던 유일한 이름들이었다. 커피를 더 마시고 담배를 연달아 피워 대면서 앞으로의 사태발전에 신경을 쓰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張총리는 첫 총성을 듣자마자 지프를 타고는 나와 연락을 취하러 우리 대사관 사택으로 왔었다(나는 벌써 대사관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정문이 닫힌 뒤에 도착했으며 아무렇게나 옷을 주워 입은 모습으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다시 서울 동쪽에 있는 카톨릭 수녀학교로 가서 피신했다. 아침 9시쯤 되었을 때 대사관 정문의 해병대 경비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정문으로 나의 명함을 가지고 온 한국군 소령이 즉시 나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朴소령은 나를 데리고 4층으로 올라가서 어둠침침한 복도를 지나 큰 회의실로 나를 안내했다. 책상엔 金鍾泌 중령이 앉아 있었다. 그는 중키였고 체격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童顔(동안)이었으며 조용하고 침착했다. 朴소령이 한국말로 나를 소개하자 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朴소령은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통역을 맡아 주었다. 내가 그 뒤 朴正熙장군 주도하의 정부와 접촉하는 데 있어 金鍾泌중령은 시종일관 주요 대상인물이었다.
朴정권이 집권 2개월 후 한국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게 되면서 우리들의 이 관계는 더욱 그럴싸하게 되었다. 접촉이 시작되면서 金鍾泌은 미국 CIA중견간부라는 나의 지위에 대해 예리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미국 CIA가 미국 정부조직상 어떤 법적 지위를 갖고 있는가에 대해 정중하나 주의깊게 질문했다. 그의 관심사항은 대부분 내가 자유롭게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주제들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기초 공민학적」성격에 준하는 강의를 하였다. 대화의 주도권은 분명히 金鍾泌 쪽이 갖고 있었다. 그는 朴소령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朴장군이 왜 군사혁명을 일으켰으며, 왜 그것이 필요했고, 가까운 장래의 개괄적인 계획이 무엇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金鍾泌은 그의 생각을 적절하고 깊이있게 표현할 줄 아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잠시 후 그는 말을 그친 다음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그들이 이제 대한민국을 통치할 책임을 떠맡았으므로 그들이 이니셔티브를 갖고 미국 대사관 및 미군 사령부와 우호적인 업무관계를 재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한국동란 동안 함께 많은 피를 흘렸던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 관계로 되면 이것은 비극이라고 말했다.
…나는 본부에다 그날 일어났던 사건들, 내가 朴소령 및 金鍾泌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 그리고 내일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사항 등에 관해 긴 전문을 보낸 후에야 대리대사가 몇몇 간부들과 함께 아직도 대사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그날 낮에 내가 한 일과 워싱턴에 보낸 보고서 내용에 대해 기본적인 것들을 알려 주었다. 대리대사는 한숨을 쉬고 일어서더니 천천히 왔다갔다 했다.
그는 매그루더 장군이 미8군뿐만 아니라 유엔군사령부를 지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더라면서,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한국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내란죄를 범한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므로 매그루더 장군은 朴장군을 만나지도 않고 상대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리 대사는 쓴웃음을 짓더니 매그루더의 정보참모가 朴장군의 좌익 경력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계속해서 말해 주었다.


朴正熙, CIA지부장과 대면

내 사무실은 그날 하룻 동안 전문의 송수신으로 바빴다. 나는 이미 좌익사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사망한 朴正熙의 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朴正熙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란 확고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대리대사에게 보고하였으며, 그는 내가 매그루더 장군을 만나 그의 태도를 돌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국방성의 자문을 받아 국무성이 대사관에 내린 지시내용은 별도지침이 있을 때까지 朴正熙를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대리대사는 이와 같은 미묘한 정치적 배경문제가 어떤 방향으로든 해결이 날 때까지 내가 金중령, 朴소령을 계속 접촉해 주도록 부탁했다. 나는 내가 金중령이나 朴소령과 가졌던 모든 회합 내용을 대리대사에게 알렸다.
다음 날 아침 정각 9시, 朴소령이 정문에 와 있다고 해병대 경비병이 전화로 알려왔다. 내가 내려가 보니 朴소령은 지프 옆에 서 있었다. 차 뒤의 보좌관석에는 2명의 사병이 각자 톰슨형 기관단총을 받쳐들고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지프의 오른쪽 좌석을 권하면서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로 간다고 말했다. …朴소령은 어느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나오더니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朴소령은 다시 통역을 맡았으며 이것이 朴正熙 장군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朴장군은 둥근 티 테이블 옆에 있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 주위에도 몇 개의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는 단구에 몸이 단단하게 짜여져 있었으며 피부는 부드럽고 눈은 의욕에 불타는 듯 했다. 朴장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朴소령은 朴장군이 나를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고 먼저 말해 주었다. 우리가 적당히 인사말을 나누고 자리에 앉자 당번병이 차주전자와 찻잔, 코카콜라와 유리잔이 담긴 쟁반을 즉각 들여왔다.
그가 이 쟁반을 테이블 가운데에 놓자 이번에는 다른 당번병이 떡이 담긴 그릇을 갖고 들어왔다. 朴장군은 영어를 거의 쓰지 않았으며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답변을 하기 전에 영어로 대답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는 영어를 상당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朴소령의 말을 막고 자기 생각을 보다 간결하게 표현한 영어 어휘를 삽입시키기도 했다. 그는 매우 지치고 피로한 표정이었다. 그의 참모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어수선한 가운데서 몇 시간 동안 시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張총리에 대한 군사혁명이 왜 필요했었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열변내용은 전날 金중령이 제기했었던 주요 관점과 일치했다. 그는 조용하고 사려깊게 이런 말들을 개진했다. 얼마 후 朴장군은 내가 강조했던 주제에 대해 언급했다. 즉 외교적이거나 군사적인 면에서의 상호접촉, 우호관계 유지, 건설적인 한미관계의 수립 등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매그루더 장군을 만나려고 시도했었지만 매그루더 장군은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며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朴장군은 朴소령이 이런 말들을 나에게 통역해 주고 있을 때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한국정부를 전복한 쿠데타가 일어난 지금, 미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바쁘다는 이유로 그 나라의 새로운 지도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언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안절부절 못하게 되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朴장군은 언제든 매그루더 장군을 만날 용의가 있으며, 대리 대사도 물론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그의 생각을 그들에게 전달해 주도록 나에게 부탁했다. 대담은 동양적인 신중함과 꼼꼼함 때문에 대화가 앞뒤로 왔다갔다 했다. 약 2시간 후, 마침내 논리적이고 합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朴장군은 내가 金중령과 계속 접촉하면 좋겠으며 내가 金중령에게 주는 메시지는 모두 그가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만일 긴급한 용무가 있으면 金중령이 자신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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