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암살 계획의 배후

한국 내의 美CIA(7): 61년 6월 安柄都씨 등 17명이 朴正熙를 암살,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二主黨사건'이 있었다
한국내의 美CIA(7)



『張勉은 우리의 첩자가 아니었다』

실버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5·16직후 사태가 유동적이던 며칠 간 쿠데타 주체세력과 대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실버·朴鐘圭·金鍾泌·朴正熙 채널이었던 것 같다. 미8군과 대사관을 통한 공식 채널이 막혀 있었던 때라 CIA가 가진 막후의 통로가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이다. 실버씨의 회고록을 믿는다면 CIA한국지부는 사태를 안정시키고, 군사정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5월19일의 매그루더·金鍾泌 회담, 5월23일의 매그루더·朴正熙 회담을 통해 작전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단 풀렸다. 실버씨는 자신이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朴장군과의 면담을 건의했고, 그때쯤에는 朴장군에 대한 사상적인 의심도 풀렸다고 썼다.
張勉총리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나 가까웠지만, CIA의 조직인으로서 실버씨는 張총리와 연연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反쿠데타 진압작전을 기도했던 매그루더는 6월20일 퇴역 당했고, 그린 대리대사도 홍콩 총영사로 전보됐다. 한국의 새 정권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미국 정부의 장애물 제거 작업이자, 문책인사였다. 실버씨는 62년 7월까지 계속 근무했다. 金鍾泌씨가 중앙정보부를 발족시킨 것은 61년 6월19일이었다. 실버씨는 정보부의 조직과 운영에 자문을 많이 했다.
70년대 후반 미국 의회는 CIA가 KCIA의 설립때 자금을 댔다는 소문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아니다』였다. 의회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金鍾泌씨에게 국내안보와 해외정보수집 기능을 KCIA가 독점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즉, CIA와 FBI를 한데 묶는 것과 같은 기능엔 반대했다는 얘기다. 실버씨는 金鍾泌씨가 미국의 CIA와 꼭같은 이름을 사용하려는 것을 말렸다고 썼다. 실버씨는 또 쿠데타군에 체포된 李厚洛씨와 군 장성들을 석방시키는 데 힘을 썼다. 석방된 장성들은 미대사관측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 갔다.
실버씨의 회고록에는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張박사가 전문적인 의미의 미국 첩자(Agent)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그는 나와의 비밀접촉이 미국과의 정직한 관계라고 믿고 있었다」
張勉박사가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미국측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CIA가 말하는 「전문적인 첩자」는 돈을 받고, 조국의 비밀을 파는 부류를 뜻한다. 張박사가 실버씨에게 유용한 정보를 더러 주긴 했지만, 그것은 한국을 위해 유익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총리를 지낸 사람을 보고 『그는 우리의 첩자는 아니었다』고 굳이 해명한, 그 의식이 문제겠다.


CIA, 提報者를 해외로 피신시켜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 전에 쿠데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했던 한국장교는 불안해했다. 그는 미국으로 탈출, 망명처를 구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를 오끼나와로 옮겼다가 미국으로 데리고 갔다. 가족도 데려다 주었다. 얼마 뒤 고향이 그리워진 그는 朴대통령으로부터 면책 보장을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가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다」 실버씨는 이 제보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金在春(김재춘·前 중앙정보부장)씨에게 물어봤더니 이런 이야기를 했다.
『5·16직후 내가 육군방첩대장으로 부임했는데 부대장인 백운상(白雲祥)대령이 며칠간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미8군 정보부대에 문의했더니 자기들이 오끼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피신시켰다고 실토하더군요』
이 白씨가 실버씨가 말하는 제보자인지는 알 수가 없다. 白씨는 미국에 정착, 잘 살고 있다니까 실버씨의 제보자 설명과는 다르다. 이 제보자에 대해 취재를 하다가 미국 정보기관이 관련된 흥미있는 사건을 알게 됐다.
5·16이후에 발표된 숱한 반혁명사건 가운데는 2주당(二主黨)사건이란 게 있었다. 安柄都(안병도)씨 등 17명의 장교 출신, 출판인, 학생 등이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을 암살, 정권을 탈취하려고 모의를 했다는 사건이다. 張勉 박사는 이들에게 거사사금 1백만환을 댔다고 하여 공판진행중 구속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었다. 1심에선 2명이 사형, 11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 이내에 모두 석방됐다.
이 사건 기소장을 읽어보면 미스터리 투성이다. 먼저 張勉총리 고문이던 위터카씨가 배후조종자로 등장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추방당했다. 미8군 309정보부대의 뉴랜드 대위, 다아링 문관이 등장한다. 모의자들이 자주 찾아가 만났고, 反혁명 모의진행의 정보를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직접 가담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安柄都피고인은 朴正熙장군, 金鍾泌 당시 정보부장과는 10여년 전부터 친교가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암살 하수인으로 쓰여져 있는 최고회의 본회의실 경비책임자 朴駿(박준)상사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면 이 사건은 조작인가? 아니면 핵심적 사실을 숨기고 기소를 했기 때문에 기소내용이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인가.
기소장에 나타난 이 사건의 핵심 줄거리는 결국 이렇게 요약된다. 5·16때 국방부 조사대 부대대장이었던 李龍煥(이용환·당시 중령)씨가 최고회의 경호원인 韓雲奎(한운규)헌병상사와 朴駿상사를 포섭, 기관단총으로 朴正熙의장, 李周一(이주일)부의장, 金鍾泌정보부장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李씨의 행적은 기소장에 나타난 것과는 달랐다.


미국인, 朴正熙 암살 계획의 배후

張勉박사의 측근으로서 미국 정보기관과도 가까웠던 李씨는 5·16 며칠 전 쿠데타 정보를 張총리에게 전달했다. 5·16당일엔 헌병대를 동원한 진압작전에 잠시 참여했다. 5월16일 새벽, 미8군 정보부대의 지프가 그의 집에 나타나 그를 태우고 8군 영내로 들어갔다. 여기서 헬리콥터로 오산, 오산에서 다시 군용기로 오끼나와의 미군기지로 날아갔다. 李씨는 오끼나와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5·16쿠데타의 발전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그는 며칠 뒤 다시 미국의 모처로 보내졌고, 서울을 떠난 지 열흘쯤만에 미8군으로 돌아왔다.
8군 영내에 머물면서 그는 미8군 정보부대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게 됐다. 최고회의 수뇌부를 체포, 또는 납치하라는 임무였다. 위터카씨도 이 작전에 끼여들었다. 李씨는 옛날에 자기 부하였던 韓雲奎헌병상사가 최고회의에서 경호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와 몰래 접촉,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韓상사는 다시 朴駿상사를 포섭했다. 그런데 朴상사가 겁이 나서 모의사실을 수사기관에 신고해버렸다. 韓상사는 체포됐다. 朴상사는 불기소됐다. 李씨는 이것을 모르고, 韓상사와 연락하기 위해 8군 영외로 나왔다가 체포됐다. 61년6월의 일이었다.
5·16 주체세력에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미군 정보기관의 개입사실을 빼고 기소를 했으며, 재판을 연 것도 李씨의 체포 1년 뒤였다는 것이다. 미군에 대한 수사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사실은 완벽하게 진실로 입증됐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위터카와 미8군 정보기관이 암살계획의 배후에 있었다는 큰 줄거리는 사실인 듯하다. 미국의 고위층에서 보면 그 계획이 하나의 안으로 검토된 정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국내정치에 대한 미국 정보기관의 계획의 대담성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버씨는 62년7월 한국을 떠났다. 홍콩 지부장으로 잠시 있다가 64년6월 사이공 지부장으로 옮겼다. 그의 사이공 지부 전임자는 60년대 말 한국지부장으로 왔던 존 리차드슨씨였다. 당시의 CIA 극동과장은 뒤에 CIA부장이 된 콜비씨.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으로 깊이 빠져들어가는 과정에서 세 CIA첩보원―리차드슨, 실버, 콜비씨가 한 역할은 월남전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것이었다.
실버씨는 사이공 지부장으로서 베트콩의 테러에 대한 反테러작전을 계획, 추진했다. 그가 조직한 국민행동대란 월남 특무기관은 베트콩 준동지역으로 잠입, 베트콩 간부들을 암살했다. 65년 5월30일 오전, 베트콩의 폭탄차가 사이공의 미 대사관 앞에서 폭발했다. 이 사고로 실버씨는 한쪽 눈을 실명했다. 그 뒤 그는 본부로 돌아와 해외정보국 참모장, 오스트랄리아 지부장 등 한직을 돌다가 지난 73년에 정년퇴직했다.


黃泰成의 신문권 요구한 CIA

실버씨의 후임으로 62년 7월 제3대 지부장으로 한국에 왔던 이는 그리스계 미국인 나시오스씨였다. 그는 1년도 못돼 다른 곳으로 전임됐고, 4대 지부장에 에드워드씨가 나타났다. 에드워드씨는 거물간첩 黃泰成(황태성)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북한의 무역성 副相(부상)을 지낸 바 있는 黃은 朴正熙 장군의 형(대구 폭동때)과 친구였었다. 그는 5·16직후 서울에 잠입, 朴장군의 형수 趙여사를 만나려다가 趙여사의 신고로 붙들려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대법원에 상고중이었다. 항간에서는 黃이 남북협상의 카드를 갖고 왔다느니, 金鍾泌 부장을 만났다느니 하는 루머가 돌고 있었다. 5·16때부터 CIA는 朴장군과 金부장의 사상적 배경을 의심하고 있었으므로 黃의 남파목적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질 만했다.
金炯旭에 따르면 에드워드씨는 미국 정보기관이 黃을 신문하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압력으로써 미공법 480호에 의해 도입 양곡을 싣고 온 수송선을 인천항에 띄워놓고 양곡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는 흉작으로 식량난이 심각할 때였다. 우리 정부는 黃을 미국측에 잠시 넘겨 조사를 받게 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원래 한미간엔 군사정보 교환협정이 체결돼 있지만, 사안에 따라선 잘 지켜지지 않았다. 에드워드씨는 6·3사태 이후 金鍾泌씨가 2차 외유를 갈 때 미 대사관과 함께 그 준비작업에 관계했었다고도 한다. 에드워드씨는 朴鐘奎씨와 무척 가깝게 지냈다. 그는 66년에 본부의 극동담당국장으로 전보됐다.
흔히 미국측과 가깝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丁一權(정일권), 白斗鎭(백두진), 金正烈(김정열), 朴定洙(박정수), 張禹疇(장우주), 李厚洛(이후락), 朴鐘圭(박종규)씨 등이 그런 유력인사다. 이들은 대체로 CIA지부장들과도 친했다. 朴定洙씨(前 국회의원)는 이렇게 말했다.
『CIA지부장들은 거의가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 교양인들이다. 만나서 대화하는 게 우선 즐겁다. 항간에선 나 같은 사람을 오해도 하는 것 같지만, 미국인들에게 나 만큼 비판적으로, 제대로 충고해주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꾸 만나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내가 겪은 CIA사람들은 대체로 한국인에 대해 진심에서 호의적이었다. 정권에 대해선 비판적이어도, 한국을 좋아한 사람들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서 한미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한 그들의 고민도 평가해야 할 것이다』
CIA와의 관계에서 知美波(지미파)와 친미파, 그리고 첩자는 구별해야 한다. 미국과 가깝다고 널리 알려진 인사들은 거의가 지미파나 친미파에 속한다. CIA는 이들에게서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주로 구한다. 자유당 시절의 張勉박사처럼 CIA와의 밀접한 관계가 한국을 위해 보탬이 된다고 믿는 이들은 지금도 있을 것이다. 자유당이나 공화당 정권 치하에서는 미국의 힘을 빌어 독재에 저항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는 분위기였다. CIA의 활동은 그런 정치사회 풍토에선 참으로 수월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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