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明博, 박근혜에 대한 경상도 사람들의 불만

先知者는 고향에서 핍박받을 때 위대해지지만 정치인은 고향에서 배척될 때 몰락한다.
1985년 2.12 總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핵심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욕망을 극적으로 분출시켰다. 선거일 25일 전에 急造된 신민당은 金泳三 계열이 주도한 이른바 선거투쟁을 통해서 선거운동 기간에 많은 군중을 동원하고 직선제 개헌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방학중이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야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베이붐 세대의 편입으로 20, 30대 유권자가 전체의 약60%나 되었다.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신민당은 단번에 제1 야당이 되었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전국 92개 선거구에서 민정당은 35.2%의 득표율로 87명(전국구를 보태어 총의석은 148석)이 당선되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한 명씩, 부산에선 3명이 낙선했다. 전두환 정권 공격에 앞장섰던 신한민주당은 선명투쟁성으로 29.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50석(전국구를 보태어 67석)을 차지했다. 온건한 한국민주당은 26석(전국구 포함 35석), 한국국민당 15석(전국구 포함 20석), 기타 6석이었다.

全斗煥 정부는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이른바 舊정치인들을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30일에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민당과 온건 민한당으로 분열되어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김영삼 김대중씨가 지원하는 신민당이 민한당에 이어 제3당이 되면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계산하기도 했다.

선거결과는 이런 계산을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기간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생애를 건 투쟁을 해온 김대중, 김영삼씨가 비록 정치활동은 금지당하고 있었으나 선거 투쟁의 사령탑이었다. 김영삼씨는 1983년 2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야권을 결속시켰고, 김대중씨는 투표 직전 귀국을 강행했다. 두 金씨가 5년만에 한국의 정치판으로 복귀한 것이다.

2.12 총선 異變의 진원지였던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생 처음 유세장에 나갔다. 야당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으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하고 치받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민정당의 政局 파트너였던 온건 야당 민한당은 선거 직후 신민당에 흡수되고 말았다. 100석이 넘는 거대야당이 등장하여 민주화 투쟁을 이끌게 된다. 2.12 총선은 이렇게 하여 민주화를 한국 사회의 大勢로 만들었다. 12대 총선은 한국 현대사가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시대로 넘어가는 分水嶺이었다.


2.12 총선으로 확인된 민심을 등에 업고 야당이 선명투쟁으로 나서자 학생, 종교, 사회단체, 언론기관도 신민당 편이 되었다. 이들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기치 아래 단결하여 여론을 만들어갔다. 선거 직전에 미국에서 귀국한 金大中씨는 金泳三씨가 先占한 신민당과는 별도로 이들 재야세력을 자신의 정치기반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서로 협력, 견제, 경쟁해가면서 대통령과 민정당을 밀어붙였다. 1980년 봄의 사태가 再現되고 있었다. 그때와 차이점은 강력한 全斗煥 정권의 존재였다.

全斗煥 대통령은 선거 직후 민정당의 새 대표로 盧泰愚 전국구 의원(당시 대한체육회장 겸임)을 임명했다. 새 총리엔 盧信永 안기부장, 새 안기부장엔 張世東 경호실장을 임명했다. 민주화 세력과 맞설 정권의 사령탑을 재정비한 셈이다. 張 부장은 부임時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노태우 대표를 잘 보좌하라'는 취지의 당부를 들었다. 張 부장은 대통령이 盧 대표를 후계자로 굳혔다고 판단했다. 張 부장은 대통령에게 특청하여 盧 대표의 인척인 朴哲彦 비서관을 특보로 데리고 갔다.

오랫동안 제2인자로 거론되던 盧泰愚씨가 實勢 자리에 들어가니 민정당도 힘을 얻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평화적 정부 이양과 88 서울 올림픽 성공이 국가대사이다. 간선제가 비민주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비민주적이다”고 주장하면서 현행 間選 대통령제를 수호하겠다는 이른바 護憲의지를 밝혔다. 이 설득은 언론과 여론에 잘 먹혀들지 않았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원초적 욕구는 1980년 봄에 한번 좌절된 때문인지 더욱 강력하게 솟구쳤다. 全斗煥 대통령은 “직선제 이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7년 단임제를 실천하여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다”고 설득했으나 국민들의 직선제 욕망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민정당의 법률가 출신 의원들은 토론회에 열심히 나가 護憲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1985년 5월엔 학생들이 미국 대사관의 문화원을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反美운동이 민주화 흐름에 끼어들었다. 곧 이어 주사파 등 친북세력이 민주화 운동으로 위장하여 합류한다. 全斗煥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심은 이런 위험성을 애써 외면하게 했다. 1986년 초엔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했다가 군부가 합세한 민중봉기로 쫓겨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피플 파워’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한국의 민주화 세력을 더욱 고무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나는 88년에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고 마르코스는 물러나지 않으려 했던 사람인데 한국과 필리핀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모욕이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달러이고 필리핀은 700이다. 우리나라에서 필리핀 사태를 기대한다면 환상이다”(1986년 3월8일 공보관련 업무지시중의 담화)라고 했다.

1986년 1월 신민당은 1000만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場外투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민추협 의장 金泳三은 2월7일 신민당에 입당했고, 2.12 총선 1주년을 맞아 2월12일부터 가두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全斗煥 정부와 여당도 護憲만으로썬 달아오르는 여론을 달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 대통령은 1월16일 國政연설을 통해서 “개헌 문제는 평화적 정부 이양과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89년에 가서 논의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개헌이란 말을 처음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2월24일 全斗煥 대통령은 3당 대표들과 청와대에서 회동한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국회와 정부에서 헌법 特委를 설치하여 연구하고 89년에 가서 개헌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언론은 이 발언을 보도하면서 89년 개헌이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과장했다. 언론이 그런 식으로 과장하면 민정당과 정부가 바로잡는 노력을 해야 할터인데 과장보도가 여론화되면서 이것이 기정사실화하는 것이었다. 언론과 여론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니 정권의 힘이 잘 먹혀들지 않았다.
1986년 3월11일 전두환 대통령은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 “89년에 가서 개헌한다가 아니고 개헌을 할 필요성이 있는지를 결정한다는 말이다”고 해명했다. 이 자리에서
全 대통령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 나라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대통령 책임제는 위험 요소도 있습니다. 내가 버마 사건을 당하고 느꼈지만 대통령 한 사람을 해치워서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면 아주 위험해요. 가령 일본은 수상을 열 번을 죽여도 우리 나라에서 대통령이 희생될 때와 같은 혼란은 안 오게 되어 있어요. 포르투갈의 2원집정제(二元執政制) 같은 것도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치 문제를 가지고는 싸움을 해도 안보 문제를 가지고 싸우면 안 돼요. 우리는 북한의 위협 때문에 대통령이 어디 나가기도 겁이 나. 내 개인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내가 겁이 나요.”

2.12 총선의 역사적 의미를 만든 곳은 경상도 정권으로 불리던 제5공화국의 본거지인 대구와 부산이었다. 이 두 도시에서 민정당 후보가 네 명 낙선하였다. 이 사실은 경상도 유권자들이 고향 사람보다는 국가적 大義를 우선시켰음을 보여준다. 釜馬사태로 경상도 출신 박정희 정권을 몰락으로 몰아간 것도 경상도 사람들이었다.

이런 경상도 사람들이 李明博 대통령이나 박근혜 의원을 同鄕이라고 하여 무조건 지지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李, 朴 두 사람이 대한민국에 충성할 때만 지지할 것이다. 民主국가에서 정치인을 무조건 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정치인에 대한 지지는 조건부라야 한다. 즉, '대한민국과 헌법에 충성하고 國益을 수호할 때만 당신을 지지한다'는 자세여야 한다.

李 대통령은 反헌법 세력에 대하여 법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朴 의원은 김정일 추종세력과 좌익亂動에 대하여 침묵함으로써 많은 경상도 사람들을 화 나게 만들고 있다. '모든 정치는 로컬(local)'이라고 한다. 고향에서 버림 받는 정치인은 설 곳이 없게 된다. 경상도 사람들은 결코 朴 의원을 '경상도의 DJ'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정일을 찾아가 만나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 만나고 와선 민족반역자의 대변인 같은 이야기를 하고, 그 뒤론 김정일의 잇단 만행에 대하여 침묵하고, 촛불난동을 편들고, 용산放火사건을 진압한 경찰을 비판하고, 드디어 선동방송을 응징하려는 미디어법 개정에 반대한 朴 의원의 행태는 박정희 노선도 아니고, 경상도 사람들의 노선도 아니며, 대한민국의 노선도 아니고, 진실-正義-자유를 핵심 가치로 하는 대한민국 헌법정신과도 맞지 않다. 무엇보다도 경상도 사람들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달하고 있다.

법을 우습게 아는 좌경세력을 상대로 한번도 정면승부를 보여주지 못한 李明博 대통령에 대한 경상도 사람들의 불만은 경멸조로 흐른다. 힘이 있는 사람이 용기가 없어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경상도 기질에 맞지 않다.

先知者는 고향에서 핍박받을 때 위대해지지만 정치인은 고향에서 배척될 때 몰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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