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사상 문제 자료집

좌익계 신민당의 활동가였던 김대중으로부터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공산당원이 된 장금성 진술서 등.
지난 10월9일 김정일이 핵실험을 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상 외였다.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면 그동안 對北굴종적 태도를 보여왔던 노무현 대통령도 일선을 긋고 대결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 관측이었다. 10월9일 오후 盧대통령도 그런 자세 변화를 강하게 시사했다.


'한국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한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다 수용하고, 이렇게는 해나갈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기자는 이 말을 듣고 나의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런 글을 올렸다.
<위에서 말한 인식변화를 盧대통령이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지켜보아야 국민들은 속지 않게 된다. 盧대통령의 말을 믿으면 절대로 안된다. 그의 실천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너무나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니 여기에 맞서다간 날아가 버린다는 위기감에서 일단 피해보자는 뜻에서 한 변명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는 우선 인책 인사를 해야 한다.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외교부장관, 청와대의 안보관련 참모들을 잘라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386 주사파, 즉 '김정일추종공산주의운동권 출신들'을 내보내야 한다. 이들이 국민들을 저주하고 미국을 공격하면서 對北굴종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노무현씨에 대한 국민들의 不信은 그가 김정일의 對南공작에 적극 호응한 배경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핵개발,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는 김정일 정권의 4대 對南적화전략이었다. 盧정권은 전폭적으로 이 4大전략을 지원하고 동조했다. 반역정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말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을 설득할 순 없다. 노무현의 과거정리가 필요하다.
금강산관광부터 중단시켜야 한다. 개성공단사업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국정원, 검찰, 경찰, 機務司에 특별지시를 내려 反국가사범과 간첩 등 내부의 敵들에 대한 감시와 수사에 전력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盧대통령 자신에 대한 의심을 다소나마 완화시켜줄 것이다>

盧대통령이 정책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10월1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남대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의 핵 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면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對北 포옹정책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닙니다. 北核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北核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이는 누가 보아도 盧대통령에 대한 압박이었다. 과연 盧대통령은 기존의 對北굴종정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금강산관광도 계속하고 통일부 장관에도 이종석 현장관보다 더 왼쪽인 이재정씨를 내정했다. 한때 脫김대중을 모색했던 盧대통령은 김대중씨 집을 찾아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등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盧대통령이 급조했던 열린당이 스스로 수명이 다했음을 선언한 가운데 前現職 대통령이 결속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주도권을 김, 노 두 사람이 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권력을 쥔 현직 대통령과 유권자의 약25%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직 대통령이 악수하면 한국의 좌파와 호남세력이 연계되어 막강한 표집단이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다. 문제는 노무현+김대중 연합세력이 김정일 정권을 선거판에 끌어들여 다시 從金정권을 만들어내려고 무리를 할 가능성이다. 김대중씨의 이념성향과 지역기반이 김정일의 對南적화공작과 결합된다면 한국은 지금의 말로 하는 내전적 상황에서 피를 부르는 내전상태로 갈지 모른다는 악몽이 생긴다. 애국행동단체에선 '김정일+김대중+노무현은 핵개발 共犯이고 대한민국의 3敵'이란 표현을 쓴다. 일부 호남사람들은 김대중씨를 호남사람들 손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위도 한다.

10월9일 핵실험 이후 한국의 국정방향을 對北굴종쪽으로 이끈 키 플레이어는 김대중씨이다. 그의 역할에 의해서 盧대통령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그 다리마저 불질러 없애버린 느낌이다.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당연히 한미동맹을 기초로 하여 유엔과 협력하여 대북압박과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盧대통령은 이런 결속이 요구되는 순간 결정적인 反美親北 노선을 취하고 만 것이다.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세 사람의 이런 노선은 필연적으로 이 세 사람을 공동운명체로 묶고 있다. 김대중씨의 연결고리 역할에 의해서 남북한 정권이 공조하여 국제사회,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질서에 도전하는 형국이 조성된 것이다. 김정일에게 돈을 주고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합의한 2000년 6.15선언으로 한국사회에서 김정일 추종 좌익세력이 남북한 좌파정권의 지원하에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한 김대중씨는 두번째의 사변적 상황을 연 셈이다. 여기서 크나 큰 의문이 생긴다. 김대중씨가 노무현 대통령을 끌어당겨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힘과 의지는 자기의 것인가? 아니면 김정일의 작용이 들어간 힘과 의지인가? 김대중씨가 보여준 김정일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인 태도는 단순히 굴종적이라는 말로써 표현할 성격이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방북을 추진하다가 김정일로부터 매정하게 거절당하여 국제적인 창피를 당했다. 그는 김정일에 대한 강한 유감을 드러내어야 할 입장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핵실험을 예고하자 김대중씨는 거의 매일 공갈치는 김정일을 편들고 미국을 비난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북한의 핵무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6.25전쟁에도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극좌적 역사관도 피력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었나 하는 놀라움은 연속되는 놀라운 발언에 의해 희석되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미국은 그의 생명을 두 번 살려주었다. 1973년 납치사건 때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런 그가 미국에 대해서 김정일을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못살게 굴어 핵실험을 하도록 했다고 공언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더구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악의적' '못살게'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라면 김대중씨는 속으로는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고 김정일을 사모하든지 북한을 사상적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김대중씨가 드디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었다'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난 10월말에 기자는 鮮于宗源 변호사를 찾아갔다. 4년 전에 들어두었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鮮于 변호사는 해방직후의 좌우익 대결에서 오제도 검사와 함께 좌익 소탕에 앞장섰던 공안검사 출신이다. 그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할 때 補導연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수사기관에서 같은 좌익사범을 돌려가면서 조사하고 무리하게 범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본 공안검사들은 한번 수사를 받고 나온 좌익사범에 대해서는 신고를 받아놓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49년에 좌익前歷者의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20만 명 이상의 신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보도연맹으로 조직한 검찰은 경찰과 협조하여 교육을 하게 되었다. 보도연맹 설립자인 鮮于 당시 검사는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는 전향한 공산주의자가 강사로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鮮于 변호사는 4년 전 기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서소문의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1950년 초로 기억됩니다. 전국에서 道별로 두 사람의 보도연맹원을 강사요원으로 추천받게 되었어요. 나는 전남북을 맡았는데 이때 전남에서 올라온 강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나 청사유수로 잘 하는지 겁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눈이 새까맣고 얼굴은 통통한 사람이 참 똑똑해요. 첫 강의가 끝난 뒤 제가 그를 검사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곤 추궁했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는 정말 전향한 것인가?'
이렇게 물었더니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청년을 강사요원으로 썼는데 아마도 6.25 때까지 서울에서 머물면서 보도연맹 교육에 참여했을 겁니다. 이 청년이 김대중씨였습니다'
김대중씨는 해방 직후 좌익 신민당에 입당하여 목포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전국적으로 번진 좌익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각서를 쓴 뒤 풀려난 적도 있다. 그는 신민당이 다른 좌익 2당과 함께 남로당을 만들 때는 가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좌익전력자 조직인 보도연뱅에 가입하게 되었는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답: 보도연맹이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들을 가입시켜 선도하던 단체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이 지도위원이며 위원장만은 우익계 인사이나 기타 맹원들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자들이었던 바, 본인도 좌익단체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어 同 연맹의 운영위원으로서 수차에 걸쳐 찬조금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목포시 보도연맹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였던가요.

답: 지금 기억되는 인물로는 초대 위원장 吳栽均, 2대 위원장 趙壽男, 부위원장 薛俊錫(남로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총무부장 金南喆(남로당원) 등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2대 위원장 趙壽男의 진술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보도연맹의 총무부 차장직에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同 연맹의 운영위원직에 있었던 사실은 있으나 총무부 차장직은 맡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해운회사를 自營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포경찰서 사찰과 보도연맹 담당인 林春吉 경사가 저의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며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보도연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저도 좌익단체에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기에 해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업과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지장이 있으니 빼달라고 하였더니 『자네는 돈이 많으니 찬조금을 내는 운영위원이나 하라』고 하여 운영위원이 되었을 뿐입니다'
선우종원 변호사의 증언은 김대중씨의 주장보다는 趙壽男씨의 진술에 더 가깝다. 전남도 전체를 대표하여 강사로 추천될 정도라면 돈만 내는 운영위원이 아니라 보도연맹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대중씨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교육을 시킬 만한 이론무장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감상적으로, 즉흥적으로 좌익에 가담한 인물이 아니란 뜻이다. 그의 좌익 교육 前歷에 대해선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있다.
金大中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同黨 상임위원급으로 權庠植 등과 같이 활동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이 權庠植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었다(1980년에 軍 검찰은 이 진술서를 金大中씨 기소 자료에 덧붙여 재판부에 냈다). 권씨의 진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 당시 좌익계 신민당 간부

위원장 李彩鉉/조직부장 및 선전부장 金大中
부원 金相培(현재 이북에 있음), 徐得均(사망), 張在赫(행방불명), 權庠植, 權五哲(이북에 있음).

그 당시 金大中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金大中이는 그 후 보니까 全南汽船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金大中이가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共黨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서도 김대중씨는 좌익활동가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존재로 기록되어 있다.
1980년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金大中씨를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의 조선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 사본이 있었다.
장금성은 民靑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白南雲), 인민당(당수 呂運亨)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朴憲永)을 만들 때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 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敎導하기 위해 조직된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그는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월7일에 다시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것이다. 우리 경찰이 이 서류를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金大中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청원서의 요지를 소개한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적색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 1946년 20일에 민청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하였음>

金大中씨는 합수부에서 軍 검찰로 송치된 후인 1980년 7월17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장금성은 모르는 사람이며, 民靑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적이 전혀 없다. 본인이 부위원장이었다고 그 서류만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軍 검찰은 그러나 장금성의 자필 기록을 받아들여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편집자 注) 목포시 위원장이며 그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이라고 적었다.
장금성의 글에는 民靑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金大中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 공산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民靑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김대중씨는 6.25 남침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공산군이 우익 청년을 인민재판으로 처형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1980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자술서에서 이런 표현을 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6.25를 겪어 공산주의의 실태를 체험함으로써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역설적이지만 한국 반공의식의 최대앙양자는 김=일성과 공산군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됨>
6.25 직후 서울에서 목포로 돌아온 김대중씨는 좌익前歷으로 해서 보도연맹 처형 때 국군에 붙들려갔으나 '호명착오'로 살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한편으로는 북한군측에 붙들려 옥중에 있다고 인천상륙 작전 이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했다는 자신의 증언이 있다.

6.25 戰後 좌익전력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그는 반공의 보루이던 천주교 세력에 접근하여 보호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다. 그의 친구인 崔書勉씨의 회고담이다. 대한매일 1999년 6월12일자 金大中 대통령 인터뷰 기사에 崔씨가 거명되어 있다. 金 당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崔書勉씨라고, 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張박사를 代父로 소개해 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張박사하고 영적으로 代父ㆍ代子의 관계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저는 신파의 총수인 張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崔書勉씨에 따르면 당시 웅변학원을 하고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은 金相賢(김상현) 前 의원과 함께 경향신문 4층에 있던 자신의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 방으로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그때 金대통령은 崔書勉씨에게 『천주교 신자가 됐으면 좋겠으니 신부를 한 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崔書勉씨는 당시 崔南善, 金性洙, 吳華英(오화영) 등에게 교리를 가르쳐 명성이 높은 尹亨重 신부를 소개했다.

金大中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리학습을 했다고 한다. 尹亨重 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자네가 보낸 그 사람 똑똑해. 질문하는 거 신랄하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세를 받은 金大中씨는 崔書勉씨에게 「토마스 金大仲(편집자 注ㆍ金大中 대통령의 改名 전 이름)」이란 사인이 적힌 사진을 하나 보냈다.

영세를 받고 나서 金大中씨는 『뭐가 되고 싶냐』는 尹亨重 신부의 질문에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직속 상관이 張勉 박사니까 자네가 소개하라』고 이야기했다. 崔씨는 金大中 대통령을 서울 소공동에 있던 경향신문 고문실에서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인 張勉 박사에게 소개했다. 崔씨의 증언.
『張勉 박사와 盧基南 주교는 천주교의 가장 큰 고민이 人材難이라고 말해 왔어요. 우리가 3ㆍ1운동 때 천주교 대표가 참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으니까요. 인물을 길러보자는 의미에서 李弘圭(李會昌씨의 선친. 당시 검사), 金大中씨 등을 환영한 겁니다』
崔씨는 張勉 박사에게 『나는 정계 진출을 안하니 나를 생각하시듯이 金大中씨를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이런 깊은 내용이 있어선지 張勉 박사와 盧주교는 金大中씨를 각별히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金大中씨가 하루아침에 민주당 상무위원, 선전부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崔씨는 말했다.
『1972년 金大中씨가 망명한 뒤 美 CIA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질문을 받았고, 주일 미국 대사 로버트 잉거솔의 특별보좌관인 아마코스트(주일 美대사 역임)가 직접 찾아와 물었습니다. 주로 「金大中 종교는 가짜 아니냐. 金大中 자신은 가톨릭에 다니면서 부인이 개신교에 나가는 것은 선거 때 표를 얻으려는 전략 아닌가」 등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공격할 게 있고 안할 게 있다고 했어요. 나와 金大中의 관계를 소개하고, 그 사람의 신앙은 의심하지 말라고 했어요』

1960년 4.19 학생의거로 李承晩 대통령이 물러난 뒤 민주당이 집권하고 張勉씨가 국무총리가 되었다. 李承晩 대통령 아래 張勉 총리의 비서실장이던 鮮于宗源씨는 張총리파로 몰려 탄압을 받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8년간 망명생활을 보낸 뒤 귀국하여 조폐공사 사장이 되었다. 돌아와 보니 보도연맹 교육요원이던 김대중씨가 국회의원이 아닌데도 민주당의 대변인으로서 張勉 총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鮮于씨가 張총리에게 金씨의 사상문제를 지적했다. 張 총리는 '나도 그런 말을 많이 듣고 있는데 의원총회를 할 때 해명을 하도록 시켜야겠다'고 말했다. 며칠 뒤 鮮于씨가 다시 張총리를 만났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변인에게 이야기를 시켰더니 한 시간 동안 해명을 하는데 모두가 말솜씨에 감탄했다. 모두가 의심을 푼 듯하다'

북한정권이 김대중씨에게 주목하고 그를 포섭대상으로 삼아 접촉을 시도한 최초의 사건은 1967년이었다. 김대중씨의 목포상업고등학교 1년 선배인 鄭泰默은 金씨가 좌익 신민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할 때 남로당원으로 일하다가 구속되어 7년형을 복역중 6.25를 만나 탈옥했다. 그는 북한으로 올라가서 간첩이 되어 내려왔다. 鄭씨는 1967년 총선 때 목포에서 출마한 김대중씨에게 접근하여 선거전략을 가르쳐주고 선거운동원을 소개해주었다. 鄭씨는 임자도 간첩사건의 주범으로서 1968년 구속되었고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보부는 김대중 의원이 鄭을 간첩으로 알고 만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기소하지 않았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진 김대중씨를 김일성 정권은 공작대상으로 삼았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후 일본과 미국을 무대로 反정부 활동중이던 金씨에게 접근한 것은 在日民團 파괴공작에 앞장선 조총련과 친북파였다. 이들과 합세하여 만들기로 한 것이 韓民統이었다. 김대중씨는 이 단체의 의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납치되었다. 이후락 정보부장은 그를 납치하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韓民統이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김대중씨를 의장으로 추대하여 對南공작에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대법원은 이 단체가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對南적화에 종사하는 反국가단체로 규정했다. 우리 법원과 검찰은 이 단체의 핵심인물인 조직국장 郭東儀씨는 북한에 잠입하여 공작원 교육을 받고 온 인물이라고 보았다. 김대중씨가 1981년에 대법원에 의해서 사형이 확정된 이유는 反국가단체 한민통의 수괴였다는 점 때문이다. 2004년 서울고등법원은 김대중씨에 대한 재심 선고 때 광주사태 간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한민통 결성 부분에 대해선 유죄인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김대중씨가 韓民統 결성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북한의 對南공작노선과 맥을 같이 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을 내어놓았다. 이 통일방안은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우리 헌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즉, 한반도의 유일合法국가인 대한민국을 反국가단체인 북한과 同格으로 놓겠다는 것이 이 통일방안의 핵심이다. 여기서 김대중씨가 무슨 변명을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좌익적인 대한민국觀과 거기에 기초한 현대사觀이 드러난다. 그는 대한민국만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이며 민족사의 정통국가란 대한민국헌법 제3조를 인정하지 않는다. 논리의 자연스런 연장선상에서 그는 통일이 북한을 자유민주체제로 흡수하는 자유통일이어야 한다는 점을 수긍하지 않는다. 여기서 김대중과 대한민국의 타협할 수 없는 不和가 생긴 것이다.

이런 反헌법적, 反국가적, 親北的 성격을 가진 연방제안이기 때문에 반드시 북한정권의 對南공작에 이용될 소지가 있었다. 그 우려는 2000년 6.15 선언에서 김대중씨가 김정일의 對南적화노선을 받아들인 反헌법적인 연합연방제통일방안에 동의함으로써 현실이 되었다. 그 뒤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좌익득세와 남북한 좌파정권 공조현상, 그리고 反美狂風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973년 8월의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일본에선 정부, 언론 할 것 없이 反박정희-反韓 태풍에 휩쓸렸다. 1987년 김현희에 의한 대한항공 폭파 사건, 그리고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韓日間에 정보교류가 재개될 때까지 韓日間엔 안보적 협력이 거의 단절되었다. 당시 對南공작의 지휘자로 등장한 김정일은 이런 反韓무드를 십분 활용하였다. 북한은 韓民統을 중심으로 김대중 구출운동을 벌이고 한민통의 행동부대 韓靑 소속 활동가 文世光을 포섭했다. 북한공작원은 만경봉호에서 文에게 朴대통령 암살을 지령했다. 최근 기자가 만난 북한통일전선부의 전 요원은 북한정권이 朴대통령 암살을 기획한 것은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는 길을 열어주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했다. 1974년 8월 文은 朴대통령 대신 陸英修 여사를 사살했다. 朴대통령은 이듬해 조총련 와해공작인 조총련 동포 母國방문사업을 허용했다. 발전해가는 한국을 구경하고 간 조총련 동포들이 이런 정보를 조총련 사회에서 확산시키자 이탈자가 속출했다. 북한정권은 이에 대해 조총련 동포들에게 북한 방문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한에 가서 지옥을 보고 돌아왔다. 한국의 발전상과 북한의 지옥상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조총련을 급속도로 약화시켜가기 시작했다. 승리가 패배로, 패배가 전화위복의 계기로 이어지는 남북대결의 한 드라마였다.


1980년에 나온 김대중 語錄集에는 그가 한국 사회를 계급투쟁적, 또는 계층갈등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낳게 하는 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만 소개한다.
<경제건설이란 이름 아래 국민은 세계 최고율의 조세부담을 강제당하고 있는데 농촌과 근로자의 생활상태는 날로 궁핍해지고 중산계층의 생활은 항시 불안 속에 있다. 민족자본으로 육성해야 할 중소기업은 사양일로를 걷는데 일부 특권분자들은 官權 및 외국자본과 결탁해서 식민지적 매판건설로 천문학적 재벌로 성장해 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농촌과 도시의 이중구조는 더욱 심화되고 지역간의 격차는 민족 내부의 대립조차 조장하고 있으며 전반적 빈부양극화 현상은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첨예화시키고 있다>

金大中씨는 우리가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朴正熙가 주도한 開發年代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권력자와 약자 이런 二分法으로 사회를 대치시키고 있다. 농촌과 도시, 근로자-농민-중소계층 對 매판재벌 및 특권층. 아래 이철 전 의원의 진술서(1997년 12월 안기부 작성)에도 김대중씨의 계급혁명적 시각이 등장한다.
<제가 1985년 2월12일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1985년 3월경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김대중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그날 오후 5시경 동교동 김대중씨 자택을 방문하여 김대중씨의 안내로 지하실로 내려가 단둘이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대중씨가 저를 보고,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너무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라는 요지로 한 시간 정도 제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때 김대중 총재가 「나를 공산혁명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나를 자기의 심정적 동조자, 정치적 계보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 김대중씨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레닌도 될 수 있고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7년 김대중씨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제3위 득표로 낙선했다. 이 선거 직전 북한정권이 김대중씨에게 공작했다는 증언이 황장엽씨로부터 나온 적이 있다. 黃씨는 1997년 12월18일 안기부 직원에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장엽·김덕홍 1일 동정 보고(국가안전기획부/1997년 12월18일)
1. 1(黃長燁 지칭)은 집필보조원과의 대화시 북한이 오익제 편지 등을 통해서 金大中 지지 용의를 보인 것은 지금까지 金大中에게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를 확실히 대통령에 당선시켜 경제원조 등을 얻어내려는 의도임.
2. 1987년 大選 당시 허담이 1에게 金大中이 양쪽(북한·조총련?)에서 받아먹고도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며 화를 낸 적이 있다고 언급하였음>
黃 선생이 기자에게 부연설명한 내용은 이러했다.
『내가 국제비서를 할 때인데, 아마도 1987년 大選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許錟이 그 전에 어디 갔다가 와서 金日成에게 보고하는 자리였어요. 許錟하고 나, 金容淳 그리고 金正日이 (보고차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金日成이 나오면서 許錟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이렇게 수염을 씻더란 말이지, 하하하」. 수염을 훑는 시늉을 하더라고요. 그건 시치미를 뗀다, 즉 돈을 받고도 모른 척한다는 뜻이지요. 許錟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었어요』

1997년 대통령 선거 때 북한은 북경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적극적으로 한국 선거판에 개입하였다. 김정일 정권은 당선이 유력시되던 김대중 후보를 상대로 일종의 협박작전을 폈다. 北京우체국의 1997년 11월11일자 消印(소인)이 찍혀 있는 편지가 金大中 진영에 들어가 있던 金元吉(김원길) 의원에게 배달되었다. 이 편지는 金大中 후보에게 전달되도록 보낸 것이다. 국민회의 측은 怪편지가 도착했다고 발표한 뒤 이 편지를 안기부로 우송했다. 이 편지를 보낸 인물은 김장수로 되어 있다. 편지엔 이런 대목이 있다.


<본인은 다행히도 일본에서 인연이 깊고 지금은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 계시는 김병식 선생님과 상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분도 이번 대선에서는 金大中 선생께서 꼭 당선되시기를 믿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이야기를 건네시면서 선생님이 가장 어려운 때인 1971년 가을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선생님과 조용히 만나 우의를 깊이하여 선생님의 반독재운동에 자금지원을 하고저 트렁크를 넘겨드리던 그때를 감회 깊이 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주」와 「통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오신 선생님과 같으신 분이 대성하면 금후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나라의 통일도 연방제 방식으로 결착을 보리라 확신하시며 선생님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인사와 후원의 뜻을 전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對共수사관계자는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를 받아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폭로할 거리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金大中씨는 역대 정부가 對南적화전략으로 규정하여 처벌대상으로 삼았던 연방제 통일방안을 6·15선언 제2항에서 「통일의 한 방향」으로 수용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편지 공작을 추진했던 북한 측 對南공작부서에서는 아마도 이 공작의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 모른다.
위의 편지에 등장하는 金炳植은 1919년 전남 신안(무안說도 있음)에서 났다. 그는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의 패망 뒤 조총련 간부로 일했다. 1967년엔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혔고, 3년 뒤엔 조총련 중앙위원회 제1부의장이 되었다. 1972년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서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해 11월부터 북한에 머물면서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국가부주석으로 있다가 1999년 7월에 사망했다.

大選 투표일이 가까워지자 북측은 金大中 후보 측뿐 아니라 反김대중 진영으로 편지를 또 보낸다. 이번에는 金炳植 명의의 타자로 친 편지였다. 북측은 金張洙 명의의 편지가 한국에서 문제가 되지도 보도되지도 않은 데 실망한 듯 이번에는 金大中씨에게 건네주었다는 돈의 액수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 편지를 여기 저기 뿌린 것이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달러)밖에 보탬해 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 데 밑거름이 되였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도 어느 회합에서 말씀하셨지만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정권이 서야 하며 북과 남이 민족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과의 뜻깊은 상봉을 확약하면서 옥체만강을 기원합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주체 86(1997)년 12월5일 평양

나는 이 편지를 평양에서 보내려고 하였으나 중도에서 차단될 것이 걱정되여 인편을 통해 해외에서 보내게 됨을 량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중씨는 1971년 11월 金載華 등 나중에 한민통을 함께 만들게 되는 친북계 인물들과 만났다는 진술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사실만으로썬 그가 김병식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주장을 입증할 수는 없다.

북한통전부 전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들고나오자 '역이용 전략'의 수립을 통일전선부에 지시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1999년 康仁德 통일부 장관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 특강에서 '우리 체제를 악랄하게 헐뜯었다'면서 『중앙정보부 對北담당 국장, 심리전 국장, 북한문제연구소 소장,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경력을 볼 때도 대단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이니 통일부 장관 자리에서 반드시 쫓아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통전부는 즉각 3위1체 무기를 꺼내들었다. 3위1체란 다름 아닌 통전부, 金大中 정부, 그리고 한국內 親北 및 좌파세력의 일심체였다. 북한은 우선 노동신문을 통해 康仁德에 대한 반대 입장을 거듭 천명했는데, 그 논조는 단순히 규탄이 아니라 명령 같은 것이었다.
1999년 5월3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시급히 제거해야 할 극악한 통일의 원쑤」
1999년 5월5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더 이상 살려둘 수 없는 극우반동」
1999년 5월7일 노동신문 5면, 범민련 일본지역 본부 성명 「반통일분자를 파면시키고 對北대결정책을 민족 화해와 단결 정책으로 바꾸라」
1999년 5월10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지체 없이 제거해야 할 통일의 원쑤」
한편 통전부는 노동신문과 동일한 내용을 26연락소가 운영하는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방송」을 통해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한국內 親北 및 좌익세력들에게 거의 매일 방송으로 지시했다.
그들은 북한과 한 목소리로 「北南(북남)관계의 개선과 통일의 앞길에 새로운 장애를 조성했다. 걸림돌이다」 하는 식으로 康仁德 퇴진 캠페인을 벌였으며, 최종적으로 金大中의 지시로 1999년 5월24일 통일부 장관직에서 康仁德이 해임됐다. 그 시간에 金正日은 강원도에 있는 자기의 갈마초대소에서 통전부 간부들과 함께 康仁德 해임 작전을 자축하는 파티를 성대히 벌였다. 남북 頂上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金正日은 『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평양회담은 李長春 대사의 표현을 빌면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하여 매수한 것'이다. 2003년의 對北불법송금사건 特檢수사기록을 精讀했던 기자는 이 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남북한 비밀회담이 민족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흥정현장이란 인상을 받았다. 현대 그룹을 내세워 김정일 정권에 뇌물을 얼마나 주느냐 하는 깎고 올리기 흥정이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현대그룹을 창구로 하고 국정원을 시켜 4억5000만 달러를 김정일의 마카오내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내준 행위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재수사하여 단죄되어야 할 세계역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희대의 국가반역혐의였다. 김대중씨가 결정적 순간에 이렇게 위험하고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그에 대한 북한정권의 오랜 투자와 접촉만으로썬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46년에 그는 좌익사상을 청산했다고 말했지만 그 후 그의 言動과 정책에 묻어 있던 좌익의 흔적은 너무나 뚜렷했다. 그런 혐의에 대한 추궁을 그는 색깔론 주장과 지역주의로 피해왔으나 불법송금사건에선 어떤 변명도 소용이 없다. 사안은 너무나 명백하다. 그는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로 보내는 돈이 군사비로 전용될 수 있으며 불법임을 알고도 송금을 지시했음이 확실하다. 林東源 국정원장은 '金대통령께서는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송금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다. 主敵의 수괴가 해외에 숨겨놓은 비자금 계좌로 4억5000만 달러를 보내 핵무기 개발이나 對南공작비로 쓰도록 하는 것이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는 정도라면 김대중씨는 자신의 死活이 걸린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슨 짓을 할 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김정일의 대남적화전략을 다 받아들인 6.15 선언이 어떤 분위기 아래서 나왔는가는 대충 알 수 있다.
2000년 6월14일 오후 평양. 金大中-金正日 회담이 열렸다. 金正日은 對坐(대좌)하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배석자의 증언).

『오늘 아침 남조선 텔레비전을 보니까 대학에서 인공기를 걸었다고 검사가 학생들을 구속하겠다고 하는데 지금 여기서 頂上회담이 열리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분위기에선 회담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환대를 받으신 걸로 만족하시고 푹 쉬신 다음에 돌아가시지요. 대통령께서도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金대통령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불측한 발언이, 金大中 당시 대통령과 鄭夢憲 현대그룹이 공모하여 4억5000만 달러와 5000만 달러 상당의 물건을 金正日에게 바친 뒤에 있었다는 점을 독자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돈 먹은」 金正日이 「돈 바친」 金大中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막말은 세계 어느 頂上회담에서도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악마와 사기꾼 사이의 密談에서나 있을 만한 低俗語(저속어)이다.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金日成 대학교에 태극기를 올린 학생들이 있었다면 金正日은 현장 사살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인간적 윤리에도 어긋난다. 20세나 연장자인 金대통령이 아닌가.
이는 도저히 「돈 먹은」 자의 미안해 하는 태도가 아니다. 돈 먹고 약점 잡은 깡패의 태도이다. 金大中씨는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이 자를 「효심 있는 지도자」라고 평했다. 金正日로서는 金大中씨와 現代가 함께 만들어 준 5억 달러가 고맙지 않았을 수도 있다. 文藝春秋 2000년 12월호에 실린 金正日의 간부회의 육성 기록(1999년도 작성)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정권을 쥐고 있는 金大中은 야당시대를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美帝의 등에 타고, 反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 있다. 수령님은, 金大中은 민족주의자임과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서, 오늘의 金大中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金大中은 야당시대에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 접근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신뢰와 의리를 모두 저버리고, 反사회주의와 反통일정책에 미친 듯이 나아가고 있다>
金大中씨는, 따라서 대한민국은 金正日이 내민 6·15 선언이란 독약을 마셨다. 그 뒤 한국 사회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 후유증은 지금의 안보불안, 경제불황으로 심화되었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제2항은 金大中씨가 친북적인 자신의 개인 통일방안에 나오는 연합제와 북한 정권의 가장 중요한 對南 적화 전략을 야합시킨 반역행위였다. 이 선언의 '우리민족끼리'라는 용어는 남북한 좌파정권이 손을 잡고 미국에 대항하는 꼴로 변해가고 있다.

퇴임 이후 김대중씨의 김정일에 대한 저자세는 더 심해졌다. 핵실험이란 도저히 변명이 불가능한 도발행위를 김정일이 저질러도 김대중씨의 김정일=햇볕정책 감싸기와 미국 때리기는 도를 더해갔다. 그는 지난 10월말 목포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사는 세상 만들었다. 과거 판문점에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했는데 이제는 핵실험 했다 해도 안심하고 산다. 남북교류를 통해 우리가 정치경제적으로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 짧은 문장에 사실이 아닌 말을 이렇게 많이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김정일과 김대중씨뿐일 것이다.
첫째,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책임자가 남북관계를 개선했다고 주장한다. 간첩을 보내고 서해상에서 두 차례 도발하고 한국을 겨냥한 핵실험을 하고 김대중씨의 訪北마저 불허한 북한정권을 놓고서 개선이란 말을 쓴다면 김대중씨는 노예근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노예는 주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만 않으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과거 판문점에서 총소리만 나도 피란갈 준비를 했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1976년 도끼만행 때,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때 국민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一戰不辭의 정신으로 대응했다. 그때 도대체 누가 피란 갈 준비를 했단 말인가? 김대중 본인이 그랬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셋째, 핵실험을 해도 안심하고 산다는 말은 김대중類의 從金세력에게만 해당된다. 국제깡패가 핵무기를 들었는데 한국인이 안심하고 산다니? 안심하고 산다는 인간들은 반역자들, 정신차려야 할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이 필요한 인간들이지 정상적인 국민들은 아니다. 김대중씨는 非정상적 국민들만 국민들로 보이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김정일의 핵무장을 기필코 無力化시키겠다는 애국시민들은 국민들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일부 국민들이 안심하고 사는 이유는 김대중씨 덕분이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구축한 韓美동맹과 국군의 對北억지력 때문이다.
넷째, 북한, 즉 김정일이 한국에 대해 감사하도록 만들었단다. 감사의 표시가 핵실험이고 미사일 발사인가? 김대중씨가 현대그룹을 앞세워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로 한국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4억5000만 달러를 보내 핵개발을 도운 데 대해서 김정일이 감사했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김대중씨는 주인인 김정일에게 얻어맞을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변태적 성격의 노예인가?


김정일의 핵실험 이후 방향전환을 모색하던 盧대통령을 압박하여 親김정일 노선으로 몰아간 김대중씨는 여러 번 무시무시한 충고를 했다. 김정일-노무현 회담을 열어서 남북관계가 우파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합의를 하라는 요지였다. 지금의 한국은 약30도 좌경화된 상황이다. 이 정도에서 멈추어도 과연 정상적인 사회로 복원될 것인가 의문인데 더 좌경화를 하라는 충고인 것이다.
여러 여론조사를 종합하면 한국은 20~30% 정도의 赤化현상을 보이고 있다. 골수 從金(김정일 추종) 좌익은 유권자의 약10%이고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친북세력을 합치면 약20%이다. 이들은 정권의 핵심에 들어가 있으며 방송, 노조, 사회단체 등에 포진하여 있다. 한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실제로 행사하는 동원력은 40~50%쯤 될 것이다. 요지부동의 대한민국 수호세력은 약30%이다. 나머지 50%는 浮動層이다. 정권이 KBS, MBC 등 선동기구를 총동원하여 50%의 부동층을 집중공략하면 뻔한 거짓말로 믿게 만들 수 있다.
청와대, 국회, 열린당엔 전향하지 않은 386 극좌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들은 영혼이 없는 관료집단을 부려서 反헌법적 정책을 밀고나간다. 여기에 실내정당 한나라당은 대중조직이란 손발이 없는 상태에서 입으로써만 싸운다.
그럼에도 盧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지고 열린당이 해체단계로 접어들도록 만든 것은 5.31 선거를 통해서 극적으로 확인된 국민들의 대각성 흐름이었다. 김정일에 굴종하면서 국가를 분열시키고 경제의 동력을 망가뜨린 盧정권의 무능과 악랄함에 치를 뜨는 국민들이 2007년 대통령 선거를 기다리고 있다. 정상적인 선거가 치러진다면 좌파의 재집권은 어렵다. 이런 위기감이 盧대통령보다도 김대중씨를 더 불안하게 만든 듯하다. 盧 대통령이 對北굴종정책에서 이탈하면 김대중씨는 김정일과 한 덩어리가 되어 매도될 구도였다.
차기 정권이 우파로 넘어올 때 김대중, 노무현 세력이 대한민국 헌법으로부터 당할 보복은 이들이 헌법을 무시한 정도에 비례할 것이다. 두 사람에 대한 정치자금이나 비자금 수사가 재개될 가능성도 높다. 코너로 몰린 것은 두 사람뿐이 아니다. 유엔의 對北제재에 걸린 김정일은 더하다. 이런 공통의 위기가 자연히 세 사람을 손잡게 할 가능성이 있다.

내년에 김정일-노무현 회담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大選用일 수밖에 없다. 盧대통령은 김정일에게 탈출로를 뚫어주고 김정일은 盧대통령과 김대중씨 세력의 정권연장을 도와주는 쇼를 하고 공작을 약속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반발한 우파 세력이 행동하면 좌파의 대중조직과 어용언론이 궐기할 것이다. 공무원 조직마저 좌우로 분열되고 돌발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경찰과 군대마저 분열되고 여기에 북한이 개입하면 대한민국은 內戰으로 들어간다. 이런 악몽은 과연 상상에 그칠 것인가?
한국인은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으로 약300만 명이 죽는 것을 보고 공산당의 실상을 알고 '빨갱이는 안돼'란 결단을 내렸다. 그 약효는 30년으로 끝나고 1980년대 학원을 중심으로 다시 공산주의가 퍼져갔다. 바로 그때 동구 및 소련 공산주의가 붕괴됨으로써 '좌파는 쓰레기이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1990년대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헛점을 틈탄 좌경세력의 확산을 저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역사는 세번째의 경종을 울렸다. 즉, 1995년 이후 5년간 북한주민 300만 명이 김정일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로 굶어죽었다. 공산주의가 惡이고 수구적 이념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국인 약600만 명이 죽은 셈이다. 그런데 그 직후 한국인은 2代에 걸친 좌파정권을 탄생시켰다. 좌파정권 8년간 한국인의 정신이 병들었다. 다수 한국인이 김정일보다 부시를 더 미워한다. 강도 김정일 정권에 인질로 잡힌 셈인 한국인이 그 강도와 손잡고 경찰에 대항하자는 취지의 소위 민족공조론에 속고 있다.

노무현-김대중 연합세력은 양극화와 같은 계급적 선동, 민족공조론과 같은 가짜 민족주의 고취, 그리고 지역주의를 부추겨 깨어나고 있는 국민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려 들 것이다. 한국의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청산하고 넘어가야 할 2대 守舊이념인 좌파와 지역주의가 노무현-김대중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 한 덩어리로 결합하여 한국 사회를 계급적으로 분열시키는 것도 모자라 지역적으로 2중 분열시킨다면 대한민국은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되는 것은 물론이고 내란상태로 빠져들 것이다. 지난 60년간 근면성실한 국민들이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 손잡고 한미동맹의 튼튼한 뒷받침을 받아가면서 발전시키고 뿌리내린 자유민주주의가 언론자유, 선거의 자유, 사유재산제도라는 3대 기능을 동원하여 이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느냐 국가분열 내지 赤化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 2006년 12월의 대한민국이다.

























<(金保鉉 국정원 3차장) 김윤규가 액수까지 부탁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다만 頂上회담 전에 보내야 한다고 다급하게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문(특검 박광빈 특검보) 임동원 원장은 당시 제5국장이었던 진술인으로부터 『현대 측으로부터 2억 불을 북한으로 보내려고 하는 과정에서 환전편의 제공요청이 왔었다』면서 자신에게 『실무부서에 가능여부를 하문해 달라』는 건의가 있었으며, 최규백 실장으로부터 가능하다는 보고와 함께 실무자의 연락처를 받아서 진술에게 건네준 기억이 있다고 하던데 어떤가요.
답(金保鉉) 임원장에게 2억 불이라고 보고를 했는지 기억이 없으나 위와 같이 보고를 하여 임원장으로부터 실무자인 김○○, 김△△의 전화번호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김윤규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은 송금방법에 대하여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2000년 6월7일 (4000억원을) 대출받은 이후 6월8일 김윤규 사장을 따라 나가서 국정원 직원을 만났으나 별다른 이야기도 없어 얼굴 정도만 확인한 채 돌아갔고, 사무실로 돌아와 바로 김윤규로부터 북한 측 돈자리(계좌번호)를 건네서, 국정원 직원을 만나서 자기앞 수표 2240억원을 건네주니까 국정원 직원이 송금을 마치고서 영수증을 건네주기에 가져온 것이 전부라고 한다> (특검 검사의 심문)
돈을 보낼 북한측 「돈자리(계좌번호)」는 2000년 5월23일부터 25일까지 금강산 부두 기공식에 참석한 鄭夢憲 회장에게 직접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기록을 검토한 결과, 현대상선이 조달한 2억 달러는 2000년 6월9일 북한 對南공작기구 대성은행의 계좌(중국은행 마카오 지점)로 송금되고,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이 조성한 2억5000만 달러는 홍콩과 싱가포르에 있는 金正日의 비밀계좌로 송금됐다는 기술을 발견했다.
현대상선이 조성한 2억 달러 가운데 국정원 직원 김○○의 명의로 중국은행 마카오 지점, 계좌주 「DAESUNG BANK」로 송금한 4500만 달러가 실제 계좌주인 「DAESUNG BANK-2」와 일치하지 않아 송금처리되지 않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현대전자의 미국 및 현지 법인은 현대건설 런던지사가 팩스를 통해 알려준 영국 홍콩상하이 은행의 현대건설 명의 계좌로 2000년 6월9일 1억 달러를 송금했다. 현대건설은 같은 날 2000만 달러, 6월12일 8000만 달러 등 모두 1억 달러를 북한측 계좌로 송금했다.
현대건설이 조성한 1억500만 달러는 이승렬 현대건설 금융재경본부 금융재정담당 상무이사, 임종익 당시 현대건설 재무기획부장이 실무를 담당하여, 2000년 5월 말경 외환은행 홍콩 지점 등 10개 계좌를 이용하여 홍콩 및 싱가포르에 있는 金正日 비밀계좌로 송금한 것으로 특검조사에서 확인됐다.
金保鉉 당시 국정원 5국장은 북한에 넘어간 5억 달러의 금품이 군사적으로 전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특검에서 밝혔다. 金大中 대통령은 林東源 국정원장으로부터 『頂上회담 합의의 대가로 정부가 지불하기로 한 1억 달러를 현대에 부담시키기로 했다』는 보고와 함께 對北송금의 실정법상의 문제점을 보고받고,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對北 송금을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돈을 직접 주는 것은 국민적 비판여론을 감내하기 어렵고 둘째 혹시 북측이 군사비로 전용할 우려가 있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1억불 정도를 주더라도 남북정상회담을 열어서 해빙무드를 조성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金保鉉 진술>
<2000년 5월 초순경 현대가 부담하기로 하는 박지원 특사와 임동원 원장의 제안에 대해서 저도 동의를 하고, 곧바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렸는데 보고시 임동원 국정원장은 대통령께 정부가 부담해야 할 1억 불을 현대가 맡기로 했다고 보고를 드렸고, 보고를 받은 대통령께서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고 하셨고, 그러면서 『정부가 떳떳하게 해야 하는데』라고 하시며, 서운해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李起浩 진술)
<문(특검 이병석 검사) 임동원 국정원장의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박지원)과 이기호 수석이 현대의 북측에 5억 불 대가 지급에 대한 보고를 드리면서 5억 불 송금에 대한 실정법상의 문제점과 그에 반해서 현대 측이 취할 수 있는 이익 등에 대한 논의결과를 보고드리자, 보고를 받으신 대통령께서는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현대의 사업을 장기적으로 볼 때 인정해 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면서 사실상 묵인하는 쪽으로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사업의 대가로 5억 불을 지급키로 했다는 내용의 잠정 합의서가 작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으셨지만 5억 불 지급에 대하여 승인하시는 그런 말씀은 없으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朴智元 진술)















안기부 자료: 북측의 의도 분석

북측은 이 편지를 당시 李仁濟 후보 측에 합류했던 兪成煥(유성환) 前 의원한테도 보냈다. 兪의원은 이 편지를 안기부 대구지부에 신고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1997년 12월 大選을 앞두고 金大中·李仁濟 두 후보 측근들이 북한 정권의 對南공작부서와 접촉하여 선거에 유리한 방향으로 북한 정권의 도움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내사를 벌였다. 북한 측은 北京에 大選공작팀을 상주시키다시피 하여 北京을 잇따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黃長燁씨의 위의 증언이 나온 것이다.

1997년 12월10일경 안기부는 金大中 후보의 국민회의가 吳益濟 편지 등과 관련하여 안기부를 조작說로 공격하고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언론보도 자료를 만들었다. 이 발표문 초안(언론사에 배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을 읽어 보면 金大中 총재 측에 대한 북측의 편지공세와 이에 대한 안기부의 視覺(시각)이 잘 보인다.

<북한의 金大中 후보에 대한 일련의 편지 공작과 관련하여

국가안전기획부는 吳益濟 편지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회의 측(金大中 후보 측)이 안기부의 정치적 조작 음모라며 정치공세를 취하여 지난 12·6 사건의 진상을 상세히 발표한 바 있는 데 국민회의 측이 그 이후에도 안기부가 북한의 金大中 후보 떨어뜨리기 공작에 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계속해서 當部를 매도하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최근 북한의 잇따른 편지공작 의도를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임.

북한이 金大中 후보에게 보내온 일련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1·12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 金炳植이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金大中 후보를 만나 反독재활동에 자금지원을 하고자 트렁크를 넘겨주었으며, 金후보가 집권하면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연방제 통일도 확신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고, 11·21 吳益濟가 북한에서 金大中 후보에게 월북을 위해 서울을 떠나기 전 金후보에게 여러 번 전화를 하였고, 또한 월북 전 미국에서 金후보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금강산무역개발 박경윤 사장에게 1971년 가을 일본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金大中 후보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달러밖에 제공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오늘날 金후보 정치역정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용 전송문을 보낸 바 있음.

이와 같이 북한이 大選을 앞두고 金大中 후보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을 적발 가능성이 높은 편지 또는 電送文 형식으로 잇따라 보내는 것은, 안기부가 편지나 전송문을 적발하는 즉시 그 내용을 공개할 경우 오히려 특정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안기부의 北風공작이라고 뒤집어씌움으로써 안기부가 마치 특정후보 낙선공작을 하고 있는 것인 양 국민적 오해를 유발하여 국민과 안기부를 이간시킴으로써 정국불안 야기는 물론 안기부 무력화를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이와 같은 북한의 공작의도는, 국민회의가 처음에는 北風공작설을 주장하다가 안기부가 金大中 후보를 떨어뜨리는 북한의 공작에 가담하고 있다고 입장을 변경하자, 북한은 국민회의 측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즉각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박경윤에게 기자회견용 電送文을 보내 과거 金大中 후보가 金炳植으로부터 20만달러를 수수하였다는 등 金大中 후보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음.

이와 같이 북한은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안기부의 분석, 판단능력을 시험하고 오판을 유도하여 우리의 大選 정국을 교란시키고 국민회의와 국가정보기관을 첨예하게 대립시킴으로써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한편 大選 이후에도 정국혼란의 불씨를 남겨 두려는 고도의 정치적 공작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됨.

따라서 그동안 국민회의가 주장해 온 안기부의 「北風공작설」이나 「북한공작가담설」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공작의도에 말려들 위험성이 큰 것으로 보이므로 좀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며 국민회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일련의 편지내용에 대한 실체적 진실 여부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임.

한편 북한은 안기부가 자신들의 공작에 말려들지 않자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금강산무역개발사장 박경윤에게 기자회견용 전송문을 보내 우리 언론을 상대로 또 다른 공작을 시도하고 있음.

안기부는 그동안 黃長燁 사건, 남파부부 간첩사건, 고영복 사건 등에서 보듯이 어떠한 對共사건에 대해서도 정치적 입장을 떠나 엄정하게 처리한다는 원칙을 지켜 왔는 바, 吳益濟 편지 사건에 있어서도 對共사안인 만큼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 국민회의 측 사전 양해를 얻어 의문사항을 질의한 것이며, 앞으로 북한의 제2,3의 편지공작이 있을 경우 북한의 저의 파악에 주력하면서 對共차원에서 조사할 수밖에 없음을 밝힘.

따라서 국민회의는 북한의 편지공작에 대해 大選 득실 여부만을 따져 정보기관을 더 이상 매도하지 말 것과 안기부가 질의한 의혹부분에 대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답변해 줄 것을 재차 촉구하며, 언론도 민감한 對共사안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판단, 보도할 경우 결과적으로 북한의 對南 공작에 말려들 소지가 많은 만큼, 반드시 對共전문기관은 안기부와 협조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림>



金炳植과 金張洙 명의의 金大中 앞 두 편지의 핵심은 金炳植이 1971년 가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20만 달러가 든 트렁크를 金大中 당시 신민당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시기에 金大中씨가 과연 도쿄에 있었는지 알아보았다.

1980년 7월19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金大中씨를 조사하여 제3차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았다.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在日동포 인사들과 함께 反국가단체인 한민통을 만든 데 대한 조사였다. 신문조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피의자는 金載華(김재화)의 사위 郭東儀(곽동의)에 대해 말하시오.

『제가 郭東儀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1971년 8월경 金相賢 의원으로부터입니다. 당시 金의원은 일본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라는 연구소를 운영, 「在日韓國人」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民團 비주류파인 소위 베트콩파에서는 郭東儀가 조총련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했습니다. 1971년 11월경 신병치료차 渡日, 東京에 체류하고 있을 때 舊민단 東京본부단장 鄭在俊이 저의 대통령 낙선 위로를 겸한 파티를 東京 신주쿠 소재 야키도리 집에서 열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鄭在俊·裵東湖·趙活俊·양상기·유석준·김은택·김군부 등 민단 비주류인 베트콩파들이 참석했으며 郭東儀가 참석해 처음 인사를 했습니다. 1972년 2월 중순경 경제시찰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온 성명미상의 駐日 한국대사관 직원이 민단 이야기 끝에 郭東儀는 조총련과 내통해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이란 말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피의자 진술에 의하면 郭東儀가 사상적으로 불순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는데 郭東儀를 사상적으로 의심해 보지는 않았는지요.

『1971년 11월 중순경 저녁 때 그동안 자주 왕래하던 趙活俊(조활준)의 주선으로 긴자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金載華와 본인 셋이서 회식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본인이 「郭東儀에 대해서 사상을 의심하는 말이 많은데 사실이냐」고 했더니 金載華는 화를 내면서 「모략이다. 내 사위는 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북송 때는 니가타에 가서 철로를 베고 누워 이를 저지하려고 투쟁한 일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식사 후 趙活俊에게 물었더니 「郭東儀에 대해서 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나의 의심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에 그 후부터는 郭東儀를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기자는 최근 아래 문서를 읽어 볼 수 있었다.

<황장엽·김덕홍 1일 동정 보고(국가안전기획부/1997년 12월18일)

1. 1(黃長燁 지칭)은 집필보조원과의 대화시 북한이 오익제 편지 등을 통해서 金大中 지지 용의를 보인 것은 지금까지 金大中에게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를 확실히 대통령에 당선시켜 경제원조 등을 얻어내려는 의도임.

2. 1987년 大選 당시 허담이 1에게 金大中이 양쪽(북한·조총련?)에서 받아먹고도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며 화를 낸 적이 있다고 언급하였음>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씨가 이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하루 앞둔 1997년 12월17일이었다. 이날 그와 金德弘씨는 두 군데의 군부대를 방문하여 강연했다. 月刊朝鮮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직접 黃長燁씨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언젠가 黃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 보았습니다. 許錟이 黃선생님과 金容淳 등이 있는 자리에서 金大中씨에게 돈을 준 이야기를 했다고 하던데….

『그것을 이제 문제제기해서 뭣합니까. 내가 국제비서를 할 때인데, 아마도 1987년 大選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許錟이 그전에 어디 갔다가 와서 金日成에게 보고하는 자리였어요. 許錟하고 나, 金容淳 그리고 金正日이 (보고차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金日成이 나오면서 許錟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이렇게 수염을 씻더란 말이지, 하하하」. 수염을 훑는 시늉을 하더라고요. 그건 시치미를 뗀다, 즉 돈을 받고도 모른 척한다는 뜻이지요. 許錟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었어요』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許錟이 한국에 온 것은 1985년 9월4일이고 그때는 金日成의 밀사로서 全斗煥 당시 대통령을 만나 친서를 전하기 위해 왔으므로 감시 중인 金大中씨를 만날 수 없었을 텐데요.

『어쨌든 저의 기억으로는 외국에 갔다가 와서 보고한 뒤였습니다. 나는 許錟이 남한에 여러 차례 갔다가 온 줄 아는데』

―金日成이 金大中씨한테 돈을 주었다고 이름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까.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金大中씨를 지칭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거야 우리끼리는 상식이지요. 許錟이 金大中씨 쪽에 어떻게 해달라고 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말이었어요』

―그런 대화가 있었던 곳은 주석궁이지요.

『그렇습니다』

기자는 黃長燁씨에게 정확한 연도를 기억해 보라고 했다. 그는 1987년 무렵일 것이라고만 했다. 黃씨의 주장으로써는 金日成이 말했다는 「두 군데서 받아먹었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돈이 나갔다고 하더라도 직접 金大中씨한테 주었다는 것인지, 간접적으로 주었다는 것인지, 본인이 알고 받았다는 것인지, 모르고 받았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黃씨의 말 중에 흥미로운 것은 『(金大中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우리끼리는 상식이었다』는 대목이다.










5. 김대중-李哲 면담(이철 진술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

진술서

성명 이철

주민등록번호

주거 서울 성북구 안암동 3-135 삼익아파트 1-203

본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 17

위 본인은 1997년 12월13일 주소지에서 아래와 같이 임의 진술합니다.

1. 저는 1948년 3월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망부 이근진(82)과 정경조(74)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1967년 2월 경기고등학교, 1985년 8월 서울대 사회학과를 각각 졸업하고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현재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정당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 제가 고영복 선생을 알게 된 경위와 접촉 상황에 대해 말하면, 제가 1969년 3월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을 때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고영복 선생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그후 저의 결혼식 때 고영복 선생이 주례를 서준 사실은 있으나 제가 정치 활동을 하면서 바빴던 관계로 거의 만나지 못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또다른 이유는 고영복 선생은 유신정권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옹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나 저의 친구들이 고영복 선생을 「정권의 눈치 보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이유도 자주 만나지 못 했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정확한 일자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1991년경 사회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통해 『정치인이니까 전기나 이철 평전 같은 책자를 출간하면 정치활동이나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뭘 돕고 싶은데… 이것밖에 방법이 없네』 하면서 자서전 형식의 책 출간을 제의받았습니다.

고영복 선생의 제의에 관련하여 며칠 후 당시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서울대 사회학과 후배 김종채(40세 가량)를 만나 저의 전기 출간과 관련 인터뷰를 한 사실은 있으나 저의 전기가 출간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1. 제가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같이 일해 보라는 제의를 받거나 북한 사람을 소개 받은 사실에 대해 말하면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는 고영복 선생은 「정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제게 도움이 되니 전기를 출판해 주겠다고 제의를 받고 사회학과 후배 김종채를 소개받고 인터뷰한 사실은 있으나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은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을 소개받았거나 제가 북한 사람을 만난 사실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1985년경 김대중 총재로부터 『우리나라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은 들었던 바 있습니다.

1. 제가 1985년 2월12일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1985년 3월경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김대중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그날 오후 5시경 동교동 김대중씨 자택을 방문하여 김대중씨의 안내로 지하실로 내려가 단둘이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대중씨가 저를 보고,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너무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라는 요지로 한 시간 정도 제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때 김대중 총재가 「나를 공산혁명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나를 자기의 심정적 동조자, 정치적 계보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 김대중씨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레닌도 될 수 있고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1988년 5월경 밤 11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여 식당에서 단둘이 면담하면서 당시 김대중 총재로부터,

―정치자금 10억원과 부총재 자리를 줄테니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저는 아직 젊은 탓인지 당직이나 정치자금은 별로 뜻이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야권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군사정권 종식을 위해서 중앙당의 수위라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한 바 있습니다.

1. 이상 진술한 내용은 사실과 틀림이 없습니다.

1997년 12월13일 위 진술인

이철(李哲)













두 번째로는 북한의 핵 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대북 포옹정책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닌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북핵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김대중의 거짓말들


토씨만 빼곤 다 거짓말. 이 짧은 문장에 거짓말을 이렇게 많이 넣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지구상에 김정일과 김대중씨뿐일 것이다.
趙甲濟

人生말년에 들어서, 그것도 김정일의 핵실험을 前後하여 좌익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김대중씨는 며칠 전 목포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사는 세상 만들었다. 과거 판문점에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했는데 이제는 핵실험 했다 해도 안심하고 산다. 남북교류를 통해 우리가 정치경제적으로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 짧은 문장에 거짓말을 이렇게 많이 넣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지구상에 김정일과 김대중씨뿐일 것이다.
첫째,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책임자가 남북관계를 개선했다고 주장한다. 간첩을 보내고 서해상에서 두 차례 도발하고 한국을 겨냥한 핵실험을 하고 김대중씨의 訪北마저 불허한 북한정권을 놓고서 개선이란 말을 쓴다면 김대중씨는 노예근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노예는 주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만 않으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과거 판문점에서 총소리만 나도 피란갈 준비를 했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1976년 도끼만행 때,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때 국민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一戰不辭의 정신으로 대응했다. 그때 도대체 누가 피란 갈 준비를 했단 말인가? 김대중 본인이 그랬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셋째, 핵실험을 해도 안심하고 산다는 말은 김대중類의 從金세력에게만 해당된다. 국제깡패가 핵무기를 들었는데 한국인이 안심하고 산다니? 안심하고 산다는 인간들은 반역자들, 정신차려야 할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이 필요한 인간들이지 정상적인 국민들은 아니다. 김대중씨는 非정상적 국민들만 국민들로 보이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김정일의 핵무장을 기필코 無力化시키겠다는 애국시민들은 국민들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일부 국민들이 안심하고 사는 이유는 김대중씨 덕분이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구축한 韓美동맹과 국군의 對北억지력 때문이다. 김대중씨가 이 對北억지력을 무너뜨리려고 노심초사했던 것을 국민이 알고 세계가 알고 김정일이 안다.

넷째, 북한, 즉 김정일이 한국에 대해 감사하도록 만들었단다. 감사의 표시가 핵실험이고 미사일 발사인가? 김대중씨가 현대그룹을 앞세워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로 한국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4억5000만 달러를 보내 핵개발을 도운 데 대해서 김정일이 감사했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김대중씨는 주인인 김정일에게 얻어맞을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변태적 성격의 노예인가?

연설 내용을 토씨만 빼곤 모두 거짓말로 채울 수 있는 김대중씨에겐 기네스 북이 새로운 종목을 하나 만들어주어야겠다.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란 종목을 신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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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핵실험해도 안심하고 산다”
햇볕정책 논란중 목포간 DJ… 환영대회 3천명 몰려


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이 8년 만에 목포를 찾았다. 시내 곳곳에는 환영 현수막이 붙었고, 가는 곳마다 환영 인파에 둘러싸였다. 호남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방문이었다.

28일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엔 시민 3000여명이 모였다. 열린우리당 천정배·김원웅·유선호·우윤근·이상경 의원과 민주당 한화갑·이낙연·최인기·이상열·채일병 의원도 참석했다.







미국책임론 주장...북핵은 어린애 장난감?

◎『북조선과 전쟁을 벌이면 한국만 파괴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과 미국 본토가 핵을 맞아 잿더미가 될 것이다』

金成昱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북한 핵무장의 또 다른 主책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 김대중 前 대통령이다. 김 전대통령의 퇴임 후 연설에는 『북한의 핵무기는 미국 앞에서 어린애 장난감』이라는 표현이 관용어처럼 반복됐다.

김 前대통령은 북한 핵실험 직전인 9월28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대북 강경파들이 북한을 악당으로 만들어 MD문제와 일본의 재무장을 추구하고 있다』며 『그들은 북한이 핵무기 1,2개를 만들었다는 것을 오히려 잘됐다고 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어린애 장난감 수준』이라고 말했다.

9월14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호 기념인터뷰에서도 『북한이 핵, 미사일을 가져봤자 미국 앞에서는 어린애 장난감이다. 미국 네오콘들이 북핵을 겁내지도 않으면서 미래의 가상 적으로 여기는 중국을 겨냥한 군비 확장의 명분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해 6월9일 한국일보 창간 51주년 인터뷰에서는 『또 다른 공화당 강경파는 북한이라는 악당이 필요한 듯하다』며 『그 사람들은 이 일로 위기를 고조시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 목적은 북한보다 다른데 있는 것』이라고 했다.

모두 「북한의 핵무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 대한 위협이며 하찮은 것인데 미국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주장들이다.

<北核은 공격용 아닌 협상용?>

김 前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기가 攻擊用이 아닌 協商用으로서 위협이 아니라는 식의 궤변도 주장했다.

그는 2004년 10월6일 경향신문 대담에서 『내가 볼 때 핵은 수단이고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미국 핵 앞에서 북한의 핵은 장난감도 아니』라며 『어떡하든지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게 북한의 철두철미한 정책이고 소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같은 해 5월18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도 『북한의 핵개발이 공격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도 미국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며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핵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협상용이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金正日의 非公式 대변인으로 불리는 日本「조선미국평화센터」 소장 김명철은 2000년 「金正日의 통일전략」이라는 책을 썼다.

김명철은 이 책에서 『제2 조선전쟁이 터지면 朝美간에 쏘아대는 탄도미사일이 마구 날아다니게 되어 그 순간에 전면적 핵전쟁이 되어 美 본토가 불바다가 될 것』이며 『북조선과 전쟁을 벌이면 한국만 파괴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과 미국 본토가 핵을 맞아 잿더미가 될 것이다』고 협박하고 있다.

金正日은 핵무기로 전쟁을 일으켜 한국 파괴를 전제하고 있는데, 전직 軍통수권자는 敵將(적장)의 의중이 平和(평화)에 있다며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김 前 대통령은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도 일축해왔다. 그는 지난 해 5월20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地下핵실험설에 대해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미국에 대해서도 다시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촉구했다.

2004년 6월15일 MBC와의 인터뷰에서도 북핵문제와 관련, 『미국은,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핵까지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증거를 내놔야할 것』이라며 미국에 항의했다.

김 前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작정한 듯 햇볕정책 死守에 나서고 있다. 그는 10월11일 전남대 강연장에서 『햇볕정책이 무슨 잘못이냐』며 이렇게 성토했다.

『대북 포용정책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닌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북한의 핵 보유를 惡意的(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다.



















1. 김대중과 보도연맹 관계('김대중의 정체'에서).


경찰서 습격 사건에 연루

1차 피의자 신문 조서(1980년 5월29일)로 돌아간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10·1 폭동사건은 어떤 사건인가요.

답(김대중): 10·1 사건은 1946년 10월1일 신민당 공산당 및 民靑 등 좌익 정당 단체와 신민당의 좌익계가 합세하여 목포경찰서 남교동 파출소 등 경찰관서를 습격한 좌익계 폭동사건입니다.

문: 피의자는 10·1 사건시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요.

답: 당시 저는 8·15 해방 전부터 근무하던 전남기선(주)에 적은 두고 있었으나 별로 일거리가 없어 목포시 상낙동 소재 장인 車寶輪의 인쇄소 일을 돌보아 주고 있던 중이었는데 1946년 9월20일경 해산차 목포시 서산동 소재 親家에 가 있던 亡妻 車蓉秀의 분만이 임박하였다 하여 9월30일 밤 처가에 가서 10월1일 새벽 처가 분만하는 것을 보았으며 10·1 사건은 그날 오후에서야 알았습니다.

문: 피의자는 權庠植이란 사람을 알고 있는가요.

답: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신민당 조직부장으로 있을 때 제 밑에서 조직부장으로 일을 보다가 10·1 폭동사건에 가담 피신하였다가 검거되어 조사를 받은 일이 있고 그 후 전향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목포경찰서 형사로 특채되어 6·25 사변 이후까지도 경찰관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위 權庠植과 張금성의 진술 기억에 의하면 10·1 사건시 신민당 조직부장과 민청의 부위원장으로서 10·1 사건에 가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이 아닌지요.

답: 제가 民靑의 부위원장이나 간부직에 있었다면 사건에 당연히 가담하였겠고, 또한 가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당시 民靑에 가입은 하였었으나 평맹원이었을 뿐 간부직에 종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동에 가담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의 호적부상 1946년 10월1일 출산자는 출생사실이 등재된 바 없는데 어떻게 된것인가요.

답: 당시 출산자는 여자로 이름은 素姬였었는데 2歲時 결핵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죽었는데 출산 직후 호적신고를 못하고 있다가 사망으로 그냥 지나버린 것 같습니다.

문: 그러면 피의자는 10·1 사건 관련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없는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1946년 10월1일 오후 妻家에서 처의 출산을 보고 나오는데 평소 본인과 감정이 극히 나빴던 우익단체인 독립촉성회 목포시지부 청년대장 洪益先 등이 본인을 촉성회 사무실 창고로 끌고가 구타하며 10·1 사건 가담 여부를 추궁하였으나 가담 사실을 계속 부인하자 목포 경찰서 사찰계로 인계, 同署에서 10여 일간 조사를 받고 당시 한국민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으로 있던 장인 車寶輪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계 단체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고 훈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좌익 전향자 先導 단체 보도연맹 운영위원

문: 피의자의 한국민주당 입당 경위와 활동사건을 말하시오.

답: 10·1 사건 후 경찰서에서 좌익단체에 관여치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훈방되자 장인 車寶輪과 당시 同黨 부위원장이던 金炫庠이 입당을 권유하여 입당, 상임위원직에 있었으나 별로 활동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피의자는 보도연맹이란 단체를 알고 있으며 同 단체에 가입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보도연맹이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들을 가입시켜 선도하던 단체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이 지도위원이며 위원장만은 우익계 인사이나 기타 맹원들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자들이었던 바, 본인도 좌익단체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어 同 연맹의 운영위원으로서 수차에 걸쳐 찬조금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목포시 보도연맹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였던가요.

답: 지금 기억되는 인물로는 초대 위원장 吳栽均, 2대 위원장 趙壽男, 부위원장 薛俊錫(남로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총무부장 金南喆(남로당원) 등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2대 위원장 趙壽男의 진술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보도연맹의 총무부 차장직에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同 연맹의 운영위원직에 있었던 사실은 있으나 총무부 차장직은 맡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해운회사를 自營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포경찰서 사찰과 보도연맹 담당인 林春吉 경사가 저의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며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보도연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저도 좌익단체에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기에 해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업과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지장이 있으니 빼달라고 하였더니 『자네는 돈이 많으니 찬조금을 내는 운영위원이나 하라』고 하여 운영위원이 되었을 뿐입니다.


保導聯盟 약 30만 명

보도연맹을 구상한 것은 당시 사상검사란 말을 들으면서 좌익 수사에 중심이 되어 있던 吳制道, 鮮于宗源 서울 지검 검사였다고 한다.

鮮于宗源 변호사는 『좌익을 수사해 보면 이러다가는 官製 빨갱이들을 많이 만들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종로서에서 풀어 준 좌익을 성동서에서는 건수를 올리기 위하여 또 잡아넣는 식으로 무리한 수사가 많았다.

그래서 좌익 사건에서 검사로부터 불기소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사람들을 주로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도록 하고 이들을 감시도 하고 선도도 하기로 한 것이다. 1949년 초부터 조직에 시작했는데 그해 가을 출범할 때 전국적으로 20만 명, 나중에는 약 30만 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보도연맹의 조직은 6·25 남침 때문에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버린다.

개성, 서울이 敵 치하에 들어가자 전향했다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표변하여 군인과 경찰관 가족들을 찾아내 학살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후퇴하는 국군·경찰에게 전해지면서 전국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예방적으로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던 것이다. 수많은 보도연맹 사람들이 국가 생존의 몸부림 과정에서 치여 죽어갔다.


2. 좌익 신민당 목포지구당 조직부장 활동과 권양식 증언


남로당으로 따라가지 않았다

문: 피의자가 관여한 신민당은 10·1사건 후 어떻게 되었던가요.

답: 신민당은 당초 左·右翼 합작 명분으로 창당되었으나 시일이 감에 따라 좌익계가 득세하여 주도권을 잡고 10·1 폭동 사건에도 가담하였는데 당시 군정 포고령에 의해 좌익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공산당의 金영재, 인민당의 薛俊錫, 신민당의 李彩鉉 등이 주동이 되어 남로당 목포시당을 결성, 1946년 11월경부터 지하활동에 들어 갔습니다.

문: 피의자가 남로당에 관여한 사실은 없는가요.

답: 본인은 당초 신민당이 左·右翼 합작을 위한 정당이라고 하여 입당, 조직부장으로 일하였으나 좌익계가 득세하여 좌익 정당이 되었고 저 또한 좌익시되어 10·1 사건 가담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 후 각서까지 쓰고 나온 터였기 때문에 완전한 지하 불법단체인 남로당에는 가입하지 않고, 해운사업계획 등 사업 착수 준비에 전념하였습니다.

문: 피의자는 좌익계 인물 지원 혐의로 수사 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까.

답: 1949년 2월경 저의 국민학교 친구였던 兪在植의 형 兪 名 미상이 제가 자영하던 동양해운 사무실에 찾아와 서울 가는 여비를 도와 달라고 하여 차비를 준 일이 있는데 약 20일 후 위의 兪 名 미상이 전남 경찰국 사찰과에 남로당 활동 관련 혐의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본인이 여비를 준 사실이 밝혀져 본인도 남로당 관련 및 자금 제공 혐의로 전남 도경 사찰과 형사에게 체포되어 10여 일간 조사를 받았으나 친구의 형에 대한 단순한 여비 보조라는 사실이 밝혀져 당시 해군목포헌병대장 朴成哲 소위(現 본인의 비서실 차장) 등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된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피의자가 兪 名 미상에게 준 여비는 얼마 정도나 되었던가요.

답: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서울까지의 기차요금과 食代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문: 피의자가 처음으로 착수한 사업은 어떤 것이었는가요.

답: 본인은 8·15 해방 전부터 선박회사에 근무하였기 때문에 그 방면에 지식을 갖게 되어 해운업에 뜻을 두고 있다가 1947년 2월경 50t급 선박 1척을 구입하여 목포해운공사라는 社名으로 연안해운업을 시작, 1948년 말경에는 상호를 동양해운으로 고치고 사업을 계속하였는데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6·25 사변 당시에는 70t급 2척 50t급 1척 등 3척의 선박을보유하게 되었고 상당한 돈도 벌었습니다.

문: 피의자의 대한청년단 입단 경위 및 활동사항을 말하시오.

답: 대한청년단 목포시단은 1948년 정부수립 후 창단되었는데 본인은 당시 한민당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1950년 3월경부터 청년단의 조직을 확대하고… (해독 불명 세 줄) 있었고, 많은 청년들이 선박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해남운수의 전무로 있던 閔丙安과 협의, 해상단을 창설키로 하고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을 결단 위 閔丙安이 단장, 본인이 부단장이 되어 해상운동청년들을 규합, 조직확대 사업을 하다가 6·25 사변을 만났습니다.… (해독불명 세 줄) 운수회사를 자영하면서 서울 조선상선회사와 목포지방의 정부 양곡 해상운송 하청계약을 체결하고 양곡운송을 하고 있었는데 1950년 6월15일경 미수된 운임 2000여만 환을 받기 위하여 당시 조선상선 목포출장소장이던 韓道源 20세 가량(現 백범기념 사업회 이사)과 같이 상경, 회사 측과 미수 운임을 계산하던 중 6·25 사변이 발발, 귀향하지 못하고 1950년 7월 중순경까지, 상경 후 투숙중이던 신문로 소재 林여관, 처남 車元軾의 처가인 동양장부제본사 사장 裵仁植 家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돈도 떨어지고 목포 가족들의 생활이 궁금하여 위 韓道源과 같이 귀향키로 하고 1950년 7월 중순경 서울을 출발 도보로 온양, 군산, 함평 경유 1950년 8월10일경 목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목포에 도착, 행복동 소재 집에 가보니 亡母 張鹵島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으며 인민군이 수차 잡으러 왔다 갔고 亡妻 車蓉秀는 목포시 죽동 소재 저의 회사 선장 朴東連 家에 피신하여 2남 홍업을 출산하고 숨어 있다고 하여 저도 위 朴東連 家로 피신하여 있다가 1950년 8월12일경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 조사를 받고 제가 6·25 전 민주국민당 상임위원, 해군부대 문관, 대한청년단 해상단 부단장 등으로 활동한 사실이 탄로되어 1950년 8월경까지 內務暑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다가 그 후에는 목포형무소로 옮겨져 9·28 수복으로 탈출할 때까지 형무소 감방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金大中씨가 신민당 목포시당의 핵심인 조직부장이었고 좌익 청년 행동대 民靑에도 가입하여 맹원 교육을 했다는 心證을 갖게 한다. 여기 다른 자료를 하나 더 소개한다.

1회 피의자 신문에서 金大中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同黨 상임위원급으로 權庠植 등과 같이 활동했다고 썼다.

이 權庠植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었다(軍 검찰은 이 진술서를 金大中씨 기소 자료에 덧붙여 재판부에 냈다). 그해 4월27일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朴正熙 후보의 여권에서 金大中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자료로서 확보해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생긴다.

<진술서. 權庠植 서기 1923.11.5일생. 본인은 해방 후(중략) 좌익계 신민당에서 활동 당시 金大中은 조직부장으로 활동중 1946년 10월 소위 인민항쟁 당시는 각각 동별로 책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金大中은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 전부가 지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다가 본인은 서울로 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목포경찰서 형사대에 체포되어 특채발령을 받고 목포서에서 근무하다가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가 있었습니다. 목포가 수복된 뒤 목포로 돌아와 있었는데 金大中의 동생 金大義를 시내에서 만났는데, 「유격대 李文基를 잡소」라고 하기에 물어 보니 「李文基가 우리 형 金大中이를 체포하였다네」라고 했습니다. 그 후 金大中이를 內査한 바 李文基가 확실히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吳世一 인쇄소 2층

그 당시 좌익계 신민당 간부

위원장 李彩鉉

조직부장 및 선전부장 金大中

부원 金相培(현재 이북에 있음), 徐得均(사망), 張在赫(행방불명), 權庠植, 權五哲(이북에 있음).

그 당시 金大中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金大中이는 그 후 보니까 全南汽船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金大中이가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共黨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金大中의 동창생 金錫哲이 신민당 재정부장으로 있다가 탈당하여 있기 때문에 아마도 金大中 활동상을 잘 알 것입니다.

서기 1971년 2월10일 權庠植>

위의 진술서에 나타난 金大中 조직부장의 부하 다섯 명의 그후 운명이 처절하다. 두 명이 북한으로 갔고, 한 명은 사형, 다른 한 명은 행방불명, 그리고 權庠植 본인은 경찰에 체포되어 아마도 수사에 협조한 代價로 경찰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광복을 맞자마자 남북이 분단되고 남한에선 金日成·소련의 조종을 받는 좌익과 李承晩의 지도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익 사이에 이념대결이 벌어졌다. 그 좌익의 선동과 폭력에 우익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피를 피로써 씻는 학살이 벌어지던 시절, 그 한복판에 20代 초반의 金大中 청년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은 신민당이 남로당으로 합병될 때 金大中씨가 남로당원으로 신분을 바꾸지 않았었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고 추궁한 흔적이 있다. 수사관들은 의심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 '김대중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교육'=장금성 자술서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金大中씨를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의 조선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 사본이 있었던 것이다.

장금성은 民靑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白南雲), 인민당(당수 呂運亨)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朴憲永)을 만들 때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 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敎導하기 위해 조직된 保導연맹에 가입했었다.

그는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월7일에 다시 조선 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것이다.

우리 경찰이 이 서류를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金大中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청원서의 요지를 소개한다.


<성명: 장금성, 지하당 시절 별명: 장세철

생년월일: 1925년 7월1일(26세)

입당년월일: 서기 1946년 10월15일

입당당시 직책: 조선공산당 목포시 북지구 제22야 세포 당원

현재: 전라남도 목포시 제22동 노동당 부책임자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적색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 1946년 20일에 민청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하였음.

1946년 10월15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에게서 입당선언을 받았으며 추천동무도 정철, 김판섭 동무이었음. 입당 직후부터 세포위원장 정철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10월31일 인민항쟁 준비투쟁으로 민청 제22동 분회장으로 임명받으면서 10월31일 오전 7시 정각에 집합장소 목포시 금화동 조선회사 앞으로 나갔으나 아무도 집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위행진에 실패하였으며 당일 시내 각처에서 악질 경관 살해, 경찰파출소 습격 시위 등으로 목포시 전체가 혼란소동하여 경찰은 물론 우익청년단체 총동원 등 일제 검속 비상경비가 실시되어 조직이 분산되고 사업을 중지하고 있었음. 11월 말일경부터 민청 조직을 수습하여 분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세포원으로서 당 지시에 의하여 집회, 당비납부, 삐라, 전단, 벽보 등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1946년 12월에 남로당으로 발족하였음.

1947년 10월15일까지 투쟁하다가 악질 경관 모종남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948년 2월19일에는 대한청년단 악질간부들과 사찰계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살인적 고문을 당하였음. 벌금을 물고 석방된 이후 1948년 10월에는 미군철퇴 진정서에 날인하고 소련군 철퇴 감사선물을 만드는 사업에 참여하였음.

서기 1949년 1월 목포시 대한청년단 남지단부에 신변보장을 하기 위하여 가입하였으나 身病으로 진단서 첨부하여 휴가원을 제출하고 출근치 않았음. (중략) 1950년 4월 중순에 보도연맹 목포시 간부인 김진강 동무의 권고로 가입하지 않으면 체포될 수가 있다 하기에 부득이 가입하였음. 1950년 6월26일 보련(보도연맹) 총소집으로 구금당하였다가 6월27일 오후 1시경에 석방되었으며, 1950년 7월4일 보련 소집으로 왔으나 신병으로 그대로 돌아왔다가 1950년 7월12일 해군 방첩대에 체포되어 목포 경찰서로 인치, 유치당했다가 7월23일 오후 2시경 무조건 풀려났음. 1950년 8월7일부터 1950년 8월23일까지 목포시 제22동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가 8월24일 신병으로 목포시 죽교리에 가서 치료하고 있었음. 이상과 같이 틀림없사옵기에 당원 등록을 청원합니다.

서기 1950년 9월7일

전라남도 목포시 서산동 4번지

청원인 장금성

조선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 당위원장 동지 앞

대필 김판섭>


金大中 반론: 민청에서 교양은 했으나 목포시 부위원장은 아니었다

장금성의 자술서 내용과 金大中의 자술서 내용을 비교해 보면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이 발견된다. 이 시대 같은 무대(목포시), 같은 좌익 단체에서 활동했던 두 청년의 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金大中씨는 합수부에서 軍 검찰로 송치된 후인 1980년 7월17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도 『장금성은 모르는 사람이며, 民靑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적이 전혀 없다. 본인이 부위원장이었다고 그 서류만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軍 검찰은 그러나 장금성의 자필 기록을 받아들여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편집자 注) 목포시 위원장이며 그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이라고 적었다.

장금성의 자술서에 따르면 좌익 통일전선 조직인 民靑에는 金大中씨 같은 신민당원이나 장금성 같은 조선 공산당원(뒤에 남로당원)이 섞여 있었고 이들이 동일한 노선의 행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금성의 글에는 民靑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金大中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 공산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民靑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金大中씨는 자신이 「민청의 모임에서 교양을 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民靑 목포시 부위원장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4편에 계속>

4. 김대중의 계급주의적 시각


1980년 어록집에는 그가 한국 사회를 계급투쟁적, 또는 계층갈등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낳게 하는 말들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만 소개한다.

<경제건설이란 이름 아래 국민은 세계 최고율의 조세부담을 강제당하고 있는데 농촌과 근로자의 생활상태는 날로 궁핍해지고 중산계층의 생활은 항시 불안 속에 있다. 민족자본으로 육성해야 할 중소기업은 사양일로를 걷는데 일부 특권분자들은 관권 및 외국자본과 결탁해서 식민지적 매판건설로 천문학적 재벌로 성장해 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농촌과 도시의 이중구조는 더욱 심화되고 지역간의 격차는 민족 내부의 대립조차 조장하고 있으며 전반적 빈부양극화 현상은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첨예화시키고 있다>

金大中씨는 우리가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朴正熙가 주도한 開發年代를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다. 그가 李哲의원에게 했다는 말대로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권력자와 약자 이런 二分法으로 사회를 대치시키고 있다. 농촌과 도시, 근로자·농민·중소계층 對 매판재벌 및 특권층.

5. 김대중-李哲 면담(이철 진술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

진술서

성명 이철

주민등록번호

주거 서울 성북구 안암동 3-135 삼익아파트 1-203

본적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 17

위 본인은 1997년 12월13일 주소지에서 아래와 같이 임의 진술합니다.

1. 저는 1948년 3월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망부 이근진(82)과 정경조(74)의 1남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1967년 2월 경기고등학교, 1985년 8월 서울대 사회학과를 각각 졸업하고 제12대, 제13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현재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정당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 제가 고영복 선생을 알게 된 경위와 접촉 상황에 대해 말하면, 제가 1969년 3월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을 때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고영복 선생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그후 저의 결혼식 때 고영복 선생이 주례를 서준 사실은 있으나 제가 정치 활동을 하면서 바빴던 관계로 거의 만나지 못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또다른 이유는 고영복 선생은 유신정권을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옹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나 저의 친구들이 고영복 선생을 「정권의 눈치 보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이유도 자주 만나지 못 했던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정확한 일자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1991년경 사회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통해 『정치인이니까 전기나 이철 평전 같은 책자를 출간하면 정치활동이나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뭘 돕고 싶은데… 이것밖에 방법이 없네』 하면서 자서전 형식의 책 출간을 제의받았습니다.

고영복 선생의 제의에 관련하여 며칠 후 당시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서울대 사회학과 후배 김종채(40세 가량)를 만나 저의 전기 출간과 관련 인터뷰를 한 사실은 있으나 저의 전기가 출간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1. 제가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같이 일해 보라는 제의를 받거나 북한 사람을 소개 받은 사실에 대해 말하면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저는 고영복 선생은 「정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제게 도움이 되니 전기를 출판해 주겠다고 제의를 받고 사회학과 후배 김종채를 소개받고 인터뷰한 사실은 있으나 고영복 선생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은 사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을 소개받았거나 제가 북한 사람을 만난 사실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1985년경 김대중 총재로부터 『우리나라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말은 들었던 바 있습니다.

1. 제가 1985년 2월12일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1985년 3월경 당시 연금에서 해제된 김대중씨로부터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그날 오후 5시경 동교동 김대중씨 자택을 방문하여 김대중씨의 안내로 지하실로 내려가 단둘이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대중씨가 저를 보고,

―현재 우리나라는 극심한 계급적 갈등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권력은 군사정권에 독점되어 있고 부는 재벌이 독점하고 있는 등 너무나 상황이 악화되어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꼭 필요하다,

라는 요지로 한 시간 정도 제게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때 김대중 총재가 「나를 공산혁명주의자로 착각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나를 자기의 심정적 동조자, 정치적 계보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말하는 김대중씨는 자신에게 유리하면 레닌도 될 수 있고 히틀러도 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1988년 5월경 밤 11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만나자는 전화 연락을 받고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여 식당에서 단둘이 면담하면서 당시 김대중 총재로부터,

―정치자금 10억원과 부총재 자리를 줄테니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저는 아직 젊은 탓인지 당직이나 정치자금은 별로 뜻이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야권 통합이 이루어진다면 군사정권 종식을 위해서 중앙당의 수위라도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한 바 있습니다.

1. 이상 진술한 내용은 사실과 틀림이 없습니다.

1997년 12월13일 위 진술인

이철(李哲)


6. 황장엽 증언:

기자는 최근 아래 문서를 읽어 볼 수 있었다.

<황장엽·김덕홍 1일 동정 보고(국가안전기획부/1997년 12월18일)

1. 1(黃長燁 지칭)은 집필보조원과의 대화시 북한이 오익제 편지 등을 통해서 金大中 지지 용의를 보인 것은 지금까지 金大中에게 투자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를 확실히 대통령에 당선시켜 경제원조 등을 얻어내려는 의도임.

2. 1987년 大選 당시 허담이 1에게 金大中이 양쪽(북한·조총련?)에서 받아먹고도 입을 꼭 다물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며 화를 낸 적이 있다고 언급하였음>

前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씨가 이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하루 앞둔 1997년 12월17일이었다. 이날 그와 金德弘씨는 두 군데의 군부대를 방문하여 강연했다. 月刊朝鮮은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직접 黃長燁씨를 만나 보기로 하였다.

―언젠가 黃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 보았습니다. 許錟이 黃선생님과 金容淳 등이 있는 자리에서 金大中씨에게 돈을 준 이야기를 했다고 하던데….

『그것을 이제 문제제기해서 뭣합니까. 내가 국제비서를 할 때인데, 아마도 1987년 大選 무렵으로 기억됩니다. 許錟이 그전에 어디 갔다가 와서 金日成에게 보고하는 자리였어요. 許錟하고 나, 金容淳 그리고 金正日이 (보고차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金日成이 나오면서 許錟을 보더니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이렇게 수염을 씻더란 말이지, 하하하」. 수염을 훑는 시늉을 하더라고요. 그건 시치미를 뗀다, 즉 돈을 받고도 모른 척한다는 뜻이지요. 許錟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말이었어요』


『그래 두 군데서 받아먹고는…』

―許錟이 한국에 온 것은 1985년 9월4일이고 그때는 金日成의 밀사로서 全斗煥 당시 대통령을 만나 친서를 전하기 위해 왔으므로 감시 중인 金大中씨를 만날 수 없었을 텐데요.

『어쨌든 저의 기억으로는 외국에 갔다가 와서 보고한 뒤였습니다. 나는 許錟이 남한에 여러 차례 갔다가 온 줄 아는데』

―金日成이 金大中씨한테 돈을 주었다고 이름을 들어서 이야기했습니까.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金大中씨를 지칭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거야 우리끼리는 상식이지요. 許錟이 金大中씨 쪽에 어떻게 해달라고 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말이었어요』

―그런 대화가 있었던 곳은 주석궁이지요.

『그렇습니다』

기자는 黃長燁씨에게 정확한 연도를 기억해 보라고 했다. 그는 1987년 무렵일 것이라고만 했다. 黃씨의 주장으로써는 金日成이 말했다는 「두 군데서 받아먹었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돈이 나갔다고 하더라도 직접 金大中씨한테 주었다는 것인지, 간접적으로 주었다는 것인지, 본인이 알고 받았다는 것인지, 모르고 받았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黃씨의 말 중에 흥미로운 것은 『(金大中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우리끼리는 상식이었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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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金炳植의 폭로 편지: 협박용?

1997년에 월북한 前 천도교 교령(국민회의 고문 출신) 吳益濟씨가 평양에서 金大中 총재 앞으로 편지를 보내기 전 안기부는 북한측이 공작 차원에서 金大中씨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더 갖고 있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았다. 이 편지들에는 북측이 金大中씨에게 제공했다는 돈 이야기가 등장한다. 먼저 1997년 11월11일자 金張洙(김장수) 명의의 편지.

<발신지: 中國 北京 太平橋大街 256號 金張洙

수신지: Seoul, South Korea 142-074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4동 563의 29

세형빌라 A동 301호 김원길 선생

존경하는 金大中 선생님께

귀체만강하옵니까.

고희를 넘기신 불편한 몸에 대선 성공의 고행을 하고 계시는 선생님께 본인은 진심으로 경의드립니다. 장기간 한국의 反독재민주화에 몸담고 고초를 이겨내며 헌신분투해 오신 선생님의 노고와 숙원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는 것 같아 기쁩니다.

선생님과 맺은 연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겨 왔고 선생님과 함께 민주와 평화통일을 일일천추로 소망해 온 본인으로서도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본인은 평양에 다녀왔었습니다. 본인은 다행히도 일본에서 인연이 깊고 지금은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 계시는 김병식 선생님과 상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그분도 이번 대선에서는 金大中 선생께서 꼭 당선되시기를 믿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여러 이야기를 건네시면서 선생님이 가장 어려운 때인 1971년 가을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선생님과 조용히 만나 우의를 깊이하여 선생님의 반독재운동에 자금지원을 하고저 트렁크를 넘겨드리던 그때를 감회 깊이 회고하셨습니다.

그분은 과거 金大中 선생님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오셨고, 상호간 좋은 협력관계에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주」와 「통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오신 선생님과 같으신 분이 대성하면 금후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나라의 통일도 연방제 방식으로 결착을 보리라 확신하시며 선생님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인사와 후원의 뜻을 전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하셨습니다.

오랫 동안 선생님과 면식을 익혀 오면서 선생님의 투철한 민족관과 민주화의 집념에 감복해 온 저 역시 선생님께서 반드시 유종의 미를 보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이 민족에게 불행을 강요해 온 불운의 20세기와 결별하고 21세기를 통일의 세기로 맞자면 지금이야말로 애국애족의 입장이 확실한 정권이 나와야 할 때라 생각합니다.

역사의 이 요청은 오직 선생님의 집권을 통해서만 성취가능한 줄로 압니다. 저는 이전과 다름없이 의리를 지켜 민주정권을 창출하고저 하시는 선생님의 귀한 노력을 각방으로 도와드릴 것임을 재삼 약속드립니다.

건승을 빌면서.

1997년 11월11일 김장수 근배>


『통일은 연방제로 결착짓자』고 계속 권고

이 편지는 北京우체국의 1997년 11월11일자 消印(소인)이 찍혀 있다. 만년필로 쓰였다. 이 편지 내용은 金大中 진영에 들어가 있던 金元吉(김원길) 의원을 통해서 金大中 후보에게 전달되도록 보낸 것이다. 국민회의 측은 怪편지가 도착했다고 발표한 뒤 이 편지를 안기부로 우송했다.

이 편지 내용에 金炳植(김병식)이 金大中씨에게 자금이 든 트렁크를 전달했다는 주장이 적혀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대목은 누가 읽어 보아도 협박용으로 보인다. 對共수사관계자는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를 받아라.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폭로할 거리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발신자 김장수」라는 사람은 정체불명인데, 그가 쓴 이 편지에서도 북한 측은 「귀하가 대통령이 되면 통일은 연방제 방식으로 결착될 것임을 확신한다」는 식의 메시지를 金大中 총재에게 계속 던지고 있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 金大中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對南적화전략으로 규정하여 처벌대상으로 삼았던 연방제 통일방안을 6·15선언 제2항에서 「통일의 한 방향」으로 수용하는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편지 공작을 추진했던 북한 측 對南공작부서에서는 아마도 이 공작의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 모른다.

위의 편지에 등장하는 金炳植은 1919년 전남 신안(무안說도 있음)에서 났다. 그는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의 패망 뒤 조총련 간부로 일했다. 1967년엔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혔고, 3년 뒤엔 조총련 중앙위원회 제1부의장이 되었다. 1972년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서 서울을 방문한 적도 있다. 그해 11월부터 북한에 머물면서 조선사회민주당 당수, 국가부주석으로 있다가 1999년 7월에 사망했다.

黃長燁 선생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金炳植이 한덕수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조총련에서 밀려난 무렵, 그는 金日成에게 자신이 관리하던 1억 달러의 비자금을 바치고 북한에 머물게 되었다. 그를 통일전선부장 金容淳이 관리하게 되었다. 金容淳은 어느 날 나에게 오더니 金炳植이 조선사회민주당 당수로서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불평하였다. 金容淳은 이런 사정을 金正日에게 이야기했고 金正日이 金炳植을 불러 혼을 냈다. 그 뒤로는 金炳植이 풀이 죽어 지냈던 기억이 있다』


「20만 달러밖에 보태드리지 못해 미안」



大選 투표일이 가까워지자 북측은 金大中 후보 측으로 편지를 또 보낸다. 이번에는 金炳植 명의의 타자로 친 편지였다. 북측은 金張洙 명의의 편지가 한국에서 문제가 되지도 보도되지도 않은 데 실망한 듯 이번에는 金大中씨에게 건네주었다는 돈의 액수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 편지는 北京에 나와 있던 북한 對南공작지휘부서에서 부친 DHL편으로 당시 북한 측과 비밀 접촉 중이던 崔鳳九(최봉구) 前 평민당 의원 집(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배달하게 되어 있었다. 부친 날짜는 1997년 12월9일로 되어 있고, 부친 사람(Sender’s Name)은 「강선생」으로 적혀 있다. DHL 봉투에서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받는 이의 이름을 「金相賢」으로 썼다가 지운 부분이다.

안기부는 문제의 편지가 崔鳳九씨한테 전달된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안기부 수사관이 이 편지를 받은 崔鳳九씨를 설득하여 개봉케 한 뒤 제출받았다고 한다. 안기부는 崔鳳九씨에 대해서 왜 「강」과 접촉하게 되었는지를 조사했다. 「강」은 北京에 와서 對南선거공작을 지휘 중이던 북한 통일전선부 간부 강덕순이었다.

이 봉투 속에는 이런 내용의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최봉구 선생 귀하

11월 상면의 우의가 아직 생생합니다. 12. 8 인편을 통해 보내드린 편지가 차단될 것이 걱정되어 다시 보내게 됨을 량해해 주시고 대선의 큰 사업에 분망하시는 金大中 선생에게 보내 주십시오.

선생과의 상봉을 확약하면서

북경에서 강」


편지의 본문은 이러했다.

<金大中 선생 귀하

이번 대선의 큰 사업을 앞두고 분망하실 선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그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선생의 오랜 소망과 뜻이 성공의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선생과 협력해 오던 지난 날이 회억되면서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달러)밖에 보탬해 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 데 밑거름이 되였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도 어느 회합에서 말씀하셨지만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정권이 서야 하며 북과 남이 민족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과의 뜻깊은 상봉을 확약하면서 옥체만강을 기원합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주체 86(1997)년 12월5일 평양

나는 이 편지를 평양에서 보내려고 하였으나 중도에서 차단될 것이 걱정되여 인편을 통해 해외에서 보내게 됨을 량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기부 자료: 북측의 의도 분석

북측은 이 편지를 당시 李仁濟 후보 측에 합류했던 兪成煥(유성환) 前 의원한테도 보냈다. 兪의원은 이 편지를 안기부 대구지부에 신고했다고 한다.

안기부는 1997년 12월 大選을 앞두고 金大中·李仁濟 두 후보 측근들이 북한 정권의 對南공작부서와 접촉하여 선거에 유리한 방향으로 북한 정권의 도움을 끌어내려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내사를 벌였다. 북한 측은 北京에 大選공작팀을 상주시키다시피 하여 北京을 잇따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黃長燁씨의 위의 증언이 나온 것이다.

1997년 12월10일경 안기부는 金大中 후보의 국민회의가 吳益濟 편지 등과 관련하여 안기부를 조작說로 공격하고 있는 것을 공개적으로 경고하는 언론보도 자료를 만들었다. 이 발표문 초안(언론사에 배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을 읽어 보면 金大中 총재 측에 대한 북측의 편지공세와 이에 대한 안기부의 視覺(시각)이 잘 보인다.

<북한의 金大中 후보에 대한 일련의 편지 공작과 관련하여

국가안전기획부는 吳益濟 편지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회의 측(金大中 후보 측)이 안기부의 정치적 조작 음모라며 정치공세를 취하여 지난 12·6 사건의 진상을 상세히 발표한 바 있는 데 국민회의 측이 그 이후에도 안기부가 북한의 金大中 후보 떨어뜨리기 공작에 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계속해서 當部를 매도하고 있는 데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유감을 표하면서 최근 북한의 잇따른 편지공작 의도를 분명히 밝혀 두는 바임.

북한이 金大中 후보에게 보내온 일련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1·12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 金炳植이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金大中 후보를 만나 反독재활동에 자금지원을 하고자 트렁크를 넘겨주었으며, 金후보가 집권하면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연방제 통일도 확신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고, 11·21 吳益濟가 북한에서 金大中 후보에게 월북을 위해 서울을 떠나기 전 金후보에게 여러 번 전화를 하였고, 또한 월북 전 미국에서 金후보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금강산무역개발 박경윤 사장에게 1971년 가을 일본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金大中 후보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달러밖에 제공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오늘날 金후보 정치역정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용 전송문을 보낸 바 있음.

이와 같이 북한이 大選을 앞두고 金大中 후보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을 적발 가능성이 높은 편지 또는 電送文 형식으로 잇따라 보내는 것은, 안기부가 편지나 전송문을 적발하는 즉시 그 내용을 공개할 경우 오히려 특정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안기부의 北風공작이라고 뒤집어씌움으로써 안기부가 마치 특정후보 낙선공작을 하고 있는 것인 양 국민적 오해를 유발하여 국민과 안기부를 이간시킴으로써 정국불안 야기는 물론 안기부 무력화를 획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이와 같은 북한의 공작의도는, 국민회의가 처음에는 北風공작설을 주장하다가 안기부가 金大中 후보를 떨어뜨리는 북한의 공작에 가담하고 있다고 입장을 변경하자, 북한은 국민회의 측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즉각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박경윤에게 기자회견용 電送文을 보내 과거 金大中 후보가 金炳植으로부터 20만달러를 수수하였다는 등 金大中 후보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음.

이와 같이 북한은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안기부의 분석, 판단능력을 시험하고 오판을 유도하여 우리의 大選 정국을 교란시키고 국민회의와 국가정보기관을 첨예하게 대립시킴으로써 사회혼란을 조장하는 한편 大選 이후에도 정국혼란의 불씨를 남겨 두려는 고도의 정치적 공작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됨.

따라서 그동안 국민회의가 주장해 온 안기부의 「北風공작설」이나 「북한공작가담설」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공작의도에 말려들 위험성이 큰 것으로 보이므로 좀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며 국민회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일련의 편지내용에 대한 실체적 진실 여부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임.

한편 북한은 안기부가 자신들의 공작에 말려들지 않자 金炳植 명의로 北京에 있는 금강산무역개발사장 박경윤에게 기자회견용 전송문을 보내 우리 언론을 상대로 또 다른 공작을 시도하고 있음.

안기부는 그동안 黃長燁 사건, 남파부부 간첩사건, 고영복 사건 등에서 보듯이 어떠한 對共사건에 대해서도 정치적 입장을 떠나 엄정하게 처리한다는 원칙을 지켜 왔는 바, 吳益濟 편지 사건에 있어서도 對共사안인 만큼 실체적 진실을 알기 위해 국민회의 측 사전 양해를 얻어 의문사항을 질의한 것이며, 앞으로 북한의 제2,3의 편지공작이 있을 경우 북한의 저의 파악에 주력하면서 對共차원에서 조사할 수밖에 없음을 밝힘.

따라서 국민회의는 북한의 편지공작에 대해 大選 득실 여부만을 따져 정보기관을 더 이상 매도하지 말 것과 안기부가 질의한 의혹부분에 대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답변해 줄 것을 재차 촉구하며, 언론도 민감한 對共사안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판단, 보도할 경우 결과적으로 북한의 對南 공작에 말려들 소지가 많은 만큼, 반드시 對共전문기관은 안기부와 협조하여 주실 것을 당부드림>


1971년 가을 도쿄의 金大中



金炳植과 金張洙 명의의 金大中 앞 두 편지의 핵심은 金炳植이 1971년 가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20만 달러가 든 트렁크를 金大中 당시 신민당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시기에 金大中씨가 과연 도쿄에 있었는지 알아보았다.

1980년 7월19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金大中씨를 조사하여 제3차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았다. 북한 정권의 조종을 받는 在日동포 인사들과 함께 反국가단체인 한민통을 만든 데 대한 조사였다. 신문조서에 이런 내용이 있다.

<―피의자는 金載華(김재화)의 사위 郭東儀(곽동의)에 대해 말하시오.

『제가 郭東儀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1971년 8월경 金相賢 의원으로부터입니다. 당시 金의원은 일본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고 해외교포문제연구소라는 연구소를 운영, 「在日韓國人」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民團 비주류파인 소위 베트콩파에서는 郭東儀가 조총련과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했습니다. 1971년 11월경 신병치료차 渡日, 東京에 체류하고 있을 때 舊민단 東京본부단장 鄭在俊이 저의 대통령 낙선 위로를 겸한 파티를 東京 신주쿠 소재 야키도리 집에서 열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 鄭在俊·裵東湖·趙活俊·양상기·유석준·김은택·김군부 등 민단 비주류인 베트콩파들이 참석했으며 郭東儀가 참석해 처음 인사를 했습니다. 1972년 2월 중순경 경제시찰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리니 마중 나온 성명미상의 駐日 한국대사관 직원이 민단 이야기 끝에 郭東儀는 조총련과 내통해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이란 말을 해준 일이 있습니다』

―피의자 진술에 의하면 郭東儀가 사상적으로 불순하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는데 郭東儀를 사상적으로 의심해 보지는 않았는지요.

『1971년 11월 중순경 저녁 때 그동안 자주 왕래하던 趙活俊(조활준)의 주선으로 긴자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金載華와 본인 셋이서 회식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본인이 「郭東儀에 대해서 사상을 의심하는 말이 많은데 사실이냐」고 했더니 金載華는 화를 내면서 「모략이다. 내 사위는 6·25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고 북송 때는 니가타에 가서 철로를 베고 누워 이를 저지하려고 투쟁한 일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식사 후 趙活俊에게 물었더니 「郭東儀에 대해서 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나의 의심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에 그 후부터는 郭東儀를 경계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간첩에 포섭되었다는 郭東儀

郭東儀씨는 金大中씨와 함께 韓民統(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만들 때 조직국장으로 일한 핵심 인물이었다. 1980년 駐日 한국대사관은 한민통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여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제출했는데 郭東儀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郭東儀는 광복 직후 남로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1948년 12월 남해군 인민위원장 박종환의 지령에 의해 밀항 도일했다. 郭東儀는 1960년경부터는 조총련으로부터 月 10만 엔의 보수를 받으며 민단 조직 와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 북한간첩 윤효동에게 포섭되어 북괴 공작선편으로 입북, 간첩 교육과 민단 파괴, 對南공작지령을 받은 후 동년 5월에 귀환한 그는 조총련 부의장 金炳植으로부터 민단 와해 및 對南공작 자금으로 5000만 엔을 받았다.

郭東儀는 1973년 7월13일부터 8월4일 사이 배동호, 趙活俊, 김종충 등을 조종하여 金大中과 한민통 일본본부를 결성하도록 하고 자신이 同 조직국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8월13일 조총련 중앙본부로부터, 그간 한민통이 조총련의 의도대로 효과적인 反韓활동을 전개하여 왔고, 북괴가 의도하는 민주 민족통일 해외 한국인 연합을 결성하여 연대 투쟁 체제를 구축하는 데 공헌한 代價로 특별자금 5000만 엔을 받은 사실이 있음>

위의 보고서에 따르면 郭은 金炳植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고, 金炳植의 편지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에 金大中씨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金大中씨의 진술에 의하면 (金炳植이 그에게 돈을 주었다고 주장한) 1971년 가을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북한 측 지령을 받고 있던 金載華, 郭東儀 등 문제 인사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때 그가 만났다는 金載華·郭東儀·趙活俊·鄭在俊씨 등은 1973년 여름에 한민통을 결성할 때 핵심 요원이 된다. 우리 대법원이 反국가단체라고 규정한 한민통의 인맥은 1971년 가을에 金大中씨와 연결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무렵에 金大中씨가 조총련의 제2인자이자 동향 인물인 金炳植과 접촉이 있었는가의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 金炳植이 풍부한 자금을 만지고 있었다는 추정은 가능하다.

1997년 12월18일자 黃長燁씨의 金大中 관련 발언 안기부 보고서에서 보고서 작성자는, 金日成 측이 金大中씨한테 두 군데로 돈을 주었다는 黃長燁씨의 발언에다가, 그 두 군데가 북한 측과 조총련으로 추정된다는 注를 달아 놓고 있다.


裵東湖 돈을 받았다고 시인한 金大中

중요한 것은, 金大中씨가 북한 측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는가이다. 돈이란 것은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에서 오고 가는 것이다.

특히 발각될 때 重刑이 예상되는, 반국가단체로부터 정치인이 돈을 받는다는 것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은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설정이 이뤄진 다음에나 가능하다. 黃長燁씨의 발언, 그 진실성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북한 측(조총련 포함)과 金大中씨 측의 관련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金大中씨와 裵東湖·郭東儀 등 북한공작원들이 조직한 反국가단체 한민통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이 분기점임을 알 수 있다. 1980년에 駐日 한국대사관이 작성한 한민통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郭東儀는 1970년 4월경 소위 「민단유지간담회」 회원 중 북괴 간첩인 尹孝同(윤효동: 후에 자수하여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했음. 그의 증언으로 인해 韓民統이 反국가단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음-편집자 注)의 안내로 北海道 하코다데 해안에서 북괴공작원 편으로 入北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郭東儀는 「공산혁명에 관한 정치학습과 간첩 교양 및 對南공작 지령을 받고 同年 5월경 歸日하여 일본內 북괴 對南적화전략기지 조성을 위한 민단 파괴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70년 11월경 배동호, 郭東儀 등은 東京 우에노 소재 다카라 호텔에서 한창규(48세) 등 8명의 민단유지간담회 간부 학습회를 열어 북괴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의 金日成 교시를 학습하면서 남조선의 인민 민주주의 혁명 정권을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민단 조직원 중 反정부·反민단 인물을 규합, 혁명적 단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강력히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1980년 7월18일, 피의자 金大中씨에 대한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신문 내용에 따르면 북한 측의 조종을 받는 裵東湖는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 출마 이전에 金大中씨와 접촉했다.

<―피의자(金大中)가 裵東湖를 알게 된 경위를 말하시오.

『제가 裵東湖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71년 1월 하순경입니다. 그때 본인은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고 일본과 미국의 정계 시찰차 출국, 일본 東京 소재 데이고쿠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마침 故 柳珍山(유진산)·梁一東(양일동)씨도 그 호텔에 투숙하고 있어서 그들과 자주 만났는데, 裵東湖가 그들을 만났러 왔을 때 梁씨의 소개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渡日 때마다 만나 서로 이야기하고 친숙히 지내고 있습니다』

―피의자는 裵東湖를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받았나요.

『裵東湖는 경상도 출신으로 金載華 밑에서 民團 사무총장을 지냈고, 당시는 兪石濬(유석준)을 民團 중앙본부 단장으로 당선시키려 적극 협조했으나 실패, 民團 非주류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피의자는 裵東湖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

『梁一東씨의 소개로 알게 된 후 柳珍山·梁一東씨와 만나는 자리에서 수차 만났는데, 제가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숙박비를 계산하려 했더니 당시 숙박비 30만 엔 정도를 裵東湖가 이미 계산했습니다. 저의 미국 여비에 보태쓰라고 하면서 梁一東씨의 동생 양삼영이 미화 1만 달러를 주기에 그중 미화 3000달러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피의자가 韓民統 일본본부를 결성하기 이전에 裵東湖는 어떤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나요.

『그 사람은 前에 民團 중앙총본부 의장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들었으나 1971년 7월경 民團에서 제명된 후에는 民團에서 이탈한 교포들을 모아 民團 非주류파에 속하는 민족통일협의회를 구성했습니다. 그 의장직에 있으면서 기관지인 「민족시보」 편집에 관한 실무감독을 하는 등 주로 反民團, 反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피의자는 朝總聯과 연계 등 裵東湖의 사상성분에 대해 의심해 본 일은 없나요.

『裵東湖는 民團에서 제명당했으며 1972년 2월경 民團 중앙위원이던 동향인 박성준으로부터 朝總聯 관련 인물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으며, 民團 사람들은 사상이 불순하다고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본인과 동향인이며 국민학교 동창생인 金鍾忠(김종충)에게 「사상성분에 관해 자세한 것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더니 金鍾忠의 말이 「民團 세력 다툼에 문제가 있어 그를 불순하다고 밀어붙일 뿐이지 사상성분에는 의심할 데가 없다」고 해 그런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1973년 7월13일 東京 소재 게이오 프라자 호텔에서 裵東湖를 만났을 때 「林昌榮(임창영) 때문에 혼나셨죠」 하기에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林昌榮으로부터 이북 간다는 전화가 와서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하기에 더욱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3월21일 본인은 民團 非주류들에게 民團 복귀를 요청했는데, 결과는 실패했지만 裵東湖가 東京 상업은행 이사장 허필석씨의 주선으로 시도해 보았다고 본인에게 보고한 점 등으로 미루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가 경영하는 「민족시보」가 너무 反정부적이고 북한에 대해선 비판이 없다는 것이 본인의 불만이므로 趙活俊씨를 통해 충고한 사실이 있습니다. 통일정책에 있어서도 그는 본인의 공화국 연방제를 지지했으나 통일 후 중립을 주장해 그 점은 결론을 보류해 두었습니다』>


「金大中에게 간 것은 朝總聯 돈임이 확실」

裵東湖씨는 郭東儀·金載華와 함께 북한 측의 지령을 받아 韓民統을 조직한 핵심 인물이다. 이런 인물과 金大中씨는 숙박비를 지원받는 관계가 된 것이다. 上記 駐日 한국대사관 보고서는 朝總聯이 韓民統에 지원한 자금의 내역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朝總聯은 한민통에 反韓 데모 동원, 反韓 집회 개최, 북괴 및 朝總聯 선전 활동 등 비용으로 활동 高潮期(고조기)인 1973년 8월~1975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최성황기인 1976년 1월~1977년 12월은 매월 1000만 엔, 퇴조기인 1978년 1월~1979년 7월은 매월 500만~1000만 엔, 再고조기인 1979년 8월~1980년 2월은 매월 1000만 엔 등을 지원하여 왔음」

「1971년 3월25일 郭東儀는 朝總聯 중앙위원회 부의장 金炳植으로부터 민단 와해 공작 및 對南공작 사업 자금 5000만 엔을 받았다는 확실한 첩보가 있음」

「金大中에 대하여는 1972년 10월~1973년 8월 베트콩파인 金鍾忠이 金大中의 한민통 조직 등 활동비조로 10여 차례에 걸쳐서 약 1000만 엔, 裵東湖가 金大中의 滯日 호텔비 및 한민통 조직 자금 보조비 명목으로 5차례에 걸쳐 500만 엔, 渡美 여비 1회 2000달러, 정재준 등 베트콩파 사업가들이 金大中의 체류비, 활동비, 여비 등 명목으로 4차에 걸쳐 약 2000만 엔 등을 제공하여 金大中은 同자금으로 일본 한민통 및 미국 한민통 조직 자금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그중 金鍾忠 및 裵東湖가 金大中에게 제공한 자금은 同人 등이 특별한 사업이나 수입원이 없는 자들인 것으로 보아 朝總聯에서 지원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음」

1971년 무렵부터 金大中씨와 裵東湖, 郭東儀 등 북한 측 공작원들 사이가 친밀해졌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자료로서 확인된다. 1971년 가을 金炳植이 金大中씨에게 돈을 주었다는 편지 내용에 대하여 기자가 만난 복수의 안기부 前 對北공작 담당자와 對共 수사관 출신들은, 『편지 내용은 사실일 것이다. 金大中 후보를 협박하려고 보낸 편지로 보이는데, 사실이라야 협박이 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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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核개발자금을 댔다는 물증


對北불법송금 特檢의 수사자료: 현대와 국정원 시켜 김정일의 비자금 계좌로 송금한 사실 확인.
趙甲濟

對北불법송금 特檢의 수사자료를 보면, 송금용 외화의 환전과 송금업무는 국정원이 全擔(전담)했다. 간첩을 잡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국정원이 간첩을 내려보내는 김정일의 對南공작기관 비밀계좌로 불법자금을 보냈다는 이 반역적 행위로 해서 국정원은 넋(魂)이 나간 조직이 되었다. 외경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국정원이 지금처럼 경멸의 대상이 된 것도 이 사건에 기인한다. 수사기록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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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장이 노무현에게 또 속지 않으려면


그는 거듭 나야 한다. 인간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김정일의 핵실험은 그의 무덤이 될 것이다.
趙甲濟

오늘(10월9일)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북한 핵실험에 대해 밝힌 대책이란 것이 애매하다. 지금까지의 對北정책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단호하게 나가야 힘이 생기는데 그런 인정은 자기부정이 되니까 적당히 덮고 논리를 전개하려니까 말이 엉키는 것이다. 그래도 의미 있는 발언은 있었다.

'다만 포용정책이라는 것이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효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거세게 제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정책상황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는 점은 객관적인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후에도 평화적 해결, 그리고 대화에 의한 해결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인식변화를 盧대통령이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지켜보아야 국민들은 속지 않게 된다. 盧대통령의 말을 믿으면 절대로 안된다. 그의 실천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너무나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니 여기에 맞서다간 날아가 버린다는 위기감에서 일단 피해보자는 뜻에서 한 변명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안이한 자세로써 북한의 핵실험 사태를 대하다가는 정말로 날아가버리는 낙엽 신세가 될 듯하다.

그는 우선 인책 인사를 해야 한다.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외교부장관, 청와대의 안보관련 참모들을 잘라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386 주사파, 즉 '김정일추종공산주의운동권 출신들'을 내보내야 한다. 이들이 국민들을 저주하고 미국을 공격하면서 對北굴종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핵실험은 그동안 애국세력들이 주장했던 분석과 걱정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걱정이 많은 국민들을 상대로 별놈이니 냉전守舊세력이라고 욕을 퍼부었던 盧대통령과 김근태 열린당 의장은 對국민사과부터 해야 된다. 이건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일 것이다. 이런 사과가 있어야 그에 대한 작은 신뢰나마 회복될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국민들의 不信은 그가 김정일의 對南공작에 적극 호응한 배경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핵개발,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는 김정일 정권의 4대 對南적화전략이었다. 盧정권은 전폭적으로 이 4大전략을 지원하고 동조했다. 반역정권이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말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을 설득할 순 없다. 노무현의 과거정리가 필요하다.

내일 당장 그는 금강산관광부터 중단시켜야 한다. 개성공단사업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국정원, 검찰, 경찰, 機務司에 특별지시를 내려 反국가사범과 간첩 등 내부의 敵들에 대한 감시와 수사에 전력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盧대통령 자신에 대한 의심을 다소나마 완화시켜줄 것이다.

물론 韓美연합사 해체 논의도 중단해야 한다. 그는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韓美연합사 해체는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이 생각을 견지한다면 盧대통령은 김정일의 핵실험을 촉구하고 격려했다는 의심을 면할 수 없다.

이제 盧대통령은 오늘의 자기비판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盧대통령의 말을 믿는 국민들은 아주 적다. 그가 신용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北核문제는 안보문제에서 경제, 사회, 생존, 생활, 체제문제로 확대되면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다. 盧대통령은 위기의 모면이 아니라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거듭 나야 한다. 인간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김정일의 핵실험은 그의 무덤이 될 것이다.

핵실험은 김정일의 위기일 뿐 아니라 노무현의 危機이다. 위기속엔 언제든지 機會가 있다. 이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벌써 '利敵대통령 퇴진 촉구 1000만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대한민국 품안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시간이 중요하다. 조국은 영원히 배신자를 기다려주진 않는다.

추가: 위에서 소개된 그의 발언중 결론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후에도 평화적 해결, 그리고 대화에 의한 해결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본심일 듯하다. 즉 앞에 말한 對北강경론 같은 발언은 마지막의 이 말을 하기 위한 위장용이다. 좌회전을 감추기 위해서 우회전 깜박이를 켠 것이다. 盧정권이 從金세력과 어용언론의 지원을 받아 핵실험의 본질을 호도한 뒤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거짓말과 선동을 되풀이할 것이냐, 아니면 정말 달라질 것인가의 여부는 국민들이 하기 나름이다. 국민들이 궐기하여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회초리를 들어 매질을 해야만, 그리하여 '이대로 가다간 감옥이 아니라 그 이상의 장소에도 가겠구나'하는 自覺을 하도록 해야만 달라질 것이다. 좌경이념의 소유자는 절대로 설득을 통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압도적 힘이 들어가야 한다. 이 원리는 김정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핵실험을 해버린 김정일을 상대로 아직도 평화적 해결을 하겠다는 노무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양 쇼를 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기자회견 발언 발췌.

<다만 포용정책이라는 것이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효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거세게 제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이와 같은 정책상황이 그렇게 바뀌고 있다는 점은 객관적인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후에도 평화적 해결, 그리고 대화에 의한 해결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한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다 수용하고, 이렇게는 인제 해나갈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을 그렇게 말씀 드리고 구체적인 문제는 하나하나 조율된 그런 조치들을 해나갈 것입니다. 조율되지 않으면 감정적인 결정이 되고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효율성 있는 효과가 기대되는 조율된 형태를 해나갈 것입니다. 포괄적 접근방안을 한미간에 마련하고 중일간에도 협의하고 있었는데, 이 포괄적 접근방안에 대한 협의는 앞으로 상당히 내용이 현저히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포괄적 방안을 한국이 계속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포괄적 방안을 포함해서 한국이든 국제사회든 이 문제에 관련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강구하고 대처방안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 하나의 옵션으로 앞으로 변화돼 나갈 것입니다. 변화된 상태에서 관리돼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대북사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는데, 포괄적으로 말씀 드린 내용에서 그렇게 포함해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두마디 더 보태고 마치겠습니다. 현실적으로, 논리가 아니라 현실로서, 전 세계가 받아들이고 있는 국제 핵질서가 있고 그 핵질서 위에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평화의 질서가 있습니다. 이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아울러서 남북 간에 비핵화 협정을 위반하는, 협정을 아주 명백히 위반하는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당장의 안보의 위협은 아니라 할지라도 장기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안보불안을 야기하고, 나아가서는 어느 분이 질문하셨듯이 다른 국가들의 핵무장을 자극할 수도 있는, 장기적으로는 그와 같은 대단히 위험한 불장난을 한 것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고 현실의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성격에 걸맞는 우리 한국정부의 대응을 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께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은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증권시장은 아주 민감하게 움직입니다. 실질적인 위협 그 이상으로 여러 위협을 예상해서 행동을 예상해서 증폭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단지 단기간의 증권시장 뿐만 아니라 그 이후 경제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경제에 영향이 가장 적도록 차분하고 전략적으로 잘 조율된, 그러나 단호한 조치들을 취해 나감으로써 실제 이상의 불안이 부풀려진, 장래에 있어서는 심각한 위협이지만 단기적으로 당장의 안보위협의 성격으로 이해돼서 상황이 부풀려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서 관리해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서도 우리정부의 역량을 믿고, 노무현 정부이든 어느 정부이든 대한민국 정부면 그 정도의 상황을 관리할 역량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야 정치지도자들과 긴밀히 협의하겠습니다.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의 합리적 대응을 강구하겠습니다. 정부를 믿고 불안해하지 마시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안정된 생활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안보불감증을 걱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안보불감증도 곤란한 것이지만, 지나친 안보민감증도 위험한 것입니다. 경제에 영향 없도록 국민 모두가 협력해 나갈 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안정된 상황관리가 오히려 가능할 것입니다. 너무 큰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드리고 싶고 또 좀 협조해 주십사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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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김대중의 거짓말들


토씨만 빼곤 다 거짓말. 이 짧은 문장에 거짓말을 이렇게 많이 넣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지구상에 김정일과 김대중씨뿐일 것이다.
趙甲濟

人生말년에 들어서, 그것도 김정일의 핵실험을 前後하여 좌익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김대중씨는 며칠 전 목포에 가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사는 세상 만들었다. 과거 판문점에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했는데 이제는 핵실험 했다 해도 안심하고 산다. 남북교류를 통해 우리가 정치경제적으로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이 짧은 문장에 거짓말을 이렇게 많이 넣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지구상에 김정일과 김대중씨뿐일 것이다.
첫째,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책임자가 남북관계를 개선했다고 주장한다. 간첩을 보내고 서해상에서 두 차례 도발하고 한국을 겨냥한 핵실험을 하고 김대중씨의 訪北마저 불허한 북한정권을 놓고서 개선이란 말을 쓴다면 김대중씨는 노예근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노예는 주인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도 죽이지만 않으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과거 판문점에서 총소리만 나도 피란갈 준비를 했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다. 1976년 도끼만행 때,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때 국민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一戰不辭의 정신으로 대응했다. 그때 도대체 누가 피란 갈 준비를 했단 말인가? 김대중 본인이 그랬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셋째, 핵실험을 해도 안심하고 산다는 말은 김대중類의 從金세력에게만 해당된다. 국제깡패가 핵무기를 들었는데 한국인이 안심하고 산다니? 안심하고 산다는 인간들은 반역자들, 정신차려야 할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이 필요한 인간들이지 정상적인 국민들은 아니다. 김대중씨는 非정상적 국민들만 국민들로 보이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김정일의 핵무장을 기필코 無力化시키겠다는 애국시민들은 국민들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일부 국민들이 안심하고 사는 이유는 김대중씨 덕분이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이 구축한 韓美동맹과 국군의 對北억지력 때문이다. 김대중씨가 이 對北억지력을 무너뜨리려고 노심초사했던 것을 국민이 알고 세계가 알고 김정일이 안다.

넷째, 북한, 즉 김정일이 한국에 대해 감사하도록 만들었단다. 감사의 표시가 핵실험이고 미사일 발사인가? 김대중씨가 현대그룹을 앞세워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계좌로 한국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4억5000만 달러를 보내 핵개발을 도운 데 대해서 김정일이 감사했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김대중씨는 주인인 김정일에게 얻어맞을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변태적 성격의 노예인가?

연설 내용을 토씨만 빼곤 모두 거짓말로 채울 수 있는 김대중씨에겐 기네스 북이 새로운 종목을 하나 만들어주어야겠다.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란 종목을 신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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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핵실험해도 안심하고 산다”
햇볕정책 논란중 목포간 DJ… 환영대회 3천명 몰려


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이 8년 만에 목포를 찾았다. 시내 곳곳에는 환영 현수막이 붙었고, 가는 곳마다 환영 인파에 둘러싸였다. 호남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방문이었다.

28일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엔 시민 3000여명이 모였다. 열린우리당 천정배·김원웅·유선호·우윤근·이상경 의원과 민주당 한화갑·이낙연·최인기·이상열·채일병 의원도 참석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인사말에서 “죽을 고비 맞았을 때, 여기서 굴복하면 우리 국민과 차별받는 고향분이 얼마나 좌절할까 생각했다”며 “대통령, 노벨평화상 등 모든 영광을 전라도의 여러분께 바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안심하고 사는 세상 만들었다. 과거 판문점에 총소리만 나도 피란 갈 준비했는데 이제는 핵실험 했다 해도 안심하고 산다. 남북교류를 통해 우리가 정치경제적으로 북한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정치를 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민족 화해협력에 헌신할 것”이라며, 미국이 한국의 참여를 요구하는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에 대해 “한반도 주변에서 했다가는 전쟁이 되고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고 반대했다. 김 전 대통령은 시민들과 함께 ‘고향의 봄’ ‘목포의 눈물’ 노래를 불렀고, 청중 중 일부는 눈물을 흘렸다. 저녁에는 환영 불꽃놀이 행사가 열렸다.


환영 만찬에서 열린우리당 전남도당위원장 유선호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지지자의 동의 없이 세력이 나뉘어서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이 잘못된 것이란 지적을 했다”며 “이런 지적을 들으면서 (민주당과) 연대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유 의원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열린우리당에서 제명당하고 민주당으로 빨리 오라”며 농담을 던졌다.


김 전 대통령은 29일엔 목포 평화의 광장과 유달산 공원에서 차에서 내려 환영 나온 시민들과 직접 악수를 하고 기념촬영도 했다. 비서진은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오시라”며 김 전 대통령과의 사진 촬영을 권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전남 도청을 방문했을 때는 방명록에 ‘무호남(無湖南) 무국가(無國家)’라고 적었다가, 잠시 후 방명록을 다시 가져오라고 한 뒤 ‘이 충무공 왈(曰)’이란 말을 추가하기도 했다.



목포=황대진기자 djhwang@chosun.com
김성현기자 s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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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또 좌회전 하기 전 우회전 깜박이 켜


정치 일체 안한다면서 정치 발언
趙甲濟

동아닷컴 보도에 따르면 어제 목포를 방문하여 연설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한반도 주변에서 실시했다가는 무력대결과 전쟁이 일어날수 있다'며 '정부는 한반도 평화에 역행하는 일이 없도록 PSI 참여에 신중한 태도를 취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자신은 '정치에 일체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부의 정책수립에 압력이 되는 말을 해놓고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과 거짓말은 다르다'는 그의 궤변과 수많은 불출마 선언 번복을 참고로 하여 그의 신뢰성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는 좌회전하기 전 우회전 깜박이를 켠다. 그는 요사이 자신의 本色을 드러내는 데 열심이다. 좌익으로서의 본색, 습관성 거짓말家로서의 본색이다. 스스로 자신의 神話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言行엔 긍정적 의미도 있다. 민주사회에선 신화와 우상이 적을수록 좋다.
[ 2006-10-29, 06:16 ] 조회수 : 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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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책임론 주장...북핵은 어린애 장난감?

◎『북조선과 전쟁을 벌이면 한국만 파괴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과 미국 본토가 핵을 맞아 잿더미가 될 것이다』

金成昱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북한 핵무장의 또 다른 主책임자로 거론되는 인물이 김대중 前 대통령이다.
김전 대통령은 퇴임 후 연설에서 『북한의 핵무기는 미국 앞에서 어린애 장난감』이라는 표현이 관용어처럼 반복됐다.

김 前대통령은 북한 핵실험 직전인 9월28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미국의 네오콘과 일본의 대북 강경파들이 북한을 악당으로 만들어 MD문제와 일본의 재무장을 추구하고 있다』며 『그들은 북한이 핵무기 1,2개를 만들었다는 것을 오히려 잘됐다고 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어린애 장난감 수준』이라고 말했다.

9월14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창간호 기념인터뷰에서도 『북한이 핵, 미사일을 가져봤자 미국 앞에서는 어린애 장난감이다. 미국 네오콘들이 북핵을 겁내지도 않으면서 미래의 가상 적으로 여기는 중국을 겨냥한 군비 확장의 명분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해 6월9일 한국일보 창간 51주년 인터뷰에서는 『또 다른 공화당 강경파는 북한이라는 악당이 필요한 듯하다』며 『그 사람들은 이 일로 위기를 고조시켜 군사력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그 목적은 북한보다 다른데 있는 것』이라고 했다.

모두 「북한의 핵무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 대한 위협이며 하찮은 것인데 미국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는 주장들이다.

<北核은 공격용 아닌 협상용?>

김 前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기가 攻擊用이 아닌 協商用으로서 위협이 아니라는 식의 궤변도 주장했다.

그는 2004년 10월6일 경향신문 대담에서 『내가 볼 때 핵은 수단이고 목적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미국 핵 앞에서 북한의 핵은 장난감도 아니』라며 『어떡하든지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게 북한의 철두철미한 정책이고 소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같은 해 5월18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도 『북한의 핵개발이 공격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한도 미국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며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핵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협상용이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金正日의 非公式 대변인으로 불리는 日本「조선미국평화센터」 소장 김명철은 2000년 「金正日의 통일전략」이라는 책을 썼다.

김명철은 이 책에서 『제2 조선전쟁이 터지면 朝美간에 쏘아대는 탄도미사일이 마구 날아다니게 되어 그 순간에 전면적 핵전쟁이 되어 美 본토가 불바다가 될 것』이며 『북조선과 전쟁을 벌이면 한국만 파괴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과 미국 본토가 핵을 맞아 잿더미가 될 것이다』고 협박하고 있다.

金正日은 핵무기로 전쟁을 일으켜 한국 파괴를 전제하고 있는데, 전직 軍통수권자는 敵將(적장)의 의중이 平和(평화)에 있다며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김 前 대통령은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핵실험 가능성도 일축해왔다. 그는 지난 해 5월20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地下핵실험설에 대해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며 미국에 대해서도 다시 북한과의 직접대화를 촉구했다.

2004년 6월15일 MBC와의 인터뷰에서도 북핵문제와 관련, 『미국은,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핵까지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증거를 내놔야할 것』이라며 미국에 항의했다.

김 前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작정한 듯 햇볕정책 死守에 나서고 있다. 그는 10월11일 전남대 강연장에서 『햇볕정책이 무슨 잘못이냐』며 이렇게 성토했다.

『대북 포용정책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닌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북한의 핵 보유를 惡意的(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는 것은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미국을 비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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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앙사설: 김대중 직격 비판


햇볕정책 목숨보다 나라 운명 걱정해야
趙甲濟

[조선일보 사설] 햇볕정책 목숨보다 나라 운명 걱정해야


김대중 前전 대통령은 11일 전남대 강연에서 “햇볕정책이 실패했다, 포용정책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하는데 햇볕정책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요즘 해괴한 이론이 돌아다닌다”면서 “햇볕정책은 죄가 없는데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은 남북 간에 분명히 성공했고 햇볕정책은 더 성공할 수 있는데 미북관계 때문에 못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했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8년 동안 8조원 상당의 지원을 받고 정상회담의 대가로 4억5000만 달러의 현찰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이 막대한 돈이 어디다 쓰였는지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 돈이 우유가 없어 굶어죽다시피한 皮骨피골이 상접해진 북한 어린이를 구하는 데 들어가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중국 공안원의 눈을 피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먹을 것을 구걸하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북한 여성들의 지옥 같은 생활을 구출하는데 쓰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대북 포용정책, 대북 햇볕정책이란 이름으로 앞으로 주고 뒤로 건넸던 이 막대한 돈이 북한 주민의 삶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쓰여지지 않았다면 어디로 갔겠는가. 물을 것도 없이 경애하는 지도자 동무에게 돌아간 것이다. 경애하는 지도자가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북한 주민의 民生민생이 아니라 先軍선군정치를 위한 軍資金군자금 마련이다. 先軍선군정치를 통해 지도자 동무를 옹위하고 세습체제를 보위하는 결정적 수단이 核핵무기 개발이다. 햇볕정책이 실어 나른 그 엄청난 돈 포대가 이번 핵실험을 준비하는 데 들어간 것이다. 대북 포용정책과 대북 햇볕정책의 受惠者수혜자는 북한 동포가 아니라 북한의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권력집단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당사자인 전직 대통령이 “북한이 햇볕정책 때문에 핵개발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이 성공했다는 근거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 등 지난 8년간 남북교류가 급격히 늘어 한반도가 안정됐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한 마당에 태연히 금강산 관광버스에 몸을 실은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은 햇볕정책 8년에 대한민국 국민의 안보의식이 그렇게까지 마비돼 버렸다는 증거일 따름이다. 세계가 이런 대한민국의 奇異기이한 모습에 혀를 차고 있지 않은가.


김 전 대통령은 북의 핵실험 이유에 대해 “미국이 북한을 못살게 하니까 북한이 발악적 행동을 하게 된다”고 했다. 북이 핵개발에 나선 것은 20여 년 전부터다. 북은 1994년부터 한·미·일로부터 경수로와 重油중유를 제공받고도 몰래 핵개발을 계속했다. 북은 작년에 노무현 정부가 대규모 對北대북 送電송전을 약속하고 올 초엔 대통령이 나서 “물적·제도적 지원은 조건없이 하겠다”고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左派좌파 시민단체처럼 핵실험의 원인을 미국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그 내용뿐 아니라 때가 너무나 빗나갔다. 북핵 실험의 後暴風후폭풍이 몰려오는 지금 국가 지도자라면 자신의 商標상표인 햇볕정책의 목숨보다는 4800만 국민의 안위를 더 염려하는 것이 마땅한 처신이 아니겠는가.












중앙일보 사설/ DJ `미국이 못살게 굴어서 핵개발했다`니

북한이 핵실험을 한 마당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선전하고 다니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포기하거나 수정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어제는 전남대에서 강연까지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햇볕정책은 나름대로 한 유용한 방법일 수 있었겠지만 북한의 핵무기 실험으로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운 정책이 돼 버렸다. 그런데 다시 이를 고집하는 것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이 남한의 햇볕정책 때문에 핵 개발을 하겠다고 한 적 없다. 미국이 못살게 굴어서, 살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핵 개발을 한다고 그런다'고 했다. 남북 관계는 성공했는데 북.미 관계가 실패해 핵 문제가 악화됐다는 말도 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건 결국 미국 책임이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살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이다.

햇볕정책을 추진한 지난 8년간 정부가 북한에 갖다 준 돈만 4조5000억원에 이른다. 마카오의 방코델타에 2400만 달러가 묶였다고 펄쩍 뛰고 있는 북한에 남쪽에서 지원한 자금이 어떤 기여를 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북한의 핵 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 제재를 계속하면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한다'고 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북한의 핵 보유를 선의로 해석하는 것인지, 핵 무기 보유를 인정하자는 말인지 너무 혼란스럽다.

대북 포용정책이 성공하려면 채찍과 당근이 함께 있어야 한다. 채찍 없는 당근은 이미 실패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거부해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해도, 미사일을 발사해도, 심지어 핵무기 실험을 해도 당근만 준다면 북한이 왜 정책을 바꾸겠는가. '북한 핵실험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해도 구체적 행동이 따르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발언이야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적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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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남대 강연에서 햇볕정책 정당성 강변


북한의 북핵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

두 번째로는 북한의 핵 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대북 포옹정책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닌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북핵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김대중

『민 주 소 식』

<<광주=유종필 대변인>>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늘(10.11) 오전 10시 30분 광주 전남대학교 대강당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 후 김 전 대통령은 전남대학교 재학생 5명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이에 답했다.

■ 김대중 전 대통령 강연전문

존경하는 강정채 총장, 교수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또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여러분!

오늘 민주 한국의 자랑인 전남대학교가 저를 강연에 초청해 주시고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해 주신 데 대해서 큰 영광으로 생각하며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광주와 전남대학교는 이 나라 민주항쟁의 상징으로서 대한민국 역사가 계속 되는 한 그 영광이 영원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이 자리를 빌려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에 대해서 몇 말씀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9일 돌연 북한에서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선언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마침내 북한이 또 한 번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북한의 이번 핵 실험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번 핵 실험으로 북한은 민족의 운명을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북한은 1991년에 체결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정면으로 위배했습니다. 미일 강경세력을 크게 고무했습니다. 북한은 이러한 핵 실험을 통해서 북미간의 직접대화를 하고자 하지만 그러한 벼랑 끝 전술로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은 핵 무장을 단념해야 합니다. 미국의 거대한 핵전력 앞에 별 성과도 얻지 못하면서 미일의 강경정책만 부추기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합니다. 핵무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 대가로 북미 양자간의 직접대화를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미국에 대해서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북한의 핵 실험은 북한의 NPT 탈퇴, IAEA 요원 추방, 미북간 제네바 합의의 파기와 함께, 미국의 대북 핵 정책의 실패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994년 이래 주고받는 일괄타결을 주장했습니다. 클린턴 정권은 이를 적극 수용함으로서 거의 성공의 단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부시 정권은 이를 외면하다가 오늘의 실패를 가져 온 것입니다. 이제 미국은 핵을 갖게 된 북한과 어떻게 대화할 것입니까?

하나는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인데, 미국은 현재 그러할 능력이 충분치 않으며, 또한 우리는 이를 절대 반대합니다. 한반도에서의 핵전쟁은 7천만 민족의 공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북한의 핵 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미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미국은 ‘악의 축’인 북한과 대화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나 역사적 사실로 보나 정당하지 않습니다.

대화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위해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사악하다는 어떠한 정권과도 대화하는 것입니다. 닉슨은 ‘전쟁 범죄자’라고 낙인찍힌 중국의 모택동을 찾아가서 대화하였습니다. 레이건은 ‘악마의 제국’이라고 지칭하던 소련과 대화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 중에도 북한과 대화하여 휴전협정을 맺게 했습니다. 오늘의 평화는 그 덕입니다.

대화를 위해서는 미국 의회에서 결정한 대북정책조정관을 조속히 임명해서 대북정책을 재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의 정권교체를 노릴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협상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북한 핵을 제거하고 한반도 비핵화에 동참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도 한반도 비핵화에는 동조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의 사태를 해결하는 핵심은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북한 사이에 주고받는 협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도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현명한 판단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반도에서의 햇볕정책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결과로 볼 때 햇볕정책은 남북간에는 성공한 것입니다. 다만, 북미관계가 장애가 되어서 완전한 성공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미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무엇보다도 긴장이 완화되었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지금처럼 북한이 핵 실험을 했다하면 공포 분위기 속에 피난하는 소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 아주 안정되어 있습니다. 국제적인 신용기관도 북한 핵 실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안정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남북간에는 이외에도 1만 3천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습니다. ‘국민의 정부’ 이전에는 50년 동안에 겨우 200명이 만났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남한에 대한 적개심이 우호와 선망과 감사의 심정으로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130만 명이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습니다. 2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남북을 왕래하고 있습니다. 개성공단이 열렸고 앞으로 35만 명의 북한 노동자가 그곳에서 일하게 될 것입니다. 휴전선의 상호비방방송이 중단되었습니다.

경의선과 동해선의 철도가 연결되었고 이제 개통만 남았습니다. 이 철도가 압록강을 넘어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유럽으로 연결되면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고,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될 것입니다. 엄청난 부와 발전을 우리나라에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압록강의 기적’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북도 좋고 남도 좋은 윈윈(win-win)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다음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4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시아 시대의 중심이 되는 것은 한,중,일 동북아시아 3국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 등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조선왕조 말엽에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할 때도 미,일,중,러 등 4개국이 우리 운명을 좌우했습니다. 일청전쟁, 일러전쟁,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에 네 나라가 관여했습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미국 예일 대학의 폴 케네디 교수는 “한국은 네 마리의 코끼리 다리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이다. 이 사이를 잘 헤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35년 전 1971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미,일,중,소 4대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보장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4대국에 남북을 합친 6자회담이 상설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4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위상으로 보아서 외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교적으로 4대국을 잘 활용하면 우리는 안정과 번영의 큰 성공을 이룩할 것입니다. 조선왕조 말엽과 같이 이에 실패하면 큰 불행이 다시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외교의 중요성을 무엇보다도 크게 생각하고 우리 전체가 외교 잘하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4대국 모두가 우호와 친선, 공동 승리의 협력관계를 실현시켜 나가야 합니다. 단 한 나라와도 적대하면 그 나라가 우리나라를 도와줄 힘은 없어도 해코지할 힘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외교를 잘하는 것은 굴종이 아닙니다. 작은 나라가 대국 사이에서 살아나고 번영을 누리는 하나의 예술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러한 일을 해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외교 잘하는 민족이 됩시다.

이제 4대국별로 우리의 대응할 길을 말씀해보겠습니다.

먼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은 우리 안보에 가장 중요한 나라이고, 경제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튼튼한 방위동맹을 유지해 나가는 한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4대국 중에 한반도에 대해서 영토적 야심을 갖지 않았던 나라는 미국뿐입니다.

현 단계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맹방은 미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미국이 중요한 만큼 미국의 정책 여하는 우리의 운명에 지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한국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를 바랍니다. 한반도는 우리가 죽고 사는 터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주장은 절대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합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한국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한반도 문제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처리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에는 일본에 대해서 몇 마디 하겠습니다. 일본은 우리의 경제와 안보를 위해서 중요합니다. 특히 안보에 있어서는 미,일동맹이 한반도에서의 안보를 뒷받침하고 있는 이상 일본 역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걱정거리는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을 부인하는 평화 헌법을 개정하려 하고 있고, 한반도 침략과 태평양 전쟁의 책임을 부인하는 새로운 국가주의적 교육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신내각의 출범과 더불어 한층 더 강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본은 지금 한국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대일 비판의 소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은 2차대전 당시 공동의 침략자였던 독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독일은 침략전쟁의 잘못을 철저히 인정하고 충분한 사과와 배상을 했습니다. 독일은 침략전쟁의 진실에 대해서 어린 세대부터 교육시켜 왔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반성과 시정의 태도는 주변 각국의 신뢰를 얻게 되어 독일 통일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일본은 이대로 가면 아시아의 나라와 큰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다음은 중국에 대해서 몇 마디 하겠습니다. 중국은 우리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이며,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의 핵 개발을 억제하는데 있어서도 상당한 협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21세기의 경제를 제패하는 패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국은 1820년경 당시 전 세계 GDP 중에서 영국이 5%, 미국이 1%일 때, 27%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미국과 일본 일부에서는 공동으로 중국을 봉쇄하려 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단견입니다. 중국을 봉쇄하면 봉쇄할수록 중국 군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가 크게 일어나서 지금 모처럼 개혁 개방의 흐름 속에 일고 있는 민주화의 가능성을 말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긴장은 크게 고조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러시아는 이제 급속히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에는 석유, 가스 등 기타 지하자원과 수산자원이 풍부하게 있습니다. 이제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종단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해서 서부 유럽까지 가는 철도의 주요 선로국가로서의 가치도 매우 큽니다.

‘철의 실크로드’의 개통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육로로 유라시아 대륙과 유럽에 진출해서 큰 경제적 성공을 이룩하는 핵심적인 수단입니다. 따라서 러시아의 중요성도 우리는 크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러시아는 6자회담의 일원으로서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을 위한 중요한 파트너이기도 합니다. ‘압록강의 기적’은 러시아의 협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일,중,러 4대국을 잘 활용하면 우리의 안전을 성공적으로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4대 강국과 경제협력을 증진시키면 우리는 21세기 경제적 선진국의 중추가 될 것입니다. 4대국 외교는 그토록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4대국의 협력 속에 평화적인 통일을 이룩하면, 한국은 4대국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궁극적으로는 중립적 위치를 취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나 4대국 각 나라를 위해서나 현명한 조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행동하는 양심’이 되십시오. 우리의 마음속에는 남을 나와 똑같이 사랑하는 천사가 있고, 나만 생각하며 남을 해코지하고자 하는 악마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천사가 이기기도 하고 악마가 이기기도 합니다. 천사가 이기게 하기 위해서는 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 형제, 아내, 자식, 친구, 사회, 국민들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웃 사랑에 치중하는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랐든 오르지 못했든, 부자가 되었든 못되었든, 오래 살았든 못살았든, 인생의 삶에 성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을 간직하십시오. ‘무엇이 옳으냐. 무엇을 해야 하느냐’하는 원리 원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판단하되, 이를 실천하는데 있어서는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돈벌이 하는데 지혜를 발휘하듯이 능숙한 실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겸비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길입니다.

셋째, 모든 일을 결정할 때는 세 번 생각하십시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직장에 취직할 때 먼저 어느 직장이 좋은지 선택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거기에 문제점이 없는가, 내게 정말로 적합한가 하는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작은 문제점이 있다하더라도 그 직장을 택하겠다고 하든가, 문제점이 너무 크니까 포기하겠다든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렇게 논리학의 변증법의 정반합과 같이 세 번 생각하게 되면 대부분의 일에 있어서는 실수 없이 성공적으로 처리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외교하는 국민이 되십시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서 외교가 생명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외교에 관심이 너무 적습니다. 성질이 급해서 외교를 그릇 칠 수도 있습니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외교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 주위에 있는 외국인부터 사귀기 시작하십시오. 가능한 한 세계 여러 나라를 자주 다니십시오. 한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벗들이 많이 생기도록 4천 7백만 전 국민이 외교 국민이 되어야 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는 민족주의 시대였지만, 21세기는 세계주의 시대입니다. 우리 모두가 세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여러분의 선배들은 오늘의 민주주의와 국가적 번영, 그리고 한류의 세계적 진출을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국은 이대로 가면 단군 이래 처음으로 세계 속에서 우뚝 서는 큰 봉우리가 될 것입니다. 선배들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사랑하는 국민을 위해서도 여러분은 이러한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 말합니다. 21세기는 지식기반과 교육수준이 뛰어난 한국의 세기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21세기의 승자가 되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민족의 통일과 발전의 일꾼이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다음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전남대 학생 5명의 일문일답 내용

질문 : 지난 9일 북한의 핵실험 이후 한반도의 위기설이 제기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대북 포용정책의 수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대북 포용정책의 수정과 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 : 대북 포옹정책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닌다. 금강산 관광도 개성공단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북핵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 길을 열어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스스로 없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흔들면 바른 정책을 할 수 없다.

햇볕정책은 남북간에는 성공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반성하지만 기여한 일은 정당하게 평가 받아야 한다. 핵 문제의 책임이 북한과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 책임 없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햇볕정책은 그것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북미관계 때문에 장애가 됐다. 미국과 북한이 책임지고 풀어야 한다.

질문 : 북한 핵실험 발표 이후 UN 안정보장이사회는 긴급회의 열어 UN헌장 7장을 통한 대북제재안을 집중 논의하고 있다. UN헌장 7장은 경제제재는 물론 군사적 제제를 가능케 하는 국제법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대북제재안이 통과될 경우 한반도는 전쟁위기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군사적 제재까지 고려한 안보리 대북제제 결의에 한국이 동참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고 평화적 해결 방안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답 : UN안보리의 북한제재는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군사적 제재는 없다고 봐야 한다. 중국이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상임이사국이 반대하면 어렵다. 경제제재 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전직 대통령과 모임에서 언급했지만 우리는 북핵 발사를 막는 데는 앞장서야 했지만 지금은 징계하는데 앞장설 필요하가 없다. 유엔과 러시아, 일본 등의 태도를 봐가며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UN의 경제제재도 효과는 의문이다. 미국 전문가들도 대화 밖에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이 북핵을 실험한 것은 잘못됐고 단호히 비난 받아야 하지만 미국도 순리대로 풀어야 한다. 북한과 미국이 대화하지 않으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햇볕정책 공격한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간접적인 당사자인 만큼 이성적으로 생각해 갈등의 요소를 해소하는데 도와줘야 한다.

질문 : 국민들은 한미 FTA가 한국에게 기회인지 위기인지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한미 FTA를 어떻게 생각하고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답 : 한미 FTA는 근본적으로는 해야 한다. 잘하면 약이지만 독이 된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21세기는 세계화시대로 우리나라만 가지고 되는 일은 없다. 우리만의 폐쇄적이고 쇄국적인 생각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칠레와 FTA를 체결해 성공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잘하면 덕을 보고 못하면 피해를 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약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농업분야는 가장 취약하다. 나도 성공 못했지만 농업부문에 대한 경쟁력을 갖도록 키워야 한다. 우리는 자동차와 조선, 섬유, 철강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능력도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시장제도, 사회보장, 평화유지에 대해 유엔의 다수국가에서도 모범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FTA는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안 그러면 시장을 빼앗긴다.

질문 :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한국형 민주주의가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답 : 민주주의는 세계화의 조짐이다. 민주주의는 서구의 것이니까 아시아에서는 적합지 않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 과반수 이상의 나라가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싹이 트고 있다.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것이지 어느 특정한 것은 아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없다. 사정에 따라 내각제 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가 백성이 주인이 돼야 한다는 원칙은 세계 공통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공짜’가 없다. 미국의 3대 대통령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인민의 피를 먹고 산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증명됐다. 한국민주주의는 뿌리가 깊다. 한국에서 군사쿠데다는 이제 있을 수 없다.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는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맥아더에 의해 군국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시행됐기 때문에 민주주의 주체세력이 없다. 그래서 과거 군국주의 세력이 부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국민의 동참이 있어야 한다. 외세나 우연에 의한 민주주의는 오래가지 못한다.

질문 : 대북경제정책에 대해 일부 여론에서는 한국이 북한에 대해 퍼주고 있다는 여론이 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이 상호 경제협력인지 아니면 일방적 퍼주기인지에 대한 견해는.

답 : 북한과 주고받기 식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에 엄청난 발을 내딛고 있다. 첫째, 북한에서 중국의 물자가 80-90%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의 지하자원 개발에 중국이 들어와 있다.

북한에 대해 미국이 봉쇄하고 우리가 진출을 못하면 북한은 중국의 지배 속에 들어간다. 미국의 북한 봉쇄정책은 중국에 밀리는 것으로 중국의 힘은 휴전선, 일본을 건너 태평양까지 가게 된다. 북한에 대한 진출은 중국과 우리의 힘을 균형 잡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엄청난 이권을 가지고 있다. 철도와 전력, 항만, 금강산.백두산 관광, 북한 경제의 핵심을 30-50년 사용토록 돼 있다. 당면한 핵문제 등에 가려서 그렇지 북한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남들이 손을 못 대도록 해야 하며 손을 떼고 나와서는 안된다. 경제가 들어가게 되면 민심의 변화를 가져온다.

북한은 2002년 7월1일 경제개선조치 이후 상업을 하는 것이 유행이 됐다. 의사도 오후에는 장사한다. 자본주의가 침투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침투하면 사유재산이 늘어난다. 사유재산은 중산층의 증가를 가져오고 정치적 자유를 요구로 이어진다. 모르는 사이에 물이 스며들듯 (자본주의가) 스며들고 있다. 햇볕정책의 결과이다.

아주 중요한 문제는 경의선과 동해선이 완공됐지만 개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전역을 종단해 압록강을 건너야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라시아로 진출해야 한다. 이럴 경우 광양과 부산은 동방의 물류기지가 될 것이다.

‘철도를 통해 대륙으로 가는냐’ 철의 실크로드를 종횡무진으로 달려가 압록강의 기적을 만드는가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제적 아젠다다.<끝>




2006년 10월 11일

민주당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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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은 「내부의 敵」이었다



「金大中+金正日」의 도전을 견디고 있는 韓美동맹은 아직도 번영의 나무 그늘이고 통일의 생명줄이다. 한반도의 두 巨惡은 미국과 대한민국에 도전했다가 반격을 불러 지금 몰락해 가고 있는 것이다.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장 (mongol@chosun.com)


2000년 6월14일 오후 평양. 金大中-金正日 회담이 열렸다. 金正日은 對坐(대좌)하자마자 이런 말을 했다(배석자의 증언).

『오늘 아침 남조선 텔레비전을 보니까 대학에서 인공기를 걸었다고 검사가 학생들을 구속하겠다고 하는데 지금 여기서 頂上회담이 열리고 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분위기에선 회담을 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환대를 받으신 걸로 만족하시고 푹 쉬신 다음에 돌아가시지요. 대통령께서도 만남 자체가 중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金대통령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불측한 발언이, 金大中 당시 대통령과 鄭夢憲 현대그룹이 공모하여 5억 달러를 金正日의 비자금으로 바친 뒤에 있었다는 점을 독자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돈 먹은」 金正日이 「돈 바친」 金大中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막말은 세계 어느 頂上회담에서도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악마와 사기꾼 사이의 密談에서나 있을 만한 低俗語(저속어)이다.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金日成 대학교에 태극기를 올린 학생들이 있었다면 金正日은 현장 사살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인간적 윤리에도 어긋난다. 20세나 연장자인 金대통령이 아닌가.

이는 도저히 「돈 먹은」 자의 태도가 아니다. 돈 먹고 약점 잡은 깡패의 태도이다. 金大中씨는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이 자를 「효심 있는 지도자」라고 평했다. 국가 지도자로서는 말할 수 없는 굴욕을 당한 사람이 최소한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金正日 一家와 金大中 사이의 오랜 인연을 짐작케 한다.


「돈 먹은」 金正日이 「돈 준」 金大中을 농락하고 있을 때 그는 「이제 확실히 金大中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해 하였을 것이다. 頂上회담을 5억 달러에 판 그는 걱정할 일이 없었다. 북한 노동신문이 폭로를 하겠는가. 이 거래가 알려진다 한들 『金大中이 수령님을 알현하러 오면서 조국통일에 써 달라고 갖다 바친 돈이다』고 하면 칭송받을 일이다.

金正日로서는 金大中씨와 現代가 함께 만들어 준 5억 달러가 고맙지 않았을 수도 있다. 文藝春秋 2000년 12월호에 실린 金正日의 간부회의 육성 기록(1999년도 작성)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정권을 쥐고 있는 金大中은 야당시대를 먼 옛날처럼 잊어버리고 美帝의 등에 타고, 反사회주의 책동에 음양으로 혈안이 돼 있다. 수령님은, 金大中은 민족주의자임과 동시에 애국주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동지적 신뢰에 대해서, 오늘의 金大中은 배신으로 대답하고 있다. 金大中은 야당시대에 민주화를 외치며, 우리들에 접근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신뢰와 의리를 모두 저버리고, 反사회주의와 反통일정책에 미친 듯이 나아가고 있다>

金日成·金正日 주변에 있었던 인물로서 이 金正日의 발언과 맥을 같이 하는 증언을 한 두 사람을 필자는 알고 있다.

金大中씨는 폭로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金正日과는 달리 5억 달러 비자금 제공 사실을 덮지 않으면 파멸한다는 불안을 가질 이유가 충분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目前에 둔 그해 가을의 노벨 평화상은 물거품이 되고 정치적 실각 상태를 맞을 것이다. 당시 이미 한국의 한 정보 기관은 6월12일 저녁에 「4개 중 마지막 한 개」를 받은 조광무역상사(對南공작기관) 총지배인 박자병이 평양의 金正日 비서실로 「입금사실」을 보고하는 전화통화를 녹음해 두었던 것이다.

金大中씨로선 무엇보다 미국 정보기관의 추적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林東源의 國情院은 송금할 때부터 金正日의 對南공작기관과 내통하고 동맹국 미국의 정보기관을 따돌리는 데 고민해야 했다. 적어도 이 순간 金大中의 남한 정보기관은 敵과 野合하여 대한민국과 동맹국을 반역하고 있었다.


2000년 6월14일 그날 金大中은 대단히 위축된 심리상태에서 金正日을 만나고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약속한 5억 달러 중 마지막 수천만 달러 입금에 차질이 생겼다고 해서 頂上회담을 일방적으로 하루 연기하여 자신을 당황하게 만들고 세계를 놀라게 한 인간과 對面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金正日이 인공기 수사 건을 꺼내면서 『그만 돌아가시죠』라고 위협한 것은 「돈 먹은」 金正日이 「돈 주고 약점 잡힌」 金大中을 더욱 긴장시키기 위하여 한 술책일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이 만든 6·15 공동 선언은 결국 약점 잡은 자와 약점 잡힌 자 사이의 합의였다. 이 합의에 두 사람 사이의 음험한 관계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金大中씨는, 따라서 대한민국은 金正日이 내민 6·15 선언 제2항이란 독약을 마셨다. 그 뒤 한국 사회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그 후유증은 지금의 안보불안, 경제불황으로 심화되었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제2항은 金大中씨가 친북적인 자신의 개인 통일방안에 나오는 연합제와 북한 정권의 가장 중요한 對南 적화 전략을 야합시킨 반역적 행위였다. 5억 달러를 매개로 하여 敵과 내통한 金大中씨가 그런 敵과의 야합을 생산해 낸 것 또한 자연스런 일이다. 6·15 頂上회담의 성사가 야합의 구조를 갖고 있었으니 그런 토양에서 핀 꽃도 「반역의 장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金大中씨의 대한민국에 대한 반역적 행위는 그가 서울로 돌아온 이후 본격화되었다. 이미 필자는 그가 金正日에게 넘겨준 50개 항목의 國益·國富 목록을 정리, 소개한 바 있어 반복 설명을 생략한다(月刊朝鮮 발간 -「대한민국이 金大中을 고발한다」 참조). 「어떻게 대통령이란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가」라고 땅을 친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제야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불법 비자금을, 그것도 對南공작부서 계좌에, 바침으로써 金正日에게 약점이 잡힌 金大中은 결국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을 배신했구나」 하는 감회가 그것이다.


왜 그는 金正日이 주한미군의 통일 후 주둔까지 양해했다고 선전하고 다녔는가(金正日은 입만 열면 철수를 주장하고 있던 그 시점에), 왜 그는 黃長燁의 訪美를 그렇게 악착같이 저지하면서 親北좌익세력의 활동을 방치했는가, 왜 그는 反美운동에 아무 제동도 걸지 않고 방관했는가, 왜 그는 국민세금까지 동원하여 赤字 금강산 관광을 유지시켜 주고 그것을 매개로 金正日 측에 현금이 계속 들어가도록 했는가, 왜 그는 그렇게 갖다 바치고도 국군포로·납북어부 한 사람 데려오지 않았는가(金大中 정부는 오히려 탈출한 납북어부의 귀국을 막으려 했었다), 왜 그는 親與방송의 親北보도를 방치하면서 金正日에게 가장 비판적인 조선·동아일보에 대한 편파적 수사를 감행했는가, 약점 잡은 金正日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인가, 왜 그는 美北 대결에서 동맹국 편에 서기를 거부하고 敵의 입장만 대변했는가, 왜 그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민족반역자 金正日 손에 이렇게 무더기로 넘겨 주었는가. 왜, 왜, 왜인가.

이제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그는 敵에게 약점 잡힌 인간이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號의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동안 온갖 詐術과 虛言으로 국민을 속인 다음 이 배를 敵陣으로 몰고 가려고 했다는 것을 이제는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게 되었다. 敵의 공격력을 강화시켜 주고, 국론분열을 조장하여 我側(아측)의 방어력을 약화시킨 뒤에 韓美동맹에까지 금이 가게 만든 金大中은 내부의 敵이었다. 대한민국은 선장실을 차지한 敵과 동침해 온 셈이다. 대한민국이 그럼에도 赤化되지 않았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가 궁금하다. 韓美동맹, 조선·동아일보의 감시와 견제, 저질 상류층이 아니면 벌써 선진국 국민 대우를 받고 있어야 할 건전한 주류층의 존재, 대법원을 비롯한 사법부의 중심 잡기, 야당의 역할 등을 꼽을 수 있다. 지난 50여 년간 대한민국 세력이 키워 온 자유의 巨木, 그 나무에 붙은 무성한 잎사귀, 즉 市場·법치·국회·언론 같은 근대 국민국가의 제도가 결국은 金大中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를 지금 삼켜버리고 있는 것이다.


헌법이 내부의 敵을 처단하여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를 지키라고 국민들에게 쥐어 준 칼이 국가보안법과 형법의 外患罪 규정이다. 지금 特檢이 다루는 사건을 對北송금사건이라고 하지만 드러나는 범죄의 성격상 이제는 「金大中 반역 음모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 형법에 「반역죄」란 명칭은 없지만 金大中이 金正日과 대한민국에 대하여 한 일들을 「반역」이란 말로 定義(정의)할 수밖에는 없다. 6·15 頂上회담 이후 일본에선 「악마와 詐欺師의 악수」란 표현이 나왔다. 필자는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自國의 대통령을 그렇게 부른다는 데 자존심이 허용하지 않았다. 다만, 「위선자는 간교한 자에게 망하고, 간교한 자는 정직한 사람에게 죽는다」는 말을 썼다.

돌이켜보면 金大中의 실패와 비극은 金正日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金正日을 그런 식으로 만나지 않고 대한민국의 정상성과 정체성을 유지하였더라면 金大中씨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유지해 간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실패의 공식은 盧武鉉 대통령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그가, 金正日을 만나는 것이 무슨 업적이나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비참한 대통령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 악마의 속삭임을 그의 귀에 대고 들려 주는 간신들도 있을 것이다. 국가정보 기능의 사령탑을 장악한 親北 편향 인사들이 그런 말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盧武鉉 대통령이 이런 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순수하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金正日에게 약점이 잡히지 않았다면 盧武鉉 대통령은 金正日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국군이 있고 세계 최강의 동맹국이 있다. 험프리 미국 부통령은 1966년 2월23일 한국을 방문하여 이런 말을 했다.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은 한국 방위에 대하여 확고한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휴전선 상, 즉 군사분계선 상에 한 사람의 미군이라도 있는 한, 美 합중국 전체의 힘이 한국의 안전과 방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과 한국을 합한 만큼 강대한 것이며, 또한 미국도 오늘날 한국과 미국을 합한 만큼 강대한 것입니다(Korea today is as strong as the United States and Korea put together. America today is as strong as the United States and Korea put together). 이에 관하여 여러분은 의문을 가질 필요도,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이런 韓美동맹이 울타리, 발판, 우산 역할을 하는 사이에 한국은 군사비 지출을 최소화하면서 경제개발과 민주화의 과정을 통과하였다. 그동안 미국은 우리의 상품 약3500억 달러어치를 사 주었고 약 500억 달러의 흑자를 허용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하여 바보짓을 많이 한 적은 있지만 나쁜 짓을 한 적은 별로 없다. 이런 韓美동맹이 舊韓末에 있었더라면 日帝 강점은 없었다. 이런 韓美동맹이 李承晩의 소망대로 6·25 전에 있었더라면 남침 전쟁은 없었다. 이런 韓美동맹이 없다면 한국 주도의 統一도 없을 것이다.

이 韓美동맹을 만들어 낸 1953년 여름 李承晩-아이젠하워의 결투가 이번 호에 실록으로 실려 있다. 충남대학교 사학과 차상철 교수는 「李承晩과 韓美상호방위조약」이란 논문에서 미국을 韓美상호방위조약으로 끌어들인 李承晩의 벼랑 끝 전술을 「칼 물고 뜀뛰기」로 비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부모가 나무를 심으면 자식들이 그늘 덕을 본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韓美상호방위조약은 북한을 포함한 공산주의 세력의 무력공격의 충동을 사전에 억제시킴으로써 한국의 안보와 생존을 확보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李承晩은 신생 독립군인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韓美상호방위조약이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나아가 그것을 심는 데 성공했다. 한국민은 그 「나무」의 그늘 덕을 아직까지 보고 있다. 韓美상호방위조약. 그것은 李承晩에게 있어서 한국의 생존이 걸린 정녕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이었다>

필자가 이 대목을 쓰고 있는 6월13일 밤, 바깥 광화문 지역은 反美 시위로 소란스럽다. 金正日과 金大中이 키운 철부지 청소년들이 기성세대와 李承晩·朴正熙의 勞苦를 잊어버리고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들의 행패에 편승하여 정권을 잡은 세력은 金正日과 金大中이 동반 몰락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두 巨惡은 처한 환경의 차이로 해서 행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한 권력이었다. 권력남용, 부패, 속임수가 이들의 상표였다.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없는 권력자들의 공통 증상이기도 하다. 金正日과 金大中이 사라지는 것은 자유통일로 나아가는 걸림돌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대한민국 主導의 통일을 반대하고 나설 세력은 중국밖에 없을 것이고 그 중국을 무력화시킬 힘은 韓美동맹밖에 없다. 危機란 낱말에는 危險과 機會란 뜻이 들어 있다. 종말을 향해 내닫고 있는 두 巨惡으로 하여 오늘날 한반도 위기는 기회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단, 하나의 전제만 유지된다면. 韓美동맹, 그것은 번영의 나무 그늘이자 통일의 생명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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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사기극의 勝者와 敗者


김대중-김정일의 속임수 게임에서 이긴 것은 김정일이다. 김대중씨는 김정일의 이 역이용 전략에 넘어가 달라는 것은 다 주고도 얻어야 할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자신은 김정일의 충복, 하수인, 대변인 수준으로 전락했다.
趙甲濟

金大中씨가 자랑하는 햇볕정책은 이솝우화에서 따온 말이다. 찬바람으로써는 북한정권의 외투를 벗게 할 순 없지만 햇볕을 쪼이면 외투를 벗게 할 수 있다는 戰略의도를 담은 말이다. 햇볕을 쪼인다는 말은 외부의 정보, 현금, 물자, 사람들을 북한쪽으로 들여보낸단 의미이다.

김대중씨는 햇볕정책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김정일을 향해서 공개적으로 '내가 너를 속여서 개혁 개방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너를 속이겠다'고 공언하면 바보도 속지 않는데 간교한 김정일이 햇볕정책에 속을 리가 없다. 김정일은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을 수립했다. 김대중-김정일의 속임수 게임에서 이긴 것은 김정일이다. 김대중씨는 김정일의 이 역이용 전략에 넘어가 달라는 것은 다 주고도 얻어야 할 것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자신은 김정일의 충복, 하수인, 대변인 수준으로 전락했다.

김대중씨가 햇볕정책의 성과라고 주장하는 교류 협력은 사기이다. 남북간에 진정한 교류 협력이 있었다는 점을 立證하려면 김대중씨는 다음을 증명해야 한다.
햇볕정책은 북한주민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남한으로 이주하여 살도록 만들었나? 西獨은 東獨에 물자(현금이 아니다)를 대주고 그 代價로써 약24만 명의 東獨人이 西獨으로 옮겨와 살도록 만들었다.
햇볕정책은 단 한 사람의 납북자, 국군포로라도 데려온 적이 있는가? 서독은 3만4000명의 東獨 정치수를 西獨으로 데리고 왔다.

교류와 협력은 주고받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갖다바치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씨가 말한 교류 협력은 굴욕적 對北퍼주기를 은폐하기 위하여, 자신이 김정일에게 속아넘어간 것을 덮기 위하여 개발한 사기적 용어이다. 黃長燁 선생의 말대로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

1945년 직후 공산당계열의 좌익활동가였던 김대중씨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어둠의 사도로서 활동했다는 의심이 생긴다. 이는 최근 도를 더하고 있는 그의 從金反美 언동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는 자진해서 김정일에게 속아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햇볕정책이라는 명칭은 김정일에게 속지 말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햇볕정책이 속인 것은 김정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들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김대중과 김정일은 햇볕사기극의 共犯이란 결론에 이른다. 김대중, 그는 어둠의 세력이었다.

*판매중인 月刊朝鮮 11월호에는 朴廣作 성균관대학 교수가 쓴 '철저분석: 西獨, 東獨에 퍼주기는 없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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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제3국 체류 북한 통일전선부 요원의 충격적 폭로고백




『386 主思派는 통전부의 정규군.우리는 金大中을「수령님의 戰士」라고 불렀다』



『金正日 지령하에 통전부-親北단체-남한 정권이 三位一體로 움직인다. 열린당은 통전부보다 더 잘한다. 對北지원은 對南공작비로 돌아간다』

● 金日成은 金大中 집권의 길 열어 주려고 朴正熙 암살 명령, 陸英修 죽게 했다.
● 金正日 정권 연장이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붕괴가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는 게 한반도 운명. 386은 지금도 國保法 대상이기에 철폐 추진, 현재가 두렵기에 과거 캐기, 親北 감추려고 親日 캔다.
● 金正日의 경멸 -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 金正日이 송호경에게 지시-『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상대라고 생각하지 말고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 李哲禹 의원이 가입했다는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북한 노동당의 남한內 지하당 조직. 노동당 깃발 金日成 초상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것이 노동당 입당의 증거
● 金正男은 親中派. 위조여권으로 제주도 방문
● 金正日 지시 - 『관리 중인 親北派를 공작원으로 포섭하여 활용할 때가 왔다』
● 안기부 해체적 개편과 康仁德 장관 해임은 통전부 작품
● 남측 민족문화작가회의 상대역은 작가가 아니라 통전부 국장
● 한국 민주주의의 첫 과녁은 金正日 정권 타도이어야

장혜영 前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근무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얼마 전 외국순방 길에서 盧武鉉(노무현) 대통령은 北核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며, 『남북간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것이 옳은 말이겠는가. 나는 북한 노동당의 적화통일 정책을 제1선에서 실행해 오던 통전부(통일전선부)의 한 일원으로서 최근 김용순 계열 숙청과 관련하여 여러 요원들과 함께 탈북한 뒤 지금 제3국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盧武鉉의 무식한 이 말에 『No』라고 대답할 수 있다.

金正日은 자기가 부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절대로 가난한 나라로 생각지 않는 특이한 자아 절대감이 있다. 바로 거기서 끈질긴 세습정치욕도 나오고 적화통일 야망도 계속되는 것이며, 그래서 수백만이 굶어 죽든 말든 核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오늘도 억만금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지금 자기의 의지대로 좌경화돼 가고 있는 한국 현실을 굽어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통쾌함을 혼자만 즐길 수 없어 그는 얼마 전 측근들과의 파티에서 불쑥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道가 몇 개 있지?』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던 중 아홉 개라는 누군가의 대답에 金正日은 웃으며 소리쳤다.

『왜 아홉 개만이야. 하나 더 있잖아 대한민국道!』

순간 좌중에 박수가 터졌는데, 그들 중 누구보다 소리 크게 박수를 친 사람은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이었다. 그의 손에 든 힘은 무엇이며 金正日의 만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오늘까지도 내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의 실체와 그들이 어떤 공작차원에서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을 증언하고자 한다.

북한 노동당 규약에는 이렇게 밝혀져 있다.

「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고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보다시피 북한 노동당의 통일관은 철두철미 적화통일이다. 이러한 야망은 북한정권 수립 이전부터 집요하게 시작됐다. 통전부의 역사적 뿌리는 1946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8·15 광복 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국가안전성 국제정보국 예하에 「소련군 정찰대 극동지부 북조선 파견대」를 조직하고 남한의 좌익세력 확장과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1946년 「서울공작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 對南공작부서의 원조이다.

左右의 첨예한 대결과 끊임없는 분쟁들이 결국 南北이라는 국토분열로 이어지도록 소련의 충견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공로와 경험을 토대로 金日成은 1948년 10월10일 黨 창건 후 「서울공작위원회」를 「對南사업부」로 승격시켜 노동당 중앙위원회에 소속시켰다. 철저한 비밀보안과 은밀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당 본 청사와 분리시켜 他구역에 별도의 건물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북한 주민들 속에서 신비의 존재로 불려지는 「3호청사」의 유래이다.

6·25 전쟁 후 북한은 휴전상태의 체제경쟁에서 최우선 당략을 적화통일로 더욱 절박하게 내세웠다. 그래서 金日成은 중공업을 먼저 발전시키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병행한다는 「군사 제일론」으로 나라의 모든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적으로는 對南공작부서의 기능과 역할을 좀더 세부화·고도화했다. 이를테면 1960년대까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제와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무장기습에 의한 파괴·와해·교란 등 힘의 정책을 對南戰의 기본으로 했다면, 1970년대부터는 駐韓미군에 의해 한반도에 분열이 정착되어 가는 상황에 맞게 長期戰에 대처한 우회적 전략, 즉 사상·문화적 침투와 인물포섭, 심리전 등을 총괄하는 지능 기능의 전문부서를 만들고 발전시켰다.


金正日이 통전부 지휘

그런 의도에서 출발하여 종전에 있던 「조국평화통일서기국」, 「남조선문제연구소」, 「평양주재 한국민주전선대표부」, 「재북평화통일 촉진협의회」, 「조총련결성준비위원회」를 통합하고 여기에 101연락소, 26연락소, 813연락소, 310연락소 등을 신설·포함시켜 북한 노동당에는 「통전부」라는 독립 부서가 생기게 됐다.

뿐만 아니라 부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최고 실권직을 제1부부장제로 낮추고 모든 행정·인사 결정권은 당 조직비서인 金正日이 직접 틀어쥐고 부장업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북한의 적화통일 노선이 얼마나 집요한가 하는 것은 현재 노동당 안에 對南공작부서만 해도 4개(작전부, 대외연락부, 35호실, 통전부), 그것도 모라자 인민군 무력부 안에 정찰국이라는 것을 또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들의 인원을 다 합치면 무려 3만여 명에 이른다.

金日成 권력으로 북한이 움직여질 때는 허봉학, 김중린, 허담 순서로 對南사업 담당비서가 對南공작부서들을 총괄하였다. 물론 그때도 중요 비준은 金日成이 하였다. 하지만 黨內에서 수령 계승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권력이양의 일환으로 金正日이 黨선전부, 黨조직부 사업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對南공작부서의 행정 및 인사 결정권도 對南사업 담당비서 중심제가 아닌 金正日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더욱이 통전부는 다른 부서들처럼 철저히 군사적 은밀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화라는 합법성 측면도 있어 對外통일방침 관리상 당적 지도력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부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통전부만은 최고 실력직을 제1부부장제로 낮추고 당 조직비서인 金正日이 직접 틀어쥐고 부장업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1994년 5월10일 통전부 산하에 건물도 사업구성원도 없는 간판만의 「조선 아태 평화위원회」를 내오고 對南사업 담당비서 김용순을 위원장으로 발표한 것도 金正日의 이러한 모략정치 이면을 가리고 아울러 평시에는 발톱을 보이지 않는 포악 동물 본성의 통전부 이미지를 미화분식하려는 것이었다.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사건」,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폭파」, 1987년 11월29일 「KAL-858기 폭파」, 1992년 10월6일 「남조선 노동당 사건」, 1996년 9월15일 「강릉해안 잠수함 침투」, 1998년 12월17일 「여수해안 간첩선 침투」, 1999년 6월15일 「서해 연평도 해상 교전」, 2002년 「서해교전」 등이 反민족·反통일의 원흉 金正日이 저지른 사건이다. 이 모든 것들을 발기하고 총지휘한 악한의 직접 지휘체계下에 움직이는 통전부는 북한 노동당의 핵심부서로서 오늘까지도 평양시 중구역 창광동에 밀집된 중앙당 청사들과는 별도로 모란봉구역 전승동 본래의 3호청사에서 적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對南공작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규모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세계 선진국인 대한민국을 상대로 전략적 주동성을 잃지 않을 만큼 통전부의 수완은 참으로 완벽하다. 그들이 공작 차원에서 「수령님의 전사」로 체계적으로 길러낸 金大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통전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정치인으로서의 목숨이 당장에 끝장날 386이 「적색무리당」이라고나 말해야 할 열린당에 대거 포진하여 공공연한 親北(친북) 및 좌경정책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흔드는 오늘의 한국 현실은 모략가 金正日을 부장으로 하는 통전부 주도의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다.


「金大中은 수령님의 戰士」

金正日이 비준한 2000년 6월15일 남북頂上회담 일정에 대한 통전부의 계획서에는 역사적 의미로 볼 때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첫 부분이 백지화 되어 있었다. 그것은 金大中 대통령이 金正日과 나란히 순안 비행장에서부터 숙소까지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나가게 되어 있는 연도 환영행사였다.

金日成 사후 공개행사를 극력 피하는 金正日이라 신변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공백인 줄로만 알았던 준비 성원들은 행사 당일에 마치 사전 약속이라도 있은 듯 金正日의 리무진에 단독으로 오르는 金大中의 행동을 보고서야 계획서 공백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술자리에서 임동욱은 취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번 남북 頂上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벌써 첫 만남에 있었다』

그 후에는 더 무게 있는 말들이 통전부 간부들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수령님은 확실히 천리혜안의 예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다. 金大中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줄 어떻게 미리 다 아셨을까』

頂上회담 후 몇 개월 지나서부터는 김용순, 임동욱, 안경호 같은 거물급들이 노골적으로 金大中을 「수령님의 戰士(전사)」라고 불렀다. 북한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는 절대적이다.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수령제일주의가 투철한 중앙당 비서 부부장들이 敵國의 괴수를 「수령님의 戰士」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金大中,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아니면 북한 독재자의 충복인가. 金大中의 이름은 이미 그가 한국의 민주투사로 인정받던 1970년대에 통전부의 문건에 올라 있었다. 북한이 인물 흡수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된 계기는 1960년 4·19 혁명이었다. 金日成은 그때 통일의 호기를 놓쳤다고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4·19 혁명이 붉은혁명으로 승화되지 못한 요인은 그것을 주도할 만한 적색인물과 그 중심의 지하당이 없었기 때문이니 하루빨리 한국 내에 혁명정당을 구축할 것에 대한 과업을 주었다.

북한은 급기야 「통일혁명당」을 결성하고 마치 그것이 한국 내에 실존하는 지하당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미국·일본·유럽·東南亞에까지 그 지부를 설치하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밖에서부터 만들어진 이 유령조직을 안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통혁당」의 이름으로 출간된 각종 격문들과 인쇄물들을 한국에 살포하거나 침투시키는 것은 물론, 인물포섭과 지하당 결성에 총력을 다했다.


『金大中은 쌀을 달라면 쌀을 주고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다』

이를 위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돌격대로 내세웠다. 1950년대에 조직된 이 협의회라는 것은 조소앙, 안재홍과 같은 납북자들과 월북자들로 이루어진 순수한 이남 출신 집단이다. 이 협의회는 한국 전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함께 편지발송, 방송심리전 등 온갖 수단을 통해 한국에 남아 있는 인맥을 최대한 동원하여 對南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主업무로 삼았다. 지금은 「재북평화통일촉진위원회」로 격상시켜 그 명맥을 잇는 것과 동시에 북한의 위상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렇게 對南공작의 제1과제를 反정부 의식이 강한 인물 흡수와 지하당 구축, 左派단체 확산으로 정한 통전부는 1970년대에는 민주투사로 자처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에게 金日成의 친서와 공작비도 보낼 만큼 혁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지금도 통전부 기밀실에는 朴正熙(박정희)의 유신독재 반대를 부르짖으며 金大中이 일본에서 맹활약하던 당시 그 흡수공작에 적지 않게 공헌한 조총련 산하 비밀요원들에 대한 활동내용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朴正熙가 암살된 후 金大中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정국조종 전술案도 보관되어 있다. 1974년 8월15일 陸英修 여사 암살사건은 바로 이 전술案의 첫 단계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남북 頂上회담 준비역을 맡았던 송호경에게 金正日은 『金大中이는 돈을 달라면 돈을 주게 돼 있고, 쌀을 달라면 쌀을 주게 돼 있는 사람이니 대화 상대라 생각지 말고 무조건 10억 달러를 내리 먹여!』 하고 지시했다.

이렇게 이용 가치 있는 인물들을 하나둘 점거하고 1970년대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일어서는 운동권에도 「통혁당」 지하가 심어지자 여기에 힘입어 金日成은 「고려민주련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주동적으로 제기하고 朴正熙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다.

1999년 1월1일 「노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공동사설 「올해를 강성대국 건설의 위대한 전환의 해로 빛내이자!」에서 북한은 「안기부는 당장 해체되어야 한다. 안기부를 해체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것은 통일을 바라는가 분열을 바라는가를 가르는 시금석이 된다」고 전에 없는 어감으로 강조했다.

이어 통전부內 각 연락소들을 발동하여 일대 섬멸전을 벌이듯 안기부 공격 전략을 펼치도록 했는데 실지 그때 이미 내부에서는 안기부가 곧 없어질 것이라는 정답이 나와 있었다. 아니 훨씬 그 전일지도 모른다.


金大中 당선 시점에 金正日은「안기부 해체」계획 수립

金大中의 大選 당선이 확실해지자 金正日은 자기의 경사를 자축하듯 파티를 열었다. 여기서 그는 통전부 사업을 좀더 進攻的(진공적)으로 펼칠 것을 역설하며, 안기부 해체 문제부터 결속지으라고 큰 소리 쳤다. 대한민국 대통령처럼 행세하는 그 장면을 한국 국민들이 보았다면 경악감과 함께 강한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金大中이 대통령 취임 연설을 준비하던 그 시간에 통전부는 이미 金正日의 지시대로 안기부 해체에 대한 구체적인 案을 작성한 상태였으며, 그로부터 1년도 채 안 된 1999년 2월경에는 안기부가 정말로 對北기능이 약화된 국정원으로 개조됐다.

金正日의 욕심은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정원 개조발표와 함께 책상 위에 놓인 국정원 내부조직 구성 보고서를 받아든 金正日은 『이게 무슨 해체인가, 명칭만 바꾸었을 뿐이지 내부 조직이며 악질들이 그대로 들어 있지 않은가』 하고 보던 문건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나서 즉시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을 불러 『안기부나 국정원이 뭐가 다르냐』며 『이것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압력을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때부터 「노동신문」은 국정원 규탄으로 지면을 채웠다.

북한의 제1신문인 노동신문은 당보로서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부의 對南전략물이기도 하다. 5면은 소위 한국 국민을 대표한다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의 백서·성명·호소문들과, 한국 국민들이 金正日을 열렬히 찬양한 듯 101연락소가 날조한 온갖 허위 내용들을 실음으로써 마치 북한 정부가 全민족적인 합법 통일정부인 것처럼 시위한다.

통전부는 그 5면을 발동하여 金正日의 지시대로 국정원 개조는 눈 감고 아웅하는 식의 기만이며 탈바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국가신문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상말을 연발했다. 「이런 反통일 모략기지, 동족탄압의 본산을 그대로 두고 대화요, 화해요, 교류요 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金大中은 햇볕정책의 성과적 추진을 위한다며 자기 임기內에 기어이 국정원의 對北기능을 변질시켰다.

그때부터 통전부 주요 간부들 입에서는 「3위1체 전략」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金大中 정권 초기 통일부 장관이었던 康仁德 제거 작전時에는 그 말이 더는 비밀이 아닐 만큼 공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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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大選 때 李會昌 낙선에 총력 집중

이런 파티와 3위1체 전략이 절정에 달했던 때는 2002년 大選 때였다. 金正日은 盧武鉉이 당선돼야 金大中의 햇볕정책이 계승될 수 있다며, 한나라당 후보 李會昌 낙선에 통전부 역량을 총 집중하라고 했다. 역시 그때도 노동신문은 3위1체의 맏형으로서 먼저 입을 열어 한나라당 죽이기에 열을 올렸다.

2002년 12월1일 노동신문 5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보도 제829호」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은 미국의 앞잡이인 리회창 패당들과 같은 민족반역의 무리들을 미제침략자들과 한바리에 실어 이 땅에서 통째로 들어내기 위한 反美, 반리회창투쟁을 더욱 과감히 벌려야 할 것이다>

2002년 12월3일 노동신문 5면, 「한민전 중앙위원회가 전체 유권자들에게 드리는 글」

<민족민주세력에 있어서 이번 대선 투쟁의 기본목표는 한나라당의 선거 전략을 분쇄하고 리회창의 집권을 저지시키는 것이다. …우리 유권자들은 민족, 민중에게 재앙만을 가져다 줄 리회창의 집권을 천의 하나, 만의 하나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2002년 12월11일 노동신문 5면, 사설제목 「매국역적의 당선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남조선에서 리회창의 당선을 허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나라와 민족, 통일의 운명을 걸고 리회창 역도의 당선을 기어이 저지 파탄시키기 위한 투쟁에 총 궐기해 나서는 것은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의 사활적인 문제로 나서고 있다>

2002년 12월15일 노동신문 5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보도 제831호」

<리회창과 같은 자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에는 미국이 강요하는 핵전쟁이 터지고 우리 민족은 그 희생자로 되게 되리라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다. 남조선의 각 당, 각 파, 각계각층 인민들은 온 겨레를 참화 속에 빠뜨리려는 반역자에 대해 각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노동신문과 「구국의 소리방송」은 大選 전날까지도 한국內 親北세력들에게 反한나라당·反이회창 성전을 연일 호소했다.


통전부 최고 성공작은 386 主思派

金正日이 얼마나 對南전략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욕심을 부렸는가 하는 것은 자기 제도권 밖에 있는 한국의 언론까지 통제하려고 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중·동 신문 안 보기 운동」을 한국 전역으로 넓혀 반드시 한겨레신문처럼 만들라』고 한총련에 지시했다.

金大中도 조·중·동을 길들이려고 했지만, 그때 조·중·동을 지켜준 것은 언론의 양심을 아는 대한민국 국민들이었다.

다 기울어져 가던 운명 직전의 金正日을 햇볕정책으로 구원해 준 金大中, 남북 頂上회담 성사명분으로 5억 달러의 불법자금까지 갖다 바친 金大中, 북한 통전부가 제시한 3위1체 전략, 그리고 그에 발을 맞춘 金大中, 이런 사람이 대통령인 대한민국을 金正日이 왜 대한민국道라고 경시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에는 386이 金大中도 감히 더 이상 넘어설 수 없었던 체제의 한계선까지 개혁하겠다고 팔 걷고 나섰다. 아직도 전향하지 않은 그들의 낯익은 모습을 TV 화면으로 볼 때마다 남북 간의 체제 경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 극도의 체제 자만으로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할 국정원까지 對北기능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북한 통전부에는 對南분야에서 수십 년 동안 잔뼈가 굵은 수천 명의 요원들이 오늘도 이 직업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들의 최고 성공작은 바로 386이다. 이날을 보자고 통전부가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재단하며 그에 알맞은 자기 조직을 부단히 확장해 왔고, 마침내는 그 효력을 보는 것이다.


主思派 工作 공로자 비밀 표창

朴正熙의 유신독재정권 시기 한국內 민주세력에 대한 통전부의 對南공작 주제 침투는 反독재, 자주화, 연방제 통일방안이었다. 4·19 혁명에 자극받은 북한은 민주주의 혁명을 反체제 폭력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한 것은 광범한 군중 속에 뿌리박을 수 있는 혁명정당과 함께 북한 주도의 지도이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한국內에 하루빨리 「主思派」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金日成의 연방제를 지지할 수 있으며, 미군을 몰아내고 체제전복도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대상을 진취성이 강하고 지성욕구로 몸이 달아 있는 대학생들로 지목했다. 그 실현을 위해 통전부는 조총련을 앞세워 일본에 나와 있는 유학생 사냥에 나섰다. 납치·회유·기만·협박의 방법으로 적색화한 그들의 임무는 한국內에 주체사상을 전파시키고 동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조국평화통일 서기국과 한국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참사실에는 그 工作성과로 영웅칭호,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은 사람들이 활동 중에 있다. 북한 공작금을 뿌려 가며 대학가에 침투하여 主思派를 결성한 초기 창시자들에 대한 조국통일상 내신문건에 金正日은 1996년 2월15일 비준했으며, 그 수훈식을 다음날 2월16일 통전부 본부 회의실에서 몇몇 주요 간부들 참석下에 익명 발표식으로 진행했다.

主思派의 활동에 통전부가 얼마나 의의를 부여했는지는 그들의 조직 확산을 지원하기 위해 대학생들에 대한 의식화·세뇌교육 목적으로 金正日이 「101연락소」라는 것을 만들도록 지시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1동 평양의학대학 앞에 건물을 두고 200여 명의 필진들로 구성된 이 연락소의 사명은 한국 작가 명의로 反독재·反美·金日成의 고려연방제식 통일을 주제로 한 소설·詩를 창작하여 한국에 침투 및 보급시키는 것이다. 책의 내용으로 보나, 책 제작으로 보나 어느 면에서도 북한産이라고 의심이 안 되게 철저히 위장 창작된 시집과 소설책들은 젊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反정부 행위와 주체사상 신봉이 더는 非합법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평범한 대학생에서 민주투사로 성장한 책 속의 주인공을 닮고 싶다며 북한으로 밀입북해 노동당에 가입한 386 출신 한 성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386들은 아직도 그때의 대표적인 작품들인 「반항」, 「돌아보는 얼굴」, 「열흘 낮 열흘 밤」, 「통일은 언제 됩니까?」 등을 자자구구 외우고 있을 것이다』

통전부는 이렇게 소설과 詩까지 對南심리전用으로 만들어 대학생들을 사상무장 시키는 데 이용했으며, 主思派는 反정부 전선을 노동자와 농민 속으로 확대하기 위해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비밀 訪北해 노동당 가입하고 「혈서 서약」

통전부는 한국內에 「反美결사대」, 「자주군인회」, 「통일결사대」, 「민족해방애국전선」, 「민주운동연합」 같은 비밀조직들을 구축하고 對南공작의 통일전선을 형성했다. 그 통일전선의 목표는 야당을 지지하여 金大中이 집권하면 국가보안법 철폐, 안기부 해체, 미군철수 등 북한의 적화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제도적 장애를 우선 제거하고 정치적 혼란, 親北여론 확산으로 합법·非합법 시민운동단체들을 규합하여 연공 정부의 기반을 확보한 다음 분열 50돌이 되는 1995년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 50돌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金正日은 한국內 지하당 성원들에게 투쟁의욕과 통일의욕을 자극시키기 위해 「누구는 서울시위원장, 누구는 충청도위원장」 하는 식으로 직위 분담을 하게 하고, 金日成에게 자기의 對南공작 지도 성과를 과시할 목적으로 그들이 노동당 입당 청원서, 충성의 맹세문, 칭송 글, 서약서 등을 작성하여 북한으로 들여보내도록 지시했다.

2002년 4월15일 평양 만수대 金日成 동상 뒤 조선혁명박물관에 새로 개관된 「동지관」 이라는 곳에는 그때 입수한 자료들과(이름은 삭제) 지하조직들이 사용했던 노동당 깃발, 金日成과 金正日 초상화가 전시되어 북한 주민들에게 한국 국민들이 金正日을 흠모한다는 선전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어 통전부는 지하조직만이 아닌 합법적인 운동단체들도 親北, 좌경화하기 위하여 主思派가 「全大協」을 장악할 수 있도록 많은 공작금과 인적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들을 정신적으로 지원한 것은 북한이 이전에 흡수했던 金大中과 같은 「민주투사」들이었다.

全大協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한 「主思派」는 해외에 유학생 지부를 만들어 놓고 체계적으로 통전부의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고,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여 노동당에 가입하면서 金正日에게 충성의 선서까지 다졌다. 그렇게 평양까지 찾아와서 번호를 받은 붉은 당증과 혈서 서약서는 모두 15개였다.

對南담당 비서 김용순은 『金正日 탄생 60돌이 되는 2002년 2월16일까지는 통전부가 선물로 60명의 혈서 서약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간부들 앞에서 지시했다. 통전부는 그 후 한국內 지하조직들을 종합적으로 통제관리하고 적화통일로 유도할 수 있는 유일적인 지령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평양시 대성구역 용흥동에 숨겨져 있는 소위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방송」 운영을 더욱 강화했다.

150여 명으로 꾸려진 이 26연락소는 한국에 실존하는 방송국으로 위장한 연락소로서 아나운서의 방송언어와 한국식으로 현지화한 억양을 사용해 한국 주민들과 해외동포,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정부의 정책과 사회상을 왜곡하거나 허위날조 보도함으로써 소요 유발을 부추기고 민주화 운동이 통전부의 對南전략대로 심화되도록 심리전을 폈고, 때로는 지령을 내렸다.

방송의 다양화를 위해 26연락소는 한국대중가요를 전담하는 전자악단도 가지고 있다. 「칠보산」 명칭을 1998년에 「북극성」으로 바꾼 이 악단에서는 한국의 대중가요들을 통전부의 입맛에 맞게 가사들을 바꾸거나 운동권 노래들을 직접 창작하여 방송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운동권 대학생들의 反정부 감정을 더욱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통전부가 왜곡한 노래 중의 하나인 「사랑의 미로」를 실례로 든다.

<그토록 다짐을 했건만/사랑은 알 수 없어요/민주 위해 목숨을 바친/그대를 나는 못 잊어/나의 작은 가슴에 심어준 사랑의 별/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그대의 원한 씻으려/투쟁에 나서리>


인터넷에까지 뻗친 통전부의 손길

통전부는 또한 성숙된 한국 정세에 맞는 對南공작의 입체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26연락소와 함께 813연락소, 310연락소를 최대한 가동시켰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에 자리 잡고 있는 150여 명으로 조직된 813연락소는 통전부內 각종 기관지들과 인쇄물들을 만들고, 특히 한국內 시민단체들과 여러 조직들이 현지에서 직접 작성한 격문, 삐라(전단)처럼 위장 제작하는 출판연락소이다.

한국적 實感을 보장하기 위해 金正日은 「고난의 행군」 시기 300만이 굶어 죽던 그 엄혹한 때에도 종이와 색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조총련선으로 수입해 오도록 하였다. 아마 거기에 든 비용만 쌀 수입에 돌렸어도 북한 주민들 10만 명은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金正日은 『813연락소에 들어가는 당 자금이 적지 않다』며 『그러나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군사에 힘을 집중하는 것도 다 통일을 위한 것이니 그런 줄 알고 자재낭비가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장 한장이 그대로 북한 주민들의 피와 목숨으로 바꾸어진 對南심리전用 삐라와 격문들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金正日의 지시에 의해 정상적으로 생산되었다.

200명 규모의 310연락소는 813연락소 생산물들을 한국에 침투시킴으로써 그 모든 허위와 날조들이 기정사실처럼 느껴지도록 한국 국민들에게 혼란을 조성하고, 북한을 동경하는 조직들이 한국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자기들 곁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확대 조작했다.

「反美애국청년회」, 「이북 바로알기 운동회」, 「자주애국청년단체」, 「하나회」, 「백두-한라조직」, 「금강산 사랑모임」 등의 조직 명의로 된 통전부의 손길이 서울의 골목골목과 인터넷에서 지금도 끊어지지 않고 있음을 한국 국민들은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이렇듯 통전부는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한국 국민들의 순수한 열정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내부에 이념적 「씨」를 박고 개별적 인물 혹은 단체를 체계적으로 키워 적화통일로 유도하기 위한 환경 마련에 시간과 지혜를 아끼지 않았다.

그 「열매」라고도 할 수 있는 386이 민주운동 경력을 자랑하며 국가보안법 철폐를 누구보다 앞장서 주장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현재 누구보다도 국가보안법의 대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가 무서워 과거청산을 부르짖고 親北 행적을 은폐하려 親日 행적을 따지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적대집단인 북한의 시각에서 볼 때 일종의 와해이자 기회였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통전부 對南공작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통전부를 고발한다면 종당엔 386 때문에 한국의 민주운동도 고발당하는 것이다.

한 민족 안에 서로 다른 양극이념의 두 체제가 대립되어 있는 한 일방적인 참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이 이룩한 기적 같은 이 민주주의는 경제의 고도성장과 함께 아울러진 문명의 현상이고, 이 이상의 민주주의는 이념공세로 인한 자멸의 초대장에 불과하다. 북한이 적화통일 정책을 백지화하지 않는 한 한국이 국가보안법 철폐나 主敵개념을 포기한다고 해서 절대로 세계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없다. 그런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우선 민주주의의 첫째 과녁을 북한 독재정권 붕괴로 조준해야 한다.


「조평통」의 外柔內剛 전략

체제수호 애국세력을 보수꼴통으로 몰아붙이는 現 여당과 노동당 지하 당원들인 386 主思派가 있어 담이 커질 대로 커진 통전부는,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을 과녁으로 삼았다. 그 목표가 바로 한국 국민들, 즉 합법적인 시민운동단체들이다.

金泳三(김영삼) 정권부터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로 남북대화와 교류의 문을 연 「조평통」은 내부 비밀로 자기들의 이 전술을 「外柔內剛」이라고 명명했다. 통전부가 「조평통」이라고 할 만큼 통전부 안에서 가장 큰 연락소는 「조국평화 통일서기국」이다.

1946년 7월에 공산통일국가 창건을 추구하기 위해 金日成을 중심으로 조직된 이 단체는 그 후 1949년 6월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으로 개편되었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거쳐 통전부 신설 당시에는 「조국평화 통일서기국」으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이 서기국은 對南정책 작성, 對南정보 수집, 對南심리전, 인물포섭, 남북대화 및 교류전담, 한국內 親北 및 좌파세력 확장·지도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산하에 필요한 연락소들을 가지고 있다.

평양시 중구역 오탄동에 「조평통」과 지붕을 같이 한 「한국민주전선중앙위원회」에 1960년대 초부터 한국內에 지하조직들을 구축, 南南갈등을 유발시키고 조정하여 온 모략의 능수 100여 명이 집결해 있다. 평양시 중구역 연화동에 기지를 둔 「남조선문제연구소」는 1950년대부터 오늘까지 150여 명의 학자들이 한국의 정치·경제·군사·문화·개별 인물들에 대해서까지 자료화하고 학술 차원에서 논문들을 작성하여 통전부의 對南정책을 이론적으로 돕고 있다.

이렇게 적화통일 의도의 모략기지를 튼튼히 꾸리고, 북한 통일정책을 대변한다는 합법적인 의미에서 통일외교의 명분으로 한국內 개별인물 혹은 단체들에 접근하여 對南공작을 활발히 벌이는 「조평통」에는 현재 700여 명의 한국 전문가들이 근무하고 있다.

한국에 군사정권이 유지될 때까지만 해도 통전부는 反독재·자주·연방제式 통일을 對南공작의 기본 주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金大中 정권 이후부터는 소극적인 틀에서 해방되어 反美, 親北, 親金正日을 노골화하고 지금은 그 전략을 「우리 민족끼리」 실현하려고 하고 있다.

특히 6·15 남북 頂上회담에서 햇볕정책이 원만하게 이어지자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金大中의 설명 이후 金正日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예술단을 불러들이고 언론사 대표단을 초청하는 등 독재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386은 통전부의 정규군

對敵관념 교양으로 주민들을 더더욱 사상무장시키고, 先軍제일주의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북조선의 실상을 가리고 미소전략으로 한국에 다가서는 金正日은 「우리 민족끼리」 이면에서 최근 對南공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비밀 지령을 주었다.

『지금 남조선 정세는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게 조성돼 가고 있다. 이것을 안정적으로 지속 발전시키자면 노출 위험성이 큰 직접 침투를 줄이고 눈에 안 보이는 침투, 즉 통전부가 그동안 관리해 오던 대상들을 현지에서 첩자로 흡수하여 적극 활용하는 방법으로 對南공작을 가속화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시민단체 포섭이다. 그들을 이용하여 남조선內 국민정서를 더욱 친북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전략이 쉽게 먹혀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많이 마련해야 한다. 공작자금은 근심하지 말라』

한국은 지금 더더욱 각성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더더욱 북한을 경계해야 할 때이다. 여당만이 아닌 한국內 각 시민운동단체 속에도 대거 포진된 386 무리가 차라리 철없는 이념 공상가들, 극단적인 親北분자들 정도면 다행이지만 이들이 벌써 金正日의 지령대로 통전부의 정규군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누가 믿고 외국기업이 투자하겠다고 하겠는가.

통전부는 자금문제도 훌륭하게 해결하고 있다. 한국에서 보내주는 모든 인도주의 물자들은 그대로 통전부 소유로 접수된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보내준 비료 일부가 국경 沿線(연선) 중국 농촌지역들에 은밀히 수출되었고, 옷·식료품·심지어 한국 가수가 보내준 생리대까지 외화상점에 내다팔아 공작자금으로 확보하고 있다.

통전부는 그렇게 마련된 붉은 자금으로 한국內 한총련 등 각 親北단체들의 집권층 장악을 위한 공작에 쏟아 붓고 있다. 특히 통전부는 反체제혁명에서 기본 동력 역할을 할 중산층 이하의 광범한 근로 대중지반을 갖고 있는 「○○○○」, 초·중·고·대학생들에게 親北 세뇌교육을 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를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악하고 있다. 결과 몇몇 인물들은 이미 북한을 극비에 방문했고 중국에 비밀 아지트도 두고 있다.

이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조평통」은 종교 세력이 강한 한국內 실정을 감안하여 통전부 교류과 소속으로 1990년대 초부터 불교도연맹, 기독교연맹, 천도교중앙위원회, 천주교위원회를 설립하고 평양시 몇 곳에 절·성당·교회를 만들어 놓았다.

이 성원들은 철저히 검열된 골수 노동당원들인 통전부 요원들로서 이들의 주된 임무는 종교인 흡수, 물자지원 청탁에 대한 전술안 연구이며 그와 함께 직업오염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해당 담당 종교의 非과학성, 반동성 논문을 작성 발표하는 식으로 정신세척을 하고 있다. 때문에 명칭이 불교이고 기독교이지 통전부 내부에서는 엄격하게 1국, 2국으로 명명된다.

통전부는 한국內 親北세력 확장과 시민운동단체 포섭을 심화하기 위하여 민간급 차원에서 대화·교류를 주동적으로 제기하는 전술을 활용한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한국은 순수한 민간인들로 구성되지만, 북한은 명실공히 통전부 요원들로 편성되어 대화하고 교류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2004년 6월 금강산에서 있었던 南北작가회담 때 김형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총장과 악수했던 북측 단장 장혜명은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아니라 작가로부터 「조평통」 부원, 101연락소 국장직을 거쳐 지금은 26연락소 對南문학창작국 담당 부소장을 하는 통전부의 핵심 요원이다.


통전부內, 한국 전문가 2550명

만능 기관인 통전부에는 이처럼 한국 각 분야를 연구하고 대응할 수 있는 북한 최고의 실력자들이 2550여 명이나 된다. 그들의 전문성에 의거하여 경제·군사·문화, 그 어느 것 할 것 없이 남북관계 문제는 100% 통전부가 자기의 對南전략 큰 그림 안에서 각본을 쓰고 연출한다. 그래서 통전부이고 그래서 분열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경제장관급회담이라면 경제적인 의미로, 군사장관급회담이라면 군사적인 의미로 천진하게 믿는 한국 정치인들이나 국민들은 불쌍할 만큼 순진하다. 오늘도 통전부는 충실한 자기 당원들의 창발성과 재능을 최대한 살려 對南공작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 모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3년 9월부터 26연락소가 운영하던 「서울에서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잠정적으로 중지했다. 종전에 진행하던 전파방송의 단면성과 非진보성을 인정하고 인터넷 보급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실정에 맞는 對南선전用 동영상화로 이전하기 위해서이다.

對南영상물 제작의 작품성을 보장하기 위해 101연락소의 對南문학창작국을 26연락소로 옮기고 「북극성」 전자악단의 규모를 더 늘렸으며, 2004년 10월에는 金正日이 직접 그 첫 시제품을 검토하는 등 지금 통전부는 새로운 對南공작 차원의 인터넷 방송국 창설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 내막도 모르고 한국 정부는 26연락소 「구국의 소리방송」 중단에 대해 2004년 6월14일 북한 측의 요구대로 DMZ 對北방송을 철거하는 또 한 번의 밑지는 장사를 했다.

인터넷 기술과 그 실현을 전담한 101연락소는 필요한 인력과 설비를 보충하고 미국·일본·유럽·東南亞로 지점을 확대하여 2004년 11월까지 한국 국민 전체를 상대로 할 수 있는 대대적인 인터넷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과거 결탁에 뒷덜미 잡혀…』

지금 이 시각에도 개인 혹은 각종 단체명의 이메일로 反정부, 反美, 親北, 親金正日 주제의 글과 동영상들을 만들어 한국에 침투시키는 인터넷 침투 연락소 101은 통전부만이 아닌 중앙당 35호실, 대외연락부, 작전부, 인민무력부 정찰국의 지령문들도 암호화하여 발송하는 북한 對南공작의 창구이기도 하다.

통전부와의 과거 결탁에 뒷덜미 잡혀 좌경으로밖에 나갈 수 없는 386, 고집은 있으나 주관이 없는 盧武鉉 정권, 입심 사나운 左派 시민운동단체들. 그들은 어느새 북한식 일심단결로 결집되어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권력이 되었고, 여당보다 정체성이 더 불확실한 한나라당은 정치표·민심표·통일표를 고민하며 우유부단하고 있으니, 이제는 우익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고 있는 한국이 되었다.

오늘날 누가 옷을 벗고 있는가. 金大中의 햇볕정책대로 북한인가, 아니면 金正日이 웃으며 말한 것처럼 대한민국道인가.

미국의 북한인권법에 대한 반대, 국가보안법 철폐, 主敵개념 포기, 탈북자 지원정책 반대, 일방적인 전연(전선)지대 선전물 철거, 국방부 문민화, 북한 정권 붕괴 반대….

金正日이 더 요구할 게 없을 정도로 열린당은 통전부보다도 더 일을 잘하고 있다. 열린당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金正日에게 아첨하는 것이 정권 연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통전부의 對南농사엔 흉년이 없다

통일 문제는 한국에선 汎국민적인 것이다. 때문에 이것을 최대한 악용하려는 기회주의 차원에서 金正日을 만나거나 지지를 얻는 것을 한국 정치인들은 제1의 인기표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한나라당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멀리 가느라고 쉬엄쉬엄 걷는 한나라당은 여당과의 대결에서 항상 자기 정책이 뚜렷하지 못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통령 꿈을 품고 무슨 운동, 무슨 단체들의 일부 대표라는 사람들도 출세의 길을 닦느라 국가보안법을 피해 가며 통전부와의 밀로를 개척하기도 한다.

이런 정치풍토에 씨앗을 뿌리고 다 익으면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통전부의 對南농사에는 흉년이 없다. 정치적 인기를 위해서라면 체제안보도 고려치 않는 을사오적 같은 정치인들이 머리를 쳐드는 한국이어서 金正日은 여유작작하게 팔짱끼고 계략을 꾸밀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남북대화는 북한 노동당 일개 부서인 통전부가 하겠다면 하고, 말겠다면 마는 식으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金正日은 북한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다.

북한의 독재자는 金正日이고, 한국의 독재자는 돈이다. 이 둘 중에 누가 더 수명이 긴가 하는 것을 386이나 일부 親北세력들은 종종 잊는 것 같다. 金正日 정권연장이 곧 386 정권 연장이고, 金正日 정권 붕괴가 곧 386 정권 붕괴로 이어지게끔 우리 한반도의 운명은 흘러가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는 한꺼번에 깨끗이 쓸어버릴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다. 오늘의 피해자들이 바로 북한 주민들이고 한국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말하고 싶다. 50만 명의 탈북자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28만 명의 생명들, 굶어 죽은 300만 명의 백성들, 이것은 우연한 數(수)가 아니다. 이 수를 감히 지울 수 있는 正義란 있을 수 없다. 金正日 정권을 북한이라는 한 민족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反민족, 反통일이다.

군사독재정권 타도에 대학생들이 앞장섰던 것처럼 오늘은 그대들이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할 때이다. 과거는 삶의 자유를 얻기 위해 極右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던 양적 민주화 시대였다면, 이제는 삶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極左 친북정권을 타도해야 할 질적 민주화 시대이다. 대한민국이여, 이제는 정말 대한민국 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통전부 요원 출신 탈북자와의 一問一答

『金正日은 對南적화의 유일한 걸림돌이 조선·동아일보라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한다. 金正男은 위조여권으로 제주도에 왔다갔다』

제3국에서 만난 북한노동당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자와 月刊朝鮮 기자의 일문일답 내용을 요약한다(편집자 注).


─李哲禹 열린당 의원이 자신은 민족해방애국전선에 가입한 것이지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민족해방애국전선은 남한에 있는 북한노동당의 지하당이며, 북한 노동당의 산하 위장 조직이다. 노동당 깃발 아래서 金日成·金正日 초상화를 걸어놓고 入黨맹세를 한 것은 노동당에 가입했다는 뜻이다. 이런 노동당 가입 관련 서류는 통전부에서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金正日에게 충성을 다짐해 놓고 무슨 단체에 가입했는지 모르겠다니,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불러세워 가입을 받은 것이 아니지 않은가? 민족해방애국전선이 북한 노동당의 직할 조직이란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이 조직 이외에도 북한 통전부는 여러 위장단체를 남한에 심어 놓았다』

─金正日은 조선·동아일보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가.

『金正日은 통전부-親北세력-좌파정권이 3위1체式으로 한덩어리가 되어 대한민국을 적화시킬 자신이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는데, 거의 유일한 견제세력이 조선·동아일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선전선동부장 출신이라 언론의 위력을 잘 안다. 그는 조선·동아일보를 미워하면서도 가장 두려워한다.

金正日이 조선·동아일보를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만 해도 통전부에서는 한국은 언론자유가 있는 곳인데 잘 먹히겠는가 하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우리가 親北세력에 지령을 내리고 북한 선전매체를 총동원하여 조선·동아일보를 공격하니, 남한에서 親北세력이 들고일어나고 정권이 합세하여 조선·동아일보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놀랐다』

─金日成이 金大中 집권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하여 朴正熙 암살을 지령했다가 陸英修 여사를 죽게 했다는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는가.

『통전부의 역사 기록 담당자로부터 들었다. 金日成·金正日의 일관된 전략은 金大中의 집권을 도와, 그가 집권하면 그의 손으로 보안법을 폐지하고 연방제를 수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金大中 대통령이 집권한 뒤 보안법 폐지를 시도했으나 보수세력이 강해 못 했는데, 이제는 386 主思派 출신들이 있으니 가능하지 않겠나. 통전부 제1부부장 임동욱은 386 출신 열린당 모 국회의원을 거명하면서 「사랑스런 이름」이라고 말하곤 한다』

─對南공작 전문요원은 모두 몇 명이나 되나.

『통전부가 약 2500명, 작전부가 약 8000명, 여기에다가 軍의 정찰국 요원들을 합하면 수만 명에 달할 것이다. 이들이 자나 깨나 남한 赤化를 위해 일하는데, 국정원은 對北 자유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金正日의 장남 金正男에 대해서 아는가.

『金正日은 한때 그를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가 중국에 자주 나타나는 것은 중국의 공작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金正男을 親中派로 보면 된다. 金正男은 위조여권을 가지고 외국을 많이 여행했는데 제주도에도 왔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전선의 對北 확성기 방송과 전광판 뉴스방송을 폐지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사이 북한 군인들은 군대 생활을 할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신기한 뉴스를 듣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았으니까. 북한에서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對北방송을 통해서 북한군인들이 총부리를 남쪽이 아닌 독재자한테 돌리도록 해야 하는데, 왜 국군이 金正日 한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북한 주민들을 배신하고 한국 국민들을 기만하는 그런 바보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金正日 정권은 오래 갈 것 같은가.

『북한은 지금 썩은 사과처럼 매달려 있다. 金正日만 제거되면 정권은 끝장이다. 한국은 이제 金正日 이후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그의 운명도 다 된 것 아닌가. 나 같은 사람이 탈출할 정도이니까』






집중인터뷰 - 韓日 막후 怪物崔書勉의 現代秘話史






崔 書 勉
1926년 강원 原州 출생. 연희전문 文科 수료, 충남大 대학원 문학박사, 단국大 명예문학 박사. 大東新聞 기자, 고아원 「聖방지거의 집」 원장, 서울천주교총무원 사무국장, 日本 아세아大 교수, 日本 도쿄 한국연구원 원장, 安重根 의사 숭모회 이사, 全國아리랑보존연합회 초대회장 역임. 現 국제한국연구원장, 한국몽골친선협회 회장, 韓日포럼 자문위원. 저서:「安重根 사료」, 「7년전쟁(임진, 정유왜란)」, 「몽골기행」, 「새로 쓴 安重根 의사」 등.

吳東龍 月刊朝鮮 기자 (gomsi@chosun.com)

카이젤 수염의 怪物


국제한국연구원장 崔書勉(최서면·76) 박사는 安重根 의사와 獨島에 관한 연구를 비롯, 韓日關係史에 관한 많은 자료를 발굴해 연구해 왔다. 崔씨는 1926년 강원도 原州에서 태어나 연희전문 文科를 수료했다. 한동안 言論界에 몸담았으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57년 渡日, 1969년 東京 한국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1988년까지 30여년 간 近代 韓日관계 자료를 수집, 연구해 왔다. 그는 1988년 귀국해 서울 江南區 역삼동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安重根 評傳」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국제한국연구원은 韓國學 관련 연구기관 중 드물게 희귀자료 20만여 점을 체계 있게 보관하고 있다. 특히 日帝 朝鮮總督府 시대의 문헌이나 安重根 의사 관련 자료, 서양인이 제작한 한국지도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 1974년 東京 간다(神田)의 古書店에서 발굴해 낸 安重根 의사의 옥중 수기 「安應七 自敍傳」을 포함한 이 자료들은 崔씨가 日本에서 19년간 한국연구원을 운영하면서 축적한 것이다.

그는 安重根 의사를 日本人들에게 새로이 인식시켜 1969년 현역 대학교수와 언론사 논설위원들을 중심으로 「국제 안중근 연구회」를 결성하게 했다고 한다. 舊韓末 개화파의 주역인 金玉均을 연구하는 「金玉均 연구회」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壬辰倭亂 때 日本에 끌려간 聖女 「오타 줄리아」 자료를 스페인 선교사 문헌에서 발견해 낸 것도 성과 중 하나다. 해마다 5월 두 번째 주일이면 고즈시마(神津島) 섬에서 韓日 가톨릭 신자들이 참여해 「줄리아祭」를 지내고 있다.

명성황후, 閔妃 시해사건에 관한 진상을 日本의 저명 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에게 알려 「閔妃暗殺(민비암살)」이란 책이 나오게 한 것도 그다. 1969년에는 일본 야스쿠니(靖國) 神社에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의 의병활약상을 기록한 「北關大捷碑(북관대첩비)」를 발견하기도 했다.

탁본된 北關大捷碑는 의병장 崔配天(최배천) 장군의 후손인 崔玉子(최옥자ㆍ83) 세종大 설립자의 주선으로 4월29일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강릉 최씨 사당인 篁山祠(황산사)에 그 模拓(모탁)이 모셔졌다. 한몽친선협회 회장이기도 한 崔씨는 몽골을 20여 차례 다녀오면서 몽골 관련 자료와 수백 점에 달하는 古地圖를 모았다.

지난 4월6일 서울 강남 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난 카이젤 수염의 崔書勉씨는 청재킷 차림이었다.

日本에서는 그의 이름 앞에 꼭 「韓日외교의 怪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고 한다. 그는 광복 직후의 격동기에 左右를 넘나들며 金九(김구), 張勉(장면) 등 當代의 거물들과 交分을 가졌다. 日本에서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ㆍ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前 日本 수상 등과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前 外相 같은 當代의 내로라 하는 정객들과 사귀었다. 韓日關係에서 그의 역할을 가리켜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前 주한 일본대사는 生前(생전), 「사케테 토오레나이 미치(さけてとおれないみちㆍ돌아서 갈 수 없는 길-日本 측의 입장에서 보면 崔씨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과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했다.

崔書勉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과 「日本」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알아야 한다. 「가톨릭」이 그와 盧基南(노기남) 대주교, 張勉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면 「日本」은 자유당 때 日本으로 亡命하면서 韓國學 전문가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崔書勉씨의 본명은 崔重夏(최중하). 연희전문 文科 학생이던 그는 金九를 중심으로 한 上海 임시정부 출신들이 만든 韓獨黨 산하 대한학생연맹(약칭 대한학련)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李始榮(이시영) 선생의 권유로 18세의 나이에 大東新聞에 입사해 기자로 일한다.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 가운데 新亞日報를 창간한 張基鳳(장기봉)씨와 權五哲(권오철) 前 동아일보 사회부장 등이 있다.

그는 金九의 개인 심부름을 주로 했다. 白凡이 庸齋(용재) 白樂濬(백낙준) 연희전문 학장에게 전하는 편지도 그의 손을 통했다. 崔書勉씨는 白凡과 庸齋가 자신을 『학생이 아니라 마치 해방 전부터 독립운동을 한 동지처럼 대우했다』고 회고했다.

―白凡과는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대한학련의 기본 입장은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해 정부를 유지한 분들이 정치를 해주셔야 올바른 建國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金九 선생을 지지하고 따랐어요. 학생운동은 爲堂 鄭寅普(정인보) 선생이 학생의 본분을 지키면서 하라는 말씀도 있어서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다가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金九 선생을 뵐 기회가 많았고요』

―金九 선생과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한번은 金九 선생이 몸이 편찮으셔서 서울 용산 원효로 聖心高女(현 성심여고) 자리에 있는 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어요. 가톨릭 신자 전용의 조용한 병원인데 그곳으로 절 부르셔서 신탁통치 결정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주셨어요』

崔書勉씨는 당시 金九 선생이 들려준 것이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내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것은 국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해방 전인 1943년경 미국에 있는 학자와 영국 사람들이 앞으로 전쟁이 끝나면 朝鮮을 신탁통치하자는 사전논의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카이로회담 직전, 重慶에서 중국의 蔣介石(장개석) 총통이 날 불러 『카이로에 가면 朝鮮 문제가 나온다. 그때 英國과 美國을 상대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만일 蔣介石 총통께서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하면 나는 어디로 또 亡命을 해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조선의 즉각적인 자주독립이지 妥協(타협)이 아닙니다』라고 나는 蔣총통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蔣介石 총통이 나를 『간디를 뛰어넘는 지도자』라고 했다. 결국 카이로에서 蔣介石 총통의 제안으로 「朝鮮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시킨다」는 것으로 결정했다>

崔書勉씨는 당시 어린 자신에게 金九 선생이 신탁통치에 대한 배경설명을 해 준 것에 대해 『당신의 확고한 정치철학을 젊은이들에게 남겨 주시려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면서 『당시 귀국한 金九 선생에게 이 나라를 통치해 달라고 맡기지 못하는 이 民族은 얼마나 슬픈 민족인가 하는 게 내 학생운동의 출발이었다』고 말했다.


張德秀 암살 사건


1948년 2월4일, 당시 崔書勉씨는 韓民黨(한민당)을 창당, 외교부장ㆍ정치부장을 역임한 雪山 張德秀(장덕수) 살해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돼 체포된다.

雪山은 1947년 12월2일 종로경찰서 경사 朴光玉(박광옥)과 연희전문 학생인 裵熙範(배희범)에 의해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자택에서 살해됐다.

『한독당, 한민당 兩黨 모두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美蘇共同委員會에 이야기한 날 밤에 張德秀가 南韓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 동의했다고 하니까 대한학련 학생들이 「學兵 가라고 권유한 잘못을 용서받은 것이 엊그제인데, 또 배신을 하느냐. 이래서 建國이 안 되는구나」 하던 일은 있었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어요. 사건이 발생하고 수일 후에 張澤相(장택상), 盧德述(노덕술), 崔雲霞(최운하) 등이 태화관에서 나를 회유도 하고 연행해서 물고문도 했어요』

美 군정 치하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라만 검사(대위) 지휘로 조사가 이뤄졌다. 崔씨는 미국 사람들도 몽둥이와 전기로 고문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용산 미군 조사실에서 취조를 받던 崔씨는 감방에서 살인혐의로 조사를 받던 當代의 俠客(협객) 金斗漢(김두한)을 만나기도 한다.

『해외에서 36년 간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분들이 「崔선생, 당신이 예스해야 우리가 안 맞는다」고 무조건 자백하라고 해요. 世交間인 金溶植(前 외무부 장관) 변호사도 「崔선생, 당신이 이야기를 안 하면 90세 노인들이 다 희생을 당하니 무조건 했다고 하고 진실은 재판에서 밝히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듬해 3월2일 과도정부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6회 공판 때는 白凡이 증인으로 불려와 『나는 왜놈 이외에 내가 죽일 놈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고 使嗾(사주)설을 부인, 이 사건의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21회의 공판을 거쳐 4월1일 美군정 포고령2호 위반으로 피고 10명 중 8명에겐 교수형, 2명에겐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이를 무기징역~5년으로 감형, 전국 교도소에 나눠 수감했다. 崔書勉씨는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로 갔다.

1948년 부통령이 된 李始榮 선생은 崔書勉씨가 「張德秀 암살 사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자, 당시 李仁(이인) 법무부 장관에게 再審(재심)을 요청했으나 美 군정하에서 벌어진 재판이라 재심은 곤란하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李始榮 부통령이 改名해 줘


그의 이름은 수감생활 중 崔重夏에서 崔書勉으로 바뀐다.

『李始榮 부통령이 감방으로 사람을 보내 열심히 공부하라(書勉)는 뜻으로 이름을 「崔書勉」이라고 새로 지어 화선지에 써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내 사무실에 걸려 있어요』

崔書勉씨는 형무소에서 인생의 轉機(전기)를 맞는다. 崔씨의 모친이 原州에서 그를 출산할 때 담당의사였던 安思永(작곡가 安基永의 兄)씨가 형무소로 찾아와 『천주교를 같이 믿자』고 傳道(전도)해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이다.

崔씨는 1949년 10월 위장병으로 인해 1년6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된다. 尹亨重(윤형중ㆍ前 경향신문 사장) 신부에게 교리 강습을 받을 무렵, 6ㆍ25가 발발했다.

『6ㆍ25 발발 며칠 후 교리를 배우러 신부님께 찾아갔더니 명동성동은 이미 인민군에게 점령됐어요. 尹신부 방에 가보니까 「崔선생, 급히 지방에 볼 일이 있어 가니 돌아와서 만나뵙겠습니다」라고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어요. 「난리 중에도 이렇게 약속을 무섭게 지키다니, 천주교를 믿을 수밖에 없구나」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피란을 못한 그는 人共 치하에서 광복군 제3지대장 출신 金學奎(김학규) 장군과 같이 지냈다. 6ㆍ25 때 인민군에 의해 형무소에서 석방된 金學奎 장군에게 南으로 피란하자는 결심을 하게 하고 경기도 수원시 조암리로 피난처를 제공했다. 아이가 없던 金장군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들을 얻었다.

金장군은 6ㆍ25 때 拉北(납북)을 면하게 해 준 崔書勉씨와 5ㆍ16 후 병든 몸을 육군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해 준 朴正熙 대통령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겼다고 한다. 申鉉俊(신현준) 해병대 초대 사령관이 崔씨에게 들려준 말에 의하면 『자신과 朴正熙 대통령은 광복 후 金學奎 장군의 광복군 제3지대에 소속돼 있었다』고 한다.

1951년 1ㆍ4후퇴 때, 崔書勉씨는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吳基先(오기선) 신부가 맡긴 고아 100명을 데리고 「聖방지거의 집」을 운영한다. 美 네브래스카州 오마하市에 에드워드 플래너건(Edward Flanagan) 신부가 집없는 소년들의 보호소인 보이스 타운(Boys Town)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것을 모델로 崔씨는 모범적으로 고아원을 운영했고, 이 사실은 서울까지 전해졌다.

이때 崔書勉씨를 도운 사람이 兪鎭午(유진오) 박사의 부인 李容載(이용재) 여사, 毛允淑(모윤숙) 시인, 現 대통령 부인인 李姬鎬(이희호) 여사, 金學仲(김학중) 前 가톨릭 醫大 성모병원장 등이었다.

盧基南(1902~1984) 주교가 『敎區 본부에서 비서역과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을 맡길 테니 함께 일하자』며 固辭(고사)하는 崔씨를 네 차례의 설득 끝에 데려갔다. 이는 盧주교뿐 아니라 서울교구 사무총장인 張勉 박사와 인연을 맺게 된 출발이기도 했다.

『천주교는 자랑스러운 종교였어요. 외국에서 가톨릭 신부가 오기 전에 신자(李承薰)가 먼저 천주교를 배워와서 전파한 것은 세계 傳敎史上 唯一한 경우지요. 그런 천주교가 3ㆍ1운동 때 많은 사람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한 것을 누가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33人 중 가톨릭 신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죠. 盧基南, 張勉, 尹亨重씨 등 뜻있는 분들은 천주교가 人材를 안 길러서 그렇게 됐다는 것을 절감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盧주교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日本으로 亡命


崔書勉씨가 日本과 인연을 맺은 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다. 李承晩 정권은 1957년 崔書勉씨를 6ㆍ25 때 脫獄(탈옥)한 사람으로 몰아 체포하려 했다. 그를 救命하기 위해 위장병을 치료했던 서울大 병원 의사와 尹亨重 신부가 趙寅九(조인구) 담당검사를 찾아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당시 李承晩 정권이 선거에서 표를 바꾸는 등 부정선거를 일삼았잖아요. 천주교에서는 이런 것은 못 참거든. 경향신문을 통해 맹공격을 했어요. 年老한 李承晩 대통령이 쓰러지면 정권은 반대당인 張勉 박사에게 넘어간다는 위기감에서 張勉 세력의 주요 인물들을 없애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다울링(Walter C. Dowling) 주한 美 대사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다울링 대사는 『以北에서 넘어온 사람이 아니고 우방국인 남한에서 온 사람에게 망명 허가를 내줄 수가 없다』고 했다. 盧基南 주교의 주선으로 천주교 성직자로 변장한 그는 美 군용기를 타고 日本으로 密航(밀항)했다.

공항에 出迎(출영)나온 日本 천주교 신도회장의 안내로 당분간 숨어 지냈다. 얼마 지나자 한국에 있는 포르투갈, 쿠바 신부들의 노력으로 이들 정부로부터 망명허가를 얻었다. 崔씨는 밀항자의 신분으로 초대 문부성 대신을 지낸 다나카 고타로(田中耕太郞) 당시 최고재판소장(대법원장)을 찾아가 출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다나카 고타로 소장은 『법의 수호자로서 밀항자를 밀출국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신원보증을 할 테니 자수해서 특별 체류허가를 받으라』고 권유를 했다. 崔씨는 이 권유를 받아들였고, 신원보증은 다나카 고타로 최고재판소장, 재정보증은 聖心女子大學 이사장이자 성심수도회 극동 관구장인 브리지트 키오(Brigitte Keog) 수녀가 하게 됐다.

『다나카 고타로 선생이 「망명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겠냐」며 피아노를 배워 위안을 삼으라고 권하던 기억이 납니다. 피아노는 배우기 쉬워 마흔이 넘어서 배운 자신도 1년에 한 번 獨奏會(독주회)를 한다고 했어요. 당초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겠다던 내 생각을 바꾸도록 한 분도 그분이지요. 日本人들에게 한국을 올바로 인식하도록 지도해 주는 것도 이 時期에 필요한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후 문부성 장관을 지낸 오타 고조(太田耕造) 아세아大 총장과 재정보증인 브리지트 키오의 경제적 지원으로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에 돌입한다. 만 5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日本 국회도서관에서 자료 속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한국 역사를 하나도 모르는 내가 무슨 한국사람이냐, 매일 매일 공부할수록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졌습니다. 속으로 이탈리아에 안 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崔씨는 1969년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을 설립한 자유주의 교육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딸의 도움으로 그가 제공한 私邸(사저)에 東京 한국연구원의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崔씨는 1970년 10월 연세大 朴大善(박대선) 총장과 게이오大 사토사쿠 총장을 연결해 두 대학 간 자매결연을 맺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日本에서 한국연구원을 만든 崔書勉씨에게 母校인 연세大가 많은 지원을 하자 그가 답례한 것이기도 했다. 한반도문제 전문가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大(慶應大) 교수도 兩校 교류 제1호로 연세大에 유학한 인물이다.

崔씨는 金九 선생이 生前에 언급한 친일파 처리방법을 소개했다.

『어느 신문사 사장이 金九 선생에게 「선생님께서 빨리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혼란하다」고 했답니다. 金九 선생은 「日本이 바로 이웃에 사는데 親日派는 많을수록 좋다. 없다면 만들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말하는 것은 「反민족적」 親日派를 처단하라고 한 것이지, 언제 단순히 親日派를 처단하라고 했느냐. 내가 中國에서 왔다고 親中派를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親中派도 아편장사 등을 하는 反민족적 親中派는 처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문사 사장이 「그럼 언제 反민족적 親日派를 처단하시렵니까」 하니까 「建國이라는 북새통에 불을 끄려면 강도의 손도 빌려야 한다」면서 「전부 힘을 합쳐 일단 建國부터 하고 그 다음으로 숙청대상은 새로 생기는 국회에서 유권해석을 내려 기본법을 제정해야 할 문제」라고 말씀하셨답니다』

崔書勉씨는 『日本이 우리나라를 통치한 방식은 총독과 고급 관리를 日本人 자신들이 직접 맡는, 세계 식민 지배 사상 유례가 없는 직접 통치였다』고 했다. 그래서 日帝에 협력한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처벌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예컨대 학병에 끌려간 사람은 규탄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慰撫(위무) 대상이라는 것이다. 당시 日本 제국주의의 강압에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총독부 간부, 『金性洙 선생이 진짜 애국지사』


崔書勉씨는 呑虛(탄허) 스님이 작고하기 전,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反민족적 친일파를 가려낼 철학적 기준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呑虛 스님은 「莊子의 人生訓(인생훈)을 보고 배워야지」 하시며 연필을 가지고 오셔서 인생훈 중 「불은 바깥에서 끄는 것보다 안에서 끄는 게 더 힘들다」는 말씀을 써 주셨어요. 밖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보다 국내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 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뜻이었어요』

그는 「안에서 불을 끈」 분으로 金性洙 동아일보 社主, 方應謨(방응모) 조선일보 社主를 꼽았다.

『고등경찰의 총지휘자인 조선총독부 보안과장을 지낸 야기 노부오(八木信雄)를 잘 압니다. 술 한 잔을 하며 「당신쯤 되면 한국 사람을 전부 다 안다고 할 수 있는데, 조선 사람 중 진짜 애국지사를 한 명만 골라보라」고 했더니 주저없이 金性洙 선생을 꼽아요. 총독의 명령으로 귀족원 의원을 임명하려고 金性洙씨를 찾아가 도장을 찍으라고 하니까 아무 대답이 없더래요.

시간을 너무 끌어 야기 노부오가 「빨리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니까 「신문사, 방직회사까지 다 내놓았는데 이것을 안 하려면 또 무엇을 내놓아야 하느냐」고 하더래요. 이 순간 야기 노부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그의 본심이 抗日(항일)에 있었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方應謨 선생도 평양에서 東亞日報 지국을 하다 朝鮮日報를 인수해 당시 東亞日報와 다른 잡지들에 실리지 못하는 反日的 내용,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글까지도 수용하며 抗日을 했어요』

崔씨는 『거짓 없는 자서전을 쓸 수 있다면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자서전을 쓰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루소나 오거스틴처럼 그 안에 자기 罪를 고백하고 있는 것은 드물다고 생각해요. 이런 의미에서 金九는 부끄러움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白凡逸志」라는 역사적 참회록이 남았다고 생각해요』

―金九 선생이 위대한 분임에는 틀림없지만 李承晩의 단독정부 수립을 대체할 만한 현실적인 代案을 제시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정치는 현실인데 실현 가능한 代案을 제시하지 못했고, 남북협상도 추진하다가 실패했단 말입니다. 국가 지도자로서는 李承晩에 비해 부족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金九 선생을 행정가적인 정치인으로 보면 안 되겠지요. 민족 독립운동 시기의 정치인은 교훈적 독립운동가여야 합니다. 金九 선생을 평가할 적에는 교훈적 독립운동가 金九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 간디를 민족 독립운동에 있어서 훌륭한 사람으로 봐야지, 네루 시대의 정치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日本을 다루는 거울, 「李承晩의 平和線」


―李承晩 대통령을 보는 視角이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습니까.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역사의 테두리에서 평가를 하는 안목을 길러야지, 자기 환경이나 자기 감정 때문에 「全部 아니면 全無」라는 생각은 안 되겠다는 겁니다. 지금은 李承晩 대통령 아드님 李仁秀(이인수) 「우남 이승만 박사 기념관」 이사장과 잘 지내요. 나는 李承晩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망명을 했으면서도 日本에서 30년 동안 욕을 안 했어요. 그건 周易에 「不忌其國(불기기국)」이라는 말이 있는데 「외국에 가서 자기 나라를 욕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죠.

10년이 지나니까 강산도 변하더군요.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계실 때 함께 李承晩 대통령 墓에 참배도 했어요. 우리는 과거를 규탄할 줄은 알지만 미래를 그리는, 역사적 로맨스를 만드는 데는 부족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해서 金九 선생 아들 金信(김신)씨, 金性洙 선생 아들 金相万(김상만) 동아일보 前 회장, 李承晩 대통령 아들 李仁秀씨 등 세 사람을 초대,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1952년 1월18일, 한국연안수역 보호를 위해 李承晩 대통령이 平和線(일명 李承晩 라인)을 그은 것이 그 뒤 韓日교섭에서 한국이 유리한 고지에 서도록 만든 것 아닙니까? 그 뒤 張勉이나 朴正熙 정권 때 말입니다.

『당연히 유리했죠. 韓日관계에서 日本이 유일하게 弱者의 입장이 된 경우지요. 4ㆍ19가 나니까, 張勉 정권과 가까운 日本 首相이 날 불러 강연을 시키더니 협상을 제안했어요. 평화선은 그대로 놔두고 日本 배가 한국쪽 평화선 안에서 고기를 잡되, 잡은 뒤 鎭海나 馬山에서 가공하도록 하는 韓日水産合同公社를 만들자는 거예요. 고기만 잡게 해주면 생선값의 일부를 한국에 떨구겠다는 제안이지요. 金永善(김영선) 재무부 장관이 내게 사장자리를 제의한 적이 있어요. 아무튼 그때 평화선 때문에 일본 수산업계가 떠는 것을 봤어요.

日本 사람들이 평화선 때문에 배가 잡혀가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고기를 잡아서 나눠먹자는 소리를 했습니다. 내가 李承晩 대통령 비판을 하다가도 이런 것을 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자 盧基南 대주교에게 깍듯이 대했던 張勉 박사


1951년 盧基南 주교에 의해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이 된 崔書勉씨는 직속상관인 사무총장 雲石 張勉을 처음 대면한다. 그는 張勉 박사를 「인격자」, 「조선왕조적 선비」라고 평했다. 1948년 제3차 유엔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한 張勉 박사는 1949년 초대 駐美大使가 돼 韓美 國交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제3차 유엔총회에 갔을 때 일이에요. 변변하게 양성한 외교관 하나 없던 실정이라 張勉 박사는 외교문서 작성하는 것 하나부터 프랑스, 영국 외교관들에게 배웠답니다. 매일 아침 미사에 빠지지 않았는데 그때 濠洲(호주) 대표로 온 천주교 주교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더래요. 「코리아에서 유엔 승인 문제로 왔다」고 하니까 「내가 앞장서서 도와주겠다」고 해 큰 덕을 봤답니다. 信仰(신앙)이 나라를 구해줬다고 말하더군요』

실제로 張勉 박사는 외국에 나가면 호텔 잡은 다음에는 성당을 찾아 미사 시간을 확인하고 매일 아침 미사에 가서 領聖體(영성체ㆍ성체를 먹는 것)를 할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였다. 張박사는 朴順天(박순천), 郭尙勳(곽상훈), 吳緯泳(오위영), 玄錫虎(현석호), 金永善(김영선)씨 등 2공화국 주요 정치인들 상당수를 가톨릭으로 改宗(개종)시켰다. 특히 張박사는 불교신도회 회장이었던 육당 崔南善(최남선)을 改宗시켰다. 病席(병석)에 있던 崔南善은 당시 KBS를 통해 충격적인 개종 발표를 했고 聲明書를 崔書勉씨가 낭독했다.

李哲承(이철승) 前 의원도 입교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金在淳(김재순) 前 국회의장도 張勉 박사로부터 『자네 영혼을 내게 맡겨야겠네』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박사님, 저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朱基徹(주기철)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말해 더 이상 입교 권유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崔書勉씨는 『張勉 박사는 농담도 잘 하시고 말씀도 구수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1925년 張박사께서 美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니까 부친께서 아무날 아무시에 아무개집 딸과 결혼한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신부감을 보여주시질 않더래요. 부친께 신부감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니가 봐 뭘해. 애비가 봤으면 됐지」라고 하시더랍니다. 결혼식장에서 절을 하다가 신부를 흘끔 보니 눈이 두 개 달렸길래 「이젠 살았구나」 했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미스터 崔는 좋은 시대에 연애하고 장가가서 행복한 거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張勉 박사가 정치에 入門(입문)한 과정을 들으셨습니까?

『張勉 박사는 일제 때 서울 東星商業學校(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 광복 때까지 근무했어요. 어느 날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李承晩 대통령이 盧基南 주교에게 각계 대표를 망라한 民主議院(민주의원-1946년 구성된 美 군정청 자문기관) 28명을 선정하는데, 천주교 대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때 盧주교의 추천을 받아 민주의원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겁니다. 張박사는 「盧주교께서 갑자기 추천해서 民主議員이 되었다」고 하시며 「내가 英語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돼 있대」라고 멋쩍어 하시더라고요』

―張勉 박사의 親日활동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지요. 기회도 없구요. 워낙 온순한 사람이 돼서요』

―張勉 박사가 創氏改名(창씨개명)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張勉 박사는 日帝 때 다마오카 츠토무(玉岡勉)로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친일파들은 창씨개명을 안 했어요. 영친왕 李垠(이은) 황태자도 姓을 갈았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안 해도 견디니까. 창씨개명한 사람들은 오히려 독립운동자가 많아요. 안 하면 쌀 배급을 안 해주고 학교도 못 들어가는데요. 사람이 죽어갈 때 金哥(김가)라고 하면 입원이 안 되고 「가네야마」하면 되는데 창씨개명 안 할 재간이 있나』

張勉 박사와 盧基南 대주교는 사제지간이다. 張勉 박사는 大神學校(대신학교, 現 가톨릭大)에서 영어와 일본말을 가르쳤다. 그때 제자가 盧基南 바오로 주교였다. 張勉 박사가 盧주교에게 『바오로야, 이것 읽어봐라』하고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張勉 박사는 盧基南 대주교를 『주교님』이라고 깍듯이 모셨고, 盧基南 주교는 張勉 박사를 편하게 『장박』이라고 불렀다.


5ㆍ16 군사혁명 때 피신한 것은 천주교식 처신


―張勉 박사는 5ㆍ16 군사혁명 때, 당일 새벽 5시부터 5월18일 정오까지 55시간 동안 수도원으로 피신, 國政(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직무유기를 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듣습니다.

『난 그렇게 보질 않아요. 그 상황에서 張勉 박사는 철저히 천주교式으로 처신했을 거라고 봅니다. 천주교에선 굶어죽을 지경이면 차라리 훔쳐 먹어 생명을 유지하는 게 옳은 겁니다. 목숨은 내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군사혁명이 났을 때 거기 앉아서 죽는 건 신앙이 용서를 안 했을 겁니다』

군사혁명이 일어나던 날 새벽, 張勉 박사는 반도호텔에서 銃聲(총성)을 듣고 부인 金玉允(김옥윤) 여사와 함께 혜화동 갈멜수녀원으로 피신한다. 혁명군 측에서 盧주교를 통해 張勉 박사를 수소문하지만 결국 찾아내지를 못했다.

『나중에 갈멜수녀원에서 張勉 박사가 나온 후, 盧주교가 프랑스인 수녀원장에게 전화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다그쳤더니 프랑스 대사한테 물어보라고 하더래요. 프랑스 대사가 하는 말이 「주교님,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프랑스에서는 政變(정변)이 나면 정치가가 숨는 데가 수도원입니다. 프랑스 정치 발달사는 수도원에서 감춰준 역사」라고 이야기를 하는 데 할 말을 잃었답니다』

―張勉 박사는 한국 정치사에서 보면 유약한 정권으로 평가되는 반면, 당시 海外의 평가는 歷代 가장 자유롭고 민주화가 실현된 시기였다고 평가하는데요.

『이상주의적 민주주의 시기였지요. 張勉 박사는 인내심이 강한 분입니다. 張勉 박사가 부통령 때인 1957년 베트남의 고딘디엠(吳廷琰) 대통령이 한국에 왔어요. 李承晩 정부에서 고딘디엠 대통령 환영식을 열어 주면서 부통령인 張勉 박사를 안 불렀습니다. 더군다나 張勉 박사와 고딘디엠은 당시 스펠만(Spellman) 뉴욕 대주교가 「장차 아시아의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아끼던 사람들로 미국에서부터 교분이 있었습니다.

張勉 박사는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명동성당을 방문한 고딘디엠을 만났을 때 李대통령에 대해 한 마디도 불평을 안 했어요』

張박사는 작곡가 安益泰(안익태)씨와 절친했다.

『1955년 李承晩 대통령 80회 탄신일, 스페인에 살고 있는 安益泰가 귀국했어요. 천주교에서도 安益泰가 천주교 신자라는 걸 확인하고 張勉 박사에게 요청해 총무원 초청 환영파티를 열어준 적이 있어요. 국일관에서 환영 행사를 하는데 기생도 있을 거 아니에요? 張勉 박사가 기생들에게 「國歌를 지으신 분이니까 잡스럽게 굴지 마라」며 곤란한 장면을 멋지게 넘기시더라고요』

4ㆍ19가 터지니까 安益泰는 日本에 망명중이던 崔書勉씨에게 電報를 친다. 「드디어 李承晩이 쓰러졌다. 이젠 張勉 박사가 대통령으로 나가야 한다. 張勉 박사가 나를 러닝메이트로 삼도록 盧基南 주교와 張勉 박사에게 부탁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보에 이어 편지도 도착했는데 보니 「He knows me very well.(그는 나를 잘 안다)」이라고 씌어 있었다.

『安益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스페인에 가서 스페인 여인과 결혼해 살고 있었어요. 순진한 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張勉 박사와 盧주교에게 보냈어요. 盧주교가 유럽 가시는 길에 東京에 들르셨길래 安益泰가 부탁한 것에 대해 물었어요. 盧주교는 「한국 사람은 뭐 좀 성공하면 정치를 하려고 한다」고 이야기하시더니 「의사면 의사, 음악이면 음악으로 출세를 해야지, 그래서 장박(張勉)에게 그거 무시하라고 했다」고 하시더군요』

崔書勉씨가 이 말을 安益泰에게 그대로 전했더니 『무식한 것들은 할 수 없구먼. 미국에 있는 폴란드 망명 정부 대통령이 피아니스트인 페테로프스키다. 이 사람은 연주가 끝나고 청중으로부터 열띤 박수를 받을 때면 「나에게 주는 박수를 고생하는 동포들과 조국에 달라」고 해 모금을 했다. 내가 그까짓 부통령 타이틀이 뭐가 필요하냐. 나는 6ㆍ25 후에 고생하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페테로프스키가 되려고 한 거지』라며 섭섭해 했다고 한다.

『어쨌든 張勉 박사는 음악인 安益泰를 좋아한 거지, 정치인 安益泰를 생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어요. 정치적 목적으로 安益泰같이 유명한 사람을 부통령 시키면 얼마나 유리하겠느냐는 고려를 절대로 안 하는 사람이에요』

―5ㆍ16 당시 혁명군은 해병대와 공수부대, 6군단 포병단과 30사단 및 33사단을 다 합쳐도 3400여 명 내외였습니다. 또 5ㆍ16 다음날 벨기에 국왕 訪韓이 예정돼 있어 경호 경비를 위해 경기도 경찰 4500명이 서울에 와 있었습니다. 張勉 박사가 쿠데타軍 타도 결심만 했다면 제압할 수 있었던 상황 아닙니까?

『張勉 박사가 무리해서 쿠데타를 진압할 마음을 먹었다면 할 수도 있었겠지요. 천주교 신자인 李翰林(이한림) 1군사령관, 代子인 姜英勳(강영훈) 前 총리가 육사 교장으로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張박사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동포들끼리의 殺生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張勉의 代子, 李會昌의 부친 李弘圭옹 추억


崔書勉씨는 李會昌 한나라당 前 총재는 모르지만, 그의 부친 李弘圭(이홍규ㆍ97)옹은 잘 안다고 했다. 그가 李옹을 만날 때인 1955년은 李옹이 서울고검 검사 시절이다. 盧基南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지도자들은 各界를 망라한 人材를 양성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던 때였다. 張勉 박사와 盧基南 주교는 李弘圭 검사를 崔書勉씨에게 소개했다.

李옹은 1951년 총리로 있던 張勉 박사를 代父로 모시고 온 가족과 함께 가톨릭에 입교한 가톨릭 신자였다. 李옹은 「청백리」 판사로 이름높던 故 金洪燮(김홍섭)씨도 천주교로 개종시킨 사람이다. 李옹은 1965년 현역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가톨릭법조인회 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무료 법률상담 및 변론활동을 벌여왔다. 이에 대한 공로로 1994년 12월 세계 인권선언일을 맞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李弘圭옹은 청주지검 검사로 있을 때, 李承晩 대통령과 가까운 충북지사 尹모씨를 구속한 일로 미운 털이 박혀 현직 검사로는 처음으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혐의는 사상범이었다. 6ㆍ25 발발 직전, 서울지검 검사로 있을 때,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남로당원 혐의자를 풀어 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상범 혐의는 풀리고 결국은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으나, 검찰의 공소취하로 풀려나 복직했다.

崔書勉씨는 『李옹은 잡아넣어야 할 사람은 꼭 잡아넣고 억울한 사람은 반드시 풀어준 강직한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좌익으로 말하면 당시 金大中씨도 가톨릭으로 입교했을 때 좋은 「보호색」을 쓴 것 아닌가요. 그 당시엔 가톨릭은 「反共」을 상징하는 최고의 보증수표였으니까요』

―金大中씨에 대한 잡음이 왜 나왔답니까.

『張勉 박사가 金大中씨를 과할 정도로 重用(중용)하니까 잡음이 났지요. 주변에 鄭一亨(정일형), 金永善, 鄭憲柱(정헌주), 金應柱(김응주) 등이 잡음을 막는 데 도왔습니다』

崔씨는 작년 여름 한 친구로부터 李弘圭옹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즉시 李弘圭옹에게 전화를 했다. 1957년 渡日 후 45년 만의 통화였다. 96세였을 그가 살아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했더니 단박에 「최형 아니야?」하고 알아봐요. 어찌나 가슴이 뭉클하던지 그 길로 찾아가서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어요(이야기를 하던 崔씨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오는 6월25일이 盧基南 대주교 忌日(기일)인데 탄신 100주년이 돼요. 그날 盧주교를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李弘圭가 얼마만큼 李承晩 治下에서 고통받던 천주교를 保護해 주었느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겁니다』

지난 5월2일 崔書勉씨는 서울 종로구 명륜동 2가에 있는 李弘圭옹의 집을 찾았다. 日帝시대에 지어진 허름한 한옥집에 들어서니 金四純(김사순ㆍ91) 여사가 반갑게 崔씨를 맞았다. 李옹은 臥病(와병)중인 까닭에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고 한다.

잠시 후 낡은 가구들로 채워진 안방으로 崔書勉씨가 들어서자 病色이 완연한 李弘圭옹이 온힘을 다해 崔씨를 향한 반가움을 표시했다. 혈기왕성한 「李弘圭 검사」의 사진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고 주위에는 聖畵(성화)들이 보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날씨 이야기를 화제삼아 기념촬영도 했다.

崔書勉씨는 李옹에게 『金大中씨가 李弘圭 검사의 신세를 그렇게 지고서 李會昌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자 李옹은 말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李弘圭씨가 그때 서울고검 부장검사였었는데 李弘圭씨가 없었으면 張勉 정권도 金大中 정권도 못 나왔을 거예요』라고 하자 그때까지 눈을 감고 잠자코 고개만 끄덕이던 李弘圭옹이 작은 목소리로 『그럼』 하고 수긍했다. 崔書勉씨가 李옹과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유당 정부에서 張勉 박사를 이모저모로 치려고 장난할 때, 중대한 국면마다 李弘圭가 부장검사니까 몰래 알려줬지요. 不義를 보면 못 참는 성격이었니까. 金大中씨도 멀리서 혜택을 본 것 아닙니까』

다시 李弘圭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金四純 여사가 李옹을 대신해 崔書勉씨가 金大中씨를 李옹에게 소개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1957년 6월10일, 盧基南 주교님이 계시는 주교관에서 파티를 열 때 崔書勉씨의 소개로 金大中씨를 처음 만났어요. 우리도 張勉 선생의 代子이고, 그(金大中)도 代子라 서로 인사를 했습니다』

金四純 여사는 과거 李弘圭옹이 사상범 혐의로 구속됐을 때의 상황도 이야기했다.

『현직 검사를 빨갱이라고 조사를 했어요. 이 사람이 「너희가 나를 죽여봐라.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고 했어요. 옷이 집으로 왔는데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가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 살배기인 막내를 들쳐업고 법무장관에게 달려갔습니다. 장관실에 들어가니 대법관들이 놀라며 「우리가 있는데 왜 오셨냐」고 하길래 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장관을 만나 「생사람을 잡는 게 장관이냐」고 따졌어요. 장관이 「사모님, 잘못했습니다」 하며 빌었어요. 빨리 남편을 석방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金四純 여사는 李會昌 前 총재에 대한 언급도 했다. 그는 『아들이 「내가 정권을 잡더라도 절대로 정치보복을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평소 金大中씨 욕하는 것을 듣지 못했고, 빈말은 안 하는 성격이라 그대로 실행할 겁니다』라며 『金大中씨가 세 아들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金大中씨가 마음 바른 것은 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崔書勉씨는 李弘圭옹에게 『꼭 백 살까지 사셔야 한다』면서 『그때 내가 좋은 술집을 예약을 할 테니 건강하시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李弘圭옹이 작년에 민주당으로부터 「日帝 치하 해주ㆍ서울ㆍ광주 등지에서 10여 년 간 검찰 수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일제 침략자들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감옥에 보내는 데 적극 협조했으며, 일상 생활에서도 마루야마(丸山)로 창씨 개명을 하고 가족에게 일본어만 사용토록 했다」는 내용의 공격을 받았는데, 실제 親日을 했다고 보십니까.

『친일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내놓아야 하는데 증거가 없잖아요. 일제 때, 어떤 자리에 있었으니까 친일파다 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죠』


경향신문 사무실에서 張勉 박사에게 金大中 소개


대한매일 1999년 6월12일자에는 金大中 대통령이 張勉 박사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는 과정이 나온다. 다음은 金대통령의 증언이다.

<기자-張勉 박사를 만나기 전에도 성당에 나간 것으로 압니다. 영세를 받은 과정을 들려주십시오.

金대통령-제 前妻의 처가가 가톨릭 집안이기 때문에 자주 성당에 나갔지만 정식으로 영세를 받은 것은 1957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한 尹亨重(윤형중) 신부로부터 교리강독을 받았고 盧基南 대주교의 방에서 金哲珪(김철규) 신부라고, 그때 우리 민주당과 매우 가까운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崔書勉씨라고, 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張박사를 代父로 소개해 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張박사하고 영적으로 代父ㆍ代子의 관계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저는 신파의 총수인 張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崔書勉씨에 따르면 당시 웅변학원을 하고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은 金相賢(김상현) 前 의원과 함께 경향신문 4층에 있던 자신의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 방으로 자주 놀러왔다고 한다. 그때 金대통령은 崔書勉씨에게 『천주교 신자가 됐으면 좋겠으니 신부를 한 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崔書勉씨는 당시 崔南善, 金性洙, 吳華英(오화영) 등에게 교리를 가르쳐 명성이 높은 尹亨重 신부를 소개했다.

金大中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리학습을 했다고 한다. 尹亨重 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자네가 보낸 그 사람 똑똑해. 질문하는 거 신랄하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세를 받은 金大中씨는 崔書勉씨에게 「토마스 金大仲(편집자 注ㆍ金大中 대통령의 改名 전 이름)」이란 사인이 적힌 사진을 하나 보냈다.

영세를 받고 나서 金大中씨는 『뭐가 되고 싶냐』는 尹亨重 신부의 질문에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직속 상관이 張勉 박사니까 자네가 소개하라』고 이야기했다. 崔씨는 金大中 대통령을 서울 소공동에 있던 경향신문 고문실에서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인 張勉 박사에게 소개했다.


美 CIA는 『金大中이 표 얻기 위해 가톨릭 신도됐다』고 의심


―金대통령을 소개한 후 張勉 박사가 崔박사께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고맙다고 그래요. 張勉 박사와 盧基南 주교는 천주교의 가장 큰 고민이 人材難이라고 말해 왔어요. 우리가 3ㆍ1운동 때 천주교 대표가 참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으니까요. 인물을 길러보자는 의미에서 李弘圭, 金大中씨 등을 환영한 겁니다』

그때 崔씨는 盧基南 대주교, 張勉 박사, 韓昌愚(한창우) 경향신문 사장 등으로부터 정계진출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던 시기였다. 「張德秀 사건」 관련자로 정치적으로 크는 것이 張勉 박사에게 累(누)를 끼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張勉 박사에게 『나는 정계 진출을 안하니 나를 생각하시듯이 金大中씨를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이런 깊은 내용이 있어선지 張勉 박사와 盧주교는 金大中씨를 각별히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金大中씨가 하루아침에 민주당 상무위원, 선전부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崔씨는 말했다.

『1972년 金大中씨가 망명한 뒤 美 CIA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질문을 받았고, 주일 미국 대사 로버트 잉거솔의 특별보좌관인 아마코스트(주일 美대사 역임)가 직접 찾아와 물었습니다. 주로 「金大中 종교는 가짜 아니냐. 金大中 자신은 가톨릭에 다니면서 부인이 개신교에 나가는 것은 선거 때 표를 얻으려는 전략 아닌가」 등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공격할 게 있고 안할 게 있다고 했어요. 나와 金大中의 관계를 소개하고, 그 사람의 신앙은 의심하지 말라고 했어요』

―경향신문 안에 있던 총무원 사무실에서 일할 때 金大中 대통령과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어느 날 나에게 「최형!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이니 경향신문에 발언권이 있지 않느냐. 신문사에 破紙(파지-신문 인쇄과정에서 나오는 못 쓰는 종이)가 나오는데, 破紙를 나에게 불하하면 그 돈으로 훌륭한 웅변가를 양성하겠다」고 그랬어요.

破紙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당시 韓昌愚 경향신문 사장에게 「내 친구 金大中이 젊은 사람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파지를 달라 한다」고 했어요. 破紙 이야기를 하니까 韓사장이 깜짝 놀래요. 알고 보니 그 동안 破紙를 처분한 돈이 신문사 총무국장의 「호주머니 돈」이 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어요. 金大中씨 덕택에 경향신문 부패방지에 큰 도움이 된 셈이죠. 이때 金大中이란 사람이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韓民統 관련, 내란 음모사건 때 거짓말한 金大中』


1980년 金大中 내란 음모사건 당시, 金大中씨는 검찰 조사과정,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일명 韓民統) 일본 본부의 성격, 그리고 이 단체에 참가한 郭東儀(곽동의)와 裵東湖(배동호) 등이 북한ㆍ조총련과 연계된 간첩 혹은 親北 左派(좌파)라는 사실이 제기되자, 『재일교포 崔書勉씨에게 물어본 즉, 베트콩파(1960년대 초 북한의 지령을 받은 郭東儀, 裵東湖를 중심으로 하는 불순분자들이 민단 조직 내에 만든 反韓조직)는 反민단계 사람으로서 그들과 韓民統을 결성하는 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崔書勉씨에게 진술을 요청했다. 崔씨는 『본인이 베트콩파들과 연합하여 韓民統을 조직해도 의심받을 일이 없다고 했다는 것은 전연 근거 없는 말이며 오히려 그 반대』라며 金大中씨와 반대되는 진술을 한 바 있다.

『나는 金大中씨에게 「위험하니까 (그 조직에) 가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나 수사관들은 「金大中이는 당신이 가라고 해서 갔다고 한다」는 거예요. 金大中씨가 내 이야기와 정반대로 진술한 것을 보니 당시에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렇게까지 이야기했겠는가 생각하니 인간적인 憐憫(연민)이 들더군요』

―그때 金大中 대통령과 사상문제로 토론한 적은 없었습니까.

『보통사람보다는 「참신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했으니까요. 내가 놀란 게 대학엘 다녀본 일이 없는 사람인데 讀書量(독서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말하는 게 논리적이고. 바꿔 말하면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거라. 그가 통일을 金九에게 제대로 배우고 민주주의를 張勉에게 제대로 배웠다면 오늘의 실패는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후쿠다가 金大中 대통령에게 「형님」이라고 한 사연


―金大中 대통령을 일본 정치인에게 소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1964년 金大中씨가 6代 국회의원에 당선되어서 日本으로 날 찾아왔어요. 앞으로 정치가로서 친하게 지낼 만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길래 自民黨 내 최고 실력자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당시 대장상을 소개해 줬어요. 한참 이야기를 들어보니 후쿠다가 생각하기에 똑똑하거든.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그만 끝낼 심산으로 「金선생, 올해 몇 살이시냐」고 물었어요. 「서른아홉」이라고 하니까 후쿠다가 갑자기 「형님」 했어요. 金大中씨가 깜짝 놀라 「제가 왜 兄이 되느냐」고 하니까 후쿠다가 「내가 명치 38년생(1905년생)인데 그날부터 한 살도 먹지 않았다. 당신이 서른아홉이니까 내 兄이 아니냐」고 했어요. 후쿠다와 金大中씨의 시작은 이렇게 좋았어요.

하지만 金大中씨는 후쿠다와의 인연을 소중히 하지는 못했어요. 朴正熙 대통령 욕을 하려다 보니 「日本이 朴正熙를 지원하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 한국도 베트남처럼 된다」고 해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수상이나 후쿠다 다케오 등 일본 보수진영과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日本에 머무는 동안 강연에 자주 나갔습니까.

『제한된 강연이지요. 자민당 내에서 좌경적 경향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德馬) 의원이 이끄는 아시아·아프리카 의원연맹같이 인원 수도 적고 영향력이 없는 곳에서 강연을 했어요. 강연 원고를 봐달라고 해서 봐주곤 했는데 전문성은 없지만 一過性 강연으로는 괜찮았어요. 강연도 잘하고』

1973년 8월8일 金大中 납치사건이 발생한다. 崔書勉씨와 도쿄 한국연구원에서 함께 일하던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前 駐韓 일본대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상의했다고 한다. 崔씨는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일본인이 해결해야 한다』고 가나야마 前 대사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韓日 간 경제협력이 한창 진행중인 상황에서 순조로운 양국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을 주한 대사 시절부터 잘 알았던 가나야마 前 대사는 청와대에 「대통령 각하, 분명한 조치를 취하십시오」라는 내용의 짤막한 전보를 치기도 했다.

―金大中 납치사건은 왜 일어났다고 보십니까.

『분명한 것은 金大中씨가 日本에서 영웅처럼 환대받으니까 그를 납치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조차도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제 나라 욕을 하고 다니냐」고 빈축을 사던 시기에 납치사건이 벌어졌어요. 나는 金大中 납치사건은 일본의 이러한 분위기, 한국의 필요가 어우러진 합작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金大中 납치사건이 난 다음 日本 언론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朴正熙 정권은 예상한 대로 軍人이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법을 무시하는 정권의 정체가 드러난 것 아니냐고 떠들고 싶었을 거예요. 역사학자들은 한국이 國運 융성기에 접어들어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당시 日本 정부는 朴正熙 대통령이 경제건설이라는 명확한 革命의 목적을 일본에 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金大中 납치사건을 귀찮게 받아들였습니다. 한국 관련 사건이니까 우리는 너무 개입하지 말자. 대신 白晝(백주)에 日本에서 끌려간 사건이고 美國이나 외국이 인권문제로 불쾌하게 생각하니까 日本은 한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線에서 마무리짓자고 한 것입니다』


金大中-李姬鎬 관계


―朴正熙 대통령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셨습니까.

『정말 몰랐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물으니까 「너도 그런 질문하냐」는 표정이었어요. 李澔(이호) 당시 駐日대사가 훌륭한 처신을 했습니다. 납치사건이 났는데 상황파악은 안 되니까 바로 비행기 타고 서울에 와 청와대에 가서 사표를 냈어요. 朴正熙 대통령이 「내가 안 했다」고 하니까 「각하가 결백하시면 도로 가겠습니다」 해서 東京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朴正熙 대통령이 전혀 몰랐다는 것을 그것으로 알아요』

―李姬鎬 여사와도 잘 아십니까.

『金大中씨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았어요.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만든 李元淳(이원순)씨 조카이기도 하고. 李姬鎬씨가 서울대 사범대에 다닐 때 崔圭夏(최규하) 대통령이 英語 선생을 했어요. 어느 날, 金大中씨가 나한테 묻더라구요. 李姬鎬를 아냐구. 그래서 난 「그렇게 깨끗하고 훌륭한 여자를 이제껏 못 봤다」고 했더니 「나하고 결혼하게 됐다」고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아는 李姬鎬씨는 자기가 나서지 않고 남자를 출세시키는 천재적인 희생심이 있는 여자인데, 金大中씨가 그것을 꿰뚫어보고 결혼을 결심한 것 같아요. 내가 반대해도 자기는 그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하더군요』

―대통령이 된 이후에 金大中 대통령을 만난 것은 언제입니까.

『단독으로 만난 일은 없고, 金九 선생 출판기념회에서 만났어요.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으니까 人波(인파)를 헤치고 와서 악수한 게 마지막입니다』


『비가 5㎜만 더 오면…』


朴正熙 前 대통령과 崔書勉씨의 첫 만남은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駐韓 일본대사가 다리를 놓아 성사됐다.

1971년 봄, 日本 아세아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崔書勉씨는 국회 文公委 위원 소속으로 일본 시찰하러 온 朴正熙 前 대통령의 처남 陸寅修(육인수) 공화당 의원을 만난다. 국회 문공위원장인 강원도 春川 출신 申玉澈(신옥철) 의원이 고향 선배로서 그를 陸의원에게 소개했다. 崔書勉, 陸寅修 두 사람은 日本땅 東京 신주쿠(新宿) 그랜드 호텔에서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舌戰(설전)을 벌였다.

『내가 「張勉 정권을 더럽게 뺏어가고 張勉 박사와 盧基南 주교, 金大中씨를 쫓아낸 너희들이 나쁜 놈이지 뭐냐」고 하자, 陸寅修씨가 「朴正熙 대통령은 金大中씨가 말하는 불쌍한 농민들을 위해 革命(혁명)을 일으켰는데, 金大中씨가 농민들을 위해 한 일은 고작 입으로만 떠든 것이다」라며 맞섰어요』

이 일은 朴正熙 대통령에게 알려졌다. 朴대통령은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駐韓 일본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崔書勉씨 이야기를 꺼냈다.

朴대통령은 가나야마 大使에게 『그 친구(崔書勉)가 日本에서 金大中 (일본 체류) 신원 보증을 하고 내 욕만 하고 다닌다면서요?』라고 했다. 가나야마 대사는 『앞으로 日本하고 일을 하려면 일본에서 한국연구원을 운영하는 崔書勉씨를 통하지 않고는 일이 안 되니 한 번 만나보십시오』라며 만남을 주선했다.

崔書勉씨가 朴대통령을 처음 만나던 날, 마침 비가 촉촉히 내렸다. 그 해 봄은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저수지의 물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고 논 바닥은 바짝 타들어가 5월이 지나도록 논에 모를 낼 수 없었다.

崔書勉씨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朴正熙에게 「한 방 먹인다」는 각오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는 李承晩 대통령 시절부터 사용해 온 회의용 소파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집무실에는 마르고 왜소해 보이는, 그러나 강한 인상의 朴대통령이 오른쪽 다리를 꼬고 꼿꼿하게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朴正熙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崔원장이 와서 그런지 조금 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는데, 大田까지 모를 심을 수 있답니다. 최소한 5㎜만 더 오면 서울까지 모를 심을 수 있을 텐데…. 崔원장이 오시니까 비도 내리고, 참 기분이 좋은 날입니다』

日本 정객들의 요란스럽고 자기 자랑 일색의 접대에 익숙해 있던 崔書勉씨는 朴正熙의 첫인사가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崔씨는 朴대통령의 시계가 왠지 허름해 보여 『어느 나라製냐』고 물었다. 朴대통령이 『내가 경제건설을 한다고 하면서도 변변한 공장이 하나 없어서 시계나 조립해 보라고 시켰다. 그 시계공장(시티즌) 낙성식에 갔다 오면서 시계 완제품 하나를 1500원 주고 샀는데 1년이 지나도록 1분도 안 틀린다』고 했다.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들이 日本에 오면 롤렉스 시계 등 고급 시계를 사느라고 난리법석을 떨던 시절에 朴대통령의 검소한 국산시계를 본 崔書勉씨는 반대로 한 방 먹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崔書勉씨가 朴대통령에게 『나도 무정부주의자였었는데, 대통령은 언제까지 공산주의자였습니까』라고 묻는 등 두 사람은 세 시간 동안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세 시간 동안 집무실의 모든 시간과 사물의 움직임은 정지된 듯했다고 한다. 전화 한 통 걸려오는 곳이 없었고, 비서가 들어와 메모를 전하지도 않았으며, 마치 「종이가 날면 소리가 날 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고 한다.

『인텔리의 약점인데,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대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어요.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까 내쪽에서 먼저 「아이고 12시에 약속이 있습니다」 하고 일어났어요』

崔書勉씨가 『오늘 한 가지 감동을 느끼고 가는 게 있습니다』고 하니까 朴대통령이 큰 소리로 『뭡니까』 하고 물었다. 『대통령이란 사람이 바닥에 구멍 난 구두를 신고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습니다』고 하니까 朴대통령이 崔씨의 어깨를 탁 치면서 『좋은 구두도 많은데 하필 그걸 보고 가십니까』라고 했다. 朴正熙와 한 번 대결해 보리라 마음 먹었던 崔書勉은 이날 이후 朴正熙의 팬이 되고 말았다.


日本 정부의 朴正熙 思想 검증


1961년 朴正熙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자, 日本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내각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을 승인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특히 朴正熙의 사상문제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지 못했던 日本 정부는 朴正熙와 관련된 일본내 모든 人脈(인맥)을 동원했다. 마침내 朴正熙의 滿軍인맥과 日本 陸士 동창생들 중 滿軍과 陸士 동창인 오이 가즈히사(押井和久)란 인물을 찾아냈다. 그는 日本 防衛♥(방위청) 중앙자료대 中國 반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오이 가즈히사가 당시 官房長官(관방장관)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에게 호출됐다. 오히라를 만나기 전날 밤 그는 崔書勉씨를 찾아와 朴正熙에 대해 알려 달라고 했다. 당시 아세아大 교수로 朴正熙의 군사 쿠데타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崔書勉씨는 好意的(호의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오히라 관방장관에게 호출당한 오이 가즈히사는 『朴正熙가 빨갱이인지 아닌지 그 이야기만 해달라』는 재촉을 받는다. 오이 가즈히사는 『헤어진 지 이미 오래라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급생으로서 思想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지금 그 사람이 자신의 사상에 대해 뭐라고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오히라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다』고 했다.

오이가 『그럼 그 말이 맞을 것이다』고 했더니, 오히라가 『당신이 어떻게 장담하냐』고 했다. 오이는 『朴군은 내일을 위해 오늘 말을 만드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 자체가 그의 전부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 그가 쿠데타를 했다면 신념이 있어서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朴正熙에게 「金大中 부통령 제안」 했으나 참모진 반대로 成事 안 돼


朴正熙가 만주군관학교 생도 시절 사용했던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그가 1963년 10월, 제3代 대통령에 당선되던 날, 그의 滿軍 동기들은 日本에 있는 同期生의 횟집에 모여 『다카키君이 대통령이 됐다. 모두 축하하러 가자』며 환호를 올렸다고 한다.

참의원 비서를 하던 朴正熙의 滿軍 선배 이나바 도라기치(稻葉寅吉)가 『취임을 축하하러 한국에 가면 그것은 朴正熙에게 辱(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동창생 중에 대통령이 나온 것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며 이들을 말렸다. 이나바 도라기치와 친했던 崔書勉씨가 훗날 이 이야기를 朴대통령에게 했더니 『사실은 그때 그런 놈들이 올까봐 참~』 하며 걱정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朴正熙 정권이 출범하면서 추진한 경제개발 계획에 대해 日本 정부도 긍정적이었다. 戰後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내각도 한국 경제 再建이 日本 경제에도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1971년 大選 이후 金大中씨가 미국 일본 등지에서 反체제 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이 朴正熙 정권을 지원하면 부패해 도미노 현상으로 공산화될 것』이라며 朴正熙 정권을 맹비난하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당시 外相이 崔書勉씨에게 『당신 사무실에 묵고 있는 金大中이란 사람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정치가」 金大中을 朴正熙 대통령이 優待(우대)해서 본국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이 없겠는가』 하고 물어왔다. 즉 한국 정부가 金大中씨에게 정치 무대를 제공하면 남의 나라에 와서 자기 나라 욕을 하겠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쿠다는 張勉 정권 때 재무장관을 지낸 金永善씨가 思想界(사상계)에 글을 써 朴정권을 공격하다 어느 날 갑자기 통일원 장관이 되면서 정권과 타협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제안이었다. 당시 청와대 참모진들이 朴대통령에게 『金永善씨를 누르는 것보다 타협하는 게 낫다』고 朴대통령에게 건의를 해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崔書勉씨는 이를 한국문제에 정통한 「朝鮮戰爭」의 저자 카미야 후지(神谷不二) 게이오大 교수와 상의했다. 카미야 후지는 『매우 건설적인 제안』이라면서 에토 신기치(衛藤瀋吉)ㆍ고타니 히데지로(小谷秀二郞) 등 주변 정치학자 6人의 의견을 추가로 수렴해 이른바 「후쿠다ㆍ카미야 案」을 만들었다.

이 제안의 내용은 朴正熙 대통령이 金大中에게 「부통령」 자리를 마련해 擧國內閣(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으로서는 金大中씨가 朴대통령의 경제건설에 협력하면 부패를 막을 수 있고, 일본 입장에서도 金大中의 反정부 활동이 없으면 對韓 경제건설에 나서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계산이 섰던 것이다.

崔書勉씨가 대표로 한국을 방문했다. 崔書勉씨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부패」 두 가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기회라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찬동했던 것이다.

한국에 오기 전, 崔書勉씨는 東京 한국연구원에서 金大中씨에게 「후쿠다ㆍ카미야 案」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고생하던 사람이라 이 제안에 혹하고 덤빌 줄 알았는데 金大中은 아주 냉랭했어요. 「될 리도 없고 그리 돼서야 되겠느냐」는 말을 했어요. 나는 金大中씨가 「信念(신념)에 미친 사람이지, 자리에 몸을 파는 政治家는 아니다」고 느꼈어요. 당시 정부에 반대하던 사람도 장관 자리를 주면 하루아침에 180도 태도를 바꾸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金大中 대통령의 本心은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두 가지죠. 하나는 나는 끝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야겠다는 것과 또 하나는 朴正熙가 정권을 잡고 있는데 나를 부통령으로 데리고 가겠느냐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崔書勉씨는 訪韓해 朴正熙를 만나 「후쿠다ㆍ카미야 案」을 전달했다.

『朴대통령의 첫 마디가 「日本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걱정해 주느냐」고 그래요. 그러면서 우리 제안에 무조건 「노」 하면 실례니까 「생각해 보겠다」고 하더군요』

朴대통령은 「후쿠다ㆍ카미야 案」을 청와대에서 金永善의 경우처럼 참모들에게 물었으나 참모들이 한 사람도 동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바람에 「金大中 부통령 제안」은 없었던 일로 돼 버렸다. 崔書勉씨는 『朴正熙라는 사람은 독재자임에도 개혁적인 일을 추진하려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참모에게 의견을 물어 투표로 결정하는 민주성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회고했다.


『작은 약속을 철저히 지킨 朴正熙』


―朴正熙 대통령을 한 마디로 평가하신다면.

『작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입니다. 카터 美 대통령이 방한할 무렵인 1979년경, 한 번은 朴대통령이 「崔원장, 내일 점심을 같이 합시다」 해서 「내일은 유학생들을 모아 놓고 식사를 내기로 했습니다」고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아, 그거 대통령하고 밥 먹기로 했다고 하시지」 해서 「(제가) 손윗사람하고는 응석으로 약속을 취소할 수 있지만 손아랫사람들이라 곤란합니다」고 답했어요』

崔書勉씨는 미국에 있는 한인단체로 李承晩 대통령이 만든 同志會(동지회)는 없어지고 安昌浩(안창호)가 만든 興士團(흥사단)이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安昌浩 선생이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라고 朴대통령에게 설명했다.

安昌浩 선생은 尹奉吉 의사의 폭탄 투척을 예고한 金九 선생의 피신 전갈을 받고도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李裕弼(이유필)의 아들과 생일 케이크를 자르기로 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며 피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갈을 가지고 간 메신저가 『아~ 애하고 한 것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라고 했더니 安昌浩 선생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이놈, 우리가 日本하고 싸우는 이유가 일본놈들이 淸日戰爭과 露日戰爭 때, 독립시켜 준다고 해놓고 약속 안 지킨 것 때문인데, 작은 약속이라도 안 지키면 독립운동 그만두어야지』 하며 약속을 지키다 결국 日警에 붙잡혀갔다고 한다.

朴대통령이 이 말을 듣고는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내일 예정인 시피엑스(CPXㆍ지휘소 작전훈련) 참석 일정을 하루 미루도록 하라』고 柳赫仁(유혁인) 정무수석에게 지시하더니 崔씨와 점심을 약속하더라는 것.

『日本에 사는 나는 CPX가 무슨 소리인 줄 몰라 PX(營內 매점)로 잘못 알아듣고 「무슨 물건을 사러 가시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하니 破顔大笑(파안대소)를 하시더니 시피엑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朴대통령이 CPX 훈련에 빠진 것은 이때뿐이었다고 합니다』


미키(三木) 수상 內定 사실 미리 朴正熙에게 알려


崔書勉씨은 1974년 자민당 수상 改選(개선)에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내각의 뒤를 이어 예상을 뒤엎고 미키 다케오(三木武夫)가 선임될 것을 미리 朴正熙에게 알려준 일이 있다. 당시 언론계와 政街에서는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를 차기 수상으로 점쳤다.

崔씨는 어느 날, 朴대통령에게 急電(급전)을 띄운다. 「다음 首相은 미키가 된다. 후쿠다가 되면 좋고 미키가 되면 나쁘다는 식으로 쓰는 신문들의 사설부터 못 나오게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電文을 본 朴대통령은 믿기지 않아 당시 중앙정보부장, 駐韓 일본 대사에게 물어봤고 대답은 『후쿠다』였다.

당시 駐韓 美 대사 슈나이더(Sneider)가 離任(이임) 인사를 겸해 朴正熙 대통령과 골프회동을 가졌다. 슈나이더도 일본 주재 1등 서기관을 지낸 사람이라 일본 사정에 정통했다.

『朴正熙가 다음 수상을 물어 보니 슈나이더도 역시 「당연히 후쿠다」라고 했어요. 朴正熙는 「미키가 수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한 번 알아보시오. 정치는 알 수 없어」라며 여운을 남기는 말을 했답니다』

이틀 후, 신문들이 미키가 새 수상이 됐다고 보도했고 중앙정보부장과 駐日대사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슈나이더 대사는 그제야 『야~ 朴正熙는 시대에 드문 先見之明(선견지명)이 있다』하며 극찬을 하는 바람에 朴대통령 콧대가 한껏 높아졌다. 이 일이 있은 후에 朴대통령이 청와대로 崔書勉씨를 초청했다.

『「崔원장 덕택에 내가 체면이 섰는데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셔요. 「제가 정치가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니지만 좋은 친구가 있어 알게 됐지요. 그는 후지다 요시로(藤田義郞)라는 산케이신문(産經新聞) 정치부장 출신인 정치평론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연인즉, 시이나 에스사부로(椎名悅三郞) 자민당 부총재가 자신과 친한 언론인인 후지다 요시로에게 다음 총리를 미키 다케오로 결정하는 裁定文(재정문)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비밀유지를 위해 일본말이 안 통하는 한국 요정 코리아하우스를 회동 장소로 정했다.

그 자리에서 후지다 요시로는 裁定文을 쓴 뒤, 「한국에서는 멋도 모르고 후쿠다가 되면 매파니까 좋고 미키가 되면 비둘기파니까 좋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식의 한국신문 論調(논조)는 韓日양국의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고 생각하고 친구인 崔씨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려줬다. 그 길로 崔書勉씨는 陸寅修씨에게 전해 朴대통령이 알도록 했던 것이다.

朴正熙는 崔書勉씨에게 『좋은 친구를 崔원장만 알지 말고 내게도 소개해 달라』면서 소개를 부탁했다. 崔씨는 朴正熙에게 후지다 요시로, 기우치 노부다네(木內信胤), 무라마쓰 고(村松剛) 등 일본인 학자 등을 소개했다.

―1972년 7월부터 1974년 7월까지 在任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일본 수상과 朴대통령은 인간적으로 잘 안 맞는 사이였습니까.

『당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의 大藏相(대장상)이었던 다나카 입장에서는 金永善 재무장관을 통해 張勉 정권과 친했는데, 쿠데타가 일어나자 기분 나쁠 수밖에요. 그게 출발점이에요. 그러나 日本 정치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른 나라 원수를 좋다 나쁘다 할 수는 없지요. 다나카의 日帝시대를 아는 金永善이 관계복원에 많이 기여했습니다.

全斗煥씨가 日本에서 40억 달러를 받은 것도 다나카가 구상했다는 게 孔魯明(공로명) 前 외무부 장관의 기억입니다』


『朴正熙는 스승을 많이 가졌던 사람』


崔書勉씨는 『우리나라 정치가들도 자기가 정권을 잡으면 마치 자기가 제일 높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스승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朴正熙를, 존경하는 선생을 일부러 많이 만들어 가졌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朴正熙는 歷史를 알기 위해 李瑄根(이선근) 前 문교부 장관을 정기적으로 만났고, 詩를 배우려고 朴木月(박목월)씨, 文學은 八峰 金基鎭(김기진)씨, 農業은 柳達永(유달영)씨를 찾는 등 선생이 많았어요. 나 같은 것도 나이는 어리지만 日本 사정을 말하는 선생의 하나였는지 모르지요』

崔書勉씨는 東京에서 입수한 檀園(단원) 金弘道(김홍도)의 열두 폭 그림을 朴正熙에게 선사했다. 단원 그림은 영친왕 李垠 황태자가 가지고 있던 것을 자신의 그림 선생인 요시다(吉田) 日本 학습원大 교수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요시다 교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東京 공습을 받을 때도 소중하게 간직하던 것을 崔씨가 입수한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朴正熙는 즉시 국립박물관장을 불러 『복제도 하나 만들어 잘 보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朴正熙는 귀중한 물건을 입수하면 즉시 국립박물관으로 옮겼어요. 그런 것을 후임 대통령들이 좀 배워야 하는데….

朴正熙는 귀중한 것이 들어오면 또박또박 국립박물관에 보내 놓는 습관이 있어서 문화재를 遺失(유실)시키질 않았어요. 세계가 배워야 할 대통령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가 감정한 것이 독립기념관에 없으면 「朴대통령이 어김없이 국립박물관에 보냈구나」 하고 새삼 그를 생각하게 돼요. 우스운 얘기로 朴正熙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내 日本 친구들이 신당동 朴대통령 私邸(사저)에 慰問(위문)을 갔어요. 朴槿惠(박근혜)가 日本 손님들에게 茶(차)를 내왔는데 찻잔과 잔 받침이 다 짝이 안 맞아요. 일본 사람들이 「朴正熙는 검소한 사람」이라고 놀라면서 朴正熙는 죽어서도 가르쳐주는 게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崔書勉씨는 崔錫采(최석채) 前 조선일보 주필에게 들은 朴正熙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1963년, 대통령에 당선된 朴正熙 당시 최고회의 의장에게 조카인 故 朴在錫(前 국제전기 회장)씨가 청와대에 찾아온 적이 있었답니다. 朴의장은 자신이 대통령이 됐으니 친인척들은 청와대 출입을 삼가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내 임기중 마지막 만남으로 생각하라고 이야기했답니다.

조카를 전송하러 현관에 나갔던 朴의장은 느닷없이 검정 지프가 나타나 조카를 태우고 가니까 놀라 故 權尙河(권상하) 정보비서관에게 「대체 무슨 차냐」고 물었답니다. 당시엔 지프가 최고의 차였으니까요. 權비서관이 「각하의 조카를 어떻게 걸어가시게 합니까. 제가 만들어드렸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답니다』

이튿날 朴正熙 의장은 대구사범 동기인 權尙河의 사표제출을 요구했다.


朴正熙 대통령의 축농증 수술


朴正熙 대통령은 崔씨에게 항일독립운동과 일본 사정을 많이 물었다고 한다. 崔씨에게 『백범일지를 일곱 번이나 읽었는데 어느 부분에서 펼쳐 읽어도 名文』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崔원장께서는 朴正熙 대통령과 金大中 대통령 두 분과 사귀셨는데, 어느 분과 더 가까웠습니까.

『朴대통령은 나를 친구도 부하도 선배도 아닌 일정한 선이 있는 관계로 대했습니다. 외국에 사는 내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대접을 잘한 것 같아요. 金大中씨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같이 싸운 「糟糠之友(조강지우)」이고, 朴대통령은 국가건설을 위해 같이 노력한 「재취 관계」라고 생각할 뿐 親疎(친소)관계로 따질 수는 없습니다』

―10ㆍ26 사태가 났을 때 느낌은 어땠습니까.

『최후도 영웅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癌(암)에 걸려 죽는 것보다 문제의식을 남겨준 죽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金載圭(김재규) 부장이 민주주의라는 명분 때문인지 좌천될 것을 두려워해서 저지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朴正熙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국가건설을 위해 자신을 따라주는 사람들이라고 마지막까지 생각을 했으니까요. 난 마지막 순간에 옆사람에게 「난 괜찮아(너희들은 빨리 도망가)」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이 한 마디가 너무나 가슴에 닿았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남 걱정을 하는 朴正熙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 한 마디에 몽땅 녹아 있는 겁니다』

崔書勉씨가 일본에 머문 지 30년을 기념해 1997년 펴낸 기념문집 「崔書勉과 나(崔書勉と私)」에 보면 朴正熙와 관련한 많은 자료들이 있다.

기념문집에는 朴正熙의 축농증 수술 사실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아시카와 리쿠오(足川力雄) 東京후생연금병원 이비인후과 부장은 1978년 2월 朴正熙 대통령의 코수술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다음은 그가 1987년 7월21일 일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崔書勉 滯日 3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밝힌 내용이다.

당시 日本에는 축농증 환자가 많이 발생하던 시기였고 한국도 역시 물기가 많은 쌀을 먹는 민족이라 축농증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아시카와 교수는 당시 지케이의대(慈惠醫大)에서 이비인후과 연구반의 반장으로 축농증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1978년 2월 서울大 盧寬澤(노관택)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東京제국호텔에 머물고 있다.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제국호텔에서 만나자 서울大 閔獻基(민헌기) 교수의 큰아버지의 코가 좋지 않기 때문에 한번 서울에 와서 진찰해 줬으면 한다고 의뢰했다. 4월1일 訪韓하자, 환자는 뜻밖에 朴대통령이었다.

두려운 마음속에 4월2일 청와대 官邸(관저)를 방문하게 됐다. 내 이름은 서울大 「李박사」라는 가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의무실에서 진찰한 결과, 아주 심한 축농증으로 고름이 咽喉(인후)를 막아 단단한 고름 덩어리를 형성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다섯 차례의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나는 閣下와 이야기를 하던 중 이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한 마디로 각하는 내가 진심으로 노력해서 고쳐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라는 기분이 들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게다가 각하의 복장, 시계 등을 보면 매우 검소해서 그것만으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5월에 수술을 했고, 6월에 수술 결과를 진찰하는 것으로 일단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듬해 1979년 9월, 駐日 한국대사인 金正濂(김정렴)씨를 통해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우리 부부는 각하로부터 비공식적인 초대를 받았다. 11월2일 訪韓할 예정이었으나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대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들은 11월 하순에 국립묘지를 찾아 朴대통령 각하 부부의 冥福(명복)을 빌었다>

崔書勉씨에 의하면 아시카와 리쿠오씨는 朴대통령의 편지를 액자에 넣어 응접실에 걸어놓고 있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년 10월26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朴正熙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다고 한다.

崔書勉씨가 소개하는 수술과 관련한 또하나의 일화. 朴正熙 대통령의 장모 李慶齡(이경령) 여사가 老患(노환)으로 고생하자 어느날 朴대통령은 처남인 陸寅修씨를 불러 『빨리 치료하라』고 호통을 친다. 陸씨는 세브란스 병원 등에서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자 崔書勉씨에게 日本의 좋은 의사를 알아봐줄 것을 부탁한다.

이경령 여사가 日本에 오기로 한 날, 崔씨는 하네다(羽田)공항으로 영접을 나갔다. 이때 한국 정부는 1973년 8월8일 일어난 金大中 납치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경로로 解法(해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에게 사죄하기 위해 金鍾泌(김종필) 총리를 일본에 보낸 시점이었다.

崔씨가 기다린 비행기에서는 뜻밖에도 金鍾泌 총리가 내렸다. 때마침 金鍾泌 총리를 영접하기로 했던 日本 外相이 나오지 않아 崔書勉씨가 金鍾泌 총리를 영접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악수하는 사진은 당시 NHK에 보도됐다고 한다.

崔씨는 의료전문지인 保健同人社 오와타리 준지(大渡順二) 기자의 주선으로 도쿄大 교수 출신인 가나가와현 노인센터 의사를 소개받았다. 「돌팔이」 의사에게 10년 치료를 받아도 소용없지만 名醫(명의)는 단숨에 병을 진단했다. 의사가 얇은 종이를 이경령 여사의 얼굴에 대고 『한 번 불어보시지요』 하고 말했다. 李여사는 신음소리만 낼 뿐 「후~」하는 바람을 내지 못 해 종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는 『호흡기장애이니 운동을 하시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朴대통령은 『名醫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먼』이라며 감탄했다.

한번은 崔書勉씨가 담석증으로 수술을 하기 위해 來韓한 적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日本의 외과수술이 우리보다 나을 텐데 왜 우리나라에서 수술을 받는가』고 물었다.

崔씨는 『수술은 몸에 칼을 대는 것인데 100% 성공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서울고 초대 교장으로 「서울고 뒷동산에 뼈를 묻겠다」던 金元圭(김원규) 교장도 日本에서 客死(객사)했는데, 나는 「드라이 아이스」에 묻혀 고국에 돌아가는 게 싫다. 6ㆍ25 전쟁 기간 동안 한국의 외과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나는 나의 주치의를 소중히 한다는 차원에서 성모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다. 내가 일본에서 수술을 받으면 주치의 金學仲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라는 말을 했다. 朴대통령은 『崔원장은 한국에 올 적마다 나를 한 대씩 갈겨주고 간다』고 했다고 한다.


「지키지 못한 약속」


崔書勉씨는 朴正熙 대통령과 10ㆍ26 직전인 1979년에 나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어느 날 朴대통령이 내게 「崔원장, 우리 둘이 가보지 못한 데가 많은데 日本에 좋은 데 있으면 안내해 달라」고 해요. 그때가 돌아가시기 수개월 전이지. 그래서 「대통령 그만두십니까」라고 물었더니, 朴대통령은 「국민소득이 2000달러가 넘어야 투표에 진실성이 있고, 2000달러가 넘어야 민주주의의 맛이 난다. 내 책임은 거기까지다」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나는 그분이 2000달러가 넘는 그 시점에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고 물러나려 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朴正熙論」이 성립이 안 됩니다. 革命의 동기도 「보릿고개」를 넘자는 것이었으니까 金載圭가 일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임기 이상은 안 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혹자는 朴대통령이 3選개헌, 민정이양 불이행 등에 대해 국민적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말하는 약속이란 「정치적 약속」이 아니라 「인간 對 인간」의 약속을 잘 지키더라는 말입니다』


한국에 뼈 묻은 가나야마 大使


崔書勉은 일본인 중 한국을 사랑해 한국에 묻힌 日本人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前 駐韓대사를 잊지 못한다.

『내가 죽으면 뼈를 한국에 묻어다오. 저 세상에서도 韓日 양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

제2代 駐韓 일본대사(1968∼1972년)를 지낸 가나야마가 1997년 11월1일 88세로 별세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의 유언대로 가족은 그의 유해를 한국에 묻기로 하고 그 해 12월13일 遷葬式(천장식)을 갖고 경기도 파주 가톨릭묘지에 있는 崔書勉씨의 假墓(가묘) 옆에 안장했다.

일제 때 조선시대의 文化(문화)를 일본에 소개한 총독부 관리인 아사카와 고(淺川巧)가 한국에서 죽어 망우리에 묻힌 적은 있지만, 일본에서 죽어 한국에 묻힌 일본인은 그가 처음이다.

가나야마 前 대사는 원래 유럽통으로 한국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인물이었다. 폴란드 대사로 임명된 지 석달도 안 된 1968년 6월, 그는 갑자기 한국 부임 명령을 받았다. 한국 門外漢인 자신이 왜 발탁됐는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부임하면서 두 나라 관계 발전의 「매개체」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한국은 朴正熙 대통령을 필두로 경제 건설에 매진할 때였다.

그는 본국에 한국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韓日관계 진전을 위해선 당당한 파트너십이 중요하다. 과거 우리가 잘못했던 일을 청산하기 위해서도 한국에 협력해야 한다』

그가 朴대통령 친서를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포항제철 건립 지원을 호소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어느 날 朴正熙 대통령이 가나야마 대사에게 술 한 잔 하자며 청와대로 招致(초치)했다. 朴대통령은 『대사는 주한 일본대사 아니냐. 그럼 한국 일도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면서 『사토 수상에게 내 親書를 전하고 答(답)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가나야마는 외교관으로 부임해 국가 원수의 이렇게 큰 신임을 받은 영예로 『무엇을 아끼겠냐』며 朴대통령의 「特使」를 자청, 일본 外務省에 들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수상관저로 가서 사토 수상을 만났다. 그는 사토에게 『이것을 朴대통령이 써줬는데 답이 없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며 긴장을 시켜 놓았다. 편지를 뜯어본 사토는 『이것(포철 건설)은 안 돼. 안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야하다 세이테츠(八幡製鐵所ㆍ新日鐵의 前身)는 한국의 제안에 대해 『나사 하나 못 만드는 나라가 제철회사를 세우겠다니 우습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가나야마는 『日本이 제철회사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가 한국을 보는 것처럼 유럽 선진국이 일본을 비웃지 않았느냐. 그럼에도 日本이 무리해서 야하다 세이테츠를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淸日戰爭, 露日戰爭에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든 것이다. 한국 정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런 논리로는 수긍을 못한다』고 사토 수상을 설득했다.

사토가 新日鐵의 이나야마(稻山寬) 사장에게 『저녁에 만나자』는 전화를 걸면서 적극적인 지원으로 돌아서게 됐다. 물론 朴泰俊(박태준) 前 포철회장, 유명한 양명학자이자 역대 首相의 스승 역할을 한 야스오카 세이토쿠(安岡正篤) 등 많은 인사들이 운동을 해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朴正熙 「작사」, 가나야마 「작곡」이라는 게 崔書勉씨의 주장이다.

『당시 후쿠다, 기시 수상 등은 韓日 간에 어려운 때는 상대방이 겪은 아픔을 공유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日本 정부는 오히려 한국의 덕을 보려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韓日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데 참고해야 할 사건입니다』


浦鐵, 地下鐵 건설에 지대한 공로자


가나야마는 서울지하철 건설에 숨은 공로자이기도 했다. 1970년 3월 日本 적군파들이 일본항공 여객기 요도號를 납치해 평양으로 가다가 김포공항에 착륙했을 때 그는 범인들에게 『나를 인질로 잡고 승객들을 풀어 주라』고 말했을 정도로 책임감을 보였던 인물이다.

1972년 10월유신 직후, 미국에서 귀국길에 金大中씨는 자신의 책 출판을 위해 日本을 방문했으나 비자 발급이 안 돼 入國이 거부되자, 하네다(羽田)공항 내 출입국 관리사무실에서 崔書勉씨에게 入國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긴급 요청을 했다. 崔書勉씨는 가나야마에게 부탁을 했고 가나야마는 일본 法務省 입국관리국장에게 『한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을 日本이 홀대해선 안 된다』며 비자발급을 주선해 특별 체류 허가를 내주게 하기도 했다.

1972년 1월, 대사 임기가 끝나자 자녀가 열두 명이나 있던 그를 위해 日本 정부가 파리문화관장 자리를 주었으나 가나야마는 『餘生(여생)을 한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 일본 외교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일본 사람들에게 일깨워야 한다』며 사양했다. 그리고 東京한국연구원인 崔書勉씨를 찾아와 상무이사 자리를 얻었다.

―朴대통령이 만든 고속도로나 浦鐵 등은 그 당시 1960년대 스케일로는 상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일본 陸士 교육을 받으며 戰爭史를 통해 日本의 明治정부가 야하다제철소를 건설할 때의 과정을 배우고 이것이 뇌리에 박힌 게 아니었을까요.

『군수산업이나 중화학공업, 제철공업 등에 대해 살필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한번은 朴대통령이 미쓰비시 사장을 한국에 데려왔으면 좋겠다고 해요. 朴대통령은 內臣(내신)도 잘 썼지만 外臣(외신)도 잘 썼어요. 가나야마 주한 대사와 같은 훌륭한 사람도 자기 부하처럼 만들었고, 외국인을 만나면 꼭 자기 사람을 만들어요. 朴正熙 대통령의 욕을 하던 사람도 만나면 욕을 안 해요.

日本의 재벌 1, 2위인 미쓰이(三井)나 미쓰비시(三菱) 사장이 새로 취임하면 한국 대통령을 만나야 비로소 사장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은 많은 투자액수 때문에 일본 측으로 보면 중요한 국가였어요. 마치 신임 日本 首相은 미국 대통령을 만나고 와야 일본 수상이 되듯이. 어느 날 朴대통령이 미쓰비시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기에 미쓰비시만 부르면 향후 균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했어요.

놀라운 건 朴대통령이 내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두 회사 사장을 같은 날 만났다는 것입니다. 현지에서는 대통령이 미쓰이를 먼저 만나느냐 미쓰비시를 먼저 만나느냐 하는 것을 두고 두 회사가 각축전이 벌어졌더군요. 미쓰이는 10시에 오라고 해서 먼저 만난다고 좋아했고, 미쓰비시는 11시에 오라고 하니 섭섭하게 생각했어요.

朴대통령이 할 말은 미쓰비시에 있었으니까 미쓰이 사장을 먼저 만나 30분 간 이야기하고, 미쓰비시 사장과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는 「아, 약속 있어요? 점심 같이 합시다」했습니다. 대통령이 점심을 먹자는 데 마다할 사람이 있어요?

미쓰비시 사장은 점심까지 먹고 왔단 말예요. 미쓰이 측은 우리가 처음 만났으니까 자존심을 갖게 됐고, 미쓰비시 사장은 밥까지 먹었는데 하면서 자존심을 갖게 했지. 이게 朴正熙의 用人術(용인술)이야』


가토 前 간사장 외면한 金泳三


崔書勉씨는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시절, 韓日 양국 지식인 간 대화채널을 위해 공식 출범한 한일포럼 한국 측 자문위원으로 임명된다. 崔씨는 초대 회장인 일본 측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ㆍ前 외무차관) 마사코(雅子) 日本 왕세자빈의 부친을 비롯한 日本 대표들과 함께 청와대로 金泳三 대통령을 예방했다.

『金대통령이 50여 명의 日本 대표단을 접견하면서 아무한테 말을 안 걸고 내게만 「崔書勉 선생 아니냐. 어떻게 여기 계시냐」하고 물어요. 한국 측 회장이자, 金泳三 대통령의 경남고 동창인 裵載湜(배재식) 서울大 명예교수가 외교관 출신으로 관방장관, 방위청장관, 자민당 정조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가토 고이치(加藤紘一)를 「차기 간사장」이라며 소개했어요』

가토를 소개받은 金泳三은 어찌된 영문인지 얼굴을 외면했다. 국제무대에서 있을 수 없는 의전상의 결례라 裵회장도 깜짝 놀랐다.

『그는 몇 번 대화를 시도했는데 金대통령이 영 상대를 안 하는 것을 눈치채고 포기했어요. 그날 저녁 가토가 내 방엘 찾아와 어찌된 영문인지 이유를 묻습디다. 나도 모르겠다고 했어요. 나중에야 金泳三 대통령이 이북동포에게 쌀을 지원해 주려는 시점에 당시 자민당 정조회장인 가토가 선수를 쳐서 북한에 먼저 쌀을 지원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金泳三씨가 모처럼 동포애를 발휘하려는 것을 싹부터 잘라버렸으니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겠어요. 日本은 북한과 관계개선을 할 때 반드시 한국과 먼저 상의해야 한다는 것은 日本 정치인들의 상식인데 그것을 어긴 가토의 태도를 金泳三 대통령이 불쾌하게 생각한 겁니다』

―요즘 韓日關係에서 인간적으로 日本과 한국을 연결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정치인으로는 누가 있습니까.

『金鍾泌씨가 제1인자입니다. 韓日 간 최고의 인물, 말하자면 「존재감」이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金鍾泌씨입니다. 日本 사람들은 세상이 다 바뀌었어도 아직도 金鍾泌씨를 만났다는 것 하나로 화제가 돼요.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고. 朴泰俊, 金守漢(김수한), 金潤煥(김윤환)씨 등도 日本에 인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충분한 대접을 못 받아요. 이건 우리나라가 사람을 안 기른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餘談(여담)으로 日本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려면 知的(지적)으로 「축적」이 있어야 해요. 日本사람들은 지금도 論語(논어)나 유교경전을 읽는 연구회가 많을 정도로 문화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崔원장께서는 日本 정치인 중에는 누구와 가장 친했습니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한국에 TV 방송국을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시이나 에쓰사브로(椎名悅三郞) 등도 잘 알지요』


『天皇은 2600年前 在日 한국인』


―일본인들의 對 한국관을 말씀해 주십시오.

『韓日關係를 이야기할 때 日本 사람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어요. 日本사람은 한반도를 어머니의 젖꼭지로 보는 對한국관이 있는가 하면, 꼭 匕首(비수)를 목에 들이대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있습니다. 처음 한반도는 日本에게는 젖꼭지의 존재, 즉 뭐든지 주는 고마운 존재였단 말예요. 匕首로 볼 때는 日本이 한반도에 쳐들어가고 싶을 때입니다. 대륙침략의 名分을 만든 거지요』

―얼마 전 日本 天皇이 자신은 백제 계통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참 충격적인 이야기죠.

『그럼요. 日本 天皇은 初代부터 오늘날 127代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大陸(대륙), 즉 朝鮮에서 건너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대 천황들은 「朝鮮에 한 번 가봤으면」 하는 것이 당연한 꿈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대국적으로 天皇이 월드컵을 「핑계」삼아 온다고 하면 「아! 先祖가 가서 고생하시더니 임금이 됐습니까. 百濟 좀 보고 가시고 新羅도 좀 보고 가십시오」하지는 못할망정 못 오게 하는 게 愛國인 줄 착각하고 있어요. 壬辰倭亂 때 陶藝工의 후손으로 성공한 沈壽官(심수관)이 오면 박수치고, 天皇은 못 오게 하고, 이건 모순입니다. 沈壽官은 500년 전 在日 한국인이고, 天皇은 2600년 前 在日 한국인입니다』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등 日本 내 명문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祖上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자각이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기시 수상에게는 내가 직접 들었어요. 가까운 先祖가 조선과 무역을 하는 사무관을 했는데 朝鮮에서 통신사가 오면 그렇게 집안이 감격을 했답니다. 후쿠다 다케오에게는 내가 직접 「당신은 지금 日本 수상이지만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 두루마기, 갓을 쓰면 영락없는 경상도 시골 面長이다」고 말했어요. 후쿠다도 「내가 한국사람의 얼굴인 것은 틀림없다」고 하더군요. 8세기경 후쿠다의 출신지인 群馬縣(군마현)에 한국에서 渡來人들이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할 때와 패전 직후 두 차례 일본 외상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ㆍ1882~1950)의 선조는 壬辰倭亂 때 잡혀간 도예공의 후예다. 그는 다섯 살 때까지 朴茂德(박무덕)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고시마(鹿兒島)縣에 살았으며, 그곳에는 지금도 檀君(단군)을 모시는 神社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남아 있지도 않은 단군교 기도문도 있을 정도로 도예공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한다.

건국 직후 駐日 대표부 공사로 있었던 鄭桓範(정환범)씨가 崔씨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맥아더가 최고 사령관인 일본 점령군 총사령부로부터 『군사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은 한국인 A급 戰犯(전범)이 있다. 만나고 싶다면 신청을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鄭공사는 이 사실을 즉시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아깝게도 도고 시게노리의 400년 만의 정신적 歸鄕(귀향)은 이뤄지지 못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50년 사망했다.


『安重根만큼 안 알려진 위인이 없다』


崔書勉씨가 최근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安重根 연구다. 그는 『安重根만큼 안 알려진 유명한 인물이 없다』고 했다. 그 예로 安重根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 중 安重根의 키(164cm)와 그가 있었던 監房(감방) 호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美日 등 외국학자들은 어느 인물에 대해 기본적인 연구부터 시작하는 것에 비해 한국학자들은 總論(총론)에만 강하고 各論에는 약한 인상을 받는다고 한다.


최근 安重根 연구의 걱정스런 현상은 한국 사람은 무책임하게 原料(원료) 없이 安重根을 쓰고, 日本 사람은 原稿(원고) 하나를 보면 열 개로 부풀려 쓰려고 하는 통에 安重根 연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日本에서 安重根傳이 열 권 정도 출간됐으나 올바른 「安重根 傳」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생각다 못한 그는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1909년 10월부터 1910년 4월까지 日本에서 발행된 전체 신문 중 安重根 관련 자료를 몽땅 훑기 시작했다. 『安重根 의사가 돌아가신 날, 서울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있었다고 서울에 있던 日本 신문 기자가 보도한 사실을 발견했어요』

현재 安重根 연구자들이 바이블처럼 인용하는 책은 당시 滿洲 일일신문사가 펴낸 「安重根 공판기록」인데, 崔書勉씨는 그 책의 오류를 이렇게 지적한다.

『安重根은 재판 때 「왜 나는 말을 길게 했는데 통역은 짧게 하느냐. 이렇게 되면 재판장, 변호사, 검사도 모두 일본인인데 그럼 재판은 「쇼」가 아니냐」고 했답니다.

그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安重根의 이야기는 이 책에 실리지 않은 것이 많았다는 겁니다. 훗날 日本 정부가 安重根 공판기록이라는 것을 만들어 출판을 했어요. 비교적 자세하긴 한데 큰 의문이 생겼어요. 日本 아사히(朝日)신문에 「그자가 무슨 義兵 중장이랍시고 건방지게 호통을 치고 있는가. 더군다나 그자는 우리 伊藤公에 대해 『伊藤이가… 伊藤이가』 하고 해라를 하고 있다」고 신문에 났어요. 그런데 日本 공판기록을 보면 꼭 「이토님」이라고 존대를 쓴 것으로 났는데, 아! 이것도 거짓말이구나 하고 알 수 있어요』

崔씨는 한국의 어느 신부가 자신의 책에서 「安重根이 죽기 전에 바라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천주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安重根은 1910년 3월 여순에서 프랑스人 빌레헴(한국명 洪錫九) 신부를 네 차례 만나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했어요. 이같은 사실이 滿洲 일일신문과 오사카 아사히신문 등 6大 일본 일간지에 실려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崔書勉씨는 얼마 전, 日本 모 단체에서 강연을 하기 전, 伊藤博文의 손자가 『나 같은 사람이 참석해도 되느냐』고 문의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崔씨가 『伊藤博文의 아들은 셋이다. 첫째는 외무대신과 주한공사를 역임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의 조카를 양자로 받아들였고, 둘째는 몰래 낳아 기른 분기치(文吉)이고, 셋째 아들이 신기치(眞吉)다. 신기치만 서울에서 같이 지냈다. 셋째 아들의 아들이면 대환영이다』고 하니, 그 사람이 『당신이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모르겠다. 우리집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아냐』며 감탄했다고 한다.


『獨島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崔書勉씨는 우리 측이 獨島에 대한 논리를 좀더 발전시켜서 日本을 설득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마치 「獨島는 일본 것이다」고 떠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고 했다.

崔書勉씨는 獨島에 대한 일본 측 자료는 독도가 일본 것이라는 증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일본 측 자료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獨島 연구를 위해서는 먼저 金玉均(김옥균ㆍ1851~1894)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金玉均이 獨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81년 이후, 두 차례 일본을 돌아보면서 나가사키(長崎)항에서 울릉도産 목재를 놓고 상인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였다고 한다.

金玉均이 싸우는 이유를 물어봤더니 상인들이 말하길 『울릉도産 재목으로 옷장을 짜면 벌레도 없고 향기가 좋다. 이것을 배급받으면 큰 수입을 얻기 때문에 서로 배급을 많이 받으려고 싸우는 것이다』고 했다.

『金玉均이 東京 히비야(日比谷)공원 인근 호텔에서 밖을 내다 보니 서양사람들이 日本 外務省에 자꾸 들락거렸습니다. 영문을 알아 보니 日本 근해에서 고래를 잡기 위한 허가를 받으려는 것이었어요. 당시 日本 사람들은 휘발유가 생산되기 前 고래기름이 燈油(등유)로, 프랑스에서는 香水(향수)의 원료로 쓰인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日本人들도 「저놈들이 日本 근해에서 고래를 잡으려고 하는데, (허가) 도장만 찍어 주면 좋아라고 하며 돈을 잔뜩 놓고 간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金玉均은 무릎을 쳤어요. 귀국한 金玉均은 「울릉도 捕鯨事(포경사) 겸 東南諸島 개척사」로 자리를 옮겨요. 당시 사정을 잘 몰랐던 사람들은 金玉均이 좌천됐다고 했습니다. 金玉均이 先見之明이 있는 게 울릉도만 해도 돈이 되는데 동남, 즉 獨島를 의식한 직함을 붙인 것입니다. 이 자료가 日本 사료관 안에 있는데 동남제도 개척사와 日本 회사가 계약을 맺은 기록도 나옵니다』


獨島에 관심 기울였던 金玉均


崔書勉씨는 獨島를 연구하기 위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軍艦(군함)을 빌려 포항에서 울릉도를 항해했다. 삼척, 강릉이 지리상으로 울릉도에 가까움에도 여객선이 포항에서 울릉도를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은 필시 海流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이를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崔씨는 당시 출판된 「日本 沿岸 항해지」의 저자인 영국의 세인트존스 함장 지도에 獨島가 三峰(삼봉)으로 표시돼 있는데, 우리 역사 기록에 獨島가 三峰島(삼봉도)라고 기록돼 있어 文獻(문헌)이 일치함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古地圖에는 울릉도와 한반도 사이에 于山島(우산도)인 獨島가 실려 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獨島는 실제로는 울릉도 밖에 있다. 그렇다면 울릉도 안에 있는 우산도라는 獨島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崔書勉씨는 『이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이를 위해 崔書勉씨는 海流에 의해서 이러한 지도가 그려지지 않았는가 하는 假說(가설)을 세우고 해류답사를 거듭했다. 실제로 울릉도 獨島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강원도 삼척 일대이다.

그럼에도 울릉도에 가는 배는 三陟(삼척)에서 가지 않고 그 밑에 있는 浦項(포항)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곧 海流의 지배를 받는 현상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답사를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비밀을 발견했다. 즉 포항에서 해류를 따라 엔진을 끈 채 항해하면 獨島가 먼저 보이고 나중에 울릉도가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까 옛날 사람들은 독도가 울릉도와 한반도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古地圖에도 그렇게 표시돼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崔書勉씨는 이 답사를 기초로 서울 안국동에서 구입한 400여 장의 지도를 분석해 시대順으로 독도의 위치를 點(점)으로 표시한 결과, 현재 지도상의 「獨島 移動 軌蹟說(독도 이동 궤적설)」이라는 假說을 세울 수 있었다. 덧붙여 그는 『일본 측이 옛날부터 우리가 獨島를 일관되게 獨島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리 다케시마(竹島)와 마쓰시마(松島) 두 가지로 혼동해 불렀다』면서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면 이런 혼동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崔書勉씨는 최근 日本에서 강연 도중 韓日關係를 걱정하는 한 日本人으로부터 『다케시마(竹島)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崔書勉씨는『다케시마(竹島)는 일본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예상 외의 반문에 놀란 그 일본인은 『그럼 왜 한국은 日本 영토라는 데 동의 안 하냐』고 물었다. 崔씨는 『우린 獨島(독도)를 우리 것이라고 했지, 언제 다케시마를 우리 것이라고 했느냐. 자기 마누라를 남에게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았느냐』고 이야기를 해주었노라고 했다. 그는 덧붙여 『너희들이 다케시마라고 하는 한 절대로 너희 것이 될 수 없다. 獨島를 인정하고 한국과 싸워야지, 다케시마는 너희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40년째 이어진 「가위질」


崔書勉씨에게 술과 담배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연희전문 1학년 때부터 50년이 넘도록 하루 두 갑 이상씩 피운 담배는 이국땅의 서러움과 고독을 달래 준 친구였다. 취침 전 습관처럼 시바스 리갈 반 병을 마시는 술은 崔씨에게 「催興劑(최흥제)」가 아니라 「睡眠劑(수면제)」다. 관절염이 심하기 때문에 알코올 기운에 의지해야 熟眠(숙면)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모진 마음을 먹고 담배를 끊었다. 간접흡연이 건강에 더 해롭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친구는 20만 점에 이르는 「자식」 같은 자료뿐이다.

지금도 東京과 서울을 수시로 오가는 崔씨는 아침에 눈을 뜨는 곳이 서울이든 東京이든 어김없이 日刊 신문을 쌓아놓고 文化面 「가위질」을 시작한다. 40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은 日常이다. 그의 오른손 중지 두 번째 마디에는 큰 사마귀 같은 티눈이 「훈장」처럼 박혀 있다.

『만나는 친구마다 사마귀를 만져보고 크기가 작아지면 「요새 일 안 하는구나」하고 경각심을 줍니다(웃음)』

일본 신문에서는 고고학ㆍ철학ㆍ환경 부분을, 한국 신문에서는 한국사ㆍ독립운동사ㆍ교육사 등을 오려낸다. 특히 「이규태 코너」는 한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자부심을 길러 주는 글이라 그가 가장 아끼는 연재물이다.

崔씨는 呑虛 스님이 지어준 別號(별호) 方寸(방촌ㆍ사람의 마음은 가슴속 한 치 사방 넓이 속에 깃들어 있다는 의미)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맺힌 것을 푸는 인생을 살아왔다. 한국에 올 때마다 1962년 작고한 모친 산소를 찾는다는 崔書勉씨.

『先親이 내가 태어난 지 한 달 이레 만에 돌아가셔선지 어머니가 지금도 내게는 저 세상 사람 같지 않아요. 난 어머니 산소에서 풀을 뽑을 때가 제일 흡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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