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戰友)의 추모 액자를 건네는 에릭 라센 박사의 모습.
위스콘신 주(州)의 Sturgeon bay소재 집을 떠나 한국에 방문할 준비를 했다. 나는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 소속의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당시 나는 결혼해 28살이었으며, 2년 반 된 딸이 있었다. 그리고 시카고에서 전문의로 일하고 있었다. 1950년 12월부터 53년 1월까지 대위로 복무했다.
4개월간 2사단의 22연대에서 대대 외과의(醫)로 있었고, 9개월간은 8209-First MASH(육군외과병원)의 외과의(醫)로 있었다. 1951년 1월 2사단에 합류했으며 그곳에서 빠른 속도로 적응하여 숙련된 외과의가 됐다. 한국에 있는 동안 23연대 3대대 소속의 대위 Ernest L, Gravelin과 친해졌다. 그와 나는 친한 친구였으며 가능한 함께 일하려 했다.
그는 전쟁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며, 부상자들의 간호에 헌신했다. 1951년 4월말, Gravelin 대위와 나는 중공군의 공세로부터 벗어나서 2사단 소속의23연대 2, 3대대에 속해있는 Zebra특공부대의 최전방에서 군의관의 임무를 수행했다.
나는 1051고지 근교의 험준한 산을 따라 나 있는 38선의 북쪽에 위치한 자은리 마을 근경의 주(主)보급도로 옆에 응급진료소를 설립하였다. 진료소는 포격을 당해 파괴된 어느 시골학교의 건물 옆에 땅을 파서 커다란 텐트를 쳐서 만들었다.
오랫동안 나는 한국의 근황과 Ernest에게 일어났던 일에 관해 자세히 알고 싶었다. 이미 나는 그의 부모를 통해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3월 18일 중공군에게 붙잡혀 모진 박해를 받다 죽어갔다. 그러나 나와 일했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자은리는 위치는 어디며, 지금도 있다면 어디일까? 파괴된 학교는 다시 세워졌을까?
최근까지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인터넷의 한국전 관련 홈페이지와 그 밖의 다양한 인터넷링크를 통해 몇 가지 응답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한국 지도를 구입했으며 미 육군을 통해 참전용사 들과 접촉했으며 그들에게 공지를 했다.
Joe Hess를 단장으로 하여 2000년 9월 10-17일 동안 한국전 50주년기념 2사단소속 참전 용사들의 한국방문에 동참했다. 서울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참전용사들은 한국의 육, 해, 공군, 해병대로 구성된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서울~대구까지의 여행을 통틀어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 우리일행은 한국군과 UN군으로 구성된 의장대의 사열을 받았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태풍이 해안을 강타했다. 한국방문 기간 동안의 하이라이트는 9월16일 서울의 캐피탈 호텔에서 주한미군의 역사분과 부 사령관인 찰스 소령이 비가 억수같이 오던 그날 오전 10시에 방문했을 때이다.
그는 공군운전병 트레이시 일병의 운전으로 육군소유의 밴(VAN)을 타고 왔다. 찰스 나이튼 소령은 이 메일을 통해 방문 전에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에 우리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3월의 중공 군 학살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나 1051고지와 자은리는 가보지 않았다. 우리는 자은리라는 마을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지금은 차량이 많이 다니는 44번 고속도로 근교에 위치했던 학교가 남아있는지 알 길이 묘연했다.
50주년 한국방문에서 나와 동행한 세 명의 회원은 Al Seyther와 일리노이 주의 Simpson에서 온 Jerry Miller와 그의 딸 Amity이다. 전쟁당시 Al은 부상을 당했으며 중공군에게 3월18일 포로가 되어 Zebra특공부대가 도로상에서 적에게 저지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Jerry Miller의 아버지는 그 근처에서 부상을 당했으며 야전병원 근교의 최전방에서 전사했다. 자은리 마을과 학교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이것을 찾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날씨는 태풍으로 인해 바람이 세차고 비가 쏟아져 내렸다.
트레이시 운전병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44번 고속도로의 북쪽 산악지역에 위치한 홍천근처였다. 우리 일행은 홍천에 오전에 도착했으며 주유소 옆의 식당에서 고기와 김치가 어우러진 맛있는 한국음식을 먹었다. 이곳에서 학교까지 가는 거리는 대략 8마일 정도였으며 나는 감회에 젖어 전방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중공군이 우글거렸던 길 왼쪽을 따라 서있는 언덕을 보았으며, 계곡의 동쪽으로 나있는 산을 따라 펼쳐져 있는 논의 동쪽을 흐르는 홍천강을 보았다. 이곳에서 나는 여기가 예전에 왔던 곳임을 의심할 여지없이 알아차렸다.
우리는 자은리에 도착했다. 길의 왼쪽에서 해군영웅 이순신의 이름을 딴 학교로 알려진 건물을 나이튼 소령이 가리켰다. 우리는 그곳을 구경하기 위해 학교 안에 차를 주차했다. 몇 명의 여자들이 건물밖에 있었으며, 재빨리 교장을 호출하였다. 학교는 학기 중이었으며 교장이 빗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우리가 뭘 원했는지 알고 있는 듯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온 이유에 대해 혼란 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이튼 소령은 그에게 한국말로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는 다시 학교로 들어간 후 10분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후 우리를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나는 교장에게 추모액자를 전달했으며 거기에 새겨진 글을 읽으려 했으나 북받쳐 오르는 감정으로 인해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이튼 소령은 날 대신해서 한국어로 대신 읽어주었다. (주: 내용은 이 글의 마지막에 게재) 교장은 학교에 걸어두겠다며 액자를 받았다.
이후 학교의 주변을 둘러보았으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나는 교장에 의해 학교 안으로 초대되어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신발을 벗고 1학년 교실을 들어서는 순간 30여명에 이르는 남녀 학생에 둘러싸였다. 소니 비디오 카메라가 있었기 때문에 이 장면을 기록으로 남기려 했으나 그 순간 북받치는 감격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는걸 잊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즐겁게 웃었다. 戰後 50년 동안의 평화가 만든 이와 같은 차이를 믿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2시간을 머물렀다. 나는 지도와 오래된 사진을 통해 대대진료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으며 1051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길은 그곳에 있었다. 한 가지 없는 것은 밀려드는 중공군의 무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1051고지 정상은 50년 전 그날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 일행은 교회가 있던 자은리 마을을 둘러보았으며, 44번 도로를 따라 늘어선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은리를 떠나며 우리는 비운의 호송행렬이 있던 길을 따라 나섰다. 대략적으로 학교의 남쪽지역으로 1.5마일 떨어진 곳으로부터, 우리는 차에서 내려서 당시 선두를 달리던 탱크가 지뢰를 밟은 장소에서 차를 세웠다.
우리는 당시 적의 포화로부터 공격을 받아 부서진 나의 지프차가 있었던 곳을 발견했다. 바로 이곳이 23연대 소속의 미군들이 탱크를 비롯한 모든 전투력을 상실한 후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바로 그 장소였다. 이곳에서 그 악몽과도 같은 그 날 이후 혼자 살아남아 다시 이곳에 서 있는 날 발견했다. (5월 18일 다른 연대소속의 2명의 미군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나는 당시 길을 가로질러 달려 도망쳤다. 그리고 제방에서 굴렀으며 그곳에서 안경을 잃었다. 이로 인해 나는 눈뜬장님이 되었다. 나는 황급히 강을 헤엄쳐 강 반대편으로 갔으며, 수많은 논을 가로질러 가는 도중 퇴각하던 탱크가 나를 태워주었다.) 그 길을 바라보며 나는 군대에서 지급 받은 안경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지 궁금하였다.
홍천강의 물살은 매우 빠르다. 넓이가 100feet에 이르고 제방은 논의 높이보다 10~20feet가량 더 높다. 나는 내가 당시 이곳을 어떻게 옷을 입고 군화를 신은 채로 강을 가로질러 헤엄을 쳤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니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나고 젊은 시절 생각이 났다. 나이튼 소령은 길가를 따라 서있던 나와 이 지역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소령과 내가 길에 서있던 시각은 오후 2시 55분이었다. 이 시각은 바로 전쟁당시 나의 지프차가 공격을 받은 시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의 부서진 시계는 영원히 그것을 증명 할 것이다. 우리는 즐거웠다 그리고 피곤했지만 행복하게 서울의 캐피탈 호텔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 Al Seyther와 나는 저녁을 하며, 호텔에서 술을 마셨다.
그날 있었던 일을 회고하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50년 전의 경험과 믿을 수 없는 오늘을 비교했다. 다음날, 9월 17일 일요일에 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꾀를 냈다. 인삼차와 한국식 사우나 그리고 골프를 치기 위해서 일행과 떨어졌다.
나는 사랑하는 Lynda를 위해 기념품을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이날 저녁 나는 나머지 일행이 자은리의 학교를 방문하기위해 오전에 여행을 연장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그들은 추모액자를 증정한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 학교에 가고자 하였으며 나의 모험과 공로에 대해 그들도 동참하고자 하였다. 그날 저녁 용산의 부대 내에 있는 네이비(NAVY) 클럽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모든 참전 용사들은 붉은 색의 아름다운 메달을 받았다. 이 메달은 부대장이 수여하는 메달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아침식사 후 내가 본 중 최고의 전쟁 박물관인 ‘전쟁기념관'을 구경하였다. 우리는 그날 저녁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회상해 보건대, 나는 이 여행을 한 것이 기쁘다. 여행은 길고 힘들었지만 내가 묘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을 충분히 보상해 주었다. 나는 우리가 무었을 위해서 싸웠는지 분명히 알게 됐으며 ‘잊혀진 전쟁’에서 역할을 다한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추모액자(PLAQUE)는 진정한 미국의 영웅이자, 나의 동료였던 2사단 3대대 소속의 군의관, 대위 Ernest L, Graveline에게 헌정한다. 그는 Zebra특공부대의 영웅적인 전투군의관이었으며, 이곳(자은리/1051고지)에서 부상병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간호했다. Graveline대위는 1951년 5월18일에 적군에 포로가 되었으며 북한 1군영에서 같은 해 10월15일에 사망했다.
Erik Lasen, M.D.Battalion Surgeon(의료대대 군의관) 2nd Bat 23rd RCT(2대대 RCT)
필자: 에릭 라센(Erik Larsen) 박사
출처: 미(美)육군 제2사단 홈페이지
번역-정리: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