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련이 2백 해리 經濟水域을 선포하면 우리의 北洋漁業은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1976년 12월 월간중앙>
한국인의 生存圈―北洋
북양(北洋)은 한국의 「프론티어」다. 개척(開拓) 10년―북양은 이제 우리의 생존권이 됐다. 이 바다에 한국의 교두보를 다지는 과정에서 60여명의 젊은 생명을 빼앗겼다. 미혼의 5대 독자, 의형제 두 선장, 꿈틀대는 생명을 아내 뱃속에 남기고 떠난 신혼중의 선원, 「조셉·콘라드」에 매혹된 수산대학(水産大學) 실습생들, 일당 5백원을 받던 北洋명태 가공공장의 여공(女工)들…….
그들은 안개, 바람, 유빙(流氷), 눈보라, 속이 황량한 바다, 「태풍의 무덤」으로 불리는 이 북양에서, 그리고 「암모니아·개스」가 휩쓸고 간 냉장공장에서 목숨을 날렸다. 온몸으로 부딪쳐간 이들의 희생과 하급선원, 女工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북양어업은 성장했다. 북양에 기득권을 가진 美, 日, 蘇, 「캐나다」등 연안국(沿岸國)의 압력. 여기에 도전을 거듭, 한국의 海洋人들이 확보하고야만 우리의 「프론티어」―北洋.
북양은 「남의 바다」가 아닌 「우리의 것」, 지켜야 할 「韓國人의 生存圈」으로 우리의 정신 속에 굳게 자리잡았다. 한국의 해양세(海洋勢)를 연안 강대국에 확인시킨 北洋개척은 극적인 사건들로 충만한 「히로이즘」의 한 章을 엮었다. 이런 北洋의 어업권이 또 다시 위협받고 있다.
미국은 내년 3월 1일부터 효력을 발생하는 2백 海里 어업규제 수역을 선포했다. 소련, 「캐나다」도 미국의 선례를 따를 것이 틀림없다. 지난 해까지 한국 「트롤」어선들은 거의 전부가 소련 「캄차카」반도 연안 대륙붕에서 명태를 잡아왔다. 아직 대화의 통로가 없는 소련이 경제수역을 선포하면 한국어선들은 「캄차카」어장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자연히 미국 「알라스카」연안과 동부 「베링」海 대륙붕어장으로 옮겨가야 할 판인데 이 어장도 몽땅 미국 규제수역 안에 들어갔다.
이것은 「국민건강의 유지」라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 위협하는 사태다. 北洋은 韓國人에겐 가장 큰 동물성단백질 공급원(供給源)이다. 지난 해의 北洋 어획고가 35만7천3백21t(명태 32만3천5백t). 올해엔 6월말 현재 24만4천6백t(명태23만t), 연말까진 40만t을 거뜬히 넘을 것이다. 北洋 어획고는 전체 원양어장의 약 63%, 국내에서 유통되는 어획물의 약 20%를 점한다. 한국인들은 동물성 단백질 섭취량의 15% 이상을 北洋에 의존하고 있다.
*2004년 명태 소비량 연평균 37만4000 톤, 오징어 33만2000 톤, 고등어, 갈치, 조기 순.
*2017년 한국인은 1인당 수산물 섭취량이 58.4kg으로 세계 1위. 일본은 2위, 오징어, 새우, 멸치, 굴, 명태, 고등어, 다랑어, 넙치, 갈치, 낙지. 수산물 수출액 17억 달러, 수입액 42억 달러.
北洋漁業權의 위협은 5천㎞ 떨어진 먼 바다의 일이 아니다. 우리 밥상에 바로 영향을 미칠 절박한 문제인 것이다. 미국 해안경비대는 요즘 외국어선 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9월3일 고려원양(高麗遠洋)(株) 소속 경양호(5천3백t)는 「알라스카」연안에서 美國국내법으로 어획이 금지돼있는 왕게를 잡았다가 붙들려 벌금 70만「달러」를 물었다. 지난 7월22일에도 고려원양의 제21광명호가 같은 혐의로 나포돼 40만「달러」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벌금을 물지 못해 2개월 동안 억류되기도 했다.
두 어선의 나포에 따른 조업일수 손실까지 쳐서 고려원양은 11억7천만원의 손해를 봤다. 해안경비대 감시원들은 우리 선원들이 선물용으로 왕게 몇 마리를 船室에 감춰둔 것까지 승선검색하여 들춰냈다고 한다. 美國정부는 어업규제 水域이 발효될 때, 외국의 위반 어선들은 『이렇게 처벌하겠다』고 예고하려는 듯 어선나포 때마다 누진적으로 벌금 액수를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北洋어장이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자 북양「트롤」14개 회사의 동업조직인 북양어업진흥회는 지난 6월24일부터 세 차례 민간교섭단을 미국에 보냈다. 이들은 어업규제수역 선포의 압력을 미국정부에 넣어온 미국 서해안 어민들에게 韓國의 입장을 이해시키려고 발버둥쳤다. 정부도 美國경제수역 내에서의 어획량을 많이 할당받기 위해 미국 정부와 접촉하고 있다.
지난 7월엔 「워싱턴」에서 미국의 어업규제 수역을 받아들인다는 전제 아래 韓·美어업협정체결 1차교섭을 벌였다. 박동진(朴東鎭)외무장관은 또 국회 답변에서 소련과 북양어업에 관해 대화할 필요성을 인정하며,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北洋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소리없이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 사이의 어업 협상은 본격적인 외교협상의 척후 역할을 하는 수가 있다.
北洋의 波谷을 헤친 白鯨號
韓國人이 北洋에 대한 도전의 닻을 올린 것은 1966년 7월16일, 부산水大실습선 백경호(白鯨號)(3백89t)는 65명의 북양어업조사단(北洋漁業調査團)을 싣고 부산을 떠나 1만9천㎞의 개척항정(開拓航程)에 올랐다. 부산水大와 수산청(水産廳)이 합동으로 실시한 이 시험조사 항해의 제1표적은 「바다의 돈보따리」인 연어와 송어였다. 수박맛 나는 이 신비한 물고기를 서양사람들은 즐겨 먹어 당시 국제시세는 t당 2천「달러」였다. t당 2백「달러」의 명태보다 10배, 「바다의 쇠고기」라는 참치보다도 2배 이상 비쌌다.
北洋진출은 원양으로 뻗는 水産韓國의,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방출이었다. 1957년 제동산업(濟東産業)이 제 1지남호(指南號)(2백t)를 「말라카」해협입구의 「니코바로」諸島 연안에 보낸 것을 시발점으로 인도양 남태평양엔 韓國의 참치잡이 어선들이 대거 진출, 그때까지 독주하던 日本 원양어선단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었다. 1966년의 우리나라 원양어획고는 6만4천9백32t, 전체 어획고의 12%를 차지했다. 이즈음 「北洋의 노다지」소문은 국내 수산업자들을 흥분시켰다.
당시 日本의 「혹가이도」에선 연어, 송어잡이 어선허가증이 허가 t당 1백만「엥」의 「프리미엄」으로 거래되고 있었다(당시 東京水産大연구원 장선덕(張善德)박사의 말). 日·蘇 어업조약에 묶여 서경 1백75도 서쪽의 北洋에서 연어, 송어 어획량을 규제당하고 있던 일본의 수산회사들 중에선 이 조약의 제약을 받지 않는 한국어선을 부추겨 연어를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회사도 있었다. 일본은 당시 매년 20만t의 연어, 송어를 잡아 연평균 6천4백만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있었다. 1척당 2개월 걸리는 1항차에 3천만∼7천만 「엥」의 수익을 올렸고 연어, 송어잡이 유자망(流刺網) 선원들은 가장 많은 봉급을 받고 있었다(1인당 평균 月 20만「엥」).
白鯨號는 그러나 소련의 예상되는 반응을 고려하여 日·蘇 어업조약 海域을 피해 「베링」海 동쪽의 美·日·「캐나다」어업조약 水域으로 향했다. 서경 1백75도 이동(以東)의 이 어장에선 어획실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1953년 이후 일본이 「자발적으로 연어 어획을 억제」하여 미국, 「캐나다」의 전유물이 돼있었다. 특히 「알라스카」주에선 연어, 송어잡이가 제1의 산업이었다. 전 주민의 약 10%가 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白鯨號를 미국이 우방국가라고 잘 봐줄 리는 없었다.
白鯨號 조사단의 단장은 韓國수산학계의 원로인 양재목(梁在穆) 부산水大교수(60)였다. 梁단장이 이끄는 白鯨號는 66년 8월5일 北洋에 들어갔다. 『우유빛 안개, 視界1백m, 갑판을 덮치는 나불, 일엽편주(一葉片舟)그대로다』고 梁교수는 항해일기에 적었다. 8월11일 白鯨號는 그물을 던졌다. 『7㎏이상 나가는 홍연어, 곱사송어, 은송어가 곶감처럼 끼워져 갑판에 내동댕이 쳐졌다. 이 싱싱한 미각의 왕자를 두고 베풀어진 향연,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기다리던 단원들이 우 달려들었다. 넝큼넝큼 벌려 젖히는 저 큰 입 속으로 푸등푸등한 살점이 들어간다. 상긋한 맛!』
8월14일 白鯨號는 4천t급 소련 「트롤」어선 「867 ASKOLD」호와 스쳐지나갔다. 白鯨號가 부산을 떠나기 전 모국제법교수는 梁단장에게 『소련경비정이 접근하면 무조건 도망가라』고 부탁하더란다. 그러나 빨간 「스커트」를 입은 소련 여자선원들이 갑판에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白鯨號는 연이어 유자망(流刺網)시험조업에서 11회 투망에 4백40마리 어획의 성과를 올렸다. 「트롤」시험에선 우리西海의 8배나 되는 단위 어획량을 기록, 엄청난 北洋의 자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명태는 너무 커서 대구와 혼돈될 정도였다.
「베링」海에서 白鯨號 조사단원 중 한 사람이 물개를 「카빈」으로 사살한 적이 있었다. 이때 美國 경비정이 이 장면을 찍어 白鯨號 귀항후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사진을 제시, 항의를 제기했다. 北洋의 물개는 국제조약으로 보호되고 있다. 약 3백50만 마리의 北洋물개가 먹어 없애는 물고기는 인간이 잡는 양보다도 많다고 한다. 白鯨號의 목욕탕엔 사로잡힌 물개 4마리가 사육되고 있었다. 모두 암놈이라 감시를 소홀히 했는데 어느날 암놈의 「그것」을 누군가가 도려가 소동을 빚기도 했다.
백경호는 「알라스카」의 「코디악」港에 보급품을 싣기 위해 들어가 이 벽지에서 교포를 만났다. 3세대가 게 가공공장에 나가 1인당 1천「달러」씩 벌고 있었다. 백경호는 검색한 美國海岸 경비대가 선물로 준 「팔멀」담배를 갖고 66년 10월12일 무사히 부산에 돌아왔다. 북양조사단은 귀항보고에서 어로상의 기술적인 문제는 해결됐으나 연안국의 반발이 염려된다고 지적했다. 또 조사기간 40일중 햇빛을 본 것은 5시간에 불과했다면서 안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최신 항해장비, 대형 어선, 고급선원의 확보가 절실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三洋水産의 무모한 출어
연어는 강에서 산란한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커가면서 바다로 내려간다. 바다에서 4, 5년 자라다가 자기가 태어난 강을 찾아가 알을 낳는다. 특히 홍연어는 태어난 강의 태어난 장소까지 정확히 찾아간다. 이 모천회귀(母川回歸)의 본능은 처절한 집착성을 갖고 있다. 알을 낳고 죽기 위해 연어(송어도 연어科에 속한다)는 눈물겨운 고생을 하면서 강을 거슬러오른다. 「댐」이 새로 생겼을 땐 헛된 짓인 줄 알면서도 뛰어넘기 위한 「점프」를 계속하다가 끝내 지쳐 죽는다. 육상동물들이 江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연어를 잡아먹기도 한다. 연어는 작은 폭포쯤은 뛰어넘는다. 1.5∼3m높이까지 「점프」한다.
산란 適地를 발견한 암놈은 꼬리를 움직여 강바닥의 자갈을 파내 산란장을 만든다. 이 때 수놈은 망을 보며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고―. 산란장 파는 데 5일. 이 공사가 완성되면 암컷은 산란장에 출입을 되풀이하며 알을 낳는다. 수컷은 암놈의 몸을 자기 몸으로 문질러 정자를 방출, 수정이 이뤄진다. 3∼5일 걸리는 수정의 과정은 어미 연어에겐 죽음의 향연이 된다. 산란을 끝낸 어미의 몸은 급격히 마른다. 체력도 거의 소진된 상태. 그래도 이 놈은 마지막 힘을 짜내 상류쪽의 자갈을 파서 알이 깔려 있는 바닥을 덮는다. 약 10일간의 이 작업이 끝나면 어미는 죽는다.
이런 母川回歸性 때문에 어업상 세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첫째, 연어의 母川을 가진 나라에선 구태여 바다까지 갈 필요없이 연어가 돌아올 때 강구(江口)에서 잡으면 된다.
둘째, 공해(公海)를 떠도는 연어지만 母川에 따라 종족이 다르고 국적이 있다.
셋째, 산란하면 반드시 죽고 죽으면 먹지 못하기에 자원유지가 큰 문제다.
첫째, 연어의 母川을 가진 나라에선 구태여 바다까지 갈 필요없이 연어가 돌아올 때 강구(江口)에서 잡으면 된다.
둘째, 공해(公海)를 떠도는 연어지만 母川에 따라 종족이 다르고 국적이 있다.
셋째, 산란하면 반드시 죽고 죽으면 먹지 못하기에 자원유지가 큰 문제다.
母川을 가진 美, 蘇, 「캐나다」는 자원유지를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여 인공 부화방유(孵化放流)를 하고 있다. 따라서 母川을 갖지 않는 나라가 비록 공해에서라도 연어어획을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 그들로부터 나오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동해안에도 연어가 산란하는 강은 있다. 밀양강(密陽江), 三陟五十川, 江口五十川. 이 연어들은 그러나 극소수이며 대부분 東海에서 뺑뺑 돌다가 돌아오므로 北洋에서의 발언권 확보엔 도움이 안 된다. 더구나 66년에 北洋개척항해를 한 한국은 개척1백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처럼 北洋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권리를 주장할 처지도 못됐다.
이런 입장에 있는 한국이 北洋에 발붙일 곳을 마련하기 위해선 외교적인 절충과 병행, 조심스럽게 진출해야 했다. 정부가 대학의 연구용 선박인 백경호를 학술조사라는 명목을 앞세워 파견한 것도 그런 배려에서였다. 그러나 三洋水産(사장 정영준(丁榮俊)의 이해할 수 없는 출어는 이런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그 뒤의 북양진출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다.
白鯨號가 연안국의 눈치를 보며 개척항해를 하고 있을 즈음 北海島 광미(廣尾)항 동쪽 30海里해상. 이곳은 日·蘇 어업조약상의 B구역에 해당한다. 때는 연어, 송어 어기(漁期)도 끝난 시점, 연어 겨우 6마리를 잡는데 그쳤다. 엉뚱하게 상어 80마리와 잡어 40상자 등 8t의 어획고를 올린 이 장난같은 출어의 참 의도를 지금도 의심하는 水産학자들이 많다. 三養水産은 이 출어에서 정부보조 출어자금 수천만원을 허비했다. 보다 큰 손실은 日本 어민에 대한 자극이었다.
三洋水産은 잡은 어류를 「혹가이도」「하꼬다데」에 양륙했다. 日本 어민들이 들고일어났다. 日本정부는 「외국인 어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우리 북양어선의 日本기항을 금지시켰다. 어민들은 또 北洋에 밝은 일본선원 21명을 뽑아 韓國에 수출시키려던 國洋産業에 압력을 넣어 이 계획을 포기시켰다. 연어잡이 어구의 對韓수출도 중지하도록 어민들은 「메이커」에 압력을 가했다. 일본의 이런 대응으로 그 뒤 韓國의 北洋진출은 왕복航程 1만㎞의 위험한 무기항(無寄港) 항해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2년 원양어업 생산량 40만 톤, 생산액 1조1260억 원, 종사자 10791명.
北洋에 던진 장미꽃
『「브리지」에 올라 1, 2호 독항선을 살피던 기자는 차마 정시(正視)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광경에 눈을 감았다. 그 큰 파도 속에 「마스트」까지 가렸다가는 다시 솟고, 금새라도 무서운 소용돌이에 삼켜질 것 같은 처절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브리지」의 출입문을 붙잡은 채 밖을 내다보던 순간, 배밑창이 빠지는 것 같은 충격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또 한번 산더미같은 파도가 「브리지」를 때리자 키를 쥐고 있던 늙은 조타장(操舵長)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배는 허공을 내딛는 것처럼 급히 가라앉고 옆으로 기우뚱했다. 이제 마지막인가보다. 그러나 노련한 조타장은 키를 꽉 쥔 채 튕겨지듯 다시 일어났다. 배는 서서히 다시 솟구치고 중심을 되찾는 데 이 과정은 퍽으나 완만하게 느껴졌다』
『母船과의 交信시간이 됐다. 7호 독항선의 통신사는 이 같은 경황중에도 제법 여유를 보여 식사며 반찬얘기까지 물어왔다. 조용재(趙鏞哉)어로과장은 일부러인 듯 식사에 대한 긴 얘기를 했다. 그런데 웬일일까? 지금까지 감도 좋게 교신하던 7호에서 응답이 뚝 그치더니 몇초쯤 지났을까.
「국장(7호통신사)! 국장!」
2호 독항선 통신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연거푸 모선을 불렀다.
「모선! 무선! 7호가 넘어집니다」
趙과장―「뭐, 자세히 말하시오. 확인하시오」
「7호가 완전히 뒤집혀 배밑창이 드러나 보입니다. 두 사람 탄 구명정이 파도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趙과장은 「이성을 지킵시다」고 SSB로 외쳐댔다』
「국장(7호통신사)! 국장!」
2호 독항선 통신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연거푸 모선을 불렀다.
「모선! 무선! 7호가 넘어집니다」
趙과장―「뭐, 자세히 말하시오. 확인하시오」
「7호가 완전히 뒤집혀 배밑창이 드러나 보입니다. 두 사람 탄 구명정이 파도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趙과장은 「이성을 지킵시다」고 SSB로 외쳐댔다』
67년 10월15일 하오 5시 북위 49도10분 동경 1백79도37분 「베링」海 한복판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태풍을 피해 필사적인 탈출항해를 하다가 끝내 태풍에 잡혀버린 三洋水産 선단 9척. 제7호 독항선의 최후를 당시 母船에 타고있던 東亞日報 김원기(金元基)기자는 위와 같이 기록했다. 곧 이어서 밤 8시에 제8호 독항선도 실종, 두 배에 타고 있던 모두 29명의 젊은 선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제7호 선장 鄭남규씨(당시 44세)와 8호 선장 곽용운(郭龍雲)씨(33)는 전남고흥군 봉래(蓬萊)면이 고향인 의형제였다. 부산水大의 두 실습항해사 김정남(金正男), 이민남(李敏男)군도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선상에서 올려진 위령제에서 선원들은 부산에서 출항할 때 가져온 붉은 장미꽃을 바다에 던져 이들의 혼을 달랬다.
이런 비극을 연출한 67년의 三洋船團 2차출어는 처음부터 너무나 무리가 많았다.
당시 三洋 선단의 어로과장으로 출어했던 趙鏞哉씨(39·三松産業株式會社 부산 사무소장)는 『北洋에 대한 기상정보, 어로정보를 충분히 입수할 수 없었다. 1백t급 독항선들은 세계 大洋중 가장 거친 北洋에선 견디기 어려운, 복원력이 약간 허술한 배였다』고 말한다. 三洋 선단의 1천t급 母船은 선령 10년의 낡은 배였다. 이것조차 北洋漁具의 對韓판매금지조치로 일본 선주가 한국에 직접 팔 수가 없어 「파나마」를 중계로 하여 도입했다. 母船의 부속품은 제조공장에서도 절품이 돼 고장나도 대체할 수 없었다. 냉동기는 항해중 고장, 日本 「하꼬다데」에서 2주일간 수리를 해야 했다.
이 출어에서도 三洋水産은 연어, 송어 漁期를 다 보내고 출항했다(8월17일 부산 출항). 이 시기에 나가 연어를 채산성 있게 잡는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으나 三洋水産은 정부로부터 출어자금 지원을 받아두었기 때문에 허약한 장비로 또 다시 무모한 위험 출어를 했다. 더구나 9∼10월은 태풍이 「베링」海로 몰려드는 가장 위험한 계절이란 것은 상식에 속해 있었다.
북양어업의 귄위자인 이병기(李秉錡)부산水大교수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국가적인 소득이 아무 것도 없는 항해를 강행한 것이 사고를 자초했다』고 말한다. 三洋선단이 두 독항선을 잃고 「알라스카」의 「더치·하버」에 피항한 뒤 선원들이 『안전성 약한 배로 더 이상 조업할 수 없다』면서 회사측의 만류를 무릅쓰고 귀항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자위행위이기도 했다. 사태를 수습하러 간 丁榮俊사장마저 「메틸·알콜」과음으로 「더치·하버」에서 변사, 三洋선단의 2차 출어는 비극으로 시종했다.
北洋명태의 등장
三洋선단은 그 비극으로써 큰 교훈을 남겼다. 「先進出 後外交」라는 정부의 북양정책의 헛점이 드러났다. 또 북양에서 뛸 수 있는 강고(强固)한 전용어선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연안국(沿岸國)의 양해가 없는 한, 연어, 송어잡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水産人들은 갖게 됐다. 다른 나라에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무지무지한 低棲자원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이다.
韓國선단의 北洋진출에 대해선 美·蘇·日·「캐나다」가 발맞춰 반대하고 나섰다. 美國, 「캐나다」는 66년 제13차 북태평양 어업위원회에서 韓國의 북양진출 반대결의안을 제출, 이를 결의했다. 日本은 67년 三洋水産 어선단이 母船냉동기수리를 위해 「하꼬다데」항에 들어가자 선원들의 상륙을 금지, 10일간 할 일 없이 바다에 떠있도록 만들었다.
결국 「하꼬다데」에 사는 日本人 친지를 선단 본부에서 수소문하여 그들이 배에 찾아와서 중계하는 방법으로 냉동기 수리를 할 수 있었다. 日本의 이런 비인도적인 보복이 없었더라면 三洋 선단은 태풍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29명의 생명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련은 71년 동성호를 「캄차카」연안에서 붙들어갔다.
가장 격렬한 반대를 보인 것은 한국이 가장 믿었던 미국이었다.
67년엔 「펠리」법안을 의회에 제출, 미국 속령이던 「사모아」에서 韓國 참치잡이 어선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1970년 5월엔 「알라스카」주 출신 「스티븐슨」상원의원이 『韓國어선이 연어를 잡으면 대한경원(對韓經援)을 일제히 중단한다』는 결의안을 상원에 제출, 통과시켜 연어잡이의 꿈을 최종적으로 깨버렸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北洋어업의 돌파구를 연 것은 젊은 선장 申영섭씨(40·현재 高麗遠洋 탁양호(拓洋號)선장)였다. 1968년 水産開發公社는 이불(伊佛)차관으로 도입한 「스턴·트롤」船 601강화호(1470t)를 대서양에서 부산으로 몰고 왔다. 강화호는 대서양조업에서 재미를 못보고 채산이 맞지 않아 소환된 셈이었다. 강화호는 기약없이 부산南港에서 나날을 보냈다. 이즈음 水産學者들이 강화호를 北洋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水開公에 하곤 했다.
水開公은 1968년 6월2일 강화호를 북양에 보냈다. 申영섭 선장은 북양어로에 대한 국내 문헌을 구하지 못해 고생하다가 그때 막 나온 『北洋漁業論』(李秉錡著)을 교과서 삼아 가져갔다고 한다. 강화호는 2개월간의 조업에서 명태4백4t, 가자미4백48t, 청어4백21t 등 총 1천3백13t을 잡고 8월1일 부산에 돌아왔다. 당시 국내 「매스컴」은 같은 날에 돌아온 제3차 三洋水産 선단에만 관심을 보였고, 강화호의 성공은 무시됐으나 강화호의 첫 출어는 그 뒤의 북양어업에 획기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의 명태값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값 비싼 청어까지 무더기로 잡아 왔기 때문에 강화호는 억대의 수입을 올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北洋에선 명태를 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잡은 명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강화호였다. 한번 그물 끌어 30∼50t의 명태를 잡아 올렸다는 얘기는 당시의 국내수산업계엔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여졌다. 그도 그걸 것이 그때 西海에서 국내 쌍끌이 어선들은 1양망(揚網)당 평균 4백㎏의 어획을 올리는 데 머물고 있었다. 강화호는 명태 등 저서어종을 대상으로 하는 「스턴·트롤」어법을 北洋에서 처음으로 성공시켜 그 뒤의 北洋漁業을 그 「패턴」대로 이끌고 간 서구적 역할을 한 것이다.
北洋 황금 시대의 개막
北洋의 개념은 약간 모호하다. 北洋은 물론 북태평양의 약칭―. 적도 이북의 태평양을 둘로 나눠 북쪽을 북태평양, 남쪽을 중부태평양으로 부른다. 둘로 가르는 線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北洋漁業의 北洋은 보통 북위 40도선 이북의 아한대해역(亞寒帶海域), 특히 「오호츠크」海, 「캄차카」근해, 「베링」海, 「뉴파운들랜드」근해와 함께 세계 3대 어장에 들어간다. 세계 어획량의 약 3분의 1인 1천8백만t이 매년 여기서 잡힌다.
세계 제1의 수산국 日本은 총어획량의 약 45%인 4백54만t(74년)을, 蘇聯은 세계 제2위의 신흥 수산국인데 약 33%인 2백40만t쯤을 北洋에서 잡고 있다. 美·蘇·「캐나다」가 각각 2백 海里 경제수역을 발효시킨다면 日本은 북양 어획고의 약 78%, 금액으로 약 7억 「달러」를 잃게 된다. 이것은 日本人의 1인당 하루평균 동물성단백질 섭취량 35g중 20%인 7g을 상실하는 것을 뜻하며 어선 1천2백척 종업원 3만여명의 실직을 의미한다. 한국 이상으로 위기에 몰려 있는 日本이다. 따라서 美國經濟 수역내의 어획 「쿼터」를 할당받는 협상에서 한국과 日本은 경쟁하는 입장에 있으며 이 수역내의 어획실적이 적은 韓國은 불리한 자리에 서있는 셈이다.
北洋에서 단일어종으로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은 명태다. 지난 70년 기준으로 매년 약 3백30만t, 그중 日本이 2백40만t을 잡는다. 해마다 약 60억 마리의 명태가 北洋에서 잡힌다는 계산이다. 명태는 한번 산란에 1마리가 약 1백50만개의 알을 낳는다. 이런 맹렬한 번식력으로 명태는 다른 어떤 어족보다도 남획을 잘 견디어 왔다. 北洋의 명태 밀집군(密集群) 가운데 큰 것은 두께 70m, 너비 5백m, 길이 10㎞나 된다. 3천∼5천t급 대형 「트롤」어선 몇십척이 1열종대로 이런 魚群에 그물을 널어뜨려 줄줄이 1시간만 끌어도 척당 15∼50t의 어획이 보장되는 것이다.
69년에 들어서자 강화호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민간水産會社에서 「스턴·트롤」어선을 북양에 출어시키기 시작했다. 한성기업은 1천5백t급 신조선 한성호를 7월28일∼12월9일(3항차)사이 「베링」海에 보내 1천4백76t의 명태 청어를 잡았다. 이 한성호 선장 金만조씨는 北洋선장들 중 돈을 가장 많이 벌고 또 가장 많이 써버린 사람으로 꼽힌다. 69∼70년 사이엔 한번 왕복항해에 3백만∼5백만원까지 받았다는 전설(?)을 뿌렸다.
한성호에 이어 부산수산냉동9株)의 제101행복호(3백t)가 北洋에 진출, 이 역시 돈더미를 쓸어오다시피 했다. 행복호는 「베링」海까지 나가지 않고 「캄차카」반도 연안에서 명태를 잡아왔다. 연어 송어면 몰라도 명태를 잡을 바에야 가까운 「캄차카」연안어장으로 족하다는 선례를 남겼다. 이 때문에 항해일수가 10일쯤 짧아져 1항차가 30일 전후로 됐다. 5천t급 「트롤」어선을 예로 들면 조업일수 1일의 단축은 각종경비 1천만원의 절약을 뜻하니 만큼 「캄차카」근해어장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행복호는 또 3백t급 중형어선도 北洋에서 獨航조업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행복호의 뒤를 좇아 1970년엔 8개 민간회사가 3백t급 9척, 8백t급 1척, 1천5백t급 1척등 모두 11척의 독항선을 북양으로 보내 1만7백12t의 저서어종(90%가 명태)을 잡아왔다. 이밖에도 이해엔 신흥수산이 7천t급 母船과 1백t급 저인망 子船 10척으로 구성된 母船式선단을 보내 6천4백t을 잡았고 남양수산도 7척의 모선식 선단을 파견, 1천45t을 어획했다. 그러나 명태어획에선 母船式선단이나 저인망 어선보다는 「스턴·트롤」독항선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판명돼 71년부터는 母船式 선단 출어가 중단됐다. 한편 三洋水産은 69년 부실기업으로 정리됐다. 71년엔 24개 회사에서 「트롤」독항선 33척 저인망어선 33척, 합계 57척을 출어시켜 7만2천9백83t의 어획고를 기록했다. 北洋황금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船長의 전성시대
이즈음 北洋「스턴·트롤」선장들은 부산 南浦洞 술집거리에서 「팁」의 신화를 남기고 있었다. 10만원다발을 뿌려 술집작부들이 5백원짜리 줍기 시합을 벌인 얘기, 귀항하면 아예 몇십만원을 술집에 예치해두고 바닥날 때까지 나날이 술을 퍼마신 총각선장의 치기(稚氣)로 유흥가는 흥청거렸다. 1항차에 1백만원이상 받는 한국 최고의 봉급수령자였던 北洋선장들은 돈을 아무리 써도 바다에 나가면 또 벌어올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부산의 자갈치시장이나 공동어시장엔 비린내를 풍기며 보따리장사처럼 바쁘게 오가는 작업복에 가죽「잠바」차림의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들은 북양수산회사사장들. 수십억원대의 고정자산을 갖고 주로 몇천만원대 이상의 금액만 대화에 올리는 신흥 알부자들이었다.
北洋선장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수산회사에선 선장과 고용계약한 뒤엔 사관을 제외한 다른 선원들의 채용은 선장에게 일임했다. 선장은 이 특권을 이용, 자기 사람을 쓸 수 있게 됐다. 선원들의 급여를 결정하는 「짓」數도 선장이 정했다. 이 「짓가림」은 韓國어업계에선 전통이 돼 있었다. 어획고에서 都中經費(어업경영비)를 뺀 나머지 수익을 노사(勞使)간에 일정한 비율로 갈라먹는 청산제도다. 北洋어업에선 중형선일 경우 70대 30, 대형선에선 78대 22 또는 80(회사몫)대 20(선원)으로 가르는 게 통례였다.
선원몫은 선장이 정한 짓數에 따라 개인별로 나눠진다. 북양표준형은 선장 3, 기관장 2.5, 1항사 2.2, 통신사와 갑판장 2, 1등기관사 및 2등항해사 1.9, 3등 항해사와 2등기관사 1.5, 냉동기사와 3등기관사 1.2, 1등갑판원과 1등 조기원(操機員) 1, 2등갑판원과 2등 操機員 0.9, 3등갑판원 및 3등조기원 0.7∼0.9짓.
대서양, 인도양, 남태평瑛?우리나라 원양참치잡이 선장들의 짓數는 2. 北洋선장이 특별 우대를 받은 것은 이들이 비교적 경험 많고 질적으로 우수한 「엘리트·그룹」인 때문이었다. 북양선장들은 또 목표량을 초과하는 어획고의 일정비율을 상여금으로 받았다. 자원이 많은 北洋의 선장에게 이 상여금이 짓가림에서의 몫보다 몇 배 많았다.
「짓가림」은 우리나라 특유의 차인동사(差人同事)라는 공동경영 형태에서 유래한다. 전규(錢圭)는 어선과 어구를 제공하고 선원 즉 差人은 노동력을 제공하며 그 수입은 분배差數(비율)에 따라 나눠 갖는다는 것이다. 이 짓가림을 수산회사측에서 악용하면 노동력의 착취가 되고 선장이 악용하면 많은 어획고를 올리기 위해 하급선원들을 밤낮없이 혹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회사측에선 都中경비 분배차수를 유동적이고 신축성 있게 만들어 두어 어획고의 多少에 따라 일방적으로 유리하게끔 적용하곤 했다.
北洋선장들의 평균연령은 참치잡이 선장들보다 5∼6세 많은 30대후반 또는 40대초반이었다. 이들은 기계화된 「스턴·트롤」의 어법에 익숙해 있고 北洋의 해황(海況)에 밝은 고참들로서 약 80%는 부산水産大學 어로과 출신. 고려원양의 심중섭(沈仲燮)선장(50)은 부산水大 어로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白鯨號의 북양개척조사단에도 끼었던 학자인데 현재 북양에 가장 정통한 선장으로 꼽히고 있다.
북양을 뛰는 수산회사중에선 日本人 어로장을 태우는 회사도 더러 있었다. 월급 1백만「엥」을 받던 이들은 초창기엔 어군탐지, 어장선택에 도움을 주었으나 우리 선장들이 북양에 익숙해지면서 상호 의견충돌이 잦아 요즘은 기피하는 경향이다. 선장을 일방적으로 우대하는 것은 선장의 수완이 어획성적과 조업일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北洋의 경우엔 예나 지금이나 만선(滿船)은 기정사실이다.
문제는 얼마나 짧은 기간안에 만선시키느냐인 것이다. 이를 위해선 가까운 어장의 선택, 단위용적당 가장 高價가 되도록 加工상태를 선별할 수 있는 능력, 응급환자에 대한 조치, 미국경비성 검색에의 대응등 경영관리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면허의사가 타지 않는 北洋어선에서 급성맹장염등 응급환자가 생기면 日本「혹가이도」에 들어가 환자를 내린다. 이 때문에 조업일수가 늘어나 응급환자 1인당 1천만원 꼴로 손해를 본다.
넘치는 북양(北洋)명태, 떨어지는 어가(魚價)
71년부터 北洋명태가 국내시장에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오자 명태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71년 1월에 kg당 1백 57원 하던 것이 그해 4월엔 79원75전, 9월엔 58원71전, 72년 4월엔 37원, 73년 7월엔 34원까지 폭락했다. 무려 5분의 1로 내려 앉은 것이다. 이것은 北洋漁業을 위협하는 현상이었을 뿐 아니라 국내 연근해어민들에겐 파국에 가까운 사태였다. 명태값은 고등어 멸치 등 다른 魚價도 함께 끌고 내려갔다. 맨먼저 동해안의 명태업자들이 타격을 받더니 부산의 고등어선망업자, 기선저인망사업자, 군산(群山)일대의 갈치 조기업자, 동해안의 꽁치 도루묵업자들이 녹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싼 명태를 즐기는 국민들이 다른 어종을 거들떠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한국인(韓國人)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옛부터 명태를 좋아해 왔다. 북양어업은 「명태기호의 전국민화」를 초래하여 밥상에 명태 끊일 날이 없도록 만들었다. 아침에 명태국을 마신 사람은 점심땐 도시락에 든 명태무침을 먹었고 저녁엔 구운 명태를 찢어 고추장에 찍어 먹는 실정이었다.
연근해업자들은 북양명태의 국내반입을 저지하는 운동을 폈다. 그러나 연어 송어면 몰라도 북양명태를 수입해 가려는 나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북양에서 명태를 대량 어획해 가는 나라론 소련과 日本이 있었는데 주로 동물 사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북양명태의 대량반입은 그러나 국민식생활의 개선이란 큰 공헌을 했다. 학자들은 북양개척 이후 한국인의 동물성단백질 섭취량이 크게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말린 명태 즉 북어는 1백g당 3백 34「칼로리」의 열량을 내는 고단백질 어종이다. 한국인에게 부족하기 쉬운 철분을 29.8g, 인분(燐分)도 9백93g 함유하고 있다. 쇠고기(1백g당 2백59「칼로리」)보다도 높은 열량이다.
1930년대의 정어리 선풍-한 해에 1백37만t(당시 단일 어종으로 세계 최고기록)이 잡히고, 어촌에선 개가 돈을 물고 다니며, 양철동이로 정어리를 퍼내고, 정어리업자 신분증은 술집에서 「프리·패스」되며, 그들이 낸 촌지(寸志)로 부산水大의 전신인 수산전문학교가 세워지던 그 「붐」 이래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이 북양명태였다.
연근해 어민들에 대한 魚價압력도 73년께부터 명태가공공장의 설립으로 해결되고 명태값도 안정돼 갔다. 73년 한성기업의 울산(蔚山)에 북양명태를 원료로 하는 「필레」가공공장을 세운 것을 계기로 고려(高麗)원양등 큰 수산회사에선 가공시설이 완비된 공선(工船)을 도입, 명태가공에 힘쓰기 시작했다. 72년을 분기점으로 북양은 무조건 잡기만 하던 시절에서 처리가공에 중심을 두는 시대로 넘어갔다.
뼈와 기생충 및 내장물을 추려낸 근육질의 「필레」(filet), 동물사료인 「피시·밀」(fish meal 어분(魚粉)), 어류(魚油), 명란 냉동어(round)로 가공된 명태는 수출길도 트게 됐다. 1973년엔 9천5백77t의 「필레」수출로 1천만「달러」, 74년엔 약 1천2백만「달러」를 벌어들였다. 72년부터 공선(工船)을 겸한 대행「트롤」어선들이 도입됨에 따라 북양어업(北洋漁業)은 우리 원양어업의 선두주자라고 나서게 된다.
72년의 北洋어선 세력은 44척에 총 t수 2만5천6백t. 어선 대형화의 경향이 나타나 3천t급 2척, 1천5백t급 2척, 1천2백t급 1척, 3백t급 39척이었다. 2척의 3천t급 어선은 高麗遠洋이 도입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 회사는 삼양수산(三洋水産)-水産開發公社-韓星기업의 「바톤」을 이어받고 北洋의 주도적인 회사로 등장했다. 72년의 북양어획고는 전체원양어획고의 약 50%인 11만6천7백16t, 73년엔 63%인 22만6천1백24t을 기록했고 74년엔 약 60%인 24만6천3백21t을 잡았다. 명태값도 kg당 88원71전(74년 3월)선으로 올라 안정됐다.
명태값의 안정엔 가공수출의 영향도 있었지만 우리 국민들이 워낙 명태를 즐겨먹어 명태 시장이 너무나 넓기 때문이었다고 수산경영학자 장수호(張 鎬)교수(부산水大)는 분석한다.
하급 선원, 女工들의 수난
75년 12월 1일 9시 20분쯤 당시 모신문사의 사회부기자로 근무하고 있던 필자는 사회부「데스크」옆에 앉아 일선기자들이 전화로 불러주는 기사를 받고 있었다. 이때 소방차「사이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화재로 짐작, 신경을 크게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렌」소리는 계속 됐다. 그제서야 큰불이 난 것으로 믿고 담당 기자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소방관들도 큰 불로만 생각하고 방독면을 지참않고 현장인 부산시 서구(西區) 충무동(忠武洞)5가 오양(五洋)냉장으로 달렸다. 사고는 큰불이 아니라 「암모니아·개스」폭발이었다. 3층처리장의 급속동결기에 붙은 고무「호스」북양명태를 가다듬는 일을 하고 있던 2백4\50여명의 女工들은 너비 1m의 좁은 2개의 계단으로 몰렸다. 「개스」를 마신 女工들은 가슴을 쓸면서 헉헉 소리만 지르곤 스러져갔다. 계단에선 넘어지고 밟히며 미끄러지는 수라장이 벌어졌다.
소방관들은 방독면 없이 엉겁결에 女工들을 구출하러 달려갔다가 같이 중독돼 쓰러졌다.
필자는 다친 女工들이 실려 오는 부산대학 병원을 「카버」하고 있었다. 실려온 피투성이의 女工들은 응급실의 「시멘트」바닥에 부어졌다. 기도(氣道)까지 찌르는 「개스」냄새, 긴급동원된 의사들은 「마스크를 끼고 거의 질식상태의 女工들 목 줄기를 따기 시작했다. 「암모니아·개스」는 강한 부식성을 가진 데다가 호흡기관의 점막을 特攻했던 것이다.
필자는 다친 女工들이 실려 오는 부산대학 병원을 「카버」하고 있었다. 실려온 피투성이의 女工들은 응급실의 「시멘트」바닥에 부어졌다. 기도(氣道)까지 찌르는 「개스」냄새, 긴급동원된 의사들은 「마스크를 끼고 거의 질식상태의 女工들 목 줄기를 따기 시작했다. 「암모니아·개스」는 강한 부식성을 가진 데다가 호흡기관의 점막을 特攻했던 것이다.
목구멍이 부어 숨을 못쉬고 가슴만 쥐어뜯는 女工들에게 의사들은 마취시킬 겨를도 없이 기도절개 수술을 해나갔다. 옷에 묻어 있는 「암모니아·개스」를 제거하기 위해 옷을 홍랑 벗기고 영하의 날씨 속에서 세척용 냉수까지 뒤집어쓴 여공 20여명이 마취없는 즉석수술을 받았다. 결막손상으로 충혈된 눈동자를 번득이며 『엄마!』를 불러대던 10代후반, 20대 초반의 女工들중 6명이 숨지고 80여명이 중경상했다.
이들은 하루 8~10시간씩 줄곧 서서 차가운 북양명태를 만졌다. 그 대가는 1시간당 50원, 월 1만5천원 안팎의 임금이었다. 北洋어업의 활로를 연 「필레」가공수출산업은 女工들의 이런 저임금덕택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北洋선원들의 수난도 계속됐다. 71년 동성호가 소련에 납치됐다가 풀려나오는가 했더니 74년 7월 29일엔 高麗遠洋소속 해금강(海金剛)호(7백20t·선장安 一男)가 「혹가이도」 동북쪽 1백㎞ 해상에서 日本어선 신흥환(新興丸)(4백23t)에 받혀 침몰, 선장을 포함한 23명이 사망했다. 北洋 특유의 안개 자욱한 바다에서 해금강호(海金剛號)의 거듭된 경적을 무시하고 접근해온 日本어선이 왼쪽 허리를 받았던 것이다. 선체는 5분만에 침몰했다. 선실의 「암모니아·개스」까지 폭발하는 통에 정신을 못차린 잠결의 선원들은 얼음물같이 차가운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5대독자 정상택(鄭相澤)씨(31·기관업) 등 12명은 생명을 잃고 말았다.
73년부터 큰 수산회사들은 당국의 임금제개선 권고에 따라 「짓가람」 대신 고정봉급제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하급선원들에겐 이 임금제도 변화가 개악(改惡)으로 작용했다. 임금이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현재 북양선원들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처리원(4천5백t 어선의 경우, 1백20명중 75명이 처리원)의 월급은 5만원 안팎이다. 이것이 「피칭」과 「롤링」에 시달리고 덜미를 쏟으며 항상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하루 16시간이상 노동한 대가다.
『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고 하지만 이들의 경우엔 애당초 먹여살릴 돈도 벌 수 없는 실정이다. 시내「버스」안내양의 처우가 문제되고 있지만 서울의 경우 최저 5만원선은 확보됐다고 한다. 잡은 고기를 정리, 절단, 가공하는 처리원들의 저임금실태는 먼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버스」안내양처럼 「매스컴」의 각광(?)을 못받고 있는 듯 하다.
처리원들의 작업 강도(强度)는 「버스」안내양의 그것과 비교 안될 정도로 높다. 더구나 처리원들은 30~50세의, 처자식 딸린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어선의 규율부장격인 30代의 초사(1항사)에게 늦잠을 자다가 덜미를 잡혀 벌로 변소청소를 하는 수모까지 겪기도 하는 처리원들이다. 봉급제 밑에서도 선장들의 봉급은 손에 잡히는 액수로 따져 80~1백만원 선이다. 1항사가 23만원, 2, 3항사는 15만~20만원, 4년제 水産大學을 막 졸업한 실습항해사가 6만~8만원, 갑판원이 6만5천~8만원선이다. 선장이 처리원 20명분의 봉급을 받는 현행 임금수준은 개혁돼야 할 것이다.
北洋선원들은 유급휴가, 시간외 근무수당, 퇴직금등 선원법이 보장하는 혜택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 노동조합은 없거나 있더라도 선상분회(船上分會)가 조직 안돼 유명무실하다. 여기에다가 의사가 승선하지 않아 항상 건강의 위험을 느낀다.
지난 72년의 부산水大 경영학과 장수호(張 鎬)교수 조사-「北洋漁業 勞務관리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북양선원들은 11개 조사항목중 9개부분(위생, 임금, 인간관계 등등)에서 회사 또는 선장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역시 72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북양에서 조업중인 44척의 어선중 42척이 韓·日어업협력차관, 對日청구권 특별차관, 伊·佛정부차관등 외채(外債) 2천여만「달러」로 건조된 배였다.
북양업자들이 막대한 원리금상환과 「오일·쇼크」를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는 ①「오일·쇼크」이전의 북양어획수익이 엄청났고 ② 저임금의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공전(空前) 「스케일」-북양어업(北洋漁業)
북양어장에 세계어업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20여개국 어선들이 몰려든다. 최신 장비가 아니면 이 거친 바다에 통용되지 않는다 풍속 40m, 파고 10m, 두께 2m의 결빙(結氷), 파도를 맞아 뱃전의 철판이 휘어지고 태풍 속에 들면 며칠간 반경 2~4㎞의 바다를 뺑뺑 도는 황천항해(荒天航海)를 해야 한다. 북양어선은 북향의 야성(野性)에 맞게끔 선폭이 넓고 45도쯤 기울어져도 복원될 수 있도록 특수설계된다.
지난해 12월 T水産의 4천5백t급 어선 1척은 고급어종을 잡으러 「캄차카」반도의 동안(東岸)에 바짝 붙어 북위 62도 「베링」해협 바로 밑에까지 올라갔다. 개척 항해에서 백경호(白鯨號)가 북위 60도 24분까지 북상한 적이 있었다. 이 배는 이 기록을 깬 최고의 북상항해를 했다. 소련 해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단다. 이 배는 여기서 얼음에 갇혀 버렸다.
밤을 지내고 남하하려고 하니 사방 수십㎞가 밤새 얼어붙어 빙원(氷原)이 돼 있었다. 선원들이 氷原에 내려가 얼음을 깨고 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배는 잠시 後進했다가 급속전진을 되풀이하며 조금씩 얼음을 깨고 氷原을 탈출했다. 두께 9㎜의 뱃전철판에 구멍이 나, 「혹가이도」의 「구시로」港에 수리차 직행했다고 한다. 이 배의 선원들은 永原을 기어가는 바다표법을 그물로 씌워 잡기도 했다. 그들은 北洋위를 걸은 첫 선원들이 된 것이다.
현재 北洋엔 우리나라에서 62척의 명태잡이어선, 23척의 은대구 잡는 통발어선이 나가 있다. 62척의 명태잡이 어선의 총t수는 11만7천t. 그중 약 7만t은 高麗遠洋 소속 44척에서 나온 것이다. 高麗遠洋은 3대양에 1백39척(총10만3천t)의 원양어선을 내보내고 있는, 단일회사로 세계최대의 水産會社다.
북양어선은 ① 海船式 상끌이선단 ② 公船式독항선 ③ 일반독항선으로 분류된다. 지난 4월28일 동부「베링」海로 출어한 유신호(2만6천8백t·工母船) 선단은 24척의 상끌이 소형子船과 운반선 3척을 거느리고 올해 10만t을 잡을 계획이다 냉동 工船式독항선엔 가공공장이 설치돼 「필레」「피시·밀」 「피시·오일」, 냉동어등 가공 제품을 선상에서 생산할 수 있다. 1천2백t~5천3백t 급의 어선들도 북양어선세력의 대종을 이룬다. 일반독항선은 냉동시설만 갖춘 것으로 1천t 급 미만의 9척이 이에 속한다.
우리 어선들은 대부분 선령 5년 안팎의 신조선들이다. 3백t급 독항선은 「오일·쇼크」이후 대서양으로 돌려졌다. 72년의 약 4배로 늘어난 우리나라 북양어선 세력은 질적인 면에서도 세계 최고수준이다. 요즘 4천5백t급 北洋전용工船 1척 건조엔 약 60억원이 먹힌다. 같은 t수의 화물선 건조비의 근 10배다. 상선에 없는 어선장비(魚探장비, 항해장비)와 가공시설(1일 2백t의 명태처리능력이 있는데다가 복원력이 훨씬 좋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의 북양어선 85척을 자산평가하편 8백억~1천억원 사이일 것이다.
손바닥 보듯 환한 해저지형(海底地形)
지난해부턴 4백~5백t급 통발어선들이 「베링」海 동쪽에서 수출용 은대구를 잡기 시작했다. 작년엔 7천9백72t을 어획, 6백64만「달러」를 벌어들였다.
북양어선의 조업해역은 대륙붕과 대륙붕 사면(斜面)에 국한된다. 「스턴·트롤」어법으로 수심 4백m 이내의 저서어종만 잡을 수 있다. 어업기술 발달의 극치로 평가되는 「스턴·트롤」은 2차대전 직후 英國에서 개발됐다. 일본에선 55년, 한국에선 67년 水開公이 강화호를 도입한 게 효시였다. 배의 옆구리로 그물을 올리는 「사이드·트롤」과는 달리, 그물을 끄는 방향으로 항해하면서 선미에서 그물을 던졌다가 끌어올리는 「스턴·트롤」은 강력한 「윈치」, 길이 즉시 가공처리하는 일관작업등 기계화된 어법으로 남획에 따른 자원고갈을 초래하기도 한다.
「캄차카」연안에선 지난해부터 잡히는 명태의 體長이 짧아지고 있다. 만선시키는데 걸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무진장한 것 같던 北洋명태자원도 고갈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캄차카」대륙붕엔 우리 선장들이 「발사장」「운동장」등의 별명으로 부르는 유명한 어장들이 집중돼 있다. 「발사장」은 길죽하고 오목하게 뻗은 바다밑의 골(谷)이다. 이 골의 바닥에 항상 명태대군(大群)이 득실하여 그물 끌 차례를 기다리는 여러나라 어선 수십척이 줄을 서는 장관이 전개된다. 「캄차카」연안의 해황, 해저지형 및 지질에 대해선 손바닥 보듯 환하다는 韓國의 北洋선장들이다. 北洋어선에선 대서양, 인도양의 참치잡이 어선에서와 같은 가혹행위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작업환경이 다른 덕택이다.
참치잡이 선원들은 2~3년간 가족과 절연된 속에서 한번 출어하면 90~1백일 걸리는 어로작업을 벌인다. 어로작업은 하루 18~20시간 계속된다. 하급선원들은 3~4시간 이상 잘 수 없다. 쇠갈고리 같은 낚시바늘을 주렁주렁 늘어뜨리는 「롱·라인」漁法은 노동력의 집중을 요구하며 육체적인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더구나 참치잡이 어선들은 2백~3백t의 낡은 배다 좁은 공간, 수면부족, 파도와 폭풍-이런 극한상황에선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선상폭력은 가학취미의 성격까지 띨 때가 있다. 지난 3년간 참치잡이 원양어선에서 얻어맞아 정신이상의 일으켜 부산대학병원에 입원한 선원들에 대한 연구논문이 나올 지경이다.
北洋의 경우엔 하루 6시간의 수면은 보장된다. 어선이 크고 40~50일만 귀향하여 가족 품에 안길 수 있다. 참치 선원들이 갖기 쉬운 「막가는 인생」이란 자포자기감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北洋선원의 저임금은 선원이 남아돌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수요와 공급의 시장법칙에 기인한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北洋어업자들이 이 바다에서 희생된 수십명의 선원들을 딛고 그동안 쌓아올린 부(富)의 일부를 임금과 복지향상에 돌리는 것은 사회적인 의무인 것이다.
갈림길에 선
북양어업(北洋漁業)
내년 3월 1일부터 발효되는 美國의 2백해리어업보존(海里漁業保存) 및 관리수역법(管理水域法)은 우리 北洋漁業의 장래를 결정지을 것이다 이 법에 따르면 이 수역내에서 고기 잡이를 하려는 외국어선은 美國정부로부터 어획량을 할당받고 입어료(入漁料)를 지불하여 어업허가증을 교부받아야 한다.
이 어획할당량은 『적정생산량의 범위 안에서 美國이 어획하고 남은 부분으로 한다』. 또 국가별 할당량을 허가해 주는데 고려할 사항으론
① 당해외국(當該外國)의 美國규제수역내 어업실적
②어업조사 및 자원보호에 대한 과학적인 공헌 및 협조성적
③ 美國정부의 과거 어업규제에 대한 위반의 정도등 3개항목.
① 당해외국(當該外國)의 美國규제수역내 어업실적
②어업조사 및 자원보호에 대한 과학적인 공헌 및 협조성적
③ 美國정부의 과거 어업규제에 대한 위반의 정도등 3개항목.
어업허가증은 1년마다 갱신되는데 외국어선은 그 허가증을 항상 조타실에 붙여놓아야 한다. 美國공무원은 언제든지 외국어선을 검색할 수 있고 위반어선에 대해선 벌금은 물론 체형까지 가할 수 있다. 入漁料징수는 차별 없이 적용되는 기준에 따른다. 이 요금엔 자원보존 및 관리, 자원조사와 행정, 감시등에 필요한 경비가 포함된다.
이상의 요지를 보면 한국은 무척 불리한 입장이다. 美國 규제수역내의 어획실적은 73년 이전 것으로 심사하는데 한국어선의 그것은 매우 적다.
74년 5월 유신호선단이 규제수역이 있는 동부「베링」海로 나가 조업하기 이전엔 거의 모든 어선들이 「캄차카」에 주력했던 것이다. 정부는 뒤늦게 올해부터 대형북양어선들을 동부「베링」해쪽으로 출어시키고 있다 첫 출어에서 10억원의 적자를 본 유신호선단도 규제수역 안에서 현재 출혈조업중이다. 美國과의 어획할당량 협상에서 우리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강화해 보려고 몸부림인 것이다.
「베링」海 어획실적이 적은 것은 순전히 수산당국과 업자들의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태도 탓이다. 71년께부터 학계와 언론계에선 소형어선을 가까운 「캄차카」연안어장에 보내는 대신, 대형어선들을 먼 동부「베링」海로 출어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것은 美國수역내의 어획실적을 쌓아두는 데서도 필요할 뿐 아니라, 소형어선들이 대형어선들과 같은 해역에서 경쟁하여 손해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日本은 61년께부터 어업허가를 내줄 때 「캄차카」어장에 작은 북양전환선(北洋轉換船), 「베링」海와 「알라스카」만엔 모선식(母船式) 저인망선단을 지정해 왔었다.
美國정부가 요구하는 「과학적인 공헌」에 있어서도 우리는 내세울 게 별로 없다. 학술목적의 조사항해로는 66년의 백경호(白鯨號), 73년1~5월의 수산진흥원(水産振興院) 조사선 오대산호(五臺山號)의 「베링」海 저서어종조사 및 「필레」처리 가공시험, 그해 7~8월의 五臺山號「오호츠크」海 高價 어종조사 74~76년 사이 五臺山號가 부산水大로 넘어간 이후의 대학생 실습항해 정도다. 「오호츠크」海 조사는 그 때가지 소련을 의식하여 우리 어선들이 들어가지 않고 있던 「오호츠크」海에서 처음으로 탐색조업하여 그 뒤의 「오호츠크」海 어로 작업을 가능케 한 개척항해였다.
이들 조사항해에서 나온 연구논문도 모두가 한국의 특수이익을 위한 美國규제수역내 자원보존과는 거리가 멀다. 보편적으로 인용될 수 있는 순수한 과학적인 연구성과는 北洋에서 나온 게 없다는 것이 수산학계의 여론이다. 북양어업에 관한 기초 통계조사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낙인 돼 있다.
수산청의 관리들이 일찍부터 직접 현장에 나가 어획어종별 통계를 정확히 「체크」하고 규제법 위반여부를 감독했다는 對美협상에서 좀더 유리한 자리에 설 있을 것이다. 어업자원에 대한 기초적이고 학술적인 자원 조사의 중요성을 우리 정부에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학계에 나오고 있다. 선진국에선 잡기만 하고 학술적인 공헌을 하지 않는 나라를 「약탈적 어업국가」라고 비난하고 있다.
美國어업규제 수역법은 상무장관이 외국어획할당량을 결정할 때 漁區別 理事會의 어업관리 계획을 근거로 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할당량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理事會는 주정부 해안경비대등 관계기관과 어민 대표 등 이해당사자들로 구성된다. 이런 理事會가 극히 보호주의적인 견해를 보이리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韓國과 관계되는 북태평양 理事會(「알라스카」, 「워싱턴」, 「오레곤」주)의 임원을 보면 水産學者, 어민대표 「트물」어선선주협회장 州정부의 어업국장, 해안경비대장 등으로 조직돼 있다.
최근 美國 수산청당국은 北洋과 美國서 해안의 규제수역 내 외국어선할당 예상량을 집계했는데 명태는 연 92만1천t이다. 현재 日本이 이 수역 안에서 잡고 있는 명태만도 연 1백12만t이며 한국업자들은 40만t의 「쿼터」는 받아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韓國, 日本 등에서 20여개국이 한정된 할당량을 두고 벌일 경쟁의 치열함을 예고해주는 듯하다.
소련도 2백海里경제수역을 선포하여 韓國이 미국으로부터 많은 할당량을 따내는 데 실패한다면 北洋양쪽의 대륙붕을 거의 잃고 중간의 深海어장으로 몰려야 될 판이다. 이 어장엔 어족도 풍부하지 못하고 깊은 수심으로 대량어획은 불가능하다. 결국 北洋 이외의 바다에서 새로운 「프론티어」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수산 및 해양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남빙양(南氷洋)의 「크릴」자원 개척에 진출해야한다』는 것이다.
南氷洋의 「크릴」漁業에 나서야
벌써 蘇聯, 일본, 미국, 「노르웨이」, 「뉴질랜드」, 호주, 「폴란드」, 西獨이 「크릴」어업의 시험조사에 착수했다. 2년 전부터 日·蘇는 상업적으로 「크릴」을 잡고 있다. 「크릴」은 고래의 먹이인 대형동물 「플랑크톤」이다. 길이 9㎝까지 자라며 단백질이 풍부하고 필수 「아미노」산을 전부 함유하고 있다. 「비타민」C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비타민」도 함유하고 있다. 소련에선 工船을 보내 배위에서 「크릴」의 단백질을 뽑아내 시판하고 있다.
日本에선 단백질을 가루로 만들어 음식물에 타서 먹고 있다. 큰 놈은 튀김으로 요리할 수도 있다. 근래 고래자원이 줄어들자 「크릴」은 엄청난 번식을 하고 있다. 세계어획량의 3배인 연2억t을 계속해서 잡을 수 있다는 계산도 나오고 있다. 부산水大실습선 오대산(五臺山)호(1천2백t)를 南氷洋에 보낼 계획을 이 대학에서 검토한 적이 있는데 복원력이 낮은 배라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北洋을 뛰는 3천∼5천t급 대형「트롤」어선을 産學협동체제 아래서 南氷洋에 파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개척어장엔 먼저 진출하여 학술적, 상업적인 실력을 남겨두는 것이 어업권확보를 겨냥하여 발언권을 강화하는데 절대 필요하다. 北洋에서의 희생과 쓰라린 교훈을 미래에서 살리려면 우리는 남극(南極)으로 나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