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향하여 열린 도시 부산 이야기

朝鮮이 철수했던 바다로 재진입한 한국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산과 바다
-朝鮮이 철수했던 바다로 재진입한 한국인들의 이야기

趙甲濟(조갑제닷컴/TV 대표)

세계로 열린 도시의 이야기

바다로, 세계로 열린 부산은 살기 좋다. 살아 봐서 알고 여러 나라, 특히 항구 도시들을 많이 돌아 보아서 안다. 사람들이 좋고, 자연이 좋고, 역사가 좋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는 시드니도, 나폴리도 아닌 부산이다. 바다, 강, 산이 거대한 항만과 이렇게 다이나믹하게 어우러진 곳은 달리 없다. 큰 부두, 해운대 백사장, 태종대 절벽, 낙동강의 낙조(落照), 시가지를 굽어보는 금정산·장산·구덕산, 색깔이 다른 동해와 남해의 만남 등.
부산은 해양수도이다. 1876년 개항 이후 본격화된 약 150년의 해양화 과정에서 부산은 그 중심에 있었다. 매축(埋築) 등으로 거주면적과 항만이 커지고 관부(關釜)연락선으로 일본과, 경부선을 통해 대륙으로 연결됨으로써 한반도는 15세기 조선왕조가 바다에서 철수한 이후 500년 만에 처음으로 해양 문화권과 대륙 문화권을 연결하는 땅값을 비싸게 치르게 되었다. 그 땅값은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치러지기도 하고 경제 및 민주발전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38도선 분단 이후 한국이 사실상 섬으로 변하여 무역과 해외진출이 생존의 조건이 됨으로써 무역 전초 기지 부산의 역할은 더욱 결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세계의 主항로와 연결된 항도(港都)에선 해양문화의 중추세력인 자유분방(自由奔放)한 시민층이 성장했다. 이들은 외래문물을 맨 먼저 받아들였고 공산침략에 맞서 부산 교두보를 지켜냈으며 임시수도 때는 타지(他地)에서 몰려드는 동포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국제시장은 이들을 먹여살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 줄 아는 습관을 익힌 부산사람들은 체험적으로 자유의 가치나 개인의 존엄성에 대하여 민감하다. 가장 부산적인 사나이, 가수 나훈아는 북한에 가지 않는 이유를, "나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곳에선 노래 안 부릅니다"라고 했는데 이게 부산의 기질이고 정의감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린 부산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붕괴를 부른 4·19의 선도세력은 마산 부산 사람들이었다. 3월15일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일어난 마산시민들을 향하여 경찰이 발포, 사상자가 생기고 시위가 격화되었는데 이를 부산이 받아 확산시키고(주력은 고등학생들) 불씨가 서울로 튀어 대학생 시위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부산은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에 의한 수출입국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었다. 한일국교 정상화와 월남파병, 그리고 무역 붐으로 부산은 생동했다. 해양대학과 부산수산대학이 배출한 우수한 선장들이 외항선과 원양어선을 몰면서 5대양을 누비고, 목재 및 신발산업으로 시작된 수출산업은 울산 창원 마산의 중화학 공업으로 바톤 터치되어 지금은 부·울·경으로 불리는 이 지역이 수도권 못지 않은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중화학 공업의 성공은 아파트와 마이 카로 상징되는 중산층을 키웠고 배가 불러지니 자유를 갈망하게 되었다. 1975년 나는 부산역 앞 광장에서 조총련 모국 방문단의 상봉 장면을 취재하고 있었다. 그 전해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에 대하여 박정희 정부는 조총련 동포들의 고향 방문을 허용,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의 고차원적 대응을 했다. 이게 북한노동당의 일본지부인 조총련을 거의 소멸로 몰고가는 시작이 되었는데 이런 분위기를 타고 리바이블되어 크게 히트한 노래가 조용필이 새로 부른 '돌아와요 부상항에'였다. 이 노래에선 1970년대 부산 냄새가 난다.
1979년 10월16일 밤 남포동, 나는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로 시위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예감했다. 부산 출신 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 의원 제명으로 촉발된 부마사태는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그날 오전 부산대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하다가 해산당하자 오후에 남포동 중앙동으로 옮겨서 시위를 계속했다. 부가가치세 실시에 불만이 많던 상인들이 이들을 응원했다(김재규가 民亂이라고 본 이유이다). 밤이 되자 시위대는 과격해졌고 경찰 작전차를 뒤집고 새 나온 기름에 불을 붙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철통 같았던 유신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였다.
2년차 기자로서 1972년 10월17일, 청천벽력 같은 비상계엄령 선포와 유신체제 출범을 맛보았던 나는 그 순간 "내일은 계엄령이다"고 동료기자에게 중얼거렸다. 부산지역에 비상계염령이 선포된 다음 날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고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그리고 10월26일의 궁정동 총성. 박정희는 경상도에서 일어난 시위와 경상도 사람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 곁에 있었던 여인 신재순은 "체념한 듯 해탈한 듯하였습니다"란 명언(名言)을 나에게 남겼는데 "난 괜찮아" 세대의 퇴장이기도 했다.

2·12 총선 異變과 '욱' 하는 성격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30년을 결정했다. 18년의 박정희 통치를 마감하고 12년 이어질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문을 열었다. 군인 출신 세 대통령 시절에 이승만 통치 12년을 보태면 42년, 대한민국 나이의 딱 절반을 차지한다. 이 네 대통령의 영도 하에 대한민국은 해양화의 길을 질주했는데 모든 해양문화의 본질은 개방과 자유를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富國强兵)과 법치 및 민주화이다. 그런 역사의 대세(大勢)를 타고 발전한 도시가 부산이고 그런 시대정신을 집단적으로 표출한 이들이 부산시민이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 퇴장에 큰 역할을 한 부산시민들은 경남 합천 출신 전두환 정부에 대한 저항도 멈추지 않았다. 거제도 출신 부산사람 김영삼이 지휘한 1985년 2·12 총선은 전두환 정권의 야권 분열책을 뒤엎고 대이변(大異變)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 2년 뒤의 6·29 선언으로 이어지는 분수령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2·12 총선 드라마의 주인공들도 부산사람들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30일에 그동안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야권성향 정치인들을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민당과 온건 민한당으로 분열되어 여당인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신민당은 고분고분한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선거결과는 이런 예측을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기간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이었다. 전국에서 민정당 후보 다섯 사람이 낙선했는데(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을 때) 세 사람을 낙선시킨 곳이 부산이었다. 내가 만난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이렇게 말했다.
“난생 처음 유세장에 나갔습니다. 야당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습니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습니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으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습니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 하고 치받치는 것이었습니다.”

6·29 선언과 부산 대시위

부산사람들의 특징인 '욱!' 하는 성깔이 1987년 6월18일 다시 한 번 역사를 뒤흔든다.
그날 밤, 10만 명의 시위대가 밤중에 부산시청을 포위, 함락 직전까기 갔다. 다음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준비명령을 내리고 부대는 출동태세에 들어간다. 당시 월간조선 기자였던 나는 밤에 계엄령이 선포될 것인데 어디로 피해야 하느냐 고민하다가
자정 무렵 계엄령 계획이 취소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했다. 이 무렵 전두환 노태우(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막후에서 6·29 선언을 협의하고 있었다. 계염령을 선포하면 다음해 열릴 서울 올림픽과 평화적 정권교체의 약속이 날아간다는 생각이 두 사람을 제약했다. 6·29 선언은 국민들이 요구하던 모든 민주화 조치를 다 받아들인 최대의 정치도박이었다. 이 도박은 양김(兩金)이 절대로 합칠 수 없다는 계산에 근거했다. 대통령이 될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김영삼 김대중은 각자 출마했고, 36.6%의 득표율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6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광주사태로 시작되어 민주화 운동과 서울올림픽을 거쳐 전두환 백담사行으로 이어진 1980년대 한국은 연평균 경제성장률 10.1%로 세계 1위를 기록, 일본을 따라잡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 경제호황이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사회가 감당하게 만든 바탕이고 울타리였다. 권위주의 정권이 민주화의 진통을 앓던 시대, 최루탄과 함성이 거리를 울리던 80년대의 격동이 밝게 추억되는 것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한 고비를 넘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는 대의(大義)라는 게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성취를 들라면 나는 "10년 만에 고문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사회부 기자 출신으로서의 자부심을 말하고 싶다. 고문과 조작에 관하여 가장 많은 기사와 책을 쓴 기자로 꼽히는 나도 1986년을 마지막으로 '기관'에 연행되는 일이 없어졌다.
부마사태로부터 29년이 흘러 2008년 4월 총선 때 부산 유권자들은 친박(親朴)연대와 무소속 후보를 일곱 명이나 당선시켜 2·12 총선에 이어 또 한 번의 이변을 연출했다(한나라당 후보는 11명 당선, 민주당 후보도 한 명이 당선되었다). 부마사태 때는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으나 이명박 세력이 박정희의 딸을 구박한다고 생각한 부산시민들이 격분한 것이다. 부산식 정의감의 발로라고 할까? 내가 부산사람들이 투표를 가장 잘한다고 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산사람들은 '욱' 하면서도 균형감각이 있다. 좀처럼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부산사람들의 특질은 거의가 바다로부터 온 것이다.

바다에서 결정된 신라의 삼국통일

우리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제1법칙은 "바다를 가까이하면 흥하고 멀리하면 망한다"이다. 그리스, 로마, 바이킹(노르만), 베니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일본, 미국, 명(明) 이전의 중국은 열린 바다에서 놀았고 번영했다.
바다를 왕래한다는 것은 문명의 교류, 과학과 군사 기술의 발전, 무역을 통한 돈벌이, 개방적이고 자유로운(그러나 규칙을 지키는)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고구려는 너무 야성(野性)이 강해서, 조선은 너무 지성(知性)이 강해서 망한 반면 신라는 야성과 지성을 통합한 나라여서 삼국통일을 이뤘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삼국통일을 마무리한 왕의 시호(諡號)가 문무왕(文武王)이었다. 내가 말하는 지성 있는 야성(野性)은 상무(尙武)정신, 자주정신, 과학정신, 법치주의, 기업가 정신 같은 것인데 거의가 바다로부터 오는 것이다. 신라 지배층은 말 달리던 북방기마민족(아마도 흉노계통) 출신인데 신라에 정착하면서 배도 잘 모는 사람이 되었다. 말 잘 타고 배도 잘 모는 민족은 속도를 장악함으로 바이킹과 노르만처럼 세계사의 최강이 된다.
신라 진흥왕은 서기 553년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하류를 빼앗아 오늘날 서울의 모태인 신주(新州)를 설치,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통하는 관문을 장악했다. 바다의 길을 연 것이다. 신라는 현해탄을 건너 일본과 통하고 서해를 건너 중국과 통하는 지정학적 우위(優位)에 서게 되었다. 진흥왕의 배신에 격분한 백제 성왕은 가야, 왜군의 도움을 받아 554년에 지금의 옥천에서 신라와 결전하는데 왕은 매복에 걸려 죽고 백제 연합군은 전멸했다. 이게 120년 뒤의 삼국통일을 예약한 셈이다.
신라는 583년엔 병부(兵部) 아래 선부(船府)를 설치, 해군을 길렀다. 신라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여러 차례 해전을 치르는데 663년 왜가 보낸 대함대(400척, 3만 병력)를 당군(唐軍)과 함께 백촌강 하구에서 무찌른다. 이 전투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나름대로 고대국가 건설의 길을 걷도록 만들었다. 676년 신라 해군은 서해 기벌포 해전에서 당의 해군에 이겨 7년간 계속된 나당(羅唐)전쟁을 승리로 마감했다(이 해 당은 평양에 두었던 안동도호부를 만주지역으로 물리고 한반도를 한민족의 보금자리로 내어준다). 문무왕은 선부를 병부로부터 독립시키는데 신라 말기까지 존속한다. 그 뒤 고려와 조선은 바다와 배를 관장하는 중앙부처를 만들지 않았다.

바다의 신라인

일류(一流)국가들의 공통점은 과거에 일류였던 경험적 DNA가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자유통일을 이룩하여 일류국가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근거는 통일신라가 일류국가였다는 이력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반도의 분쟁 요인을 제거하여 그 뒤 3세기에 걸쳐 당 신라 일본이 공존공영하는 고대사의 황금기를 열었다. 당시 경주는 콘스탄티노풀, 바그다드, 장안(長安), 교토와 함께 세계 5대 도시였다. 황금기의 후반에 속하는 9세기 신라사람들의 해양력과 정신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책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이다. 일본 천태종을 대성시킨 승려 엔닌(圓仁)이 쓴 일기식 기행문인데, 일본인들에 의하여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힌다. 장보고의 활약상과 당에 진출한 신라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감동을 받은 문장은 이것이다.
<장(張)대사는 지난 해 겨울부터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금년 2월에 이르러 일을 마쳤다. 오로지 우리를 실어 떠나보내어 귀국시키고자 함에서였다.>
엔닌 일행이 9년간의 당 나라 불교 순례여행을 끝내고 신라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되는 과정에서 나온 문장이다. 엔닌이 그 동안 수집했던 전적(典籍)들을 신라인에게 맡겨두었다가 불교탄압의 와중에서도 고스란히 돌려받는 이야기, 장보고의 부하 장 대사가 엔닌을 무사히 귀국시키기 위하여 배를 짓는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당시 일본은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하여 항해중 신라 영해로 표류하여 들어갈까 봐 경계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은 장보고(張保皐)가 부탁한 적국의 승려를 정성껏 대하여 신라 배로 무사히 돌아가게 한다.
이 여행기를 영문으로 번역 출판하면서 '엔닌의 당대(唐代) 중국 여행'이란 책을 냈던 주일 미국대사 출신 동양학자 라이샤워는 신라를 이렇게 평했다.
<당시의 한국(신라)은 지리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이미 오늘과 같은 나라였다. 같은 민족, 언어, 국경을 가지고 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한국에 필적할 만한 소수의 국가들 속에 일본이 들어 있다.>


바다에서 철수한 조선

고려도 해양국가적 면모를 이어갔다. 몽골의 침략에 고려가 수십 년간 저항한 것은 세계적 기록인데 그 힘은 해군 해운 조선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삼별초(三別抄)의 영웅적 저항과 두 차례 일본원정은 그 저력을 보여준다. 1274년, 여몽(麗蒙) 연합군의 제1차 일본 원정 때 동원된 병력은 원(元)이 2만5000명, 고려가 1만5000명이었다. 고려는 900척의 배를 지었다. 1281년, 제2차 원정 때는 원(元)이 10만의 강남군(江南軍)과 약 4만의 동로군(東路軍)을 동원했는데 여기에 고려군 2만7000명(뱃사공 포함)이 포함되었다. 2차 원정 때는 수천 척의 배가 투입되었다. 상당수는 동로군 발진기지 합포(지금의 마산)에서 만들었다.
태풍 등으로 실패한 이 원정은 규모 면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전과 맞먹는 세계역사상 최대였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이끄는 잉글랜드 원정대의 규모는 약 7000명이었다. 헤이스팅스에서 잉글랜드 군을 전멸시켜 세계 역사를 바꾼 상륙작전이었지만 규모는 10분의 1도 안 된다. 이는 고려의 강력한 해양력을 엿보게 한다. 신라 고려는 바다를 무대로 삼아 싸우고 자주성을 지켜냈다. 그런데 조선이 바다에서 철수하는 비극이 벌어진다.
조선의 바다 철수는 명(明)의 해금(海禁)정책 및 주자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자폐증과 연관된다. 15세기 초, 명 나라 영락제(永樂帝)의 후원을 받은 환관 출신 정화(鄭和)의 7회에 걸친 대항해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탐험이자 정복사업이었다. 매회 약 2만7000명의 병력이 수백 척의 거선(巨船)을 몰고 동남아, 인도양,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돌고 귀환했다. 정화는 7차 항해를 마치고 귀국 중 인도 캘커타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정화의 대원정은 역사를 만들었지만 역사를 바꾸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교에 젖은 관리들이 권력투쟁에서 환관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잡자 항해기록을 불태우고(인류 역사상 가장 아까운 문서 파괴이다), 환관이 무역업자들의 후견인으로 많은 돈을 만지게 된 데 대한 보복으로서 무역금지령까지 내린다. 한때 3500척의 함정을 보유했던 세계 최강의 중국 해군도 거의 해산되고, 1500년에는 민간에서 배를 건조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해 위반하면 사형에 처했으며, 1525년에는 모든 원양 선박을 없애 버렸다. 미국의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흥망(興亡)'이란 저서에서 이것이 동양의 쇠락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짚었다.
15세기, 명나라가 바다에서 철수함과 동시에 조선도 내륙화의 길을 간다. 명과 조선 사이의 서해는 외항선이 다니지 않는 바다가 되어 400년이 흘러갔다. 명이 자유통항을 금지하니 사신들도 육로로 다녀야 했다. 명과 조선의 서해 폐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었다. 조선왕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섬들을 대상으로 강제로 인구를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을 취한다. 이영훈(李榮薰) 교수는 '한국경제사'에서 <조선왕조에 이르러 바다는 넓은 개방의 통로가 아니라 높은 쇄국의 장벽으로 바뀌었다>고 썼다.

한민족을 바다로 再進入시킨 李承晩

바다에서 철수했던 한국인을 다시 바다로 재진입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이승만(李承晩)이다. 서기 648년, 서해를 건너 장안으로 들어가 당 태종과 담판, 나당(羅唐)동맹을 만든 국제인 김춘추(金春秋), 그의 맥을 잇는 이승만은 1905년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갔고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란 수준 높은 해양법 관련 박사 논문을 썼다.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를 처음으로 소개한 이 논문은 해양문화와 해양세력에 대한 이승만의 깊은 사고(思考)의 시작이었고, 1951년의 평화선 선포(독도 영토화), 1953년의 한미동맹으로 결실되었다.
신라가 동북아의 바다를 누빈 것처럼 한국인은 태평양을 포함한 5대양 6대주로 뻗어나가게 된다. 박정희의 수출입국과 조선 해운 육성, 전두환의 경제 개방정책, 노태우의 북방정책은 이승만의 바다 재진입 전략의 확대판이었다. 이제 한국은 신라처럼 해양강국이 되었고 부산은 한국 해양화의 선도자가 되었다.
한국전은 부산항을 누가 먼저 차지하느냐의 경주였다. 1950년 6월26일 새벽 부산 근해에서 백두산함이 북한군 600명을 태운 적선(敵船)을 발견, 격침시키지 않았더라면 부산 교두보가 구축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부산을 향하여 밀려내려오는 북한군을 최초의 한미 연합작전으로 다부동에서 저지함으로써 부산 교두보는 무너지지 않았고,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길이 열렸다. 한국전에서 경상도 출신이 다수인 약 2500명의 소년병이 전사했는데 대부분이 이 교두보를 지키기 위하여 투입된 아이들이었다.

지도를 거꾸로 보면 부산의 앞은 동남아?

부산 수산대학 출신으로 원양어선 선장을 거쳐 동원그룹을 만든 김재철(金在哲) 전 무역협회 회장은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고 말하는 분이다. 한반도 지도를 180도 돌려 놓으면 부산이 국토의 맨 앞에서 바다로 뛰어들 듯 웅크리고 있다. 부산 앞에 열린 태평양 인도양, 그곳에 한국 문명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최근, 1980~90년대 서울특파원을 지낸 일본 기자를 만났다. 그는 서울 특파원을 지낸 뒤엔 방콕 특파원으로도 근무했는데 "한국 언론이 동남아를 너무 경시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지역에 특파원을 많이 두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한국 기자들은 선진국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은 아픈 지적이었다. 머지 않아 GDP 규모에서 인도네시아가 한국을 능가할 것이고 중국의 침체와는 달리 인도 베트남 태국이 올라오는데 언론이 무관심하니 한국인도 이 지역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인도는 이미 중국을 젖히고 세계 최대 인구대국이 되었고,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은 인구가 각 1억을 넘는다. 그는 인도의 모디 수상이 21세기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평했다. 21세기 부산이 나아갈 방향을 시사한 충고로 생각되어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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