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3월17일 저녁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로 NCC 회장 金知吉(김지길) 목사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함께 했다. 여기서도 개헌 문제가 화제가 되었다.
金知吉 회장: 각하께서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위해 애쓰시는 것 잘 압니다. 개헌은 89년에 가서 논의하자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바라는 것은 대통령 임기 중에 여건을 조성해서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게 순서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89년에 가서 논의한다는 것은 석연치 않습니다. 임기 중에 절차를 밟아서 후임자에게 넘기려면 각하께서 임기 전에 개헌하는 것이 순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통령: 내가 李敏雨 총재를 불러서 정당 차원의 개헌 운동은 인정한다, 절대 혼란을 안 된다고 했어요. 개헌을 하면 86 아시안 게임이고 뭐고 안 됩니다. 조용히 하면 못 할 것도 없지요. 민정당은 기술이 없어 폭력도 못 일으켜요. 국민 소득이 60달러일 때 정치한 사람들이 지금도 같은 방법을 쓰려고 하는 게 문제예요. 나는 88년에 그만두기 때문에 89년에 헌법 바꾼다는 소리는 내가 할 수 없어요. 80년 상황을 보세요. 나라가 망한다고 했었지 않아요. 그게 수습이 되어서 안정이 되니 모두가 잊어버립니다.
직선이든 간선이든 내가 국민에 약속한 것은 평화적 정부 이양을 한다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하고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의 大事를 끝내고 그때 개헌하자고 하면 해야지요. 나는 대통령으로서 헌법 수호를 선서한 사람입니다. 7년 가서 또 헌법을 바꾸면 나라가 안 돼요. 李敏雨 총재한테 내가 그랬습니다. 직선제 개헌을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있느냐고. 한두 달 연구해서 헌법을 고치면 나라 망한다고. 국가 행사가 없으면 바꾸자, 헌법에 손대게 되면 바꿀 게 많다, 대통령 선출 방식뿐만 아니라 인구도 늘고 했으니 전 조항을 손대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가 대사를 앞두고 내가 재임하는 동안에 개헌을 하면 내가 나쁜 사람 되는 것 아닙니까. 꼭 하려면 내가 사임한 다음에 해야지. 어떤 사람은 직선제를 하면 민정당이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냐, 임기 중에 개헌을 해놓고 나가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조리에 안 맞는 얘기입니다. 국회에서 밤새워 민정당, 신민당이 헌법을 가지고 토론했는데 이론적으로 야당이 손들었어요. 그래서 李敏雨 총재가 선수를 바꾸자고 했어요.
우리 나라의 큰 문제입니다만 정치하는데 무엇을 하면 유명해지느냐, 법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검찰에서 조사받으면 그 사람 이름이 알려져요. 돈 안 들고 선거 운동 되는 거지요. 이런 의식을 가지고는 민주주의가 안 됩니다. 내가 88년에 가서 한번 더 해야겠다, 눈물 줄줄 흘리면서 한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하면 국민들이 정이 많아서 동정도 하고 또 정부가 힘이 있으니 불법이라도 밀어 부치면 알 수 없습니다. 저 사람들이 내놔라 하더니 내가 하는 걸 보니 틀림없이 나가려고 하거든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더니. 내가 처음부터 이 시점까지 그때 가봐야 알겠다고 만 했다면 지금쯤에는 그냥 나가기만 해달라고 했을 겁니다. 나는 너무 순진하니까 상대방을 너무 믿었어요. 그러나 나는 양심대로만 할 겁니다. 정치인은 혼란이 생겨야 수지가 맞지만 혼란이 생겨 손해 보는 것은 국가와 국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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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 대통령은 1986년 4월5~21일 사이에 영국, 서독, 프랑스, 벨기에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직후 全 대통령은 내각제로 개헌하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귀국 직후인 4월22일 그는 통치사료담당 金聲翊 비서관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도 구라파처럼 정부 형태를 내각 책임제로 바꾸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이번에 구라파를 돌아보니 최선진국들인 이들 나라가 내각책임제를 가지고 잘 해나가고 있어. 우리도 이제는 그것을 수용할 만한 수준이나 단계가 되었다고 봐. 그래야 국민의견이 의회로 수렴되고 정치적 훈련이 되니까 민주의식이 뿌리내릴 수 있어. 내가 이것을 오는 하계 기자회견을 통해서 폭탄선언을 하려고 한다.”
이날 전 대통령은 4월28일 오전 청와대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 “국민이 신민당 편도 아니고 정부 민정당 편도 아니다. 정부 여당이 안정으로 대세를 잡아가면 떠드는 사람들은 떠들다가 지쳐버린다”고 말했다.
“몽둥이로 패서 지하에 들어가도록 하면 어느 시기에 가서는 폭발하게 돼요. 두레박에 구멍이 없이 물이 하나도 안 새면 한 두레박이고, 구멍이 나서 새면 두세 두레박이지 한 두레박으로만 물을 떠 가려고 하면 줄도 함께 떨어져요.”
내각제 개헌을 생각하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4월30일 청와대에서 盧泰愚 민정당 대표, 李敏雨 신민당 총재, 李萬燮 국민당 총재와 회담한 자리에서 중대 발언을 했다.
“재임 기간중에 개헌해 달라고 하는데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서 건의하면 내 재임기간 중에 개헌하는 데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개헌안 내용 등을 합의하여 건의하면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89년까지 현행 헌법을 지켜 평화적 정부 이양과 올림픽 등 대사를 치른 후 국민의 뜻에 따라 개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5공화국 헌법엔 개헌발의권이 국회에만 있었다.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는 改憲 발의권이 없으니 국회에서 여야가 개헌안에 합의하면 ‘임기내 개헌’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셈이다. 이 발언은 여론의 호응을 얻었으나 야당과 在野를 고민에 빠뜨렸다. 대통령이 개헌용의를 밝힌 마당에 場外 강경 투쟁을 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場外의 김대중씨와 場內로 들어온 김영삼씨 사이에도 이견이 있었다. 김대중씨는 대통령 직선제를 고수했으나 김영삼씨는 “여야는 혼자서 승리할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여 타협의 여지를 남겼다.
노태우 대표가 이끌던 민정당도 혼란에 빠졌다. 그때까지 간선 대통령제를 옹호해왔던 기존 노선을 수정하여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대표에게 민정당의 개헌안을 내각책임제로 하도록 지침을 주었다. 간선제를 옹호하면서 직선제를 비판하던 민정당이 직선제보다도 더 성숙한 민주주의 제도인 내각제를 주장해야 했다. 한국인에게 내각제는 張勉 정부의 실패로 인해 혼란과 부패를 연상시키는 단어가 되어 있었다. 내각제 이야기만 나오면 반드시 二元집정제 음모론이 붙어 다녔다.
그럼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2.12 총선 이후 처음으로 정부 여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았다고 평가했다. 3당 대표 회담 다음날인 5월1일 전 대통령은 鄭九鎬 공보수석 비서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당도 낚시걸이에 걸린 것이다. 국회가 합의하면 개헌에 반대하지 않는다, 극히 당연한 얘기지. 뭐든지 국회에서 합의하면 반대할 수 없지 않나. 얼른 들으면 굉장히 큰 변화가 있는 것 같은 얘기이지만, 내가 私心이 없고 장기집권을 안하겠다고 했으니 국회에서 당신네들끼리 해보라는 거야. 야당은 89년에 개헌하면 내가 또 출마할 수 있지 않느냐고 의심하고 있어요. 그런 오해도 풀고 야당이 場外에서 떠드는 명분도 없애는 방안이야.”
5월2일에도 전두환 대통령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등 정부의 실력자들과 만찬을 함께 하면서 같은 취지의 설명을 했다. 그는 ‘임기내 개헌 추진’ 발언으로 여야 대치 政局을 協商政局(협상정국)으로 전환시킨 점을 자랑했다.
다음 날인 5월3일 인천 발생했다. 인천 시민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던 신민당의 개헌추진 인천 경기집주결성대회는 재야, 학생들이 반미폭력 시위를 벌이고 경찰이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열리지 못했다. 언론과 여론도 폭력시위에 비판적이었다.
5월7일 저녁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 당직자 169명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만찬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고통과 진통을 겪으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사태 때 폭력배, 좌경세력이 동원되었다”면서 시민과 언론도 야당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서브권만 우리 쪽으로 가져온 상황이예요. 우리가 아직 한 포인트도 따지는 못했어요. 우리가 지금 힘으로 하면 다시 서브권을 넘겨주어야 돼요. 비상조치를 발동해서 아시안 게임 동안만이라도 조용하게 만들까 생각했지만 민정당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런 건 최후에 가서 쓰고 당이 정치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됩니다.”
1986년 6월24일 국회 본회의에서 개헌특위구성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국회와 정치판 안에서 직선제와 내각제 공방이 이뤄지게 되었다. 민정당은 7월18일부터 내각제 개헌안 작성 작업을 시작했다. 8월16일 오전 10시에서 12시15분 사이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내각제 개헌안 보고가 있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안기부장, 안현태 경호실장, 허문도 정무수석, 채문식, 이치호 의원 등이 참석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헌법에서 대기업 규제 같은 경제 조항을 잘못 넣으면 큰일 나는 수가 있다”고 주의를 주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확정된 내각제 개헌안은 내각과 수상의 권력이 직선제 대통령만큼 강력하게 된 안정적 내각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5년으로 하고, 수상을 선출한 이후 2년 이내엔 불신임을 할 수 없게 했으며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후임 수상을 먼저 선출하는 방식으로 불신임을 하도록 하여 공백이 없도록 했다. 군통수권도 내각이 갖도록 했고, 계엄령 선포권과 비상조치권도 내각회의에 귀속시켰다. 대통령은 實權이 없는 상징적 존재로 규정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보고를 다 받은 뒤 아주 예리한 예측을 했다. “야당이 우리의 내각제와 자신들의 직선제안을 놓고 국민투표를 하자고 나올 수가 있다”는 경고였다.
“국회에서 싸울 게 아니라 국민한테 직접 물어보자고 야당에서 들고 나오면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면 대단히 위험해집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프니까 단순하게 대통령 책임제가 좋다고 할 수가 있어요. 국민한테 납득이 가는 이론을 개발해야 돼요.”
김영삼, 김대중씨는 전 대통령의 경고대로 연말부터 이른바 ‘선택적 국민투표’를 들고 나온다. 전두환 대통령은 보고회의 마무리 발언을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내각제를 하고싶지만 정 합의가 안되면 현행 헌법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1986년 8월26일 10개 부처 개각이 있었다. 盧泰愚 대표를 견제했던 허문도 정무수석이 통일부 장관으로 나가고 문공부 金潤煥 차관이 정무수석으로 들어왔다. 金
수석은 盧 대표와 경북고 동기로서 각별한 사이였다. 후계 구도가 盧 대표쪽으로 기울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당시 민정당은 직선제를 갈망하는 민심에 포위된 듯했다. 언론도 민정당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정부의 영향권에 있는 방송만이 외롭게 정권 편을 들고 있었다. 활동적인 학생, 지식인, 종교인들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즈음 민정당은 활기가 있었다. 노태우 대표가 유력한 후계자로 부각되면서 민정당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정부를 견인하기 시작했다. '잘 하면 직선제를 해도 이길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장세동 안기부장과 노신영 국무총리도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 협조적이었다. 전두환 대통령도 '정치는 당이 하고 나는 통치를 한다'면서 노태우 대표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여당이 대통령으로부터 독자적인 권한을 위임받아 정치를 주도하고 행정부를 끌고 간 것은 노태우의 민정당이 처음이었고, 그 뒤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1987년 12월 大選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는 민정당의 투지와 自生力이 뒷받침되었다.
전두환의 내각제 개헌 발상 秘話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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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2-04, 00: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