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하반기는 대체로 전두환 정부와 민정당이 國政의 주도권을 잡은 시기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개헌特委 구성으로 수용하여 국회내로 수렴한 덕분이었다. 다만 재야세력이 7월부터 ‘부천서 문귀동 형사에 의한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을 부각시키면서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1987년 1월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연결되어 6월사태의 대폭발에 인화물질이 된다.
1986년 9월의 아시안 게임을 앞둔 9월14일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바깥 철제 쓰레기통에서 폭탄이 터져 1기족 4명을 포함한 5명이 즉사하고 30여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범행 숫법이 전형적인 북한 소행이었다. 9월20일 중국 팀을 포함한 27개국 4800여 명이 참석한 아시안 게임이 개막되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예감케 하는 멋진 경기운영이 펼쳐졌다.
10월14일 신민당의 兪成煥 의원이 對정부 질의를 하면서 “반공보다 통일이 國是가 되어야 한다. 통일이나 민족이란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법무부는 이 발언이 국가보안법의 제7조1항(반국가단체 찬양고무) 위반이라면서 대통령 명의로 체포동의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민정당은 경호권을 발동하도록 하여 이 동의서를 통과시켜 兪 의원이 구속되도록 했다.
10월28일엔 건국대 사태가 터졌다. 26개 대학생 2000여명이 건국대학교에서 愛學鬪 발족식을 갖고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밀리자 대학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31일 경찰은 전경 8000여명을 투입하여 농성학생 1219명을 연행, 대부분의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자신감을 갖게 된 전두환 대통령은 비상조치설을 흘리기 시작했다. 9월26일 오후 6시, 전두환 대통령은 장세동 안기부장, 박희도 육군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 안현태 경호실장,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를 청와대 별관으로 불렀다. 全 대통령은 “좌경 학생들이 도시 게릴라화되고 있다. 사태가 전국적으로 악화되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태를 정리해야 한다. 비상조치도 검토하라. 계엄령과 비상조치는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헌법과 국회를 살려두고 할 것인지의 여부를 연구하라. 불순한 국회의원을 검거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할 수 있도록 서울, 수원 등 지역별로 군법회의 설치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 “유사시 9사단, 26사단, 33사단을 뽑는 것은 유엔사령부와 협조하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지시도 했다. 물론 가상계획이었지만 全 대통령은 이런 구상이 박철언 특보를 통해서 민정당 노태우 대표에게 전달되고 야당과 재야쪽에도 알려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10월4일 전 대통령은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청와대내 벙커에다가 계엄상황실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10월10일엔 장세동 안기부장이 박철언 특보를 불러, 대통령의 지시라면서 비상조치 일정계획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兪成煥 의원이 구속된 직후인 10월18일 청운동 안가에선 공안관계장관 회의가 열렸다. 국방장관, 내무장관, 외무장관 등이 참석했다. 장세동 부장은 “이번에 조치를 취하면 시대를 정리하는 정도의 초강경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라면서 “현재는 조치를 취할 상황은 아닙니다. 비상조치는 최후의 단계이고 안할수록 좋습니다”라고 했다. 10월22일 전두환 대통령은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비상조치를 내린 직후 김대중이에게는 '군에서 죽이기로 했으니 정계에서 은퇴하지 않으면 수감하겠다‘고 경고하도록 보안사령관에게 지시했다”고 말했다(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상권‘). 10월30일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가 장세동 안기부장을 통해서 박철언 특보팀에 내려왔다.
“김영삼, 김종필은 갑근세도 안내고 있는데 탈세혐의로 입건 가능한지 검토하라. 김대중, 김영삼은 보안사에서 연행하고 수사는 안기부에서 하라”
11월2일 전두환 대통령은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결행 날짜를 하달했다. 11월8일 토요일 저녁 11시에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자정을 기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을 선포하면서 비상조치를 발표한다. 11월16일에는 민주정치발전국민회의를 발족시키고 1987년 1월에 국민투표를 통해서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2월엔 비상계엄을 해제하되 비상조치는 계속한다. 김대중은 정계에서 은퇴시킨 후 재수감과 외국행 중 택일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1월4일 미국의 중간선거 결과는 레이건 대통령의 공화당이 상하원의 과반수 위치를 모두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6년 11월5일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전두환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공식으로 선언했다. 흉흉한 소문에 접하고 있었던 김대중씨는 며칠간 고심 끝에 이 발표를 내어놓았다. 이날 전두환 대통령은 계엄령과 비상조치를 일단 미루는 결정을 했다. 그는 장세동 안기부장에게 “다음 주까지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하고 11월중에 표결을 시도해보라. 12월 2일 예산안이 통과된 이후 비상조치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야당과 여당 전체를 상대로 고단수 심리전을 한 셈이다.
1986년 11월 29일 저녁 6시부터 8시 20분까지 全斗煥 대통령은 청와대로 盧泰愚 대표위원, 李載灐 국회 의장 등 민정당 중앙 집행위원 전원과 상임위원장들을 초청, 저녁을 대접했다. 참석자는 權翊鉉 상임고문, 蔡汶植 상임고문, 李春九 총장, 李漢東 총무, 張聖萬 정책위 의장, 林芳鉉 중앙위 의장, 李相翊 전 중앙위 의장 위원, 權正達 내무분과 위원장, 鄭順德 전 사무총장 위원, 金正福 전 보사 장관 위원 등이었다.
대통령: 오늘 신민당 행사는 잘 끝났나요?
盧 대표: 오후 4시 李敏雨 총재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표현은 상투적이었지만 정권 타도 투쟁도 불사한다, 헌특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국회는 버리지 않겠다, 내일 오전 8시까지 농성한다, 하는 요지입니다.
대통령: 어디서 한다는 거요? 기왕이면 추운 길거리에서 하라고 하지 그래요. 내가 오늘 여러분을 초청한 것은 도대체 민주주의의 개념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전유물인 것처럼 쓰고 있는데, 중학교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할 사람들이오. 그런 사람들과 앉아서 국사를 논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피곤한 일입니까. 그것이 현실이에요. 내가 당장 국회를 해산시켜버리고 싶지만 할 것을 다하고 해산시켜도 돼요.
금년 초 그 사람들이 개헌 현판식을 할 때 강력하게 해버리려고 하다가 놓아두고 보자고, 상황을 보아가면서 하자고 해서 일부러 놓아두는 거지, 그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의회를 원내 투쟁에 이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정부와 민정당에서 대책을 잘 세웠고 도대체 그 사람들에 대해 국민의 호응도 없었어요. 경찰이 꼭 막아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백만 명이 몰려오는 것 같지만 호응하는 국민들이 없었어요.
盧 대표: 당에서도 일반 국민에 대한 계도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대통령: 북한에서는 金日成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댐을 만드는 판에 관심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런 것을 할 시기가 아닙니다.
李 의장: 사실은 일기가 나빴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盧 대표: 저쪽도 적극성이 없었습니다.
대통령: 사실은 내가 11월 7일에 비상조치와 계엄령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정지시키려고 했는데 경제가 잘되기 때문에……. 한 달에 9억 달러의 흑자가 나는데…… 그래서 놓아두었습니다. 12월 초에 예산이 국회에서 통과되든 안 되든 하려고 했는데 盧 대표위원이 12월 8일까지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건의를 했어요.
시간 여유를 줄 테니 여러분이 협조해서 국민 합의를 바탕으로 개헌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정치 노력으로 안 될 때는 부득이 강경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 소신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전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말해두는 겁니다.
현재 집권한 민정당이 앞으로 올림픽도 치러야 합니다. 10~15년 이내 남북의 정치 대결이 올 때 남쪽을 이끌어 나갈 정당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에서는 사소한 잡음도 있을 수 없어요. 모두 당에서 함께 일하기 위해서 뜻을 함께 했다면 단합해야 되요. 이합집산을 하면 개인도 당도 나라도 불행하게 됩니다.
전두환의 對김대중 심리전 내막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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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2-04, 00: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