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고 그들에게 율법을 던져준 모세 등에게 견주어 볼 만한 역사적 위인이었다.
임정 대통령 선출, 이승만 민주공화제 초대 대통령이 돼
대한제국 멸망 후 최초로 국제회의에 한국 문제 이슈화
모든 인간에게는 장점과 함께 약점이 있듯이 모든 정치 지도자에게는 공(功)과 과(過)가 있게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지성계(학계·언론계·교육계)는 4·19‘혁명’(1960) 이래 대체로 이승만에 대해 비판일변도(批判一邊倒)의 평가를 내림으로써 한 때 국부(國父)로 추앙되었던 ‘건국대통령’을 부패·무능한 독재자로 매도해 왔다.
이승만에 대한 지성계의 부정적 평가는 각급 학교에서 사용되는 국사 교과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요즈음 대다수 국민은 그를 망각하거나 ‘역사의 죄인(罪人)’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인은 자기 나라 현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즉 ‘건국의 아버지’에 대해 일종의 부친살해(父親殺害 : patricide)죄를 범하였고 그 죄값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심각한 정신분열증, 즉 국가정체성에 대한 국론분열 신드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자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새 정부가 출범하는 이 엄숙한 시점에 우리 나라 지도층이 깊이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금까지의 편파적 시각을 바로잡음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 자기 나라 건국 대통령―나아가 대한민국―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갖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나라 국민이 조국에 대해 진정한 애국심을 갖고 세계화·선진화를 위한 제2의 도약에 힘찬 박력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는 그가 저지른 실정(失政)을 부정하거나 은폐하고 그의 업적을 과장·조작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의 공과 과를 샅샅이 가린 다음 그의 과(실정)는 솔직히 인정한 바탕 위에 그의 공(업적)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행히 이 대통령의 경우 그의 인물됨이 워낙 출중하고 그의 공이 과에 비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 점을 사실대로 공정하게 밝히기만 하면 그에 대한 평가는 저절로 긍정적으로 바뀌리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아래에서 그 동안 비판일변도의 역사 교육으로 인하여 일반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승만의 이력과 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을 간추려 소개함으로써 초미의 국가적 과제인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에 일조하고자 한다.
하와이에서 교회·학교 설립 장기적 독립운동 대비
이승만(1875~1965)은 한마디로 자존심이 강한 천재이며 투철한 애국자였다.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령대군의 17대손이었던 그는 (만)20세까지 과거(科擧) 등과를 목표로 동양의 고전을 통달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청일전쟁(1894~1895)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크게 변했음을 깨달은 다음 과거공부를 접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1학기 만에 그는 배재학당의 영어 교사로 발탁되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입학 후 2년 만에 배재학당(‘Paichai College’)을 졸업할 때 그는 졸업생 대표연설자로 뽑혀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하여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연설을 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 때부터 그는 자기의 처녀 연설 제목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편단심 조국의 독립에 전 생애를 바쳤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다음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청년층 지도자로서 입헌군주제 지향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고종황제의 미움을 산 나머지 ‘한성감옥(서)’에 투옥되어 5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출옥 후 미국으로 건너가 T.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존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외교 교섭에 실패하자 그는 미국에 눌러앉아 워싱턴대, 하바드대, 프린스턴대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이들 미국 동부의 일류 대학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사(특히 미국사), 정치학, 국제법 등 근대적인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연마한 끝에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학사(BA), 석사(MA), 박사(Ph.D.)학위를 모두 취득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정치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땄으며 그 과정을 미국 교육사상 전례 없이 짧은 기간 내에 마쳤던 것이다. 이는 실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린스턴대에서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박사’는 졸업 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돌아와 1년 반 동안 서울YMCA에서 학감으로 활동하다가 일제 총독부의 기피·체포 대상이 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1918년까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잡지’를 발간하고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설립·운영하면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에 3·1운동이 터지자 그는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Executive Chief/ President)로 추대되었다. 거의 동시에 그는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임명(4월 11일)되었으며 5개월 후(9월 6일)에는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즉, 이승만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민주공화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두 임시정부의 수반(首班)이 된 그는 상해임시정부보다는 한성임시정부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상해로 곧장 부임하지 않고 워싱턴 DC에 머물면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명의로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개설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한편 미국과 유럽 강국을 상대로 외교·홍보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1년 말에 야 상해에 부임하여 약 5개월간 상해 임정 업무를 처리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파리 강화회의(1919)와 워싱턴 군축회의(1921~1922)를 상대로 한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외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그 회의 주도국들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잇따른 외교의 실패로 상해임정 내에서 그에 대한 비난이 치솟았고 그의 인기는 추락하였다. 그 결과 그는 1925년 3월에 상해 임정의 동의 없이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독립자금을 마음대로 거두어 썼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공산당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상해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면직되었다.
‘임시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비록 외교에 실패하고 정치적 고배를 마셨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알찬 실적을 남기고 있었다. 즉, 그는 대한제국 멸망 후 최초로 국제회의에 한국문제를 제기, 이슈(issue)화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구미위원부 중심 미 정부·국민 상대 외교 홍보활동
동시에 그는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 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독립자금을 거두어 들여 이 돈의 일부를 가지고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는 10여 권의 영문 저서·책자를 발간하고, 자기의 은사인 서재필로 하여금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영문 잡지를 발간케 하며 미국 전역과 파리·런던 등 유럽 대도시에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 미국과 유럽의 지도층에게 종래 ‘은둔국’으로만 알려진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소개하면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30년대 이후 외교 독립운동 전개에 필요한 기반을 조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1933년에 그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회의에 임시정부의 대표로 홀로 참관함으로써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홍보활동을 재개했다. 그 때 그는 ‘만주의 한국인(Koreans in Manchuria)’이라는 자기 책자를 국제연맹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하면서 만주에 이주한 한국인들의 권익을 존중·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주의를 맹렬히 규탄하는 언론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제네바에 모여든 수많은 외교관과 언론인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내었으며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1939년 그는 5년 전(1934)에 결혼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여사와 함께 호놀룰루에서 워싱턴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 때까지 명맥을 이어온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외교·홍보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1941년 초에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승만은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제목: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을 이미 1912년에 프린스턴대 출판부를 통해 출판하였고 또 1933년에 위에서 소개한 ‘만주의 한국인’을 출판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의 세 번째 영문 저서였다. (이승만은 이들 영문 저서 이외에 ‘독립졍신’(1910)과 ‘한국교회 핍박’(1913) 등 여러 국문 저서·역서를 출판한 바 있다.) ‘일본내막기’에서 그는 일본인의 침략적 근성을 폭로하고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을 침략한 군국주의 일본이 머지않아 태평양에서 미국에 도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의 예언이 적중하여 1941년 12월에 ‘진주만 사건’이 터지고 이를 계기로 미·일전쟁, 즉 태평양전쟁이 개시되자 이 책은 일종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승만은 일부 지각 있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예언자라고 칭송되었다.
태평양전쟁 중 그는 미국의 F. 루즈벨트(FDR) 대통령과 국무장관 헐(Cordell Hull) 등을 상대로 줄기차게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때 그는 미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곧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戰後)에 소련이 시베리아에서 훈련시킨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앞세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울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돌이켜 보면, 이는 이승만의 탁월한 역사적 통찰력을 증명하는 시의적절한 경고였다.)
농지 개혁, 산업자본화로 자본주의 기초 다져
기독교 장려, 해방 당시 30만에서 1960년 120만으로
이승만은 1942년 초 주(駐)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크롬웰을 회장으로 받든 ‘한미협회’를 조직하고 이어서 아메리칸대학의 총장인 더글러스등으로써 ‘기독교인친한회’를 조직하여 이들 단체들로 하여금 미국 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게 만들었다.
이 밖에 그는 1942년 여름부터 미 합동참모부 산하의 전략첩보국 부국장인 굿펠로우대령과 협력하여 미국 내 한인 청년 50명을 선발, OSS의 특수 요원으로 훈련시키는 작업을 개시함으로써 미국의 대일(對日)전쟁을 적극 도왔다.
이러한 이승만의 치밀하고 다각적인 노력이 주효하여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영국의 처칠 및 중국의 장제스 총통과 함께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념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결의한다”라는 문구가 담긴 역사적인 ‘카이로 선언’을 발포하게 된 것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카이로 선언은 이승만이 1919년 이래 미국에서 꾸준히 펼친 그의 외교·홍보 활동이 주효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1945년 해방 때 까지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친 외교 노력은 얼핏 보아 실패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은 실패한 것이라고 폄하하면서 그 대신 김일성 류의 무력항쟁노선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카이로 선언의 예에서 보이듯이 근시안적인 오견(誤見)이다. 특히 해방 후 이승만이 조국으로 돌아와 미·소 간 치열한 각축전의 틈바귀에서 순전히 외교를 통하여 대한민국을 수립한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승만은 개인적 능력이나 애국심 면에서 동 시대 여러 민족 지도자들 가운데 ‘타(他)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도로 탁월하였고 독립운동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실적을 올린 지도자였다. 학력과 경력 면에서 그는 세계 어느 나라 원수(元首)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기록을 가진 인물이었다. 우리 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오랫동안 오도된 역사교육의 영향으로 그의 인물됨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유엔 등 26개 우방국 승인 받아
이승만은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였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공적을 남겼는가? 4·19‘혁명’ 이후 편만했던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인지 우리 나라 학계에서는 그의 치적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 극히 드물다.
최근에 필자를 포함한 몇몇 뜻 있는 역사학자·사회과학자들이 1998년부터 출판된 ‘우남이승만문서’를 활용하여 연구한 결과를 나름대로 종합해 보면 이 대통령은 집권한 12년 간―아래에 요약한 바와 같이―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위업(偉業)을 달성하였다.
첫째 (정치분야에서), 이승만은 해방 후 미·소 간에 합의된 4개국의 5년 간 신탁통치안을 배격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건국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이 땅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하였다.
그는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제헌헌법’의 심의·채택 과정을 총괄하는 가운데 국회의원 중 다수가 선호했던 내각중심제 정부안에 반대하였다. 그 대신 그는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안을 채택하도록 국회의원들을 설득하여 기어코 자신의 의사를 관철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구조를 대통령중심제로 정착시켰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나라가 되었다.
그 후 남한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 제도는 국회의장으로서 이승만이 지적한 대로 내각책임제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신생 대한민국의 비약적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는 정치적 기제로 기능하였다.
둘째 (외교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수립 후 유엔을 위시하여 미국 등 26개 우방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그가 외교분야에서 남긴 업적은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53년 10월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 대통령은 이 조약이 체결되기 전 1953년 8월 서울에서 덜레스(John F. Dulles) 미 국무장관과 가(假)조인식을 마쳤을 때 이 조약의 잠재적 가치에 관련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치·문화 등 다방면으로 혜택을 입어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번영을 누릴 것이다”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의 말 대로 이 조약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반세기 이상 억제하면서 미국의 군사 보호막 아래 남한 국민이 역사상 미증유의 경제발전과 정치·문화 발전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외교분야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할 수 있다.
6·25 후 65만 병력·첨단 장비 보유
셋째 (군사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25전쟁 중 유엔군과 긴밀히 협력하고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여 그들을 동원함으로써 공산 침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전쟁을 통하여 전쟁 발발 전에 10만 명(8개 사단)에 불과했던 대한민국 국군의 규모를 전쟁이 끝날 무렵 65만 명(2군, 20개 사단)의 수준으로 대폭 증강시키면서 국군의 장비를 현대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적극적 협조하에 추진된 장비 현대화 계획에 따라 국군은 280mm 원자포와 F-5 초음속 비행기 등 정밀무기를 보유하고 최첨단의 통신 및 수송수단을 갖추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이 대통령은 육·해·공군 사관학교와 각종 특과학교 및 지휘참모학교 등을 설립하여 우수한 군 지휘관을 양성하고, 9,000여 명의 장교를 미국에 파견하여 미국 군사기관에서 첨단 군사지식과 기술을 연마케 하였다. 그 결과 이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남한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상비군을 갖추게 되었으며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돋보이는 군사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될 무렵 우리 나라의 병력이 1만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이 대통령의 군사적 업적은 역사에 보기 드문 위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경제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집권기에 일반 국민의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경제발전에 무관심했거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대통령은 집권 초에―아래에서 재론하려는―농지개혁을 단행하였고 상·공업, 특히 수입대체산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6·25전쟁 이후 미국으로부터 31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받아내 만성적인 인플레를 극복하면서 전후복구사업을 벌인 끝에 1955년까지 거의 완전히 복구하였다.
그 결과 1950~1960년 대한민국은 연평균 4.9%의 경제성장을 달성, 1948년에 약 50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60년에는 83달러로 높아졌다.
이 대통령이 성취한 경제면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농지개혁이다. 그 결과 그는 6·25전쟁의 발발을 전후하여 총 경지의 약 40%에 해당하는 89만2,000정보의 토지를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였다. 이로써 남한 농민 중 대다수를 점하는 소작농들이―역사상 처음으로―자기가 경작하는 토지의 소유권자가 된 것이다.
농지개혁은 농지의 실 경작자에게 해당 농지의 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농민들의 경작 의욕을 북돋아 농업 생산력을 높였고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화시킴으로써 한국 자본주의 경제를 태동시키는 등의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 같은 경제적 효과 이외에 농지개혁은 한국 사회의 지배층이었던 양반들의 토지기반을 붕괴시킴으로써 양반제도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또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추진돼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호응하는 이적(利敵)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요컨대, 이 대통령이 추진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 초에 태조 이성계가 실시한 과전법 이래 최초로 성공한 토지개혁으로서 이는 1961년 이후 남한의 ‘경제 기적’에 근원적으로 기여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통령이 경제분야에서도 역사상 어느 집권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업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섯째 (교육분야에서), 청년기부터 교육입국(敎育立國)론을 외쳤고 박사학위 취득 후 장기간 교육에 종사했던 이 대통령은 집권하자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해방 당시 약 80%이었던 한국인의 문맹률을 1960년까지 10% 이하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동시에 그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 각급 학교의 수를 대폭 증설하였다.
그 결과 대학(교)의 예를 들면 건국 당시 19개에 불과했던 대학(교)의 수가 63개교로, 즉 3.3배 증가하였고 대학생수는 7,800여명에서 9만7,800여 명으로 10배 이상 증폭하였다. 9만7,800명이라는 수치는 당시 영국의 대학생 수에 맞먹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고급 인력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 청년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는 전례 없는 ‘유학 붐’이 일어나 1953~1966년 약 7,400명의 젊은이가 해외유학인정시험을 거쳐 해외 특히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그 중 약 1,500명이 1982년까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들 정규 유학생 이외에 미국경제원조처(USOM)가 후원하는 ‘교육교환계획’에 따라 약 2,500명의 고급 인력이 유학, 단기 훈련, 단기 시찰 등 명목으로 외국(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 국무성이 지원하는 ‘지도자 단기시찰 계획’의 일환으로 940여 명의 정치인, 고급 관료 및 교육자(특히 영어교사)들이 미국을 다녀왔다.
이상과 같은 교육개혁조치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는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기적(敎育奇蹟)’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에 양산된 고급인력은 1960년대의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대통령은 한국민의 교육수준을 현격히 상향시키고 수많은 고급인재를 길러냄으로써 1961년 이후 남한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기틀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역사상 ‘교육대통령’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여섯째 (문화·종교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0월에 한글전용법안을 공포함으로써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그는 개천절(開天節)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단군(檀君)연호를 서력(西曆)과 더불어 병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한국인의 세계화에 필요한 영어 교육을 장려하였다. 그 목적으로 중학교급 이상의 학교에 영어과목을 증설하고 영어 교육 담당 교사를 많이 양성하였다.
고급인력 등 산업화·민주화 주역 양성
대통령 자신은 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에서 영어를 상용하며 영자 신문을 주로 읽고 주요 공문서를 영문으로 작성하는 등 영어를 애용함으로써 주위의 관료들과 일부 상류층 국민들간에 ‘영어 붐’을 조성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현상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급속한 교세 신장이었다. 스스로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1919년 4월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 미국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차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배경 하에 그는 1948년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회식을 주관할 때 감리교 목사 출신 국회의원 이윤영에게 식순에도 없는 개회기도를 부탁하여 개회를 하였다. 이어서 그는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일에 기독교 의식에 따라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였다. 그 후 12년 동안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 의전을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대통령 령(令)으로 국기 경례를 주목례로 하며 군에는 종군목사, 형무소에는 교회목사제를 도입함으로써 ‘동양 최대의 교세’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친(親)기독교 정책의 여파로 남하의 총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이 10% 미만인 상황에서 국회의원 중 약 25%, 정치적 요직을 점유한 인사들 가운데 약 40%가 기독교 교인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해방 당시 30여만 명에 불과했던 남한의 기독교인 수가 1960년에 이르러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이 대통령 집권기에 다져진 교세를 바탕으로 남한의 기독교회는 계속 성장, 오늘날 대한민국은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볼 때 이 대통령은 원래 유교 내지 불교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한국판 콘스탄틴 대제(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황제, 치세 : 324~337)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수한 사상·제도 도입 국가부강시켜
이상과 같이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다져놓았으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비약적 발전과 공전(空前)의 번영에 이바지하였다. 그런데 그는 대한민국의 기간(基幹)제도를 ‘미국화’하는 국가건설 정책을 택함으로써 이러한 업적을 달성했다. 이 점은 특히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의 채택, 미국과의 동맹조약 체결, 미국식 군대의 육성, 미국식 시장경제제도의 도입, 미국식 교육제도의 모방 그리고 ‘미국의 종교’로 알려진 개신교의 장려 등에서 두드러지게 난다.
그렇다면 왜 그는 미국 지향의 국가건설을 도모하였을까? 이승만의 비판자들은 흔히 그가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에서 영주한, 말하자면 자주 정신이 박약한 친미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판단은 일견 그럴 듯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동전의 한 면만을 본 편견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 이전에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졍신’에서 세계 역사상 인류가 고안하고 실험한 정치제도 가운데 미국의 공화제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리고 3·1운동 전후에 그가 집필한 다른 문건들에서도 미국의 사상과 문물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 내지 암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이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침략과 압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달성ㆍ유지하고 나아가 일본, 중국, 러시아 보다 더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간제도를 미국식으로 개혁·정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확신하였음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그는 대한민국을 미국에 준하는 일등국가로 만들기 위해 미국을 벤치마킹하는 국가건설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발상은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우리 나라 위정자들이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기들이 살았던 시대에 전세계에서 가장 문명 정도가 높았던 중국의 당·명 왕조 제도를 애써 모방·섭취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빼어난 학식과 독립운동가로서의 풍부한 경험에 입각하여 한반도에 처음으로 태어난 민주공화국을 전세계가 우러러 보는 ‘모범국가’로 만들어 보려는 애국적 동기에서 ‘팍스 아메리카’ 시대의 패권국가인 미국을 벤치마킹하는 국가건설을 추진하였으며 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터키의 서양화를 주도한 케말 아타튤크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 거시적으로 볼 때 그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이나, 고대 중국의 영토와 제도를 통일하고 중화제국을 탄생시킨 진시황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고 그들에게 율법을 던져준 모세 등에게 견주어 볼 만한 역사적 위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세계화·선진화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지도자 및 국민 모두에게 적합한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다.
[柳永益·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http://www.futurekorea.co.kr/] 한미우호협회 발행 ‘영원한친구들’ 3월호 관련기사
임정 대통령 선출, 이승만 민주공화제 초대 대통령이 돼
대한제국 멸망 후 최초로 국제회의에 한국 문제 이슈화
모든 인간에게는 장점과 함께 약점이 있듯이 모든 정치 지도자에게는 공(功)과 과(過)가 있게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경우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데 한국의 지성계(학계·언론계·교육계)는 4·19‘혁명’(1960) 이래 대체로 이승만에 대해 비판일변도(批判一邊倒)의 평가를 내림으로써 한 때 국부(國父)로 추앙되었던 ‘건국대통령’을 부패·무능한 독재자로 매도해 왔다.
이승만에 대한 지성계의 부정적 평가는 각급 학교에서 사용되는 국사 교과서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요즈음 대다수 국민은 그를 망각하거나 ‘역사의 죄인(罪人)’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자면, 한국인은 자기 나라 현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즉 ‘건국의 아버지’에 대해 일종의 부친살해(父親殺害 : patricide)죄를 범하였고 그 죄값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심각한 정신분열증, 즉 국가정체성에 대한 국론분열 신드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자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새 정부가 출범하는 이 엄숙한 시점에 우리 나라 지도층이 깊이 생각하고 처리해야 할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금까지의 편파적 시각을 바로잡음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 자기 나라 건국 대통령―나아가 대한민국―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갖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 나라 국민이 조국에 대해 진정한 애국심을 갖고 세계화·선진화를 위한 제2의 도약에 힘찬 박력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는 그가 저지른 실정(失政)을 부정하거나 은폐하고 그의 업적을 과장·조작하는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의 공과 과를 샅샅이 가린 다음 그의 과(실정)는 솔직히 인정한 바탕 위에 그의 공(업적)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행히 이 대통령의 경우 그의 인물됨이 워낙 출중하고 그의 공이 과에 비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 점을 사실대로 공정하게 밝히기만 하면 그에 대한 평가는 저절로 긍정적으로 바뀌리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아래에서 그 동안 비판일변도의 역사 교육으로 인하여 일반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승만의 이력과 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을 간추려 소개함으로써 초미의 국가적 과제인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에 일조하고자 한다.
하와이에서 교회·학교 설립 장기적 독립운동 대비
이승만(1875~1965)은 한마디로 자존심이 강한 천재이며 투철한 애국자였다.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령대군의 17대손이었던 그는 (만)20세까지 과거(科擧) 등과를 목표로 동양의 고전을 통달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청일전쟁(1894~1895)에서 중국이 일본에 패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크게 변했음을 깨달은 다음 과거공부를 접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1학기 만에 그는 배재학당의 영어 교사로 발탁되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재’라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입학 후 2년 만에 배재학당(‘Paichai College’)을 졸업할 때 그는 졸업생 대표연설자로 뽑혀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하여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연설을 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 때부터 그는 자기의 처녀 연설 제목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편단심 조국의 독립에 전 생애를 바쳤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다음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청년층 지도자로서 입헌군주제 지향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고종황제의 미움을 산 나머지 ‘한성감옥(서)’에 투옥되어 5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출옥 후 미국으로 건너가 T.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하고 러일전쟁 후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존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외교 교섭에 실패하자 그는 미국에 눌러앉아 워싱턴대, 하바드대, 프린스턴대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이들 미국 동부의 일류 대학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서양사(특히 미국사), 정치학, 국제법 등 근대적인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연마한 끝에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학사(BA), 석사(MA), 박사(Ph.D.)학위를 모두 취득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정치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땄으며 그 과정을 미국 교육사상 전례 없이 짧은 기간 내에 마쳤던 것이다. 이는 실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린스턴대에서 학위를 취득한 이승만 ‘박사’는 졸업 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돌아와 1년 반 동안 서울YMCA에서 학감으로 활동하다가 일제 총독부의 기피·체포 대상이 되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1918년까지 하와이의 호놀룰루에서 ‘태평양잡지’를 발간하고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설립·운영하면서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에 3·1운동이 터지자 그는 4월 23일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Executive Chief/ President)로 추대되었다. 거의 동시에 그는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임명(4월 11일)되었으며 5개월 후(9월 6일)에는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즉, 이승만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민주공화제 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두 임시정부의 수반(首班)이 된 그는 상해임시정부보다는 한성임시정부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상해로 곧장 부임하지 않고 워싱턴 DC에 머물면서 한성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명의로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개설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한편 미국과 유럽 강국을 상대로 외교·홍보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1년 말에 야 상해에 부임하여 약 5개월간 상해 임정 업무를 처리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파리 강화회의(1919)와 워싱턴 군축회의(1921~1922)를 상대로 한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외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그 회의 주도국들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하였다.
잇따른 외교의 실패로 상해임정 내에서 그에 대한 비난이 치솟았고 그의 인기는 추락하였다. 그 결과 그는 1925년 3월에 상해 임정의 동의 없이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독립자금을 마음대로 거두어 썼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공산당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주도권을 장악한 상해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면직되었다.
‘임시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비록 외교에 실패하고 정치적 고배를 마셨지만 나름대로 상당히 알찬 실적을 남기고 있었다. 즉, 그는 대한제국 멸망 후 최초로 국제회의에 한국문제를 제기, 이슈(issue)화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구미위원부 중심 미 정부·국민 상대 외교 홍보활동
동시에 그는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 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독립자금을 거두어 들여 이 돈의 일부를 가지고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는 10여 권의 영문 저서·책자를 발간하고, 자기의 은사인 서재필로 하여금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영문 잡지를 발간케 하며 미국 전역과 파리·런던 등 유럽 대도시에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 미국과 유럽의 지도층에게 종래 ‘은둔국’으로만 알려진 한국의 우수한 문화를 소개하면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930년대 이후 외교 독립운동 전개에 필요한 기반을 조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1933년에 그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기 위해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회의에 임시정부의 대표로 홀로 참관함으로써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홍보활동을 재개했다. 그 때 그는 ‘만주의 한국인(Koreans in Manchuria)’이라는 자기 책자를 국제연맹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하면서 만주에 이주한 한국인들의 권익을 존중·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주의를 맹렬히 규탄하는 언론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제네바에 모여든 수많은 외교관과 언론인들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어내었으며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1939년 그는 5년 전(1934)에 결혼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여사와 함께 호놀룰루에서 워싱턴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 때까지 명맥을 이어온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외교·홍보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1941년 초에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승만은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제목: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을 이미 1912년에 프린스턴대 출판부를 통해 출판하였고 또 1933년에 위에서 소개한 ‘만주의 한국인’을 출판했기 때문에 이 책은 그의 세 번째 영문 저서였다. (이승만은 이들 영문 저서 이외에 ‘독립졍신’(1910)과 ‘한국교회 핍박’(1913) 등 여러 국문 저서·역서를 출판한 바 있다.) ‘일본내막기’에서 그는 일본인의 침략적 근성을 폭로하고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을 침략한 군국주의 일본이 머지않아 태평양에서 미국에 도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의 예언이 적중하여 1941년 12월에 ‘진주만 사건’이 터지고 이를 계기로 미·일전쟁, 즉 태평양전쟁이 개시되자 이 책은 일종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이승만은 일부 지각 있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예언자라고 칭송되었다.
태평양전쟁 중 그는 미국의 F. 루즈벨트(FDR) 대통령과 국무장관 헐(Cordell Hull) 등을 상대로 줄기차게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때 그는 미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곧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戰後)에 소련이 시베리아에서 훈련시킨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앞세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울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돌이켜 보면, 이는 이승만의 탁월한 역사적 통찰력을 증명하는 시의적절한 경고였다.)
농지 개혁, 산업자본화로 자본주의 기초 다져
기독교 장려, 해방 당시 30만에서 1960년 120만으로
이승만은 1942년 초 주(駐)캐나다 대사를 역임한 크롬웰을 회장으로 받든 ‘한미협회’를 조직하고 이어서 아메리칸대학의 총장인 더글러스등으로써 ‘기독교인친한회’를 조직하여 이들 단체들로 하여금 미국 정부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게 만들었다.
이 밖에 그는 1942년 여름부터 미 합동참모부 산하의 전략첩보국 부국장인 굿펠로우대령과 협력하여 미국 내 한인 청년 50명을 선발, OSS의 특수 요원으로 훈련시키는 작업을 개시함으로써 미국의 대일(對日)전쟁을 적극 도왔다.
이러한 이승만의 치밀하고 다각적인 노력이 주효하여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3년 12월 카이로에서 영국의 처칠 및 중국의 장제스 총통과 함께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념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결의한다”라는 문구가 담긴 역사적인 ‘카이로 선언’을 발포하게 된 것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카이로 선언은 이승만이 1919년 이래 미국에서 꾸준히 펼친 그의 외교·홍보 활동이 주효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1945년 해방 때 까지 이승만이 미국에서 펼친 외교 노력은 얼핏 보아 실패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은 실패한 것이라고 폄하하면서 그 대신 김일성 류의 무력항쟁노선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카이로 선언의 예에서 보이듯이 근시안적인 오견(誤見)이다. 특히 해방 후 이승만이 조국으로 돌아와 미·소 간 치열한 각축전의 틈바귀에서 순전히 외교를 통하여 대한민국을 수립한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승만은 개인적 능력이나 애국심 면에서 동 시대 여러 민족 지도자들 가운데 ‘타(他)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도로 탁월하였고 독립운동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실적을 올린 지도자였다. 학력과 경력 면에서 그는 세계 어느 나라 원수(元首)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기록을 가진 인물이었다. 우리 나라 국민의 대다수가 오랫동안 오도된 역사교육의 영향으로 그의 인물됨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유엔 등 26개 우방국 승인 받아
이승만은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였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공적을 남겼는가? 4·19‘혁명’ 이후 편만했던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인지 우리 나라 학계에서는 그의 치적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이 극히 드물다.
최근에 필자를 포함한 몇몇 뜻 있는 역사학자·사회과학자들이 1998년부터 출판된 ‘우남이승만문서’를 활용하여 연구한 결과를 나름대로 종합해 보면 이 대통령은 집권한 12년 간―아래에 요약한 바와 같이―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위업(偉業)을 달성하였다.
첫째 (정치분야에서), 이승만은 해방 후 미·소 간에 합의된 4개국의 5년 간 신탁통치안을 배격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건국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이 땅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하였다.
그는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제헌헌법’의 심의·채택 과정을 총괄하는 가운데 국회의원 중 다수가 선호했던 내각중심제 정부안에 반대하였다. 그 대신 그는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안을 채택하도록 국회의원들을 설득하여 기어코 자신의 의사를 관철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의 정부구조를 대통령중심제로 정착시켰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한 나라가 되었다.
그 후 남한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이 제도는 국회의장으로서 이승만이 지적한 대로 내각책임제 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신생 대한민국의 비약적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는 정치적 기제로 기능하였다.
둘째 (외교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수립 후 유엔을 위시하여 미국 등 26개 우방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그가 외교분야에서 남긴 업적은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53년 10월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 대통령은 이 조약이 체결되기 전 1953년 8월 서울에서 덜레스(John F. Dulles) 미 국무장관과 가(假)조인식을 마쳤을 때 이 조약의 잠재적 가치에 관련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받을 뿐만 아니라 경제·정치·문화 등 다방면으로 혜택을 입어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번영을 누릴 것이다”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그의 말 대로 이 조약은 한반도에서 전쟁의 재발을 반세기 이상 억제하면서 미국의 군사 보호막 아래 남한 국민이 역사상 미증유의 경제발전과 정치·문화 발전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외교분야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할 수 있다.
6·25 후 65만 병력·첨단 장비 보유
셋째 (군사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6·25전쟁 중 유엔군과 긴밀히 협력하고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여 그들을 동원함으로써 공산 침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전쟁을 통하여 전쟁 발발 전에 10만 명(8개 사단)에 불과했던 대한민국 국군의 규모를 전쟁이 끝날 무렵 65만 명(2군, 20개 사단)의 수준으로 대폭 증강시키면서 국군의 장비를 현대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적극적 협조하에 추진된 장비 현대화 계획에 따라 국군은 280mm 원자포와 F-5 초음속 비행기 등 정밀무기를 보유하고 최첨단의 통신 및 수송수단을 갖추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이 대통령은 육·해·공군 사관학교와 각종 특과학교 및 지휘참모학교 등을 설립하여 우수한 군 지휘관을 양성하고, 9,000여 명의 장교를 미국에 파견하여 미국 군사기관에서 첨단 군사지식과 기술을 연마케 하였다. 그 결과 이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남한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국 역사상 최고 수준의 상비군을 갖추게 되었으며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 돋보이는 군사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될 무렵 우리 나라의 병력이 1만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이 대통령의 군사적 업적은 역사에 보기 드문 위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넷째 (경제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집권기에 일반 국민의 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경제발전에 무관심했거나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대통령은 집권 초에―아래에서 재론하려는―농지개혁을 단행하였고 상·공업, 특히 수입대체산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6·25전쟁 이후 미국으로부터 31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받아내 만성적인 인플레를 극복하면서 전후복구사업을 벌인 끝에 1955년까지 거의 완전히 복구하였다.
그 결과 1950~1960년 대한민국은 연평균 4.9%의 경제성장을 달성, 1948년에 약 50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60년에는 83달러로 높아졌다.
이 대통령이 성취한 경제면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농지개혁이다. 그 결과 그는 6·25전쟁의 발발을 전후하여 총 경지의 약 40%에 해당하는 89만2,000정보의 토지를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하였다. 이로써 남한 농민 중 대다수를 점하는 소작농들이―역사상 처음으로―자기가 경작하는 토지의 소유권자가 된 것이다.
농지개혁은 농지의 실 경작자에게 해당 농지의 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농민들의 경작 의욕을 북돋아 농업 생산력을 높였고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화시킴으로써 한국 자본주의 경제를 태동시키는 등의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 같은 경제적 효과 이외에 농지개혁은 한국 사회의 지배층이었던 양반들의 토지기반을 붕괴시킴으로써 양반제도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또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추진돼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호응하는 이적(利敵)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
요컨대, 이 대통령이 추진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 초에 태조 이성계가 실시한 과전법 이래 최초로 성공한 토지개혁으로서 이는 1961년 이후 남한의 ‘경제 기적’에 근원적으로 기여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통령이 경제분야에서도 역사상 어느 집권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업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섯째 (교육분야에서), 청년기부터 교육입국(敎育立國)론을 외쳤고 박사학위 취득 후 장기간 교육에 종사했던 이 대통령은 집권하자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여 해방 당시 약 80%이었던 한국인의 문맹률을 1960년까지 10% 이하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하였다. 동시에 그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 각급 학교의 수를 대폭 증설하였다.
그 결과 대학(교)의 예를 들면 건국 당시 19개에 불과했던 대학(교)의 수가 63개교로, 즉 3.3배 증가하였고 대학생수는 7,800여명에서 9만7,800여 명으로 10배 이상 증폭하였다. 9만7,800명이라는 수치는 당시 영국의 대학생 수에 맞먹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고급 인력 양성에 관심을 기울여 청년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는 전례 없는 ‘유학 붐’이 일어나 1953~1966년 약 7,400명의 젊은이가 해외유학인정시험을 거쳐 해외 특히 미국으로 유학하였으며 그 중 약 1,500명이 1982년까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들 정규 유학생 이외에 미국경제원조처(USOM)가 후원하는 ‘교육교환계획’에 따라 약 2,500명의 고급 인력이 유학, 단기 훈련, 단기 시찰 등 명목으로 외국(주로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미 국무성이 지원하는 ‘지도자 단기시찰 계획’의 일환으로 940여 명의 정치인, 고급 관료 및 교육자(특히 영어교사)들이 미국을 다녀왔다.
이상과 같은 교육개혁조치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에는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육기적(敎育奇蹟)’이 일어났다. 이 기적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에 양산된 고급인력은 1960년대의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경제발전의 주역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 대통령은 한국민의 교육수준을 현격히 상향시키고 수많은 고급인재를 길러냄으로써 1961년 이후 남한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기틀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역사상 ‘교육대통령’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여섯째 (문화·종교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10월에 한글전용법안을 공포함으로써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그는 개천절(開天節)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단군(檀君)연호를 서력(西曆)과 더불어 병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한국인의 세계화에 필요한 영어 교육을 장려하였다. 그 목적으로 중학교급 이상의 학교에 영어과목을 증설하고 영어 교육 담당 교사를 많이 양성하였다.
고급인력 등 산업화·민주화 주역 양성
대통령 자신은 경무대(景武臺 : 현재의 청와대)에서 영어를 상용하며 영자 신문을 주로 읽고 주요 공문서를 영문으로 작성하는 등 영어를 애용함으로써 주위의 관료들과 일부 상류층 국민들간에 ‘영어 붐’을 조성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현상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기독교(특히 개신교)의 급속한 교세 신장이었다. 스스로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던 그는 1919년 4월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 미국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차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배경 하에 그는 1948년 5월 31일 역사적인 제헌국회 개회식을 주관할 때 감리교 목사 출신 국회의원 이윤영에게 식순에도 없는 개회기도를 부탁하여 개회를 하였다. 이어서 그는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일에 기독교 의식에 따라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였다. 그 후 12년 동안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 의전을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대통령 령(令)으로 국기 경례를 주목례로 하며 군에는 종군목사, 형무소에는 교회목사제를 도입함으로써 ‘동양 최대의 교세’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의 이러한 친(親)기독교 정책의 여파로 남하의 총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이 10% 미만인 상황에서 국회의원 중 약 25%, 정치적 요직을 점유한 인사들 가운데 약 40%가 기독교 교인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하여 해방 당시 30여만 명에 불과했던 남한의 기독교인 수가 1960년에 이르러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이 대통령 집권기에 다져진 교세를 바탕으로 남한의 기독교회는 계속 성장, 오늘날 대한민국은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볼 때 이 대통령은 원래 유교 내지 불교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한국판 콘스탄틴 대제(기독교를 공인한 로마의 황제, 치세 : 324~337)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수한 사상·제도 도입 국가부강시켜
이상과 같이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다져놓았으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비약적 발전과 공전(空前)의 번영에 이바지하였다. 그런데 그는 대한민국의 기간(基幹)제도를 ‘미국화’하는 국가건설 정책을 택함으로써 이러한 업적을 달성했다. 이 점은 특히 미국식 대통령중심제의 채택, 미국과의 동맹조약 체결, 미국식 군대의 육성, 미국식 시장경제제도의 도입, 미국식 교육제도의 모방 그리고 ‘미국의 종교’로 알려진 개신교의 장려 등에서 두드러지게 난다.
그렇다면 왜 그는 미국 지향의 국가건설을 도모하였을까? 이승만의 비판자들은 흔히 그가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에서 영주한, 말하자면 자주 정신이 박약한 친미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판단은 일견 그럴 듯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동전의 한 면만을 본 편견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 이전에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졍신’에서 세계 역사상 인류가 고안하고 실험한 정치제도 가운데 미국의 공화제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리고 3·1운동 전후에 그가 집필한 다른 문건들에서도 미국의 사상과 문물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주장 내지 암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이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의 침략과 압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달성ㆍ유지하고 나아가 일본, 중국, 러시아 보다 더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기간제도를 미국식으로 개혁·정비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확신하였음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그는 대한민국을 미국에 준하는 일등국가로 만들기 위해 미국을 벤치마킹하는 국가건설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발상은 통일신라~조선시대의 우리 나라 위정자들이 국가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기들이 살았던 시대에 전세계에서 가장 문명 정도가 높았던 중국의 당·명 왕조 제도를 애써 모방·섭취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요컨대, 이 대통령은 빼어난 학식과 독립운동가로서의 풍부한 경험에 입각하여 한반도에 처음으로 태어난 민주공화국을 전세계가 우러러 보는 ‘모범국가’로 만들어 보려는 애국적 동기에서 ‘팍스 아메리카’ 시대의 패권국가인 미국을 벤치마킹하는 국가건설을 추진하였으며 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터키의 서양화를 주도한 케말 아타튤크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 거시적으로 볼 때 그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이나, 고대 중국의 영토와 제도를 통일하고 중화제국을 탄생시킨 진시황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고 그들에게 율법을 던져준 모세 등에게 견주어 볼 만한 역사적 위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세계화·선진화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지도자 및 국민 모두에게 적합한 ‘롤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다.
[柳永益·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 http://www.futurekorea.co.kr/] 한미우호협회 발행 ‘영원한친구들’ 3월호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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