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99년부터 리비아와 비밀접촉
칸의 조직망은 또 하나의 정보전의 성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기관이 활동한 결과 오랫동안 불량국가로 있었던 리비아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대량파괴무기계획을 포기했다.
CIA는 1999년 이래 고위 리비아 관리들과 비밀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노력은 테러리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 다양한 이슬람 테러리스트 그룹에 관해 리비아로부터 알아낼 수 있는 것을 배우는 데 집중되고 있었다. 이 모임은 우리 영국의 동료들과 함께 진행되었고, 유럽의 몇 개 도시에서 열렸다. 리비아 대표단은 무아마르 알 가다피 대령의 정보책임자 무사 쿠사가 이끌었다. 그는 1978년 미시건 주립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활동해야 하는 초현실적 세계를 보여 주듯이 CIA 요원들은 1988년 12월 팬암 103편을 폭파해서 270명을 죽인 사건의 배후 주모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과 인사를 교환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접촉은 스코틀랜드 법정이 한 리비아의 정보요원이 그 항공기 폭파에 가담했다고 유죄판결을 내리고, 다른 사람은 석방했을 때까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다. 리비아의 스코틀랜드 재판 협조와 그 밖의 행동은 속임수가 분명했지만, 20년 넘게 이 나라가 추구해 온 테러리즘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첫 신호로 해석될 수 있었다.
9·11 공격 이후 가다피는 공개적으로 그 테러리스트 활동을 규탄하면서 “끔찍하다”고 말했고, 리비아 국민은 미국에 인도적 원조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흥미 있는 신호였다.
우리는 9월11일 이후 리비아와 몇 가지 테러리스트 추적 데이터를 교환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아프가니스탄 내 알 카에다의 추적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그 접촉은 한동안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자 2003년 3월, 가다피의 특사가 영국 관리들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했다. 그는 가다피가 WMD 계획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으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서방 측이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겠느냐고 물었다.
한 고위 영국 정보관리가 이라크 전쟁이 막 시작되었을 무렵 미국으로 날아왔다. 나는 그 다음 날 그를 만났다. 5일 후 나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 및 영국 총리 블레어를 만났다. 블레어는 내 상대자인 리처드 디어러브와 함께 있었다. ‘스파이의 스파이’라는 리처드는 내가 함께 일해 본 정보기관 관리 중 가장 노련하고 재능있는 사람이었다. 매우 신중하고 정연한 그는 대서양 양쪽에 있는 두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금방 신뢰를 얻었다.
우리들은 이라크에 관한 이야기로 대부분 시간을 보냈지만, 가다피의 놀라운 제안을 토의했다. 우리는 이라크에 대한 침공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에 있었다. 이 전쟁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사담의 핵, 생물학 및 화학계획에 대한 우려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느닷없이 또 하나의 불량국가가 그들의 계획을 포기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나선 것이다.
비밀 접촉장에 이스라엘 총리 등장
우리는 가다피의 동기에 대해 토의했다. 리비아인들은 대단히 값비싼 WMD 획득 노력에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은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리비아는 아랍과 아프리카 양쪽에서 기인(奇人)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라크 주변에 배치된 15만 명의 미군이 그의 심리에 주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나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돌아와 비밀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최고위 직원인 짐 패빗과 스티브 캐프스를 사무실로 불렀다. 나는 리비아와의 접촉 통로를 설명해 주고 고위 수준에서 극도로 신중하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패빗과 나는 이라크 ‘자유 작전’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완벽한 적임자인 스티브를 발견했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유능한 공작원 담당 요원이었다. 러시아어와 파르시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CIA가 지시한 가장 어려운 임무도 훌륭히 완수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 임무를 주고 이라크 문제로 다시 돌아갔다. 스티브와 그의 상대인 영국의 고위 정보관리는 각각 자기 소속 기관을 위해서 협조했다. 그들은 진정으로 WMD 계획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리비아와의 회의를 마련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 동료는 4월 중순 한 유럽의 도시로 날아갔다. 처음에는 그들이 리비아의 정보책임자 무사 쿠사와 리비아의 외교관 푸아드 실트니를 호텔에서 만나 아침을 먹을 계획이었다. 스티브와 그의 동료는 그 호텔의 레스토랑 내부를 모두 바라볼 수 있는 테이블을 골랐다. 약속시간 조금 전에 중동인의 모습을 한 젊은이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스티브는 그들이 보안 전문가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얼마 후 전 이스라엘 총리 에후드 바라크가 레스토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민감한 토의를 할 수 있는 조용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스티브가 그 이스라엘인을 계속 주목하고 있는 동안 영국인은 그 리비아인들을 데리고 호텔의 제일 위층에 있는 회의실로 갔다. 스티브도 곧 그들과 합류했다.
자리가 정리되자 키가 크고 정장을 한 무사 쿠사는 리비아의 입장에 관해 준비해 온 긴 연설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 첫 회의에서는 어떤 미국의 문서도 주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스티브는 리비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조처를 취하기 바란다는 부시 대통령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 첫 회담은 두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약간의 토의가 있은 후 무사 쿠사는 사실상 리비아가 자기들이 서명한 모든 국제적인 무기통제조약을 위반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리비아가 무기계획을 포기하려고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믿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 뒤 우리에게 선의의 표시를 요청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 동료는 레이건 대통령의 유명한 ‘신뢰 그러나 검증’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주고, 우리가 전문가를 리비아로 보내 리비아의 무기 보유 현황을 검증하고 계획이 해체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두 나라 어느 쪽으로부터도 선의의 표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다피, 열변 뒤의 미소
스티브가 돌아오자 나는 그를 백악관으로 데려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비록 구체적인 것은 없었지만 우리는 진정한 돌파구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우리와 영국은 리비아에 가서 그들의 계획을 조사할 수 있는 WMD 전문가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리비아는 지연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국인들에게 자기들의 무기계획을 조사하며 돌아다니게 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5월 중순 런던으로 날아가서 영국의 정보국장을 만났다. 같은 달 말 스티브와 한 고위 영국 정보관계자가 리비아인들에게 유럽의 한 수도에서 만나자고 초청했다. 가다피의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이 무사 쿠사와 함께 그 모임에 참석했다.
사이프는 끈질긴 협상자의 역할을 시작하면서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에게 리비아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 자기들이 우리에게서 기대하고 있는 것을 설명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한동안 그가 이야기를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말을 중단시켰다. 스티브는 말했다.
“우리 요원들이 당신 나라에 가서 당신이 무기 저장량과 의도에 관해 우리에게 한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어떤 양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돌아가서 당신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리비아 측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몇 달이 흘렀다. 8월에 다시 회담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가다피의 아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무사 쿠사는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에게 리비아로 와서 가다피를 직접 만나라고 초청했다. 부시 대통령은 우리에게 리비아의 의도에 관한 확실한 증명과 그들이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기 전에는 아무런 약속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9월 초에 트리폴리로 날아갔다. 중동에서는 흔히 그런 것처럼 그 회담은 몇 번이나 연기되었다. 그들은 지중해 한 끝에 있는 호텔에서 기다렸다. 무사 쿠사는 가다피와 만나면 처음 몇 분 동안은 ‘약간 거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했다.
마침내 그들은 저녁 때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무사 쿠사는 직접 차를 몰아 그들을 가다피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는 가는 도중 한 곳을 가리키며 1986년 미국의 폭격으로 가다피의 양녀 한 명이 사망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은 가다피의 커다란 사무실로 들어갔다. 개인컴퓨터가 설치된 커다란 책상 양쪽에 커다란 지구의가 하나씩 있었다(스티브는 가다피가 웹을 서핑하면서 외부세계의 진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다피는 값비싼 이탈리아제 로퍼(簡便靴)를 신고, 아프리카의 지도가 인쇄된 번쩍거리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방문자들은 짤막한 소개를 한 후 의자에 앉았다. 무사 쿠사는 마치 무슨 일이 닥칠지 알고 있다는 듯 머리를 숙였다. 그의 통역이 종이철을 꺼냈다. 가다피는 즉시 큰 목소리로 서방 측, 특히 미국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 통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통역은 가다피가 쏟아 내는 아랍어를 따라가느라고 큰 고역을 치렀다.
장광설이 17분가량 계속되었을 때 마치 그의 폭언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듯 무사 쿠사의 머리가 올라갔다. 가다피는 기운이 소진된 듯 처음으로 잠깐 말을 멈추더니 미소를 짓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눈감아준 密輸
그는 계속 과거를 깨끗이 지우고 싶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토의 대상이 되었다. 리비아의 WMD 계획이 언급되자 가다피는 화를 내며 WMD 계획은 없다고 주장했다. ‘대량파괴무기’가 정확히 무엇이냐에 대한 토의가 뒤따랐고, 그 다음 다른 의제로 나아갔다. 누군가가 “미국과 영국은 리비아의 무기시설을 검사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가다피는 화를 냈지만, 우리 측이 그것을 ‘검사’라는 말 대신 ‘방문’이라고 부른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회담은 2시간30분 동안 계속되었다. 회담은 가다피가 “무사 쿠사와 협의해서 하라”는 말을 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났다. 그러나 방문자들은 그 사무실을 나오면서 그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던 가다피의 아들 사이프가 즉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사이프의 비치 하우스로 안내되었다. 그의 보좌관들이 거실의 家具(가구)를 꺼내서 지중해의 모래 위에 내다 놓은 것 같았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들은 늦은 만찬을 즐기면서 리비아 지도자의 아들에게 회담 내용을 알려 주었다.
스티브가 돌아오자 나는 다시 그를 데리고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나는 스티브가 상황을 과대 포장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하면서 리비아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 그런 거래를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공포가 우리만큼 크다고 말했다. 만약 그들이 서방 측과 우호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우수한 자제들을 미국 대학에 보낼 수 있고, 메이저 석유회사를 유치하여 지금은 불가능한 경제적 번영을 촉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극비로 되어 있었다. 나는 콜린 파월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고, 리치 아미티지와 국무부의 중동문제 담당자인 빌 번스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만약 이 노력이 궁극적으로 성공한다면 리비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작업은 그들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2003년 가을, A. Q. 칸과 리비아 등 우리가 거둔 두 가지 성공에 관한 내용이 등장했다. 우리는 칸의 조직망에 대한 작전을 통해서 독일 船籍(선적)으로 되어 있는 BBC 차이나호가 원심분리기 부품을 싣고 리비아로 가고 있다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 배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후 이탈리아 항구 타란토로 항로를 바꾸도록 만들었다. 이 배는 10월4일 그 항구에 도착했다. 검사관들은 積荷(적하)목록에 단순히 ‘중고기계부품’이라고 되어 있는 40피트짜리 컨테이너에 정교하게 제작된 원심분리기 부품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 선적화물을 가로챌 수 있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지만, 그때는 지나치게 문제를 확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 사건을 이용해 리비아인들에게 우리가 그들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모든 WMD를 포기하도록 인센티브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고위 관리를 가다피에게 보내 그 압수 이야기가 신문에 나기 전에 알려 주었다. 리비아인들은 그 선적은 현재의 비밀협상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마련된 것이고, 그 담당자는 임박한 WMD 포기 결정을 모르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美英 검사팀, 리비아를 뒤지다
미국 정부의 관리들 중에도 리비아와 진행 중인 막후협상에 대해서 알고 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비밀을 모르고 있던 한 저명인사는 그 압수사건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국무부의 군축담당 차관 존 볼턴이 그 사건을 대통령이 추진한 ‘핵확산저지계획’의 위대한 성공사례로 내세울 기자회견을 열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년 전에 시작된 이 계획은 불법적인 무기船籍(선적)을 제한하기 위한 국제적 협조를 강화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BBC 차이나호의 나포는 그 계획과는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우리는 미국 관리들이 비록 옳지만 상투적인 리비아 규탄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가다피가 당혹한 나머지 모든 거래를 취소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우리가 추진 중인 노력을 알고 있는 국무부 관리 중 하나인 리치 아미티지에게 전화를 걸어 볼턴이 기자회견을 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그 지시를 이해할 수 없었던 볼턴은 스티브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에게 직접 알려주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리비아가 결국 검사팀이 자기 나라를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한 뒤 소수의 CIA 무기전문가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날아가 그들의 영국인 동료를 태웠다. 10월10일, 그들은 아무런 표지가 없는 비행기를 타고 트리폴리로 날아갔다. ‘미합중국’이란 표지가 붙은 제트기가 착륙하는 모습은 리비아인이나 우리 모두가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착륙하기 직전 조종사는 스티브 캐프스에게 트리폴리 공항이 착륙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이 단순한 관료적 절차의 착오인지, 아니면 리비아가 다시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스티브는 의문이 있으면 무사 쿠사에게 물어보도록 관제탑에 말하라고 승무원에게 지시했다. 몇 분 안 되어 착륙허가가 나왔다. 스티브는 리비아 당국이 그들의 도착을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터미널을 향해 접근하고 있을 때 창 밖을 내다 본 스티브는 군악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군악대는 다른 고위인사를 맞기 위해 나왔던 것이었다. CIA 비행기는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추었다.
이틀 동안은 별로 진전이 없었지만, 10월21일 가다피는 스티브에게 단독으로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가다피는 큰 사무실에 앉아 목소리를 높여 상투적인 연설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말을 멈추고 WMD 계획을 포기하면 미국이 정말 약속을 이행할 것이냐고 물었다. 스티브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는 분입니다. 그러나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아주 단호한 분이십니다.”
가다피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과거 기록을 지우는 것이라고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다시 벽에 부딪쳤다. 그래서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이미 여러 번 확증된 수법인 ‘짐싸기’ 전술을 사용했다. 그들은 무기검사 요원들에게 짐을 싸라고 지시하고, 비행기를 불러 그것을 실으라고 말했다. 무사 쿠사는 탄식을 했다.
“당신들은 정말 골칫거리군요.”
그는 실무자들에게 좀더 개방하라고 지시했다. 무기검사원들은 짐을 다시 풀었다.
느리긴 했지만 진전은 있었다. 리비아인들은 미국과 영국의 검사요원들에게 다양한 무기계획이 어디까지 진전되어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이미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고 여러 차례 무기계획의 일부를 숨기려고 시도했다. 그들이 스커드 B 미사일을 보여 주면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스커드 C는 어디 있습니까?”
고도의 독성을 가진 화학물질 저장시설에 안내되었을 때 우리 검사요원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비아가 치명적 화학물질을 보유한 것에 놀란 게 아니라 그 물질을 커다란 플라스틱 병에 담아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비아인들의 유일한 안전대책은 그 시설에 들어갈 때 코를 잡는 것이었다. 검사요원들은 재빨리 뒷걸음쳐 나와서 완벽한 화학방호복을 착용한 뒤 창고에 다시 들어갔다.
다양한 계획의 在庫(재고)조사를 하는 작업은 몇 달이나 걸렸다. 리비아인들은 핵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비협조적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계획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드디어 核개발 포기선언
2003년 11월 말, 스티브와 그의 영국인 동료는 무사 쿠사를 한 모임에 초청했다. 그들은 무사 쿠사에게 리비아가 원심분리기 시설을 구입한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리비아는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에 대해서 털어놓기 시작했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우리는 칸의 조직망에 대한 작전 덕택으로 그들의 계획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상대방의 카드를 알면서 돈이 많이 걸린 포커를 하는 것과 같았다. 이 경우 그 상금은 가다피에게 궁극적으로 핵무기 능력을 줄 수 있었던 핵개발 계획을 완전히 그리고 평화적으로 해체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리비아인들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우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이 물건 값으로 A. Q. 칸에게 1000만 달러를 지불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동안 당혹해서 입을 열지 못했다.
“1000만 달러라고요? 우리는 2000만 달러라고 생각했는데.”
분명히 누군가가 떼돈을 벌었을 것이다.
12월 중순이 되자 충분한 진전이 이루어졌고, 곧 그 거래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조차도 신중하게 조정했다. 가다피가 먼저 리비아 국민들에게 WMD 계획을 포기했음을 발표하도록 했다. 그러면 블레어 총리가 이에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그 뒤에 부시 대통령이 논평을 하는 것이다. 시기는 긴밀한 협상 끝에 12월19일로 결정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가다피가 늦추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걱정했다. 그는 이 거래를 취소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설명을 듣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리비아의 국가대표 축구팀 경기의 텔레비전 중계가 그날 밤 예정되어 있었다. 가다피는 대부분의 리비아인들이 아무런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대량파괴무기에 관한 발표로 그 중요한 경기의 중계를 중단시켜 분노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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