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9월에는 미 군정의 사회, 경제정책에 반발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들의 총파업은 다음 달 대구 등 여러 곳의 민중봉기로 이어졌다.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된 봉기는 경상도 일대로, 다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수십만 명의 민중들은 쌀 공출의 폐지, 토지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 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러한 봉기는 경찰이나 우익청년단체들에 의하여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260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교과서의 내용이 거의 전부 그러한 것처럼 위의 기술은 反국가적-反사실적 관점에 서 있다. 10월 폭동은 민중이 주동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 세력이 일부 민중을 선동하여 일으킨 流血사태였다. '민중봉기'란 표현은 폭동주동세력인 공산당을 美化하는 표현이다. '봉기'는 의로운 항거라는 의미를 띠고 있다. 10월 폭동 주도세력이 저지른 잔인한 만행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법질서 회복을 위하여 진압에 나섰던 경찰의 武力性을 강조하였다. 마치 평화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한 것처럼 쓰고 있다.
<쌀 공출의 폐지, 토지개혁 실시, 식민지 교육 철폐, 미 군정 퇴진 등을 요구하며>라고 운운하여 공산당 세력의 요구가 정당하고 진실된 것인양 美化했다. 이런 요구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중을 폭동에 끌어들이려 선동한 것이지, 진심으로 원한 것도 아니었다. 북한에서 공산당 세상이 되어 실시한 토지개혁은 地主의 땅을 빼앗아 국가가 독점하도록 한 것이었다. 토지개혁으로 민중은 자기 땅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10월 폭동에 가담했던 민중이 과연 이런 토지개혁을 원했을까?
위의 기술은 따라서 대한민국 建國과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던 공산당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사실을 날조한 것이다. 이런 역사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미군과 경찰과 우익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 경찰 우익은 대한민국이 서는 데 기여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금성출판사 교과서로 공부하면 우리의 恩人들을 미워하고 원수들을 동정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한국 사회의 主流가 되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감사할 줄 모르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을 양산하는 교육이다. 反인간화 교육인 것이다.
이런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킨 교육 공무원들을 가려내어 반드시 처벌해야 나라가 바로 설 것이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를 채택한 고등학교가 서울에서만 100개를 넘는다고 한다. 그 명단을 하루속히 공개하여 학부모들이 학교 당국에 항의하는 운동을 벌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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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傳記 제1권에서 인용.
제5장 상모리 소년
10월의 폭풍
광복과 함께 표면에 나온 공산주의자들은 우리 민족에게 ‘증오와 위선의 과학’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계급 해방’이란 명분 아래 부모, 師弟, 上下 간의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더 큰 휴머니즘이요 역사의 발전이라고 가르쳤다. 인륜을 파괴하는 행동에 죄책감이 아니라 사명감을 부여한 이 ‘악마의 논리’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동족상잔과 내분의 씨앗이 되었다. 계급적 이익을 민족애와 國益보다도 더 중시하는 공산주의자는 본질적으로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전략에 민족과 국가를 파는 사대주의자였다(그런 점에서는 이들이 증오했던 친일파와 같다).
金桂澈(김계철)은 대구사범 학생으로 10월 폭동에 가담했다가 越北(월북)하여 공산주의의 실상에 절망한 뒤 중국으로 탈출했다. 1994년에 44년 만에 귀향했다.
그는 대구사범 선배 박정희 형제의 운명을 바꿔 놓은 사건의 내막을 소년의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다. 김계철은 광복이 되자 좌익 학생들이 대구사범 김용하 교장을 연단으로 끌고 나와 여러 학생들이 보는 데서 ‘민족반역자’라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았다. 학생들은 특별하게 親日행동을 한 적도 없는 김 교장의 머리를, 신발짝을 벗어 때리는데 교사들은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하순 한 좌익 선배가 김계철에게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면서 대구의대 학생 대표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김 군은 봉투를 들고 가다가 쪽지를 펴 보았다. ‘시체 네 구를 준비하라’로 시작되는 메모였다. 쪽지를 전달받은 학생 대표는 읽어보더니 옆에 있는 학생에게 “되는가”하고 물었다. 그 학생이 김 군을 데리고 해부실로 가더니 약물에 담겨 있는 시체와 붕대에 감겨 있는 송장들을 보여 주면서 “본 대로 전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10월 1일 대구에서 좌익 노동자들이 ‘쌀 배급’, ‘일급제 반대’,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폭력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자위적인 발사로 시위대원 한 사람이 맞았다(이 사람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아 과연 사망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다음날 흰 가운을 입은 대구의대 학생들이 들것에 들고 나와 시위를 선동하는 데 써먹은 시체는 전날 경찰의 총격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김계철 소년이 보았던 해부실 시체였음이 확실하다.
이날 대구경찰서는 폭도화한 시위 군중에 항복하고 경찰관들은 달아났다. 무기를 탈취하고 수감자들을 풀어준 좌익 극렬 세력은 동족을 상대로 한 살육의 祭典(제전)을 벌인다. 표적은 경찰과 地主들이었지만 무고한 사람들이 더 많이 죽었다. 살육의 방법도 그 뒤의 동족상잔의 과정에서 되풀이되는 전형적인 공산당식이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때로는 그 가족까지 때려 죽이고 찔러 죽이고 찢어 죽이고 찍어 죽였다. 공산당이 加虐(가학)취미적 학살을 즐긴 것은 이른바 ‘반동학살’을 ‘위대한 혁명적 행위’로 합리화했기 때문에 양심을 마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좌익이 선동한 폭동에는 깡패와 양아치, 그리고 부화뇌동한 민중이 대거 참여하여 절제되지 않는 살육에 도를 더했다. 좌익 의대생과 의사들이 人命살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경북도립의원에 실려온 부상 경찰관들은 화단 주변에서 폭도들에 의하여 맞아죽었다.
“그중 몇 사람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죽음 직전에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보고 청년들은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확인 타살을 했다(당시 대구의대 3년생 김만재 증언).”
“어떤 부상한 경찰관이 살려 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 내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 의사가 떠밀었다. 아래로 굴러 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나왔다(이원만 《나의 政經50년》).”
이날(10월2일) 오후 미군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장악했다. 좌익 폭도들은 그러나 대구 근교로 진출하여 살상의 피바람은 경북으로 번져가기 시작한다. 박정희 一家가 한때 살았던 칠곡군 약목면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다.
<폭도들은 약목지서를 먼저 습격하여 주재 중인 세 경관을 기둥에 결박한 다음 낫과 도끼로 전신을 참살했다. 또 왜관경찰서를 습격하여 서장 사택을 파괴하고 서장, 수사과장 외 4명의 경찰관을 도끼로 참살했다. 특히 장 서장은 두부로부터 밑으로 절반을 째 죽였다(<대구시보> 1946년 10월 13일자)>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가 주동한 구미폭동은 위에 묘사된 살육극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대구시보> 정치용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선산군 民戰(민전·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조직) 사무국장이자 선산 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이던 박상희는 2,000여 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적기가를 부르면서 (구미에 있는)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여 백철상 서장에게 전 기능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金聖東(김성동·전 통일원 비상계획국장) 소년은 경찰서 옆에 살고 있었는데 이때 구경삼아 거리로 나왔다. 폭도들이 곡괭이와 쇠스랑을 둘러메고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종술 경사가 경찰서 뒤편 철조망을 넘다가 곡괭이에 얻어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지더니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日帝 때 기마부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민전간부 김정수가 무기고를 열고 총과 실탄을 나누어주었다. 좌익폭도가 처음으로 쳐들어간 곳은 대성당 약방 주인 송대헌의 집이었다. 폭도들은 송씨와 그의 아버지를 끌어내더니 기름통을 가져와 2층 건물 현관에 석유를 붓기 시작했다. 불을 붙이려는 찰라 “야, 이놈들아!”하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송대헌의 아들 송재욱은 구미초등학교 음악선생으로 이 사건을 목격했다). 朴相熙였다.
“누가 이 집에 불 지르라카더노. 어느 놈이 시켰노. 앞으로 투쟁과업을 계속하다가 보면 부상자들도 나올낀데 약방을 태우면 느그들은 어데 가서 약 바를 거야.”
청년들은 호랑이 같은 박상희의 호통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벅였다.
“약방은 있어야 된다. 그 다음에 송재욱 선생은 학교에서 노래 가르치지 느그들한테 욕 가르치나. 이 할아부지(宋秉根 목사)는 독립 운동했는데 느그들한테 뭐 잘못한 거 있노. 그런데 왜 불질러. 집에 안 가나.”
박상희는 청년들이 흩어지자 멍하니 서 있는 송재욱을 향해서 야단을 쳤다.
“조사부 차장은 여기서 뭘 하노. 신분도 안 밝히고.”
송재욱은 광복 직후 박상희의 지도 하에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의 조사부 차장이었다.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10월 공산폭동 美化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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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13, 1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