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한 것은 1950년 5월이었다. 그해는 校舍 신축관계로 개강은 6월19일이었다. 개강한 지 일주일 만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온 세상이 5월의 하늘처럼 푸르고 넓고 태양처럼 찬란한 것만 같았던 내 앞에 전쟁, 특히 동족상잔의 전쟁은 이 세상에 지옥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울이 赤治에 놓인 3개월이 가고 9·28수복이 됐다. 동숭동 캠퍼스에 있던 미군 부대도 철수해서 학교에 가보았으나 강의는 언제 시작할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당시 학장이었던 孫晉泰 교수며 몇몇 교수가 납북되셨고, ‘도강파’(渡江波: 북의 침략을 피해 한강 이남으로 피난간 학생)들이 교수며 학생들의 성분(人民軍에 협조했는가의 여부)을 가려내느라고 설치는 등 혼란스런 분위기였다. 2학기의 강의는 한 시간도 못하고, 1·4후퇴를 맞았다.
부산 피란중 1951년 2월께 응급전시연합대학법이 만들어져 개강한다는 말이 들려 가보았더니, 남한 전체의 모든 대학의 학생 수백 명이 섞여 전매청 창고에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숨막히고 어지럽고, 교수의 음성도 들리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文理大가 따로 개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등록을 포기했다. 그 대문에 졸업이 1년 늦어진 셈이다.
내 동기나 선배 중에는 졸업이 5~6년 혹은 10년이나 밀려나간 학생도 있는데, 전쟁터에서 싸우느라고, 혹은 포로수용소에 갇혀있거나, 9·28 수복 후의 성분 심사에서 잘못 판단되어 한동안 복교하지 못했거나, 경제적으로 힘들었거나,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사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校史 기록에 보면 51년 2월19일 서울大 전체의 합동강의가 비상조치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는데 나는 그 당시 그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 때의 총장은 김두헌 박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꼼꼼하게 출석을 챙기던 교수들…
나는 부산 대신동 구덕산 기슭에 서울대의 국방색 텐트학교가 단독으로 시작할 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이 4월이라고 기억한다. 텐트가 산기슭에 흩어져 서 있었는데 그것이 강의실이다. 책상은 세로 약 20cm, 가로 1m70~80cm, 두께 3cm쯤 되는 얇은 판자고, 의자 역시 영화의 옛날 선술집 세트로나 볼 수 있는 책상과 똑같은 길이, 같은 두께의 판자였는데 학생들이 너댓 명이 끼어 앉았다.
간단히 말하면 여름에는 더워죽겠고, 겨울에는 추워 죽을 지경이었다 할까. 52년 가을 무렵 부산 항구의 무서운 바람이 몰아치면 텐트째 날아갈 것 같은 교사 대신 그 자리에 판자 교실이 세워졌으나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피란중이라 목숨만 부지하는 것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니, 교수며 학생들의 의복 같은 것은 대부분 형편없었다. 특히 남학생 중에는 밤새워 미군부대나 부두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도 많이 꾸벅꾸벅 조는 사람도 있었다.
꼼꼼하게 출석을 챙기시던 李熙昇 교수, 음성학의 명강의 김선기 교수, 손우성 교수의 ‘말라르메’ 原詩 강의도 잊을 수 없다. 낡은 선생님의 가방은 꿰매질 대로 꿰매져 있었다. 결코 값진 것이 아닌 구겨진 흰 반팔 남방이 바지 허리춤에서 빠져 나오는 것도 모르고 ‘바다의 미풍’, ‘권태’에 취하고 계셨다.
학생들도 시민의 오뇌에 함께 시달렸었다. 찌링하는 벨 소리에 우리는 경우 詩世界에서 풀려나왔었다.
여름 비가 쏟아내리는 어느 날 오후 시각. 동양사의 김상기 교수는 칠판 끝에서부터 끝까지 어려운 한자를 가득 쓰셨다. 학생들도 부리나케 베끼는데, 더위에 지친데다 졸리기는 왜 그렇게 졸린지. 수업은 한 강의가 1시간 20분이었는데, 선생님은 칠판을 메운 것을 지우시고, 또다시 칠판 맨 끝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하셨다. 5분이면 시간은 끝나는데… 뒤에서 어느 학생이 “그만 하지요”라고 했다. 그 말에 모두 살 것 같았다. 선생님은 아무 대꾸 없이 써내려가셨다.
그리고 뒤돌아보시며 “누구요? 문리대 학생이요?” 딱 한마디. 그 한마디에 잠이 후딱 달아났다. 창피하고 민망했다. 그 후 어느 시간에도 이런 제의는 없었다. 당연하다. 누군가는, 아니, 어떤 친구는 전쟁터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을 그런 시간이 아니었던가.
피란 중에는 국문 교재가 거의 없고 영·독·불어 원서가 교재고, 그것도 흔치 않아 대부분 복사한 것인데 상태가 흐려서 읽는 데 애먹었다. 지금 생각하니 전쟁 중의 향학열에도 감탄하나 당국의 조치에도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학문이 없는 국가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전시대학 출신자들이 6·25전쟁 후 국가 재건에 큰 몫을 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韓末淑 소설가)
(출처: 月刊朝鮮 2005년 1월호 별책부록)
피란 시절 향학의 불씨를 피운 戰時대학
- 韓末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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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19, 18: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