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학살을 '反개혁분자 숙청'이라 美化

금성 교과서의 북한군 비호, 국군 때리기.
대한민국의 지난 60年史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금성출판사의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는 6.25 때 있었던 학살에 대해서도 북한에 유리하게 적고 있다.
<전쟁 초 승리를 거둔 북한군은 점령 지역에서 토지개혁이나 노동법령의 개정과 같은 북한식 개혁을 하면서, 지주나 공무원 등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다>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을 숙청했다는 뜻이다. 개혁은 좋은 의미를 띤다. 즉 좋은 일을 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을 숙청했다는 것이다. '숙청'은 肅淸으로서 '엄하게 다스리어 잘못이나 그릇된 일을 치워 없앰'(금성교과서 국어사전)이란 뜻이다. '감행'이란 표현은 좋은 일을 용감하게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교과서는 결국 북한군에 의한 양민학살에 대해서 '북한군이 反개혁 분자들을 정리-응징한 좋은 일'로 기술한 셈이다. 실제로 학살은 북한군보다 남한내 좌익분자들에 의하여 더 많이 이뤄졌다. 이 교과서는 북한군의 학살을 숙청이라 미화하여 기술하고, 남한내 좌익에 의한 집단학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이 교과서는 국군에 대해선 어떻게 기술하나?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게 되자 반대로 북한군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잇따랐다>

북한군의 학살을 '숙청'이라고 미화한 이 교과서는 국군과 유엔군의 행동에 대해선 '처형'이라고 표현했다. 국군을 폄하하고 敵軍을 비호하고 있다. 구체적인 학살 건을 소개하는 대목에서도 이 교과서는 국군에 불리하게 기술했다. <남한에서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이 있었고, 경남 거창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후퇴하는 북한군도 대전 등지에서 많은 주민을 죽였다>고 하여 국군에 의한 처형에 대해서 더 자세히 길게 적었다. 학생들은 이 교과서를 읽고 남침 戰犯집단인 북한군에 대해서보다는 국군에 대해서 더 나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6.25 전쟁중에 있었던 민간인 학살의 1차적인 책임자는 전쟁을 일으킨 북한군과 이들에게 협조한 남한 좌익들이었다.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처형은 불행한 일이었으나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오자 좌익들이 들고 일어나 경찰과 군인가족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명부로 확인되는 수치에 의하면 북한군과 남한 좌익은 8만661명을 납치해갔고, 5만9964명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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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납북자 8만661명 피살자 5만9964명

月刊朝鮮 金成東 기자가 2002년에 찾아낸 문서가 있다. '大韓民國 政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6·25事變 被拉致者 名簿」. 이는 李承晩 정부가 서울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조사를 통해 拉北者(납북자) 명단을 작성했음을 보여 주는 문서다. 이 문서가 밝히고 있는 전국의 拉北者 명단은 8만661명이다. 남자가 7만9145명, 여자가 1516명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1만8330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1만5871명), 강원도(1만422명), 충청남도(9972명), 경상북도(7483명), 전라북도(7013명), 충청북도(6166명), 전라남도(3554명), 경상남도(1805명), 제주도(45명) 順이다.
납북자의 절반 이상이 서울, 경기, 강원 등 중부 이북 지역에 집중돼 있다. 全지역에서 납치된 남성의 숫자가 여성에 비해 월등히 많지만 가장 적은 인원이 납치된 제주지역만은 반대다. 총 45명의 被拉者(피납자) 가운데 여자가 30명으로 남자 15명의 두 배다.
이 「6·25 事變 被拉者 名簿」가 작성된 시기는 1952년 10월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1952년 10월에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발간한 「大韓民國統計年鑑」에는 6·25 사변중 被拉者를 8만2959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3년 발행한 「大韓民國統計年鑑」에는 拉北者 수를 8만4532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이 統計年鑑은 休戰 이후에 발간된 것이다. 被拉者 名簿의 拉北者 수가 1952년 발행 統計年鑑에 기록된 숫자에 비교적 근접해 있고 休戰 이후에 발행된 統計年監의 拉北者 수가 증가한 점을 감안하면 1952년께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정부가 인정하는 6·25 事變 납북자 수는 8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6·25 事變 被拉者名簿」는 현재 통계청 대전 청사內 「통계전시관」에 복사본이 전시돼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돼 있다. 2003년에 月刊朝鮮이 명부를 책으로 발간했다.


6·25 납북자 8만여 명 名簿(명부) 발견(月刊朝鮮 2002년 2월호)에 이어 6·25 전쟁 당시의 참상을 보여 주는 피살자 명단도 발견됐다. 6·25 피살자 名簿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李美一·이미일)가 납북자 名簿를 찾는 과정에서 함께 발견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이 名簿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번에 발견된 피살자 名簿는 국립중앙도서관, 정부기록보존소에도 동일한 문건이 소장돼 있으며 통계청도 피살자 名簿의 일부인 서울시와 경기도 지역의 피살자 명단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표지에 적힌 이 名簿의 정식 명칭은 「6·25 事變 被殺者 名簿」이며 작성 주체는 공보처 통계국으로 돼 있다. 작성일은 1952년 3월31일이다.
名簿는 성명, 성별, 연령,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 등 총 8개 항목으로 피살자들의 신원을 기록해 놓고 있다. 名簿는 피살자들을 크게 각 市道별로 구분한 다음 郡이나 區별로 세분화해 피해가 많은 姓氏 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凡例(범례)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軍警을 제외한 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만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었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만4008명, 여자가 1만5956명이었다.
여성 피살자 1만5956명 가운데 1만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靈光郡(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만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만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靈光郡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최근 발견된 6·25 사변 납북자 전국 명단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발견된 6·25 피살자 5만9964명의 명단이 실린 名簿 외에도 인원이 추가된 새로운 名簿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부친(李錫圭·이석규)이 전주형무소에서 인민군에 피살된 李哲承(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은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전주교도소 등에 문의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서류가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알 수 없었다』면서 『이렇게 아버님에 대한 한 줄의 기록이라도 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6·25 당시 전남 영광군의 피살자 2만1225명의 명단은 A4 용지 772장 분량이었다. 피살자 명단을 꺼내 훑어보았다. 명단을 입수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점이 보였다. 한 살, 두 살, 세 살… 아이들의 죽음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많았다. 대략 수를 세어 보았다. 열 살 이하 어린이가 영광군 전체 피살자 2만1225명의 12%에 달하는 2500여 명이었다.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 이 지역 여성들이라는 사실과 아이들의 죽음. 그것은 일가족이 학살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호남지역 향토사학자인 金井昊(김정호) 향토문화진흥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6·25 사변 당시 인민군이 후퇴할 때 미처 지리산으로 못 들어간 빨치산들이 영광 지역에 많이 모여서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컸습니다. 특히 九岫山(구수산·해발351m) 주변 백수면과 염산면에서 민간인 피살자가 많았습니다. 영광 지역의 또 다른 특성은 해방 후 사회주의 색채를 가진 인사들이 많았던 곳이라는 점입니다. 좌우 갈등이 심했던 곳이라는 뜻입니다. 좌익이나 우익 진영 모두 그로 인한 희생도 컸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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