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출판사刊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휴전을 지연시킨 포로 송환 문제'라는 제목으로 유엔군측이 반공포로를 돌려보내려 하지 않은 것이 지연의 이유인 것처럼 썼다. <제네바 협약은 '자동송환'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측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자유송환'을 주장하였다>고 쓴 이 교과서는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휴전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다>고 기술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냈다.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美 국부부 간부들은 이 前例를 되풀이해선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딘 에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트루먼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공산군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은 늦어졌고 트루먼 재임기간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人權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군은 1950년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난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이 또한 세계戰史에서 찾기 힘든 인류애의 發顯이었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몰래 석방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화를 냈으나 공산군측도 내심으론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李承晩 대통령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한미상호방위 조약과 국군현대화 계획 및 戰後 복구지원들을 약속한다. 이때 처음으로 李承晩이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트루먼, 스탈린, 毛澤東, 金日成, 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李 대통령이 막판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韓美동맹이란 국가번영의 울타리를 만들어낸다. 금성교과서는 반공포로 석방과 韓美상호방위조약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李 대통령이 무모한 행동을 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은 李承晩 대통령이 韓美동맹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던진 위대한 승부수였던 것이다.
수년 전 ‘毛澤東 秘話’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저자는 러시아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毛澤東이 金日成에게 휴전당시 불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이들을 비참한 운명에 넘겼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이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毛는 중공군 포로 2만1374명중 3분의 2가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에 대해서 한 셈이다. 두 저자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Problemyi Dalnego Vostoka. 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Alena Volokhova)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이 毛澤東 전기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중공군은 약40만 명이며 연300만 명이 참전했다고 했다. 공식발표로는 전사자가 15만2000명이지만 鄧小平이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실토한 숫자가 40만이란 것이다.
반공포로 송환 거부로 휴전 지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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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21, 11: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