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60년의 가장 큰 奇蹟은 38선

미국이 38선을 美蘇軍의 점령경계선으로 제의했을 때 소련이 거부하고 부산까지 내려갔더라면?
대한민국 60년은 奇蹟과 逆轉의 드라마였다. 그 기적중 가장 큰 기적은 38선이다. 아래 조은뉴스 사이트에 올라 있던 글을 소개한다.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트루먼 회고록)의 444∼5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어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38선을 그을)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일을 양국이 분담한다는 편의성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말을 보충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는데,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천km 남쪽 멀리 오끼나와에 있었고, 또 미군은 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한편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신속히 군대를 진입시킬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 나진, 웅기, 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다. 이런 속도라면 불과 2, 3주 사이에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러 38선을 그어 거기까지만 소련군이 내려오도록 결정하여 소련측에 통고했고,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왜 하필 38선인가에 대해서는 38선을 그은 당사자인 당시 미국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 소속 딘 러스크(Dean Rusk) 육군중령 (후에 케네디, 존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 역임)의 말을 들어보자. 1990년에 출판한 그의 회고록 'As I Saw It' (내가 본대로) 124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국무부와 국방부는 의견이 달랐다. 국무부는 중국 본토의 가능한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장래를 염려하여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합의했다.

일본이 항복한 바로 그 날인 (미국 동부시각) 8월14일(주: 11일의 착각) 늦은 밤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국무부, 국방부, 해군이 합동회의를 하고 있던 회의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반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내셔널 지오그랩휙' 잡지사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위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스윙크(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 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소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38도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러스크의 이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한 한반도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했다는 것도 알수 있다. 만일 군부의 고집대로 미군이 한반도 진출을 아예 포기했다면 한반도 분단은 없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김정일 독재 밑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38선이 그어지고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 38도선 이남에 병력을 상륙시킨 미국은 한반도에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소련의 비협조 때문에 38선이 서서히 남북한의 정치적 경계선으로 굳어버리게 된다.>

스탈린이 미국이 제의한 38선에 동의하지 않고 부산까지 소련군을 남하시켜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겠다고 해도 미국은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이 즉시 미국 제의를 받은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스탈린은 만주를 점령하고, 일본의 북방열도를 차지하고, 일본의 분할점령에 미국과 함께 참여하려 했다. 러일전쟁에 승리하여 러시아에 재앙을 안겨주었던 일본을 無力化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스탈린은 일본의 처리에 대하여 미국의 협조를 얻으려면 한반도에선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련군은 이미 북한지역을 점령하여 염원이던 不凍港도 확보한 상태였다.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소련과 영국은 한반도를 신탁통치한 후에 독립시키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어차피 한반도를 소련 영향권 아래 둘 수 있다고 낙관했을 수도 있다.

38선이 한반도를 분단시켰다기 보다는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다고 봐야 한다. 38선에 의한 分斷 책임을 미국에 떠넘기려는 것이 좌익들의 고전적 숫법이다. 이들은 미국이 38선을 제의하지 말고 한반도를 소련군 점령지역으로 포기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한반도가 공산체제로 통일되었어야 하는데 미국이 38선을 제의하여 南韓을 자유의 보루로 확보한 점에 대해서 反感이 많은 것이다.

미국은 38선을 편의상의 군사분계선으로 여기고 한반도에 민주적 통일국가가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해방 두 달 뒤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38선을 禁斷의 출입금지선으로 설정하여 남북한을 물리적으로 분단시켜버렸다. 分斷은 38선을 그었을 때 결정된 것이 아니라 소련이 38선을 일종의 국경선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분단의 책임은 전적으로 소련과 김일성 집단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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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조은뉴스

미국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난리인가

비밀 해제된 소련극비문서, 미 당사자 회고록을 보니...



[미국 = e조은뉴스]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둘러싼 분쟁이 격렬해 지고 있다. 철거를 주장하는 한총련 등 과격 단체들은―진보 단체라는 명칭은 부적절― 6.25 전쟁은 미국 때문에 일어났으며 미국 때문에 우리 나라가 아직도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미제국주의 상징'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려 하고 있다.

필자는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6.25전쟁 전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절대로 그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1991년 소련이 붕괴된 후 비밀이 해제된 소련 정부 비밀문서 하나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문서는 1966년 월남 전쟁 초기에 베트콩을 지원할 것인가 여부를 논의하던 소련 지도부가 참고 자료로 보기 위해 한국전쟁 전말서를 작성해 올리라고 소련 외무부에 지시하여 마련된 것인데, 미국의 한국현대사 전문가 캐스린 웨더스비 교수(전 훌로리다 주립대 교수, 현 우드로우 윌슨 국제 학술센터 선임 연구원)가 1993년 모스크바에 직접 가서 러시아어로부터 영어로 번역한 것이며, 여기 소개하는 부분은 6.25전쟁이 김일성 단독으로 일으킨 내전(內戰)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소련, 중국, 북한 3개국이 공모하여 일으킨 국제전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한글 번역은 필자가 함)

소련 외무성 극비문서
(1966년 8월 작성)
브레즈네프 당총서기, 코시긴 수상 등에 복사본 발송

한국전쟁과 휴전협상에 관한 보고서

(앞 부분 생락)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남한 정권은 각각 자기네가 한반도 전체의 정부라고 주장했다. 1948년 전후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38도선에서의 남북 관계는 더욱 긴장되었다. 이 때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지도부는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남한에서 광범위한 민주화 운동을 통해 한반도를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인민군대가 창설되었는데 병력 면에서나 장비 면에서 남한의 군대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1950년 1월(전쟁 5개월 전) 현재 북한의 총병력은 11만이었으며, 추가 사단들이 계속 급조되고 있었다.
미국이 남한을 위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김일성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는데 동의해 달라고 (소련 수상) 스탈린과 (중국 주석) 마오쩌둥(모택동)에게 끈질기게 졸라댔다.<1950년 비밀전문 번호 4-51, 233>

스탈린은 '그러한 큰 일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끈질긴 호소를 처음엔 소극적으로 취급했지만, 스탈린도 한반도 무력 통일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북한의 무력통일 계획에 스탈린이 최종적으로 동의한 것은 김일성이 1950년 3월 하순에서 4월초에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했을 때였다. 김일성은 그해 5월 베이징으로 가서 마오쩌둥의 지지 약속도 받아냈다.

북한 정권은 다음과 같은 3단계 목표 달성 계획을 세웠다.

(1) 병력을 38선 가까이 집중 배치한다.
(2) 남한 정권에게 평화적으로 통일하자고 촉구한다.
(3) 남한 정권이 평화통일 제의를 거부한 뒤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실제로 이 계획대로 진행되었음―역자 주)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북한군 추가 사단 조직을 위해 필요한 무기와 장비는 북한에 신속히 보내졌다. 중국 지도부도 중공군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로 구성된 병력 1개 사단을 북한에 파견하고 식량 원조도 약속했다. 중국은 또 '일본이 남한을 위해 전쟁에 개입할 경우에 대비하여' 중공군 1개 군단을 한반도에 더 가까이 배치하겠다고 약속했다. <1950년 비밀전문 번호 362> (미국이 아니라 일본의 개입을 중국이 예상한 것이 이채롭다―역자 주)

1950년 5월말 현재 북한군의 38선 집중 배치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북한군부와 소련 군사고문단이 보고했다. 김일성의 고집대로 군사행동 개시 시점은 1950년 6월25일로 잡았다. <1950년 비밀전문 번호 408>

공격 개시 당시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보다 월등히 우세했다.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군인 1 : 2 (앞이 남한, 뒤가 북한)
대포 1 : 2
기관총 1 : 7
경기관총 1 : 13
탱크 1 : 6.5
항공기 1 : 6

인민군 작전 계획에 의하면 인민군은 하루에 15 내지 20km 남진하며, 대체적인 전체 군사작전은 22일 내지 27일 안에 끝내는 것으로 예상했다. <1950년 비밀전문 번호 468>


이 문서를 통해서 우리는 6.25전쟁이 북한 단독으로 시작한 내전(집안싸움)이 아니라 김일성이 먼저 아이디어를 내고,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 수상 스탈린의 허락과 원조, 그리고 중국 주석 마오쩌둥(모택동)의 협조를 받고 일으킨 국제적 전쟁임을 알수 있다.





이번엔 1945년 38선이 그어지게 된 경위를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트루먼 회고록)의 444∼5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38선을 그을)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일을 양국이 분담한다는 편의성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말을 보충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는데,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천km 남쪽 멀리 오끼나와에 있었고, 또 미군은 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한편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신속히 군대를 진입시킬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 나진, 웅기, 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다. 이런 속도라면 불과 2, 3주 사이에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러 38선을 그어 거기까지만 소련군이 내려오도록 결정하여 소련측에 통고했고,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왜 하필 38선인가에 대해서는 38선을 그은 당사자인 당시 미국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 소속 딘 러스크(Dean Rusk) 육군중령 (후에 케네디, 존슨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 역임)의 말을 들어보자. 1990년에 출판한 그의 회고록 'As I Saw It' (내가 본대로) 124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국무부와 국방부는 의견이 달랐다. 국무부는 중국 본토의 가능한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장래를 염려하여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합의했다.

일본이 항복한 바로 그 날인 (미국 동부시각) 8월14일 늦은 밤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국무부, 국방부, 해군이 합동회의를 하고 있던 회의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반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내셔널 지오그랩휙' 잡지사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위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스윙크(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 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소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38도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러스크의 이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한 한반도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했다는 것도 알수 있다. 만일 군부의 고집대로 미군이 한반도 진출을 아예 포기했다면 한반도 분단은 없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김정일 독재 밑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38선이 그어지고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 38도선 이남에 병력을 상륙시킨 미국은 한반도에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소련의 비협조 때문에 38선이 서서히 남북한의 정치적 경계선으로 굳어버리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국무장관 James Byrnes는 회고록 'Speaking Frankly'('솔직히 말하면') 222∼3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사적 편의를 위해 그어진 선이 소련과 미국의 점령지역 경계선으로 굳어져버렸다. 그래서 우리 대표단은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통화, 상거래, 교통, 전신, 전력배분, 연안 항해 등의 행정상의 문제를 단일화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였다. 우리 대표단은 또 조선인들이 효과적인 독립 대의(代議)정부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기간 동안만 존속될 (미국, 영국, 국민당 정부의 중국, 소련) 4개국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신탁'은 조선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외세의 지배를 연장하는 것이고, 또 오랫동안 갈구해온 독립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안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조선인들의 민주적인 임시정부와 같이 일을 하다보면 신탁통치는 없어도 되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반도가 국제사회에서 자주적인 회원국이 되는 날을 앞당기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불행히도 이러한 우리의 희망은 그 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1946년 1월 회의를 열었으나 우리에게는 분명한 의미로 전달되는 것들이 또다시 소련에게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한반도가 경제적으로나 행정상으로 단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점령군) 사령관은 완전히 분리된 두 점령지역 상호간의 교환과 조정의 문제로 간주하였다. 1년 6개월이 지난 오늘 현재, 남북은 여전히 분리된 지역으로 남아있고, 임시정부 수립 노력은 또한 매우 실망적인 진척을 이루었을 뿐이다.

소련대표는 신탁통치안을 반대하지 않은 (조선인) 정당들만 임시정부 구성에 관여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조선인들은 신탁통치안을 반대했었다. 언론 자유의 원칙에 따라 (신탁통치안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는 이유로 (임정 구성에) 관여를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주장했다. (임정 구성을 위한 회의에) 모든 정당 대표들을 참여시키자고 우리가 고집하자 미·소 공동위는 1946년 5월 교착상태에 빠진채 산회되었다.....

소련 점령지역(북한)에서는 10만 내지 40만명으로 추산되는 조선군대를 소련 군대가 훈련시켰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해체되고, 미·소 양국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소련이 훈련시킨 이 군대가 한반도에 남는 유일한 군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정부가 한반도에 들어서든 간에 이 군대가 그 정부를 좌지우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소 공동위원회가 해체되기 전에 먼저 이 군대가 해체되어야 한다. 한반도에는 소련이 훈련시킨 군대도, 미국이 훈련시킨 군대도 필요하지 않다.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경제 원조이다....소련 점령군 사령관은 북한의 비료를 남한으로 수송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므로 남한의 피폐한 농지에 생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남한은 당장 외국에서 비료를 수입해야하는 실정이다. 한반도의 생산 공장들은 재건되어야 한다. 석탄과 원료도 필요하고 기계 부품도 필요하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2, 3년 더 존속하고 우리 미국인들이 경제 원조 행정을 담당한다면, 미국은 한반도의 공장 재가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원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세우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38선 이북을 자기네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이었던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북한에 조선민주당(조만식)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김일성)의 연정을 세웠으나 조만식 선생이 강대국 신탁통치를 결사반대하자 그를 호텔에 연금시키고 신탁통치에 찬성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만들어주었다. 소련은 이때 이미 동유럽 여러나라도 자기네 위성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결론> 비밀이 해제된 소련 극비문서와 미국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미국은 우리를 세번 구해주었다. 1945년 일본의 35년 식민통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었고, 같은 해 38선을 그어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결과적으로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아주었으며, 1950년에는 소련, 중국, 북한이 합작하여 일으킨 6.25전쟁에 신속히 개입하여 남한마저 김일성-김정일 세습독재 밑으로 들어가지 않게 해주었다. 필자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서 잠시 김일성 치하(治下)에서 살아보았지만, 지금 그의 아들 김정일 밑에서 살고 있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되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국대 강정구 교수 같은 사람들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역사 지식을 주입하여 미국을 반대하는 것만이 통일의 길인 것처럼 선동하고 있다. 필자는 강교수가 쓴 글을 보고 그의 역사 지식 부족에 정말 놀랬다. 그는 지금은 한물 간 브루스 카밍즈 같은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오래 전에 쓴 책 몇 권 읽고 '이것이 진짜 한국 현대사로구나!'하고 감탄했을 사람처럼 보인다. 카밍즈는 이미 1995년 캐스린 웨더스비와 한국전쟁 기원에 대해 지상(紙上) 대설전을 벌이고 판정패한, 미국 역사학계에선 한물간 인물이다.

역사를 잘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또 있다. 듣자하니 일부 영화인들이 미국을 우리 민족의 원수로 묘사한 영화를 만들어 돈벌이를 하고 있다 한다. 필자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본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영화가 만들어져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9월 11일 인천 자유공원에 몰려들어 맥아더 동상 철거를 주장한 사람들도 '미군 철수' 플래카드를 들고 그런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미군 철수? 그래 좋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하자는 건가? 그것이 알고 싶다. 미군이 철수하면 김정일이 그 좋은 독재 권력 포기하고 당장 남북한 총선거 실시해서 통일하자고 나오기라도 할것 같은가? 아니면, 남한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포기하고 김정일 밑으로 들어가자는 얘긴가?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연방제? 북쪽은 지도자가 죽기 전에는 정권을 바꿀수 없는 사실상 절대군주제이고, 남쪽은 5년에 한번씩 국민들이 지도자를 투표로 뽑는 민주체제인데, 연방제 해서 서로 내정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김정일 세습독재체제만 영구보장해주는 결과밖에 안되지 않나?

만일 연방제도 아니라면, 무얼 어떻게 하자는 건가? 무슨 구체적인 대안을 가지고 미군 철수를 주장해야 할 것 아닌가? 아무 대안도, 계획도 없이 막연한 민족주의적 감상(感傷)에 사로잡혀 맥아더 동상 때려부수자고 하고, 무조건 미군만 나가라고 하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자는건가? 반미하는 것을 애국적 통일 운동하는것과 동일시하는 분들, 제발 역사 공부 더 하시기 바란다. 국내에서 손쉽게 구할수 있는 김학준 박사(전 서울대 교수)의 '북한 50년사'를 권한다. 책 읽기 싫으면 이 책을 만화로 만든 '아! 북조선'도 좋다.

기사원문 읽기>> http://www.e-goodnews.co.kr/sub_read.html?uid=31911§ion=section3
59.23.101.221


[ 2005-09-17, 22:01 ] 조회수 : 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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