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 逆轉의 드라마(2)

대한민국 略史
대한민국의 지난 세월을 정리해본다. 한 마디로 奇蹟(기적)과 逆轉(역전)드라마의 역사였다. 한국은 여러 번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벼랑에 섰다. 그때마다 한국인들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통하여 상황을 反轉(반전)시켰다. 위기극복 수준이 아니라 轉禍爲福(전화위복) 차원의 뒤집기였다. 한국은 지금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냉 온탕 오가듯 한다. 이 젊은 稚氣(치기)가 한국 현대사를 전진시킨 力動性(역동성)이었다. 물론 運(운)도 따랐다.

1. 가장 큰 기적은 38선: 아시아에 두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중국이 공산화된 것이 기적이고, 둘째는 한국이 공산화 안 된 것이 기적이란다.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38선이다. 1945년 8월10일 오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국방부 정책과의 두 장교 딘 러스크(뒤에 국무장관)와 찰스 본스틸(뒤에 주한미군 사령관)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의 한반도 지도에서 가운데를 지나는 38선을 골랐다.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가 국방부에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멀리 있고, 병력도 부족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異義(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異義(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그때 소련군은 북한의 동해안에 상륙하여 破竹之勢(파죽지세)로 南進(남진)하고 있었다. 38선의 북쪽에선 소련군이, 그 남쪽에선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자는 미국의 제의를 스탈린이 선뜻 받아들였다. 그가 만약 '소련군이 1주일이면 부산까지 내려갈 수 있다. 한반도내 일본군은 우리가 처리하겠다'고 반대했더라면 미국으로선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했더라면 38선은 물론 없었겠지만 우리는 지금 김정일 치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스탈린은 그때 만주를 점령하고 일본의 북방열도를 차지한 뒤 미국과 함께 일본의 분할 점령에 참여하려는 목적달성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한반도에서 미국의 제안을 반대하지 않았다. 트루먼의 말대로 당시 미군도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일을 兩國(양국)이 분담한다는 편의성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美蘇(미소)가 관심을 딴 데 쏟고 있는 사이에 한반도에 기묘한 균형線이 생긴 셈이다.

2. 李承晩이란 기적: 실용적인 중국이 공산화된 것은 毛澤東(모택동)의 군사적 천재성 때문이고, 관념적인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李承晩(이승만)의 위대한 지도력 덕분이다.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제1극동군 사령관에게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지역에서 우선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의하여 이듬해 북한지역엔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괴뢰정권이 세워져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토지의 국유화를 통하여 소련은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미군정하의 남한과는 전혀 다른 체제를 북한에 세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남북분단의 시작이다. 한반도 분단의 의미는 이념과 체제가 달라진 것인데, 북한이 먼저 체제를 달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朴憲永(박헌영)과 金日成(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시험문제를 내어 金日成을 북한정권의 지도자로 지명했다. 미군과 소련군 사이의 군사 경계선에 불과했던 38선은 소련군에 의하여 출입금지의 分斷線(분단선)으로 돌변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세워보려고 애썼다. 李承晩(이승만)은 소련에 의하여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화되었으므로 남한에서라도 民主(민주)기지를 구축하여 후일을 기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建國(건국) 노선은 美군정 당국, 좌익, 중도파에 의하여 공격받았으나 세계사의 흐름을 정확하게 내다 본 비전이었다. 1947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이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확대 정책을 펴고 있다고 판단하여 對蘇(대소) 포위 정책을 채택한다. 미국과 유엔도 결국 협상에 의한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李承晩 노선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李承晩은 1948년 3.1절 기념사를 통해서 건국의 당위성을 이렇게 설파했다.
'선거를 통해서 수립된 국회에서 세우는 정부는 통일중앙 독립정부로서 완전무결한 國權(국권)을 세우는 것이니 단독정부란 말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 한 편이 죽어가는 경우에는 살아 있는 편이라도 완전히 살려서 죽는 편을 살리기를 꾀할 것인데, 다른 방책이 없이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면 살아 있는 편까지 마저 죽어버리자는 것으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소련은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이란 유엔 결의까지 거부함으로써 한반도 분단의 책임자가 되었다.

3. 南侵 직전 농지개혁: 건국을 위한 남한의 총선거(1950년 5월10일)엔 공산세력의 폭동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95%가 투표에 참여하여 制憲국회를 구성했다. 이 국회가 수준 높은 토론을 거쳐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을 만들고 이 헌법에 따라 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 정부를 구성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合法(합법)국가라는 정통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한국인의 저력에 대하여 확신을 가졌던 최초의 대중정치인이 李承晩이었다. '세계정세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꿰뚫어본'(무초 미국 대사의 평) 그가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하는 민족사 최초의 국민국가를 세웠을 때 생존의 전망은 밝지 못했다. 미국은 한국이 死守(사수)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땅이라고 판단하여 1949년에 미군을 철수시켰다. 한국내엔 강력한 좌익세력이 군대, 국회, 지식인 사회, 그리고 산악지방에 포진하여 폭동, 반란, 사보타지 등 利敵(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다. 제주폭동, 여순14연대 반란사건, 국회내 프락치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좌익의원들은 남아 있던 미군 고문단(500명)까지 몰아내려는 운동을 벌였다. 李 대통령은 미국에 군사장비 지원을 요청했으나 사실상 거절당했다.
국제환경은 더 불리해져갔다.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核독점이 4년만에 끝났다. 毛澤東이 蔣介石(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차지했다. 한 차례 김일성의 南侵(남침) 건의를 거절했던 스탈린은 상황이 달라진 1950년 초 드디어 南侵을 허가하고 毛澤東의 보증을 받도록 했다.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을 때 李承晩은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공산주의자였던 曺奉岩(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남북한의 좌익들과 한민당의 반대를 꺾고 초법적으로 실시한 농지개혁으로 약92%의 농민들이 農地(농지)를 갖게 되었다. 地主계급이 사라지고 산업혁명의 길이 열렸다. 6.25가 터지자 이 自作農民들은 자신의 농토를 지키기 위해서도 공산군에 저항하게 되었다. 농지개혁은 <한민당과 김일성의 의표를 찌른 기막힌 병살타였고, 김일성이 노린 인민혁명에 반격의 펀치를 날린 멋진 한반 승부였다>(金聖昊).

4. 트루먼의 결단: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압도적 병력과 장비로 38선 전역에서 기습남침을 시작했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의 집에서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전화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그 자식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결단을 내리는 데 30초가 걸렸다고 한다. 한국인이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한 외국인의 결단에 의하여 구출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미국은 한국에 군대를 보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안 보낼 이유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군부가 한국을 지킬 가치가 없는 땅이라고 규정했었다.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않았지만 트루먼은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한국에서 공산군의 침략을 허용하는 것은, 연합국이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체코 침략을 허용한 결과 2차 세계대전을 부른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의 참전 결정으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워싱턴의 한국전 기념물 銘文) 약5만4000명의 미군이 죽고 약10만 명이 다쳤다. 6.25 남침은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던 대한민국을 확실하게 파멸로 몰고 가는 듯 보였으나 '재앙으로 위장된 축복'임이 드러난다. 남침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1950년대 말쯤 월남식으로 赤化(적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남침이 없었더라면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의 비공식 문관으로 延命하던 朴正熙 전 소령은 장교로 복직하지 못하고 불평분자로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5. 자유의 기적: 기습당한 국군은 후퇴는 했으나 부대 단위의 항복은 없었다. 국군이 서울방어전에서 사흘을 버티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사흘을 허송한 것은 김일성에게 치명적이었다. 急所(급소)를 맞고도 국군이 인천상륙 작전 이후의 북한군처럼 붕괴되지 않은 것은 자유를 맛보아 자유의 소중함을 안 군대인데다가 미군의 참전 약속이 있었던 덕분이다. 6.25 전쟁중 기적적인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미군은 중공군에 쫒기면서도 흥남철수 작전 때 피란민 10만 명을 태우고 남하했다. 후퇴중인 군대가 이렇게 민간인, 그것도 외국인을 구조한 것은 세계전쟁 사상 처음일 것이다. 미국은 반공포로들을 북한과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처형당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자유의지에 의한 송환’을 고집했다. 이 거룩한 인도주의 원칙에 의하여 전쟁은 2년을 더 끌었고, 포로 숫자보다 더 많은 人命(인명) 손실이 있었다. 李承晩 대통령은 戰時(전시)임에도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고, 언론을 검열하지 않았다. 전쟁중에 신문이 我軍(아군)에 의한 학살사건(거창사건)을 폭로하여 장관들을 몰아낸 예는 민주주의 선진국 영국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주의의 나이가 다섯 살도 되지 않은 대한민국이 戰時에도 사상최대 규모의 지방선거를 실시했다. 임시수도 부산에선 야당과 육군 지휘부가 미국의 방조 하에서 전쟁 지도자 李承晩을 대통령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가 실패했다. 전쟁중 통화개혁을 할 때 李承晩 대통령은 사유재산권의 존중을 강조하면서 일정 액수 이상 예금의 凍結(동결)에 반대했다. 전쟁은 젓 비린내 나는 한국의 어린 민주주의를 말살한 것이 아니라 단련시켰다. 전쟁이 민주주의를 키우고, 근대화의 主力이 될 국군을 길러냈다.

6. 韓美동맹: 19세기말에 韓美동맹이 있었더라면 한일합병은 없었고, 1949년에 韓美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더라면 6.25 남침은 없었을 것이다. 1952년 여름 부산정치파동 때 야당과 미국이 합세하여 李承晩을 실각시켰더라면 1953년 6월의 반공포로 석방도 없었고, 따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한반도에서 휴전하고 발을 빼려는 미국의 멱살을 잡은 李承晩은 처절한 벼랑 끝 도박으로 韓美(한미)동맹을 쟁취하여 자유와 번영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60년의 기적적 발전엔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 韓美동맹, 위대한 지도자, 유능한 국민. 李承晩 대통령에 의한 농지개혁, 교육확충, 민주주의 실험, 韓美동맹 결성은 朴正熙에 의한 근대화를 가능하게 한 토대였다.

7. 國軍이란 기적: 李承晩은 建國 및 建軍의 지도자였다. 그 어떤 군인보다도 뛰어난 대전략의 안목을 가졌던 그는 6.25를 기회로 삼아 미군의 힘을 빌어 세계적 强軍을 건설했다. 70만 군대의 장교단은 개방적이고 개혁적이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났을 때 6만 장교중 약10%가 해외유학 경험자였다. 이 비율은 외교관들의 유학비율보다 더 높았다. 천국 같은 미국에서 지옥 같은 조국을 바라보면서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던 청년장교단이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것은 12세기 武臣亂(무신란) 이후 800년만에 처음 있는 군사정권의 등장이었다. 강력하고 선진된 국군의 조직적 효율성이 5.16에 의하여 국가 전체의 효율성으로 확대되면서 성장과 건설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런 군대를 만든 것도 6.25 사변이었으니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결국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장미꽃이었다. 한 영국 기자가 6.25 전쟁중에 했다는 말,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려는 것과 같다”는 저주는 전쟁의 속성과 한국인의 저력을 오판한, 그러나 한 세대만에 적중한 예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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