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 하우스(舊돌담집)의 유래
글 : 부경대학교 사학과 이승영 교수
대연캠퍼스 종합강의동의 동편 소나무 밭에는 돌담집(일명 워커기념관)이 한 채 있었다. 그 건물의 넓이는 약 100평 정도로 지붕이 나지막하고, 돌벽의 직경의 1척은 좋게 되었다. 필자는 돌담 집에 들를 때마다 천정이 머리를 누르고, 벽이 몸을 죄는 듯한 가벼운 구속감을 느끼곤 했다. 그 집은 이를테면 지상(地上)의 벙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집이었다. 어떤 내객들은 특이한 건축양식 때문에 그 유래를 묻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이 집이 언제 준공되었는지 그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대학 당국은 50년 7월20일 제 103 미군 야전병원에 교사(校舍)를 비워줘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 이집이 세워진 것만은 분명하다. 전하는 말로는 돌담집은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Walton H. Walker)과 그의 참모들의 숙사(塾舍)로 쓰였다고 한다. 야전 병원이 철수한 후에는 민사원조처(CAC)와 스웨덴 병원이 차례로 교사(校舍)를 차지하였다. 대학 당국이 교사와 캠퍼스를 완전히 돌려받은 것은 57년 9월25일이었다. 그 후에 돌담집은 교수, 학생 식당으로 전용(轉用)되었다. 81년 5월에는 식당이 지금의 학생회관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는 해양문학회와 씨사운드(Sea Sound) 그룹이 차지하였다. 그런데 90년 여름에 큰 화재가 일어나 돌담집은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그 원상(原狀)이 망가진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1995년에 이르러 장선덕 총장은 돌담집의 복구계획을 세웠다. 이 역사적 건물을 복원하여 워커 장군의 유물을 전시하고, 인근의 유엔묘지를 찾는 방문객들을 유치하여 대학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려고 했다. 필자와 이원균 교수가 돌담집의 내력을 밝히는 일을 떠맡게 되었다. 할 일 없이 관련 자료를 찾아서 육군 전사 편찬실과 미 8군 전사과(戰史課)등을 순방하였다. 당시의 8군 전사관 루쏘 소령은 기념관 건립에 아주 호의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나중에 미 국방성 및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의 소장 자료를 보내오기도 했다. 95년 9월29일 마침내 지금의 돌담집이 준공 되었다. 전시관 준비도 순조롭게 착착 진척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거센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이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돌담 집은 한국전쟁 및 워커 8군사령관과 사연이 있는 건물이었다. 먼저 그 건립 배경을 살펴보자.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포문을 열고 남침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승승장구(乘勝長驅)로 남진하여 7월 말에는 마침내 낙동강 강변에 포진하였다. 워커 장군은 포항부근의 해안을 북쪽 경계선으로, 진주, 마산 지역을 남쪽 경계선으로 하는 방어선을 그었다. 그리고 모든 전선의 韓美군에게 8월1일까지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제 아군은 적군의 어떠한 압력을 받는다 하더라도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8월 첫째 주에 미 해병 제 1사단이 작전을 개시하여 마침내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전선은 그때부터 8월 말까지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김일성은 8월을 ‘완전 승리의 달’로 선포하고, 조국통일을 달성하라는 성화같은 독전령(督戰令)을 내렸다. 8월 말 인민군은 대공세를 펼쳐서 2주 동안 한 미 연합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인민군 3개 대대가 중앙지구에서 낙동강을 건넜으며, 포항과 진주를 점령하였다. 9월 초에 인민군이 다시 경주, 마산, 대구를 위협하였으므로 부산 방어권(Pusan Perimeter)은 거의 무너질 듯한 아슬아슬한 고비를 맞았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9월4일 8군 참모들은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데이비드슨 라인(Davidson Line)으로 후퇴하자는 논의까지 벌였으나, 그날 밤 워커 장군은 철수계획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9월 6일에 8군 사령부만을 대구에서 부산수산대학으로 이동하였다. 그 이유는 텔레타이프 통신자비를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만일 그것이 파손되거나 敵軍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극동지역에서는 그러한 장비를 당장 구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9월 9일 김일성은 전쟁이 “아주 치열하고 결정적인 단계”에 도달했으며, 적을 3개 전선에서 몰아붙이고 있다고 호언하였다. 미국의 전사가(戰史家) 애플만은 9월 중순 “한국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한 2주간의 전투를 치른 후 (미군은) 북한의 대공세를 근근이 물리쳤다”고 썼다. 9월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 작전은 지금까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이튿날 워커의 병사들은 부산 방어권을 돌파하여, 인천에 상륙한 군대와의 연계를 위한 경쟁을 시작하였다.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은 허둥지둥 북쪽으로 달아났다. 9월24일 전세(戰勢)의 전환에 따라서 미 8군사령부도 부산에서 대구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8군 사령부가 부산 수산대학에 머물렀던 기간은 겨우 18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워커 장군이 과연 이곳에 얼마 동안이나 머물렀던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마 한나절을 넘기지 못 했을 것이다. 이 기간에 낙동강 방어선은 가장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싸움터를 떠날 겨를이 있을 리 없었을 것이다. 워커는 기본적인 낙동강 방어 전략을 ‘기동방어(Mobile Defense)에 두고 있었다. 즉 취약한 방어선에 예비 병력이나 인근 부대의 병력을 차출하여 긴급투입 함으로써 병력의 열세(劣勢)를 커버하는 작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커가 늘 일선을 자주 방문 하였던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한 가지는 ’정확한 현황 파악‘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이었다. 즉 육군장성을 목격하면 사태가 악화될 수 없다고 병사들이 판단 할 것이라고 워커는 말하였다. 그가 일선에 늘 나타난 결과로 정보참모를 포함한 그 어느 누구보다도 그의 방어권에 대하여 워커는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최격전지에는 어김없이 나타나서 “맹렬한 총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부대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던 것이다”. 그가 받은 세 개의 은성무공훈장 사유서에도 그의 지두지휘와 탁월한 기동작전이 언급되고 있다 워커가 야전 지프차를 몰면서 낙동강 전선을 미친 듯이 누비고 다녔던 사실은 인구에 회자되는 일화이다.
2차 대전 시 미 3군 사령관이었던 패튼(Patton)장군은 그에게 “더럽게 잘 싸우는 녀석”이라는 애정 어린 칭찬을 보냈으며 “미 육군의 어느 장군보다도 워커를 더 높이 평가하였다.” 「잊혀진 영웅, 월튼 워커」에는 그의 프로필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맨 처음 믿을 수도 없고 , 서글프기도 했으며, 아주 인기도 없었던 몇 달간의 전쟁에서 한국을 구했던 것은 그의 개인적 능력, 끈덕진 에너지, 지칠 줄 모르던 고집이었다. 워커가 그의 뚜렷한 통솔력이 없었더라면 미 합중국은 한반도를 떠났을 것이다.”
워커장군은 50년 12월23일 24사단에 복무중인 25세의 대위인 아들 쌤 심스(Sam Sims)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달아주려고 식장으로 가는 도중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 사흘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그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맥아더 원수는 그의 대장 승진을 며칠 전에 상신 해놓은 상황이었다. 제 1차 대전 때는 대대장으로 프랑스 전선에서, 제 2차 대전 때는 군단장으로서 프랑스, 도이치, 오스트리아 전선에서 민첩한 작전과 용맹으로써 명성을 떨쳤던 그가 사고사(事故死)로 42년간의 군대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은 역사적 아이러니이었다.
서울 워커 힐 호텔에서 워커의 무공을 기리는 기념기가 제막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기념사를 낭독하였다.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그의 고상한 평화애호 정신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한 군인으로서 그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우리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번영은 달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釜慶大學 내 워커 하우스 이야기
- 이승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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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2-08, 1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