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穗根의 그늘에서 스려져간 裵慶玉의 인생逆轉

검찰 상고 포기, 無罪 확정. 그렇다고 죽은 李穗根이 살아나는 것도, 人生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낸 裵慶玉의 삶이 복원되는 것도 아니다.
<1989년 12월22일. 크리스마스가 사흘 앞으로 다가온 그날 새벽. 견고하고 육중해 보이던 안동교도소의 철제문이 「철커덕」 하며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날은 아직 어두웠고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그때 작고 아담한 체구의 사내 하나가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교도소 건물에 시선을 한번 준 후 천천히 문을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코 끝을 훑고 지나갔다. 교도소 안이나 밖이나 체감 온도는 같았다. 21년 만에 마주한 세상이건만 사내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무기수에서 20년 刑으로 감형되어 나오는 길인데도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사내의 이름은 裵慶玉(배경옥). 출소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21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볼품없는 보따리가 그의 한 손에 들려 있었다.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한쪽 어깨가 심하게 기운 이 사내는 1969년 위장 간첩으로 단정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李穗根(이수근)의 姨姪(이질: 아내의 조카)이었다.

그해 李씨와 함께 체포되어 무기형을 선고받고 복역해 온 그의 죄목은 제3국으로 탈출하려는 李씨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죄였다. 그런 그에게 중앙정보부(이하 中情)는 간첩 혐의를 씌웠고,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인 30, 40代를 어둡고 차가운 교도소에 감금시켰다. 친구들은 물론 아내와 아이들의 소식마저 모르고 지낸 지 20년.

그의 출소를 기다리는 이는 팔순이 다 된 老母와 자신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중병을 얻은 동생들뿐이었다.

『누구든 마중 나오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동생이 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동생 차를 타고 안동을 벗어나 충북 제천쯤 왔을 때 아침식사로 설렁탕을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출소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데요. 사회참관(재소자들을 상대로 교화 차원에서 사회발전상을 시찰하게 하는 교도소內 행사)하러 나온 것 같았습니다』

그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은 것은 동생 裵慶壽(배경수)의 집에 도착하고 난 후였다. 동생 집은 경기도 하남시에 있었다. 동생은 직업 군인이었으나 형이 간첩으로 낙인 찍히면서 중위로 강제 예편되었다. 당시 서울 충무로에서 조그마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동생네는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내일은 뭘 할까 생각했어요. 그때서야 내가 교도소를 나왔구나, 사회참관하러 나왔을 때처럼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밤 저는 날이 밝는 대로 月刊朝鮮의 趙甲濟(조갑제) 편집장님부터 찾아뵈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趙편집장은 20년 동안 왜곡되어 있던 李穗根 위장간첩 사건의 진실을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1989년 3월호)는 제호의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밝혀 낸 기자였다. 裵씨는 광주교도소에서 이 기사를 처음 접했다. 그때의 심정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후 그 어떤 단체나 언론 기관도 그의 억울한 인생에 관심을 가져 주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있던 그에게 「결국 진실은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게 되어 있구나」하는 희망이 생겼다.>
(2004년 1월호 月刊朝鮮/'진짜 경계인' 李穗根의 그늘에서 스러져간 '나의 인생'에서 뽑음-徐喆仁 기자.)

지난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재심에서 징역 20년을 살고 나온 裵慶玉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金炯旭이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하여 李씨를 위장간첩으로 조작하여 처형했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이 선고에 대한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렇다고 죽은 李穗根이 살아나는 것도, 人生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낸 裵慶玉의 삶이 복원되는 것도 아니다. 李穗根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던 金炯旭은 그 10년 뒤 金載圭의 명령으로 파리에서 청부살해 되었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