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의 朴正熙

연재 6/민주군 장교로서 광복을 맞은 그는 한동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다.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포진하고 있던 만주군 8團의 네 조선인 장교들. 1945년 8월9일 소련군의 참전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반벽산의 단본부에 있던 團長부관 朴正熙 중위였다. 그는 7월1일자로 중위로 진급했었다.

8단은 만리장성 북쪽에 흩어져 있는 전 병력(약 4,000명)을 싱룽에 집결시켰다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몽골의 뚜어룬(多倫)으로 북진하라는 작전 임무를 부여받았다. 박정희는 이런 명령을 신현준의 제6연을 비롯한 예하 부대에 전달했다. 그때 방원철이 속해 있던 중화기중대는 만리장성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일본군과 합동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통신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만주군은 대대급 부대만이 발전식 무전기를 갖고 다녔다. 한 30분간 발전기를 돌리고 통신기를 틀어야 송수신이 되는 퇴물이었다. 방원철이 선임장교로 있던 중화기 중대가 만리장성 남쪽에서 작전을 마치고 반벽산에서 20리쯤 떨어진 孤山子(고산자)의 본부로 돌아온 것은 8월 13일 오후. 목욕을 하려는데 박정희 중위가 전화를 걸어왔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유지를 위해서 조선어를 쓰겠습니다. 지난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전면전에 돌입하였습니다. 우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싱룽에 집결했다가 뚜어룬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새벽 5시까지 반벽산에 도착해주십시오. 반벽산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싱룽으로 향합니다. 장비를 최대한 가볍게 꾸려주십시오.”

이 순간 방원철도 아차 했다. 그 한 달 전 平泉(평천)에 주둔하던 헌병 상위 문용채가 엽서를 보내왔던 것이다. ‘건국동맹 군사분맹’의 연락책인 문용채는 이 엽서에서 ‘나는 持病(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봉천으로 간다. 방 중위도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는데 휴가를 얻어서 우선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했다. 방 중위는 이 편지를, ‘이제 일제의 패망이 임박했으니 휴가를 내어 후방으로 빠졌다가 거사하자’는 취지로 이해했다. 그래서 상부에 휴가를 신청했더니 일본군과의 합동작전이 끝난 뒤 한 달간의 휴가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

방원철의 중화기 중대 약 250명은 당나귀 50마리에 짐을 싣고서 14일 새벽에 반벽산으로 출발했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반벽산에 집결한 8단 병력은 행군대열로 재편성하여 바로 싱룽으로 출발했다. 반벽산-싱룽은 약 60km의 거리였지만 강원도 산악지대처럼 험했다. 차는 다닐 수 없었다.

당나귀와 보병으로 구성된 긴 행렬이 연일 계속되는 폭우를 뚫고 걸어갔다. 절벽과 계곡을 따라 난 길을 걷자니 하루 50리가 고작이었다. 방원철의 중대에서는 졸면서 걷던 병사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기도 했고 급류를 건너다가 떠내려가기도 했다.

신현준의 중대도 식량과 탄약을 실은 당나귀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를 당하는가 하면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야간기습을 당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우군부대가 오인사격을 해온 것이었다. 8월 15일, 16일도 행군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사실도 모르고 그들은 걷고 있었다. 폭우를 맞으면서 잠을 자고 깨어나면 또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발전기를 한참 돌려야 작동하는 무전기를 켤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8월 17일 방원철의 부대가 싱룽에 거의 당도했을 때 무전기를 작동시켰다. 아무 방송도 잡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데 중국어 방송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장개석의 육성연설이 방송되고 있었다. 방원철은 그 연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은 14년에 걸친 중국 침략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하여 항복하였습니다. 동북지방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보다도 더 심한 압제를 받았습니다. 조선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에게 빌붙어 나쁜 짓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하는 바입니다. 東北辨事處(동북변사처)를 조직하여 왕 장군(중국군 소속 조선인 金弘壹·김홍일 장군을 지칭)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니 자중자애해주시기 바랍니다.”

뒤따라오던 신현준은 싱룽에 당도하여 중화민국의 청천백일기가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현준,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인 8단장은 매우 원만하게 이 사태를 관리했다고 한다.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 네 명은 일본인 장교 13명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했다. 당제영 단장은 일본인 장교들을 싱룽 소재 일본군 게도(下道)부대에 인계했다. 다른 만주군 부대에서는 일본인 장교들이 중국인 사병들에 의해서 피살되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었다.


만주군 중위 박정희가 일본인 장교들과 함께 그 만주군에 의해서 무장해제를 당했을 때 느꼈던 감상은 신현준 상위처럼 착잡했을 것이다. 그의 회고록 《노해병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만주군 장교가 된 이래로 계속 소중히 아끼고 있던 손때 묻은 軍刀(군도), 권총, 쌍안경을 고스란히 바치게 되었을 때의 그 심정이란 마치 하늘을 날던 새가 날개를 잃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국해방의 기쁨을 안고 희망찬 장래를 기대하면서 전진하기로 결의하였다>

머나먼 만리장성 산중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광복의 그날을 맞은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는 그러나 잃은 것이 더 많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교사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군인의 길을 결단했던 그는 일본이 항복하는 순간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바로 일본 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원폭과 소련의 참전에 의해 앞당겨진 광복이었기에, 그 광복의 소식조차도 이틀 뒤에야 알았듯이 이 결정적인 순간에 박정희는 역사의 격류 속에 무력한 존재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일제의 압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반발한 그였지만 그 일본 장교들과 같은 취급을 받아 군도도, 계급도, 월급(약 150원)도 박탈당한 박정희였다. 이때야 비로소 그는 박상희 형이 그토록 말리던 만주행을 후회도 해보았을 것이다. 민족해방의 순간에 서서 기쁨보다도 걱정이 앞서게 된 박정희의 25시. 나라가 힘이 없으면 국민이 구차해진다는 이 실감, 광복이 몰고온 모순과 곤혹과 갈등의 이 체험이 박정희를 自主人(자주인)으로 빚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소련 하바로프스크 북동 약 70km 아무르 강변 부야츠코에 마을에 있던 88특별저격 여단 본부에서 광복을 맞은 金日成(김일성) 소련군 대위는 박정희 만주군 중위와는 처지가 뒤바뀌었다. 쫓는 편에 서 있던 박정희가 오히려 쫓기는 입장에 서게 되었고 김일성은 북한으로의 금의환향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한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한 뒤 중국인 학교에서 공부하고 19세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던 東北抗日連軍(동북항일연군)의 중대장급 지휘관이 되어 빨치산 투쟁을 하던 김일성은 1941년 무렵 만주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소련으로 건너갔다. 소련 극동방면군은 이 중국인·조선인 혼성부대를 88여단이란 첩보부대로 재편성하였다.

여단장은 중국인 周保中(주보중), 김일성 대위는 제1대대장이었다. 소련군은 조선어까지도 서툴던 이 33세의 대위를 신화 속의 김일성 장군으로 조작하여 평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김일성은 조국을 떠난 지 20여 년간 줄곧 중국과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부하로 있음으로 해서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애환과는 유리되었다. 그는 사실상 중국화된 조선인이었다.

김일성·김정일 집단의 심리적 특징이 된 마적단적 시각, 즉 북한을 점령지로, 동포들을 노획물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변태적 호화판 생활에는 아무런 양심의 갈등을 느끼지 않는 특징은 외세에 소속되고 외세에 조종된 만주 경험에서 우러난 바 크다.

박정희, 김일성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시기에 만주를 경험하고 비슷한 시기에 조국으로 돌아왔다가 15년 뒤에는 서로 대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두 사람이 만주를 어떻게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 그 뒤 한반도의 운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만주군 8단은 싱룽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게도부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장비를 접수했다. 그런 뒤 당일 밤으로 싱룽 지역에서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당제영 단장이 예하부대에 하달한 훈령은 이런 요지였다고 신현준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내용이 양반스러웠기 때문이다.

<1. 오늘 밤에 한해서 초병들은 사전 허가 없이는 일체의 사격행위를 금한다.

2. 우리 8단이 오늘 작별하는 일본군 게도부대와 재회할 때는 적대관계에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

3.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까지 동맹 관계를 맺고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전우였다는 사실을 저버릴 수는 없다.

4. 의리를 존중함이 인간의 도리일진대,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도리를 다해야 하느니라>

8단의 당제영 상교(대령)는 박정희 등 조선인 장교들을 직위해제한 뒤에도 8단에 손님처럼 남아 있게 해주었다. 그런 상태에서 8월을 다 보내고 벌써 만리장성으로 남하하는 가을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9월 어느 날, 박정희와 이주일이 신현준을 찾아왔다. 방원철은 봉천을 향해서 떠난 뒤였다. 박정희가 입을 뗐다.

“이제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택할 진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중국 사정은 형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실 터이니 귀국을 위해서 어떤 노선을 선택해야 할지 말씀해 주십시오.”

“군자는 대로행이라고 하는 말을 명심해야 하네. 봉천을 경유하여 귀국하는 길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데다가 봉천까지의 철로가 두절되어 있네. 북경을 경유하는 길이 멀기는 하지만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만주국이 망했으니 만주군 8단은 고아처럼 되어버렸다. 당제영 단장은 장개석과 모택동을 놓고 어느 편에 붙을까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8단은 부대를 정비한 뒤 미윈(密雲)이라는 도시까지 이동하여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박정희 등 세 사람은 이 기회에 미윈까지만 동행한 다음 헤어지기로 했다. 세 조선인은 당 단장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기차편으로 북경으로 향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서 9월 21일에 북경에 도착했다고 쓰고 있다. 박정희 일행은 동포가 경영하던 음식점 덕경루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앞날을 걱정했다.

만주·중국 전선에서 광복을 맞은 조선인 장병들은 북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수십 명이 덕경루에서 寄宿(기숙)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崔用德(최용덕) 중국군 소장을 동북판사처장에 임명하여 이들을 광복군 산하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신현준, 이주일, 박정희는 이 광복군에 들어가기로 했다. 북경 시내 北新橋(북신교)라는 곳에 제지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 건물과 마당이 광복군의 병영이 되었다. 박정희는 광복된 뒤에 광복군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쑥스러워했다고 전한다.




광복된 뒤에 일본군·만주군 출신 장병들로 편성된 북경의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제3지대 駐平津大隊(주평진대대)’로 불리게 되었다. 평진은 北平(북평)과 天津(천진)에서 따온 단어였다. 이 부대의 대대장에는 신현준 전 만주군 상위, 1중대장에는 이주일 전 만주군 중위, 2중대장에는 박정희 전 만주군 중위, 3중대장에는 尹瑛九(윤영구) 전 일본군 소위, 정훈관에는 鄭弼善(정필선) 광복군 공작원, 군의관에는 嚴在玩(엄재완)이 임명되었다.

이 부대를 관리한 사람은 장개석 군대의 소장 출신 최용덕이었다. 최 소장과의 연락책임자로 李成佳(이성가) 중국군 중위가 평진대대에 주재했다. 원래 상부에서는 이 평진대대를 박정희 중위에게 맡겨 지휘하려고 했었다. 그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우등으로 졸업했다는 사실로 해서 평가가 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는 상부에 대해서 “나이로 보나 계급으로 보나 신현준 상위가 나보다 위인데 내가 지휘관이 되면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고 사양했다. 박정희는 그렇게 해놓고 신현준을 찾아와서 “형님께서 이 부대를 맡아야 하니 부디 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라고 간청하더란 것이다.

약 200명의 이 평진대대원들은 귀국 날짜를 기다리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학병 출신으로서 이 광복군에 속했던 朴基赫(박기혁·연세대 부총장 역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 집단을 만든 것이다. 배편을 기다리면서 규율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군사편제로 조직된 것이다. 광복군이란 말에 어울리는 이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광복군의 일과는 훈련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먹는 것이었다. 신현준, 박정희 등 간부들은 최용덕과 함께 북경에 있는 동포들에게서 식량을 얻어 와서 부하들을 먹이느라 애를 먹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서 ‘구걸해오다시피 하였다’고 했다. 병영으로 쓰고 있던 제지공장 안에는 식당도 없었다. 병사들은 숙소에서 식사를 했고 간부 요원들은 취사장 옆에 한 20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을 마련하여 먹었다. 의자가 없어 식탁 주변에 둘러서서 담소하면서 먹었다. 신현준은 “밥도 먹고 죽고 먹고 굶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이때 박정희는 노래 하나를 작사, 작곡하여 혼자서 콧노래로 부르곤 했다. 신현준은 하도 이 노래를 많이 들어서 50여 년이 지난 요새도 기억한다.

<조팝 깡다리에 / 소금국만 먹어도 / 광복군 정신만은 / 씩씩하게 살아 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 지은 ‘새마을 노래’와 비슷한 경쾌한 곡이다. 박정희는 평생 울분이나 고통을 나팔 불기, 노래 부르기, 기타 치기, 단소 불기 같은 음악을 통해서 위로받으려고 했다. 음악까지도 그는 아주 실용적으로 이용하였다.

박정희나 신현준은 이 평진대대 안에서 친일시비에 휘말린 적은 없다고 한다. 광복군 병사들은 계급장은 떼고 일본군, 만주군 군복을 개조하여 그대로 입고 다녔다. 진짜 광복군 출신 張俊河(장준하·전 사상계 사장·작고)가 이때 박정희와 만나 나쁜 사이가 되었다는 풍설은 사실이 아니다. 신현준에 따르면 좌·우익 대립이 벌써 이 평진부대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눈에 안 보이는 38선이 부대원들 사이에 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밤을 새워 사상문제로 토론을 벌이는 일도 잦았어요. 박정희 중대장이 어느 이념에 경도되어 있었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여운형 선생을 줏대 있는 지도자라고 평가하던 일입니다.”

신현준은 그 사건을 1945년 12월 10일 오전 10시에 일어났다고 기억하고 있다. 평진대대의 전 병력을 이끌고 야외에 나가서 훈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방에서 기관총 사격소리가 들렸다. 위협사격이었다. 이어서 일단의 중국군(장개석 파) 부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훈련을 중지하고 손을 들고 나오라”고 하더니 아무 설명도 없이 北新區(북신구)의 병영으로 행진시켰다. 그리고는 신현준, 박정희, 이주일 등 장교 출신 간부진을 몽땅 영창에 집어넣고는 문을 잠그고 사라져버렸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신현준은 평진부대를 편성할 때부터 중국공산당 계열의 조선인 공작원들이 몇 사람 묻어온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집회를 갖고 부대원들에 대한 포섭활동도 거의 공공연히 벌이고 있었다. 이 공산주의자들이 협조를 해주지 않는 간부진을 혼내주기 위하여 중국군에게 모략을 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신현준은 생각했다. 간부들은 몇 시간 지난 뒤 풀려났으나 이 경험은 박정희에게 오래 기억되었다. 훗날 둘째 딸 박근혜에게 박 대통령은 북경에서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국 땅에서도 단결하지 못하고 분열한 조선인의 민족성에 대해서 개탄하였다. 박정희는 평진대대에서 처음으로 공산당과 실체적인 접촉을 할 수 있었고 그 첫 경험은 매우 기분 나쁜 기억이 되었다. 하루는 박정희가 중대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몇 사람이 앞으로 나오더니 “당의 회의 때문에 먼저 가봐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잔말 말고 훈련이나 받아!”

박정희는 일부러 더 고된 훈련을 시켰다. 그날 저녁 공산주의자들은 박 중대장을 규탄하는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은 자고 있는 박정희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중대장 동무는 당의 중대한 회의를 무시했으니 책임을 지시오.”

이런 선동에 “옳소!”라고 외치며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박정희는 “옳기는 뭐가 옳아. 돌아가 잠들이나 자!”라는 말을 남기고는 나와 버렸다. 숙소에 돌아온 박정희는 ‘동무’라는 말을 곱씹으면서 화를 삭이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동양적·무사적 서열의식과 예절에 철저한 박정희로서는 나이와 계급을 무시하고 맞먹으려드는 공산주의식 인간관계에 生來的(생래적)인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박 대통령은 김종신 공보비서관에게 “그때 보니까 이놈 저놈들이 나서서 군대를 팔아먹으려 하더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끼리는 좌·우익으로 갈리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親(친)장개석 파, 親(친)모택동 파로 또 한번 찢겨져 서로 평진대대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싸우는 조선인들의 심성에 절망한 것이 박정희였다. 이 절망은 곧 거대한 문제의식으로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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