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유학동기인 李翰林(이한림)은 1946년 2월에 미 군정청이 창설한 국군의 前身(전신)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다. 그해 여름 이한림 副尉(부위·중위)는 5월1일에 창립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의 교관 겸 학생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서울로 올라온 과거의 단짝 박정희를 만났다. 을지로 5가의 어느 허름한 여관에서였다.
박정희는 “우리 군대가 어떤지 한번 알아보려고 왔다”고 말하는 것이 입대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되도록 빨리 들어오게. 시골에 틀어박혀서 이때까지 뭘 했나.”
“세상 구경했지. 아무리 봐도 세상 돌아가는 것이 수상한 걸.”
“그래 시골은 어때.”
“난장판이야. 어떻게 돌아가는 판인지 알 수 없군. 서울 구경도 할 겸 올라왔는데 군대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 내키는군.”
“어서 들어오게. 잘 생각했네. 나는 그 사이 이북·이남을 두루 살펴봤는데 이 길밖에 없겠어. 이북은 일사천리야. 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딱 정해놓고 밀고나가고 있어.”
고향으로 돌아온 박정희는 박재희 누님에게 말했다.
“구미에서 무슨 취직을 하겠어요. 아무래도 서울에 올라가서 알아 봐야겠어요.”
그 다음날부터 박정희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면서 노잣돈을 마련하고 있었다. 진실 누님(큰누나인 박귀희) 댁에 갈 때 박정희는 “돈을 빌리면 하루 자고 오고 못 빌리면 저녁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저녁에 돌아온 그는 “에이, 돈이 있으면 내가 보태주고 싶더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재희의 남편 한정봉이 여비를 마련해주어 서울로 떠나게 된 전날 밤 박재희는 열병에 걸려 누워 있었다. 상희 오빠가 무엇을 들고 들어오더니 머리 쪽 선반 위에 올려놓으면서 “야, 이것좀 잘 간수해두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박정희가 나타나더니 선반 위를 더듬었다. 무엇을 내리는데 카메라였다.
“누님, 나 이것 가지고 갈 테니 형님한테는 내가 기차 탄 뒤에나 이야기하세요.”
“그것 비싼 거야.”
“갖고 가서 필요하면 팔아서 쓸 거예요.”
카메라가 없어진 것을 안 박상희는 애꿎게도 재옥이 어머니를 불러 호통을 쳐 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박정희가 서울로 간 지 한 열흘이 지나 박재희에게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박정희가 보낸 것이었는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는 보고였다.
박정희는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에 이은 세 번째의 사관학교이자 만주군, 일본군에 이은 세 번째의 군복이었다. 입시경쟁률은 2 대 1, 입학생은 263명이었다. 중국군, 만주군, 일본군에서 장교로 근무한 경력자가 35명이었다. 나이 분포는 20세에서 30대 초반까지, 평균연령은 22.3세였다. 2기생들은 나이와 경력의 차이가 가장 큰 생도들로 꼽힌다. 박정희는 당시 29세로서 나이나 경력면에서 최상층부에 속했다. 생도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었고 중대장 요원은 趙炳乾(조병건·당시 20세), 吳一均(오일균·당시 21세) 參尉(참위·소위) 등이었다. 조, 오 두 사람은 일본 육사 60기 출신으로서 박정희보다 3년 후배. 박정희는 나이가 8∼9세나 어린 중대장 밑에서 생도로서의 훈련을 묵묵히 잘 받았다. 박정희와 같은 중대에 속했던 孫熙善(손희선·육군 소장 예편·국가안보회의 상임위원 역임)은 키가 비슷한 沈興善(심흥선·총무처 장관·육군대장), 박정희와 함께 대열의 끝에서 뛰어 다녔다. 박정희는 불평 한마디 없이 늘 꼿꼿한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일제 때 조선 지원병훈련소로 쓰였던 泰陵(태릉)의 경비사관학교 건물은 창틀은 있으나 유리는 끼워져 있지 않은 데도 있었다. 도끼가 없어 구석기 시대 사람처럼 돌로써 장작을 패어 취사를 하기도 했다. 모포에는 이가 버글버글했다. 내무생활은 일본식이었다. 토요일마다 빈 병으로 내무반 바닥을 닦아 번쩍번쩍 빛이 나도록 했다. 흉년이 들어 강냉이밥과 고구마를 많이 먹어야 했다. 그래서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박정희로서는 6년 전 만주군관학교에서 겪었던 고통이었다. 겨울에 거행된 졸업식에 여름옷을 입고 참석해야 할 만큼 피복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그래도 독립국가의 기반이 되는 국군을 만든다는 뜨거운 가슴들이 있었다.
일제의 군국주의적 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 도발은 수십만 명의 조선 사람들을 군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광복이 되었을 때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아주 큰 병력 자원이 존재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군, 만주군의 군복을 입고서도 조국의 문제로 고민했던 많은 장교들이 배출된 것은, 일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建軍과 6·25 동란에 대비한 인력 양성이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 출신자로서의 군대 경험을 통해 군대가 독립 국가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반임을 실감했다. 국가와 군대의 관계에 대한 이런 直視(직시)와 각성은 문약한 문민통치의 전통이 유구하게 흘러오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일본 육사 56기 출신으로 군번 1번을 부여받았던 李亨根(이형근·육군참모총장 역임)은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바로 그 날 나는 일본 육군 대위로서 도쿄에 있었는데 바로 英親王(영친왕) 李垠(이은)을 찾아갔다. 조국이 없는 군인으로서 충성을 바칠 대상을 찾아 헤매던 나는 가끔 (고종의 아들인) 그분을 찾았는데 그때마다 일본말을 쓰고 일본식으로 응대해주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날은 달랐다. 뜻밖에도 청산유수와 같은 유창한 우리말로 열렬하게 충고하는 것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다 같은 유교국가이면서도 일본은 尙武(상무) 정신을 발전시켜 무사도를 전통으로 삼았는데 조선은 武(무)를 천시하여 文弱(문약)에 빠지고 文尊武卑(문존무비)라는 폐습을 이어 오다가 결국은 무사를 존중하는 일본에 병탄당하고 말았소. 나는 언젠가는 우리 조상들, 즉 조선 왕가를 대표하여 문약풍조를 없애지 못하여 亡國(망국)을 초래한 잘못을 우리 동포들 앞에서 깊이 사과하고 싶었소.”>
국군장교가 되다!
- 趙甲濟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9-02-23, 2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