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육예수가 아버지 육종관으로부터 호통을 듣고 나오자 육영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육종관은 대전으로 간다면서 집을 나가 버렸다. 모녀는 대구로 떠나지 못하고 두 시간쯤 기다렸다. 육영수는 “인사만이라도 드리고 가야 한다”고 마냥 기다리려고 했으나 예수는 “언니,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척 해버리는 것도 로맨틱하잖아” 하면서 출발을 권했다. 어머니 이경령이 나섰다.
“너희 아버지가 언제 네 결혼 걱정하는 것 보았니. 어서 너희들이나 먼저 가라. 나는 내일 아버지 모시고 갈 테니.”
육영수, 예수 자매는 군용파카를 입고 송재천 중위가 몰고 온 트럭 짐칸에 타고 대구로 출발했다. 이날 집안에서 있었던 일로 해서 신경이 곤두섰던 육영수는 차 안에서 심한 위경련을 겪었다. 예수가 언니의 배를 주물러 주었지만 통증은 계속되었다. 밤 10시에 두 자매가 도착한 곳은 대구 三德洞(삼덕동)의 李正雨(이정우) 집 사랑채였다. 박정희 중령은 9사단 사령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이 집을 얻어 두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육영수를 사랑채의 한 방에 눕혔지만 육영수는 그날 밤을 딴 집에서 보냈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즉 1950년 12월 11일 육영수는 동생을 데리고 미장원에 갔다가 간밤의 고통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놀랐다. 예수는 “언니, 내일이 결혼식인데 어떡하지” 하고 울상이 되었다. 이날 오후 어머니 이경령이 혼자서 대구로 내려왔다. 전날 밤늦게 돌아온 남편과 싸우고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점잖게 진행되었다고 전한다.
서로 옆방에 앉은 채로 한마디씩 주고받는 식이었다. 육종관이 자기 방에 앉아 “집안도 알아보지 않고 딸을 치우는 부모가 어디 있나” 하고 소리치면 이경령은 안방에서 “영수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는데도 가만 있으란 말이에요”라고 외친다. 남편이 소실을 다섯 명이나 집안에 들여도 순종하던 이경령으로서는 이런 ‘점잖은 싸움’도 대단한 도전이었다.
다음날 일찍 이경령이 대구로 출발할 때 이미 결심이 섰다. 이경령은 딸 편을 들기로 함으로써 육종관과 헤어지는 것이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사실상 별거 상태로 들어가고 만다. 육종관은 서울 사직동에 살던 큰 개성댁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이경령은 육영수와 함께 살게 된다. 순종적인 여성상의 전형처럼 보였던 이경령─육영수 모녀의 육종관에 대한 반란은 그들의 내면에 그동안 쌓여갔던, 바람피우는 남자에 대한 공통된 증오심이 공동 전선의 형식으로 發露(발로)된 때문이리라.
훗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친인척들의 집에 경찰관들을 배치하여 이권청탁 등 비행에 휘말리는 것을 감시케 했다. 서울에 살던 장인 집 앞에도 경찰이 진을 치자 육종관은 “사위놈이 날 감시하려는 구나” 하고 이경령이 자주 출입하는 친척집에 가서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영수한테도 전화를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여기 너희 외숙모(이경령)가 자주 온다고 해서 찾아왔다. 내가 무슨 독립운동 하는 것도 아닌데 형사들이 우리 집에 와 앉아 있으니 성가셔 죽겠다. 너희 외숙모한테 이야기 좀 전해라. 제발 형사들 좀 보내지 말라고.”
이 말이 박정희에게 전달되어 육종관에 대한 감시가 풀렸다고 한다.
박정희─육영수의 결혼식은 12월 12일 오후 대구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열렸다. 박정희의 가족으로는 큰형 박동희, 조카 박재석, 박영옥이 참석했다. 대구 시장 허억이 주례석에 오르자 모닝코트를 입은 박정희 중령이 독특한 걸음걸이로 입장했다. 육영수는 꽃바구니를 든 두 소녀를 앞세우고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 김영기 선생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육영수의 들러리는 김재춘 중령의 부인 장봉희와 육예수.
주례 허억은 신랑 신부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주례사를 하면서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이라고 序頭(서두)를 떼 장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러나 송재천은 얼굴이 하얘졌다. 송 중위는 김재춘으로부터 신부용 금반지를 하나 사 갖고 있었다.
그는 반지 匣(갑)이 너무 커서 반지만 꺼내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예물 교환 시간에 맞추려고 반지를 찾으니 잡히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송재천은 김재춘한테 돈을 타서 뛰어나갔다. 금반지를 새로 구입하여 겨우 예물 교환 시간에 댈 수 있었다. 송 중위가 나중에 차분히 반지를 찾아보니 시계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이날 박정희의 은사 김영기는 이런 요지의 축사를 했다.
<창천에 기러기 훨훨 날아가는 맑고 갠 오늘, 신랑 박정희 군과 신부 육영수 양은 바라건대 세상은 회오리바람처럼 그칠 줄 모르니…신랑의 억센 기품과 아름다운 신부의 온화함이 화합되어 서로 도와, 푸른 강가에 원앙새 한 쌍 훨훨 날아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이 결혼식을 준비하는 데 애썼던 대구사범 동기생 이성조의 회고─.
“하객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지만 피로연은 조촐했지요. 전란 중이라 뭐가 있었겠습니까. 동기생들이 밤새워 피로연을 준비했는데 성당 뒤편에 밤, 대추, 오징어로 한 상 차렸습니다. 순수한 우정으로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이날 우리 동기생들은 다짐을 했어요. ‘박정희의 신혼생활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지는 말자’고 말입니다. 결혼식이 끝나자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각의 삶 속으로 돌아갔지요. 전쟁 중에 모두가 갈 길이 바빴거든요.”
박정희도 결혼식 다음날 사단사령부로 출근했다. ‘신혼여행’이란 개념이 생소하던 때였다. 박정희가 세든 사랑채는 방이 세 개였다. 큰방은 박정희, 두 번째 방은 이경령과 육영수·육예수, 세 번째 방은 운전병과 부관이 썼다. 이 집에는 부엌이 없었다. 육영수는 예수와 함께 현관을 부엌으로 개조하였다.
박정희는 퇴근하고 귀가하여 식사를 할 때는 주로 처제와 대화하는 편이었다. 그는 아내를 ‘영수’라고 불렀고 아내는 ‘저 보세요’라고 얼버무렸다. 박정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아내는 따뜻하게 데운 세숫물을 대야에 받쳐들고 마루에 서 있었다. 육영수는 머리를 곱게 빗고 엷은 화장도 했다. 육영수는 집안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로서는 처음으로 안락한 가정생활을 맛보게 된 것이다.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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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2-26, 22: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