陸本의 深夜 참모회의

연재 12/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쿠데타 모의, 그 현장에서 박정희는 침묵을 지켰다.
이승만의 再選(재선)을 저지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군은 한국군이 이승만에 의해서 계엄군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李鍾贊 육군 참모총장 측에 대해 부산 정치 파동 이전부터 공작을 해왔다. 밴플리트는 이승만에 대한 미국 측의 거부감을 내비치면서 쿠데타 가능성도 타진한 것으로 보인다. 이종찬은 “밴플리트의 진심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서 觀望(관망)하는 태도였지만 李龍文 작전국장은 달랐다. 그는 ‘미군이 이승만 제거를 원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미국이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사실상 철회한 지금, 2개 대대 정도의 병력만 있으면 간단하게 이승만을 무력화함으로써 국회에서 장면을 차기대통령으로 뽑도록 도울 수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용문의 보좌관格(격)인 박정희 대령도 강경론이었다.

金宗平 정보국장을 비롯한 육본 참모들도 대체로 反(반)이승만 성향을 보였다. 이들 장교는 6·25 초전에 있었던 이승만의 ‘서울 死守(사수)’ 거짓방송, 1·4 후퇴 때 수만 명을 얼어죽게 만들고 굶어죽게 만든 국민방위군사건, 700여 명의 양민을 공비로 몰아 학살한 居昌(거창)사건 등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다. 이용문과 박정희는 戰前(전전)부터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용문─박정희의 강경론에 밀린 이종찬 참모총장은 한때는 적극적으로 한국군의 쿠데타 계획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打診(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종찬 총장은 그러나 미국의 지원 없이도 쿠데타를 감행할 인물은 아니었다.

6월 1일 라이트너 미국 대리대사는 국무부에 전문을 보낸다.

<필요한 때는 유엔군이 부산에 직접 계엄령을 선포하여 이승만을 예방적으로 구속하고 부산의 한국군과 경찰을 접수하는 계획을 수립해줄 것을 건의한다. 이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은 거의 없다. 질서는 단기간에 회복될 것이다. 이승만이 저항을 선동할 일정한 힘은 갖고 있지만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교육을 받은 층에선 그를 받아들일 것이며 수동적인 대중도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고 따라갈 것이다>

1952년 6월 초는 이승만에게는 피를 말리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미군이 곧 계엄령을 선포하여 야당을 이승만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란 소문이 부산 政街(정가)에 나돌아 숨어 다니던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했다. 야당 의원들의 신변을 미군이나 국군이 보호해줄 수 있다면 국회에서 새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고 이승만 정권은 끝나는 것이다.

이 무렵 육본에서 深夜(심야) 참모회의가 열렸다. 증언자 安光鎬(안광호·육군 준장 예편, 대한무역진흥공사 사장 역임·작고)는 당시 총장 비서실장이었다. 안광호의 부친 安秉範(안병범)은 일본 육사 출신으로서 6·25 남침 직후 서울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인왕산에서 할복자살했다. 안씨의 두 동생도 전사했다. 안씨는 문제의 심야 참모회의가 열린 날을 계엄령 선포 1주일 뒤인 6월 1, 2일경으로 기억했다. 총장 전속 부관 유병일 중령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와 육본 회의실로 나가니 참모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이종찬 총장과 유재흥 참모차장은 보이지 않았다. 이종찬 총장은 5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辭意(사의)를 표명한 뒤에는 관사에서 칩거 중이었고 유재흥 차장이 대리하고 있었다. 안광호의 生前(생전) 증언.

<이상하게도 이용문 작전국장은 보이지 않고 박정희 차장이 대신 참석했다. 유병일 부관이 나에게 議題(의제)를 설명해 주었다. 후방에서 공비 토벌 임무를 맡고 있는 2개 대대를 부산으로 보내 원용덕의 헌병대 병력을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아주 간단한 병력 이동 같았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빚을지는 모든 참모들이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이 유일하게 의존하고 있던 헌병대가 무력화되면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에 의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실각할 것이다.

내가 회의장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논의가 상당히 진행된 것 같았다. 투입 병력의 지휘관으로 박경원, 이용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내 느낌으로는 회의의 대세는 파병하는 방향으로 기운 것 같았다. 나는 퍼뜩 이종찬 총장을 생각했다. 그분의 持論(지론)이 ‘군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오늘 회의는 친위 쿠데타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쿠데타를 감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모들은 나보고 이종찬 총장 대신 유재흥 차장을 참모회의 의장으로 모시고 나오라고 했다. 그때가 밤 2시쯤. 나는 대령이고 그는 소장이었지만 우리는 친구 사이였다. 나의 先親(선친)과 그의 선친 유승열 장군도 친구였다. 나는 유재흥 차장을 지프에 태워 육본으로 가는 차중에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유재흥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런 요지의 설명을 했다.

‘잘하면 혁명이 될지는 모르겠다. 성공 여부는 일선의 사정에 달려 있다. 군단장, 사단장급이 반발하면 수습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 수행에 차질이 생긴다. 성공해도 군이 혁명했다는 오점을 남긴다. 미국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밴플리트가 자주 이종찬 총장을 찾아오긴 했지만 이렇다 할 言質(언질)을 준 것은 없다.’

이런 내 의견을 듣더니 유 차장이 말했다.

“안 대령, 이러면 어떨까. 군의 정치 불개입을 선언한 지난 5월 26일 현재의 입장엔 변함이 없다고.”

나는 “그게 좋겠다”고 찬동했다. 유재흥 차장이 참모회의장에 들어가더니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김종평 정보국장이 의제를 설명한 뒤 “작전참모도 가능하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사참모는 일선 장병들의 사기나 軍紀(군기)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신속하게 치러져야 하는데 그 판단은 인사참모가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재흥 차장이 이용문 작전국장을 대리하여 작전참모로 참석한 박정희 대령에게 물었다. 박 대령은 싱긋이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 문제는 상부에서 결심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다면 지장이 없게끔 수배는 됩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박 대령의 그 묘한 웃음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군수참모는 “그 문제는 G2(정보), G3(작전)에서 결정할 문제이지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물으니 어느 참모도 “꼭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참모들의 의견을 다 들은 다음 유재흥 차장이 말했다.

“그러면 육본의 태도를 분명히 하겠다. 오늘 현재 육본의 결심엔 변동이 없다.”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데 김종평 국장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안 대령, 잘 됐수다”라고 했다. 나는 “잘 됐수다”란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했다. 그날 회의는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무거운 분위기였고 국가의 운명이 이 자리에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모두 갖고 있었다>

육군 총장 비서실장 안광호 대령은 새벽 3시쯤 이종찬 총장을 관사로 찾아가 참모회의의 결정을 보고했다. 이 총장은 “오늘 현재 육본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라고 반문하더니 웃더라고 한다. 안광호는 ‘그 참모회의를 누가 소집했고 누가 2개 대대의 부산 파병을 제안했을까. 왜 이용문 작전국장은 참석하지 않고 박정희 차장이 대신 참석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지니고 다녔다. 그는 이종찬 총장과 함께 미국 참모대학에서 공부했는데 그때 물어보았다.

“그 회의는 누구의 발상이었습니까?”

이종찬은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박정희 그 사람 인물이야”라고 했다. 안광호가 “동감입니다”라고 했더니 이 총장은 “어떤 점이 그렇더냐”고 되물었다.

“그날 밤 박정희 대령의 표정을 보니 그가 ‘명령만 내리시면 가능합니다’라고 답할 때나 유재흥 차장이 ‘부산파병은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릴 때 흔들림이 없더군요. 저는 박정희는 淸濁(청탁)을 같이 들이마실 수 있는 큰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 봤네.”

이 참모회의에 참석했던 김종평 정보국장은 “그 회의를 소집한 사람은 박정희 대령이었다”고 증언했다. 파병 문제가 議題(의제)였으니 작전국장을 대리한 박정희가 회의를 소집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당시 이승만을 실각시킬 목적의 군대동원에 대해서는 이종찬─이용문─박정희 세 사람이 핵심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작전과장 유원식 중령은 박정희 대령의 지시를 받아 실무적으로 참여했다.

이날 회의에 이종찬, 이용문은 참석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의제만 상정해놓고 회의에서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입장을 취했다. 대령으로서는 회의를 主導(주도)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단독으로 이런 중대한 회의를 소집했을 리는 없다. 그는, 이용문 국장이든 이종찬 총장이든 상부의 지시를 받아서 했을 것이다.

파병이 결의되려면 이종찬 총장의 적극적인 의사표시가 있어야 했는데 이날 그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렇다면 이용문 국장이라도 총대를 메야 하는데 그는 자리를 피했다. 이 국장은 아마도 박정희 대령으로 하여금 의제를 상정시켜 참모회의의 분위기를 떠보려 했을 것이다. 그날 밤 참모회의 의장이 된 유재흥 차장은 그 며칠 전(5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했다가 대통령으로부터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 나온 사람이었다.

“육본에서 지금 흥사단 사람들(평안도 인맥을 지칭)이 반역을 꾀하고 있어. 최고사령관인 대통령에게 抗命(항명)한 이종찬 총장을 砲殺(포살)해야 돼.”

不發(불발)로 끝난 이날 참모회의는 박정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을 것이다. 그때 육본이 2개 대대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이승만의 계엄군’ 헌병 2개 중대를 접수해 버렸다면 거의 틀림없이 정권은 무너졌을 것이다. 야당을 탄압하던 물리력이 사라지면 국회가 정상화되어 間選(간선)으로 장면을 차기 대통령으로 뽑았을 것이다. 미국 측도 그런 군사 개입이 신속하게 충돌 없이 성공하면 그 결과를 기정사실로 추인해 버렸을 것이다.

그때 육본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고 있었고 그 상황의 한복판에 박정희가 있었다. 박정희는 이때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그 뒤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무덤까지 갔다. 훗날 닉슨 미 대통령이 자신의 전화를 자동적으로 녹음하도록 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 때 그게 약점이 되어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도록 법원의 명령을 받아 혼이 나는 것을 본 박정희는 경멸조로 말했다고 한다.

“닉슨, 그자는 회고록 쓸 일이 있었나.”

‘회고록을 쓸 자료를 모으기 위하여 녹음을 했는가’란 말인데 박정희는 회고록을 쓸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는 改造(개조)된 대한민국이 바로 자신의 회고록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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