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남과 죽음

연재 13/朴槿惠 출생과 李龍文의 죽음
1952년 여름 戰線(전선)은 38도선을 따라 교착되어 雙方(쌍방) 100만 명이 넘는 중무장한 군대가 서로를 비벼대고 짓이기는 고지 쟁탈전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機動戰(기동전)보다도 더 참혹한 고지전과 참호전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박정희는 부산 정치 파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안정된 가정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가 1952년 7월 2일 밤에 쓴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란 시가 있다.

<밤은 깊어만 갈수록 고요해지는군 / 대리석같이 하이얀 피부 / 馥郁(복욱·꽃다운 향기)한 백합과도 같이 향훈을 뿜는 듯한 그 얼굴 / 숨소리 가늘게, 멀리 행복의 꿈나라를 거니는 / 사랑하는 나의 아내, 잠든 얼굴 더욱 예쁘고 / 평화의 상징! 사랑의 權化(권화)여! / 아! 그대의 눈, 그 귀, 그 코, 그 입 / 그대는 仁(인)과 慈(자)와 善(선)의 세 가닥 실로 엮은 / 한 폭의 위대한 예술일진저 /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 길이 빛나고 길이 아름다워라.

나의 모든 부족하고 미흡한 것은 / 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 흡수되고 동화되고 정착되어 /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되고 완성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 이 찰나가 / 무한한 그대의 引力(인력)으로써 / 인생 코스가 되어 주오.

그대 편히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 이 밤이 다 가도록 새날이 오도록 / 나는 그대 옆에서 그대를 보고 앉아 이 행복한 시간을 / 영원히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아내에 대한, 존경심에 가까운 사랑을 素朴(소박)한 詩語(시어)로써 고백한 이 글을 읽어 보면 박정희는 육영수로부터 일종의 母性愛(모성애)까지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의 행복감을 더욱 충만시켜 준 것은 이때 生後(생후) 다섯 달이 된 딸 槿惠(근혜)의 존재였다. 그 전해 육영수는 근혜를 임신하고 입덧을 시작하자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겠지만 틈만 나면 빨래를 했다고 한다. 손가락 끝이 갈라질 정도였다. 밤에는 털실로 뜨개질을 하여 아기 옷을 미리 짜두었다.

1952년 2월 1일 저녁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육영수가 産痛(산통)을 시작했을 때 처제 陸修(육예수)와 장모 李慶齡(이경령)은 집에 없었다. 박정희는 産婆(산파)를 불러 안방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옆방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아내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참다못한 박정희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육영수는 책상 다리를 붙들고 힘을 주고 있었다.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저렇게 고생하는 걸 차마 못 보겠는데 어떤 방법이 없습니까.”

“잠시만 참아요.”

산파는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박정희는 아이를 낳는 순간까지 아내의 손을 잡고 지키고 있었다. 새벽에 출산, 딸이었다. 아침에 처제 육예수가 돌아왔다. 한동안 박정희는 점심때에 일부러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처제와 함께 근혜를 목욕시켜 주기도 했다. 박정희는 딸의 성장 과정을 담아 두려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름은 박정희가 옥편을 뒤져서 지은 것이다. 무궁화 ‘槿’(근)자는 ‘조국’을 상징한다.

박정희와 이혼한 金浩南(김호남) 사이에서 난 첫딸 在玉(재옥)은 이즈음 고향(선산군 상모동)에서 살면서 주로 편지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정희의 조카 朴在錫(박재석)의 집에 살 때 재옥은 아버지에게 원망하는 편지를 자주 썼다.

<아버지, 제게는 부모님이 모두 계신데 저는 왜 이렇게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합니까. 사촌오빠가 저까지 데리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귀찮고 성가시겠어요. 저는 또 얼마나 미안한지 아세요? 오빠도 고생스럽고 저도 힘들고요>

이런 편지에 대해서 박정희는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니 열심히 살아라’는 요지의 답장을 학교 公納金(공납금)과 함께 보냈다. 박재옥이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구미여중에 다니고 있던 때였다. 근혜가 태어난 직후였다. 재옥은 집안 어른이 전해주는 그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벌써 오래 전에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이용문 준장이 작전국장에서 수도사단장으로 나간 석 달 뒤인 1952년 10월에 砲兵(포병)으로 轉科(전과)했다. 당시 육군 포병감 申應均(신응균·육군 중장 예편)은 포병을 증강하면서 포병단장 요원으로 고참대령 20여 명을 뽑아 교육시켰는데 그 가운데 박정희가 들어 있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그 뒤 장성 진급이 유리해졌다.

포병 장교들은 당시로선 비교적 지식 수준이 높았다. 포병 장교들은 업무상 꼼꼼하고 정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고 한다. 그들은 “무기는 짧을수록 배신한다”고 말하곤 했다. 권총이 배신을 많이 하고 대포를 가진 포병은 충직하다는 농담이다. 박정희는 광주 포병학교에서 넉 달간 교육을 받았다. 육영수는 딸 근혜를 포대기에 감싸 안고 광주로 따라가 동명동에 셋방을 얻었다. 이때 육영수와 딸을 L─19 비행기로 태워 날랐던 조종사는 이삿짐이 경비행기에도 실을 만큼 단촐한 데 놀랐다고 한다.

1953년 6월 24일 밤, 대구 <영남일보> 주필 구상은 이용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가 박정희 대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장군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요지였다.

“반네미 자식아, 죽긴 왜 죽어!”

이런 말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이용문 남부경비사령관은 이날 오후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남원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이 장군이 “이렇게 날씨가 나쁜데 뜰 수 있겠나” 하고 조종사에게 물으니 조종사는 “운봉만 넘으면 대구까지는 훤히 뚫렸습니다”라고 했다. 이용문은 부사령관 兪海濬(유해준) 대령과 바둑을 두다가 느릿느릿 비행장으로 향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유해준은 한참 있다가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를 듣고는 “이 장군이 비행장에서도 상당히 지체했구나”라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 중인 유해준에게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운봉 고개에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죽은 사람은 미군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대구 비행장으로 연락을 해보니 이용문의 비행기는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키가 크고 피부색이 하얀 이용문을 미군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25일 아침에 현장에 도착한 이용문의 장남 李健介(이건개·전 자민련 국회의원)에 따르면 비행기는 논두렁에 기체의 앞부분이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이용문은 뒷자리에서 죽어 있었다. 조종사도 사망했다. 이용문은 그때 서른일곱이었다.

이용문이 살아 있었더라면 박정희는 그를 추대하여 쿠데타를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존심 강한 박정희가 진심으로 服屬(복속)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 이용문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이용문의 유족에 대해서 박정희는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박정희는 이용문의 忌日(기일)이 되면 꼭 육영수와 함께 未亡人(미망인) 金靜子(김정자) 여사의 집에 들러 한참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자신도 가난에 쪼들리고 있으면서 돈을 모아 유족의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5·16 뒤 대구 근교에 있던 이용문의 묘소를 수유리로 옮기는 이장위원회의 위원장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었다. 이용문의 동상을 세울 때 돈을 모으기 위해서 연고자들에게 취지문을 보냈는데 박정희, 구상 명의로 되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매년 주최하는 ‘이용문 장군배 쟁탈 승마대회’는 기병 장교 출신인 이용문을 기리기 위한 것인데, 이 행사도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장남 이건개 검사를 불러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한 뒤 31세에 서울시경국장으로 내보낸 것도 박정희였다.

박정희 대령은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광주에서 창설한 3군단 포병단 요원들을 데리고 강원도 양구로 이동했다. 당시 군단장은 姜文奉(강문봉) 소장이었다. 강문봉은 박정희보다 여섯 살이 아래였고, 만주군관학교 2년 후배였지만 조선경비대에 일찍 들어왔기 때문에 상관이 되었다. 박정희는 상관대접을 깍듯이 했지만 속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75년에 강문봉은 ‘정일권 대통령 추대사건’에 연루되어 受賂罪(수뢰죄)로 구속되고 징역을 살았다. 이 사건은 정일권─강문봉 콤비에 대한 박정희의 의심을 이용한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조작한 것이었다.

3군단 포병단장 시절 박정희의 전속부관은 ‘새 박사’로 유명한 元炳旿(원병오·경희대 명예교수) 중위였다. 원 교수에 따르면 박정희는 포병단에 파견된 미군 고문단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미군 장교가 턱도 없는 참견을 한다 싶으면 우리말로 “그 잠꼬대 그만하라고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통역장교는 적당히 통역하느라고 애를 먹었다. 미군 고문단은 한국군 취사장에서 한 200m 떨어진 위쪽에 변소를 지으려고 했다. 박 대령이 따졌다. 미군 측에선 지하수에 분뇨가 스며들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밥 짓는 데 가까이 변소를 내는 것은 우리 풍습에 어긋난다. 한국 땅에서는 한국 풍습에 따르라”고 하여 끝내 못 짓게 했다. 박 대령은 고문단장 베이커 중령이 자신에 대해서 나쁜 보고를 상부에 올린 것을 알고는 베이커 중령을 불러 꼬치꼬치 따지기도 했다.

그때 副(부)단장은 낙동강 전선에서 귀순해 왔던 인민군 포병 중좌 출신 鄭鳳旭(정봉욱) 대령이었다. 미군에선 남로당 前歷者(전력자)와 인민군 출신이 같이 근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정 대령을 다른 부대로 보내도록 했다. 박정희는 “정 대령이 귀순한 것은 인민군이 유리할 때인데 그를 의심해선 안 된다”고 변호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정봉욱은 나중에 5·16 거사에도 가담했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전속부관 원 중위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부하들에게 ‘손찌검이나 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박정희의 가장 큰 욕은 지휘봉으로 철모를 가볍게 치면서 “밥통!”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원병오는 담대하게만 보이는 박정희 단장이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 상관들에게 브리핑할 때는 긴장하여 손을 떨곤 했다는 것이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