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포병학교장 시절 교육처장이던 오정석 중령(육군 준장 예편)이 지금도 기억하는 교장 훈시가 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尉官(위관)장교는 발로, 영관은 머리로, 장군은 배짱으로 일하는 겁니다. 위관은 항상 사병들과 더불어 먹고 자고 발로 뛰면서 일해야 합니다. 영관장교는 머리를 짜서 자기 분야에 전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상관에게 A안, B안을 제시한 다음 각각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저는 이런 이유에서 어느 안을 추천합니다’라고 건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관장교는 전문가적 식견을 갖추어 참모로서 지휘관을 보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장군은 참모로부터 추천받은 안을 선택하는 결심을 한 다음 배짱으로 밀고나가는 겁니다. 장군은 관리자이지 기능인이 아닙니다.”
매주 월요일 오전엔 교장실에서 참모 브리핑 시간이 있었다. 한 달쯤 지나면서부터 참모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시간이 되었다. 박정희는 큰소리나 욕설 없이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예컨대 油類(유류) 현황을 참모가 보고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던 박정희는 이렇게 말한다.
“이봐, 지난 주엔 232드럼 남았다고 했는데 오늘까지 추가 소모가 없었는데 왜 잔고가 212드럼이 됐어? 20드럼은 어떻게 된 거야?”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좋은 박정희의 질문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갈 수 없었다. 현황파악이 不實(부실)했다고 自認(자인)하든지 박정희의 머리를 뛰어넘는 거짓말을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되니 한 달 후부터는 모든 참모들이 차트를 들고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확인을 하고 기록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참모들이 한 번씩 수모를 당했지만 수모를 준 교장을 존경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나중에 조국 근대화 작업의 행동 철학이 되는 박정희式(식) 일처리의 핵심은 업무의 본질에 구체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포병학교는 논산훈련소에서 4주간 훈련을 받은 신병들을 포병단 자원으로 받아 4주간의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운전 교육을 반드시 履修(이수)해야 했다. 운전 교육용 닛산 트럭 15대가 있었다. 어느 날 박 교장은 오정석 교육처장에게 물었다.
“신병들이 여기서 교육받아 나가면 전방에 배치되자마자 砲車(포차)를 끌어야 하는데 실제로 신병들이 운전 교육 때 핸들을 잡는 시간은 얼마나 되오?”
“알아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민간 교육장에서는 운전대 잡아 보는 시간이 얼마나 되오?”
오 중령은 ‘알 필요 없는 것까지 묻는다’고 생각했는데 곧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 질문임을 알게 되었다. 조사를 해보니 신병들이 운전대를 잡아보는 시간은 한 시간도 안 되는데 민간인은 면허를 받을 때까지 대강 15시간가량 운전 실습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보고하자 박정희 교장은 다시 지시했다.
“그러면 민간 차원으로 교육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추가로 필요한 교육 기간, 차량, 유류 소모량, 그리고 예산이 얼마인지 산출해서 보고하시오.”
오정석 중령은 추가 소요를 작성하여 학교장에게 올렸고 박정희는 육군본부 회의에 참석하여 이를 건의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광주포병학교장 박정희 준장은 1955년 4월 24일에는 학생대대 중대장 崔忠烈(최충렬) 대위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학생대장 洪鍾哲(홍종철·청와대 경호실장, 문공부 장관 역임) 중령이 박 교장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주례사에서 “이북 출신인 최 대위가 가정을 가짐으로써 외로움을 덜게 된 것을 축하하며 동료들은 이 가정을 도와주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최충렬 대위에 따르면 박정희 교장은 미군으로부터 받아오는 비상식량 시레이션으로 아침식사를 양식으로 만들어 장교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다른 부대와 마찬가지로 포병학교도 厚生(후생) 사업을 하고 있었다. 부대의 트럭들을 화순의 벌목업자에게 빌려 주어 수입을 올렸다. 이 수입을 박정희 교장은 공개적으로 아주 공정하게 나누었다고 한다.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는 금액을 봉투에 집어넣어 참모들에게 직접 돌렸다고 한다. 트럭 임대료를 장작으로 받기도 했다. 박 교장은 이 장작을 연병장에 쌓아 놓고는 배분비율을 정해 주고 장교들이 越冬用(월동용)으로 가져가도록 했다.
박정희는 포병학교에서 그 뒤 25년간 동반자가 될 당번병 朴煥榮(박환영) 일병과 운전병 李他官(이타관) 상병을 만났다. 박 일병을 뽑아 올린 것은 행정처 李洛善(이낙선·국세청장, 상공부 장관 역임·작고) 소령이었다. 박환영은 ‘말을 건네기가 힘들 정도로 무섭게 보이던’ 박정희가 알고 보니 그렇게 자상하고 따뜻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놀랐다고 한다.
박정희는 처음 두 달가량은 “박 병사”라고 부르더니 그 뒤로는 “환영아!”라고 했다. 박정희가 고향을 물어 “옥천입니다”라고 했더니 “옥천이면 내 장인 알겠네”라고 했다. 박정희는 “잘 만났다”면서 퇴근길에 박환영 일병을 데리고 관사로 갔다. 관사는 넓고 낡은 일본식 木造(목조) 건물이었다. 응접실과 욕실까지 있으니 서울 고사북동 시절보다는 한결 좋아진 셈이었다. 육영수와 근혜는 당번병 박환영을 “아저씨”라고 불렀다. 뜰에는 서너 그루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아래엔 탁구대가 있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일요일엔 탁구를 즐겼다. 박정희는 당번병을 결코 下人(하인)처럼 대하지 않고 식구처럼 대했다. 최근까지도 신당동의 박정희 私邸(사저) 관리인이었던 박환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분은 아무리 잘못해도 처음 한두 번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쯤 실수하면 그때는 납득할 만큼 따끔하게 나무라시지요. 저에게는 평생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박정희는 그때 ‘공작’담배를 즐겨 피웠고 커피를 좋아했다. 그리고 항상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박환영에 이어 운전병으로 뽑혀 왔다가 10·26 사건 때까지 박정희를 모신 이타관 상병(작고)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인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인간차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생전에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는 술을 마시러 갈 때도 무작정 기다리게 하지 않고 ‘몇 시까지 다시 오라’고 배려해 주었다. 이타관, 박환영 두 사람은 관사의 한 방에서 같이 기거하며 육영수가 해주는 식사를 했다.
일과 사람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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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01, 16: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