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7/자신을 아끼던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용퇴를 권하는 편지를 쓰다.
1960년 4월26일 李承晩 대통령 下野 이후 온 나라에 불어 닥친 혁명적 분위기는 박정희 소장을 격동시켰다. 5월2일 박정희는 육사 11기 작전장교 손영길 대위를 불렀다. 李洛善(이낙선)이 작성한 《5·16 증언록》에서 손영길 대위는 이렇게 기억했다.
<박정희: “손 대위, 위관급 장교들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지금 모든 분야에서 혁신의 분위기가 있는데도 군부에서만은 이렇다 할 혁신의 기운이 없다. 서울에서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우리 사령부 내의 위관급 장교들 동태는 어떤가?”
손영길: “대부분의 장교들은 과거에 부정선거를 지시한 부정 장성들이 건재하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입니다. 젊은 장교들은 지휘관들을 불신임하고 있는 경향입니다.”
박정희: “(편지봉투를 전하면서) 이걸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전달하게.” >
손영길 대위는 이날 오후 편지봉투를 들고 L─19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갔다.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실에 근무하는 동기생 김 대위를 통해 이 서신을 전달했다. ‘5·16 혁명의 史官(사관)’ 이낙선은 문제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고 적었다.
<참모총장 각하.
多難(다난)한 계엄 업무와 군내의 諸(제)업무의 처리에 골몰하심을 위로드리는 바입니다. 각하로부터 많은 恩顧(은고)를 입으며 각하를 존경함에 누구 못지않을 본인이 지금 그 높으신 은공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각하의 처신을 그르치지 않게 충고 드리옴이 유일한 방도일까 짐작되옵니다.
지금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선거 부정 관리의 책임으로 규탄되고 있으며 군 역시나 내부적, 외부적 양면에서 이와 같은 비난과 淨化(정화)에서 예외될 수는 없을 것이오니 未久(미구)에 닥쳐올 격동의 냉각기에는 이것이 문제화될 것은 明若觀火(명약관화)한 일이며 현재 일부 국회 국방위원들이 對軍(대군) 추궁을 위한 증거 자료를 수집 중임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옵니다.
卑見(비견)이오나 군은 上命下服(상명하복)의 엄숙한 통수 계통에 있는 것이므로 군의 최고명령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 각하께서는 4·19 이후의 민주적인 제반처사에 의하여 絶讚(절찬)을 받으시오니 부정의 책임감은 희박해지며 국민이 보내는 갈채만을 기억하시겠습니다마는 사실은 不日內(불일내)에 밝혀질 것입니다. 차라리 국민이 아쉬워할 이 시기를 놓치지 마시고 처신을 배려하심이 각하의 장래를 보장하며 과거를 장식케 하는 유일한 방도일까 아뢰옵니다.
4·19 사태를 민주적으로 원만히 수습하신 각하의 공적이 절찬에 값하는 바임은 물론이오나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도 또한 결코 면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功過(공과)는 相殺(상쇄)가 불가능한 사실에 비추어 가급 조속히 進退(진퇴)를 英斷(영단)하심이 국민과 군의 眞意(진의)에 迎合(영합)되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현명한 상관은 부하의 誠心(성심)을 수락함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별한 은혜를 입은 부하로서 각하를 길이 받들려는 微忠(미충)에서 감히 진언드리는 충고를 경청하시어 성심에 답하는 裁量(재량) 있으시기를 伏望(복망)하옵니다.
외람되오나 각하와의 두터운 신의에 의지하여 이 글을 올리오니 두루 解諒(해량)하시와 본인으로서의 심사숙고된 성심을 참작하여 주시기 아뢰옵나이다>
그동안 박정희가 송요찬에게서 입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이 편지는 독한 마음을 품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私情(사정)을 모질게 끊고 송요찬의 용퇴를 건의한 것이다. 이때 송요찬은 계엄군이 4·19 때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의 하야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하여 국민적 인기가 높았다. 미국 정부도 한때 그를 과도 정부 수반으로 밀어 줄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송 장군에게 匕首(비수)와 같은 편지를 써 올린 박정희는 이 행동으로써 격랑이 일고 있는 시대 상황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것은 상황의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이 되겠다는 결단이었다.
5월 2일 허정 과도 정부 내각 수반은 국방장관에 이종찬 전 육대 총장을 임명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박정희와 함께 이승만 정권의 전복을 생각했고 한때는 많은 청년 장교들에 의해서 군사 혁명의 지도자로 지목받고 있었던 이종찬의 장관 취임은 박정희에게 상당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종찬은 송요찬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편지를 받은 송요찬의 심경을, 이낙선은 《正義(정의)의 受難(수난)》이란 기록에서 다소 소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송 총장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았다.
“빨갱이 같은 놈! 부정선거에 내가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또 책임이 있다 치더라도 4·19 이후의 처신이 충분히 그것을 속죄했다고 언론이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저를 애써 승급시키고 등용하고 있는데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온 세상이 나를 칭찬하는데 네가 나를 잡아먹어?”
분을 못 이긴 송 총장은 문제의 서신을 움켜쥐고 박정희 소장을 경계하는 여러 장성과 고위층에 이를 회람시켰다. 고민의 며칠 밤을 지낸 5월 5일 송 총장은 곰곰이 생각한 결심 하나를 실천에 옮겼다. 육군본부의 전 장병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사무치는 분노와 危懼感(위구감)을 폭발시킨 것이다.
“4·19 사태의 수습에 있어서 우리 군은 본인의 지휘하에 원만히 그 소임을 다하여 靑史(청사)에 남는 위업을 달성한 것인데 지금 일부에서는 이 성스러운 성과를 시기하며 파괴하려 드는 불순분자가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겠지만 이렇듯 下剋上(하극상)의 풍조를 선동하여 군 상하 간의 불신을 야기하며 단결을 와해시켜 북괴에 이익을 주는 따위의 행위는 단연코 배격되어야 한다.”>
이낙선의 《5·16 증언록》에 따르면 육본 정보국 기획과장 김종필 중령은 이 연병장 연설의 분위기에 대해서 이런 증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이미 중견 장교들의 동향이 뭉치기 시작한 때이고 연설 도중에 (장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해서 육본의 공기는 險惡一路(험악일로)가 되었다>
5월 6일 김종필 중령은 ‘육본의 공기와 그동안의 동향을 보고차 下釜(하부), 박 장군 숙소에서 투쟁 방법의 표면화(육본의 동지 규합을 위해)를 進言(진언)했다’는 것이다.
5월 8일,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출신 장교들은 整軍(정군)을 요구하는 連判狀(연판장)을 작성하여 상부에 제출하려다가 탄로가 난다.
1961년 1월12일 육군본부 본청 2층 정책회의실에서 개인 보안심사위원회가 열렸다. 군 방첩 기관에서 적색, 혹은 회색으로 분류해 온 군인들에 대한 사상적 성분 검토를 하여 ‘전역’, ‘無睾(무고)’ 판정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이 위원회는 甲班(갑반)과 乙班(을반)으로 나뉘어져 갑반은 중령 이상 장교들을 다루고, 을반은 그 이하를 취급했다.
갑반 위원회의 구성은 참모차장을 비롯한 작전, 군수, 관리참모부장, 육군방첩대장, 그리고 1, 2군 사령부의 보안 책임자였다. 1958년부터 방첩대의 전신인 특무부대에선 사상 성분에 문제가 있는 장교들에게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하고 전역시키는 案(안)을 상부에 건의해 왔다. 여기에 해당하는 장성급 인사는 두 사람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미군이 박정희를 내몰려고 하는 가운데 이 보안 부적격자 처리 문제가 재론되었다. 이날 비밀회의는 ‘박정희 소장에 대해서, 좌익전력자로서 비밀 취급 인가를 받기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예편시키기로 결의했다’고 이낙선은 5·16 직후에 쓴 手記(수기)에서 주장하였다.
<이 결의가 즉각 탐지됨으로써 혁명 촉진의 자극제가 되었다는 것은 전화위복이었다. 그 후의 이야기이지만 5·16 혁명이 일어나자 이틀 후에 육본에서는 모 처장의 제의로 개인 보안 심사를 재심의하여 박 소장의 거세를 위한 정책적인 조치이던 엉터리 결의를 무효화하고 관계 서류를 감쪽같이 지워 버렸으니 허무한 세상이랄 수밖에 없다>
2군 부사령관으로 밀려 나 있던 박정희는 광복 직후의 좌우익 對決期(대결기)에 좌익 모험을 한 것이 평생 꼬리표가 되어 그를 따라다니는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이로부터 오는 강박관념이 그를 절박하게 혁명의 길로 몰아붙였다. 혁명이냐, 강제 轉役이냐의 시간싸움이기도 했다. 혁명 모의엔 박정희의 구국일념에 못지 않게 이러한 개인적 이해관계도 걸려 있었다. 목숨을 던지는 일대 승부를 결단하는 데는 내면적인 요인에 못지않은 외부로부터의 압박이 작동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오랜 친구이던 具常(구상)은 당시의 박정희를 <木瓜(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 란 自傳詩(자전시)에서 이렇게 그렸다.
<歸路(귀로), 大邱(대구)서 만난 將軍(장군) 朴正熙(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내가 避靜(피정: 가톨릭 용어로 묵상의 뜻)의 餘韻(여운)으로 화제를 灑落(쇄락)으로 몰고 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여 연발하며 鞭聲肅肅夜渡河曉見千兵擁大牙(편성숙숙야도하효견천병옹대아: 일본 전국시대의 대결전을 노래한 한시의 구절. 그 뜻은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大將旗(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이다)란 일본 詩吟(시음)을 되풀이해 불렀다.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4·19의 젊은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 단상을 점령하는가 하면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마저 해방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2군 부사령관은 1개 소대도 동원할 수 없는 자리였다. 박정희가 직책과 직권에 의존하여 쿠데타를 계획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를 2군 부사령관으로 보내는 것만으로 後患(후환)을 제거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박정희는 국가개조에 대한 공감과 자신의 인격을 바탕으로 하여 인맥을 구축한 것이지 직책에서 나오는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박정희에게는 2군 부사령관이란, 실권이 없는 대신 시간이 많은 자리가 오히려 혁명 모의에 적합했다.
2군 참모장은 만주군 시절부터의 친구인 이주일 소장이었고 대구에 이웃한 영천의 정보학교장은 박정희가 군에서 추방되어 불우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도 그를 따랐던 육사 2기 동기인 한웅진 준장이었다. 이 두 사람은 4·19 이전의 이승만 타도 쿠데타 모의 때부터 가담하였다. 한웅진은 박정희와 함께 포섭 대상자들을 고르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의 ‘인물 지식’에 놀랐다고 한다.
“이 친구는 입이 가벼워. 이 친구는 ○○○ 사람이야. 이 사람은 가만히 놓아두어도 우리 편을 들 사람이니 굳이 포섭할 필요가 없어.”
박정희는 이런 식으로 장교들의 특성과 자질을 줄줄 꿰고 있더라고 한다. 인간에 대한 好(호), 不好(불호)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던 박정희이지만 그는 예리한 인간 관찰을 해왔고 혁명 조직을 짜는 데 그 축적된 지식이 한몫을 했다. 공자는 ‘지식’을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능력’이라고 요약했다. 박정희는 주변에 다양한 인물들을 모아서 그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일을 맡길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박종홍과 같은 철학자와 金正濂(김정렴) 같은 모범생과 이후락 같은 智謀人(지모인)과 김형욱과 같은 거친 인물을 상호 모순 없이 쓰고 부렸다. 그를 두고 ‘청탁을 함께 들이마신 사람, 그러나 자신의 혼을 오염시키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것도 사람을 다루는 안목의 다양성과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나라를 뒤집고 새로 세우는 일에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만 있어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전략과 정보에 밝은 박정희는 5·16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도 그 작전의 원리를 적용했다. 서울에 소재한 정권의 사령탑을 기습하여 그 기능을 일거에 마비시키는 집중의 원칙이 그것이었다. 장면 총리의 체포와 방송국 및 육군본부의 점령이 쿠데타 작전의 핵심이었다. 박정희는 또 이 쿠데타가 군부 내의 일파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되면 작전 지휘권을 쥔 미군에 의해서 손쉽게 진압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서는 육군 참모총장이 지휘하는 全軍(전군)의 거사라는 간판을 걸어야 했다. 이 때문에 참모총장을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경록 총장은 박정희에게 비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조종할 자신이 있다고 판단한 장도영 2군 사령관을 총장으로 밀려고 했다. 1960년 말 박정희는 한웅진과 張坰淳(장경순·국회 부의장, 농림부 장관 역임) 준장을 방첩부대장과 9사단장으로 보내 비밀의 누설에 대비하고 수도권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데 쓰려고 인사 운동을 했으나 실패했다.
5·16의 결정적인 요인은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간 관계였다. 나이는 여섯 살 아래인 직속상관 장도영은 박정희의 磁場(자장) 안에 들어 있었다. 장도영의 박정희에 대한 높은 평가와 그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뒤섞인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숙명적 관계는 권력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선 피해자와 가해자로 갈리게 마련이었다.
1960년 4월26일 李承晩 대통령 下野 이후 온 나라에 불어 닥친 혁명적 분위기는 박정희 소장을 격동시켰다. 5월2일 박정희는 육사 11기 작전장교 손영길 대위를 불렀다. 李洛善(이낙선)이 작성한 《5·16 증언록》에서 손영길 대위는 이렇게 기억했다.
<박정희: “손 대위, 위관급 장교들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지금 모든 분야에서 혁신의 분위기가 있는데도 군부에서만은 이렇다 할 혁신의 기운이 없다. 서울에서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혁신을 부르짖고 있다. 우리 사령부 내의 위관급 장교들 동태는 어떤가?”
손영길: “대부분의 장교들은 과거에 부정선거를 지시한 부정 장성들이 건재하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입니다. 젊은 장교들은 지휘관들을 불신임하고 있는 경향입니다.”
박정희: “(편지봉투를 전하면서) 이걸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전달하게.” >
손영길 대위는 이날 오후 편지봉투를 들고 L─19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갔다. 송요찬 육군 참모총장실에 근무하는 동기생 김 대위를 통해 이 서신을 전달했다. ‘5·16 혁명의 史官(사관)’ 이낙선은 문제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고 적었다.
<참모총장 각하.
多難(다난)한 계엄 업무와 군내의 諸(제)업무의 처리에 골몰하심을 위로드리는 바입니다. 각하로부터 많은 恩顧(은고)를 입으며 각하를 존경함에 누구 못지않을 본인이 지금 그 높으신 은공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각하의 처신을 그르치지 않게 충고 드리옴이 유일한 방도일까 짐작되옵니다.
지금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선거 부정 관리의 책임으로 규탄되고 있으며 군 역시나 내부적, 외부적 양면에서 이와 같은 비난과 淨化(정화)에서 예외될 수는 없을 것이오니 未久(미구)에 닥쳐올 격동의 냉각기에는 이것이 문제화될 것은 明若觀火(명약관화)한 일이며 현재 일부 국회 국방위원들이 對軍(대군) 추궁을 위한 증거 자료를 수집 중임도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옵니다.
卑見(비견)이오나 군은 上命下服(상명하복)의 엄숙한 통수 계통에 있는 것이므로 군의 최고명령자인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시어 정화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자진 용퇴하신다면 얼마나 떳떳한 것이겠습니까. 각하께서는 4·19 이후의 민주적인 제반처사에 의하여 絶讚(절찬)을 받으시오니 부정의 책임감은 희박해지며 국민이 보내는 갈채만을 기억하시겠습니다마는 사실은 不日內(불일내)에 밝혀질 것입니다. 차라리 국민이 아쉬워할 이 시기를 놓치지 마시고 처신을 배려하심이 각하의 장래를 보장하며 과거를 장식케 하는 유일한 방도일까 아뢰옵니다.
4·19 사태를 민주적으로 원만히 수습하신 각하의 공적이 절찬에 값하는 바임은 물론이오나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도 또한 결코 면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功過(공과)는 相殺(상쇄)가 불가능한 사실에 비추어 가급 조속히 進退(진퇴)를 英斷(영단)하심이 국민과 군의 眞意(진의)에 迎合(영합)되는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현명한 상관은 부하의 誠心(성심)을 수락함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각별한 은혜를 입은 부하로서 각하를 길이 받들려는 微忠(미충)에서 감히 진언드리는 충고를 경청하시어 성심에 답하는 裁量(재량) 있으시기를 伏望(복망)하옵니다.
외람되오나 각하와의 두터운 신의에 의지하여 이 글을 올리오니 두루 解諒(해량)하시와 본인으로서의 심사숙고된 성심을 참작하여 주시기 아뢰옵나이다>
그동안 박정희가 송요찬에게서 입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이 편지는 독한 마음을 품고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私情(사정)을 모질게 끊고 송요찬의 용퇴를 건의한 것이다. 이때 송요찬은 계엄군이 4·19 때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의 하야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하여 국민적 인기가 높았다. 미국 정부도 한때 그를 과도 정부 수반으로 밀어 줄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송 장군에게 匕首(비수)와 같은 편지를 써 올린 박정희는 이 행동으로써 격랑이 일고 있는 시대 상황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것은 상황의 구경꾼이 아닌 주인공이 되겠다는 결단이었다.
5월 2일 허정 과도 정부 내각 수반은 국방장관에 이종찬 전 육대 총장을 임명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때 박정희와 함께 이승만 정권의 전복을 생각했고 한때는 많은 청년 장교들에 의해서 군사 혁명의 지도자로 지목받고 있었던 이종찬의 장관 취임은 박정희에게 상당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종찬은 송요찬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편지를 받은 송요찬의 심경을, 이낙선은 《正義(정의)의 受難(수난)》이란 기록에서 다소 소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송 총장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았다.
“빨갱이 같은 놈! 부정선거에 내가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인가. 또 책임이 있다 치더라도 4·19 이후의 처신이 충분히 그것을 속죄했다고 언론이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저를 애써 승급시키고 등용하고 있는데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온 세상이 나를 칭찬하는데 네가 나를 잡아먹어?”
분을 못 이긴 송 총장은 문제의 서신을 움켜쥐고 박정희 소장을 경계하는 여러 장성과 고위층에 이를 회람시켰다. 고민의 며칠 밤을 지낸 5월 5일 송 총장은 곰곰이 생각한 결심 하나를 실천에 옮겼다. 육군본부의 전 장병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사무치는 분노와 危懼感(위구감)을 폭발시킨 것이다.
“4·19 사태의 수습에 있어서 우리 군은 본인의 지휘하에 원만히 그 소임을 다하여 靑史(청사)에 남는 위업을 달성한 것인데 지금 일부에서는 이 성스러운 성과를 시기하며 파괴하려 드는 불순분자가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라고 지칭하지는 않겠지만 이렇듯 下剋上(하극상)의 풍조를 선동하여 군 상하 간의 불신을 야기하며 단결을 와해시켜 북괴에 이익을 주는 따위의 행위는 단연코 배격되어야 한다.”>
이낙선의 《5·16 증언록》에 따르면 육본 정보국 기획과장 김종필 중령은 이 연병장 연설의 분위기에 대해서 이런 증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이미 중견 장교들의 동향이 뭉치기 시작한 때이고 연설 도중에 (장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해서 육본의 공기는 險惡一路(험악일로)가 되었다>
5월 6일 김종필 중령은 ‘육본의 공기와 그동안의 동향을 보고차 下釜(하부), 박 장군 숙소에서 투쟁 방법의 표면화(육본의 동지 규합을 위해)를 進言(진언)했다’는 것이다.
5월 8일,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 출신 장교들은 整軍(정군)을 요구하는 連判狀(연판장)을 작성하여 상부에 제출하려다가 탄로가 난다.
1961년 1월12일 육군본부 본청 2층 정책회의실에서 개인 보안심사위원회가 열렸다. 군 방첩 기관에서 적색, 혹은 회색으로 분류해 온 군인들에 대한 사상적 성분 검토를 하여 ‘전역’, ‘無睾(무고)’ 판정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이 위원회는 甲班(갑반)과 乙班(을반)으로 나뉘어져 갑반은 중령 이상 장교들을 다루고, 을반은 그 이하를 취급했다.
갑반 위원회의 구성은 참모차장을 비롯한 작전, 군수, 관리참모부장, 육군방첩대장, 그리고 1, 2군 사령부의 보안 책임자였다. 1958년부터 방첩대의 전신인 특무부대에선 사상 성분에 문제가 있는 장교들에게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하고 전역시키는 案(안)을 상부에 건의해 왔다. 여기에 해당하는 장성급 인사는 두 사람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미군이 박정희를 내몰려고 하는 가운데 이 보안 부적격자 처리 문제가 재론되었다. 이날 비밀회의는 ‘박정희 소장에 대해서, 좌익전력자로서 비밀 취급 인가를 받기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예편시키기로 결의했다’고 이낙선은 5·16 직후에 쓴 手記(수기)에서 주장하였다.
<이 결의가 즉각 탐지됨으로써 혁명 촉진의 자극제가 되었다는 것은 전화위복이었다. 그 후의 이야기이지만 5·16 혁명이 일어나자 이틀 후에 육본에서는 모 처장의 제의로 개인 보안 심사를 재심의하여 박 소장의 거세를 위한 정책적인 조치이던 엉터리 결의를 무효화하고 관계 서류를 감쪽같이 지워 버렸으니 허무한 세상이랄 수밖에 없다>
2군 부사령관으로 밀려 나 있던 박정희는 광복 직후의 좌우익 對決期(대결기)에 좌익 모험을 한 것이 평생 꼬리표가 되어 그를 따라다니는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이로부터 오는 강박관념이 그를 절박하게 혁명의 길로 몰아붙였다. 혁명이냐, 강제 轉役이냐의 시간싸움이기도 했다. 혁명 모의엔 박정희의 구국일념에 못지 않게 이러한 개인적 이해관계도 걸려 있었다. 목숨을 던지는 일대 승부를 결단하는 데는 내면적인 요인에 못지않은 외부로부터의 압박이 작동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오랜 친구이던 具常(구상)은 당시의 박정희를 <木瓜(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 란 自傳詩(자전시)에서 이렇게 그렸다.
<歸路(귀로), 大邱(대구)서 만난 將軍(장군) 朴正熙(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내가 避靜(피정: 가톨릭 용어로 묵상의 뜻)의 餘韻(여운)으로 화제를 灑落(쇄락)으로 몰고 가도 “해치워야 해”를 주정 섞여 연발하며 鞭聲肅肅夜渡河曉見千兵擁大牙(편성숙숙야도하효견천병옹대아: 일본 전국시대의 대결전을 노래한 한시의 구절. 그 뜻은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大將旗(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이다)란 일본 詩吟(시음)을 되풀이해 불렀다.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4·19의 젊은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 단상을 점령하는가 하면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마저 해방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2군 부사령관은 1개 소대도 동원할 수 없는 자리였다. 박정희가 직책과 직권에 의존하여 쿠데타를 계획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를 2군 부사령관으로 보내는 것만으로 後患(후환)을 제거했다고 볼 수 있었다. 박정희는 국가개조에 대한 공감과 자신의 인격을 바탕으로 하여 인맥을 구축한 것이지 직책에서 나오는 영향력을 바탕으로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박정희에게는 2군 부사령관이란, 실권이 없는 대신 시간이 많은 자리가 오히려 혁명 모의에 적합했다.
2군 참모장은 만주군 시절부터의 친구인 이주일 소장이었고 대구에 이웃한 영천의 정보학교장은 박정희가 군에서 추방되어 불우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도 그를 따랐던 육사 2기 동기인 한웅진 준장이었다. 이 두 사람은 4·19 이전의 이승만 타도 쿠데타 모의 때부터 가담하였다. 한웅진은 박정희와 함께 포섭 대상자들을 고르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의 ‘인물 지식’에 놀랐다고 한다.
“이 친구는 입이 가벼워. 이 친구는 ○○○ 사람이야. 이 사람은 가만히 놓아두어도 우리 편을 들 사람이니 굳이 포섭할 필요가 없어.”
박정희는 이런 식으로 장교들의 특성과 자질을 줄줄 꿰고 있더라고 한다. 인간에 대한 好(호), 不好(불호)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던 박정희이지만 그는 예리한 인간 관찰을 해왔고 혁명 조직을 짜는 데 그 축적된 지식이 한몫을 했다. 공자는 ‘지식’을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쓰는 능력’이라고 요약했다. 박정희는 주변에 다양한 인물들을 모아서 그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일을 맡길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박종홍과 같은 철학자와 金正濂(김정렴) 같은 모범생과 이후락 같은 智謀人(지모인)과 김형욱과 같은 거친 인물을 상호 모순 없이 쓰고 부렸다. 그를 두고 ‘청탁을 함께 들이마신 사람, 그러나 자신의 혼을 오염시키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하는 것도 사람을 다루는 안목의 다양성과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나라를 뒤집고 새로 세우는 일에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만 있어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전략과 정보에 밝은 박정희는 5·16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도 그 작전의 원리를 적용했다. 서울에 소재한 정권의 사령탑을 기습하여 그 기능을 일거에 마비시키는 집중의 원칙이 그것이었다. 장면 총리의 체포와 방송국 및 육군본부의 점령이 쿠데타 작전의 핵심이었다. 박정희는 또 이 쿠데타가 군부 내의 일파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되면 작전 지휘권을 쥔 미군에 의해서 손쉽게 진압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서는 육군 참모총장이 지휘하는 全軍(전군)의 거사라는 간판을 걸어야 했다. 이 때문에 참모총장을 포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최경록 총장은 박정희에게 비우호적인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조종할 자신이 있다고 판단한 장도영 2군 사령관을 총장으로 밀려고 했다. 1960년 말 박정희는 한웅진과 張坰淳(장경순·국회 부의장, 농림부 장관 역임) 준장을 방첩부대장과 9사단장으로 보내 비밀의 누설에 대비하고 수도권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데 쓰려고 인사 운동을 했으나 실패했다.
5·16의 결정적인 요인은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간 관계였다. 나이는 여섯 살 아래인 직속상관 장도영은 박정희의 磁場(자장) 안에 들어 있었다. 장도영의 박정희에 대한 높은 평가와 그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뒤섞인 결과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숙명적 관계는 권력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선 피해자와 가해자로 갈리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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