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대구사범 동기생들을 주변에 많이 데려다놓았다. 서정귀(호남정유 사장 역임), 조증출(문화방송 사장 역임), 왕학수(부산일보 사장 역임), 황용주(문화방송 사장 역임), 권상하(대통령 정무비서관 역임)는 많이 알려진 경우이고 金昞熙(김병희·한양대 문리대학장 역임)는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고서 박정희를 도운 사람이다. 박정희 의장은 대구사범 때부터 단짝이던 김병희를 은사 김영기 선생 회갑연에서 만나자마자 학창시절에 했던 장난대로 김병희의 귀를 잡아 비틀고는 식장까지 끌고 갔다.
반도호텔에서 최고회의 주최로 파티가 열렸을 때 당시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이던 김병희도 초청을 받아 갔다. 박 의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박정희는 김병희를 발견하자 곧장 다가왔다. 참석자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주목하고 있는데 박정희는 김병희와 악수를 나눈 뒤 수행원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나의 대구사범 동기인데 한양대학교 문리대학장이시다. 한 사람씩 인사드려!…병희야, 나를 좀 도와줘.”
“수학을 하는 내가 도울 일이 있나.”
김 교수는 사양했지만 다음날 金容珣(김용순·중앙정보부장 역임) 최고위원이 찾아와 학생문제담당 상임자문위원 자리를 권했다. 그렇게 하여 김병희는 최고회의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박정희가 불렀다. 박 의장은 김병희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대뜸 한다는 말이 “이 자식아, 한 건물 안에 있으면서 왜 안 왔지?”였다. 김병희는 “야, 지금 여기 들어오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이 아까워서도 자주 올 수야 없지”라고 했다. 박 의장은 부관을 부르더니 “김병희 교수만은 무상출입시켜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김병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친구 박정희를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의장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첫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우동 한 사발과 노랑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1961년 5.16 쿠데타로써 무서운 권력자로 변한 박정희는 소박한 인간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육사 생도들을 혁명 지지 시위에 동원하는 데 일역을 맡았다가 박정희의 경호원이 된 육사 11기 이상훈(전 국방장관) 대위는 광주에서 열린 혁명 지지 대회에 참석한 朴 의장을 수행하여 작은 호텔에 들었다. 한밤중에 호텔 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데 화장실을 겸한 세면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李 대위가 가보니 박정희 의장이 양말을 빨아 줄에 널고 있었다. 양말이 신고 온 한 켤레밖에 없어 밤에 몰래 나와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李 대위에게 들킨 박정희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박정희는 양말, 손수건, 그리고 팬티를 직접 빨곤 하였다. 부인한테 맡기지도 않았다. 지방 순시중 묵게 되는 호텔이냐 여관방에서 나올 때는 항상 깨끗히 정리해놓곤 했다. 이런 습관은 오랜 군인 생활에서 익힌 것으로 보이지만 좀 심한 편이었다. 이불을 개어놓고, 슬리퍼는 가지런히 놓고, 화장실안도 간단한 청소를 해놓았다. 경호원에겐 베개 밑에 팁을 넣어두도록 시켰다. 박정희는 의장시절, 대통령 시절을 통틀어 아랫사람들에게 좀처럼 반말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의 이발사, 보일러공, 청소부들에게 꼭 존대를 하였다. 사람차별을 하지 않는 권력자였다. 골프를 치고 식사를 할 때도 캐디 아가씨들을 불러 함께 하였다.
박 대통령은 八자 걸음을 걸어 구두 뒷축이 비스듬히 깎이곤 하였다. 그러면 대통령은 오른쪽, 왼쪽 뒷축을 서로 바꿔달게 하였다. 와이셔츠의 소매 끝이 헤어지면 그 부분만 바꿔 달고 계속 입었다. 나중에 살이 쪄서 바지의 허리가 조이면 이를 넓히는 수선을 시켰다.
朴 대통령은 구두를 항상 반들반들하게 하고 다녔다. 골프백은 구멍이 날 때까지 거의 10년간 사용하였다. 경호원이 골프백을 멋대로 새것으로 바꿨다가 혼이 났다. 대통령은 헌것을 다시 찾아오게 하였다.
李承晩 대통령의 절약정신도 유명하다. 이화장에 가 보면 대통령 시절에 지나간 타임지를 스크랩북으로 사용한 것이 보인다. 마분지 상자를 잘라 옷장으로 쓴 것도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電球를 양말속에 집어넣어 헤진 양말을 깁기도 하였다. 연필을 쓰다가 짧아지면 긴 뚜껑을 끼워 사용하였다.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부분에서도 當代의 1등 선수들이었다.
몇년 전 故朴正熙 대통령의 아들 志晩씨를 만났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생명을 사랑하신 분이셨어요.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 나무 꽃 강아지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쪽으로 아버지에 대해서 쓴 글이 없더군요'
그 말을 듣고보니 朴正熙 일기가 생각났다. 그의 일기엔 낙엽, 꽃, 나무, 구름 등에 대한 감상적 표현들이 아주 많다. 작은 것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 같은 것이다. 그의 일기는 권력자의 日記가 아니라 소학생의 日記처럼 순수하다. 너무 꾸밈이 없어 '대통령이란 분의 일기에 깊은 맛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당시 朴대통령과 비슷한 나이가 되어 보니 절대적 권력을 잡고도 소학생과 같은 순수한 정신을 유지했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순진한 것은 모를 때 이야기이고 순수한 것은 이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다 알고 겪고 나서도 맑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 淸濁을 다 들여마시되 맑은 魂을 유지하는 자세이다.
朴대통령이 山林녹화를 성공시킨 것도 나무를 하나의 생명체로서 사랑한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朴 대통령은 工團이나 아파트 단지를 지을 때 造景(조경)개념을 도입하도록 한 분이다. 그는 公害산업을 멀리하고, 환경보전을 국가정책으로 삼는 데도 매우 빨랐다. 그는 출장을 가다가도 자연친화적 분위기가 좋은 곳을 골라 쉬고 그런 곳에 있는 음식점을 찾곤 하였다. 타고난 듯 審美眼이 높은 분이었다. 그가 좋아한 여성들도 인물이 좋았다. 그가 자주 찾았던 음식점들은 지금도 잘 된다. 요컨대 아름다움을 아는 눈을 가진 이였다. 眞善美 가운데 美가 가장 중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저절로 진실되고 착해진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이 나무에 대해서 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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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 사람과 같이 대접해야”
1975년 8월 27일.
대통령은 이발을 하고 나서 기자실에 들렀다. 그곳에 있던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집에 별 일 없지요”라고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은 산림녹화 사업에 관한 생각들을 이야기했다.
“전에 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산들이 모두 기계충에 걸린 것처럼 흙이 많이 보여서 마음이 삭막했었는데, 요즈음은 모두 푸르게 변해 마음도 시원해요. 등산로를 제외하고는 입산 금지시키는 것을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산림녹화의 비방은 무엇입니까?”
“나무도 사람과 같이 생각해서 대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산에 가보면 알겠지만, 나무도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해요. 등산로 근처의 나무들은 시들거나 축 늘어져 있는 데 반해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한적한 곳에 있는 나무들은 싱싱하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어요. 내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삼성의 이병철 씨가 용인공원을 만들기 전에 산림에 관계되는 대학 교수들을 만나 산림녹화 방법을 물어봤는데, 그때 어떤 교수가 아무런 수식사도 없이 ‘입산 금지를 시키면 됩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철 씨는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답니다. 뒤에 이병철 씨가 일본에 가서 총독부 시절 산림에 관한 일을 한 총독부 관리를 만나보았는데, 그 사람도 같은 얘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시험해 보니 그게 진리더라고 이병철 씨가 나에게 얘기했어요. 그 후 그 교수를 찾아가서 사의를 표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나에게 지금은 장작을 때지 않으니까 산을 자연 그대로 두고 해충약이나 뿌려 주고 비료를 주면 우리 나라도 산림대국이 될 수 있다고 권하더군요.'
박정희 의장의 양말과 관계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5·16 당시 국무원 사무처 보도과장은 국방부 보도과장 출신 李容相(이용상)이었다. 혁명 정부하에서는 공보부의 보도처 보도과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박정희가 9사단 참모장일 때 그 밑에서 정훈부장으로 근무했던 이용상 시인은 계급을 떠나서 박정희 집안과 인간적으로 친밀했다.
기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용상에게 박정희 의장과의 기자회견을 주선해 달라고 졸랐다. 이용상은 장충동의 의장 공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육영수가 받았다. 박 의장이 언제 돌아온다는 것만 확인했다. 이용상은 중앙청 출입기자들을 데리고 무턱대고 장충동으로 갔다.
박정희는 외출에서 돌아오더니 발을 씻고는 양말도 신지 않은 채 회견 장소에 나와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낙선 소령이 호주머니 속에 양말을 넣고 와서 박 의장에게 귀엣말로 “사진기자들도 왔으니 양말을 신으시지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큰 소리로 “발은 찍지 말라고 해!”라고 하면서 끝까지 맨발로 기자회견을 했다. 한국일보 尹宗鉉(윤종현) 기자가 “박 의장님은 주량이 어느 정도입니까” 하고 물었다.
“내 주량은 여기 있는 이용상 동지에게 물어 보시오.”
윤 기자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아닙니다. 이용상 과장의 주량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묻는 것은 의장님의 주량입니다.”
“아마, 이용상 동지 주량은 여러분들도 잘 모르실 겁니다. 이분은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가는 데 일주일이 걸리는 사람이에요. 중간, 중간에 있는 술집을 다 들러야 하거든요.”
5·16 혁명 직후 박정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는 洪得萬(홍득만) 중사가 있다. 그는 5·16이 났을 때 육군 참모차장실 선임 하사관이었다. 그는 1952년 박정희가 대구에서 육본 작전국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그 밑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어느 날 일직사령 박정희 대령이 사병들을 집합시켰다. 홍 중사가 “집합 완료”를 보고하자 박정희는 “전원 모자 벗어!”라고 명령했다. 사병들의 두발 상태가 불량함을 확인한 박 대령은 “가서 가위 가져와”라고 했다.
박정희는 두발 상태가 가장 단정한 홍 중사의 머리칼을 싹둑 자른 뒤 “해산시켜”라고 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가 버렸다. 홍 중사는 박 대령에게 찾아가서 “명색이 제가 하사관인데 이렇게 하시면 부하들이 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하고 하소연을 했다. 박정희는 웃으면서 “그럴 거야. 지금 사병들이 뭘 하고 있는지 한번 보고 와”라고 했다. 홍 중사가 막사로 내려가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사병들이 모두 이발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하사관이 억울하게 혼이 나는 것을 본 사병들이 알아서 한 것이었다. 홍 중사가 “이것도 지휘통솔법입니까”라고 하니 박정희는 “바로 그거야”라면서 씩 웃었다. 5·16이 터지자 홍 중사는 바로 곁에서 박정희를 시중드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최고회의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잠을 언제 자는가 싶을 정도로 항상 깨어 있고 일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야전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 신문부터 꼼꼼히 읽었다. 그 다음엔 중앙정보부, 육해공군 정보부대에서 올라온 각종 보고서들을 뜯어 밑줄을 쳐가면서 읽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진정서와 건의서들을 읽었다. 보고서를 읽느라고 아침을 생략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육영수가 신당동 근무 중인 박환영 중사를 시켜 꿀 한 병과 잣 한 봉지, 그리고 양주 한 병을 보냈다. 박정희는 홍 중사가 있을 때만 잣 몇 알을 입에 털어 넣은 뒤 양주 한 잔을 얼른 마시곤 했다. 꿀은 가끔 한 숟갈씩 퍼먹었다.
혁명의 성공으로 박정희의 신당동 생활은 곧 끝나게 되고 육영수의 생활도 많이 바뀐다. 육영수의 사촌동생인 宋在寬(송재관·전 어린이회관 관장)은 그때 <평화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군부 쿠데타 소식을 듣고 이종 사촌자형이 앞장을 섰다는 것을 알게 되자 한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육영수가 송재관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 회사 끝나고 우리 집에 들러 줄 테야?”라고 했다.
“무슨 일이죠?”
“나, 지난번에 돈 탄 것 가지고 집수리했어.”
그날 퇴근길에 신당동에 들렀더니 육영수는 처마 끝에 플라스틱 차양을 덧대어 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곗돈을 타서 마음먹고 만든 것이었다.
그런 평범한 주부이던 육영수에게 송재관은 5월 17일 전화를 걸었다.
“아니, 자형은 왜 앞장서서 그런 일을 했어요?”
송재관은 이종 사촌누님으로부터 “그러게 말이다…”란 말을 기대하면서 위로의 말을 준비했다. 그런데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육영수는 정치나 시국 같은 데에는 무관심하던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육영수는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동생 무슨 소리야?”
“아니, 자형이 위험한 일에 가담하셨기에….”
송재관은 순간적으로 ‘내가 말을 잘못 했나’라고 생각했다. 육영수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상이 온통 부정부패로 물들고 혼란에 빠진 채로 국민들이 어떻게 살겠어? 그냥 그대로 간다면 나라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송재관은 대충 대답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이상하다. 저 누님이 언제 저렇게 변했나”라고 중얼거렸다.
몰래 양말 팬티 빠는 대통령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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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05, 2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