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상공부 차관·장관을 지낸 박충훈과 지방 시찰 중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봉건적인 직업관인 士農工商(사농공상) 의식에 대해서 박충훈은 工(공), 즉 제조업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박정희는 商工農士(상공농사)를 주장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수출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기업인들을 앞세우고 士(사)로 상징되는 지식인들을 뒤로 밀어버리는 정책을 추진한다. 오랜 文民(문민)정치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이단적이었고 학생, 언론인, 학자 등 지식인들의 거센 반발을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무렵 박정희는 자신의 첫 저서를 펴냈다. 1962년 3월 1일에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우리 민족의 나갈 길》. 277쪽에 이르는 이 책은 몇 사람의 학자들이 代筆(대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머리말은 박정희의 글이다. 이 글은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 전략과 철학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문헌이다.
<고달픈 몸이 한밤중 눈을 감고 우리 민족이 걸어온 다난한 歷程(역정)을 생각해 본다. 우리가 짊어진 유산들은 몹시 무겁고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더욱이 8·15 해방 후의 민족수난사는 뼈아픈 바가 있었다. 과거 17년史(사)는 두 정권의 부패, 부정으로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는 오늘의 危局(위국)을 결과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는 更生(갱생)의 길이 없을까. 이지러진 민족성을 고치고 건전한 복지 민주국가를 세우는 길은 없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거짓말하지 않고 無事主義(무사주의), 安逸主意(안일주의)의 생활태도를 청산하여 근면한 생활인으로 ‘인간혁명’을 기하고 사회개혁 통해서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길이 없을까 하고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반드시 길이 있을 것이다. 설움과 슬픔과 괴로움에 시달리던 이 민족의 앞길에는 반드시 갱생의 길이 있을 것이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혁명이라는 수술만으로 환자가 元氣(원기)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며 病因(병인)을 도려내는 것만으로 건강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병이 다시 오지 않도록 恒久的(항구적)인 方略(방략)과 기초공사를 해놓아야 한다.
이 길이 어디 있을까. 꼭 있을 것이다. 이 민족의 걸어온 길과 걸어 나갈 길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에 내키는 대로 몇 줄씩 메모하여 정리한 것이 이 책으로 되어 나왔다. 敍述(서술)은 무디고 서투르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단편적이나마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지난날 우리 民族史上(민족사상)의 惡遺産(악유산)을 반성하고 李朝(이조) 당쟁사, 일제식민지 노예근성 등을 깨끗이 청산하여 건전한 國民道(국민도)를 확립하는 일이다. 인간이 혁명되지 않고는 社會再建(사회재건)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가난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농민들의 기나긴 빈곤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덴마크와 같은 복지농촌 재건을 위해 있는 힘을 경주해야 한다. 우리는 이해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누적된 빈곤을 하나씩 추방하고 공업화된 근대국가의 토대를 구축해야 한다. 자유사회의 존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생존권을 옹호할 수 있는 經濟自立(경제자립) 없이는 불가능하다. ‘최대한의 자유, 최소한의 계획’을 원칙으로 경제계획을 완수하여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해 놓는 것이 바로 勝共(승공)의 길이다.
북한집단은 무리한 경제발전을 강요하여 ‘천리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나, 이는 국민의 자유권을 침해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살하는 악독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創發性(창발성) 가운데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中道而廢(중도이폐)하는 ‘토끼’보다 꾸준히 밀고 나가는 ‘거북이의 길’을 택한다>
1962년 10월10일 이만섭 기자는 동해안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훈련을 참관한 박 의장 일행을 취재하다가 특종욕심이 생겼다. 박 의장이 참관 뒤 해군함정 편으로 울릉도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배에 미리 들어가 함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박 의장은 민기식 1군 사령관, 李孟基(이맹기) 해군 참모총장, 이후락 공보실장들을 데리고 선장실로 들어오다가 이만섭과 마주쳤다.
이만섭이 “<동아일보>의 이만섭 기잡니다”라고 인사하자 박 의장은 “아, 그래? 그런데 요즘 신문이 문제야. 신문은 선동만 해요. 쌀값이 오르면 신문이 1면 톱으로 ‘쌀, 쌀, 쌀값 폭등’하고 주먹만 한 활자로 보도하니 쌀값이 더 오르지 않소. 신문이 그렇게 해서야 되겠소?”하고 퍼붓다시피 했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쌀값이 오르면 위정자들이 그런 현실을 알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지 결코 선동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보도야말로 신문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박 의장은 계속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장성들도 박 의장의 말에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만섭은 지지 않고 반격했다.
“저는 윤보선 대통령이 이야기한 것을 사실대로 보도했는데도 잡혀 갔습니다. 혁명정부의 언론정책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건 뭔가 잘못된 것 같소.”
“그렇습니다. 그건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박 의장은 미안했던지 그 뒤론 입을 다물었다. 어두워서 울릉도 道洞(도동) 항구에 박 의장이 도착하니 島民(도민)들이 횃불을 밝혀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울릉도에 국가원수가 방문한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박정희 의장 일행은 朴昌圭(박창규·대구시장 역임) 울릉군수 관사에 묵고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는 대륜중학교 후배 집에서 잤다. 다음날 박 의장 일행은 시찰을 마치고 해변가 다방에서 국수를 시켜 점심으로 때우고 있었다. 그 다방으로 이만섭이 들어왔다. 박정희는 이만섭 기자를 불러 옆자리에 앉힌 뒤 국수를 같이 먹자고 했다. 박정희는 국수를 먹으면서 말했다.
“어제는 내가 좀 심하게 이야기한 것 같아 미안하오.”
“뭘요. 그럴 수도 있지요.”
이만섭은 무섭고 차가운 인상의 권력자 입에서 나온 너무나 겸손하고 솔직한 이 말에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녹아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 박정희는 위험한 고비를 두 번 넘겼다. 도동 항구에서 작은 경비정을 타고 먼 바다에 떠 있는 本船으로 떠나려고 할 때 풍랑이 심했다. 경비정은 흔들리다가 전복될 뻔했다. 위기를 감지한 이맹기 해군 참모총장이 “바다로 뛰어내리자”고 했다. 그때 풍랑은 더욱 거세어져 배를 해안에서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전송 나왔던 島民(도민)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밧줄을 던져 겨우 경비정을 해안으로 끌어당길 수 있었다. 해안 가까이 갔을 때 박 의장을 비롯한 승선자들이 한 사람씩 바다로 첨벙 첨벙 뛰어내렸다. 다행히 수심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았다.
바닷물에 흠뻑 젖은 박 의장 일행은 산을 넘어 건너편 학동 항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쪽 바다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만섭 기자의 손을 당겨 함께 걸으면서 어민들의 애환과 농촌의 피폐상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무뚝뚝한 박 의장이 너무 인간적으로 따뜻한 이야기를 하니 이 기자로서도 딱딱한 정치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고 한다.
학동 항구에서 경비정을 타고 본선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박 의장은 밧줄로 묶어 만든 줄사다리를 타고 本船에 오르는데 파도가 덮쳤다. 박 의장은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미친 듯이 출렁이는 바다 속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만섭은 “만약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의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그날의 파도만큼이나 심하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억하고 있다. 박 의장은 “이래서 국가 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이만섭 기자는 朴 의장 일행이 모두 기진맥진해 있어 단독 인터뷰를 갖지 못했다. 의장과의 인터뷰는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특별기동차 안에서 이루어졌다.
10월 12일자 <동아일보> 조간 1면 머리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박정희는 舊정치인과 언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 의장은 “혁명 후 1년 반이 지났으나 구정치인 중 한 사람도 과거를 반성하는 사람이 없고 그 대부분은 정부를 헐뜯는 짓을 일삼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구정치인들이 지금도 다방 같은 데서 정치를 하고 있는 것도 알고 있고 그것을 법으로 다스릴 수도 있으나 그들이 반성하기를 좀더 두고 본다”고 했으며 “우리나라 언론이 아직도 부정확하고 무책임하며 국가의 이익을 무시하는 과거의 폐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의장은 또 “정치정화법으로 정치활동이 묶여 있는 구정치인들을 선별적으로 구제할 계획이 없고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계엄령을 해제할 생각도 없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이즈음 박정희의 머리를 지배한 주제는 민정이양을 이용한 집권연장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5·16 전야, 신당동 자택에서 혁명공약 문안을 검토할 때 김종필이 써온 초안에다가 제 6항을 덧붙였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이 항목에 김종필은 반대했다. 박정희는 군부가 국정에 개입했다가 복귀한 뒤에도 계속해서 현실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터키나 버마식 통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직접 국가를 운영해보면서, 그리고 권력에 대한 한국인의 본성을 체험하면서 박정희는 정권을 일단 이양하면 영향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切感(절감)했다.
군부 내 민정참여파와 반대파의 갈등은 김종필파와 반김파, 함경도 인맥과 경상도 인맥의 불화와 겹쳐 극심한 내부 분열현상을 보여주었다. 박정희는 어떻게 하면 민정참여 지지 쪽으로 군부를 몰아갈 것인가로 고민하면서 동시에 엄청난 음모를 구상했다는 증언이 있다.
崔周鍾(최주종)은 5·16 때는 광주 31사단장으로서 혁명주체세력의 일원이었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서 박정희보다 1년 늦게 공부했던 그는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성품으로 해서 박정희와 매우 친했다. 집안끼리도 교유가 잦았다. 다섯 살 위인 박정희를 형님처럼 모시고 있던 최주종은 혁명 직후 의정부 8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최주종은 수도권을 방어하는 핵심 사단장으로서 침대 밑에 권총을 두고 자기도 했다. 최고위원을 겸하고 있었던 그는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단 운영에만 전념했다. 그의 참모장이었던 이가 白行傑(백행걸) 대령이었다. 준장으로 예편한 뒤 무역전시관(KOEX)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는 백행걸은 회고록 《미완성의 성취》에서 이런 비화를 소개했다.
<내가 그의 참모장으로 부임하기 얼마 전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하게 된 박정희 의장의 부름을 받고 밤중에 청와대로 갔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은 군정 연장의 명분을 얻기 위하여 사전에 짜인 각본에 의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달라는 지시 겸 부탁을 하였다.
박 의장에 의하여 구상된 쿠데타 계획은 최주종 장군이 지휘하는 제 8사단 병력이 친위 쿠데타 부대로 출동하면 제 5사단(당시 경기도 포천 일동에 주둔)으로 하여금 진압시키고, 쿠데타 주모자 역할을 맡은 최 장군은 체포 후 우선 안전하게 미국으로 빼돌렸다가 추후 책임지고 재등용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비장한 각오로 이 지시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더 이상 군이 정치에 이용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고 한다>
기자는 ‘박 의장이 최주종 8사단장을 불러 친위쿠데타를 일으켜달라는 주문을 했다’는 요지의 글을 회고록에 남긴 백행걸 장군에게 그 근거를 물었다. 백 장군은 박정희 시대가 끝난 뒤 최주종 장군(1998년 작고)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했다. 기자가 “최주종 장군은 믿을 만한 분이냐”고 했더니 백 장군은 “작년에 타계하여 대전 국립묘지에 묻힌 그분의 묘비명을 내가 썼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나라가 낳은 한 위대한 참 군인이 이곳에 고이 잠들다. 원리 원칙을 존중하고 정직과 청렴과 결백을 생활신조로 한평생 명예와 신의 속에 살면서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그는 전형적인 직업군인의 귀감. 그의 숭고한 가치관은 두고두고 후세를 위한 존귀한 길잡이가 되리라>
백행걸 전 무역전시관 이사장은 박정희가 최주종 장군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이 8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한 1962년 5월 24일 전이라고 증언했다. 최주종 장군의 부인 李惠正(이혜정) 여사도 생전에 남편으로부터 ‘친위 쿠데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확인해주었다.
“박 장군께서 그런 제의를 하기에 그분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한 시간쯤 있다가 못 하겠다고 하셨답니다.”
최주종이 박 의장에게 불려갈 때의 참모장은 金麗林(김여림·육사 9기, 육군 준장 예편) 대령이었다. 김 씨는 “1962년 4월쯤인데 최주종 장군이 박 의장을 만나고 나와서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있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최주종 장군은 ‘박정희에 의한 친위 쿠데타 敎唆說(교사설)’을 지어낼 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 대체로 그를 잘 아는 이들의 이야기다. 문제는 時點(시점)이다. 박 의장이 이런 엄청난 구상을 털어놓았다는 1962년 4월은 겉으로는 박정희 체제가 안정되어 있는 듯이 보일 때였으나 안으로는 군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을 때였다. 1962년 6월 9일 주한미군 사령관 멜로이 대장이 렘니처 미 합참 의장에게 보고한 비밀전문이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쿠데타 계획에 대한 소문과 보고가 쏟아지고 있다. 육·해·공군의 여러 부대들이 쿠데타 소문과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소문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없다. 몇몇 소문은 조작된 것이지만 몇몇 소문은 근거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소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군의 불안정을 상징한다. 정보부는 꾀를 내어 함경도 인맥의 가장 강력한 멤버 중 한 사람인 朴林恒(박임항) 중장을 1군 사령관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권력균형의 추가 김종필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함경도 출신인 최주종 장군은 박임항으로 대표되는 함경도 군맥의 일원으로 분류되어 왔다. 박정희가 최주종에게 친위 쿠데타를 교사했다면 그 목적은 권력안정과 민정참여에 걸림돌이 되는 함경도 군맥을 숙청하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1년 뒤인 1963년 3월에 박정희는 反혁명 사건을 조작하여 함경도 군맥을 숙청하고 군정연장을 발표한다.
박정희는 최주종의 거절로 1962년에는 실현되지 않았던 구상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다가 1963년에 들어서 反김종필 세력의 도전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자 그 구상을 써먹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1963년 3월의 함경도 인맥 숙청 때 최주종 장군은 박임항, 김동하(해병사단장 출신), 朴蒼岩(박창암·혁명검찰부장) 등 함경도 장성과 함께 反혁명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점이다. 대구 5관구사령관으로 근무 중이던 그가 육군방첩대에 구속되자 박정희 내외와 친하게 지내온 아내 이혜정은 호소편지를 써 들고 장충동 의장 공관으로 달려가 박정희를 만나려 했다. 경호계장으로 근무하던 육사 11기 출신 李相薰(이상훈·전 국방장관) 소령이 이 씨를 알아보았다.
최주종이 육사 생도대장일 때 당시 이상훈 중위는 훈육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령은 이 여사의 편지를 받아 목욕하고 나오는 박 의장에게 전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박 의장이 인터폰으로 李 소령을 불렀다. 박 의장은 어느 새 썼는지 편지와 금일봉을 건네주면서 쌀 한 가마를 갖고 최 장군 집에 갖다 주라고 지시했다. 이상훈의 기억에 따르면 박정희는 다음날 김재춘 당시 정보부장을 부르더니 “최 장군을 풀어주라”고 지시하더란 것이다.
박정희가 이혜정 여사에게 보낸 편지는 남아 있다. 그 全文(전문)은 이러하다.
<惠送(혜송)해주신 信書(신서)는 감사히 拜讀(배독)하였습니다. 今般(금반)사건으로 얼마나 심려가 많으실까 마음 아프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본인은 이 시간에도 최 장군이 설마 그러한 사건에 관련이 되었으리라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만은 타 연루자들의 진술과 방증이 있다 하여 수사기관에서 조사가 종료될 때까지는 당분간 참아주셔야 할 줄 사료되오니 과히 염려마시고 趨移(추이)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정국수습이 단락을 지으면 본인이 직접 최 장군을 한 번 만날까 하고 있습니다.
금년 正初(정초) 이래 여러 동지들과 친구들로부터 배신과 이탈을 당하니 허무한 감이 들 뿐이오나 이것 역시 본인의 부덕의 소치라고 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20全年間(전년간)의 同窓(동창)이요 후배로서 누구보다도 신뢰하던 최 장군이기에 본인의 心痛(심통) 또한 비할 바 없습니다. 진심으로 신에게 빌고 싶은 마음은 최 장군만은 이 사건에 직접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라오며 약소하나마 생계에 보태어 쓰시기 바라고 가정에 곤란지사가 계시오면 직접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3월 29일 朴正熙 拜>
최주종 소장은 곧 무혐의 처분을 받고 풀려나 부산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박정희는 그 뒤로도 항상 崔 장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잘해주려 했다고 전한다.
박정희 의장의 울릉도 방문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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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08, 17: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