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의 國葬은 이렇게 치러졌다

교향詩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연주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79년 10월27일 오전 5시를 조금 넘어 鄭炯謨(정형모) 화백은 친구로부터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충격 속에서도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오후에 문공부에서 “좀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國葬(국장)에 쓸 대통령의 영정을 그려 달라는 당부였다. 그날부터 鄭 화백은 철야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朴 대통령의 얼굴을 어떻게 표현할까로 고민했다. 4년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인상적이었던 그의 눈을 떠올려 보았다.

부끄럼타듯 아래로 내리뜬 눈, 그러나 正視(정시)할 때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빛나는 眼光(안광)을 영정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눈매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 가슴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구나’ 하는 느낌을 주어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정형모는 陸英修 여사가 죽은 뒤에 청와대 본관에 걸어 둘 육영수 초상화의 작가로 뽑혀서 陸 여사의 사진만 참고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대통령 부부의 초상화 모두를 死後에 그리는 인연을 갖게 된 것이다. 鄭 화백은 대통령 영정을 그리면서 1975년 8월 28일에 그를 만났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尹胄榮(윤주영) 문공부 장관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니 대통령은 딸 槿惠와 함께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긴장하고 있는 정형모에게 “청와대에는 정 화백의 그림이 가장 많아요”라고 하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정 화백에게 담배를 권하더니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주었다. 정형모는 ‘부모 앞에서도 피우지 못하는 담배를 대통령 앞에서 피우다니’ 하는 생각이 나서 서너 모금 피우다가 재떨이에 비볐다. 완전히 껐다고 생각했는데 연기가 모락모락 나면서 대통령 얼굴 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당황해 하는 정 화백을 보고 근혜가 재떨이의 뚜껑을 덮었다. 식당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하는데 정 화백이 그린 육영수의 초상화가 벽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陸 여사의 특징을 살리려고 웃음 띤 입술과 우아한 목을 신경 써서 그렸지만 만족을 느끼지 못한 鄭 화백이었다.

대통령은 옆 자리에 앉은 근혜에게 “너도 알렉산더 대왕 傳記를 읽고 있지?”라고 하더니 2층으로 올라가 아내의 사진 앨범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는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앨범을 펴 놓더니 정 화백에게 사진을 고르라고 했다. 그때 37세였던 鄭 화백은 대통령이 꼭 자상한 아버지처럼 느껴졌다. 그날 식단은 토스트와 만두국, 그리고 반찬 세 가지가 전부였다.

정형모는 國葬 하루 전인 11월 2일에 영정을 완성하여 납품했다. 7일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탁자만한 150호짜리 화폭에다가 근대화 혁명가의 비장한 혼을 불어넣어 보려고 했던 정씨는 곧 곤한 잠에 떨어졌다.

1979년 11월 3일 故 朴正熙 대통령 국장 영결식이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렸다. 崔圭夏 대통령권한대행이 建國훈장 대한민국장을 영전에 바쳤다. 이때 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교향시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였다.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이 장엄한 곡은 낮은 음에서 시작하여 고음으로 치달은 뒤에 꼭지점에 도달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 곡은 독일 철학자 니체가 쓴 같은 이름의 책 序文을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곡을 선택한 것은 국립교향악단의 洪燕澤(홍연택) 상임지휘자였다. 그는 “朴 대통령과 超人의 이미지를 연결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면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곡을 연주한 것이다”고 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序文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인간이란 실로 더러운 강물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이 강물을 삼켜 버리려면 모름지기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정희는 疾風怒濤(질풍노도)의 시대를 헤쳐 가면서 영욕과 淸濁(청탁)을 같이 들이마셨던 사람이다. 더러운 강물 같은 한 시대를 삼켜서 바다와 같은 다른 시대를 빚어 낸 사람이다. 박정희가 그런 용광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권력을 잡고 나서도 스스로의 魂을 더럽히지 않고서 맑게 유지한 덕분일 것이다.

1963년 최고회의의장 시절에 쓴 책 《국가와 혁명과 나》의 끝 장에서 박정희는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고 했다. 그는 글라이스틴 駐韓미국대사가 평한 대로 ‘한시도 자신이 태어난 곳과 농민들을 잊어 본 적이 없었던’ 토종 한국인이었다. 그는 死後 지식인들로부터 뭇매를 맞았으나 서민들의 마음속에서는 항상 살아 있었다.

영결식에서는 박정희의 육성연설 녹음을 두 편 골라서 틀었다. 지금 들으면 국민들에 대한 遺言처럼 느껴진다.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식 치사. 여기서 박정희는 자주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주정신이란 우리 스스로가 이 나라의 주인이며 역사창조의 주체라는 自覺”이라면서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뿌리를 둔 주체적 민족사관을 정립하여 自主정신을 북돋움으로써 민족中興의 활력을 제공하자”고 역설했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의 끝 장에서도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이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 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고 했었다.

박정희가 自助정신·自立경제·自主국방을 강조한 것은 이 3自를 갖추어야 진정한 自主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박정희의 이 확신은 국수주의나 폐쇄적 민족주의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에 대한 동정심과 서민들을 괴롭히는 힘센 자들에 대한 정의감의 확대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서민들을 괴롭히는 强者에 대한 반발심이나 우리나라를 누르려는 강대국이나 북한정권에 대한 반발이나 같은 심정에서 출발한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는 서민적 반골정신을 대통령이 된 뒤에는 민족의 자주정신으로 승화시켰던 사람이다.

영결식 기도에서 천주교계를 대표한 金壽煥(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인자하신 주여, 이제 이 분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엎드려 주님의 자비를 빌고 생명을 목말라 합니다. 이 분의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생명과 광명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새문안교회 姜信明(강신명)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저 공중을 날으는 참새 한 마리도 당신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기에 우리는 지금 이 뜻하지 않은 일의 뜻을 알지 못 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하기야 이 길은 인간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할 피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뜻밖에 비참하게 가셨기에…….”

*친구 具常의 鎭魂祝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나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贖罪羊(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義氣(의기)와 行動力(행동력)과 質朴(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功德(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서 애쓰며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무참히 흘린 피를 굽어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친구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써 내려간 具常(구상) 시인(작고)의 이 ‘鎭魂祝(진혼축)’은 대령에서 대통령 시절까지 인간 박정희와 交友하면서 남긴 일곱 편의 詩作 중 마지막 편이 됐다.

具常이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나자렛 예수》를 쓰고 있을 때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亡者가 되어 버린 친구를 위해 진혼축을 썼고 그 뒤 5년간 친구의 安息(안식)을 기원하는 미사를 올렸다. 구상은 “그 친구는 의협심과 인정이 강하고 詩心이 있는 사람이었다”면서 “亂世에 파격적인 인물들을 모아서 혁명을 일으킨 뒤에 정상적인 사람들로 주변을 교체해 가는 과정에서 갈등도 많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朴正熙의 꿈은 自主的 근대화를 통한 民族中興(민족중흥)이었다.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권력과 부패의 늪 속에 발을 담그고, 三面(3면)의 敵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가면서, 자신들도 지킬 수 없는 도덕과 명분론을 무기로 삼아 대책 없는 비난을 業으로 삼는 위선적 守舊 지식인 세력의 도전을 극복해야 했다. 그를 공격한 세력은 좌익뿐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한 세대도 안 되는 나라가 서구식 先進 민주주의를 그대로 따라 하지 않는다고 朴正熙를 독재로 몰았던 관념론자들이 더 많았다. 이들은 카터類의 미국인들로부터 응원을 받고 있었다.

기회주의자들과 기능주의자들이 主流를 형성한 정권 안에서 오직 朴正熙만이 이들 위선자들과 맞설 수 있는 논리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朴正熙의 절대고독이 담긴 獨白(독백)이 바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였다.

朴正熙의 소망은 ‘소박하고, 근면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이었다.

그는 1963년 자신의 魂(혼)을 불어넣어 쓴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생리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 미리 이렇게 유언해 놓았던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所以(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人情(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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