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金九, 金奎植은 1948년 북한으로 올라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金九, 金奎植의 역사적 평가에 있어서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사람이 철저하게 김일성에게 이용당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려 하였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명서는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회의가 열렸음을 분명히 한 뒤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련은 북한과 接境하고 있어 군대를 철수하더라도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지만 미군은 한번 철수하면 한국이 남침을 당하더라도 제때 파병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백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兩金씨는 공산주의자들의 주한미군 철수론에 동조한 것이다.
이 성명서는 또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1년 뒤 북한군의 南侵이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南侵의 초대장이었다. 그럼에도 金九, 金奎植은 외국군대가 철수한 후에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확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속인 셈이다. 지도자가 속는 것은 결국 국민들을 속이는 행위이다.
이 성명서는 또 ‘외국군대가 철퇴한 이후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공동명의로써 全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통일정부 수립을 주도할 ‘下記 諸정당단체들’은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근로인민당, 북조선농민동맹 등 56개 단체였다. 金九, 金奎植 세력과 남북한 좌익단체 연합체가 건국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즉 李承晩 세력 등 자유진영을 제외하고, 남북한 공산세력이 뭉쳐 공산국가를 만드는 데 김구, 김규식이 가담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도 金九, 金奎植은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이렇게 평하였다.
<이것은 美蘇공위에서 소련이 주장해온 것, 즉 남한의 우익진영을 배제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단지 美蘇공위 때는 소련이 배제하려 했던 김구와 김규식 및 그들의 추종정당과 단체들을 추가로 참여시킨 점이 다를 뿐이다. 김구, 김규식 등이 이제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당지배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성명의 내용대로 진행되어서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권이 수립되면 그 다음에 생길 통일정부가 소련이 원하는 공산정권이 될 것은 너무나도 自明한 것이었다. 요컨대 4.30 성명도 공산당의 한반도 지배를 위한 소련의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결과를 초래할 문건이었다>
金奎植은 평양에 가 있을 때 김일성이 주최한 초대연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북조선으로 오니 북조선은 살 토대가 있다. 남쪽은 공장이 없고 미국 차관만 가져오고 여기 공장은 일하고 있으며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5월6일) 외신기자들과 회견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였다.
<남조선에는 도처에 부패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북조선의 공장은 남조선의 공장보다도 충실한 생산을 하고 있다. 소련인은 그다지 표면에 나서지 않는데 남조선 미국인은 너무나 간섭이 심하여 현재 군정부에는 부패가 심하다>
金九, 金奎植은 5월6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4.30 공동성명이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는 것이라고 自讚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 하겠다고 확언했다>
4.30 성명대로 통일조국이 건설되면 자유진영이 배제된 공산국가가 될 것이다. 金奎植, 金九는 사실상 공산국가 건설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북조선 당국자도 單政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 하겠다고 확언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당시 이미 북한엔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북조선 당국자’란 말 자체가 정부를 전제로 한다. 남한엔 ‘남조선 당국자’로 불릴 만한 조직도 사람도 없었다. 美軍政이 있을 뿐이었다.
4.30 성명은, 2000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과 만나 발표한 6.15 선언이 연합제-연방제 혼합방식의 反헌법적 통일방안을 제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구, 김규식이 했던 역할과 비슷한 役을 김대중이 再演했다.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의 대변자 비슷한 말을 한 것이나 김대중이 김정일의 대변자 같은 말을 지금껏 계속하고 있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두 김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10 선거는 투표율 90% 이상의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다. 김구는 그러나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는 논평을 냈다. 유엔감시기구도 공정하다고 평한 선거를 惡評한 것이다. 양동안 교수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제헌국회가 開院되고 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이 제헌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고 말한 데 대하여 “현재 국회의 형태로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아무 조건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6월7일 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김구, 김규식은 나중엔 북한에 대하여도 정부 수립 움직임을 비판하여 兩非論을 보이기도 하였다. 梁東安 교수는 <그러나 그들의 분단정권 반대는 남한의 대한민국에만 타격을 줄 뿐 북한의 단독정권에는 타격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었고, 남한의 정치체제가 개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고 평하였다.
李承晩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북한은 소련군에 의하여 공산화되어 이미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으니 남한의 갈 길은 북에 조직된 공산군의 武力 앞에 굴복하여 공산화를 감수하든지 아니면 정통성을 가진 자유민주 국가를 세워서 반공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해 자유통일을 진행하든지 두 가지가 있었다. 여기에 제3의 길이란 한국엔 없었다. 金九와 金奎植, 兩金은 북한에 가서 이미 양성된 공산군의 실태를 보고 남한에 정부를 수립해도 곧 붉은 군대가 쳐내려와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建國할 필요가 없다고, 끝까지 소련과 북한공산정권의 편을 들어 정부수립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해방정국의 迷兒가 되고 말았다(*아래 대화록 참조)>
그는 또 이렇게 설명하였다.
<金九와 金奎植은 북의 공산집단이 머지않아 남침해 올 것을 알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두 金은 그럴 일은 없다고 거짓성명을 하였다. 정부를 수립해 봐야 곧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그들의 강력한 建國반대였다. 그대로 있다가 공산화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민족통일이었다. 金九는 西山大師의 漢詩 구절,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를 愛誦(애송)하였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길을 金九는 옳게 걸어갔는가? 과연 김구를 따르는 용공통일의 길이 옳았던 것인가? 반세기 이상을 신문과 방송이 김구 찬양 일색인데 과연 그 추종자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있는가 말이다. 김구는 저항민족주의자일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판을 유지하였던 공로는 1945년까지 혁혁하였다. 역사의 진실을 가리고 한국사회가 지금도 金九예찬론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金九-劉馭萬 대화 비망록
유엔한국위원회의 중국대표인 劉馭萬(유어만) 公使는 1948년 7월11일 오전 11시 金九를 자택으로 방문,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劉 공사는 대화의 내용을 英文으로 요약하여 국회의장 李承晩에게 전달하였다. 이 문서는 梨花莊(이화장)에 보존되어 있다. 이 대화는 대한민국 建國에 반대하는 일에 공산주의자들과 손잡은 金九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劉馭萬: 나는 선생님의 어떤 면보다도 정직한 분이란 점에서 존경하여 왔습니다. 나도 비록 외교관이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 부임하게 된 것은 나로선 최초의 외교관 임무입니다. 오늘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지 모르지만 정직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하기 위하여 방문한 것입니다.
金九: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떡일 뿐)
劉: 유엔 위원단의 한 사람으로 上海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며느님과 아드님께서 중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 엄씨도 선생님과 같이 살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어 나를 통역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래서 자주 여기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金: 귀하가 말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 없어도 귀하를 위하여 통역할 사람은 있어요.
劉: 나는 오철성이 보내는 편지를 갖고 있는데 공사관에 두고 왔습니다. 중국 외무장관 왕시굴도 직접 편지를 보낼 것입니다. 蔣介石 총통께서도 편지를 직접 쓰려고 하였는데, 외무장관이 오늘 대화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서 쓰시도록 건의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세 통의 편지가 같은 메시지를 선생께 전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李 박사와 협력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李 박사와 선생과 金奎植 박사가 남한 정권을 수호하는 데 협조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중국 格言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형제들이 다툴 순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自招해선 안된다.” 선생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다고 해도 소련이 지배하는 세계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선 다 형제들입니다. 나는 선생의 아들 김신을 나의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아들이 자신의 아버님에게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라고 생각 해 주십시오. 만약 선생께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가담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그렇게는 믿지 않습니다만, 제발 그렇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정치적 敵手로서 서로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으면 됩니다.
金: (심각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나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요. 사실은 내가 마음에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내 최측근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 당신에게 털어놓는다는 게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만 말씀드리지요.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귀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이 좋아하든 않든 간에. 귀하는 기다려주실거죠?
劉: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오히려 말씀 하시지 않도록 권하고 싶어요. 저에게 부과된 메시지 전달은 끝났으므로 허락해주신다면 선생님께서 고민하고 계시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金: (찬성은 아니지만 예의상 승낙한다는 표정을 지음)
劉: 내가 李 박사에게 선생과의 협조 가능성을 타진할 때마다 그분의 대답은 변함없이 “만약 그가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다가가 환영하겠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李 박사께서 부통령직을 선생에게 제의하실 생각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갖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나는 귀하께서 그런 자리를 초월하신 분이라 그런 점에 대하여 제가 언급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선생님께선, “부통령 같은 것은 집어치워! 어떤 공직도 맡지 않겠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께서 李 박사와 협력하시고 싶다면 새롭게 구성되는 정부에서 그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과 당황하고 있는 선생의 지지자들에게 右翼진영의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선 애국활동의 찬란한 기록을 갖고 계십니다. 선생께서 최근 평양에서 열린 소위 남북한 지도자 협의회에 관계하신 일은 그런 기록에 타격이 되었습니다. 북중국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로가 되면,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겠지만, “우리는 김구 지지자들입니다. 그분이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시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선생의 모든 동지들은 선생의 찬란한 과거 업적이 이런 식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金: 나도 알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자신들의 협력자로 간주합니다. 내가 귀하께 이야기했듯이, 모든 사람들이 내 입장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남한 정부에 참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귀하도 알다시피 李 박사는 한민당의 포로가 되어 , 말하자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내가 만약 정부로 들어가면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내가 바깥에 머무는 게 낫습니다. 나는 그 더러운 정치싸움에 연관되는 게 싫습니다.
劉: 선생님의 말씀은 오히려 바깥에서 계시는 것보다는 정부에 들어가셔야 한다는 논리를 갖게 합니다. 李 박사께서는 한때 선생님의 동지이셨던 신익희, 이범석, 이청천씨 같은 분들을 麾下(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참여하셔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시지 않으신다면 모든 게 한민당 뜻대로 되고 말 것입니다. 李 박사께서 國益을 위하여 그렇게 하고 싶으셔도 혼자서 그 정당을 제어하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선생께서 정부에 들어가셔서 그들을 견제하면 李 박사를 강화시켜줄 것이고 만약 버리신다면 李 박사를 한민당의 수중에 떨어지게 할 것인데, 선생께서도 한민당이 국가의 운명을 견제 없이 함부로 농단하여선 안 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金: (정치싸움 등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 한 다음) 더구나 나는 한 특정 정당의 비방전에 의하여 反美주의자로 광범위하게 색칠당하였습니다. 나는 중국과 미국만이 한국에 도움이 되는 이웃나라라고 생각하는 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건설하는 데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데 내가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안에 있으면 미국인의 동정심에 찬물을 끼얹어 국가이익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劉: 선생님 말씀은 틀렸습니다. 李 박사도 한때 반미주의자로 惡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미국 사람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의 고유한 일입니다. 한국에 있는 미국인이 선생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은 결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 장군도 명예롭게, 창피를 당하지 않고 소환될 것입니다. 가도 괜찮습니다. 귀측이 단결하고 유엔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되면 미국측이 떠나가는 일도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金: 귀하는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劉: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 미국, 영국이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金: 미국이 (지금 입장을) 물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劉: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미국인들이 한국의 독립을 확고하게 지지하니까요.
金: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劉: 러시아가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데, 그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과거에 러시아는 두 번 국제적인 압력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한국으로부터, 또 한 번은 요동반도로부터 물러났습니다. 유엔을 통하여 세계 여론이 일어나면 러시아는 그 충격 앞에서 다시 굴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만들려고 하는 정부가, 북한정권이 러시아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미국의 꼭두각시라면 나는 선생께서 어느 쪽과도 협력하지 않으려 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유엔의 지지 덕분에 한국 정부는 主權국가가 될 것이고, 통일을 성취할 基地가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이 약하게 보일수록 선생께선 조건 없이 (建國을 위하여) 투신하셔야 합니다(끝).
金九-劉 공사의 대화를 읽으면 金九가 보인 행동의 모순점이 드러난다. 金九는 '러시아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것(주-북한군)을 南進하는 데 써 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즉,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평양에서 발표한 4.30 성명서 중 '외군이 철수해도 內戰은 없다'는 대목은 완전한 속임수가 된다.
金九는 북한군이 반드시 남침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유일한 수단은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이었다. 金九는 이 안전판의 제거를 요구한 것이 된다. 즉,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장애물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서울주재 중화민국 공사이던 劉馭萬은 장개석 총통의 뜻을 받들어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화합,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하도록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일행이 1948년 1월8일에 서울에 왔다. 유어만(劉馭萬: Liu Yu-man)은 이승만, 김규식, 그리고 김구가 한 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해 점심에 초대하였다. 그것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위원들이 “한국의 지도자들이 장래성이 없이 분열되어 있고 서로 마주 보지도 않을 정도라는 인상을 가지고 돌아가는” 불행한 일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정창인)>.
劉馭萬은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난 뒤 유엔주재 중화민국 대표부 처장, 駐韓 대사 등을 역임, 1966년에 별세하였다.
손 세 일
1. “나는 이승만입니다.”
광복절이 돌아올 무렵이면 생각나는 것의 하나가 1942년 6월에 행한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이다.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쩌렁쩌렁한 육성은 마흔일곱살의 그때의 그의 나이를 의심하게 한다.
“나는 이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해내 해외에 산재한 우리 2천300만 동포들에게 말합니다.…자세히 들어서 다른 동포들에게 일일이 전하시오. 또 다른 동포를 시켜서 모든 동포에게 다 알게 하시오.…”
그는 일본이 패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을 소개한 다음, 자신은 미국 정부와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교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국내와 아시아 지역에 있는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하라고 촉구했다.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파상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나의 사랑하는 동포여…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 우리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그것은 게릴라 활동의 선동이었다. 이 무렵 이승만은 철도에 폭파할 만한 터널이 있는 지점을 표시한 한국 지도를 들고 미국무부 관리들과 국회의원들을 만나고 다녔다. 한국인 게릴라들이 무장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무기대여법(Lend Lease Act)에 의한 무기원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 단파방송은 국내에서도 들은 사람이 많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다가 투옥된 사람도 있었다. 게중에는 전 동아일보(東亞日報)정치부 기자였던 홍익범(洪翼範)처럼 광복의 새벽을 보지 못하고 옥사한 사람도 있었다.
독립운동기간에 국내외에서 전개된 그 많은 의열투쟁 가운데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제고시킨 것은 1932년에 있었던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 의거였다. 일본천황 히로히토(裕仁)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이나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중국인을 위압하기 위해서 거행된 히로히토의 생일 축하행사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이른바 현인신(現人神)으로 숭앙되는 일본천황의 권위를 혼비백산 시켰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2. 미-일전쟁의 원인은 을사보호조약
독립운동의 전 기간에 걸쳐서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항일정신 내지 반일감정이었는데, 이승만과 김구(金九)는 그것을 체현한 대표적인 두 인물이었다. 이승만은 1941년에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라는 저술을 통하여 미-일전쟁이 임박했음을 주장하여 ‘예언자’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그러한 ‘예언’보다는 양심적인 미국인들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사실 설명에 있었다. 그는 미-일전쟁의 원인은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듦으로써 세계 정복의 야욕을 갖게 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하고, 그 책임은 일본의 한국 침탈을 묵인한 당시의 미국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 정부가 1882년에 채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Pearl S. Buck)이 “이것은 무서운 책이다. 나는 이 책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나, 그것이 너무나 사실인 것이 두렵다”라고 평한 것은 양심적인 미국 지식인들의 반응의 대표적인 보기였다.
나는 또 백범일지(白凡逸志)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김구의 애국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밤새껏 조사를 받고 동창이 밝을 무렵 유치장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을 김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평소에 무슨 일이든지 성심껏 보거니 하는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스스로를 물어보니, 온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듯이 고통스런 와중에도, 내가 과연 망국노의 근성이 있지 않은가 하여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찼다.”
김구의 저항적 민족주의는 이처럼 제국주의 일본의 불가마에서 달구어졌던 것이다.
3. 임시정부를 짊어지고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이승만과 김구의 가장 큰 공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의 근거인 임시정부를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끝까지 지켜낸 점이다.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에는 이승만은 대통령, 김구는 경무국장이었고, 1945년에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에는 김구는 정부수반인 주석(主席)이고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장이었다. 바로 그 사실이 임시정부와 두 사람의 파란만장한 관계를 그대로 설명해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세계에서 가정 오래 존속한 임시정부였다. 그러한 임시정부의 전 기간을 통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재정 궁핍과 이데올로기의 갈등이었다.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자들의 연립정부로 출범한 상해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심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휘둘렸다. 미국을 민주주의의 이상국가로 생각하는 대통령 이승만과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를 이상국가로 생각하는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의 대립은 거족적인 3·1운동이 성취한 유일한 성과인 임시정부의 권위와 역량을 크게 손상시켰다. 공산주의 그룹의 대표인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는 이승만을 “아직 사회주의의 소양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동휘의 비판과는 반대로 이승만의 공산주의에 대한 ‘소양’은 출중했다. 그는 이미 1920년대 초에 자신이 발행하는 태평양잡지에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글을 여러편 썼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공산당의 당 부당”(1923. 3)이라는 글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 이론의 핵심이 1)평등주의 2)재산의 공동 분배 3)자본가의 숙청 4)지식계급의 숙청 5)종교 단체의 혁파 6)국가 소멸론의 여섯 가지라고 말하고, 평등주의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합당하나 그 밖의 이론은 부당한 것임을 하나하나 비판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자본가의 경쟁이 없어지면 과학기술이 발달되지 않는다고 한 주장 같은 것은 자본주의 원리의 핵심을 설명한 것으로서 오늘날에도 매우 주목되는 탁견이다. 이때에 쓴 이승만의 일련의 공산주의 비판 논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이론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글들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4. 공산주의의 도전에 맞서
임시정부가 활동한 기간은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상이 복음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1922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는 참가자 전체의 3분의 1이 넘는 56명의 한국 ‘혁명가’들이 몰려갔고,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은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이승만과 김구의 반공주의가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일찍이 레닌(Vladimir I. Lenin)이 의도했던 대로, 공산주의자들의 주도아래 놓였을 것이다. 레닌은 한국독립운동자들에게 200만루블이라는 거액의 자금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먼저 두 번에 걸쳐서 40만루블을 제공했다. 1923년에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도 그 자금으로 열렸다. 그러나 결국 모스크바 자금은 한국독립운동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마찰과 분열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구의 공산주의 비판은 이승만의 경우보다 훨씬 감성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투철한 애국심과 민족주의 신념에 입각한 것이었다. 같이 공산당을 하자는 이동휘의 권유에 대해 김구는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민족의 자주성을 위배하는 행동을 삼가라고 힐책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해방하고 귀국한 뒤에 김구는 공산주의자들의 그러한 행동을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하고 소위 사상의 조국을 운운하며, 혈육의 동포를 무시하고 소위 사상의 동포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계급을 주장하여, 민족주의라면 마치 이미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나의 소원)
김구는 모스크바 자금을 임시정부에 내어 놓지 않고 공산당의 활동자금으로 쓰고 있는 전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을 부하를 시켜 처단해 버렸다. 그리하여 김구는 상해에 있는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주된 공격목표가 되었다. 김구가 상해 교민단장으로 활동할 때에는 그들은 민단세(民團稅) 불납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승만의 공산주의 인식에는 소련 방문경험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1933년에 일본의 만주 침략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총회에 갔다가 이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미국, 소련, 중국, 한국 4개국이 공동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안을 소련 외교인민위원회와 상의하고, 극동 시베리아의 한인지도자들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입국비자를 내주었던 소련 정부는 그 비자가 착오였다면서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승만을 이튿날로 출국시켜 버렸다.
5. 자본주의와 기독교국가
그러나 항일정신이나 반공주의가 곧 이승만과 김구가 추구한 이상이나 가치 그 자체일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이었을 뿐이다. 두 사람이 추구한 이상이나 가치는 말할 나위도 없이 자유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근대적 국민국가의 건설이었다. 이승만의 경우 그것은 미국과 같은,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대적 자본주의 국가, 곧 미국식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러한 근대국가의 모습은 그가 젊어서 옥중에서 써 내보낸 제국신문(帝國新聞)의 논설들에 그림을 그리듯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프리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 박사학위논문도 국제 자유무역을 다룬 국제법 논문이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두 사람 다 기독교인이었다. 귀국한 뒤에도 두 사람은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도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유교나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었고, 김구는 청년시절에 동학의 접주로서 동학 농민봉기에 참가한 경험도 있었다.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신도였던 이승만은 해방 뒤에도 “교회에 나가면 어쩐지 남의 집에 간 것 같고 절간에 들리면 내 집에 온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나,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매일 아침에 프란체스카와 함께 기도를 했고, 기도할 때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성경구절(마태복음7:33)을 외웠다고 한다. 한편 김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서 대조적이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에는 유교도 성하고 불교도, 예수교도 자유로 발달하고, 또 철학을 보더라도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 다 들어와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니, 이러하고야만 비로소 자유의 나라라 할 것이요….”(나의 소원)
이 말은 역사의 세 가지 힘은 국가와 종교와 문화라는 스위스의 역사철학자 부르크하르트(Carl Jacob Burckhard)의 고전적인 명제를 상기시킨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역동성의 원인의 하나가 바로 우리사회의 급속한 다종교화 경향에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 도처에서 종교 분쟁이 심화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기묘하리 만큼 평화적인 공존을 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다원화는 남북한 관계의 평화적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6. 설화(說話)가 된 남북협상
김구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1948년의 5. 10선거를 앞두고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다녀온 일은,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국민들 사이에 설화처럼 되어가고 있으나, 그 동기와 경과에 대한 정확한 사실구명이나 평가는 오히려 소홀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김구의 북행을 만류하러 찾아온 이청천(李靑天)에게 김구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의 일을 보기로 들어 설명했다.
금일불가무(今日不可無)는
최지천화친론(崔遲川和親論)이요,
백세불가무(百世不可無)는
삼학사척화론(三學士斥和論)이라.
지천(遲川)은 병자호란 때에 척화론 일색인 조정에서 홀로 화친론을 주장했던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의 호이다. 김구는 삼학사(三學士: 洪翼漢, 尹集, 吳達濟)의 이상주의와 최명길의 현실주의가 다 필요한 것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동석했던 유림(儒林)의 장로 김창숙(金昌淑)이 전한 말이다.
이승만은 이때의 두 김씨의 북행을 찬성하지 않았으나, 실패하더라도 일단 해보겠으니 반대하지 말아달라는 두 김씨의 요청을 받아들여 공식으로는 “방임하기로 했다”고 성명했다. 그러나 윤석오(尹錫五) 비서에게는 “소련을 직접 가서 담판한다면 몰라도 김일성(金日成)을 백번 만나야 무슨 소용이 있다고…”하고 아쉬워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독립운동 기간은 말할 나위도 없고 해방 정국에서도 내내 협조적이었다. 김구는 지방 여행을 하다가 “국부 김구선생(國父金九先生) 환영” 이라고 쓴 현수막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수행한 선우진(鮮于鎭)비서에게 “어느 나라에나 국부는 한 사람이야. 우리나라의 국부는 이 박사뿐이야. 통일 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 박사가 되어야 해” 라고 말하면서 현수막을 떼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김구의 그 겸손과는 관계없이, 또 양쪽의 일부 극성지지자들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이승만과 김구를 함께 대한민국의 국부로 추앙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새로 발행되는 10만원권 지폐에는 두 사람의 초상화를 함께 넣자고 제안한다.
그 눈길을 金九는 옳게 걸어갔는가?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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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8-01, 2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