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는 19세기에 '유럽의 病者'로 불렸다. 투르크族이 세운 오스만 터키는 600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大제국을 건설, 운영하면서 유럽의 심장부를 위협하였다. 터키군은 16, 17세기 두 차례 비엔나를 포위하였고, 지금의 헝가리, 불가리아, 발칸반도를 수백년 동안 지배하였다. 19세기부터는 과학 기술력에서 밀리고 특히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1차 대전 때는 독일과 연합군이 되었다가 敗戰國으로 전락, 제국은 해체되고 공화국으로 再탄생하였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케말 파샤(터키에선 아타투르크라고 부른다)였다. 그는 이슬람圈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인 본격적 개혁을 성공시켰다. 政敎분리를 핵심으로 하고 여성참정권 인정, 문자개혁을 통하여 근대화의 길을 갔다.
2차 대전 때 터키는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전쟁이 끝난 후 소련의 위협에 직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고 하였다. 이때 6.25 남침 전쟁이 터졌다. 터키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군대를 파견하면 나토 가입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터키는 1개 여단, 5450명을 보냈다.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이다. 721명이 戰死, 168명이 실종, 2111명이 부상당하였다. 터키는 휴전 뒤에도 1960년까지 1개 여단을 유지하였다. 근무기한은 1년이었으므로 이 10년간에 약5만5000명의 병사들이 한국에 왔다는 이야기이다. 터키를 여행하면 한국인을 戰友라고 반기는 이들이 많은 이유이다. 수도인 앙카라 한복판에 한국전 참전비가 서 있다.
한국戰 파병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터키는 나토에 가입, 냉전 시대에 소련의 남측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터키 군대는 한국전에서 미군, 영국군과 함께 잘 싸운 군대로 꼽힌다. 미군 25 사단에 배속되어 미군 작전통제하에서 전투를 했다. 1950년 11월 중공군이 기습하였을 때 터키 군대는 군우리 부근에서 후퇴하는 유엔군을 엄호하였다. 터키 여단은 1.4 후퇴 때 김포를 방어하고 반격 때는 안성-용인 지역을 수복하고 중공군과는 백병전을 자주 벌이는 등 휴전 직전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여, 오스만 터키 帝國 군대의 전통을 실증하였다.
터키 군대는 軍律이 매우 엄격하였다. 포로가 된 터키 군인들은 장교와 사병들이 철통같이 단결하여 공산군의 세뇌, 분열공작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생존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이다.
파병을 결정할 때 터키 수상은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결단하였다. 터키는 19세기 이후 지는 전쟁에만 참여하였는데, 한국전에서 善戰한 것이 국민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데도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한다.
*참전비
위치 용인군 성면 동백리
건립일자 1974. 9. 6
건립취지문
터키는 1950년 10월17일 1개 보병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여단은 참전초기 군우리 전투에서 苦戰하였으나 금양장리 전투와 장승천 전투, 네바다 전투에서 善戰하였습니다. 국방부는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산화한 장병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5500명을 韓國戰에 파병한 터키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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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8-08, 1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