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집 연령도 아닌데 자원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1950년 8월 포항 전투에서 숨진 어느 소년병의 글에서)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1950년 낙동강 전투에서 숨진 소년병의 편지에서)
학도의용군 가운데 일부 포함되는 15~17세(1933~ 35년생)의 소년병들(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에 대해선, 戰史(전사)는 따로 소년병이라는 용어로 이들의 참전과 전투, 戰死(전사)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당시 국가비상동원령에 의한 징집대상 연령은 만 18~30세. 만 17세 이하의 소년지원병들이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조국을 구하겠다며 어른들의 전쟁에 참전하여 2464명이나 목숨을 바쳤다. 이는 '6·25 참전 소년지원병 전우회'(회장 朴泰承)가 2000년에 국군 전사자 명단을 조사하여 처음으로 밝혀낸 숫자다. 군번도 없이 죽어간 숱한 소년병 전사자를 포함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짐작된다.
1950년 10월 하순, 소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던 朴泰承씨는 육군본부 직할 수색대원으로 평북 박천까지 북진했다가 후퇴하던 중 어느 야산 골짜기에서 그날 처음 보는 다른 부대의 한 소년병과 함께 대오의 꽁무니를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소년병은 열일곱 살인 朴씨보다 한두 살은 어려보였다. 잠시 인민군의 총소리가 뜸한 틈을 타서 말을 걸었다.
'너는 어디서 왔노?'
'청도에서 왔어예'
무거운 M1 소총과 탄띠를 어깨에 멘 소년병은,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몇 끼나 굶었는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군복은 물이 빠지고 해져서 너덜거렸고, 운동화는 다 떨어져서 그야말로 거지 행색이었다.
'는 진량에서 왔는데…' 하며 고향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엎드렸다가 일어나 보니 방금 전까지 얘기를 나누었던 소년병이 쓰러져 있었다. 복부에서는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총상을 입은 소년병은 배를 움켜쥐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적병이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다시 총알이 날아올 것만 같아서 朴씨는 오금이 저렸다.
날도 점점 저물어 가고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는데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소년병이 朴씨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가려거든 나를 쏘고 가라'며 울기 시작했다. 복부에서는 창자가 삐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오면 어차피 자기는 죽을 목숨이니 제발 자기를 쏘고 가라고 애원했다.
朴씨는 순간적으로 소년병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은 그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M1 소총으로 소년병의 이마를 겨냥해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년병은 '어매야'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부르고는 숨을 거두었다. 朴씨는 눈물을 훔치면서 골짜기를 내려가 我軍의 뒤를 좇아 달리기 시작했다.
전쟁 참전 4년 후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朴씨는 그때 이후 자기 손으로 총을 쏘아 눈을 감겨주었던 그 소년병을 잊을 수 없어 20년 전부터는 집안에 소년병의 冥福을 기리는 작은 法堂을 마련하고 이날 이때까지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14세 소년병의 죽음
연일 血戰이 벌어지고 兵力손실이 늘어나 戰力이 모자라게 된 국군은 충원을 위해 후방에서 募兵(모병)을 했다. 군은, 1950년 8월 초 대구에서 교육대라는 명칭으로 신병모집 훈련소를 차렸다. 사단이나 연대를 재편하거나 新編(신편)할 때는 병력이 모자라 거리에서 길을 막고 공모하기도 했다.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트럭에 스피커를 단 지원병 모집대를 각 마을과 학교로 보내 호소했다.
'사랑하는 학도 여러분. 지금 조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조국은 학생 여러분에게 총을 들고 나와 북한 괴뢰군을 무찔러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피끓는 애국학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 공산 괴뢰군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공산도당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나가 괴뢰군을 물리칩시다.'
수업 중인 교실에까지 들려오는 지원병 모집대의 스피커 소리는 수많은 학생들의 피를 끓게 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자칫 온 나라가 북한 공산군에게 먹힐지 모른다며 은근히 軍입대를 권했다. 소년들은 책가방을 교실에 던져두고 교복 차림의 까까머리 그대로 戰線으로 나갔다. 많은 소년들이 집에도 알리지 않거나 부모님의 손을 뿌리치고 전선으로 나갔다. 당시 중학교(6년제) 학생들은 일제치하를 조금이나마 겪은 세대여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전선에 투입된 소년병들은 말이 지원병이지 거의가 '병사'라고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격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나마 광목에 국방색 물감을 들인 군복을 지급받고 1~2주간 약식 군사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나중에 8월 격전이 벌어지고 난 후부터는 훈련도 받지 못한 채 교모를 쓴 교복 차림 그대로 전선에 나가는 경우도 非一非再(비일비재)했다. 일반 학생과 구분하려고 교모에 흰 띠를 두른 것이 고작이었다.
나이 겨우 15~17세의 소년들은 한참 성장기에 있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지금의 10代들처럼 영양상태가 좋아 키가 1m 80㎝에 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년들은 큰 키라고 해야 1m70㎝ 정도였고 대체로 1m60㎝를 조금 넘는 소년이 대부분이었다. 키 작은 소년병들이 M1 소총, 탄약과 수류탄 등 약 20kg에 달하는 무장을 하고 산골짜기를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낑낑거리며 어른 군인들을 따라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몹시 힘드는 일이었다. 군복을 얻어 입은 소년병들일지라도 옷이 너무 커서 옷과 몸이 따로 놀았다. 어린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꼴이었다. 이런 소년병들은 절대 다수가 경북·대구 출신이었다.
소년병 權道文(당시 14세, 경북 군위중 2년)의 큰형수인 崔在彦(76)씨는 어린 시동생에 대한 기억을 어제일처럼 생생히 말한다.
'시동생은 내가 시집갔을 때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아이였는데, 얼마나 영특하고 인정이 넘쳤는지 모두들 우리 도련님을 칭찬했지요. 어린 나이에 군대 간다고 해서 온 식구들이 말리느라 난리가 났었어요. 그런데도 나라를 위해 싸워야 된다면서 어찌나 고집을 부리던지 아무도 붙들지 못했습니다.'
崔씨가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시동생이 치열한 다부동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北進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되었을 때 고향집에 왔었는데, 그때 눌러 있지 않고 몸이 회복되자 다시 부대로 복귀했다가 戰死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아주 잘했으니까 전쟁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공부를 계속해서 훌륭한 인생을 보냈을 터인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지만 아무도 어린 소년병의 죽음을 기억해 주지 않잖아요. 시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이제 나마저 죽고 나면 누가 우리 시동생을 기억이나 해주겠어요?'
눈가에 이슬을 반짝이며 큰형수 崔씨는 말을 더듬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허망하게 죽은 우리 도련님이 정말 가여워요. 그래서 6·25만 다가오면 눈물이 나요.'
6·25 참전 소년병 戰死者 2464명
- 김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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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11, 2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