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초 당시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미얀마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측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가서 살고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는 사실을 확인, 송환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鄭亨根 의원의 소개로 양영태 씨 등 70여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한 송환 촉구 청원서는 "북한은 1983년 미얀마를 방문중이던 全斗煥 전 대통령과 수행범을 암살하기 위해 유례없이 처참한 폭탄테러를 자행했다"면서 "이러한 反인간적 잔혹행위에 대해, 북한은 여태까지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범행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원서는 이어 "북한 공작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민철은 미얀마 당국에 체포돼 복역하며,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는 뜻을 수 차례 밝힌 바 있다"면서 "미얀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석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만큼, 유일한 생존자 테러범을 우리가 송환해 관련 진상을 낱낱이 파헤쳐 온 국민들에게 알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줘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송환 결의안 제출
鄭 의원은 2006년 3월, '아웅산 테러범 신병송환 및 진상규명 촉구 결의안'도 국회에 제출하였다.
<북한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방문중이던 한국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을 암살키 위해 테러요원들로 하여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테러(원격조종)를 자행, 당시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요인들과 수행기자 등 21명이 사망(한국인 17명, 미얀마인 4명)하고 46명이 부상하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천인공노할 테러참변이 발생한 바 있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결과 범인들은 북한의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 특수부대 소속 장교 3명으로 확인, 이중 신기철(상위대위)은 도주중 미얀마경찰에 의해 사살되었으며, 진某(소좌소령)와 강민철(상위대위)은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진某는 교수형이 집행되었고,강민철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유일하게 생존, 23년이 지난 현재까지 복역중에 있다.
제3국에서 한국의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수뇌부를 한꺼번에 제거하려 했던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국가 주도의 테러사건이며, KAL기 폭파사건 등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대표적인 국제테러 전형으로 손꼽히고 있는 반인간적 반인륜적 잔혹행위였음에도 불구, 북한은 여태까지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범행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미얀마 당국은 이 사건 직후 북한과 단교(83.11월)라는 극단적 조치와 함께 1년 뒤인 84년 유엔총회에 공식 제출한 사건 조사결과에서 “이번 사건은 북한당국의 명령에 따라 북한인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확인했음에도 북측은 “한국과 미얀마가 공모해 날조한 자작극”으로 치부하는 등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 지금까지도 그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 국회는 同 아웅산 폭탄테러사건과 관련하여 과거사 진상조사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대통령과 정부에 촉구한다.
1. 1983년 발생한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자 생존자인 강민철(양곤 북부 인세인 교도소 수감중)을 송환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와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2. 대통령과 정부는 산증인인 강민철을 송환함으로써 천인공노할 만행을 누가 지시했고 어떤 목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했는지 그 배후를 과거사 진상 조사차원에서 샅샅이 파헤쳐 이를 온 국민들에게 알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길 것을 촉구한다.
제안이유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범 신병 송환조치 및 진상규명 촉구 결의안의 제안이유는 다음과 같음.
첫째, 국회는 지난 2005년 5월 3일 與野 합의로『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기본법』을 통과시켰고, 同 아웅산 폭탄테러사건은「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 인권유린, 폭력, 학살, 의문사」라는 ‘진실규명 범위내’ 사건에 해당하는 만큼 KAL기 폭파사건의 김현희 경우와 마찬가지로 강민철을 송환, 역사적 사건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임.
둘째, 유일한 증인 강민철은 23년째 복역중으로 “북한에 속았으며 석방된다면 제3국이 아닌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 상부 지시로 폭파했지만 결과적으로 17명을 죽게 한 사실에 대해 마음 아프다”는 전향의사를 정부관계자 등에게 수차례 밝힌 바 있는데, 미얀마 형법에 따르면 무기수가 최소 13년 6개월을 복역하면 행형실적에 따라 언제든지 석방될 수 있으며, 미얀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석방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
셋째, 북한은 강민철 신병 인도문제 언급시 同 테러사건을 자인하는 결과로 비쳐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절 대응치 않고 있으나, 한국측의 신병확보로 자신들의 죄상이 만천하에 폭로될 것을 우려, 최덕근 영사 및 이한영 사례에서와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민철에 대해 위해를 가할 가능성도 예상되는 만큼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조기 송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음.
* 특히 북한은 同 사건을 계기로 斷交(83.11)까지 당한 바 있는 미얀마와 외교관계를 복원한다는 보도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
넷째, 23년전 북한이 엄청난 테러를 자행한 목적은 한국을 혼란과 불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으려는 의도였음은 분명해 보이고, 지금도 그런 의도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실현하려하고 있으며, 한국사회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음.
소위 친북활동 경력이 뚜렷한 해외학자가 민주인사의 상징처럼 환영받고 보편적 가치와 진리를 탐구해야할 대학교수가 공공연히 친북 선동을 서슴치 않으면서도, 북한체제의 폭력성과 야만성․무자비한 인권탄압과 300만 이상의 동포 餓死에 대해서는 항변조차 하지 않는 작금의 분위기는 이러한 우려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함.
KAL기 폭파사건도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다루고 있음에 비추어 아웅산 폭탄테러사건 또한 못 다룰 하등의 이유도 없으며, 북한과 직접연계된 인사가 아닌 한 강민철의 국내송환 및 진상규명 촉구에 반대할 명분도 없을 것임.>
*누가 송환을 막았는가?
2006년 11월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金萬福씨 인사 청문회가 열렸다.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은 이 자리에서도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行을 원하고 있는데 이를 정부측에서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鄭亨根: 후보자는 83년 10월 아웅산 폭탄테러 공작원으로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북한 공작원 강민철이 수감 중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金萬福: 예,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본 위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강민철이 한국의 관계기관에 轉向의사를 표시했으며 한국으로의 송환을 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듣고 있습니다.
정형근: 듣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정형근: 국정원은 아웅산 테러사건 이후 면회 등 강민철과 접촉한 내용 및 시기에 대해 외교상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접촉한 사실을 말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요, 밝힐 수 없습니까?
김만복: 아닙니다.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강민철과 접촉한 일이 없다고요?
김만복: 예.
정형근: 그것 자신할 수 있습니까? 위증죄 됩니다.
김만복: 확인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정형근: 확실히 없습니까?
김만복: 그것을 제가 보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정형근: 아니, 본인이 모릅니까? 보고받은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만복: 지금 대답은 ‘모른다’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정형근: 아니, 밝힐 수 없다는 것하고는 다르지요. 면회를 했어요. 면회를 했는데, 지금 오려고 그러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김만복: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은, 북한은 남쪽이 했다라고 그렇게 주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정형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김만복: 그러니까 그 주동자를 남쪽이 데리고 오면 ‘봐라, 너희들이 시킨 사람 이제 너희들이 너희 나라로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라고 북한이 선전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형근: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조사를 갖다가 수년을 해 가지고 斷交까지 한 사례인데, 그것을 안 데려온다면 말이 안 되고요. 그렇다면 왜 KAL기는 과거사에 넣고 이것은 과거사에 넣지 않습니까?
김만복: 과거사는 제기를 해야 넣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히...
정형근: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아웅산 테러사건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앞으로 정말로 과거사에서 조사 대상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됩니다. 본인이 오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북한 눈치 보고 지금 막고 있는 겁니다.
김만복: 이해관계인이 제기를 해 주면 98개에서 99개로 그 사건을 조사하는 데 넣도록 하겠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당시 아웅산 테러 현장>
*강민철, 25년 수감생활 중 사망
지난 5월 AP 통신은 미얀마(버마) 수감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서 25년간 수감 중이던 강민철이 죽었다고 보도하였다. 이 관계자는 강씨가 미얀마 감옥에 수감된 외국인 最長 수형자였으며, 사망 전 간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鄭亨根 의원의 요구대로 강민철을 한국에 데려왔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17명의 원혼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예의였다. 지난 週 일본 정부가 납치된 일본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특별기를 띄워서까기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를 일본으로 모시고 가서 國賓(국빈) 대접을 한 것과 한국 정부의 냉담한 태도가 대조된다.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강창수는 6.25 남침 때 戰死한 강건 장군의 아들. 폭파임무를 맡은 3人1組의 組長은 진모 소좌(생포 후 사형), 組員은 강민철(최근 獄死), 신기철(체포과정에서 사살됨) 상위였다.
세 사람을 태운 배 愛國동건호는 1983년 9월9일 밤 황해도 옹진항을 출항, 8일만인 9월17일 오후 미얀마 랭군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내린 세 공작원은 駐 미얀마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 도착하였다. 세 사람은 이곳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테러 실행 계획을 세웠다. 폭약과 조종장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애국동건호가 입항,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리 탐지, 본부에 보고하였다. 盧信永 안기부장은 全斗煥 대통령에게 미얀마 방문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6일 테러범들은 숙소를 나와 전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였다. 다음날 새벽 세 사람은 全斗煥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아웅산 묘소 건물의 천장에 폭발물(폭탄 3개)을 설치하였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 설치하는 사이에 진모는 밑에서 망을 보았다.
이 폭탄들은 1~2KM 이내에서 원격조종으로 터지도록 했으며 유효 살상 범위는 80m 내였다. 세 사람은 이틀간 묘소 주변 숲속에서 잤다.

<왼쪽 상단이 당시 체포된 강민철. 강민철은 얼마 전 獄死했다.>
*天祐信助로 잡힌 두 범인들
10월9일 오전 범행에 성공한 세 사람은 항구로 탈출, 북한 선박편으로 귀환하기로 하고 일단 흩어졌다. 組長 진모는 10월10일 저녁 강을 헤엄쳐 바다로 향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다. 주민들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를 건져냈더니 살아 있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1일 어선에 편승, 항구로 내려 가다가 수상하게 여긴 어부들의 신고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이 초소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수색하려 하자 두 사람은 수류탄을 던지고 응사하면서 달아났다. 신기철은 경비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망쳤다가 다음날인 12일 군인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왼쪽 팔뚝이 날아갔으나 목숨을 건졌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였고 진모는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민철은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이 강민철은 복역중 한국측 인사를 만나 "한국에 귀국하여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강민철이 몇달 전에 사망한 것이다. 강민철의 한국行을 막은 前 정권의 행태는 國政조사 대상이다.
*황장엽 증언: "김일성은 是認, 김정일은 사건 은폐를 주장"
지난 6월30일에 있었던 黃長燁 선생 출판 기념회에서 黃 선생은 아웅산 테러에 대하여 재미 있는 秘話를 소개하였다. 북한소행임을 확인한 미얀마가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고,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의 對北제재가 들어가자 당황한 북한 수뇌부는 공작원을 원망했다고 한다. "왜 땅을 파고 숨어 있지 않고 나돌아 다니다가 잡혔는가"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어느 날 김일성이 김정일, 황장엽, 허담과 만난 자리에서 말하였다.
"야, 이거 국제여론이 너무 나쁜데. 이렇게 하면 안 될까? 밑에서 실무자들이 저지른 일이다. 위에선 몰랐다고 하면 어떨까?"
김정일이 강하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무조건 잡아떼야 합니다"라고 했다. 김일성도 자신의 주장을 밀고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김정일에게 살아 있는 강민철과 김현희는 자신을 겨냥하는 비수였을 것이다. 그 강민철이 미얀마에 살아 있는 동안 한국 정부가 데려오지 못한 것은 '못한 것'이 아니라 김정일을 의식하여 '안한 것'인지 모른다.
*"가짜 김정일이 했단 말인가"
한국 정부가 김정일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부터이다.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金在益 수석의 부인 李淳子 교수는 이 회담 직후 이런 글을 남겼다(월간조선 2000년 7월호). 지금 읽어보면 상당히 예언적이다.
<1983년 10월9일, 내 남편 金在益(김재익․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全斗煥 대통령의 아세안 국가 순방에 공식 수행원으로 동행중 미얀마(舊버마) 양곤(舊랭군)에서 북한이 획책한 테러사건인 아웅산 묘소에서의 폭발로 순직했다.
테러를 지시한 북한의 金正日은 지난 6월13일부터 15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金大中과 수행원을 평양으로 초청하고, 사흘 내내 우리 언론가 방송으로부터 ‘인간적인’, ‘자상한’, ‘정중한’, ‘합리적인’, ‘겸손한’, ‘세련된’ 등의 修辭를 받았으며, ‘드디어 진짜모습’을 보게 됐다고 흥분하는 全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내 남편을 포함한 열일곱 분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은 ‘가짜’ 金正日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며, 그 5년 뒤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도 眞犯 없는 사건이 되어버린 셈인가.
남편을 잃고 슬픔과 증오를 감내하며 살아왔지만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방송과 언론에 휘둘리며 金正日을 ‘보기’ 시작하는 것만큼 참기 어려운 고통도 없을 성싶다.
23년간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이들이 단 한순간 매스컴에 홀려 國家의 정체성도 잊어버린 채 인공기까지 내거는 모습에 교육자로서 자괴감을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가 젊은이들을 이렇게 교육시켰나. 체제에 대한 분별력을 텔레비전 화면보다 약하게 심어 주었나….>
*범행 직후 북한소행이라고 단정한 全 대통령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爆沈의 범인이 밝혀진 것은 민족반역적 범죄에 대한 天罰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적이다.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30분쯤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랭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 외교 사절단은 全斗煥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全 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미얀마 외무장관이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분 늦게 묘소로 출발하였다. 駐 미얀마 한국 대사 이계철씨가 탄 벤츠車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앞서 달렸다. 이 차에 대통령이 탔다고 오인한 것은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북한공작원 세 명이었다. 대사 차가 지나가고 조금 있다가 나팔소리가 묘소에서 울려 퍼졌다. 북한 공작원은 참배가 시작되었다고 誤判,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한국 정부의 장차관급 엘리트 관료 및 취재기자 등 17명이 죽었다.
오전 11시쯤 우산우 미얀마 대통령이 全斗煥 대통령의 숙소로 달려왔다. 全 대통령은 범행을 북한소행으로 단정하였다. 대화록에 의하면 이렇다.
"이 테러행위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하고도 집요한 파괴공작의 일환이며 한국, 버바 두 나라의 관계를 갈라놓으려는 폭력사태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취지가 버마(당시 國名) 정부가 발표할 성명서에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우 대통령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자 全 대통령은 자신의 心證을 재차 강조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복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IPU(국제의원연맹)를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오늘과 같은 수법으로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미얀마 군부의 실력자 네윈 의장이 사죄차 방문하였다. 네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보국에서 숙청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경호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책임자가 제대로 체크를 못한 듯합니다. 사건은 내부 소행일 수도 있고 외부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全 대통령은 네윈 의장에게도 북한소행이라고 강조하였다.
"수사에 참고되는 말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 상황은 의장께서 이해하시기 어려울 만큼 긴장이 고조돼 있습니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키로 된 IPU 총회에 대해 온갖 방해공작을 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총회 개최 10일 전에 대구 美 문화원 폭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수법이 오늘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그때 사건도 북한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네윈 의장은 오히려 미얀마 내부 사정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범죄자를 꼭 잡아낼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복잡한 파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서 긴급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는 物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천인공노할 북괴의 국제테러 집단으로서의 본성을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았다>고 했다.
한편 북한 공작원 3명은 범행 직후 탈출을 기도하다가 신고망에 걸려 들었다. 그들은 범행 다음날인 10일과 12일에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미얀마 경찰에 검거되는 과정에서 自爆, 응사를 하다가 組長인 진모와 組員 강민철이 생포되고 조원 신기철은 사살되었다. 全斗煥 대통령이 자신의 感에 의존하여 단정한 것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대구문화원 폭파 사건에 대한 수사보고를 받고 사용한 폭발물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웅산 테러의 상황과 연결시켜 범인을 적중시킨 예언을 한 셈이다. 全斗煥 장군은 1사단장일 때 제3 땅굴을 발견하였다.
오직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대통령이 되었던 李明博씨는 천안함 爆沈의 범인이 김정일이라고 단정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 軍人 출신 대통령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가운데서 30분만에, 군대 안 간 대통령은 수많은 증거 속에서도 두 달만에 범인을 特定하였다. 다음 대통령은 安保 전문가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임진각 아웅산 테러 殉國者 위령탑 아래서
1983년 10월9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미얀마 랭군의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으로 순국한 17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駐 버마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한경희: 대통령 경호원
정태진: 대통령 경호원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북한쪽이 건너다 보이는 임진각 공원안에 '버마 아웅산 殉國 외교사절단 위령탑'이 서 있다. 全斗煥 대통령이 미얀마에서 급거 귀국하여 국민들에게 발표한 성명서의 한 귀절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아무리 사악한 무리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더라도 우리의 숭고한, 평화와 전진을 향한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北面한 쪽에는 이런 돌판 글도 보인다.
<열일곱 塔身으로 높이 솟은 넋들이
원한을 넘어서서 북녘 향해 합장했네
이념의 악몽서 한시바삐 깨어나라
한겨레, 한 울타리, 한 품속에 길이 살자
허공에 메아리치는 저 외침을 못듣는가
님들이 틔워놓은 선진화의 그 한 길을
넓히고 다져가며 줄기차게 나아가서
끊어진 남북의 길도 이어놓고 마오리라.>
惡을 惡으로 갚지 않고 善意로써 녹여버리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웅산 테러와 86년의 김포공항테러, 그리고 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정권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 한 짓이었다.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지 아웅산과 KAL기 테러범들이 현장에서 모두 잡히고 북한정권은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올림픽에 대항하여 주최한 평양 세계청년축전엔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였다. 그들의 惡意는 그들의 목줄을 죄기 시작하였다.
잇단 테러를 당하면서도 보복을 참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던 한국은 북방정책으로 그 성과를 확대하고 韓中수교로 새로운 경제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1983년 全斗煥 정부가 이성적으로, 전략적으로 대응한 결과 북한정권은 망해가고 있고, 한국은 소란속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지난 겨울 임진각에 서니 양지바른 곳에서 殉國기념탑이 파아란 하늘을 이고 다보탑처럼 빛나고 있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한 민족반역자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까지도 제 命대로 산다면 이야말로 민족의 수치란 생각이 들었다.


<1983년 10월 13일,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17명의 외교사절 합동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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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30일에 있었던 黃長燁 선생 출판 기념회에서 黃 선생은 아웅산 테러에 대하여 재미 있는 秘話를 소개하였다. 북한소행임을 확인한 미얀마가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고,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의 對北제재가 들어가자 당황한 북한 수뇌부는 공작원을 원망했다고 한다. "왜 땅을 파고 숨어 있지 않고 나돌아 다니다가 잡혔는가"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어느 날 김일성이 김정일, 황장엽, 허담, 김용순과 만난 자리에서 말하였다.
"야, 이거 국제여론이 너무 나쁜데. 이렇게 하면 안 될까? 밑에서 실무자들이 저지른 일이다. 지도부에선 몰랐다고 하면 어떨까?"
김정일이 강하게 반발하였다고 한다. "무조건 잡아떼야 합니다"라고 했다. 김일성도 자신의 주장을 밀고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김정일에게 아웅산 테러의 犯人 강민철이 미얀마 감옥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을 것이다. 좌파정권 10년간 대한항공기 폭파범 金賢姬는 정권, 방송, 단체들의 협공을 받아 '숨어 다니는 처지'가 되고 입이 봉해졌다. 같은 시기에 강민철은 한국 정부 인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가서 살고싶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김정일이 테러主犯임을 증명하는 두 사람이 한국에서 같이 활동하고 다녔다면 북한정권에 큰 심리적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천안함 폭침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달, 일본 정부는 특별기를 보내서 김현희씨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서 前 총리 별장에 머물게 하는 등 國賓(국빈) 대접을 하였다. 김정일이 납치한 일본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한국 정부는 오고싶다는 강민철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던가?
미얀마 정부는 1983년 11월4일 아웅산 테러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공식 발표하고 북한과 斷交 및 정부 인정 취소 조치를 취하는 한편, 한국에 조문 사절 단을 파견하였다. UN에도 이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공식 보고하였다.
이후 코스타리카, 西사모아 등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단절 하였으며, 그외 세계 69개국이 對北 규탄성명 발표, 人的⦁物的 교류제한 등의 응징 조치를 취했다. 미얀마 정부의 공식 발표내용은 이런 요지였다.
<아웅산 국립묘지 폭발사건으로 한국인 長官을 포함 공직자 1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하였으며, 버마 공무원 4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하였다. 미얀마 정부는 내무종교相을 위원장으로 5人 조사위원회를 구성, 산하 6개의 소위원회를 두고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정부는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2명의 한국인(Koreans)혐의자를 생포하였고, 1명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다. 생존자 진술과 수집된 각종 증거물에 의거, 이번 사건은 북한의 명령(the order of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에 따라 3명의 북한인(North Koreans)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이에 따라 미얀마 정부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북한에 대한 정부승인을 취소하였다>
미얀마 지방재판소는 1983년 12월 생포된 2명의 진술과 증거자료를 종합해 볼 때 범인들이 북한군 육군소장 강창수로 부터 대한민국 대통령과 수행원에 대한 폭탄공격 명령을 받고 범행을 행한 것이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하였다. 미얀마 최고 재판소는 1984년 2월 두 범인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하였다.
미얀마는, 1986년에 ‘진某’를 사형집행하였으나 수사에 협조했던 강민철에 대해서는 사형집행을 유보하였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강민철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우리 정부의 확인결과 미얀마 정부의 공식적인 減刑 조치는 없었다.
미얀마와 북한은 2007년 4월 國交를 회복하였다. 지금 국제사회는 미얀마와 북한정권이 核개발에 협력하고 있다는 의혹을 품고 있다. 북한이 미얀마에 군사용 땅굴을 파주고, 영변형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는 것 같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두 정권이 생존 차원의 협력을 하고 있는 있는 듯하다. 인종차별로 국제봉쇄를 당하였던 남아공이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核무기를 개발하였던 적이 있다.
미얀마와 북한이 國交를 회복하는 데 걸림돌이 있었다면 아웅산 테러 범인 강민철의 존재였을 것이다.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테러사건 이후 한국 정부측에 대하여도 강민철에 대한 面談을 허용치 않는 등 보안을 유지하였다. 우리 정부 인사가 교도소에 가서 수감중인 강민철을 비공식으로 면담한 것은 사건발생 15년이 지난 1998년 11월이었다.
우리 정부인사들은 그 후 10여 차례에 걸친 면담을 이어갔다. 강민철의 건강 및 심리상태 등을 파악하는 한편, 한국음식 ․ 의약품 및 소액의 영치금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강민철은 한국 정부 인사를 만날 때마다 “미얀마 및 한국 정부에서 허용한다면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음이 필자가 입수한 面談 보고서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미얀마 정부는 강민철 석방 및 한국行과 관련하여 어떠한 意向도 표명한 바 없으나, 1999년경 현지의 한국 대사관측에 비공식적으로 ‘頂上간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강민철은 체포당할 때 自爆시도로 왼팔이 절단되고 창자가 보일 정도로 腹部(복부)에 중상을 입었다. 한국측과 면담할 때는 건강한 상태였다. 강민철은 미얀마 주재 한국 대사관에 편지를 써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면담은 2005년 9월이었다. 강민철과의 면담으로 그가 1955년 4월18일 강원도 통천에서 났으며 북한 인민 무력부 정찰국 대위였고 북한엔 아버지 강석준 • 어머니 김옥선 • 누이동생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2006년 초 국가정보원은 鄭亨根 한나라당 의원의 문제 제기를 계기로 하여 강민철을 한국 정부가 데려오는 데 대한 검토를 하였는데,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국정원은,‘북한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同 사건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강민철 송환조치와 관련 일절 대응을 하지 않거나 반발하더라도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北核(북핵) • 僞幣(위폐) • 인권문제 등과 관련 국제사회의 對北압박이 강화되고 있고 우리로부터 비료 • 식량 등의 지원 및 획득이 절실한 입장에 있어 반발하더라도 극히 제한적 • 일시적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데려올 가치가 있는지에 대하여는 정부 차원에서 판단하여야 할 것이란 입장이었다. 즉, '아웅산 테러사건은 미얀마 정부가 북한의 소행임을 명백히 밝히고 북한과 斷交조치까지 취했으므로 실체가 이미 규명된 事案으로 보나 사실관계 추가 규명을 위해 강민철을 국내송환 할 필요성이 있는지 여부는 정부차원에서 검토 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정부측 인사가 강민철과 면담을 이어가던 시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두 정권이 편 對北굴종적 정책과 외교-안보 관련 人事를 볼 때 강민철을 한국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논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의 국정원 고위 간부는 "강민철 문제가 국정원 지휘부에조차 보고된 적이 없다"고 했다. 실무자의 노력으로 끝나고 公論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이다.
2006년 봄 당시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現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미얀마에서 옥살이를 하고 있던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측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가서 살고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는 사실을 확인, 송환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鄭亨根 의원의 소개로 양영태 씨 등 70여명이 서명하여 국회에 제출한 송환 촉구 청원서는 "북한은 1983년 미얀마를 방문중이던 全斗煥 전 대통령과 수행범을 암살하기 위해 유례없이 처참한 폭탄테러를 자행했다"면서 "이러한 反인간적 잔혹행위에 대해, 북한은 여태까지 사과는 커녕 자신들의 범행 자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원서는 이어 "북한 공작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민철은 미얀마 당국에 체포돼 복역하며,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는 뜻을 수 차례 밝힌 바 있다"면서 "미얀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석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만큼, 유일한 생존자 테러범을 우리가 송환해 관련 진상을 낱낱이 파헤쳐 온 국민들에게 알리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줘야 한다"고 촉구했었다.
청원서의 요지는 이러하였다.
<유일한 증인 강민철은 23년째 복역중으로 “북한에 속았으며 석방된다면 제3국이 아닌 한국에 가서 참회하며 살겠다. 상부 지시로 폭파했지만 결과적으로 17명을 죽게 한 사실에 대해 마음 아프다”는 전향의사를 정부관계자 등에게 수차례 밝힌 바 있는데, 미얀마 형법에 따르면 무기수가 최소 13년 6개월을 복역하면 행형실적에 따라 언제든지 석방될 수 있으며, 미얀마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 석방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
북한은 강민철 신병 인도문제 언급시 同 테러사건을 자인하는 결과로 비쳐지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절 대응치 않고 있으나, 한국측의 신병확보로 자신들의 죄상이 만천하에 폭로될 것을 우려, 최덕근 영사 및 이한영 사례에서와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민철에 대해 위해를 가할 가능성도 예상되는 만큼 인도적 차원에서라도 조기 송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음. 특히 북한은 同 사건을 계기로 斷交(83.11)까지 당한 바 있는 미얀마와 외교관계를 복원한다는 보도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
*누가 송환을 막았는가?
2006년 11월20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金萬福씨 인사 청문회가 열렸다. 한나라당 鄭亨根 의원은 이 자리에서도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이 한국行을 원하고 있는데 이를 정부측에서 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鄭亨根: 후보자는 83년 10월 아웅산 폭탄테러 공작원으로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북한 공작원 강민철이 수감 중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金萬福: 예,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본 위원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강민철이 한국의 관계기관에 轉向의사를 표시했으며 한국으로의 송환을 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알고 있습니까?
김만복: 듣고 있습니다.
정형근: 듣고 있습니까?
김만복: 예.
정형근: 국정원은 아웅산 테러사건 이후 면회 등 강민철과 접촉한 내용 및 시기에 대해 외교상 밝힐 수 없다고 하여 접촉한 사실을 말을 하지는 않고 있는데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요, 밝힐 수 없습니까?
김만복: 아닙니다.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형근: 강민철과 접촉한 일이 없다고요?
김만복: 예.
정형근: 그것 자신할 수 있습니까? 위증죄 됩니다.
김만복: 확인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정형근: 확실히 없습니까?
김만복: 그것을 제가 보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정형근: 아니, 본인이 모릅니까? 보고받은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김만복: 지금 대답은 ‘모른다’고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정형근: 아니, 밝힐 수 없다는 것하고는 다르지요. 면회를 했어요. 면회를 했는데, 지금 오려고 그러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김만복: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은, 북한은 남쪽이 했다라고 그렇게 주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정형근: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김만복: 그러니까 그 주동자를 남쪽이 데리고 오면 ‘봐라, 너희들이 시킨 사람 이제 너희들이 너희 나라로 데리고 가지 않았느냐’라고 북한이 선전에 이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형근: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조사를 갖다가 수년을 해 가지고 斷交까지 한 사례인데, 그것을 안 데려온다면 말이 안 되고요. 내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아웅산 테러사건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처리한 것은 앞으로 정말로 과거사에서 조사 대상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책임져야 됩니다. 본인이 오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본인이 한국에 와서 살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북한 눈치 보고 지금 막고 있는 겁니다>
2008년 5월 AP 통신은 미얀마(버마) 수감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서 25년간 수감 중이던 강민철이 죽었다고 보도하였다. 이 관계자는 강씨가 미얀마 감옥에 수감된 외국인 最長 수형자였으며, 사망 전 간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鄭亨根 의원의 요구대로 강민철을 한국에 데려왔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17명의 원혼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예의였다.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아 인민군 정찰국 산하 특수 8군단 소속 특공부대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강창수는 6.25 남침 때 戰死한 강건 장군의 아들. 폭파임무를 맡은 3人1組의 組長은 진모 소좌(생포 후 사형), 組員은 강민철(獄死), 신기철(체포과정에서 사살됨) 상위였다.
세 사람을 태운 배 愛國동건호는 1983년 9월9일 밤 황해도 옹진항을 출항, 8일만인 9월17일 오후 미얀마 랭군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내린 세 공작원은 駐미얀마 북한 대사관 전창휘 참사관의 집에 갔다. 세 사람은 이곳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테러 실행 계획을 세웠다. 폭약과 폭파장치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 정보기관은 애국동건호가 입항, 수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미리 탐지, 본부에 보고하였다. 盧信永 안기부장은 全斗煥 대통령에게 미얀마 방문 취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6일 테러범들은 숙소를 나와 전 참사관의 안내를 받으면서 아웅산 묘소를 정찰하였다. 다음날 새벽 세 사람은 全斗煥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아웅산 묘소 건물의 천장에 폭발물(폭탄 3개)을 설치하였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 설치하는 사이에 진모는 밑에서 망을 보았다.
이 폭탄들은 1~2KM 이내에서 원격조종으로 터지도록 했으며 유효 살상 범위는 80m 내였다. 세 사람은 이틀간 묘소 주변 숲속에서 잤다.
*범행 직후 북한소행이라고 단정한 全 대통령
1983년 10월9일 오전 10시30분쯤 미얀마(당시 버마)의 수도 랭군의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 외교 사절단은 全斗煥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全 대통령은 안내를 맡은 미얀마 외무장관이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분 늦게 묘소로 출발하였다. 駐미얀마 한국 대사 이계철씨가 탄 벤츠車가 태극기를 휘날리며 앞서 달렸다. 이 차에 대통령이 탔다고 오인한 것은 길가에서 이를 지켜보던 북한공작원 세 명이었다. 대사 차가 지나가고 조금 있다가 나팔소리가 묘소에서 울려 퍼졌다. 북한 공작원은 참배가 시작되었다고 誤判, 발파 스위치를 눌렀다. 한국 정부의 장차관급 엘리트 관료 및 취재기자 등 17명이 죽었다.
오전 11시쯤 우산우 미얀마 대통령이 全斗煥 대통령의 숙소로 달려왔다. 全 대통령은 범행을 북한소행으로 단정하였다. 대화록에 의하면 이렇다.
"이 테러행위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악랄하고도 집요한 파괴공작의 일환이며 한국, 버바 두 나라의 관계를 갈라놓으려는 폭력사태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취지가 버마(당시 國名) 정부가 발표할 성명서에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우 대통령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자 全 대통령은 자신의 心證을 재차 강조하였다.
"북한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복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IPU(국제의원연맹)를 집요하게 반대하면서 오늘과 같은 수법으로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오후 3시경 미얀마 군부의 실력자 네윈 의장이 사죄차 방문하였다. 네윈 대통령은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최근 우리 정보국에서 숙청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경호에 차질이 있었습니다. 책임자가 제대로 체크를 못한 듯합니다. 사건은 내부 소행일 수도 있고 외부에 기인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다. 全 대통령은 네윈 의장에게도 북한소행이라고 강조하였다.
"수사에 참고되는 말을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 상황은 의장께서 이해하시기 어려울 만큼 긴장이 고조돼 있습니다. 북한은 서울에서 개최키로 된 IPU 총회에 대해 온갖 방해공작을 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그들은 총회 개최 10일 전에 대구 美 문화원 폭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수법이 오늘 사건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 점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그때 사건도 북한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네윈 의장은 오히려 미얀마 내부 사정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하였다.
"우리는 범죄자를 꼭 잡아낼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복잡한 파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 오후 서울에서 긴급 소집된 임시 국무회의는 物證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천인공노할 북괴의 국제테러 집단으로서의 본성을 다시 한번 똑똑히 알았다>고 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몇 달 전에 있었던 대구문화원 폭파 사건에 대한 수사보고를 받고 사용한 폭발물에 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가 아웅산 테러의 상황과 연결시켜 범인을 적중시킨 예언을 한 셈이다. 全斗煥 장군은 1사단장일 때 제3 땅굴을 발견하였다.
天祐信助로 잡힌 두 범인들
아웅산 테러, KAL기 폭파, 천안함 爆沈의 主犯이 김정일로 밝혀진 것은 민족반역적 범죄에 대한 天罰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우연적이다. 天祐信助란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리라.
10월9일 오전 범행에 성공한 북한 공작원 세 사람은 항구로 가서 북한 선박편으로 귀환하기로 하고 일단 흩어졌다. 組長 진모는 10월10일 저녁 강을 헤엄쳐 바다로 향하다가 주민들에게 발각되었다. 주민들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수류탄을 터뜨렸다. 그를 건져냈더니 목숨이 붙어 있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11일 어선에 편승, 항구로 내려 가다가 수상하게 여긴 어부들의 신고로 경찰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이 초소로 끌고 온 두 사람을 수색하려 하자 둘은 수류탄을 던지고 응사하면서 달아났다. 신기철은 경비병에 의하여 현장에서 사살되고 강민철은 도망쳤다가 다음날인 12일 군인들에게 붙들리기 전에 수류탄을 터뜨렸다. 왼쪽 팔뚝이 날아갔으나 목숨을 건졌다.
강민철은 수사에 협조하였고 진모는 거부하였다.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강민철은 협조한 점이 참작되어 사형이 유보되었다.
*"김대중은 상을 받겠지만 우리는 불행해질 것"
고등학교용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한민국이 잘못한 부분은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북한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축소, 왜곡, 비호하는 내용이 많다. 대한항공기 폭파사건과 아웅산 사건을 다루지 않는 교과서가 많다. (주) 천재교육에서 펴낸 교과서는 기술은 했으나 표현이 애매하다.
<남북한의 관계는 1983년 10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얀마를 방문하였을 때, 수도 랭군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 폭발사고로 각료를 포함한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발사건 역시 남북한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아웅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북한정권이 저지른 것임을 애써 감춘 기술이다. 이 내용만 읽어선 누가 범인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사건의 진상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처럼 쓰고 있다. 이 두 사건이 터졌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오늘의 고교생들이 이 글을 읽고 무엇을 배울 것인가?
‘아웅산 폭파사건’이라고 해야 테러라는 느낌이 들 터인데, '폭발사고’라 표현하니 가스폭발사고처럼 들린다.
한국 정부가 본격적으로 김정일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부터이다.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金在益 수석의 부인 李淳子 교수는 이 회담 직후 예언적 글을 남겼다(월간조선 2000년 7월호).
<1983년 10월9일, 내 남편 金在益(김재익․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은 全斗煥 대통령의 아세안 국가 순방에 공식 수행원으로 동행중 미얀마(舊버마) 양곤(舊랭군)에서 북한이 획책한 테러사건인 아웅산 묘소에서의 폭발로 순직했다.
테러를 지시한 북한의 金正日은 지난 6월13일부터 15일까지 대한민국 대통령 金大中과 수행원을 평양으로 초청하고, 사흘 내내 우리 언론가 방송으로부터 ‘인간적인’, ‘자상한’, ‘정중한’, ‘합리적인’, ‘겸손한’, ‘세련된’ 등의 修辭를 받았으며, ‘드디어 진짜모습’을 보게 됐다고 흥분하는 全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내 남편을 포함한 열일곱 분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은 ‘가짜’ 金正日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이며, 그 5년 뒤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도 眞犯 없는 사건이 되어버린 셈인가.
남편을 잃고 슬픔과 증오를 감내하며 살아왔지만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방송과 언론에 휘둘리며 金正日을 ‘보기’ 시작하는 것만큼 참기 어려운 고통도 없을 성싶다.
23년간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지만, 이들이 단 한순간 매스컴에 홀려 國家의 정체성도 잊어버린 채 인공기까지 내거는 모습에 교육자로서 자괴감을 피할 길이 없었다. 우리가 젊은이들을 이렇게 교육시켰나. 체제에 대한 분별력을 텔레비전 화면보다 약하게 심어 주었나….>
<金大中 대통령은 남달리 고난을 많이 겪으며 평생 대통령이 되려고 노력한 분이다. 金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이란 도박에서 노벨 평화상을 얻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 국민의 資産중 祖國, 反共, 愛國, 忠誠, 名譽, 正義, 勇氣, 自由를 잃고 돌아온 것은 아닐까.
金大中 대통령 개인의 소원은 성취했을지 몰라도 우린 그만큼 불행한 국민이 될 것 같다.>
*임진각 아웅산 테러 殉國者 위령탑 아래서
북한쪽이 건너다 보이는 임진각 공원안에 '버마 아웅산 殉國 외교사절단 위령탑'이 서 있다. 全斗煥 대통령이 미얀마에서 급거 귀국하여 국민들에게 발표한 성명서의 한 귀절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아무리 사악한 무리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더라도 우리의 숭고한, 평화와 전진을 향한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北面한 쪽에는 이런 돌판 글도 보인다.
<열일곱 塔身으로 높이 솟은 넋들이
원한을 넘어서서 북녘 향해 합장했네
이념의 악몽서 한시바삐 깨어나라
한겨레, 한 울타리, 한 품속에 길이 살자
허공에 메아리치는 저 외침을 못듣는가
님들이 틔워놓은 선진화의 그 한 길을
넓히고 다져가며 줄기차게 나아가서
끊어진 남북의 길도 이어놓고 마오리라.>
惡을 惡으로 갚지 않고 善意로써 녹여버리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웅산 테러와 86년의 김포공항테러, 그리고 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정권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 한 짓이었다.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지 아웅산과 KAL기 테러범들이 현장에서 모두 잡히고 북한정권은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올림픽에 대항하여 주최한 평양 세계청년축전엔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하였다. 그들의 惡意는 그들의 목줄을 죄기 시작하였다.
잇단 테러를 당하면서도 보복을 참고 서울올림픽을 성공시켰던 한국은 북방정책으로 그 성과를 확대하고 韓中수교로 새로운 경제의 생명줄을 만들었다. 1983년 全斗煥 정부가 이성적으로, 전략적으로 대응한 결과 북한정권은 망해가고 있고, 한국은 소란속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임진각에 서니 殉國기념탑이 파아란 하늘을 이고 다보탑처럼 빛나고 있었다. 못된 짓만 골라서 한 민족반역자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까지도 제 命대로 산다면 이야말로 민족의 수치란 생각이 들었다. 아웅산 테러의 진정한 비극성은 범인 강민철이 한국에 오고싶어 해도 이 정부의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웅산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였더라면 대한항공 폭파도 천안함 폭침도 없었을 것이다.
1983년 10월9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령에 의한 미얀마 랭군의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으로 순국한 17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이계철: 駐 버마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차관
강인희: 농림수산부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차관
심상우: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한경희: 대통령 경호원
정태진: 대통령 경호원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1983년 10월 13일,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직한 17명의 외교사절 합동葬>
아웅산 폭탄 테러범 강민철 관련 보고
2006. 3. 17
1. 사건개요
o 북한테러공작 實行組 3명은 83. 10.9 전두환 대통령 미얀마 (당시 國名
버마) 국빈 방문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자행
o 동 테러사건으로 인해 우리 측은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 17명이 사망하고
이기백 합참의장 등 15명이 부상
2. 미얀마 정부의 조치내용
o 미얀마 정부는 사건 발생 직후 상기 테러범 3명을 추적, 1명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강민철’ 및 ‘진 某’ 등 2명을 생포하여 수사에 착수
o 미얀마 정부는 83.11.4 동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공식 발표하고
- 북한과 단교 및 정부승인 최소조치를 취하는 한 편, 한국에 조문 사절 단을 파견하였고, 84.9 UN에도 동 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공식 보고 (첨부참조)
- 이후 코스타리카, 서사모아 등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단절 하였으며, 그 외 세계 69개국이 대북 규탄성명 발표, 인적⦁물적 교류제한 등의 응징 조치를 취함
o 83.10.9 발생한 국립묘지 폭발사건으로 한국인 長官을 포함 공직자 17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하였으며, 버마 공무원 4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하였음.
o버마 정부는 83.10.10 내무종교相을 위원장으로 5人 조사위원회를 구성, 산하 6개의 소위원회를 두고 철저한 조사를 진행하였음.
o버마 정부는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2명의 한국인(Koreans)혐의자를 생포하였고, 1명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음.
o생존자 진술과 수집된 각종 증거물에 의거, 이번 사건은 북한의 명령(the order of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에 따라 3명의 북한인(North Korea)에 의해 행해졌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입증되었음.
o이에 따라 버마정부는 83.11.4일자로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북한에 대한 정부승인을 취소하였음.미얀마 정부 발표 내용
o미얀마 지방재판소는 1983년 12월 생포된 2명의 진술과 증거자료를 종합해 볼때 동명들이 북한군 육군소장 강창수로 부터 대한민국 대통령과 수행원에 대한 폭탄공격 명령을 받고 범행을 행한 것이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 (첨부참조)
o미얀마 최고 재판소는 84. 2상기 2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 판결
(첨부 참조)
- 이후 86년 ‘진 某’는 사형을 집행하였으나 수사에 협조했던 강민철(인적 사항 첨부참조)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사형집행을 유보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강민철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03.10 주간조선, 06.2 SBS등), 현지 파견관을 통해 교도 당국 등에 확인결과 미얀마 정부의 공식적인 감형 조치는 없었음.
3. 질의에 대한 답변
질문 1 :아웅산 폭탄 테러 공작원으로 미얀마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 중인 강민철이 관계기관에 전향의사를 표시했다고 하는 바, 국정원이 강민철의 전향의사를 확인한 시점, 내용
질문 2 :강민철의 한국으로의 송환요구에 대한 국정원의 판단
o 강민철이 장기간 교도소에 수감(23년)중이고, 罪를 뉘우치고 있는 점 및 건강 상태를 감안 할 때 인도적인 차원에서 국내송환 문제를 검토해 볼 수 있겠음.
o 강민철이 일반 범죄자나 탈북자가 아니고 미얀마 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고 형 집행대기중인 테러범이라는 점에서
- 동명의 송환문제는 양국정부간 교섭이 전제되어야 하는 사안인 바, 정부 차원의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사료되며
- 이와 함께 미얀마 정부(軍政 최고위층) 정치적 결단도 필요할 것으로 판단
질문 3 :국정원 등 정부가 아웅산 사건 이후 면회등 강민철과 접촉한 시기 및 내용
o 전술한 바와 같이 국정원 현지파견관이 미얀마측의 협조를 받아 장기 구금 상태에 있는 강민철을 면담하면서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함께 근황을 지속 파악
o
- 파견관은 동명이 장기수감 (83년 당시 15년 째 복역)중인 점을 감안하여 한국음식 • 의약품을 인도적 차원에서 계속 지원해왔으며
- 가장 최근에는 05.9 교도당국을 통해 한국음식 • 의약품 및 소액의 영치금을 지원 한 바 있음.
o 미얀마 측은 軍政 최고위층의 사전 허락 없이 파견관의 강민철 면담주선이 이루어진 점을 고려, 보안유지를 수차례 당부 하였으므로 우리도 강민철을 접촉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보안유지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
질문 4 :강민철의 송환요구에 대해 정부가 주저하는 실제이유와 관련 하여 정부가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강민철을 받아들일 경우 김정일을 자극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지적에 대한 국정원 입장
질문 5 :20만불을 제공하면 미얀마에 수감 중인 아웅산 폭파범 강민철의 송환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에서 강민철을 송환하여 아웅산 폭파사건 실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닌지
o “20만불 관련설”은 파견관이 현지 교민사회 등을 통해 파악해본결과 사실자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음
o 아웅산 테러사건은 미얀마 정부가 북한의 소행임을 명백히 밝히고 북한과 단교조치까지 취했으므로 실체가 이미 규명된 사안으로 보나
- 사실관계 추가 규명을 위해 강민철을 국내송환 할 필요성이 있는지 여부는 정부차원에서 검토 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
강민철 인적사항
(83.10 사건 당시 모습)(98.11 면담시 모습)
o 생 년 월 일 : 1955.4.18 (98.11 최초 면담시 진술)
o 출 생 지 : 강원도 통천
o 직 업 :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대위 (체포 당시)
o 在 北 가 족 : 父 강석준 • 母 김옥선 • 누이동생(43세)
o 참 고 사 항
- 83.10 체포 당시 수류탄 自爆 실패로 왼쪽 팔이 절단되어 창자가 보일 정도로 복부에 부상을 입었음
- 당초에 死刑선고를 받았으나 수사에 협조한 점이 감안되어, 형이 집행되지 않고, 양곤 인근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중
- 98.11 이래 미얀마 파견관이 수차례 면담하였고, 가장 최근에는 05.8 미얀마 주재 우리 공관에 서한을 보내 도움을 요청, 파견관이 의약품과 소액의 영치금을 교도당국을 통해 지원
미얀마, 對北 復交 방침 결정
대북 복교 관련 입장 추이
‣ 미얀마는 「아웅산 폭탄테러」사건(83.10)을 계기로 북한과 단교한 이래 아웅산 사건에 대한 북한의 공식사과가 없이는 관계개선을 이룰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견지
‣ 그러나 6者회담 개최 • 南北韓 관계 진전과 함께 印尼⦁泰國 등의 對北 교류가 활성화되면서 馬聯 등 제3국 공관에서의 접촉과 UN총회 (05.9) 등 계기 復交문제를 논의하는 등 상호관계 개선을 모색
*미얀마는 ASEAN 10개국 회원국 중 유일한 대북 미수교국
復交위한 내부절차 완료, 공식발표 시기 조율중
‣ 「소윈」총리 주재 각료회의(05.12)시 北韓과의 復交방침을 결정한 데 이어 「탄쉐」국가평화 발전위(SPDC)의장의 재가를 획득
‣ 이에 따라 조만간 對北 復交를 공식 발표 한다는 방침 하에 대외 발표문안 작성 등 후속절차 논의를 위한 실무협의를 추진 중
평가 및 고려사항
‣ 미얀마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民政이양 지연등과 관련 美⦁EU 등의 경제제재와 외교압력이 가중되고 있는 점을 고려, 對北 협력을 통해 외교고립을 타개하면서 통치기반을 강화하려는데 연유
‣ 고위인사 교류⦁經協 증진 등을 통해 실질 협력기반을 확충하고 對北 復交가 北韓 미사일 도입 등 군사협력 확대로 이어져 남북관계 및 韓⦁미얀마 협력 증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외교노력을 강화
* 駐미얀마 러 공관원, 北韓의 미얀마 미사일 방공망 시스템 건설 지원설 제기(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