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한국이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던 때

중공군 개입에 대한 맥아더의 誤判은 세계戰史上 最惡의 정보 사고이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60년 전으로 돌려본다. 1950년 11월, 대한민국은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한 맥아더의 誤判은 세계戰史上 最惡의 정보 사고이다. 중공군 수십 만 명이 북한지역으로 몰래 들어오고 있던 1950년 10월 20일 前後에도 그는 중공군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10월15일 태평양상의 웨이크 섬에서 만난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중공군이 개입할 시점은 지났다. 개입하더라도 소규모일 것이고 공군력으로 이를 격멸시킬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10월 하순 유엔군이 총공세를 폈다. 서북쪽 산악지대에 숨어 있던 중공군이 나타나 한국군을 표적으로 삼아 기습해왔다.

이 기습으로 한·미군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공식적으로는 ‘중공군 정규 병력의 대거 참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의 병력을 3만 명 정도로 추정하였다. 실제로는 그 10배가 되는 병력이 들어와 있었다.

기습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난 11월 5일 맥아더는 마침내 ‘인류 역사상 가장 침략적인 행동을 감행한 중공에 대해서 세계가 봉쇄작전을 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중공군 참전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날 중공군은 全(전) 전선에서 갑자기 공격을 중단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들은 북쪽 山中으로 물러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버린 것이다. 중공군의 이런 후퇴는 맥아더의 판단을 흐리게 하였다. 중공군을 과소 평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반격을 중지하고 후퇴해버린 중공군을 두고 맥아더 사령부는 ‘역시 별것 아니구나’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毛澤東은 이즈음 거대한 덫을 놓고 있었다. 誘敵深入(유적심입) 작전, 즉 적을 깊게 끌어들인 다음 우회·포위작전과 정면 돌파를 배합한 입체적 섬멸전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퇴를 가장한 매복이 필요했다.

11월 6일, 맥아더는 90대의 B─29폭격기 편대를 띄워 압록강에 걸린 철교들을 폭격, 만주로부터 중공군이 북한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다. 맥아더는 극동 공군의 스트레이트미어 사령관에게 출격명령을 내린 뒤 잠자리에 들었는데 폭격기 편대가 이륙하기 직전 워싱턴의 합참에서 긴급연락이 왔다. ‘별도의 통보가 있을 때까지 韓滿(한만) 국경으로부터 5마일 이내의 지역에 대한 폭격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화가 났다.

‘이 폭격이 연기되는 시간만큼 미군과 유엔군 장병들의 피가 더 많이 흐르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즉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주기 바란다. 이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검토가 없다면 본인은 이로 인한 파국의 책임을 질 수 없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맥아더의 위협적인 電文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읽어주었다. 트루먼은 폭격을 승인해주도록 지시했다. 합참은 여기에 조건을 붙였다. ‘압록강 철교 중 북한 측 반만 폭격하라. 그리고 압록강에 있는 댐과 발전소를 폭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폭격기가 만주 영공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철교를 적중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주의 비행장에서 이륙하여 미군 폭격기를 공격하는 敵 전투기(소련군 조종사들이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미그 전투기를 몰고 있었다)를 국제법상의 ‘추적권’에 의하여 만주 상공까지 따라갈 수 있어야(3분간만이라도) 我軍機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워싱턴에서는 유엔참전국들이 만주 영공 침범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맥아더의 항의를 묵살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에 인원과 물자를 대주는 만주기지를 聖域(성역)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흥분했다.

11월 9일 워싱턴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는 韓國戰에 관한 기본전략을 토의했다.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도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의 규모를 실제병력의 6분의 1정도인 6만~7만 명 정도로 잡고서 개입 목적을 ‘압록강의 발전소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 설정’이라고 해석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맥아더 사령부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중공군을 과소 평가하고 있었다. 마셜 장관은 동부전선으로 진격한 유엔군이 너무 넓은 지역에 걸쳐 분산되어 있는 점을 지적했고 애치슨 장관은 “현 전선보다 방어에 더 적합한 진지선이 어디인가”라고 따졌다. 브래들리 의장은 “군사적 見地(견지)에선 후방으로 물러나는 것이 유리하나 그렇게 하면 한국인의 사기와 국제여론을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고 했다.

영국의 대전략가 윈스턴 처칠도 맥아더가 한반도의 목(평양~원산) 부분에서 진격을 정지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희망했으나 맥아더는 “아시아 사람들은 공격적인 지도력을 숭배한다”면서 이를 묵살했다. 평양~원산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좁은 병목이다. 그만큼 병력을 집중하여 방어할 수 있는 데 반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전선이 네 배나 넓어져 병력이 분산됨으로써 敵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 우려가 있었다.


육군본부 전투정보과장 박정희가 9사단 참모장으로 옮긴 뒤 그의 후임으로 불려온 것은 柳陽洙(유양수) 중령이었다. 6·25 남침 직전에 전투정보과장으로 있다가 6사단 정보참모로 전보되었던 그는 북진 중에 다시 육군본부로 호출되어 장도영 국장 후임으로 부임한 白仁燁(백인엽) 정보국장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10월 말부터 상황판에는 ‘CCF(Chinese Communist Forces)’, 즉 중공군 정규부대의 동향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서부전선의 1, 7사단에서 올라온 정보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백인엽 국장은 ‘중공군 대부대 출현’정보를 믿지 않으려고 했다. 장교들이 아침에 상황판을 들고 들어가서 국장에게 보고하고 나오면 ‘CCF’가 지워져 버리는 것이었다. 유양수 과장은 “야, 다시 기록해 둬!”라고 한 뒤 국장에게 따졌다.

“정보 보고는 정직해야 합니다.”

“증거도 없이 무슨 중공군이야.”

유양수는 함흥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국군이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물건들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육본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은 ‘중공군 출현’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6·25 직전에 전투정보과가 ‘南侵임박’ 정보를 그렇게 올려도 믿지 않던 사태가 재현되고 있었다. 수년 전에 작고한 柳陽洙 전 동자부 장관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하였다.

“6·25 남침 정보를 입수하고도 우리 軍 수뇌부가 남침이 없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은 미군의 판단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중공군 개입에 대해서도 육본 수뇌부는 미국 측의 견해를 좇고 있었습니다. 정보판단을 할 때 윗사람의 意中을 살펴서 하면 誤判이 생깁니다.”

맥아더가 중공군 개입에 대해서 평가절하하는 입장을 취하니 워커 美 8군 사령관도 그런 태도였다. 8군 산하의 미군 사단장들도 워커의 입장을 따랐다. 미군이 그러니 독자적인 정보수집·판단의 능력에 한계가 있는 국군도 같은 태도를 취했다. 윗사람의 판단에 맞추어주는 이런 정보 왜곡이 국가적 재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즈음 워커 8군 사령관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불평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작전 계획이 敵에게 새나가는지 敵이 우리의 의도를 미리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맥아더는 도쿄와 서울에 있는 미군 사령부에 대해 내사를 시켰으나 아무 증거도 잡아낼 수 없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맥아더 사령부가 유엔군의 작전계획을 워싱턴의 합참에 보내면 이 복사본은 국무부, 중앙정보국(CIA), 백악관의 특정인들에게만 배포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이 고위층에 공산당 간첩망이 숨어 있다고 주장했다.

맥아더의 이 육감은 정확했다. 당시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은 킴 필비였다. 그는 영국첩보기관 MI─6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닐 때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처칠 해군장관의 보좌관이었다. MI─6에 들어가 출세가도를 밟았던 필비는 1949년 워싱턴에 부임하여 CIA와 영국첩보기관 사이의 연락관으로 일했다. 이때 영국과 미국 첩보기관은 고급정보를 共有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한국전에 군대를 파견한 이후에는 동맹국으로서 미군의 작전 계획에 대해서 상당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6·25 남침 직전 미국의 정세판단, 중공군 개입에 대한 맥아더의 판단, 만주 폭격 금지 등 중공에 대한 주요 전략, 유엔군의 北進작전 등 미국 측의 중요정보들이 송두리째 필비에 의해서 모스크바로 전달되고 모스크바는 이를 毛澤東과 김일성에게 중계했으리라는 것이 定說이 되고 있다. 필비의 부하이던 가이 버지스 2등 서기관도 MI─6에 박힌 소련첩자였다. 영국 외무부의 미국과장이던 돈 매클린도 소련 첩보기관에 포섭된 간첩이었다. 미국 과장이란 요직에 있으면서 매클린은 미국과 영국 사이를 오고가는 한국전 관련 비밀문서를 읽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영국과 미국 사이 정보교류의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이 세 간첩들은 또 오랜 친구 사이였다. 이들은 청년기 때 빠져든 공산주의에 충성하면서 자발적으로 소련에 봉사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서 毛澤東과 김일성은 맥아더가 취할 조치뿐 아니라 취할 수 없는 조치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정체가 밝혀지자 소련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죽었다.

1950년 11월 23일은 추수감사절이었다. 맥아더는 전선에 있는 모든 미군들에게 칠면조 고기를 공급했다. 유엔군은 사기충천해 있었다. 한 달 전의 중공군 기습에 대한 기억도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졌다(1사단장 백선엽 증언). 맥아더는 한국 전선에 있는 미군들은 이번 공세가 성공하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진격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벌써 戰線의 분위기는 勝戰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 이때 미군은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11월 초에 산속으로 후퇴한 중공군에 대한 수색을 소홀히 한 것이다. 미군은 차량수색을 주로 했다. 중공군은 산속에 숨어 있었으니 그런 편한 정찰에 걸릴 리가 없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예상 접근로 근방 산악지대에 숨어 이들이 함정 속으로 빠져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군은 수색정찰로도, 공중정찰로도 이들의 소재를 알아낼 수 없었다. 수색의 제1조는 ‘절대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지 말라’인데 미군은 중공군을 얕잡아보고는 이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았고 그것은 엄청난 人命 손실을 불러올 것이었다.

11월 24일 맥아더는 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에 대해서 총공격을 명령했다. 11월 24일 공격 개시 첫날 백선엽 준장이 지휘하는 1사단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前進을 개시하여 중공군 포로를 한 명 잡았다. 신문해보니 그는 일본인이었다. 中日 전쟁 때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참전한 것이었다. 공세 첫날의 進度(진도)에 만족한 백선엽 준장은 압록강까지 도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다는 자신을 가졌다.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동쪽을 맡고 있던 국군 2군단을 主攻面(주공면)으로 선정했다.

6, 7, 8사단으로 구성된 2군단은 영천 결전의 영웅 劉載興 군단장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2군단의 정면은 묘향산맥, 오른쪽 면은 중앙 산악지대였다. 友軍은 이 산악지대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서부의 美 8군과 동부의 미 10군단 사이에 방치되어 아무도 챙기지 않았던 중앙 산악지대에 매복한 중공군은 이 거대한 덫으로 국군 2군단이 빨려들면 그 측면을 내리찍으면서 배후를 포위해 버릴 작정이었다.



11월 25일,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오른쪽(동쪽)인 묘향산맥 남쪽의 국군 2군단 소속 8사단과 7사단을 집중 공격했다. 중공군은 2군단의 右側方(우측방)을 따라 진격하던 8사단의 21연대와 16연대, 그리고 7사단 8연대를 취약점으로 파악하고 세게 내리쳤다. 경계하기가 힘든, 부대와 부대 사이의 틈새로 대병력을 침투시켜 우회, 포위하려는 고전적 전술이었다.

7사단장 신상철 준장은 군단 예비로 뒤에 남아 있던 6사단의 19연대를 지원받아 중공군이 밀고 들어오는 7사단과 8사단 사이의 골짜기를 틀어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중공군은 틈새를 확대시켜 대병력을 쏟아붓더니 7사단 사령부의 배후로 진출했다. 신상철 준장은 사령부 후방에서 총성이 들리자 포위되었다고 판단했다. 5, 8연대장에게 전화를 하니 이미 중공군에게 녹아 버려 연락이 되질 않았다.

맨 왼쪽에 있던 3연대만이 健在(건재)했다. 신상철 사단장은 3연대장에게는 왼쪽에 인접한 美 24사단과 합류하여 후퇴하도록 명령한 뒤 사단사령부의 후퇴를 지시했다. 7사단의 후퇴는 지휘 체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붕괴란, 장교들은 계급장을 떼고 사병들은 장교의 말을 듣지 않는 상황에서 무거운 公用 火器는 버리고 사단장이나 이등병이나 똑같이 살길을 찾아가는 것을 이른다.

2군단의 오른쪽 전선을 맡고 있던 8사단 가운데서도 맨 오른쪽에 배치된 연대는 21연대(연대장 金永魯·김영로)였다. 이 연대의 1대대장이 뒤에 駐越(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蔡命新(채명신) 소령. 중공군의 主攻(주공)을 받은 21연대는 와해되고 채명신 대대장은 소총을 가진 병력이 반도 되지 않는 13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중공군 지역을 헤쳐가면서 40여 일 만에 남한으로 귀환한다. 채명신은 중공군이 밤에 계곡을 따라 행군하는 습관을 간파하고는 밤에는 高地에서 자고 낮에는 계곡을 피해서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갔다.

채명신 부대는 연대장을 모시고 있었다. 이 연대장이 자꾸만 “채 소령, 나 고기 한 점만 먹으면 원이 없겠소”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채명신은 부대원을 이끌고 작은 마을에 들어가 닭을 삶아 먹었다. 食後에 연대장을 필두로 부대원들이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이미 敵의 治下로 넘어가 버린 지역에서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르는데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연대장은 몸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채명신은 연대장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댔다.

“연대장 한 분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죽을 수는 없습니다. 어서 일어서십시오. 아니면 쏘겠습니다.”

“아니, 여보, 채 소령, 왜 이래.”

연대장만이 놀란 건 아니었다. 잠을 이기지 못하던 부대원들이 모두 긴장하여 졸음을 털어냈다. 그날 밤 채명신의 부대는 적의 기습을 받아 흩어졌다. 연대장과는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와해된 8사단의 3개 연대 가운데 21연대 김영로 중령과 10연대장 高根弘(고근홍) 중령이 실종되었다.

서부전선의 우측방을 맡고 있던 국군 2군단이 무너지자 이 붕괴면을 따라 중공군이 쏟아져 들어와 유엔군의 배후로 진출, 퇴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2군단의 붕괴로 그 왼쪽에 있던 美 9군단은 오른쪽 측면이 敵에게 노출되었다. 9군단도 후퇴, 美 9군단의 왼쪽에 있던 美 1군단도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국군 2군단의 붕괴로 시작된 도미노 현상이 全(전) 전선으로 확대되면서 총퇴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의 중앙부를 맡고 있던 미 9군단 소속 2사단은 11월 30일 오전 평양 북쪽 약 40km의 順天(순천)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2사단의 철수 행렬이 葛峴(갈현) 고갯길에 들어섰을 때 양쪽 산중에 매복하고 있던 1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덤벼들었다. 기관총과 박격포밖에 없었던 중공군은 戰車로 중무장한 2사단을 섬멸하기 위해 절묘한 전술을 썼다.

그들은 먼저 2사단의 선두 戰車에 타고 있는 보병을 저격했다. 전차는 보병의 엄호 없이는 전진할 수 없으므로 미군 전차대는 일단 정지했다. 후속 부대와 차량들이 정지한 전차 뒤에 몰려들어 교통체증이 생겼다. 이 밀집된 차량 행렬과 장병들을 향해서 중공군의 기관총과 박격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1만 6,000명이 넘는 병력과 수백 대의 차량을 거느린 2사단의 後尾(후미)에서는 선두가 기습을 받고 있는데도 전진을 계속했다.

마치 치약이 튜브에서 짜내지듯이 계속해서 2사단은 이 죽음의 계곡으로 밀려들었다. 한나절 계속된 이 살육전으로 2사단 장병 약 3,000명이 戰死, 戰傷, 실종됐다. 2사단의 모든 전차, 차량은 이 갈현 고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파괴됐다. 한때는 사단장 로렌스 카이저 소장도 실종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붕괴된 국군 7사단의 신상철 사단장, 8사단의 李成佳(이성가) 사단장은 군법회의에 넘어가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집행유예 선고로 사면되고 곧 軍에 복귀했다. 카이저 2사단장은 직위해제됐다.

동부전선에서도 長津湖畔(장진호반)까지 깊숙이 진출한 美 해병이 중공군의 덫에 걸려들었다.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경계짓는 청천강線(선)을 함경남도 장진호까지 연장한 약 300km의 全(전) 전선에 배치되었던, 한·미군을 主力으로 하는 유엔군 12개 사단, 약 20만 명의 대병력은 36만 명의 중공군과 약 6만 명의 인민군에 의해서 포위될 지경이 되고 말았다.

V자형으로 매복하여 맥아더의 맹목적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은 V자 속으로 안겨온 유엔군을 죽음의 포옹으로 몰고 갔다. 毛澤東은 맥아더를 자신의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맥아더의 영광을 빛낸 戰場은 산악 지형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해군력과 공군력을 마음껏 쓸 수 있는, 면이 넓고 평탄한 바다와 해안이 맥아더 전략의 무대였다면 한반도의 깊은 계곡과 험준한 산악은 기습, 포위, 그리고 장병들의 지구력에 의존하는 毛澤東의 무대였다.

막강한 火力과 풍부한 물자의 뒷받침을 받으면서 주로 대낮에 치르는 정규전에 길들여진 미군은 측면 우회, 후방 차단, 매복, 기습, 위장, 야간 전투, 인해전술을 배합한 毛澤東의 非(비)정규적 奇策(기책)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孫子兵法(손자병법)의 대결이었다. 기습에 성공하고 地利(지리)를 얻은 중공군은 단박에 전장의 주도권을 잡았다.

유엔군은 11월 24일의 일제공격 개시 후 나흘이 지난 28일 벌써 전면적인 후퇴를 결정했다. 맥아더는 이날 서부전선 사령관 워커와 동부전선 사령관 알몬드 중장을 도쿄로 불러 네 시간 동안 회의를 가졌다. 맥아더는 ‘유엔군을 약 100km 후방인 평양─원산線(선)으로 물린 다음 차후의 행동 방침을 강구한다’고 결론지었다. 맥아더는 이날 “전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워싱턴에 擴戰을 건의하였다. 중공의 해안봉쇄, 만주폭격, 장개석 군대의 투입, 그리고 대규모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맥아더를 不信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중국을 치면 중국의 동맹국인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한 상태에서 참전, 미국과 소련이 제3차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는 판단을 하고 맥아더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맥아더는 "그렇다면 한국을 포기, 일본으로 철수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에 대하여 "한국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순 없다. 최선을 다하여 중공군을 저지하다가 마지막 선택으로서 철수를 검토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1950년 12월 3일 당초 계획했던 평양─원산 저지선을 포기하고 서부, 동부 전선의 모든 유엔군 부대는 38선으로 총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양 방어의 거점 도시인 成川(성천)은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었는데 이곳이 이날 중공군에게 넘어갔다. 중공군은 성천에서 평양 동남쪽으로 진출하여 유엔군을 배후에서 포위할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유엔군을 추격하는 중공군의 산악행군 속도는 하도 빨라서 制空權下에서 大路를 따라 차량으로 후퇴하는 美軍들을 추월할 정도였다.

맥아더는 ‘평양─원산 사이에 있는 산악지대를 유엔군이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敵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가하면서 38선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美 합참에 보고했다. 그는 ‘중공은 이미 26개 사단을 전선에 투입하였고 20만 명은 만주에서 대기 중이다. 이것은 우리의 소수 병력이 全 중공인민과 대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치적 결단으로 새로운 작전이 수립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 의한 38선으로의 후퇴 결정은 한반도 통일을 포기한 것일 뿐 아니라 수복한 북한 주민들을 다시 敵 치하로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다. 國軍은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으로 내려가도록 강요한 적이 없었지만 수백만의 북한 사람들은 자유를 향한, 목숨을 건 집단 거주 移轉(이전)을 감행한다. 평양 철수, 흥남 철수, 1·4 후퇴로 해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산가족의 비극이 빚어진 것이 이때이고, 한국인들이 자유의사로 김일성 정권에게 “당신은 아니오”라고 선고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남한 쪽으로 굳힌 것이 이때였다.

국군은 평양을 12월 5일에 포기했다. 평양이 고향이고 北進 때는 평양 돌입의 선봉장이었던 백선엽 1사단장은 대동강 철교를 비롯한 평양의 중요 시설들이 모조리 폭파되고 대동강역에서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 탱크 18대가 대포 한 발 못 쏘아보고 화염에 휩싸여 버리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것이 생전에 내가 보는 평양의 마지막 모습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끊어진 대동강 다리 아래로 흐르는 차가운 강물로 뛰어든 피란민 수백 명이 죽어가고 있었다. 백선엽은 황해도의 사리원을 지날 때 말라리아에 걸렸다. ‘미군이 일본으로 철수한다’는 소문이 번지면서 장병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이 한국전을 거치면서 관찰한 국군의 문제는 ‘상황이 유리할 때는 초인적인 용감성을 보이는데 불리하게 돌아가면 삽시간에 무너져 버리는 점’이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휘관의 솔선수범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평소의 훈련과 계획이 철저하여 부대가 기습을 받아 당황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휘관論이다. 서부전선에 투입된 국군사단 가운데 질서 있는 후퇴를 한 것은 1사단뿐이었다.

백선엽 장군은 “문제가 많은 한국인들을 지휘하려면 지휘관의 속이 썩어야 한다”고 회고했다. 12월 15일 1사단은 6월 25일 아침에 있었던 바로 그 자리, 高浪浦(고랑포)로 돌아왔다. 38선을 따라 진지를 구축하고 수비를 해야 할 입장으로 원위치한 셈이었다.

동해안을 따라 北進하던 국군 1군단(수도사단과 3사단)과 부전고원을 넘어 長津湖(장진호)로 북동진하던 美 10군단(제1해병사단, 미 3사단, 미 7사단이 주력)은 11월 말 중공군 9개 사단(7만~8만 명)의 매복 기습에 말려들었다. 한·미군 약 10만 명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고원과 협곡을 빠져나와 흥남으로 후퇴했다. 이 포위망 탈출 작전은 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지막 철수선이 흥남부두를 떠나고 부두시설과 보급창고들이 폭파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미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이었다.

함선 109척이 동원되어 군인 10만 5,000명, 차량 1만 7,500대, 물자 35만t, 한국 민간인 9만 8,000명을 남쪽으로 실어날랐다. 이 후퇴─철수 작전에서 한·미군은 약 1만 500명의 병력 손실(戰死, 실종, 부상)을 당했다. 7만 명의 중공군이 兵力과 火力에서 월등한 유엔군을 패퇴시켰다는 것은 중공군이 결코 인해전술만으로 이기는 군대가 아님을 입증한다. 맥아더는 흥남에서 철수한 10군단을 38선 방어에 재배치했다. 12월 하순 13개 사단, 3개 여단으로 구성된 20여만 명의 유엔군은 南下하는 29개 사단 31만 명의 중공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12월26일 트루먼(대통령), 애치슨(국무장관), 마셜(국방장관), 브래들리(합참의장), 스나이더(재무장관)는 한국사태를 협의한 뒤 3일 후에 맥아더 사령관에게 戰況이 절망적이 된다면 어떤 조치를 권고하고 싶은지 보고해달라고 통보했다. 12월30일 맥아더는 답신했다.

<1) 중국대륙의 해안선 봉쇄 2)해군과 공군을 동원한 포격과 폭격으로 중국의 군수산업시설 파괴 3)대만의 지원군을 받아서 한반도의 방어선 강화 4)대만의 장개석 군대에 대한 작전제한을 철폐하여 중공 본토에 대한 陽動작전 성격의 공격을 가능케 할 것.

이렇게 하면 중공의 전쟁 수행 능력은 약화될 것임. 한국에서의 승리를 보장하고 아시아의 다른 지역이 공산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부산 교두보로의 점진적인 후퇴를 통해서 한국에서 철수하는 수밖에 없음>

트루먼은 참모들과 이 제안을 검토한 뒤 1951년 1월9일 합참을 통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擴戰은 안 된다. 병력 손실을 최소화하도록 애써 보고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일본으로 철군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1월4일 서울이 중공군에게 넘어간 5일 뒤 미국은 드디어 한국 포기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합참이 자신의 건의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자 맥아더는 다시 電文을 보낸다.

<한국작전을 책임진 극동사령부에 대한 비정상적인 제약 때문에 현재의 전선을 방어할 수 없다>

트루먼과 참모들은 맥아더가 자신의 예상되는 패배에 대비하여 그 책임을 워싱턴에게 轉嫁(전가)하려는 함정을 놓고 있다고 해석했다. 트루먼은 콜린스 육군 참모총장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급파했다. 콜린스는 세 가지 문서를 전달했다.

합참의 작전명령: ‘한반도에서 계속 싸워라’는 요지였다.

합참의 검토문서: ‘일본으로 철수할 경우 취해야 할 16단계 조치’

트루먼 대통령의 친서: ‘미국의 군사력 건설이 완료되기 전에 擴戰은 삼가야 한다’는 요지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만약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면 한반도의 서남해에 있는 작은 섬들을 근거지로 하여 계속 抗戰할 각오라고 밝혔다. 콜린스 총장은 한국으로 날아가 리지웨이 8군사령관과 함께 戰線을 시찰했다. 여기서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맥아더는 당장이라도 한국방어선이 붕괴될 것처럼 워싱턴에 겁을 주면서 중공을 때려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는데 현장에 와보니 意外로 미군의 士氣는 충천하고 있었고 리지웨이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유엔군이 일본으로 철수할 필요가 없다면, 그리하여 한국 전선을 38선 부근까지 밀어올려 고착시킬 수 있다면 미국은 휴전협상을 통해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敵을 선택한 이 잘못된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로부터의 철수’라는 위협으로써 ‘중공 본토로의 擴戰’을 유도해내려던 맥아더의 대도박은 기묘하게도 리지웨이 사령관의 유엔군이 중공군의 南進을 수원 아래에서 저지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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