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주(鄭柄宙)장군의 삶과 죽음

지난 3월 5일 낮 1시쯤, 나는 아내와 함께 모처럼 교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주간조선 조남준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었다는 메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기자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정병주 장군(62세)의 죽음 소식이었다. '자살로 추정된다'는 조기자의 말을 듣자마자 조건 반사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다.

유혈이 낭자한 12.12군사 변란의 밤, 그리고 늘 어린아이처럼 웃던 정 장군의 백발 덮인 얼굴. 내가 지난해 6월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정 장군은 예상대로였다. 덜렁덜렁하는 몸짓과 유쾌한 청년처럼 웃음을 잃지 않는 표정과 그런 명랑함 뒤에 잠깐잠깐씩 엿보이는 허전함과 울분의 그림자…. 그의 웃음은 늘 호쾌하였지만 즐거워서 웃는다기보다는 가슴속에 깃들려고 하는 자책과 분노를 쫓아버리기 위해 애써 '웃어넘겨버리는' 듯한 느낌을 나는 받았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나는 공수 부대를 들먹이며 그를 적지 않게 괴롭혔었다.

'광주 사태 때 공수 부대가 한 행동은 이 부대의 진통과 생리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하고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이다. 6년 동안 공수 특전 사령관을 지냈던 정 장군은 '공수 부대란 것은 집권자가 써먹기 좋은 간편한 부대'라면서 '교육을 잘못 시킨 나의 책임도 크다'고 말했었다. 광주 시위 진압이 있었을 때 정 장군은 군에서 밀려난 뒤였으므로 그의 책임은 '도덕적'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에게 사과하듯 하는 그의 표정이 진지해 이 날 정 장군의 죽음 소식에 접하자 그 표정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부산에서 시외 전화가 걸려왔다. 백영옥 여사(41)였다. 백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난해 8월에 두 분이 여기를 다녀가셨는데… 조 기자님, 좀 알아주세요'라고 했다. 백씨는 12.12사태 그 날 밤 측근 부하들이 슬슬 피해버려 홀로 남게된 특전 사령관을 끝까지 보호하면서 공수3여단의 돌격대에 저항하다가 피살된 특전 사령관 비서실장 고 김오랑 소령의 미망인이다. 남편을 쏴 죽이고 정 장군의 팔에 총격을 가했던 그 돌격대의 지휘자는 김 소령 집과 가깝게 지냈던 육사 선배 박모 중령이었다.

백씨는 지난해 8월 31일에 정 장군과 부인 강남희 씨(57)가 함께 자신이 전화 상담자로 일하고 있는 부산 자비원으로 찾아왔더라고 했다. 정 장군은 위스콘신 대학 경영학과 조교수인 큰아들 정승환 씨(33)가 쓴 박사 학위 논문을 주고 갔다. 그 논문의 서문에는 '고 김오랑 소령을 추모하여'란 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 장군은 두 아들과 두 딸에게 평소에도 '내가 죽은 뒤에도 김 소령 묘소에 꼭 참배하라'고 다짐을 놓기도 했었다. 백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 20일 전에 정 장군 사모님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그 때 목소리가 좀 이상해서 집안에 무슨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조 기자님, 정말 자살일까요. 결국은 12.12사태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백씨는 남편을 쏜 돌격대의 지휘자 박모 당시 중령(대대장)이 지난해 준장으로 승진, 서울근교 사단의 부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가장 피비린내 나는 장면으로 꼽힐 그 날 밤. 신성한 군율을 지킨 사람과 어긴 자, 상관을 쏜 부하와 보호한 사람의 엇갈린 운명이 백씨의 이 짧은 하소연에 서려있었다. 3월 7일 밤. 서울 명동성당 지하실에 안치된 정 장군의 빈소는 조문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까만 상복 차림의 단아한 자태로써 한 집안의 안주인다운 위엄을 풍기는 강남희 여사는 조문을 발기에 앞서 나에게 인사말을 먼저 했다. '2년 전에 월간조선 난 그분과의 인터뷰 기사 덕분에 언론에서도 이번에 잘 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 장군의 죽음을 전하는 언론은 1987년 12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그와의 최초 인터뷰 기사를 많이 참고하고 인용했었다.

장례식에 조화를 보낸 같은 편 사람, 반대편 사람

'하루 세 끼 밥 먹고, 하늘을 쳐다보다가 땅이 있으니 걷고, 그리고는 잠자고…. 울화가 치밀 때는 술병을 들고 구파발~서오릉 주변을 왼 종일 혼자서 터벅터벅 걷다가 아무데서나 쓰러져 자곤 했어요. 그러다가 서울 북쪽의 검문소 앞을 지날 때는 노태우가 저 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나고…' 1987년 12월 16일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처음으로 공개적인 발언을 한 정 장군은 울적했던 시절의 심경을 그렇게 표현했었다.

이 말을 정 장군은 농담처럼, 남의 일처럼 했었던 기억이 난다. 기자가 누구와 서너 시간을 인터뷰해도 오랫동안 머리에 남는 것은 결국 한두 마디인데, 정 장군의 그 말이 그랬다. 정 장군이 영원히 말문을 닫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이 말이 3월 7일자 동아일보가 1면의 횡설수설난에 인용된 것을 비롯, 여러 기사에 등장하였다. 역시 군인은 죽어서 말하는 모양이었다.

정병주 씨 앞에 '군인'이란 말을 갖다 붙여도 어색한 수식어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이승에서 가졌던 단 하나의 직업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육사9기로 입교하면서 시작되었던 그의 군 생활은 31년만에 끝났고, 1927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나면서 시작된 그의 생애는 62년만에 막을 내렸다. 6.25때 그는 1연대 소대장으로서 후퇴하다가 한강변에서 포탄의 파편에 머리를 맞아 후송되었다. 공수단장 시절에는 낙하 훈련 중 다리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1979년 12월 13일 새벽의 부상은 군 생활 중 세 번째였다.

그가 한국 현대사에 기록되고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부하의 총을 맞은 이 세 번째 부상때문이었고, 그의 죽음을 몰고 온 네 번째 상처는 군복 입은 그의 사건을 지면과 화면에 쫙 깔리게 하였다. 4반세기에 걸쳐 한국을 통치하였던 군사 정권은 '상처받은 군인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전장에서의 상처가 아니라 하극상과 쿠데타에 의한 상처였다는 게 이 시대 한국 군인들의 비극이었다.

장례식장에 늘어선 조화(弔花)는 죽은 이와 그 가족의 이력서이기도 하다. 고향 사람, 동창회, 친구, 선배, 후배 등등 그 사람의 행동반경이 조화에 달린 이름들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3월 8일 오전에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정 장군의 영결식장에서도 그러했다. 조화를 쭉 둘러보면서 나는 현대사의 한 장(章)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민정당 의원 정호용, 육군참모총장 이종구 대장, 특전사령관 이○○중장, 방직협회장 윤성민, 제1공수여단장 장○○준장, 민주당 총재 김영삼, 평민당 총재 김대중, 3군사령관 고명승 대장, 국방장관 이상훈….

호상은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12.12사태 때 그와 반대편에 섰던 사람, 그와 같은 편에 섰다가 뒤에 그쪽 편으로 넘어간 사람, 그의 공수단 후배들,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 그를 정치적으로 매도했던 사람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두 사람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정병주 장군의 죽음에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전두환, 노태우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때 정 사령관의 직속 부하였고 집안끼리도 자주 접촉했던 사이였다. 정병주 사령관은 두 대통령(全, 盧)과 두 육군참모총장(정호용(鄭鎬溶).박희도(朴熙道))과 최세창 합참의장(대장).장기오 전 총무처장관(예비역 중장)을 직속 부하(여단장)도 거느렸던 사람이다. 제5공화국의 핵심부를 차지했던 공수단 인맥의 정점에 있었으나 그는 개인적인 정분을 끊고 군율에의 충성을 선택했다가 피투성이가 되었던 것이다.

영결식의 집전을 한 조순창 신부는 '교리에는 자살한 사람의 영결식을 교회에서 못 하게 돼 있지만 정 장군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직 그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져 있지 않기 때문에…'라고 했다. 그는 5년 전 천주교에 귀의한 정 장군의 덕을 기리는 설교를 하면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교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관 위에 성수를 뿌리면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성수는 고인이 이 세상을 살았던 그 나약한 인간의 허물을 씻고, 고인의 번뇌와 번민과 미움을 씻으며, 남은 우리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며, 고인의 죄는 우리의 죄이기도 합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다같이 속죄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정 장군의 시신이 담긴 관이 버스에 실려지던 날 바람은 쌀쌀했으나 하늘은 가을빛이었다. 남편 김오랑 소령의 죽음 뒤 두 눈이 멀어버린 백영옥 씨는 소복차림으로 남동생이 부축을 받으면서 장지인 국립 묘지로 향하였고 손은 따뜻하였다. 장례 버스가 떠난 텅빈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교우(交友)인 박찬종 의원(무소속)은 '우리 정치인들이 저분을 죽인 것 같다'고 했다.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자 나는 갑자기 살아 있다는 것의 뿌듯한 기쁨, 그리고 고마움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누구한테 전해주고 싶었다. 공중 전화 상자로 가서 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장군의 삼우제(三虞祭)가 있었던 3월 10일 밤 나는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있는 고 정병주 장군의 집을 찾아갔다. 부인 강남희 여사는 '명예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시던 그분이 왜 그렇게 되셨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남편을 잃은 슬픔 못지 않게 그 죽음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답답함이 강 여사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았다.

강 여사는 나를 붙들고 '조 기자님께서는 기자 생활을 하시는 동안 숱한 사건과 죽음을 취재하셨을 텐데, 이렇게 돌아가시는 수도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꿈에도 편한 얼굴로만 나타나셨어요. 밤에 전화벨이 울리면 금방이라도 '여보, 나야!'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수화기를 들곤 했습니다. 천당에 가서 그 이를 만나 꼭 따져봐야겠어요.'

지난해 10월16일 저녁 정병주 씨는 옆집에 사는 매제를 불러 함께 매운탕을 먹은 뒤 산책 나가는 사람의 옷차림을 하고 '매제의 집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오겠다'면서 나갔다는 것이다. 정씨는 매제의 집에서 담소하다가 밤 10시쯤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고 한다. 여동생은 오빠 집까지 따라왔다. 정씨는 문 앞에 이르자 손짓을 하면서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여동생을 보낸 뒤 정씨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디론가로 갔다가 3월4일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야산중턱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다.

경찰의 부검 결과는 정씨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살 추정에 의문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타살로 의심할 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정 장군의 죽음이 가진 미스터리와 메시지는 죽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참 군인으로서, 그리고 진실된 천주교인으로서 생을 마치고 싶어했던 사람이, 자녀 교육을 잘 시켰고 부부금실이 그럴 수 없이 좋았던 사람이 왜 군인과 교인의 도리에 배치되는 방법의 죽음을 해야 했느냐 하는 물음인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가 죽은 정장군에게 던지는 물음일 뿐만 아니라 정 장군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물음이기도 할 것이다.

강 여사는 '그 때의 고통이 가장 큰 줄 알았었는데 이번의 고통이 더 하다'고 했다. '그 때'란 12.12사태를 가리킨다. 정 장군은 생전에 나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왼팔에 총을 맞은 나는 개 끌리듯 끌려갔지요. 내가 피를 흘리며 지프에 태워져 어디론가 가는데 내 옆에서 또 다른 한 군인이 피를 흘리며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관인 장대위가 다친 줄 알았어요. 부대 정문에서 보초가 검문을 하니까 내 차에 탔던 장교가 '나 ○○대장이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를 끌고 나온 부하가 박○○ 중령일 줄 알았어요. 나는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는데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 생각만 나면 피가 역류하듯 합니다. 거기서 과다출혈로 쇼크 현상을 보이니까 나를 국군통합 서울 지구 병원으로 데리고 가더군요. 나는 치료를 받으면서도 장대위 걱정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피신했더군요. 나의 부하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배신하여 반역하거나 피신한데 대하여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정 장군은 김오랑 비서실장이 사령관 집무실에서 저항하다가 피살된 것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지난해 6월 나는 정장군과 김 소령을 쏜 측에 있었던 당시 공수3여단 소속 대위 나영조 씨(34.식당업)를 만나 반대쪽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의 팀은 그날 5분 대기 중이었습니다. 대대장 박 중령이 나에게 특전 사령관을 모시고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대위인 내가 이 명령의 배경을 알 수도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권총을, 부하들을 M16소총을 들고 특전 사령관실로 들이닥쳤습니다. 안에서 사격이 있었습니다. 박 중령은 오른손, 나는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과 척추, 김모 대위는 배, 신현수 상사는 목에 총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쓰러졌고, 바깥 복도에서 기다리던 부하들이 닫혀진 문을 향해 집중 사격을 했습니다.'

박 당시 중령에 대해 정 장군은 나와의 대화 중 가끔 괘씸하다는 감정을 비치기도 했었다. 그의 거취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박 중령은 해외 공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몇 년 전 귀국, 지난해 장성으로 승진했는데 부사단장인 그가 정 장군의 죽음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정 장군이 군 병원에서 총상 치료를 받고 있는 사이 가족들은 첫 며칠간 그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하도 답답해서 강 여사가 서울 근교의 어느 절로 기도하러 갔었는데, 그 곳에서 정승화 장군의 부인 신유경 씨와 맞닥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한 달쯤 지나서 면회가 허용됐다. 80년 2월 29일 고 김오랑 소령의 유해는 국립 묘지에 묻혔다. 이 자리에 참석하고 늦게 온 강 여사가 저간의 사정을 실토하여 정 장군은 비로소 비서실장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 장군은 현역에 있을 때 아내에게 '나는 군복을 벗으면 국영 기업체 같은 데 가서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군인으로서 끝나고 싶다. 그러니 당신도 각오해야 돼?'라고 경고하듯 말하곤 했었다. 정 장군은 89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노태우 후보를 반대하는 이유를 나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군인은 명령에 거의 무조건 따르도록 훈련된, 사고방식이 아주 단순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사회를 끌고 나갈 수가 없어요. 저도 아내로부터는, 당신은 가정도 군대식으로 다스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직업 군인은 옷을 벗고 정치를 해도 절대로 그 버릇을 버릴 수가 없지요. 군대는 상관이 하고 싶은대로 하게 돼 있는 사회인데, 그런 사고방식을 정치와 경제에 적용해 보십시오. 법치국가에서 명령과 법을 구별하지 못하고 명령에다가 법을 갖다 붙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 장군은 5.16때도 육사 8기생이 주도한 이 쿠데타에 비협조적이었다. 당시 중령이던 그는 주체 세력 장교들에게 붙들려 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12.12사태 때 육군 본부측에 서서 전두환 합동 수사 본부장편에 대항했던 장성들 중 상당수는 예편된 뒤, 정권을 잡은 전씨측이 제공한 국영 기업체 사장 등 고위직을 받아들였으나 정장군은 김진기 전육군 헌병감과 함께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외롭게 살았다.

강남희 여사는 '당한 것도 분한데 우리를 죄인 보듯하는 주위의 시선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그분은 되레 나를 위로하면서 속으로 분을 삭이고 좀처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정 장군은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가운데서 피눈물나는 물리 치료 운동으로써 왼팔의 기능을 회복했고 지병인 당뇨명의 자가 치료에도 신경을 써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을 관리했다고 한다.

정 장군은 '대중 목욕탕에서 자주 목욕하는 것이 돈도 적게 먹히고 건강에 좋다'고 나에게 여러 번 자랑했었다. 부부 사이는 더욱 가까워져 함께 등산을 자주 다녔으며 2남 2녀인 자녀들도 아버지를 위로하는 데 잔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다. 정 장군은 생전에 '아이들이 잘 해주어 견딜만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정 장군의 군생활 때 앨범 사진을 보면 늘 유쾌한 표정이다. 지휘하는 모습과 훈련을 참관하는 것이 그런 게임을 즐기고 있는 표정이다. 정 장군의 별명이 '스마일 장군'이었다고 한다.

군생활, 그 자체를 즐겼던 그가 부하에게 총을 맞고, 누명(김재규에게 돈을 받았다는 것. 실제로 그 돈은 당시 정보부장이 전두환 당시 국군 보안 사령관을 포함한 주요 군지휘관들에게 의례적으로 주던 촌지였다)을 쓴 채 군복을 벗었으니 그의 내면 세계가 어떠했을지는 상식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 장군은 그런 울분을 표출하지 않고 삭이려고 애썼다. 안으로 삭이려는 이 노력이 외향적 표출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소나기 흠뻑 맞으며 군정 종식 위해 기도드려.

정 장군은 1983년에 명동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강 여사는 불교도였는데 이 해에 장남이 천주교인 아내를 맞게 되었다. 정 장군은 '늙으면 자식 따라 살아야 한다'면서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장남 승환 씨는 연세대 요업학과를 졸업한 뒤 네브라스카 경영대학원에 유학, 지난 해에는 위스콘신 주립대학 경영학과의 조교수로 취임했었다. 차남 태환 씨(32)는 지금 워싱턴 주립대학원에 유학 중이다. 큰딸 민구 씨(30)는 이화여대를 나와 대학교수에게 시집을 갔으며 막내딸 민영씨(27)는 이화여대 수학과를 졸업한 뒤 교육개발원의 수학 담당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런 자녀들에 대하여 정 장군은 자랑스러워했었다. 집을 나가기 며칠 전에도 큰 아들이 봉급을 많이 받는다고 강 여사에게 흐뭇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특히 큰아들과는 부자 사이라기보다는 친구처럼 다정(?)했다고 한다. 정 장군은 12.12사태 뒤 큰아들에게 '야, 교수가 좋은 모양이더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 이것은 교수가 되라는 뜻인데,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충고를 하는 식이었다.

강 여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분과 저는 열심히 명동 성당에 나갔지요. 노인반에 들면 노인 대접을 받는다면서 굳이 청년반에 들어 1주일에 두 시간씩 공부를 했습니다. 신부님이 '뭘 하세요'라고 물으시면, '장사해요'라고 답하시더군요.' 정씨 부부는 1984년 2월에 영세, 그 해 10월에 건진성사를 받았다. 세례명은 정요아김, 강안나였다. 정 장군은 명동 성당의 사회 봉사 조직에도 들어 청송 보호 감호소, 영등포 창녀촌, 불우 시설들을 자주 찾아다니곤 하였다. 강 여사도 창덕여고에 나가 카운셀러로 일하고 있다. '제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다기보다는 그런 아이들과 섞여 지내면서 오히려 많이 배웠습니다.'

강 여사에게 결혼한 사정을 물었더니 잠시 슬픔을 거둔 표정이 돼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6.25때 저는 이화여고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의 동생이 군대에 징집돼 가서 집안에서 걱정을 하고 있는데 편지가 날아왔어요. 중령이시던 그분이 보낸 편지였어요. 제 동생을 부하로 잘 데리고 있는데 죽도록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이 휴가 중에 저희 집을 찾아와서 알게 되었지요. 아버님께서,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지 못해 너를 고생시킬지는 모르겠지만 속을 썩힐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결혼을 권했습니다.'

12.12사태 뒤 쓸쓸한 정 장군을 여러모로 보살펴준 사람은 언론인출신의 K씨였다. 나이 70대인 K씨는 정 장군과는 한 30년간 사귄 사이였다. 정 장군이 불우한 시절을 보낼 때 K씨는 말동무, 등산 동무가 돼 주면서 위로했다. 정 장군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조언도 많이 했다. 정 장군이 8년간의 침묵을 깨고 사회적 발언을 하게 된 것은 1987년 대통령 신지를 앞두고서였다. 6월 사태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그해 6월 15일 저녁 명동 성당에서는 폭우 속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미사가 열렸는데 정 씨는 소나기를 흠뻑 맞으면서 군정 종식을 위한 기도를 드렸었다.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이 그해 9월호 월간조선의 인터뷰에 응한 뒤 나는 정병주 씨를 지면으로 끌어내기 위해 몇 번 접촉했었다. 그는 '아직 말할 시기가 아니다'는 입장이었지만, 대통령 선거라는 중대사에서 방관자로 머물러 있지는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때 내가 놀란 것은, 정 장군이 12.12사태의 전체적 상황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는 점이었다. 내가 설명을 하면 '그게 그렇게 되었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그의 정보명은 1979년 12월13일의 새벽에 멈추어 가동하지 않은 듯 하였다. '왜 그 날 밤 정승화 장군 편에 섰느냐?'는 물음에 대해서는 '정 장군편이 아니라 정당한 명령의 편에 섰던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전두환 씨 등 자신을 괴롭혔던 군인들에 대한 개인적 비난을 삼갔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인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였다. 그의 후임 특전 사령관인 정호용 씨에 대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의리의 인물'이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런 정 장군이 나와의 인터뷰에 응한 것은 정승화 씨가 민주당에 입당하고 난 3일 뒤(11월 12일)였다. 다시 며칠 뒤 정 장군은 김진기 전육군 헌병감과 함께 기자 회견을 자청하며 12.12사태 주도세력을 비난하였다. 이 무렵 민주당에서는 정 장군의 입당을 권유하였다. 김진기 씨 등 10여 명의 예비역 장성들이 입당했으나 정 장군은 끝내 입당하지 않았다.

정병주 씨는 군정종식을 위해서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지만 정치에 끼여들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민주당은 그해 12월 5일의 여의도 유세에 정병주 씨가 연사로 나올 것이라고 한다. 정씨 부부는 그해 12월 16일 투표를 한 뒤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17일 일본에서 정씨는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아내에게 '아직 우리 국민 수준이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부족한 모양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으니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밀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장군 부부는 미국에 가서는 둘째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로 장남 집에서 기거하며 관광을 다니는 등 여섯 달 동안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 정 장군은 지난해 4월 말에 귀국했고 6월에 나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다.

정 장군 삼우제 있던 날 큰딸은 둘째아들 낳아

삼우제가 있었던 날 오전에 고 정 장군의 큰딸 민구 씨는 둘째아들을 낳았다. 한 생명이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대를 이어 태어난 것이다. 이 날 유족들이 삼우제를 지내려고 국립 묘지로 간 사이에 정장군의 조카 상환 씨(46)가 빈소를 다녀갔었다. 삼촌의 빈소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상환 씨는 고 정 장군의 죽음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사람이다.

정병주 씨 위로는 두 형이 있었다. 맏형은 젊은 나이에 죽었고 둘째 형은 큰아들인 상환 씨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세상을 떴다. 그 뒤 정씨는 이 조카를 아들처럼 같이 키우면서 돌봐주었다고 한다. 상환 씨는 10여 년 전부터 충남 온양에서 삼원지관공업(주)이란 공장을 도려왔다. 방직 공장에서 쓰는 실타래용 지관(紙管)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4년 전부터는 제지 시설을 추가하여 운영해왔다. 정장군은 삼원지관공업이 기재 설비를 추가할 때 자신의 집(약 2억 원짜리)을 대한 보증보험(주)에 근저당으로 설정, 리스 회사에 대한 보증을 섰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제지 공장들이 공급 과잉을 빚어 종이 단가가 폭락하는 가운데 이 회사는 지난해 10월 초 부도를 내고 말았다. 정 장군은 부동산을 팔아 조카에게 운영 자금을 빌려주었을 뿐 아니라 언론인 출신의 친구인 K씨의 수억대 돈을 조카 회사에 소개하여, 사채로 쓰게 했다고 한다. 조카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정 장군은 친구의 돈까지 날리게 되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 장군은 아내에게는 K씨의 돈을 소개해준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강씨는 삼원지공이 부도가 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K씨는 부도가 난 뒤에도 아주 대범하게 처신했다고 한다. 미안해하는 정 장군 부부에게는 '우리 사이는 돈 이전에 정으로 맺어진 것인데… 돈이야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고, 없다가도 새로 생기는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되레 위로를 했다는 것이다. 정 장군은 부도 사태의 뒷수습이 궁금해 조카 상환 씨와 만나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몸을 피하고 있는 조카와는 전화 통화만 가능하여 답답해하였다고 한다. 조카가 자기쪽 전화 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아 정 장군은 상당히 애를 태웠던 것 같다. 그래도 정 장군은 자기 일 걱정보다는 조카 걱정을 더 많이 했다고 한다. 정 장군은 이런 사건 속에서도 적어도 집으로는 평정을 유지하였다.

가출 이틀 전에 그를 만났던 옛 부하는 '통일로변 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했는데 군을 걱정하시는 말씀을 하여라'고 기억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도 군대는 절대로 흔들려서는 안 되는데, 지역 감정이니 뭐니 해서 군대에도 분열의 조짐이 보여 걱정스럽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가출 당일에도 정 장군은 옛 부하에게 전화를 걸어 '사법서사를 개업한 내 동서를 잘 도와주라'고 부탁했었다. 그 옛 부하는 '전화 목소리에서 전혀 이상한 낌새를 차리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정 장군은 가출하기 며칠 전 예비역 장성들과 함께 골프를 칠 때도 '우리 모두 오래오래 삽시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정 장군은 저당 잡힌 집 이외에도 청파동의 가옥 등 부동산이 더 있어 당장 생계에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정 장군은, 골프장에서는 캐디를 데리고 다니지 않았고 백발의 나이에도 지하철과 시내 버스를 잘 이용하는 등 검소한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그렇게 돌아가실 수가…' 의문과 분노에 싸인 강 여사

조카의 부도가 큰 충격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목숨을 끊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가족들의 일치된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집을 나간 10월 16일 밤과 그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19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가 죽음의 비밀을 캐는데 가장 중요한 단서일 것이다. 정 장군은 집을 나간 그 날 밤을 서울 시내 여관에서 자고 그 다음날에 아마도 조카를 만나러 나간 것으로 보인다. 조카가 17~19일 사이에 정 장군을 실제로 만났느냐의 여부는 경찰이 자살로 단정하는 바람에 수사대상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가족들도 경찰의 자살 단정에 수긍하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인 수사를 요구하지도 않아 정 장군이 자살했다면 그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강남희 여사는 '그분의 옷에서 나온 수첩과 손수건이 말짱하게 보존돼 있는 것이 참 이상했다'고 말했다. 손수건은 정 장군의 체취를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정 장군의 빈소에 모인 사람들 중 자살설에 가장 강한 의문을 제기한 것은 12.12사태 당시의 수경사령관 장태완씨(58.한국전산증권 사장)였다. 12.12사태 그 날 저녁 강씨는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 김진기 당시 육군 헌병관의 계략에 걸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부하들에게 납치 당하고 있던 순간에 서울 연희동의 한 요정에 보여 있었다. 전 장군이 '식사나 같이 하자'면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위해 실병력을 동원할 위험이 있는 이 세 지휘관들을 유인해낸 것이었다(전씨는 참모장을 대신 보내 바람을 잡고서 시간을 끌도록 했었다).

장씨는 12.12사태 때 자신의 2개 예하 경비단이 전장군편으로 넘어가고,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부하 헌병들에 의해 체포.연행돼 조사를 받고, 온 집안이 수색을 당하고 미행을 당한 것이 속상해 마음 고생을 많이 했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내가 바보 짓하여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는 1남1녀를 두었다. 1981년에 서울대학교 2학년생이던 아들이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간다면서 가출, 한 달간 실종되었다가 고향인 경북칠곡의 산속에서 얼어붙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음독 자살로 처리했었다.

장씨 집안에서는 지금까지도 '가출하는 날 어머니에게 어리광 부린다고 꼭 껴안고 나간 아이가, 딱 한 번밖에 간 적이 없는 고향을 찾아가 죽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병주 씨도 시체로 발견된 곳과는 별다른 연고가 없어 강씨는 '왜 저기로 가셨는지, 자사이라면 왜 글 한 줄 남기지 않으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탄식했다.

12.12사태 때 정승화 장군 편에 섰던, 수도권의 2대 핵심 부대 지휘관 두 사람은 군사 변란에 의해 밀려난 비극에다가 그보다 더한 가정적 비극을 덧붙이는 불운을 맞고 말았다. 속임수와 바람잡기와 배신으로써 이 두 장군을 밀어냈던 전두환 씨측 장군들의 승승장구와 장태완, 정병주씨와의 비극을 비교해보면 '과연 이 세상에는 천도(天道)가 있는가'라는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저절로 자아내게 만든다. 정장군의 장례식에는 전두환, 노태우 씨 등 정장군의 옛 부하들이 나타나지도, 부조금과 화환을 대신 보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 예비역 장성은 '고인의 영혼 앞에서도 용서와 화해를 기피한 행동이다'라고 흥분하기도 하였다. 부도 사건으로 고민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가출 직전까지도 군대를 걱정했던 정 장군은 이렇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과 분노와 한을 남기고 갔다. 나는 '사람이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습니까'라고 되풀이하여 묻는 강 여사에게 '정 장군은 마음이 너무 곧고 고와서 그렇게 되신 것입니다'는 말로써 어리석은 답을 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장군 같은 사람이 살기에는 이 세상이, 그 인정이, 그리고 이 역사가 너무나 가파르고 살벌했던 모양이다.

고 정병주 장군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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