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께선 한번 쉬셔야'
21일 오후 김계원 실장 집 일요일인 이날 유정회 조일제(趙一濟)의원은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정보부에서 국내 정치담당 과장·국장·차장보를 오래 지낸 조의원은 과거의 상관인 김실장 집으로 찾아갔다. 김실장은 시국수습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유신선포 무렵의 정치공작을 맡았던 조의원은 이틀 전 부산·마산을 다녀와 그 전날 태완선 유정회 의장에게 현지 실정을 보고한 적이 있었다. 조의원은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유신헌법의 정신이 지금 왜곡되고 있습니다. 당초의 헌법 정신은 대통령이 당적을 갖지 않고 초당적 차원에서 국정을 통괄하고, 국무총리는 야당도 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2원집정제적인 요소가 있는 헌법입니다. 그래야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 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박대통령께서 공화당 총재직을 맡아 여당의 당수가 되셨습니다.
야당 입장에서 보면 정권장악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극한투쟁이 안 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나라의 체구도 커졌으니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직을 내어놓고 국방, 통일문제 등 큰 줄기만 붙들고 자질구레한 건 민주화시켜야 합니다.'
김실장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얼마 전 대통령이 '김실장,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공화당 총재를 맡은 건 잘못된 것 같아'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10년간 대만에서 대사 생활을 하는 바람에 국내 정치정세에 어두워진 김실장은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김실장은 '그런 질문을 다시 할지 모르니 건의서를 하나 써달라'고 부탁했다.
조의원은 며칠간 국회도서관에 틀어박혔다. 유신 선포의 막후연출가인 이후락 의원을 찾아가 당초의 구상을 확인하기도 했다. 유신선포 당시 정치담당 국장이던 조의원은 2원집정제의 논리로 야당 인사들을 설득, 유신 찬성 서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이 공화당 총재직을 수락하자 화가 나서 공화당 고위 당직자에게 '이건 사기 아니냐'고 대든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 날자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괴는 20일에 이른바 조국전선중앙위 긴급확대회의를 소집한 데 이어 21일에는 평양시 군중대회라는 걸 열고, 부산사태의 전국적인 확산을 겨냥하여 한국 대학생 및 시민들의 반정부 투쟁을 극렬하게 선동했다는 것이다.
22∼23일 공화당 의원회의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화당은 이틀간 무역회관 식당에서 상임위원회별로 의원들의 시국수습책을 들었다. 식당 문을 닫아걸고 기자들의 출입도 막았다. 신형식 총장은 '발언내용은 내가 책임진다'는 대통령의 말을 전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언론자유를 얻은 여당 의원들은 솔직한 이야기들을 쏟아놓았다.
'정보부장을 바꾸라'
'청와대 비서실을 개편해야 한다'
'후계자를 빨리 부상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에 이어
'각하께서 한번 쉬시는 게 좋겠다'까지 나왔다.
신총장은 이 발언들은 첨삭하지 않고 충실히 기록,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청와대에 보고서를 가져가기 직전인 24일 대통령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각하께서 그 보고를 안 듣겠다고 하십니다.' 신형식은 맥이 탁 풀렸다. 그는 지금도 '그때 안 듣겠다는 것이 대통령의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귀를 가리는 자들의 소행이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엇갈린 보고 올려
백두진 당시 국회의장은 이 무렵 김재규의 직접 전화를 받았다. '부마사태를 조종한 것은 남민전 조직이라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의 이 통보는 황성권을 남민전 관련자로 착각한 부산 수사진의 보고를 그대로 전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섭 제2차장보도 10·26 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부마사태의 배후 조직을 ①남민전, ②기독교 계통, ③불평불만분자라고 진술한 것으로 미루어 '남민전 조종' 쪽으로 수상 방향이 기울고 있었던 것 같다.
18∼25일 사이 김재규는 부마사태에 대해 매우 엇갈리는 보고를 올렸다. 개인적으로는 측근들에게 부마사태가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에서 비롯됐고 배후는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공식회의에선 상투적인 원인 분석을 보고하곤 했다.
임방현(林芳鉉) 당시 청와대 대변인(지금 민정당 의원)의 증언
'관계자 회의에서 김재규는 부마사태의 주모자를 첫째 신민당, 둘째 학생, 셋째 제 5열의 개입 등 세 갈래로 추정, 조사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 박대통령을 마주보지도 못하고 아래로 시선을 비켜 던진 채 풀죽은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정보부장이 저런 애매한 보고를 해선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열 법무장관의 증언
'안보회의에서 김재규의 보고사항 중엣 신민당이 조종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들어 있었다. 나는 다른 계통으로 부산사태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으므로 '저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다.' 재판 과정에서의 진술대로 김재규가 내심으로는 부마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공식적인 자리에선 신민당이나 불순세력의 조종을 보고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역심(逆心)을 위장하려는 행동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0월 22일 현홍주 국장이 작성, 대통령께 보고한 부마사태에 대한 전반적인 판단서는 정확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1차 보고서는 부마사태의 원인을 여러 갈래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의 김재규 보고는 주로 배후세력 수사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수사가 오락가락했으므로 김재규의 보고도 일관성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가 위기에 있어서의 정보책임자로서는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김재규는 대체로 부마사태를 과대평가 하는 쪽으로 보고를 한 흔적이 있다. 5대 도시로 확산된다든지 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반면 차지철은 확산의 염려가 없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이 경우에도 차의 보고를 선호했던 것 같다. 김재규는 이때 파리에서 일어난 김형욱 실종 사건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부하 간부가 10월 22일에 해외출장 목적지에 파리를 집어넣어 결재를 올리자 '이럴 때 하필 그곳에 가느냐'면서 신경질을 내곤 목적지 변경을 지시했다.
정국 전환의 구상에 몰두
23∼24일 청와대
10월 22일 김치열 법무장관은 박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단둘이서 장시간 부마사태 등 시국문제를 이야기했다. 다음날도 두 번째의 단독 면담을 했다.
두 차례 면담에서 김장관은 난국을 타개하는 근본적인 대책으로서 유신헌법의 개정을 건의했다. 개헌의 골자는 유정회 제도를 없애고 통대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나도 같은 의견이다'는 태도를 보였다. 김장관은 '개헌 문제를 연구해 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첫날 면담 도중 박대통령은 '정보부에서 몇 년 근무했지'하고 물었다. 김장관은 1970∼73년 사이 김계원·이후락 부장 아래에서 차장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박대통령의 물음에서 김장관은 대통령의 보다 깊은 의중을 읽었던 것 같다.
김법무는 한달 전에도 대통령과 단독 면담을 했었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이번 임기가 끝나기 전에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유신체제를 시한성이 있는 비상조치로 생각하고 있더란 것이다. 박대통령과 김장관의 면담 직후 권력층 주변에선 '후임 정보부장에 김치열'이란 얘기가 돌았다. 당시 공화당 의원이었던 이후락은 10월 24일에 같은 선거구 출신인 신민당 의원 최형우를 만나 당직 사퇴를 권유하면서 그런 귀띔을 했다.
김치열 장관은 박대통령에게 직언을 설득력 있게 잘하고 대통령의 신임 또한 두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에 1.1퍼센트 앞섰던 1978년 12월 12일의 총선은 '역사상 가장 깨끗했던 국회의원 선거'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김치열은 '정치 민주화는 조국 선진화의 요체이며, 이를 위해선 관권선거의 전통을 이 기회에 끊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정보부에서도 '유정회가 있는데 굳이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건의, 이 총선에서 행정기관은 공화당 의원들이 매정하게 생각할 정도로 중립을 지켰다.
김장관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 제명 직전엔 '강경책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면 팔레비나 소모사의 말로가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라는 일종의 '상소문'을 개인적으로 박대통령에게 올린 적도 있었다. 그는 열흘 전의 임시 국무회의에선 부산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령 선포에도 반대했었다. 이러한 김장관에게 박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맡기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은 정국의 근본적인 전환뿐만 아니라 유신체제의 진로의 대한 재검토를 뜻하는 것이었으리라.
박대통령은 늘 장기집권의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한달 전쯤 새마을 운동 담당의 박진환(朴振煥) 특별보좌관에게 박대통령은 불쑥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 정치적으로 새마을운동을 없애버리겠지'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정권에 관계없이 새마을운동이 계속되려먼 농협이 앞으로 이 운동을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박대통령은 부마사태를 계기로 두달 밖에 안 남은 80년대에 대한 큰 구상을 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1978년 유신헌법하의 두 번째 임기에 취임한 직후 박대통령은 통대 제도를 '당적을 가진 선거인단 제도'로 바꾸고, 대통령 후보도 정당 추천이 가능하며, 찬반 연설도 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겠다고 소신을 피력한 적도 있었다. 부마사태 이전부터 대변인은 80년도 기자회견 내용의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줄거리는 80년대에 우리 사회를 '자율과 개방'으로 성숙시켜나가겠다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의 이런 80년대 구상의 상당부분이 제5공화국에 의해 수용된 점은 주목거리다.
김영삼 총재가 제명되던 날 차지철은 대통령을 수행, 지방 시찰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카폰으로 공화당 간부와 전화 연락을 하여 제명을 확인한 다음, 도중의 어느 호텔에서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각하, 이제부터야말로 진짜 정치를 할 때입니다'고 힘주어 말했는데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박대통령이 구상하던 80년대의 새정치가 차지철이 생각한 새 정치와 같을 리야 없겠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었음도 명백한 것 같다.
당시 청와대의 정치담당 수석비서관이었던 유혁인은 최근 나에게,
'요즈음 발표되는 회고물 기사에 보면 박대통령이 10·26직전에 자신의 거취에 관한 구상을 하고 있었고, 누가 대통령에게 물러날 것을 권했다는 증언이 나오는데, 나는 두 가지 점을 확언할 수 있다. 대통령 면전에서 그만두라고 한 사람도 없고, 대통령이 장기집권 체제 자체를 양보하려고 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5·16때부터 그가 혐오해온 '구 정치인' 집단을 청소한 뒤 깨끗한 정치판을 합리적인 정치인들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후견인 역할을 할 뜻도 있었다는 게 당시 측근들의 얘기다. 김영삼 제명은 그런 청소 작업의 시작이었다는 풀이다. 박대통령의 구상을 실천하기 위해선 정운갑 대행체제로 상징되는 야당의 어용화가 그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했고, 여당권의 도구화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정치의 결벽성을 무리하게 추구하면 정치를 위해 정치를 말살시키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걸 몰랐다는 점에서
'박대통령은 본질적으로 정치인이 아니라 개혁가(reformer)요 교사(teacher)였다'
는 해석도 있다.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었던 김경원 박사는 박대통령 생존시에는 '이분은 유교적이고 일본적인 철학을 가진 우리나라의 마지막 통치자가 될 것이다'는 평가를 하곤 했다.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
이즈음 박대통령은 이승의 생활을 정리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이것은 물론 10·26 뒤 박대통령의 행적을 되돌아보았을 때 느낀 감회이긴 하다. 박대통령은 10월 6일 지만 육사 생도를 데리고 경북 구미시 상모동 선영을 찾아 성묘를 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갑작스런 귀향을 반기는 주민들의 인사에 일일이 답례하고 생가에 들러 주민들과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박대통령은 마을 어귀에 세워진 노인정을 찾아 바둑을 두고 있던 노인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 두 달 전인 8월 7일에는 역대 각군 참모총장들을 청와대로 초청, 만찬을 대접했었다. 참석자들은 느닷없는 대통령의 초대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만찬장소인 청와대 구내 영빈관에 들어섰으며 생일 케이크가 놓여진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의아해했다. 그들이 아는 한 박대통령의 생일은 분명히 11월 14일(음9월 30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찬장에는 악사들이 궁중복 차림으로 앉아 은은한 아악(雅樂)을 연주하고 있었다.
만찬이 시작되자 박대통령은 참석자 중 제일 연장자인 건군의 산파역 이응준(李應俊) 장군과 메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인사말을 했다.
'선배님 생신을 제가 모르고 지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며칠 전 어느 신문을 보고 지난 7월 20일이 선배님 생신이셨던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선배님과 역대 총장들을 모시고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의문이 풀린 참석자들은 이 장군의 생일을 박수로 축하하고 모처럼 대통령과의 한때를 흥겹게 보냈다. 만찬이 끝나고 헤어질 때 박대통령은 이장군에게 은밀히
'한가지 청을 들어달라'며, '선배님께서 90고령에 차가 없어 무척 불편해 하신 다는데 조그만 성의지만 생일선물로 승용차 한 대를 준비했으니 받아주십시오'라며 이장군에게 자동차 한 대를 선사했다.
이장군은 '대통령 각하께서 여러 가지 국사로 바쁘신데 다 늙은 노인을 잊지 않고 이렇게 생일축하를 해줘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해했다.
박대통령은 10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계곡에서 청와대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자연보호운동을 벌였다. 박대통령은 '그 동안 자연보호운동으로 자연 경관이 많이 깨끗해졌으나 자연보호운동을 하는 날만 깨끗해서는 안되며 평소에도 항상 깨끗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대통령은 이날 자연보호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목에 허술하게 세워진 방범초소를 지적, '예산을 지원해서 잘 지어주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등 평소의 그의 세밀함을 나타내었다.
10월 11일 저녁엔 이례적으로 주한 외교사절들을 경주 보문단지로 초청, 만찬을 베풀었다. 이것이 한국 주재 외국 외교관들과의 하직 인사가 됐다. 12일 오후 박대통령은 그의 역사의식이 상징된 경주 통일전을 참배하고, 화랑교육원을 시찰했다. 박대통령은 통일전을 나서면서 누렇게 물결치는 논 사이로 훤히 일직선으로 뚫린 신작로를 내려다보며 경내의 조경 상황을 치하하고 앞으로의 관리 등에 관해 지시했다.
이어 화랑교육원에 들른 박대통령은 정문 앞에 도열한 교직원들을 일일이 악수로 격려하고 대강당에서 마침 연수 수강중인 영남대학교 학생들의 책상 사이로 들어가 교과서를 펼쳐보며 학년과 학과 등을 물어보고 잠시 강의 광경을 지켜봤다.
박대통령은 경내를 걸어가면서 신축중인 분임 토의실을 살펴보고 교직원 사무실과 연수생 숙소 내부를 자세히 돌아봤다. 박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화랑교육원교직원과 통일전 직원들을 위해 3∼4층 규모로 약50세대분의 아파트를 짓도록 하라고 김무연(金武然) 경북지사에게 지시하고 즉석에서 아파트 대지를 지정하고 설계도를 작성해 보내면 건설비를 지원해주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교육원 입구에서 삼국 통일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던 관광객들과 국민학교 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가운데 이곳을 떠난 박대통령은 분황사지에 들러 지난번 시찰 때 지시했던 경내 정화사업의 추진 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김재규·황낙주의 담판
24일 오전 궁정동
부산지구 계엄사령부는 25일 오후 포고문 제2호를 발표, 통금시간을 종전대로 환원한다고 발표했다. 일단 사태는 수습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김재규도 이날부터 신민당 공작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신민당 황낙주 총무는 23일 정보부 김정섭 차장보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이튿날 오전 약속된 장소인 백남빌딩의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모르는 사나이가 불쑥 전화기를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았다. 김재규였다.
'아이구, 황총무님 오랜만입니다. 중대한 문제가 있으니 지금 이리로 와주십시오, 안내는 김차장보가 할겁니다.'
이렇게 해서 황낙주는 생각도 못했던 장소로 가게 됐다. 그는 백남빌딩 사무실에서 집으로 전화를 걸어 '지금 정보부로 가는데 저녁까지 안 돌아오면 김영삼 총재에게 연락하라'고 당부를 해놓았다.
황총무를 태운 뉴 코로나는 낡아서 페인트가 벗겨지고 안에는 흙탕물이 괴어 있어 발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불안 속에서 차가 당도한 곳은 궁정동의 정보부장 사무실이었다. 문 앞에서 낯익은 김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로 황낙주를 안내한 김재규는 30분 동안 딴소리를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야기를 하더니 '지도자는 후퇴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대통령의 위대성에 대해서는 열을 내 말했다. 이윽고 부마사태 이야기가 나왔다.
'신문에선 양아치와 불량배가 데모했다고 하지만 실은 선량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난국을 수습 못하면 광화문 네거리가 피바다가 됩니다. 이걸 수습할 분은 나와 황총무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본론이 시작됐다. 김재규는
'난국 수습을 위해선 김영삼 총재가 당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하며, 황총무도 원내총무직을 사퇴해주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김영삼 총재는 나와는 같은 피가 섞인 일가가 아닌가. 내가 그분이 망할 일을 하겠는가. 당신도 사퇴하면 진해여상의 확장을 도와주겠고 2∼3년 뒤에는 롤백할수 있도록 밀어 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황총무는 김재규가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데 놀랐다. 김재규는 계속해서
'만약 황총무가 불응하면, 아무리 내가 당신과 친하지만 웃분의 지시가 있을 경우, 감옥에 안 보낼 수가 없다. 당신에 대한 모든 비위조사는 다 돼 있다'고 위협했다. 황총무는
'당신과 나의 의견은 하늘과 지하실만큼의 차이다. 차라리 서대문형무소로 가겠다'고 했다. 평행선만 긋는 이야기는 무려 네 시간이나 계속됐다. 김재규는 애원·설득·협박을 번갈아 하면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황낙주에게 그것은 고문이었다.
부마사태가 진정되자 김재규는 중단된 신민당 당직자 사퇴 공작을 재개했었다. 이후락에게 부탁, 자신이 실패했던 최형우 의원의 당기위원장 사퇴 설득을 다시 시도하도록 했다. 이후락은 같은 선거구 출신인 최의원에게 사퇴를 종용했으나 실패했다. 김재규의 의도는 황총무 등 당직자들을 사퇴시키고 정운갑 대행체제를 출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황의원은 오후 4시쯤 '선약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뒤 궁정동 사무실을 나왔다. 김재규는 문밖까지 따라 나오면서
'내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퇴를 발표해달라. 일을 잘 처리하고 함께 진해의 맑은 공기나 마시러가자'고 다짐을 놓았다. 황의원은 그 길로 같은 선거구의 공화당 의원 박종규를 찾아갔다. 박의원은 황의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바로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 신청을 했다. 오후 5시 30분께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이 '지금 바로 들어오시랍니다'란 연락을 해왔다.
박대통령, 박종규에게 교섭 지시
24일 저녁 청와대
박종규가 청와대에 들어가니 대통령은 집무실 옆 식당에서 칵테일을 들고 있었다. 신직수, 김계원, 유혁인 등이 함께 있었다.
'마산은 어땠어? 자네 집은 피해 없었나?'
박종규는 자기가 보고들은 부마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온건한 대책을 건의했다. 7시 반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일어서는데 박대통령은 '자네는 남게'라고 했다. 두 사람만 남자 박종규는
'각하, 오늘 낮에 황낙주 총무가 찾아왔습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재규를 만났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만났더라도 그런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겠지요,'
'알아. 아까 다 보고 받았어.'
박종규는 김영삼 제명과 선별수리론의 부당성을 험구까지 섞어가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공화당의 경직성도 비판했다.
박대통령은 '당에서 김영삼이를 제명해야 한다 길래 나도 처음엔 반대했는데 계속 제명을 주장하더니 이렇게까지 몰고 갔어'라고 했다. 두 시간쯤 이야기를 했는데 대통령은 '그렇다면 자네가 나서서 일단 김영삼과 의견을 나누어보게'라고 했다.
25일 오전 청와대
박종규는 25일 아침 황총무를 초대, 아침을 먹으면서 박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김총재의 태도를 빨리 알려달라고 했다. 김총재를 만나고 나서 황의원은 다시 박의원에게 '김총재도 난국 수습엔 동감이다. 긴급조치 9호의 철폐와 민주화 추진은 선행 돼야 한다. 야당 분열공작도 중단돼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박종규는 25일 오전 10시께 그 내용을 가지고 박대통령을 만나 1시간 가량 이야기했다. 박종규는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께서 김총재의 조건을 거의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다'고 생전에 증언했었다.
'단, 앞으로도 질서 파괴와 폭력을 수반하는 불법 행위는 없어야 한다'고 친필로 메모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을 하직하고 나오는데 입구에 차지철 경호실장의 보좌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실장님이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십니다'는 전갈을 했다.
'시간이 없으니 차나 한 잔 들고 가지'하면서 경호실장실로 들어갔다. 차실장은 박의원을 '실장님'이라고 부르면서 깍듯이 대했다.
'이틀동안 각하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어.' 박의원은 퉁명스럽게 하대하는 말을 했다.
'혹시 김재규 정보부장을 바꾸겠다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까?' 박종규는 김과 차의 불화가 이 정도로 깊은가 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박종규는 차를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밑에 데리고 있을 때 그의 성품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우쭐해하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은 것이 차지철이었다. 그래서 1974년에 후임을 천거할 때도 박종규는 5·16때 맨 처음 한강다리를 건넜던 해병대 출신 오정근(吳定根)을 밀어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인척이 다녀간 뒤 박대통령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차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최근 김영삼은 나에게
'박종규씨가 말한 그런 교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박종규씨가 대통령으로부터 그런 중대한 일을 위임받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