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 한국정치 막후 秘話 - 주한 美軍 정보통 하우스맨 증언
여순 반란사건에서 5·16, 12·12사태까지 한국 군부가 일으킨 격동의 사건 때마다 그 막후에서 활동하였던 미8군 정보통의 회고
<1990년 7월 월간조선>
朴正熙 구명(救命), 이승만(李承晩)에게 호소
올해 72세의 제임스 하우스맨 氏는 그 인물 자체가 한국의 현대사이다. 하우스맨 대위는 1946년에 미군정청의 고문관으로서 한국군의 창설에 깊이 간여하면서 역대 한국군부의 주요 인물들과 깊은 인간적 유대를 갖게 되었다. 창군, 여순 반란사건, 6·25전쟁, 5·16군사 쿠데타, 10·26사건, 12·12사태 등 한국군부가 관계된 현대사의 격동기마다 그 현장이나 막후에서 한·미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李承晩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그는 한때 한국군 고위층의 인사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李대통령, 한국 국방부장관, 미8군 사령관, 한국 육군참모총장 등 4명에 대해 동시에 고문관 역할을 했던 적도 있다.
1958년에 중령으로 전역한 뒤에는 미8군사령관 고문으로 일하다가 지난 81년에 정년 퇴임하여 미국으로 돌아갔었다.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살고 있는 하우스맨 씨는 李承晩, 朴正熙, 全斗煥 세 대통령 모두에 대해 주한 미군의 창구로서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그는 지난 5월말 경희대학교측의 초청으로 6·25관계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한국에 들렀다. 민기식(閔耭植) 전 육군참모총장, 김종갑(金鍾甲) 전 국방차관 등 옛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하우스맨씨는 그의 후임인 미8군 사령관 고문인 스티픈 브레더너씨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기자는 6월9일 그를 찾아가 약4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가졌다.
최근에 나온 백선엽(白善燁) 전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여순 반란사건 이후의 군부 내 남로당 조직 수사 때 귀하가 육군방첩대에 붙들린 朴正熙소령을 살리는 데 간여했다고 돼 있습니다. 수사책임자였던 白善燁 육군정보국장이 朴소령을 살리기로 결심한 뒤 육군참모총장 고문이던 귀하께 양해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李承晩대통령의 개인고문이기도 했습니다. 李대통령께서는 군에서 올라오는 일정 한도 이상의 지출 건에 대해서는 저의 결재가 있어야 지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저를 너무 믿어주었습니다. 무초 주한미국 대사가 李대통령을 찾아가 「하우스맨대위는 미국공무원인데 그런 일을 시키면 곤란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李대통령은 「당신한테는 공무원이지만 나한테는 사적인 고문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합디다. 군부 내 남로당 계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李대통령께서는 저에게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는지를 감시하도록 시켰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제가 먼저 사인을 하도록 했습니다.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朴소령에 대한 구명(救命) 건의는 白善燁, 정일권(丁一權),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각각 따로 李대통령에게 한 것입니다. 朴소령은 진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유능한 장교라고 판단하여 살려주자고 한 것입니다』
하우스맨 씨는 朴소령과는 친면이 있었다고 했다. 朴소령은 용산의 육군본부 관사촌에서 육사7기 출신인 고정훈(高貞勳)씨 집 옆에 살았는데 하우스맨 씨는 高씨를 통역장교로 쓰기도 하여 자연히 朴소령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1948년 10월에 여순 반란사건이 터지자 광주에 반군 토벌사령부가 설치되었다. 하우스맨 씨는 토벌군사령관 송호성(宋虎聲)준장의 고문으로서 미군고문단을 대표하여 한국군의 작전에 간여하고 있었다. 그의 옆방에서 작전참모 보좌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 朴正熙소령이었다고 한다.
강문봉(姜文奉)에 대한 朴대통령의 불만
하우스맨 씨는 朴소령이 남로당에 들어간 심리적 동기는 배타적, 반미적 민족주의였다고 했다. 『그는 미 군정을 36년간의 일제식민통치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간판만 바뀌었을 뿐 외세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다는 관점이었습니다. 제가 1946년 4월에 춘천에서 8연대를 창설할 때 창설요원의 조장으로 일했는데 연대장직을 원용덕(元容德) 씨에게 물려주었습니다. 元장군한테서 나중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8연대로 배치되어 온 소대장들을 모아놓고 元연대장이 앞으로는 장교들도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설명했더니 한 소대장이 발딱 일어나 대어들더랍니다. 「이 군대가 미국 군대입니까, 한국군대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그 장교가 朴正熙였어요』
하우스맨 씨는 미군당국이 朴正熙소령의 생명을 구하는데 일조는 했지만 그 뒤 그를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장면(張勉)정권 때 미군이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朴正熙소장을 전역시키려 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과장된 것이다』라고 했다. 『朴소장이 張勉정권 때 육군 본부작전 참모부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누었던 대화가 생생합니다. 朴소장은 영어를 꽤 잘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농가를 모두 초가집에서 슬레이트 집으로 개조해놓고 싶다고 했습니다.
1970년대 후반기에 스틸웰 미8군사령관이 朴대통령과 골프를 치다가 언덕에서 밑을 내려다 보니 농촌의 초가집들이 정말 모두 슬레이트 집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스틸웰 장군은 저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어 朴대통령에게 「각하의 꿈이 이제 이뤄졌군요」라고 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기분이 좋아져서 「오늘 저녁에 청와대에서 한잔 합시다. 하우스맨 씨를 꼭 데리고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면도를 하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40분 안에 청와대로 오라는 연락이었습니다. 그 저녁 자리에는 朴대통령, 스틸웰, 한국 국방장관, 그리고 제가 참석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그때 담배를 끊고 있었는데 기분이 흡족했던지 저한테 담배 한 개비를 달라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姜文奉장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때 유정회 국회의원이던 姜장군은 모종의 사건으로 구속돼 있었습니다. 朴대통령은 「강문봉이는 만주군관 학교 후배인데 한국군에 먼저 들어와 내 상관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깍듯이 경례를 부치면서 예의를 차렸다」고 말합디다. 그는 이어서 「그런데 내가 지금 대통령이 아닌가. 그런데도 강문봉이는 나에게 존경심을 보이지 않고 있어」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저는 朴대통령에게 선처를 부탁했고 朴대통령은 姜의원을 곧 풀어주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5·16 때 朴소장과 비밀접촉
하우스맨 씨는 1961년의 5·16 군사쿠데타 때 朴소장과 비밀리에 만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5월17일쯤으로 기억되는데 朴소장이 그때는 민간인이던 姜文奉씨를 데리고 하우스맨씨 집으로 찾아왔더 라는 것이다. 朴소장은 미8군 사령관 고문인 하우스맨씨에게 『미국에 가서 우리의 입장을 요로에 잘 설명해달라』고 부탁하더라고 한다. 朴소장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쿠데타사령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하우스맨씨에게 『朴소장의 안전을 책임지라』는 당부였다. 그 메시지를 朴소장에게 전하면서 두 사람은 웃었다고 한다. 그때 朴소장은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기름이 떨어졌는지 불길이 솟지 않았다. 하우스맨씨는 딸에게 라이터를 충전해 오도록 했다. 朴소장이 충전된 라이터를 켜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군사쿠데타가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로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서 그런 폭발음이 나니 그 자리에 웃음이 터지면서 오히려 분위기가 누그러지더라고 한다. 朴소장은 옆에 앉은 姜文奉씨의 무릎을 툭툭 치면서 『앞으로는 강문봉이 같은 사람이 육군참모총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朴소장은 5월18일에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일종의 사과문을 보냈다. 이 문안의 작성과정에서도 하우스맨 씨는 쿠데타주체세력과 협의하였다고 한다. 朴正熙측과 매그루더 측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한 것은 매그루더-金鍾泌담판으로 알려져 있는데, 하우스맨 씨는 『그 전에 이미 점진적인 사태발전이 있었다』고 했다. 군사쿠데타 직후 쿠데타에 반대했던 여러 장성들이 반혁명혐의로 구속됐었다.
하우스맨 씨는 구속된 장성들의 명단을 들고 朴소장을 찾아가 석방을 부탁했다고 한다. 朴소장은 명단을 훑어보더니 『이 사람은 괜찮아』 『이 사람은 안돼』하는 식으로 석방과 불석방자를 직접 가려냈다고 한다. 석방대상자 이름 옆에는 朴소장이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그 명단을 하우스맨씨는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고 했다. ―미군이 석방시킨 장성들은 누구입니까? 『강영훈, 지금 총리, 이한림 당시 1군사령관, 최석 장군 등등이죠. 우리는 그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냈습니다. 朴소장은 한 대학에 두 명 이상 다니지 않도록 하라고 하더군요』
- ―5·16쿠데타 직후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은 쿠데타군에게 원대복귀를 명령하는 등 朴소장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는데 귀하는 오히려 朴소장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움직이신 것 같군요.
『저는 張勉정부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는 것을 보고 질서가 회복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또 국민들이 지지하는 정부를 지지하게 돼 있습니다.』
경찰이 군을 용공으로 모략
하우스맨 씨는 張都暎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 겸 내각수반 겸 국방장관이란 여러 감투를 쓴 것이 한미관계에 장애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미8군과 주한미국대사관측에서는 張총장을 상대로 여러 가지 주문이나 요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張총장은 승낙을 하지만 실세가 아니었으므로 도무지 실천이 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하우스맨 씨는 朴소장을 찾아가 『아무래도 박장군께서 명실상부한 혁명정부의 지도자가 돼야 하겠다』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5·16직후에 있었던 어떤 술자리를 하우스맨 씨는 기억하고 있다. 朴소장과 朴林恒장군, 그리고 하우스맨 씨가 참석한 자리였다. 박임항(朴林恒)장군은 일선군단장으로서 5·16쿠데타에 협조한 함경도출신 장군이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에서 1기 선배로서 朴正熙와 함께 생도시절을 보낸 사람이기도 하였다. 성격이 괄괄하기로 유명한 朴林恒장군은 취중에 朴소장이 해방 직후에 좋아한 여자를 『내가 먼저 건드렸다』는 투로 이야기하더란 것이다. 그 순간 朴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한 달쯤 뒤 朴林恒장군(혁명정부의 건설부장관)은 반혁명사건에 연루돼 거세되었고 朴대통령 시절에 한 번도 공직을 맡지 못했었다.
하우스맨씨는 『5·16이전부터 미군당국은 朴正熙소장을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고 했다. 반공주의자인 李承晩대통령이 朴正熙를 살려주고 그를 계속적으로 승진시켜 준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하우스맨씨는 군부내의 남로당에 들었다는 것이 꼭 공산주의자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였다.
『저는 숙군이 진행될 때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나에게는 똑 같은 한국인으로 보이는데 빨갱이다, 아니다를 무슨 기준으로 판별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로당에 들어간 사람들도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좌우 어느 쪽에든 서야 하는데 「우」가 싫으면 중간이 아니라 「좌」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숙군에 걸려든 장교들을 살리려고 애썼습니다. 어느날 李承晩대통령이 저에게 한 보고서를 건네주었습니다. 경찰에서 올린 정보인데 군부내의 용공주의자들 명단이 씌어 있었습니다. 채병덕(蔡秉德)국군총참모장 이름도 거기에 들어있었습니다. 순전히 모략용 보고서였습니다.
李대통령은 보고서를 저에게 주면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보고서를 갖고 이응준(李應俊)육군참모총장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다 잡아 넣으시지요」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상관인 蔡秉德총참모장 이름까지 끼여 있는 것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미 군정 시대에 경찰과 군은 아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일제 경찰출신들이 많았던 경찰은 자신들이 독립한국의 군대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여순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허위정보를 많이 올려 억울한 피해자들이 생기기도 했지요. 좌경적인 젊은이들이 군에 많이 들어온 이유도 경찰에 대한 반감이 그 하나였어요. 우리는 한국군을 5만에서, 10만 명 수준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 전국에 모병관들을 보냈습니다. 일정한 할당량을 맡겼습니다. 마을마다 돌면서 머리채우기 식으로 청년들을 끌어 모으니 신원조회나 사상검토를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때 군내의 분위기도 사상문제에 대해서는 퍽 관대하였습니다. 미 군정 시대에 송요찬(宋堯讚)씨는 공산주의 활동을 하는 부하를 영창에 집어넣었다고 상부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했습니다. 사상은 자유인데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하느냐는 추궁이었죠』
『왜 미군정당국이 일제경찰을 중용 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하우스맨 씨는 『어느 나라이든 점령군의 1차적 목적은 질서유지와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에 있다. 그런 목적에 쓸 기술자를 찾다가 보니 우선 일제 경찰 출신들이 중용 된 것이다. 그들을 민주경찰로 재교육 할 틈도 없이 여순 반란사건,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고 했다.
사형장에서의 악수
하우스맨 씨는 군내 남로당의 지휘부였던 최남근(崔楠根), 김종석(金鍾碩), 오일균(吳一均)씨 등이 수색에서 사형집행 당할 때 입회했었다고 한다. 『유언이 없느냐고 집행관이 물었습니다. 金鍾碩중령이 두리번거리더니 저를 향해 손짓을 하더군요. 제가 갔더니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영어로 인사를 하더군요. 그런 뒤 그들은 기둥에 묶였고 눈이 가려졌습니다. 이 사형 집행장면을, 나중에 주 프랑스 대사를 지낸 이수영 씨가 16mm 무비카메라로 찍었습니다. 그 필름도 보존돼 있지요』
朴正熙소령을 남로당으로 포섭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崔楠根중령이 어느날 하우스맨 대위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崔중령은 『내가 아내와 두 아들을 북한에 두고 월남했는데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으로 올라가 뒷수습을 하고 내려와야겠는데 좀 도와달라』고 하더란다. 하우스맨 씨는 崔중령이 몰래 북한을 다녀오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때 남북한 사이에는 사람 왕래가 더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을 신문하여 많은 정보를 빼냈습니다. 6·25직전에 월남자들이 뚝 끊겼습니다. 그 무렵 우리는 북한의 탱크를 찍은 한 사진을 입수했는데 흰 페인트로 230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얼마 전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던 당시의 인민군 장교가 말하기를 「인민군에게 공급된 소련 탱크가 2백40대였는데 일련 번호를 페인트로 썼다」는 거예요』
하우스맨 씨의 한국군에 대한 영향력은 李承晩대통령 시절에 가장 세었고, 朴正熙시대에 와서는 감소되었다. 이에 대해 하우스맨 씨는 『나는 한국군이 제 힘으로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생 역할을 해왔다』면서 『학생들이 성장할수록 선생의 힘은 줄어드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李承晩대통령은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미국인이고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 견해를 피력하니까 저를 믿어준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그 자신이 군부를 잘 아니까 저의 도움이 필요없었습니다』 하우스맨 씨는 李, 朴 두 대통령을 『아주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
『李대통령은 아주 스케일이 큰 국제적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이 국가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데 그는 온 신경을 다 썼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내정(內政)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1950년에 트루만 대통령이 한국에 파병하기로 한 결정이야말로 역사에 「세계공산주의 종말의 시작」(Tht beginning of the end of world ccommunism)으로 기록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공산화의 움직임이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던 것입니다』
정당이 약해 군 개입 불러
하우스맨씨는 『李承晩대통령이 장성승진자 명단이나 육군참모총장 등 주요 인사 서류가 국방부로부터 올라오면 자신에게 보여주며 동의여부를 묻곤 했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경제다운 경제정책을 편 사람입니다. 남덕우, 장기영씨 등 진짜 경제전문가들을 끌어 모아 부린 이가 朴正熙였습니다. 산업화는 통신과 수송의 네트워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일찍 간파하여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를 완성시킨 분이 朴正熙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저의 朴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우스맨 씨는 1973년 봄에 尹必鏞 수경사령관이 구속되기 바로 전날 밤 그와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고 했다. 연합사의 정보참모가 미국에 출장 갔다가 귀임한 것을 환경하는 자리였다. 그날 밤 기분 좋게 헤어졌는데 다음날 尹장군이 구속되었더란 것이다.
하우스맨씨는 『尹장군의 구속은 한국군부 내에서 육사8기생 전성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곧 이어서 육사11기 전성시대가 나타나게 되는데 尹장군사건에 의하여 육사11기의 선두주자 손영길(孫永吉)준장이 제거됨으로써 全斗煥장군이 11기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하우스맨씨는 1979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을 때 퍼뜩 3·15 마산의거가 연상돼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고 했다. 그는 10·26사건은 부마사태로 더욱 심화된 車智澈-金載圭 암투의 결과였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金載圭정보부장을 제가 잘 아는데 정신과 의사가 보았다면 환자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가 갑자기 우울해지는 등 성격의 기복이 아주 심했습니다』
10월26일 밤을 하우스맨 씨는 미8군 지하벙커에서 보냈다. 미국으로 출장간 위컴 사령관을 대신한 유병현(柳炳賢) 연합사 부사령관을 통해서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월 27일 오전에 그는 부하를 김포공항으로 보냈다. 스틸웰 전 미8군 사령관이 朴대통령의 초청으로 그날 도착했던 것이다. 10·26사건 뒤 하우스맨 씨를 실장으로 하는 미8군 사령관 고문관실의 정보팀은 권력의 공백을 메울 세력이 누구인가를 탐색하는 데 주력하였다.
『우리는 朴대통령의 죽음을 지배층의 붕괴라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한 지도자의 죽음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朴대통령을 지탱하여 온 여러 파워 그룹들이 朴대통령이 죽었다고 해서 권력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이제는 우리가 나설 때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여러 파워 그룹 중에서 군대와 경제계가 가장 발달해 있고 정당이 가장 낙후돼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당이 권력의 공백을 메워야 민주화가 되는데 그럴 힘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鄭昇和 장군 생일 카드 소동
하우스맨 씨는 한국군부의 요인들과 인간적으로 친한 관계로 해서 한미간에 마찰이 생기면 이를 해소하는 윤활유 역할을 해 왔다. 5·16때도 그랬고 12·12사태 뒤에도 그런 역할을 했다. 1980년 2월 27일은 鄭昇和 전 계엄사령관의 생일이었다. 鄭씨는 남한산성의 군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는데 鄭씨 집으로 위컴 사령관이 축하카드를 보냈다. 鄭씨의 부인 신유경(申有慶)여사는 이 카드를 갖고 교도소로 면회를 가서 鄭씨에게 보여주었다. 全斗煥합수본부장은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냈다. 그 며칠 전 위컴 사령관과 처음으로 만나 그 동안의 불편한 관계를 다소간 해소했다고 생각했던 全본부장의 신경이 날카로와진 것이었다.
『그때 제가 全본부장을 만나서 해명했습니다. 우리 사무실에서는 한국군 장성들의 생일을 미리 파악해두었다가 자동적으로 카드를 보내고 있었는데 鄭장군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위컴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특별히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全斗煥본부장은 위컴 사령관과 처음 면담한 자리에서 『우리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병영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를 믿어주면 언젠가는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고 했었다.
5·16때도 朴正熙소장 그룹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어 한 번 속은 적이 있었던 미8군에서는 全장군의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미군 정보기관은 주요인물의 말이나 사상보다는 상황을 권력역학의 측면에서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12·12사태 이후에는 全斗煥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래도 우리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써 한국에서 자유로운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애를 썼습니다. 우리의 이상은 한국에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정부가 들어서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하우스맨 씨는 군부의 정치개입을 막을 만한 튼튼한 정당이 없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고 했다. 그는 『全斗煥장군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고 병영으로 돌아간 뒤 선거에서 다른 사람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민주화에 따른 욕구분출로 나라는 혼란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랬을 때는 군부가 재차 국가를 수호한다면서 정치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40년 전 6·25전쟁이 터졌을 때도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6월24일 밤에 아내가 갑자기 아파서 저는 육군장교클럽 파티에 가지 못하고 간호를 했습니다. 25일 새벽 5시쯤 육군본부의 비상소집연락을 받고 육본으로 나갔습니다. 그 전에도 38도 선상에서는 잦은 충돌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 전선에 걸쳐서 충돌보고가 들어왔으므로 전면전이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고문이었던 저는 지금도 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육군참모총장 蔡秉德,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 미군 고문단장 라이트 대령과 16명의 고문관들이 같이 앉았습니다. 申장관이 위스키 한 병을 가져오더니 따라주면서 「우리는 생사를 같이 해야 한다. 이곳을 사수하자」고 했습니다. 그 며칠 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했습니다. 거기서 맥아더 사령관의 전문을 받았습니다』
텅 빈 서울거리에서 아이 울음
「나는 육군 지휘소의 장소로는 먼저 있었던 곳을 선호한다. 미 해·공군의 제한적인 사용이 시작되었다. 」는 요지였다. 하우스맨 씨는 용산으로 복귀하기 위해 한강다리를 건너는데 한국공병대가 폭파용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는 『이래선 안 된다』면서 직접 다이나마이트 한 상자를 들고 멀리 치워놓았다고 한다. 하우스맨씨는 蔡秉德장군의 최후에도 관계되었다. 蔡장군은 초전의 실패 책임을 지고 丁一權장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 뒤 부산에서 한직을 맡고 있었다. 그때 인민군의 한 부대는 전라도 지방을 돌파하여 진주 방향으로 우회하면서 부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미군은 진주·하동 방향으로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수원의 육군본부에 있던 하우스맨 씨는 蔡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부대를 이끌고 나가서 적진 정찰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蔡장군은 진주 근방의 언덕 위에 올라 인민군을 정찰하다가 저격을 당했다. 머리 관통상을 입고 절명했다. 부관이 피투성이가 된 蔡장군을 끌어안고 물러났다. 이 부관은 피묻은 군복차림 그대로 수원으로 와서 하우스맨 씨에게 蔡장군의 최후를 전하더라고 했다. 하우스맨 씨는 기자에게 『내일 그 부관과 식사를 같이 하기로 약속이 돼 있다』고 말했다.
하우스맨 씨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내어준 1951년 1월의 후퇴작전 당일 李承晩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반도호텔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丁一權참모총장도 참석했다. 李대통령은 『당신네들이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떠나야 한다. 서울 시민들이 다 철수했는지를 확인한 다음 한강을 건너라』고 지시했다. 李대통령은 또 젊은이들을 적군에 빼앗기면 모병의 자원이 없어지니까 대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때 이미 하우스맨 고문과 丁총장은 국민방위군을 창설, 장정들을 끌어 모아 후방으로 이동시키도록 해 두었었다. 국민방위군의 조직은 인력자원을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보급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수천 명이 이동 중에 굶어 죽고 얼어죽는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지게 된다. 식사를 끝낸 뒤 丁총장과 하우스맨 씨는 지프차를 타고 텅 빈 서울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고 한다. 유령의 도시처럼 돼 버린 서울의 모습은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고 한다. 인적 없는 거리에 버려진 어린이의 울음소리를 하우스맨 씨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회고록 구술중
하우스맨 씨는 육군총사령관을 지낸 宋虎聲장군이 6·25때 월북한 것처럼 알려진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宋장군은 광복군 출신이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친했습니다. 같이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이상할 것도 없지요. 6·25가 터지자 그는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서울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宋장군의 부인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宋장군은 친척과 친구들 집을 전전하면서 피해 다니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폐를 끼치는 것도 못할 짓」이라면서 인민군에 자수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宋장군이 자진해서 월북했다는 설이 생긴 것은 그의 목소리가 북한방송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우스맨 씨는 『나도 그 방송을 유심히 들었다. 똑 같은 연설이 되풀이되었다. 처음에 녹음한 것을 계속해서 트는 것 같았다. 강제로 녹음시킨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하우스맨 씨는 두 딸과 한 아들을 두었는데 지난해 엘리자베스 크리스티나 하우스맨 양이 암으로 죽었다. 하우스맨 씨도 지난해 대동맥 수술을 받았다. 10년 전에는 신장절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미국의 작가 존 톨란드에게 자신의 회고록을 구술시키고 있다고 한다. 『한 70페이지쯤 완성했습니다. 톨란드씨가 가끔 저한테 날아와서는 인터뷰를 해 가지요. 톨란드의 비서가 인터뷰 내용을 타자로 쳐서 보내주면 제가 교정을 봐 되돌려 보내지요. 한 1년은 걸릴 것 같습니다』 하우스맨 회고록은 35년간 한국의 군부를 관찰해 온 한 미국인의 솔직한 증언이 될 것 같다.
주한미군 정보통 하우스맨 증언
-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2003-07-16, 14: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