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쥐고도 부패하지 않는 혼 근대화 혁명가로서 비장한 생애를 살다가 간 박정희(朴正熙)의 국가관, 혁명관, 인간관을 보여주는 박정희 저 『國家와 革命과 나』(1963년 9월 1일 향문사에서 초판 간행)를 34년 만에 다시 출간하는 이유는 이 책이 담고 있는 격정과 비전이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을 소망했고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人情)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했다. 자주 독립된 한국의 창건은 자주적인 통일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미완성의 대업(大業)으로 남아 있다. 그는 부하의 권총에 의해서 생이 끝나고 지식인들에 의해 사후(死後) 격하를 당했으나 서민의 인정(人情)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 한국인의 가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박정희 시대 18년. 박정희 사후(死後)18년을 다 거치면서 우리는 이 거목(巨木)이 드리우고 있는 큰 그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아낌없이 주고 간 이 나무를 좀 떨어진 자리에서 다소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이 책에서 토로했던 포부를 이해하고 또 그의 성취와 비교해가면서 채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혁명아 박정희의 인간을 그 숨결까지 느끼게 해준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반 0시……"로 시작되는 서문과 "가난은 나의 스승이자 은인이다"로 시작되는 마지막 쪽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먼저 분기(噴起)시킴으로써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분기시켰던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다. 18년 만에 세계 최빈국(最貧國)을 선진국의 문턱까지 끌어올려다 놓은 그의 지도력을 지탱한 것은 권력을 잡은 뒤에도 부패하지 않은 그의 혼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땀을 흘려라/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2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가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박노해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의 저항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가원수의 저서에 실리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國家와 革命과 나』의 초고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를 도와주고 있었던 박상길(朴相吉, 전 청와대 대변인, 水協 회장) 씨의 회고이다. "그날도 장충동 공관에서 박 의장과 담론을 나눈 끝 무렵이었습니다. 화제는 아마도 박 의장이 겪었던 가난이었을 겁니다. 그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박 의장이 다른 방에 갔다가 오더니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게 하나 있는데 넣을 데가 있겠습니까'하고 메모지를 건네주는 거예요. 받아보니 친필로 쓰고 고친 흔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조판이 다 돼 있었던 책에 무리를 해서 끼워 넣었습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인지, 그분 자신의 창작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아마도 창작일 겁니다. 지방 출장 때의 체험에 근거한 시작(詩作)이 아닌가 합니다."
박상길 씨는 자신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을 도와서 이 책을 정리하던 때(1963년)의 이야기를 『나와 제3, 4공화국』이란 저서에서 이렇게 공개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 의장의 일상은 보기에도 민망하리만큼 망쇄(忙殺) 하였지만 저술의 핵심을 잡기 위해서는 상당한 담론이 필요치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개의 경우 자정을 전후한 야반에 장충단 의장 공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메모한 예정된 내용이나 때로 그분이 말하는 자유로운 의견들을 중심으로 대충 골간을 잡아 당초 세운 논술 구성 방향에 따라 써 내려갔다. 50장에서 100장 정도의 원고가 되면 의장 공관으로 직행하여 읽어보고 의견을 말하고 하였는데 바로 이 전후가 격동의 절정기였는지라 좀체로 차분하게 담론할 수가 없었다.
가다가는 돌발적인 사태, 정치적인 난제(難題) 등이 주제로 등장하여 혹은 진지, 혹은 흥분, 혹은 격정적이 되는 등 의외의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일들은 한 민족국가의 운명을 거머쥔 한 영도자의 스스럼없는 나상(裸像)을 보는 데서 역사의 엄숙, 민족의 비애, 국가의 어려움을 가슴에 느낄 수 있었고 이 절대한 파도와 맞선 한 운명적 인간의 순정, 정열, 비장, 결심 등을 그대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영원히 확신하고 있다. 이 이후 이분의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지만 이분의 철학.사상.정치.경제.문화.외교.사회관은 물론 하나의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이만큼 정확한 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실용성과 주체성이 혁명의 논리
모든 성공한 혁명에는 논리와 철학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박정희 식 근대화 모델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 근대화 혁명을 가능하게 만든 논리로서의 철학을 말하는 사람은 적다. 이 책의 재출간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사상에 대한 재조명일 것이다. 박정희 사상이 지금까지 별로 정리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논리를 어렵고 고상하고 정교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투박하게 툭툭 여기저기 던져놓기만 했던 몇 줄의 글들을 다시 모아서 지나간 세월의 캔버스에 배열해놓으면 비로소 이 혁명아가 그리고 있었던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설계도, 그 밑그림이 나타나는 것이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의 위대한 1급 지식인이자 사상가였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겨 민족이 처한 상황을 타파해간 혁명가였다. 삼국통일로써 우리 민족사에서 공간적인 현상 타파를 가져온 김유신(金庾信), 그리고 한글 창제로써 정신적인 현상 타파를 꾀했던 세종대왕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될 당대의 진보적 사상가였다. 그는 청빈(淸貧)을 위선자와 패배자의 변명이라고 경멸하고 우리 민족의 숙명처럼 따라다니던 가난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사의 물질적인 제약을 타파해간 사람이다.
혁명가 박정희의 진정한 혁명성은 그가 생전에 자신의 혁명논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던 점에 있다. 혁명이 이념화되면 우상숭배로 전락하고 혁명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주의나 학설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어떤 주의나 학설도 거부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실용성과 주체성이 그의 진정한 혁명논리였다. 그는 섣부른 이념이 없을 때 영구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수구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정치인(舊政治人)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맹신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혁명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수구적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4.19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다수의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자유당을 독재, 민주당을 민주세력으로 보고 있었던 데 대하여 박정희는 그런 형식논리를 거부하고 그들의 본질인 봉건성을 잡아채어 둘 다 역사 발전의 반동세력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 어디에도 합헌(合憲)정권을 무너뜨린 데 대한 죄의식과 변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당시에 박정희가 이런 혁명적 시각을 자신의 신념으로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원(不遠)한 장래에 망국의 비운을 맛보아야 할 긴박한 사태를 보고도 인내와 방관을 미덕으로 허울 좋은 국토방위란 임무만을 고수하여야 한단 말인가. 정의로운 애국군대는 인내나 방관이란 허명(虛名)을 내세워 부패한 정권과 공모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말하자면 5.16혁명은 이 공모를 거부하고, 박차고 내적(內敵)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작전상 이동에 불과하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강제적 이식(移植)과 맹목적 추종을 비판했으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자주정신이 강한 그로서는 외래 정치사상을 부정하고 싶고 그리하여 민주주의란 이름이 붙지 않는 한국식 정치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지만 자신과 한국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 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각양(各樣)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바로 이것이 본인이 추구하는 이상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이 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 근대화 혁명이 성공한 요인은 유교의 실용성과 집단주의적 희생정신을 동원하여 이를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경쟁체제의 작동에 의한 영원한 자전력(自轉力)을 얻어냈다는 점에 있다. 동양과 서양문화의 장점을 뽑아내어 종합한 셈인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주체적 관점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게적 발전 전략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 전략은 자조-자립-자주의 정신적 근대화 과정(이를 그는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인간 개조라고 했다)을 그 추진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보겠다는 자조(自助)정신이 생겨야 자립경제가 건설될 수가 있고 자립경제를 기반으로 할 때만이 자주국방을 할 수가 있다. '자주국방능력이 없는 국가는 진정한 독립국가가 아니다'는 생각을 확집(確執)처럼 갖고 있었던 점에서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에서 김유신과 가장 닮은 자주적 국가관의 소유자이다. 박정희는 국토통일도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건설한 다음에야 우리 주도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통일관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1976년 1월 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밝힌 내용이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녹음 테이프에서 가감 없이 풀어본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 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 빤해졌다 해서, 소강 상태라 해서 안심을 한다든지 만심을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박정희가 말한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어떤 객관적 여건'이 지금 조성되어 있다. 문제는 이 호기를 잡아챌 만한 주체성과 의지력과 지도력을 가진 대통령이 없다는 점이다. 주변 4대국 가운데 어느 나라도 남한 주도에 의한 통일을 지원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통일한국이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중국 편으로 기울까 걱정하고 있다. 차라리 기울어 가는 북한을 연착륙이란 이름 아래서 지원하여 분단의 항구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 정부의 목표가 북한체제의 흡수통일인지 평화 공존의 항구화인지 알 수가 없다. 북한 당국은 민족의 원수, 반(反)국가단체, 그리고 우리의 적이며 북한동포는 김정일(金正日) 집단에 의하여 인질로 잡혀 있는 구조의 대상이다. 이런 구분 없이 북한 당국과 북한 주민을 다같이 북한이라고 표기하니 화해의 대상에 민족의 원수가 포함되어 있다.
일류국가에의 염원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이 당시 지식인의 패션이었던 민주주의에의 맹목적 추종을 거부한 주체성에서 비롯되었듯이 한반도 통일도 요사이 주변 강국과 국내 지식인들의 패션이 되고 있는 위선적 평화통일론을 우리가 거부하고 피아 구분, 목표, 전략이 분명한 승공통일, 즉 북한을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의 체제로 흡수하는 통일로 나갈 때만 선진 통일조국을 건설하는 마지막 관문 통과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가 이 책에서 약속했고 그가 실천했던 '민족중흥―조국 근대화'의 대업은 통일이란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서 그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34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읽을 때 우리에게 던지는 박정희의 물음은 '당신들은 어떤 통일을 하려고 하는가'이다.
삼국통일과정에서 신라도 지금 한국과 비슷한 기로에 섰던 적이 있다. 당(唐)은 신라와 손잡고서 백제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내친김에 신라까지 쳐서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다. 이때 대책회의가 열렸다. 김춘추(金春秋), 즉 태종무열왕은 '아무리 그렇지만 우리를 도와서 백제를 멸해준 당(唐)을 상대로 어찌 싸울 수가 있겠는가'하고 약한 태도를 보인다. 이때 병권(兵權)을 쥐고 있던 김유신이 나서서 이런 취지의 말을 한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개는 주인을 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 당하고만 있겠습니까."
김춘추와 김유신의 생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김춘추는 당을 우호적 강대국으로 생각하고 평화적 현상유지를 주장하고 있다. 요사이 미국을 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진 시각은 이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당이 비록 우방이라고해도 조국의 자존심과 생존권을 위협한다면 사생결단의 자세로써 대결하여 자주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박정희가 가졌던 미국에 대한 태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 대한 감사를 항상 간직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 정책적 표현이 중화학공업과 자주국방 건설이었다.
삼국통일과정에서는 결국 김유신의 대당(對唐) 결전의지가 채택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삼국통일이라 하면 김춘추보다는 김유신을 먼저 연상하는 것도 김유신의 대당(對唐) 결전 전략에 의해서 한민족의 삶터가 확보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북한통일과정에서는 과연 박정희식 대미(對美) 자주노선이 계승될 것인가. 아니면 김춘추식 평화론이 선택될 것인가. 김유신과 박정희 노선에는 희생이 따른다. 전쟁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희생정신, 그런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있어야 한다. 그런 희생과 고통과 결단과 단련을 통해서 일류국민이 되고 일류국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유신―박정희 노선은 바로 일류국가가 되는 전략인 것이다. 『삼국사기』의 열전(列傳) 김유신과 박정희의 이 저서를 같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두 사람이 꿈꾸었던 통일조국은 이륙국가로 자족하는 수준의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해방 뒤에 이승만(李承晩)이란 위대한 자주적 지도자의 영도 아래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했다. 박정희는 이승만이 잡아놓은 터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건실한 보금자리를 건설했다. 이제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간 형제를 다시 찾아와서 온전한 가정을 마련하는 단계에 올라섰다. 그래야만 이웃에서 우러러보는 가정, 즉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국가가 될 것이다. 이승만―박정희를 이어서 누가 우리 나라를 이끌고 일류국가로 가는 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것인가. 그가 어떤 지도자여야 할 것인가. 이런 화두(話頭)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한국인에게 이 책은 많은 감흥과 감명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또 선진 통일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웅지를 품은 정치인들에겐 있어서도 필독서가 될 만하다.
봉건적 잔재와 싸우다가 전사
정치인이 자신의 포부를 미리 밝히고 이를 충실히 실천해간 예로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있다. 히틀러는 아리안족의 우월성과 순수성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줄기차게 추구하다가 세계를 2차세계대전의 참화로 몰고 갔다. 박정희도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國家와 革命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 전술, 정책적인 수정은 있었지만 본질적이고 전략적인 수정은 없었다는 사실을 34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언어감각의 천재이고 화가는 색감(色感)의 천재이듯 영웅은 행동의 천재이다. 복잡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의 본질을 간단하게 파악한 다음 단순화된 목표와 전략에 일생을 투척하는 도박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영웅이다. 영웅의 생애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행동의 집중적 투자를 위해서는 생략하고 무시해야 할 인정, 사정, 과정, 때로는 인명의 희생 때문이다. 이런 영웅의 생애가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범인(凡人)은 살았을 때의 그를 알아주지 못하고 그가 죽고 나서는 그가 성취한 것들만 공짜로 즐기려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죽음은 그가 혁명의 대상으로 삼았던 봉건적 잔재, 즉 사대주의, 위선적 명분론, 당파성과 그가 도전의 대상으로 삼았던 미국식 민주주의가 연대하여 그를 삼킨 결과라는 해석이 있다. 국내 민주화세력에 내재(內在)된 사대성과 명분성을 중시하는 시각이다. 1979년 10월 그는 미국의 인권 압력과 국내 민주화세력의 도전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가 『뉴욕 타임즈』와 한 기자회견이 미국의 내정간섭을 요청한 것이라 하여 화를 낸 박정희는 김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게 되었고 이는 부마(釜馬)사태의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불안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권부(權府) 깊숙한 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드디어 김재규(金載圭)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된다. 이 김재규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여러 요인 가운데는 차지철(車智澈)에 대한 증오심과 차 실장을 편드는 박정희에 대한 원한 이외에 민주화세력으로부터의 영향과 미국의 어떤 작용을 상정할 수 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밤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중얼거리면서 궁정동 식당으로 들어가 총을 쏘았고 법정에서는 박정희가 사력(死力)을 다해서 추진한 자주국방정책을, 한미(韓美) 안보협력체제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김영삼을 조선조의 양반정치 전통을 이어받은 사대적 정치인으로 보았고 김영삼은 박정희를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독재자로 보았다. 미국과 국내의 지식인, 학생세력은 김영삼 편을 들었다.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다.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
요즈음 들어서 박정희에 대한 인기가 갑자기 높아진 것같이 말하지만 서민 대중 속에서 그의 인기는 변함이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 정치인(그것도 민주계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평가가 높아진 것이 새로울 뿐이다.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를 앞당긴 것은 '민주화의 기수' 김영삼의 실정(失政)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상징하는 민주화세력의 나상(裸像)을 알게 됨으로써 박정희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의 죽음을 예약한, 봉건적 잔재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당돌한 도전의 가치를 범인(凡人)들도 이제는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國家와 革命과 나』의 재출간은 시공(時空)을 뛰어넘어서 고독했던 이 혁명가의 육성과 숨결을 직접 느끼며 역사와 대화하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1997년 9월 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