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

알카에다가, 미국 9.11 테러와 동시에 여객기를 납치, 주한미군 기지와 나이트 클럽을 공격하려는 계획은 왜 최종순간에서 포기되었는가?
*月刊朝鮮 5월호


특종/알 카에다의 한국판 9.11 테러 계획
-두 차례 세웠다가 발각, 포기. 이런 행운이 계속될 것인가?

*보징카 작전: 김포공항 출발 넉 대의 미국 여객기 등 12대에 폭탄장치 태평양 상공에서 폭파! 성공했다면 4000명 사망.
*한국판 9.11 테러 계획: 미국의 9.11 테러와 동시에 아시아에서 미국 여객기 납치, 駐韓(주한)미군 기지와 주일 미국 대사관에 突進(돌진)!
*보징카 계획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 제1차 테러범 유세프가 주도, 駐韓(주한)미군기지 공격은 9.11 테러 배후 지휘자 모하메드가 구상하고 빈 라덴이 결심.
*보징카 작전은 아지트에서 불이 나 음모가 발각, 한국판 9.11 계획은 납치의 타이밍을 맞출 수 없어, 뉴욕 작전에 전념하기로 하고 포기.


趙甲濟(월간조선 편집위원 겸 조갑제닷컴 대표)



김포 공항 출발 넉 대 등 12대의 미국 여객기 폭파 계획


1995년 1월21일과 22일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네 편의 美국적 여객기를 포함한 12대의 東아시아 출발 미국행 비행기를 태평양 상공에서 동시에 폭파시키려는 알 카에다의 테러계획이 실행 직전에 발각되어 저지된 사건을 아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 作戰(작전) 개시일을 보름 앞둔 1995년 1월6일 마닐라의 공작원 아파트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음모가 드러나고 주모자들은 달아났다. 이 계획은 보징카 작전(Operation Bojinka)으로 불린다. 보징카는 아랍 俗語(속어)로 ‘폭발’이란 뜻이다. 보징카 공작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앞으로 KSM이라고 略稱(약칭)한다]였다. 그는 이 실패한 계획의 불씨를 살려 2001년의 9.11 테러를 發想(발상)한다. KSM은 보징카 공작을 위하여 1994년에 마닐라에서 김포공항으로 일종의 탐색여행을 했던 이다. 그는 김포공항에서 입국하지 않고 10시간 대기하다가 마닐라로 돌아갔다. 아파트에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김포공항을 출발한 미국항공사 여객기 넉 대 등 12대가 공중폭파되어 4000명 이상이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9.11 테러뿐 아니라 알 카에다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테러 작전에서 빈 라덴의 작전참모 역할을 한 KSM은 2000년엔 9.11 테러계획을 총괄적으로 지휘하면서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테러계획도 꾸몄다는 사실이 최근 미국 당국의 訊問(신문)에 의하여 밝혀졌다. 그는 빈 라덴의 지시에 따라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여객기 납치 계획을 추진하였다. 동아시아에서 미국 여객기를 납치, 9.11 테러와 같은 시간에 한국의 미군기지와 일본의 미국대사관 건물을 공격한다는 계획이었다. KSM은 2003년 파키스탄에서 검거되어 쿠바에 있는 美軍(미군)기지 관타나모에 수용된 상태에서 訊問(신문)과 재판을 받고 있다.
기자는 최근 구글(Google.com)을 검색하다가 미국 국방부가 2007년 3월10일에 쿠바내 미군기지 관타나모에서 있었던 '敵性(적성) 전투원’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KSM)에 대한 訊問(신문)기록을 인터넷에 공개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김포공항發(발) 여객기와 주한미군 기지 및 나이트클럽에 대한 공격계획에 대한 모하메드의 自述(자술) 내용이 실려 있었다. 이 사실이 국내에 보도되지 않은 것은 당시 盧武鉉(노무현)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국내언론은 이 재판자료가 공개된 것을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자는 이 재판문서를 실마리로 하여 한 달간 취재를 하였고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 폭파범이 主謀(주모)


마닐라를 중심으로 전개된 보징카 공작에 동원된 人力(인력)과 조직과 發想(발상)이 9.11 테러로 進化(진화)된 것은 두 주모자 때문이다. 보징카 공작의 제1 주모자는 람지 유세프였다. 그는 KSM의 조카였는데 세 살 아래였다. 유세프와 KSM은 쿠웨이트에서 자랐으나 뿌리는 이란-파키스탄 국경에 사는 부족이었다.
유세프는 1993년 2월26일에 있었던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제1차 폭파사건의 주모자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 여섯. 알 카에다의 훈련소에서 폭탄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북쪽 타워의 지하 주차장에 세운 트럭에서 폭탄이 터졌다. 7층 높이의 구멍이 생기고 6명이 사망, 약 천명이 부상하였다. 문제의 폭탄은 유세프가 만든 것이었다. 그는 파키스탄 국적으로 위장하여 그 전해 미국에 들어왔었다. 유세프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북쪽 타워를 넘어뜨려 남쪽 타워를 밀어붙이면 두 타워가 같이 무너지도록 폭파를 설계하였으나 北타워는 기울지 않았다.
유세프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빌딩의 폭파 직후 파키스탄으로 달아났다가 국제적으로 수배를 당하고 있는 가운데 삼촌과 함께 위조여권으로 마닐라에 잠입하였다. 마닐라에서 공작세포를 만든 그는 KSM과 함께 아파트를 빌려 엄청난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 공작에 돈을 댄 것은 알 카에다였다. 당시 빈 라덴은 수단에 있었다.
유세프는 아파트에서 폭탄을 만들어 실험을 하기 시작하였다. 1994년 12월1일 유세프는 자신이 만든 私製(사제) 時限(시한)폭탄을 마닐라의 그린벨트 극장 좌석 밑에 두어 터지게 하였다. 수 명이 부상당하였다.
12월11일엔 여객기를 상대로 실험을 하기로 하였다. 그는 마닐라에서 휴양지 체부로 가는 필리핀 항공 점보 여객기에 탔다. 숨겨 들여온 부품을 갖고 화장실에 들어가 폭탄을 조립한 다음 26K 좌석 밑에 두고 체부에서 내렸다. 폭탄이 네 시간 뒤에 터지도록 해놓았다. 이 여객기가 마닐라에서 일본의 나리타 공항으로 날아가던 중 오키나와 부근 상공을 지날 때 폭탄이 터졌다. 승객 한 명이 사망하였으나 여객기는 오키나와에 비상 착륙하였다. 이때 사용한 폭탄은 유세프가 완성하기로 한 폭탄의 10분의 1 정도 폭발력을 가진 것이었다.
유세프가 26K 자리 밑에 있는 구명대 속에 폭탄을 숨겨놓은 것은, 그 자리가 중앙연료탱크의 바로 위쪽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보통 점보기에선 그게 맞았으나 이 여객기에선 26K 자리가 정상위치보다 두 줄 앞이었다. 그래서 폭탄이 터졌지만 연료탱크는 손상되지 않았다. 26K 자리에 타고 있던 일본인 승객의 몸은 두 동강 났다. 그렇게 충격을 흡수해주었으므로 機體(기체)는 견딜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292명의 탑승자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유세프와 KSM 콤비는 이때 필리핀에서 20여명의 요원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유세프는 알 카에다 요원으로부터 다른 지령도 받았다. 1994년 11월12일에 마닐라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암살계획이었다. 스팅어 미사일로 클린턴 전용기를 공격하는 등의 여러 수단을 강구하다가 포기하였다. 1995년 1월15일 마닐라를 방문하기로 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암살하는 계획도 추진하였다. 이는 12대의 여객기 동시 폭파사건을 준비하기 편하게 경찰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신부로 위장한 암살자가 폭탄을 품고 교황에게 접근, 自爆(자폭)하기로 했다.


김포공항 정찰 여행

유세프가 꾸민 12대 同時(동시)폭파의 시나리오는 이러하였다.

1.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마닐라 등지에서 출발하여 미국으로 가는 미국 항공사 여객기를 표적으로 삼는다. 항로는 반드시 중간 기착지가 있는 것을 선택한다.
2. 다섯 명의 공작원을 투입한다. 이들은 목표 여객기에 탑승, 時限(시한)폭탄을 좌석 밑에 두고 중간 기착지에서 내린 뒤 또 다른 여객기에 옮겨 타서 또 폭탄을 장치하고 내린다. 시한장치는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작동시켜둔다.
3. 공작원들은 폭탄 장치 임무가 끝나면 즉시 파키스탄의 라호르 공항으로 돌아간다.
4. 12대의 여객기가 태평양이나 남지나해 상공을 지날 때 폭탄이 터지도록 한다.

미국 수사 기관은 보징카 공작이 성공하였더라면 약4000명이 사망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1993년과 1994년에 걸쳐 유세프와 KSM의 삼촌-조카 콤비는 탐색 비행을 몇 차례 하였다. KSM(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은 마닐라에서 팬암 점보기를 타고 김포공항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1층의 1등석에 앉아 관찰하였다. 조종석은 2층에 있었으므로 조종사들의 동향에 대하여는 충분한 관찰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KSM은 2004년 미국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당시 김포공항에서 입국수속은 밟지 않고 10시간 머물다가 공항내에서 마닐라로 돌아왔다고 진술하였다.
유세프는 사제폭탄 제조의 天才(천재)였다. 그가 1994년 12월에 필리핀 항공 점보기를 상대로 실험을 할 때는 부품을 갖고 들어가 화장실에서 폭탄으로 조립하여 의자 밑에 두고 내렸는데, 폭탄에 쓰이는 니트로글리셀린 액체는 콘택 렌즈 용액 병에 넣었다. 폭파용 배터리는 어린이용 장난감에서 분리한 것으로서, 구두 밑창에 숨겨서 탑승하였다. 電線(전선)은 시계줄 속에 숨겼고 시계는 時限(시한)장치로 전용되었다.

아파트에서 불이 나 음모 발각

1995년 1월6일 금요일, 비행기 폭파 보징카 작전 개시일을 보름 남기고 막바지 준비에 바쁘던 유세프의 마닐라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요원 무라드가 화학약품에 물을 부은 것이 화재로 발전했다. 냄새가 나자 아파트 거주자가 소방서에 신고를 하였다. 불은 소방차가 오기 전에 꺼졌다. 유세프와 무라드는 소방 요원들이 현장에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려 했다. 경찰은 이를 수상하게 생각하여 아파트에 대한 압수 수색에 들어갔다. 아파트는 폭탄제조 공장이었다. 화공약품, 각종 부품, 폭탄제조법을 적은 문서, 그리고 보징카 계획을 담은 네 개의 디스켓과 일본 토시바製(제) PC가 발견되었다. 주범 유세프와 KSM은 따로 따로 마닐라 공항을 출국, 파키스탄으로 빠져나갔다. 무라드 등 세 명의 요원이 체포되었다.
유세프는 1995년 2월7일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호텔에서 파키스탄 군 정보기관과 미 국무성 보안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미국으로 넘겨졌다. 200만 달러의 현상금을 탐 낸 유세프의 동지가 그를 밀고한 것이다. 유세프는 미국 법정에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 폭파를 지휘한 죄로 징역 240년, 보징카 공작과 관련하여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필리핀 수사 당국은 무라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음모가 구상되고 있었음을 발견, 이를 미국정부에 통보하였다. 이 구상은 KSM이 한 것인데, 납치범이 열두 번째 여객기를 납치하여 이를 조종, 미국의 CIA 빌딩으로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KSM은 납치한 여객기를 자살폭탄으로 이용하는 發想(발상)을 보징카 공작을 통하여 얻게 되었다. 그로선 보징카 공작의 실패가 더 큰 테러를 위한 단련이었다.
유세프의 컴퓨터 등에서 압수한 12대의 여객기 폭파 계획서엔 김포 공항이 중심지로 되어 있다. 12대 가운데 4대의 여객기가 김포 공항을 경유한다.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은 서울에서 이 넉 대의 여객기에 탑승하게 되어 있었다. 마닐라 아파트에서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다음 네 편의 김포공항發(발) 여객기에 탄 승객들은 生死(생사)의 기로에 섰을 것이다.

1. 노스웨스트 항공 30편: 마닐라-서울-로스앤젤레스
2. 델타 항공 59편: 미국의 포틀랜드-서울-타이페이-방콕. 테러리스트는 서울 김포공항에서 탑승, 폭탄을 機內(기내)에 두고 타이페이에서 내린다. 폭탄은 타이페이에서 방콕으로 비행하는 도중에 터진다.
3. 유나이티드 항공 808편: 샌프란시스코-서울-마닐라-서울-샌프란시스코. 테러리스트는 김포공항에서 탄 뒤 마닐라에서 내린다. 폭탄은 비행기가 마닐라를 출발한 뒤 터지도록 시간을 맞추어놓는다.
4. 유나이티드 항공: 로스앤젤레스-서울-타이페이-서울-로스앤젤레스. 테러리스트는 김포공항에서 탑승, 폭탄을 두고 타이페이에서 내린다. 폭탄은 여객기가 서울로 가는 도중에 터진다.

유세프의 컴퓨터에서 이들 비행 스케쥴은 ‘보징카’라는 이름의 파일안에 저장되어 있었다. 마닐라 아파트에서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태평양과 남지나해 상공에서 爆死(폭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빈 라덴과 알 카에다 조직의 對韓(대한) 공작은 보징카 공작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 줄여서 KSM으로 알려진 稀代(희대)의 테러리스트를 추적, 알 카에다와 한국의 惡緣(악연)을 규명한다.

9.11 테러의 총괄 지휘자 KSM

쿠웨이트에서 성장한 KSM은 나이 열여섯 때 무슬림형제단(Muslim Brotherhood)에 들어가 지하드(聖戰) 정신에 매료되었다. 1983년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노스 캘로라이나의 농업 기술 주립대학을 졸업하였다. 1987년 그는 파키스탄을 통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 對蘇(대소)항전에 참여했고, 1992년엔 보스니아에 가서 그곳 이슬람 신도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 뒤 카타르 정부에 기술자로 취직하여 1996년까지 籍(적)을 두었다.
KSM이 처음 국제테러와 연관된 것은 조카 유세프가 미국에 건너가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 1차 테러를 준비하던 1992년이었다. KSM과 유세프는 준비상황에 대하여 국제전화로 자주 상의하였다. KSM은 돈도 보내주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 제1차 테러 사건으로 조카의 名聲(명성)이 올라가는 것을 본 KSM은 1994년엔 유세프와 함께 필리핀으로 가서 보징카 작전을 추진하였다. KSM은 보징카 계획이 발각된 직후 필리핀을 탈출한 이후엔 세계 도처(말레이시아, 브라질, 수단, 예멘)에 퍼져 있는 이슬람 지하드 공동체를 찾아다녔다.
그는 빈 라덴을 1989년에 처음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났지만 특별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1996년 중반 KSM은 아프가니스탄으로 근거지를 옮긴 빈 라덴을 찾아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보징카 공작에 대하여 설명하고, 9.11 계획의 핵심이 되는 구상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조종사를 양성하고 이들이 여객기를 납치, 미국의 정부 건물을 공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KSM은 이런 큰 계획은 자금과 조직 및 인력의 동원능력이 센 알 카에다가 주도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빈 라덴은 KSM의 提案(제안)을 듣기만 했다. 그는 KSM에게 알 카에다에 가입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족을 옮길 것을 권했지만 KSM은 거절하였다.
KSM은 1998년 8월7일 알 카에다가 탄자니아와 케냐의 駐美(주미)대사관을 동시 공격하여 200명 이상을 죽이는 것을 보고 빈 라덴이 진정으로 미국을 상대로 맞설 사람이란 평가를 하게 되었다. 1998년 말이나 이듬해 초에 빈 라덴은 KSM에게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대한 9.11 테러 계획을 진행할 것을 허가하였다. KSM(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은 근거지를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로 옮기고 9.11 테러 준비작전을 총괄하는 한편 알 카에다의 선전부서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30대 중반.

駐韓(주한)미군 기지로 여객기 돌진!

1999년 봄부터 빈 라덴, KSM, 빈 라덴의 군사부장인 모하메드 아테프는 수시로 만나 9.11 작전계획을 논의하였다. 빈 라덴은 미국에 들여보내 조종사 교육을 받게 할 팀의 책임자로 모하메드 아타를 선택하였다. KSM은 공격목표를 연구하고, 테러리스트들의 미국 입국 수속을 책임 졌다. 이 3 巨頭(거두) 회담에서 KSM은 미국에서 여객기를 납치하는 것과 동시에 동아시아에서도 미국 여객기를 납치, 양쪽이 동시에 미국과 미군 시설을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런 사실은 KSM이 2003년에 파키스탄 軍(군) 정보부(ISI)에 체포되어 미국정부에 넘겨진 뒤의 신문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이 동아시아판 9.11 계획은 보징카 계획에서도 그러하였던 것처럼 한국을 중심으로 구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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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M은 납치한 미국 여객기를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펜타곤 건물 등으로 돌진시키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한국과 일본에서도 미국 여객기를 납치, 駐韓(주한)미군기지와 駐日(주일)미국대사관, 또는 駐日(주일)미군기지에 충돌시키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문제는 타이밍을 맞추는 일이었다. KSM은, 국제 항공편 수의 제한으로 東(동)아시아에선 한, 두 편의 여객기밖에 납치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KSM 등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은 인터넷, 이메일, 휴대전화기 등 최신정보통신 기능을 활용하는 데 능하다. 정보화 사회를 악용하는 이들의 행태를 ‘뉴 테러리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알 카에다 조직원들은 컴퓨터를 愛用(애용)하므로 미국 수사당국은 이들을 검거할 때 컴퓨터를 압수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테러계획의 상세부분이 컴퓨터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KSM은 알 카에다의 홍보분야를 책임진 적도 있어 특히 인터넷을 통한 정보 수집에 밝았다. KSM은 ‘한국판 9.11 계획’을 세우면서 한국에 온 적이 없다. 주한미군 기지, 미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나이트클럽, 미국 대사관의 위치와 건물들에 관하여선 인터넷을 통하여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2000년 무렵엔 상업위성이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되고 있었다.
9.11 테러 때 납치범들은 무기나 폭탄을 갖고 타지 않았다. 한국판 9.11 계획에서도 그러하였을 것이므로 빈 라덴과 KSM은 비행기 납치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문제는 미국인들이 많이 타는 여객기를 미국에서의 납치와 동시에 납치, 미군이나 미국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공격하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9.11 테러에 대한 미국 정부측의 白書(백서)를 읽어보면 빈 라덴은 총괄적인 지휘와 결심만 하였고 구체적인 계획 수립, 인원 선발, 훈련, 자금 지원, 표적 선정 등은 KSM을 중심으로 한 실무자들이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서울에 가서 알 카에다 조직원을 만나라!”

KSM이 한국과 미국 동시 테러계획을 추진하고 있을 무렵 그는 이 사건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알 카에다의 해외 작전을 총괄하고 있었다. 이때 그가 표적으로 삼고 있던 또 하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를 출발하는 여객기를 납치, 이스라엘 남부의 휴양도시 에이라트에 있는 건물에 충돌시키는 계획을 세우고 현지 정찰과 자금지원을 하였다. 이 계획은 빈 라덴의 반대로 실천되지는 않았다. 빈 라덴은 이슬람 국가의 여객기를 희생시키는 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KSM이 테러 작전 대상으로 삼은 국가 목록을 보면, 미국, 영국, 이스라엘, 한국, 일본, 태국, 쿠웨이트 등 親美(친미)국가들이다.
알 카에다가 한국판 9.11 테러계획을 설계하는 단계에선 소수의 수뇌부 인사들만 참여하였다. 준비단계에선 중간간부들이 참여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이 ‘왈리드 모하메드 살리 빈 로샤에드 빈 아타시’(앞으로 아타시로 적는다)라는 긴 이름을 가진 빈 라덴의 경호원 출신 요원이었다. 그의 가족은 빈 라덴과 친밀하였다.
아타시는 199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북부동맹군과 전투중 오른 발을 잃었다. 그의 별명 겸 암호명은 ‘다리의 아버지’였다. 아타시는 2003년 4월29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체포되어 미국에 넘겨져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지휘하거나 관계한 테러에 대하여 자백하였다. 2007년 2월8일자로 미 국방부가 공개한 ‘敵性(적성) 전투원’ 아타시의 혐의내용에 따르면 1998년 8월7일에 있었던 케냐 나이로비와 탄자니아 달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도 그가 지휘한 사건이었다. 케냐와 탄자니아 테러는 거의 동시에 발생하였다. 알 카에다는 충격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늘 테러의 ‘同時性(동시성)’을 중시한다. 이 同時(동시)테러로 미국인 12명을 포함, 213명이 죽고 4,500명이 다쳤다.
아타시는 2000년 10월12일에 있었던 예멘의 아덴港(항) 정박 미국 함정 콜号(호)에 대한 공격도 그의 작품이라고 자백하였다. 이 사건으로 17명의 미군이 죽고 39명이 다쳤다.
빈 라덴은 자신의 측근인 아타시를 한국판 9.11 계획에 참여시켜 KSM의 지시를 받도록 하였다. 빈 라덴과 KSM은 알 카에다 요원들이 납치하여 한국과 일본의 미군기지와 대사관에 충돌시킬 비행기를 동남아시아에서 출발하는 미국 항공사 점보기로 설정하였다. 그들은 아타시로 하여금 東南亞(동남아) 공항의 보안상태를 점검하도록 하였다. 아타시는 1994년에 마닐라-김포간 정찰여행을 한 적이 있는 KSM에게서도 자문을 받았다.
아타시는 빈 라덴으로부터 서울 지도와 사진도 건네받았다. 빈 라덴은 아들처럼 여기는 아타시에게 “미국 여객기를 타고 서울로 한번 들어가 보라. 서울에 도착하면 도움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말한 적도 있었으나 곧 그 지시를 취소하였다고 한다. 빈 라덴은 아타시가 콜호 공격 임무에 주력하도록 배려 한 것 같다.
알 카에다는 이 무렵 東아시아판 9.11 테러계획을 위하여 10여 명의 행동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 입국하는 데 비자가 필요 없는 나라 출신들로 테러실행 조직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빈 라덴은 이때 싱가포르의 미군기지 공격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금융 심장부와 해외침략의 상징인 해외 미군기지를 동시에 공격하여야 극적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였다.

동시 납치의 타이밍 문제

2000년 초 빈 라덴은 알 카에다의 본부가 있는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자주 9.11 대책회의를 열었다. 알 마스리, 아테프, KSM은 고정 참석자였고, 아타시도 가끔 끼였다.
빈 라덴은 한때 아시아판 9.11 계획을 두 종류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미국 여객기를 납치하여 추락시키는 것과 납치된 비행기를 한국과 싱가포르의 미군기지에 충돌시키는 것으로 분리하기로 한 것이다. 빈 라덴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미군기지 등을 공격하는 데 사용할 여객기에 미국사람들이 반 이상은 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시아 사람들이 많이 타면 억울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고 국제적 비난을 받을 것이었다. 그런 비행편을 고르는 게 쉽지 않았다.
KSM과 아타시는, 빈 라덴이 2000년 중반부터 동아시아판 9.11 계획에 대하여 자신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항의 保安(보안)검색은 문제가 아니었다. 납치범들은 폭탄을 품고 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동시 납치의 타이밍이었다. 빈 라덴은, 미국과 아시아에서 같은 시각에 비행기를 납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납치의 타이밍이 서로 맞지 않으면 첫 번째 비행기 납치 직후 비상이 걸려 후속 납치는 불가능하게 된다.
이 무렵 빈 라덴은 9.11 계획의 세부사항을 점검하면서 준비과정을 통제하던 KSM에게 월드 트레이드 센터 공격을 앞당기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야당 당수 아리엘 샤론(뒤에 총리)이 2000년 9월에 지지자들을 데리고 이슬람 세계에서 세 번째로 신성하다는 예루살렘의 ‘바위의 돔’ 지역을 방문, 이슬람 신도들을 격분시켰다. 빈 라덴은 이에 대한 보복을 빨리 하고 싶었다. KSM은 빈 라덴에게 미국에서 조종사 교육을 받고 있는 아타 등 요원들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하였으나 세부적인 사안에 대하여는 관심이 적었던 빈 라덴은 계속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빈 라덴은 2000년 말, 아시아판 9.11 계획을 포기하고 KSM이 미국 작전에 전념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하여 많은 한국인과 駐韓미군의 생명이 보존되었다.


미국 기자를 직접 斬首(참수)

KSM은 9.11 사건 직후엔 미국에서 여객기를 납치, 미국의 서해안에 있는 상징적 건물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으나 한국판 9.11 계획을 다시 시도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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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한 KSM은 9.11 테러 이후에도 영국인 리처드 라이드를 파리 드골공항發(발) 미국 마이애미行(행) 아메리칸 항공 보잉 767기에 태웠다. 라이드는 감옥에서 이슬람으로 改宗(개종)하였다. 라이드는 폭약을 넣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비행도중 성냥에 불을 붙여 구두 밑창에 숨긴 폭약을 터트리려던 라이드를 승무원과 승객이 덮쳤다. 비행기는 보스턴의 로건 공항에 비상착륙하였다. 라이드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이후에 비행기 탑승객들은 공항에서 구두를 벗고 보안검색을 받게 되었다. 세계인들의 생활습관을 바꿔놓은 것이 KSM이었다.
KSM은 월 스트리트 저널 西南(서남)아시아 지국장 다니엘 펄 기자를 납치, 斬首(참수)하는 데도 관여하였다고 자백하였다. 2002년 1월 펄 기자는 라이드의 범행을 취재하려고 파키스탄에 들어갔다가 알 카에다 조직원에 납치되었다. 알 카에다는 펄 기자를 참수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공개하였다. KSM은 2007년 쿠바의 미군기지 관타나모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의 오른 손으로 펄의 머리를 베었다”고 진술하였다.

화려한 테러목록


2007년 3월10일 미군 관타나모 기지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KSM이 저지른 테러범죄의 目錄(목록)이 자술서 형식으로 제출되었다.

1. 나(KSM)는 1993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작전에 관련되었다.
2. 나는 9.11 작전엔 A부터 Z까지 관련하였다.
3. 삭제
4. 나는 구두 폭파범(Shoe Bomber) 작전으로 미국 비행기 두 대를 추락시키려 하였다.
5. 나는 두 명의 미국 병사를 죽인 쿠웨이트의 필카 섬 작전에 책임이 있다.
6. 나는 발리 폭파사건에 관련되었다.
7. 나는 9.11 사건 이후 아래 건물들을 폭파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훈련과 정찰을 하였다.
a. 캘리포니아의 라이브러리 타워
b. 시카고의 시어즈 타워
c. 워싱턴주의 플라자 은행
d.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 나는 9.11 사건 이후 호르무즈 해협, 지브랄타 해협, 싱가포르 항에서 미군 함정이나 유조선을 파괴하기 위한 계획을 하고 자금을 마련한 책임이 있다.
9~21. 생략
22. 나는 몸바사 공항을 출발한 이스라엘 엘 알 항공사 여객기를 향하여 地對空(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한 작전에 책임이 있다.
23. 나는 한국에 있는 미국 표적들, 예컨대 미군기지나 미군이 많이 드나드는 나이트클럽을 공격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조사를 한 책임이 있다.
24~26. 생략
27. 나는 승객이 탄 미국 비행기 12대를 추락시키려는 보징카 작전을 계획하고 정찰한 책임이 있다. 나는 직접 팬암기를 타고 마닐라-서울을 왕복하였다.
28~29. 생략


무슬림 형제단이 국내 진출?


그가 자백한 화려한 테러목록 중 두 항목에서 한국(23번, 27번)이 등장한다. KSM과 아타시의 행적을 분석해보면 종합해보면 2000년 무렵 알 카에다가 한국내에 조직원을 두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KSM은 관타나모 군사 법정에 제출된 自述書(자술서)에서 “나는 한국에 있는 미국 표적들, 예컨대 미군기지나 미군이 많이 드나드는 나이트클럽을 공격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조사를 한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미군기지 공격은 납치 비행기로 하면 되지만 나이트클럽 공격은 한국으로 침투한 조직원이 해야 한다. 알 카에다가 조직원을 한국으로 들여보내 이런 類(류)의 공격을 할 것이란 첩보는 우방국 정보기관에 의하여 입수되어 한국측에 가끔 통보된다. KSM은 미군 나이트클럽 공격을 아마도 자동차를 이용한 폭탄테러나 자살테러로 기획하였을 것이다. 거기에 따른 계획과 조사를 하였다고 했으니 알 카에다 조직원이 한국을 다녀갔을지도 모른다.
2004년 이라크의 反美(반미) 무장 조직은 김선일씨를 납치, 살해하였고,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은 한국인 선교단을 납치하여 두 명을 사살하였다. 지난 3월엔 빈 라덴의 고향 예멘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노린 자살폭탄 테러로 4명을 죽였다. 알 카에다는 한국이 미국과 친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파병하였다고 하여 敵性國(적성국)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엔 약100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는데 약10만 명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 국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집단거주를 하는 경우가 많다.
삭제
무슬림형제단(Islam Brotherhood. MB로 약칭)이 조직을 만들지의 여부가 관심사이다. KSM도 16세에 무슬림형제단에 들어가면서부터 지하드(聖戰을 위한 순교)의 길을 걸었듯이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상당수가 이 조직을 통하여 교육을 받았다. 무슬림형제단은 1928년 이집트의 학자 하산 알 바나에 의하여 창설되었고 그 후 이슬람 세계 전체로 퍼져갔다.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미국은 테러조직으로 규정)가 무슬림형제단이 만든 정치조직이다. 이집트에선 무슬림형제단의 정치활동을 불법화하였다.
MB는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人力(인력) 풀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이다. 무슬림형제단은 테러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곤 하지만 그 진정성에 대하여는 의심하는 이들이 많다. 무슬림형제단의 창립목적이 이슬람식 생활을 확산하는 것이므로 남녀평등, 종교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 자유민주적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무슬림형제단의 창립자인 하산 알 바나가 쓴 책은 폭력을 선동한다고 하여 여러 나라에서 禁書이지만 한국에선 이슬람 조직이 경영하는 서점에서 살 수 있다. 필자가 구입한 알 바나의 책은 ‘The Concept of Allah in the Islamic Creed'(이슬람主義에서 알라의 개념)이란 제목이다.
이 책의 78페이지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알라神은 알라의 길을 가기 위하여 싸우는 지하드를 모든 이슬람 신도들의 의무로 규정하였다. 알라는 지하드에 참여하는 戰士(무자히드)들에게 來世에 최고의 상을 내리신다. 지하드를 피하는 자들에겐 최악의 벌과 불행한 종말을 약속하였다. 그들은 來世(내세)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 속에서 지낼 운명이다. 금을 산떠미처럼 주고 용서를 빌어도 도망갈 방법이 없다>
알 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단체들이 핵무장한 미국을 상대로 이렇게 맞설 수 있는 비결은, 지하드 정신으로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이 자살폭탄이 되어 목숨을 草芥(초개)처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공급되는 인간폭탄이 쓰기 힘든 핵폭탄을 누르고 있는 셈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을 폭탄개념으로 활용하는 집단은 이슬람 과격파와 김정일 정권뿐이다. 그러니 서로 잘 통하는 것이다.
정보당국에선 국내 이슬람 신도들 사이에 무슬림형제단이 세포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첩보를 입수, 긴장하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 과격 세력이 국내 좌익과 연계될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일부 이슬람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었을 때 좌익세력과 손을 잡으면 사회불만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의 좌익들은 反기독교, 反美, 反이스라엘 정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하는데 자연스럽게 親이슬람 성향을 띤다. 무슬림형제단이 만든 하마스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단체엔 국내 좌익단체와 유학중인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2년 전 이집트 정부가 무슬림형제단 사람들을 체포하자 한국의 좌익단체들이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연 적도 있다. 무슬림형제단 홈페이지는 이 시위 사진을 실어 선전하기도 하였다.

국정원의 對테러 기능 강화해야

북한정권은 파키스탄, 이란,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정부와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친밀하다. 이란-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공동개발한다는 의심도 사고 있다. 북한 공작부서는 오랫동안 이슬람 테러단체들과는 거의 형제처럼 지내기도 하였다. 정보 당국에선 북한정권-이슬람 과격파-국내 좌익의 연계 가능성과 이에 바탕을 둔 테러를 걱정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친북좌익 성향을 띠었으므로 국내 이슬람 과격파에 대하여 온정적이었다. 국정원이 이슬람 과격 성향의 인물들을 색출, 추방하면 관련국가에서 한국 정부에 항의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때 노무현의 청와대는 국정원에 대하여 “왜 쓸 데 없는 짓을 하는가”라고 오히려 힐책하였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對테러 업무를 위한 조직 및 법령 정비가 좌파세력의 반대로 지금껏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의 극렬 좌익세력은 테러집단인 북한정권을 편들 뿐 아니라, 이슬람 테러단체를 염두에 둔 우리 정부의 대비계획도 방해하고 있다.
한국에서 對테러 업무는 북한정권과 이들과 연계된 이슬람 테러조직을 主(주)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으므로 본질적으로 안보 문제이다. 안보에는 국군이 동원되어야 한다. 국정원이 국회에 제출한 對테러기본법은 시설보호 및 경비업무에 한하여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對테러센터를 국정원 산하에 두는 것은 국정원의 임무와 기능에 비추어 자연스러운 데도 기능과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 총리실 산하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2001년 9.11 테러 직후부터 정부는 테러방지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주로 좌파세력의 반대로 8년이 지난 지금도 통과되지 않고 있다. 작년 10월 한나라당의 공성진 의원이 ‘국가對테러활동에 관한 기본법안’을 다시 발의, 정보위에 올려놓고 있다.
국가정보원이 추진중인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에 대하여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는 이들이 많다. 개정안의 요지는 휴대전화 등 최신통신시설에 대한 합법적 감청이 가능하게끔 통신업체가 감청협조설비를 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합법적 감청이라 함은 법원으로부터 감청 허가를 받아 특정 인물이나 조직에 대하여 허가기한내에 통화나 통신을 감청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법원의 허가를 얻어도 통신업체에 감청협조 설비가 없어 감청이 불가능하다.
요사이 테러집단은 첨단 통신장비를 사용하여 재빨리 움직인다. 신속하게 對테러작전을 펼쳐야 할 국가기관은 통신의 현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法制(법제)에 갇혀 기민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通秘法(통비법) 개정을 반대하는 세력은 법안이 개정되면 국정원이 휴대전화를 마음대로 엿듣게 된다는 식으로 선동하고 있다.
우선 법원의 감청 영장 없이는 감청이 불가능하다. 감청도 국정원이 직접 하는 게 아니라 통신업체를 통하여 한다. 이 규정을 어기면 징역 5년 이하의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국정원이 하는 일은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알 카에다 조직이 한국에 들어와 휴대전화와 인터넷 전화로 테러준비를 하는 사태를 이런 사람들 때문에 막을 수 없다면 이건 나라도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갔던 조선 사신이 그들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도 정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침략할 것 같지 않다'고 보고하였던 일이 있었다. 對테러와 같은 안보문제를 私的(사적) 이해관계에서 다루면 國益과 안보가 날아간다.
알 카에다가 한국을 노리는 두 차례의 대규모 항공 테러를 기획하였다가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우연한 幸運(행운) 덕분이었다. 이런 행운이 계속되리라고 믿는 것은 일종의 공짜심리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란 말이 새삼 생각난다.



*사진 설명

1. 타이틀 사진: 9.11 테러 입안자 KSM(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이 2003년 파키스탄에서 체포되었을 때의 모습.
2. 1차 월드 트레이드 센터 폭파와 보징카 작전의 지휘자였던 람지 유세프
3. 1차 월드 트레이드 센터 폭파 현장. 유세프는 북쪽 타워를 넘어뜨려 남쪽 타워를 밀어붙이면 두 타워가 함께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4. 빈 라덴(사진)은 납치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판단, 한국판 9.11 계획을 취소시키고 미국판 9.11 테러에 집중하도록 결정하였다.
5. 한국에서 팔리는 무슬림형제단 설립자의 著書(저서). 지하드(聖戰)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다.
6.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에 대한 관타나모 군사 재판의 訊問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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