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成哲은 <7.4 성명>의 主役이 아니었다
李東馥
10월30일자 조간신문 기사 가운데 북으로부터의 부음(訃音) 기사 한 꼭지가 필자의 눈길을 끈다. 박성철(朴成哲)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다. 그런데, 그 가운데 <조선일보> 2면의 기사를 보고, 어쩌면 망자(亡者)에게 서운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역사의 기록성을 위해서 이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조선일보>는 망자를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최측근으로 <7.4 남북공동성명>을 성사(成事)시킨 주역(主役) 중 한 사람”이라고 쓰고 아예 기사 제목도 “<7.4 성명 주역 북(北) 박성철 사망”이라고 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실성에 큰 오류(誤謬)를 범하는 것이다.
박성철은 “<7.4 성명>을 성사시킨 주역”이 아니었다. <7.4 성명>은 1972년5월2일부터 5일까지 사이에 이루어진 이후락(李厚洛ㆍ중앙정보부장)의 비밀 방북(訪北)의 산물(産物)이었다. 그러나, 이 때 박성철은 남북대화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거기까지 이르게 된 데는 이러저러한 경위가 있었고 이 글에서는 그 자세한 내용을 일단 제켜 놓겠지만 당시 이후락의 방북은 이후락 쪽에서 북에 대해 ‘고위급 정치회담’을 제의한 것을 북이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에 앞서 남북 간에는 진행 중이던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의 그늘 속에서 1977년 타계(他界)한 장기영(張基榮ㆍ당시 <한국일보> 사주)의 방북 문제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1972년 초 이후락은 정홍진(鄭洪鎭)-김덕현(金德賢) 라인을 통해 북의 김일성(金日成)에게 “북에서 김영주(金英柱)가 나의 상대역이 되어준다면 장기영 대신 내가 직접 방북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데 대해 북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이후락의 방북이 성사된 것이다. 이후락이 김영주를 그의 대화 상대역으로 찍은 것은 그가 이끌던 <중앙정보부>가 김영주를 북한 권력구조에서 김일성의 후계서열 1위의 제2인자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남측의 국가정보기구가 갖는 북한 정보에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었는지를 보여준 한 사례(事例)였다. 이 무렵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장남(長男) 김정일(金正日)으로의 봉건왕조(封建王朝) 식 세습(世襲)에 의한 권력승계 작업의 막(幕)이 열려서 <조선로동당>의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 두르며 김일성 우상화(偶像化)를 주도해 오던 김영주는 이미 퇴장(退場)의 수순(手順)을 밟기 시작하고 있었음이 뒤에 들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중앙정보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김일성이 ‘해’(日)인 북한에서 김영주가 아직도 ‘달’(月)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락이 평양에 가 있는 동안도 박성철은 전혀 모습을 들어 내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아니 유일하게 이때만은, 김영주가 직접 나섰다. 평양에 가 있는 동안 이후락은 김영주와 두 차례 회담한 뒤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가졌다. 김일성과의 회담 석상에서 이후락은 그의 방북에 대한 답례로 김영주의 서울 방문을 요청했다. 그런데, 김일성의 이 같은 이후락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대신 김일성은 “내가 김영주 못지않게 신임하는 박성철을 서울로 보낼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답변한 것이다. 당시 북한 권력구조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인 김일성이 ‘내각’의 ‘수상’이었고 ‘제1부수상’이 김일(金一), 박성철은 ‘제2부수상’이었다.
이후락이 한 동안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왔는데 나의 상대역인 김영주가 아니라 대역(代役)이 서울을 방문하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반박 논리도 동원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막무가내였다. 이후락이 이유를 묻자 김일성은 “사실은 김영주가 몹시 아프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후락과 두 차례 회담하고 또 김일성과의 회담에도 배석한 김영주는 멀쩡했었다. 이후락이 ‘병명(病名)’을 묻자 이에 대한 김일성의 대답은 “그, 의사가 무엇이라고 하던가, 아마 ‘식물성신경부조화증(植物性神經不調和症)’이라고 했지”라는 것이었다.
이후락이 서울로 귀환한 뒤 남쪽에서는 의학계를 대상으로 엉뚱한 ‘보물찾기’가 벌어졌다. “도대체 ‘식물성신경부조화증’이라는 것이 무슨 질병이냐”는 것이었다. 남쪽의 의학계에서는 아무도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 질병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영구미제(永久未濟)’로 남겨졌다. 그러나, 이후락의 평양방문을 마지막으로 김영주의 존재는 망각(忘却)의 세계로 묻혀버렸다. 그 뒤 18년간 김영주는 완전히 잠적(潛跡)해 버렸다. 18년 뒤 김영주는 유명무실한 ‘국가부주석’ 중의 한 사람으로 다시 모습을 들어냈다. 뒤에 알려진 사실은 그 잠적 기간 중 그는 함경북도의 어느 곳에서 연금(軟禁)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걸림돌이 된 그는 18년 간 북한판 ‘철가면(鐵假面)’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성철이 남북대화에 등장했다. 그는 1972년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비밀리에 서울을 다녀갔다. 이때 남측 국가정보기관의 체면을 꾸기게 만든 또 하나의 해프닝이 발생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5월31일 저녁 청와대(靑瓦臺)에서 북측 방문객들에게 만찬을 대접했다. 철저하게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지도자였던 박정희는 이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보고 받은 정보자료를 토대로 북측 방문객들의 인적 사항을 철저하게 연구ㆍ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다.
북측 방문객들의 ‘단장’은 박성철이었지만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그랬던 것처럼 북측의 실력자는 그가 아니라 ‘부단장’인 류장식(柳章植ㆍ<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이었다. 그는 심지어 그의 상관(上官)인 박성철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도 ‘감시’하고 ‘감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청와대 만찬에 앞서서 접견실에서 있었던 리셉션 석상에서 류장식이 이후락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박정희는 박성철과 1대1로 환담하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박정희가 ‘실력(實力)’ 발휘를 시도했다. 그는 박성철에게 “나도 박 부수상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 고향이 함경북도지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중앙정보부> ‘존안(存案)’ 정보자료에 박성철이 함경북도 출신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박성철이 황급하게 ‘착오(錯誤)’를 시정했다. “각하, 제 고향은 함경도가 아니라 경상북도 경주입니다. 저는 경주에서 낳아서 초등학교를 거기서 다녔습니다...”라고 바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박성철의 유ㆍ소년기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될 찰나(刹那)였다. 이때 이후락과 함께 있던 류장식이 박정희와 박성철이 환담하고 있는 자리로 닥아 왔다. 그러자, 박성철은 그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중도에 접고 얼른 말머리를 다른 화제로 돌렸다. <중앙정보부>가 가지고 있던 북한 정보의 부정확성을 적나나하게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였다. 물론 북한이 폐쇄성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남측의 국가정보기관이 보유하는 북한 정보의 이 같은 부정확성은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는 남북대화에 참여한 기간 중 항상 ‘꼭두각시’였을 뿐 ‘주역’이 아니었다. 당시 남북대화에서 생산된 합의문건 가운데 <7.4 성명>은 이후락(남)과 김영주(북)가 서명한 반면 이 성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남북조절위원회>가 생산한 유일한 합의문건인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의 경우 이후락이 직접 서명한 남측과는 달리 북측은 박성철이 “김영주를 대리하여” 서명했었다. 그 뒤 <남북조절위원회>가 탈이 나서 중단된 1973년5월까지 박성철은 “김영주를 대리하여” 북측 대표단을 인솔했지만 그는 시종 남북대화의 북측 ‘얼굴마담’일 뿐이었다. 북측 대표단의 실제 실력자(實力者)이자 실권자(實權者)는 류장식이었다.
류장식은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가 중단된 후 그 역시 자취가 살아진다. 들려 온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부정부패(不正腐敗)’ 혐의로 ‘숙청(肅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를 통하여 접했던 북측의 진면모(眞面貌)에 아연(啞然)했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가 중단된 뒤 남북 간에는 판문점에서 <남북조절위원회 부위원장회의>라는 이름의 접촉을 근 1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남측에서는 장기영이, 북측에서는 류장식이 참가했다.
그 기간 중 어느 날 필자는 판문점에서 류장식에게 말을 거는 기회를 가졌다. “요즘 김영주 위원장 근황은 어떠시냐”는 것이 필자의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류장식의 대답을 듣고 필자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낸들 압네까. 아파서 누어 자빠져 있다고 하는데...” 그가 ‘부장’으로 모시고 있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의 직속상관이고 김일성의 실제(實弟)에 대해 어떻게 이런 화법(話法)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일까.
박성철에 관한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샜다. 사실은 박성철이 남북대화에 참가하기 시작한 뒤 필자 역시 박성철에 관한 ‘연구’ 아닌 ‘연구’를 한참 하게 되었고 과거에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김일성이 만주(滿洲)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위관(尉官)’급 장교로 빨치산 무장활동을 할 때 김일성의 ‘당번병(當番兵)’으로 신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45년 해방에 따라 북한으로 돌아 온 뒤 이 같은 김일성의 신임을 바탕으로 북한군 소장(少將)이 되어 15사단 사단장으로 사단을 이끌고 6.25 남침의 서전(緖戰)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이끄는 북한군 15사단 48연대가 7월7일 충청북도 음성의 무극리에서 김종수 소령이 이끄는 국군 6사단 7연대 2대대의 요격(邀擊)으로 대파(大破)되고 이어서 7월16일에는 같은 15사단 48연대가, 그리고 7월21일에는 15사단 45연대가 충북 보은의 화녕장에서 국군 17연대의 요격으로 역시 연달아 대파 당하는 연전연패(連戰連敗)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단장에서 해직(解職)되어 소환된 뒤 상당 기간 불우(不遇)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에 대한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 때문에 그는 다시 공직 생활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의 북한 권력구조 내에서의 위치는 달라졌다. 이제 그는 북한의 실권(實權) 조직인 <조선로동당>에서는 빛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그는 그의 ‘얼굴마담’ 능력을 살려서 이번에는 북한의 외교활동에 동원되어 후일 ‘외교부장’을 거쳐 ‘제2부수상’이 되었을 때 남북대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남북대화 석상에서 접한 그의 풍모는 다른 북한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악착스럽지 않았다. 써가지고 온 것을 읽을 때는 써 준대로 읽었지만 써 준 글을 읽지 않고 즉흥적으로 대화할 때는 말이 구수하고 또 털털했다. 호호야(好好爺)의 풍모를 보여 줄 때가 많았다. 아마도 김일성은 그의 그러한 면모를 인정해서 그를 ‘얼굴마담’으로 주로 활용한 것 같았다. 필자가 접했던 북한 인물 가운데 박성철과 비슷한 풍모(風貌)를 보여 준 인물이 또 있다. 1990년대 초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선언>을 만들어 낸 <남북고위급회담> 때 필자의 상대역이었던 백남준(白南俊)이 그런 인물이었다.
백남준은 본명이 백남순(白南淳)으로 뒤에 북한 ‘외무상’이 되었다가 한 두 해 전에 타계했다. 그도 박성철처럼 다른 이들과 달리 그리 악착스럽지 않았고 써 준 대로 읽는 발언이 아닐 때는 화술(話術)이 그렇게 매섭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차 안에서나 아니면 사석(私席)에서는 북한 사람답지 않게 더러 ‘봉이 김선달’이 절간 앞에서 유부녀(有夫女)를 희롱하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음담패설(淫談悖說)도 곧잘 입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박성철이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아직 <신라호텔>이 건축되기 전이었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만이 덩그렇게 서 있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에서는 그를 거기에 투숙시켰다. 그런데, 밤에 잠을 잘 때 그의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스러웠는지 방 밖에서도 크게 들릴 지경이어서 그때 남쪽 회담 인원들 사이에서는 “저 사람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말이 오갔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부터 벌써 36년 전, 그는 이제 95세의 수(壽)를 누리고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생겼던 인연(因緣)으로 본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조문(弔問)의 대상이 될 법 하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언급하는 그의 면모는 오직 일부일 뿐이다. 김일성ㆍ김정일을 포함하여 다른 북한 인물들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우리의 평가는 개인적 감상(感想)에 의존할 일이 아니라 이제 63년을 헤아리는 남북관계의 역사 속에서 조명(照明)되지 않을 수 없다. 부음이 전해진 박성철에게 이 글이 나 나름의 조사(弔詞)가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