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의 金賢姬 추억

"북한에선 his story를 가르치고 남한에선 history를 가르친다"
김일성의 이름 앞엔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혁명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시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이시며, 세계혁명의 위대한 영도자이시며, 절세의 영웅이시며, 경애하는 수령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주체사상의 창시자이시며, 자애로운 어버이시며,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시며...>

대한항공 폭파범 金賢姬씨는 1989년 나와 인터뷰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북한에선 his story를 가르치고 남한에선 history를 가르친다'. 북한에선 김일성 김정일 역사만 가르치는데 남한에 와보니 민족사를 제대로 가르치더란 이야기였다.

金賢姬는 대학교 1학년 때 朴正熙 대통령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제 통일에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朴정희 도당들 때문에 통일이 지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워낙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머리가 나빠서 칼부림밖에 모르는 포악무도한 독재자」라고 배웠다. 그 全 전 대통령이 1988년 11월23일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사죄성명을 읽은 뒤 백담사로 스스로 선택한 귀양을 떠나는 것을 金賢姬씨는 텔레비전으로 지켜보았다.

『인민들의 의사가 무섭고 발언권이 세다고 느꼈습니다. 사과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이 인민들의 힘 아니겠습니까. 여기 와서 보니까 全대통령은 성과도 있으시고 가정적으로는 비난받을 점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金日成이 같으면 그 정도의 가정적인 문제는 도대체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쪽 인민들은 金日成·金正日의 신상에 대해서 모릅니다. 金正日의 아내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신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경한 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全 전 대통령의 성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잘은 모르지만 80년에 집권하고 나서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이렇게 발전시킨 것이 성과가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런 말도 했었다.
'범행을 자백한 뒤에 남한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꼭 내가 북한에 있는 것 같고 이따금 고향에 와 있다는 착각을 느낄 만큼 山川이 흡사한데 놀랐고, 풍습과 음식이 같고 해서 한 핏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자백한 직후엔 남한을 확고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김일성 수령님을 배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차츰 진실을 알게 되면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끓어올랐습니다.'


김현희는 1989년의 한국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여기서는 살빼는 것이 소원이고, 저쪽에선 살찌는 것이 소원입니다. 안경 낀 사람들이 많아 놀랐습니다. 이렇게 잘 사는데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왜 데모를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텔레비전에 보니 시민들이 아주 말을 잘 합니다. 마이크를 갖다대면 술술 합니다. 북한에선 즉석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말조심을 해야 하니까요. 여기 사람들은 군것질을 많이 합니다. 북한에선 명절 때만 과자를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서울의 노점상들은 북한의 백화점보다 더 물건이 많습니다. 여기는 뿌리가 튼튼한 나무이고, 북쪽은 이파리만 달린 연약한 나무 같습니다. 대통령을 멋대로 욕하는데 놀랐습니다. 북한에선 남편이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면 외도했나 하는 걱정보다는 말실수를 하여 강제수용소에 끌려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을 더 한답니다.'

그럼에도 김현희씨는 통일이 되면 남북한 사람들이 빨리 적응할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잘 맞지 않는 점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성은 어쩔 수 없고 인간의 속성은 버릴 수 없습니다. 자유를 주어 행복하게 해주면 이념은 사라지고 인간 본성이 드러날 것입니다.'

김현희씨는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남한 사람들은 KAL기 폭파사건을 왜 그렇게 빨리 잊어먹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 비행기를 남한이 폭파시켰다면 두고두고 선전하고 군중집회를 열면서 써먹었을 것입니다.'

그때 김현희씨는 남한의 주부들이 파출부를 쓰는 데 대해서 분개하고 있었다. 수사관들 사이에선 '김현희한테 들어가면 나오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만큼 물건을 절약했다. 1회용 커피를 뽑아주었더니 마신 뒤 종이컵을 닦아 보존하고 있더란다.

여자는 통상 남자에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한다는데 金씨는 북한 초대소에서 밀봉교육을 받을 때 누구를 위해서 화장을 했을까 궁금했다.

『敵區化 교육의 하나로서 자본주의식 화장법을 배웠습니다. 일본인 교사 리은혜 선생이 가르쳐 준 대로 일본여자의 화장법으로 매일 화장을 했습니다. 黨 간부들이 불시에 들르기 때문에 항상 화장을 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저처럼 여러 가지 화장품을 많이 쓴 화장을 할 수 있는 이는 북한에서는 예술인들 이외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밤에 화장을 한 채 집에 들렀더니 어머님께서 눈가에 바른 아이새도우를 보시고는 「누구한테 얻어맞았니?」라고 하시며 놀라십디다. 어머님은 제발 그것 좀 지워버리라고 질색을 하셨습니다.
저는 브라운색의 아이새도우를 주로 발랐습니다. 3∼4 개월에 한번씩 지도원의 차를 타고 평양시내의 최고급 미장원인 창광원에 가서 퍼머도 했습니다. 화장이란 것이 저 자신에게 좋게 보이도록 하는 면도 있으므로 싫지는 않았습니다』

金賢姬씨가 남한 생활을 하면서 배운 낱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 쌓인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무슨 뜻인지 몰랐다가 차츰 남한 사회를 알게 되면서 그 뜻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쪽에서는 스트레스에 합당한 말이 없습니다. 기분 나쁘다는 뜻도 아니고… 북한은 같이 못사니까 스트레스가 별로 없으니까요』

金賢姬씨는 「가스 순찰대」란 조직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는 설명을 하였다. 북한에서는 가정에서 분탄을 배급받아 직접 연탄을 찍어 사용하고 있다.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많다. 남한의 반상회 조직과 비슷한 인민반에서는 가스중독 사고를 막기 위해 방범순찰대와 비슷한 가스 순찰대를 만들어 새벽 2∼4시 사이에 관할 주택을 돌게 한다고 한다. 문을 두드려 잠을 깨워 가스에 취하지 않았음을 도장으로 확인 받은 뒤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자게 한다』고 불평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19공탄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중이었다. 내가 사회부 기자로 뛰던 1970년대 매일 아침 경찰엔 연탄가스 중독 사건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신혼 부부가 중독되어 죽었다든지 이사를 온 첫날에 가족이 전부 중독되어 병원에 실려갔다든지 하는 보고서였다. 나도 어릴 때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김치국물을 많이 먹은 적이 있다.

19공탄이 잘 타지 않고, 잘 부서진다고 해서 저질탄이 큰 사회문제로 번진 적도 있다. 그러나 19공탄으로 해서 한국은 山林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70년대부터 아파트化가 진행되면서, 그리고 1980년대부터 가정에 가스가 들어오면서 연탄 이야기는 기자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김현희(金賢姬)가 1년간 금성정치군사대학 공작원 속성정보반 교육을 받을 때의 정치사상, 학습 과목표를 보면 13과목 중 12과목이 「김일성 혁명역사」 「김일성 저작전집 20권)」「김일성주의 철학」 등 金日成에 관한 것이었다. 金賢姬는 『북한의 각급 학교에서 金日成주의 과목이 시간적으로 약30%를 차지할 것이다』고 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망가지게 된 한 원인은 경제와 과학 기술 교육이 혁명 교육에 밀려 부실했기에 인재집단이 허약해졌기 때문이다.

金賢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적도 없었다. 나는 공산당 공작원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생각했는데 그녀의 설명은 이러했다.

『자본론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레닌 책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 헤겔의 이름만 알고. 유물론과 변증법도 그런 것이 있다는 정도로만 배웠습니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공산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어둡습니다.

주체사상은 金日成이가 공산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시대에 맞게끔 독창적으로 창시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항일무장투쟁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검증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주체사상의 수령관에는 수령, 당, 인민을 전일체(全一體)라고 하면서도 특히 수령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수령은 「통일과 단결의 중심으로서 혁명과 건설에 관한 전술이론을 제시하여 인민을 승리로 영도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수령이 있어야 인민도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의심 가졌다가 스스로 삼가

김현희(金賢姬)는 주체사상을 배우면서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수령님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을 갖는 것조차 불경으로 여깁니다. 「수령님을 높이 모시기 위한 4대 원칙」은 ①신격화 ②신조화 ③절대성 ④무조건성입니다. 그런데 「전세계의 김일성주의화」를 가르치는 데 대해서 「그렇게 하면 全세계를 김일성주의로 지배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것과 위배되지 않느냐」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런 의심을 품는 저 자신이 두려워 기겁을 하고 그 생각을 버렸습니다.
의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나의 사상이 변질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金賢姬는 『바깥 세계와는 완전히 봉쇄돼 있고, 조선시대-일제시대-해방 뒤를 통해서 폐쇄사회만 경험했고. 특히 집권자의 교체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 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대손손 해먹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비교적 적은 것 같습니다』는 풀이도 했다.

납치된 일본여자 리은혜로부터 일본인化 교육을 받고 있던 1982년 4월15일의 金日成생일에 리은혜는 金賢姬와 함께 술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리은혜는 취하자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말라』면서 그 해 2월16일 金正日의 생일파티에 초대돼 갔던 일을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이 파티에서는 참석자들이 놀이를 하면서 「진 사람을 때리기」 「진 사람은 옷 벗기」를 했다는 것이다. 최해옥이란 30대 가수는 여러 번 지는 바람에 알몸이 드러날 때까지 옷을 벗어야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金賢姬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파티에서 그런 일도 있나』하면서 의아해 했으나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이 스스로 불경스럽게 느껴져 잊어버리려 애썼다는 것이다.

金賢姬는 『북에서는 애국가보다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더 자주 부르고, 국기보다는 金日成 초상화에 더욱 지극한 경의를 표한다. 여기에 와서 남한사람들이 태극기에 대해서 소중히 여기고 엄숙히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金日成 우상숭배가 극도화 됨으로써 金日成은 黨과 국가보다도 위에 있는 전지전능의 존재가 돼버렸다는 얘기다. 그래서 金賢姬는 안기부의 관할 하에서 생활하면서 성경을 읽어보고는 『주체사상과 그렇게도 같다니…』하고 감탄해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김현희씨를 만날 때 그녀는 악몽을 자주 꾼다고 말했다. 꿈에 아버지 어머니가 보이면 빨리 남한으로 내려가자고 매달린다. 부모는 눈이 휘둥그래지고 김현희는 답답해서 발을 동동 굴리고... 그러다가 깬다는 것이었다.

그때 김현희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재판장에서 유족들로부터 욕을 먹으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저를 살인자로 만든 김일성 김정일이 저주스럽습니다. 저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려드리는 게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김현희씨는 북한에서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고양이를 품은 적이 있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면서 생명의 소중함이 가슴으로 다가오자 깜짝 놀라 '이렇게 약해지면 안 된다'고 다짐했었다고 한다. 김정일에 충성하는 것과 인간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양립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김현희씨는 가짜라고 주장하는 몹쓸 인간들이 있다. 김현희씨로부터 북한을 배운 나도 가짜란 말인가?

김정일은 김현희를 부려 대한항공기를 폭파, 서울올림픽을 막으려 했지만 올림픽은 대성공하고 김현희는 살아 남아 김정일의 민족반역행위를 고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인간폭탄이 되었다. 미국 등 국제사회는 對北제재로써 그를 응징했다. 남한의 從金세력들이 김현희씨를 가짜로 몰아세우는 데 성공한 것 같지만 엉뚱하게 당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한국은 逆轉드라마의 나라이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