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김정일의 두통거리'가 될 여인

20년 전 김현희 인터뷰 기사 再錄
지옥도와 같았을 최후의 장면


115명이 죽은 KAL 858편 여객기 폭파는 그 참담함의 실감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면에서 희한한 사건이다. 폭파현장은 한국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버마 남쪽 공해 상공 약 11km 하늘에서 공중분해 될 때의 상황을 우리는 상상으로만 알뿐이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지는 참상이 아니라 머리로 분석되는 현장이기에 실감이 덜한 것이다. KAL858편 (보잉 707)에서 폭발했던 양과 같은 양(350g)의 콤포지션-4(C-4) 폭파력 시험장면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본 적이 있었다. 직사각형의 쇠 상자 뚜껑 안쪽에 밀가루 반죽 덩어리 같은 C-4를 부착시켰다. 약200m 떨어진 토치카에서 원격조종으로 단추를 눌렀다. 굉음과 함께 쇠 상자는 분해되면서 날아갔다. 파편은 200m나 떨어진 토치카 창의 앞까지 날아와 실험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회수된 두께 1cm의 철판(뚜껑부분)은 종잇장처럼 찢어져 있었다. 보잉707기의 동체외판은 수 밀리 정도이고, 철판보다 훨씬 약한 알루미늄 합금이다. 앞자리 선반 위에서 C-4폭약이 들어있는 라디오 시한폭탄과 그 옆에 있던 액체용 폭탄이 동시에 터졌으니 보잉 707機는 동체가 부러졌을 것이다. 기체가 터지면서 일시적으로 기내는 급격한 기압감소로 인해 자욱한 안개로 덮였을 것이다. 승객들은 수초 내지 수십초간의 의식으로 지옥과도 같은 장면을 마지막으로 網膜에 담았을 것이다. 조종사는 비상사태가 나면 습관적으로 머리에 쓰고 있는 송수신기를 작동시키고 긴급상황 보고를 한다. 이 행동에는 1∼2초가 걸릴 뿐이다. 소련요격기의 미사일을 맞은 KAL 007의 조종사도 10여초간 알아듣기 힘든 비상사태 보고를 했었다. KAL 858편 조종사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공중 폭파된 비행기에서 구조신호가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기내상황은 KAL 007 사건 때보다도 더욱 처참했다는 얘기다.
폭파 순간에는 급격한 減壓, 그 직후에는 엄청난 압력증가가 나타난다. 減壓 상황에서는 머리에 있던 피가 四肢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고 압력이 증가하면 피가 머리로 몰려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런 순간적 압력변화로 대부분의 승객은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기체는 화염에 휩싸여 동강난 채 떨어지고 기체에 있던 물건과 사람들은 섭씨 영하 50∼60도의 高空으로 흩뿌려졌을 것이다. 버마 서해안에서 발견된 구명보트 등 KAL기의 잔해들은 엄청난 압력을 받은 흔적들을 보여주었다. 구명보트에 실린 공기압축 펌프의 고무 손잡이는 그슬려 있었고 강철 피스톤은 40도쯤 휘어져 있었다. 이런 압력과 고열을 115명의 인간들은 그 연약한 육체로써 감당하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산화해 버린 것이었다.
그 주검들 가운데 한 사람인 고 이사성(李師成)씨(당시 39세·대우개발 차장)의 친구들은 1988년 7월에 추모문집을 냈다. 李씨와 미망인 徐貞玉씨 사이에 오고간 편지와 친구들의 글들로 꾸며진 이 책의 제목은 「옥가락지 둥글 듯이」. 「옥가락지 둥글듯이/옥가락지 둥글듯이/우리 사랑 끝이 없어라」로 시작되는 부인 徐씨의 추모시에서 딴 제목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올 것만 같고, 새벽의 늦은 귀가처럼 선뜻 내 옆자리에서 날 안아줄 것만 같은 무수한 착각 속에 일어나 앉아보면, 사진만이 나의 눈물 맺힌 동공 속에 클로즈업되어…」 「사(師)야! 이 아비 불유부덕(不有不德)하여 부모에게 자식 노릇 못하고, 너희들에게 아비구실 못했으니 좀더 살자니 세상사람 부끄럽고 지하에 가자니 부모님께 죄스러워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허둥대는 것이 오늘의 내 꼴이다. …저 젊디 젊은 김현희(金賢姬)가 아무리 양심적 고백을 한들 전세계의 여론이 물끓듯 북괴를 규탄한들 우리들의 크나큰 슬픔에 무슨 손익이 있겠나?」

인간의 악마성과 분단의 비극

이 추모문집을 만드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은 李씨와 고등학교(부산고교) 대학교(서울법대) 동창이었던 安京煥교수(당시 서울법대 교수)였다. 安교수로부터 이 책을 전달받아 읽어가면서 기자는 처음으로 KAL 858사건의 비극을 실감할 수 있었다. 찢기고 그슬린 시체들이 발견되었다면 더욱 절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을 터인데, 시체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아 아직도 어느 유족은 『밤중에 전화벨이 울리면 금방이라도 딸이 「아빠. 저에요」할 것 같아 얼른 전화기를 든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유족은 KAL기가 버마 정글 속에 동체 착륙하여, 자신의 남편이 어느 부족의 포로가 돼 있을 것이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KAL 858기 폭파사건의 비극성이 제대로 실감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것이 정치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건이 난 날은 대통령선거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7년 11월29일이었다. 이날 여의도에선 金大中 후보가 대규모 집회를 가졌었다. KAL 858사건은 신문 지면과 텔fp비전 화면에서 이 대군중의 열기를 냉각시켰고 민정당 盧泰愚 후보를 유리하게 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 교체를 바라던 약60%의 한국인에게는 KAK기 사건이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지기도 했었다. 1988년 1월15일 金賢姬라는 아리따운 처녀가 범인으로 등장하자 이번에는 金의 미모가 시중의 화제로 올랐고 『살려야 한다』 『죽여야 한다』는 논쟁 속에서 이 사건의 본질은 또다시 왜곡되고 말았다. 더구나 북한측이 金賢姬를 한국공안기관이 조작한 범인이라고 일대 선전전을 전개하고 북한 선전 자료를 그대로 베낀 문서가 국내에 돌아다니면서 이 사건의 본질은 또 한번 흐려지게 되었다. 진실은 정치나 선전의 도마 위에 올라갈 때 해체돼 버리는 것이다.
KAL기 사건에 신경이 무디어진 기자에게 「옥가락지 둥글듯이」는 충격이었다. 이 세상보다도 무겁다는 생명이 115명분이나 처참하게 사라졌다는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고 그 범인이 동족이며. 죽은 이들은 異域萬里에서 몇 년간 고생한 끝에 드디어 그리운 가정으로 돌아가던 노동자였다는 것, 그 유족들 중 일부는 金賢姬를 조작된 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 이런 사실들은 인간의 악마성과 분단의 비극을 다같이 보여주고 있다. 金賢姬는 115명의 생명을 허공에서 날려버리기로 결심을 했을 때의 상황을 안기부 수사관과 1심 재판부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었다.

『바그다드 출발 KAL기에 올라 김승일이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폭약이 들어 있는 비닐쇼핑 백을 좌석 위 선반에 올려놓는 것을 보고 사업결과 총화시 보고할 목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탑승객은 100여명 정도 되는데 거의가 중동근로자들로서, 중동에서 일하기가 힘들다면서 소속 회사에 대한 불만을 많이 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귀국하는 것이 좋은지 즐거워 하다가 機內食이 끝난 뒤에는 거의가 잠에 들었습니다. 아부다비에 도착하여 내릴 때, 이 근로자들이 죽을 것을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양심의 가책이 왔습니다만 김일성이 지시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마음먹고 내렸습니다』

연구대상

양심이 마비된 이러한 인간폭탄 金賢姬는 연구대상이다. 이 金賢姬를 취재함에 있어서 기자가 다음과 같을 전제를 밝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金賢姬는 과연 범인인가?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를 쓴 의심 많은 기자의 눈에도 金賢姬는 확실한 범인으로 비친다. 북한측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하는 일은 정부의 일로 돌려놓자. 간단하게 북한측 선전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북한의 방송·신문은 지금까지 한번도 북한 사람들에게 金賢姬란 이름과 그 가족상황 및 학교관계를 알린 일이 없다. 金賢姬를 마유미라고 계속 부르고 있다. 북한의 중앙조선통신사는 1988년 1월15일자 성명에서 「마유미라는 여자를 우리와 관련시키기 위하여 학력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으나 그가 다녔다는 평양의 인민학교나 중학교 대학에는 그런 학력을 가진 여학생이 없으며. 그가 특수훈련을 받았다는 그런 이름을 가진 대학이나 양성소도 없다」고 주장했다.
고유명사 대신에 「그런」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인민학교가 아니라 「평양시 서성구역 하신동 소재 하신인민학교」라고, 그런 대학이 아니라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라고 밝힐 자신이 없는 것이다. 북한 주장대로 金賢姬가 남한에서 조작한 범인이라면 金은 남한사람이 아니면 넓게 잡아서 일본인이나 중국인이어야 한다. 金의 얼굴이 세계의 텔fp비전 화면과 지면을 뒤덮은 지 1년이 지나도록 『그 아이와 같이 지냈다』 『그 아이는 내 딸이다』는 신고는 한 건도 없다. 金賢姬를 26년간 밀폐되고 격리된 공간에서 사육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大明天地에서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북한측이 제기한 의문점은 다 지엽적인 오해의 소지를 확대한 것을 뿐이다. 金賢姬가 바로 이 사건의 가장 중요한 물증 그 자체이다.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마땅할 金賢姬를 살려 놓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된 것도 金이 살아 있어야 KAL858 사건의 진실을 북한에 빼앗기지 않는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이름을 떨칠 운명의 아이

金賢姬는 1962년 1월27일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났다. 아버지 金元錫은 그때 정무원 외교부 지도원이었고 어머니 임명식(55)은 개성 만월 중학교 역사교사를 하다가 결혼한 예절바른 여자였다. 金賢姬는 2남2녀 중 장녀이다. 金賢姬는 어릴 때 사주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에 이름을 떨칠 여자다」는 성명풀이였다. 金씨는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름을 떨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고 푸념한 적이 있다.
金賢姬씨는 자기 성의 본을 모른다. 『무슨 주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는 것으로 봐 경주 金씨인 듯하다. 북한에서는 호적을 없애고 한글 이름만 쓰므로 한자로 표기할 줄 모르는 젊은이가 대다수라고 한다. 金賢姬는 태어난 다음해(1963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 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하바나 시로 가 67년까지 살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 1968년 9월 金은 평양의 하신 인민학교에 들어갔다. 3학년 때 선전영화 「사회주의 조국을 찾은 영수와 영옥」에 아역 배우로 출연하였다. 아버지는 영화배우가 되려는데 반대하였다고 한다.
1972년 8월 金양은 인민학교 4학년을 졸업한 뒤 평양의 중신중학교에 들어갔다. 1학년 때 「딸의 심정」이란 영화에 출연했다. 그 해 11월2일 평양시 근교 헬리콥터장에서 제2차 남북조절위 평양회담에 참석하러 온 한국측 대표단의 李東馥씨에게 꽃다발을 전달하였다. 金양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부모가 남한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친구는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사실에 대해서 진술한 바 있다. 그 친구의 동생이 아버지를 고발했다는 것이다.
1977년 8월 金賢姬는 중신중학교 5학년을 졸업, 김일성 종합대학에 입학, 예과 1년을 수료한 뒤 1978년 9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金은 평양 외국어대학 1년 재학시 같은 과 여학생 4명과 함께 평양근처의 심신탄광에 노력 동원되었다. 坑안에 들어가서는 소변도 바로 옆자리에서 봐야 하고 식사도 坑안에서 해야 했다.
대학생 군사교육은 남녀 전대학생이 대학생활 중 의무적으로 6개월간 교도대에 입대, 현지 군부대에 파견되어 군사이론·실기·붉은 기 쟁취운동 등 군사교육을 이수하여야 한다.
<나는 김일성대 예과 입학 후 다섯달 간 교도대에 입대하여 평양시 용성구역 중이리 소재 85mm 고사포 부대의 지휘소대 정찰분대에 배치되어 방공 정찰 훈련을 받았다. 교도대 이수 대학생에게는 소위자격을 준다. 대학생들은 『평양 하늘은 대학생들이 보위한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사전이 희귀하여 나의 경우 초대소 생활시 한일사전·한영사전은 남한에서 출판된 것을 사용하였고, 타자기는 87년 노동신문에서 한글타자기가 생산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으나 한글타자기를 직접 보았거나 사용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공작원으로 소환되다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1980년 3월 金양은 3차의 면접시험을 거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된다. 金賢姬는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심청이를 보내는 심정이다』고 푸념하던 기억을 갖고 있다. 4월8일에 그는 묘향산 골짜기 2지구 2호 초대소에 밀봉 수용되었다. 김숙희(본명 김순애 · 당시 26세)란 여자공작원과 한 조가 돼 금성정치군사대학 공작원 속성 정보반에 입학했다. 金賢姬는 이때부터 김옥화라는 가명을 쓰게 되었다. 金賢姬는 1987년 12월23일에 서울 안기부 조사실에서 자백을 시작할 때까지 약8년간 그의 본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金양은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1981년 4월17일까지 기초적인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정치사상학습(주로 김일성 사상 공부), 실무학습(사격, 지형학, 행군, 수영 등), 영화를 통한 세뇌교육을 받았다.
金양은 1년 과정을 마친 뒤부터는 남한실정교육, 일본인화 교육, 해외실습, 중국인화 교육, 유럽·중국·마카오 현지 실습 등 단계적으로 전문화 교육을 받아 나간다. 모여서 교육받는 것이 아니라 혼자이거나 두 사람이 한 조가 돼 마치 여러 가정교사들로부터 집중지도를 받는 방식이었다.
남한화 교육(1981·4·17∼7·4) : 金양은 김숙희와 함께 평양시 용성구역 임원동 소재 동북리 9호 초대소에서 남한실정에 대한 교육 및 일본어 자습 등을 받았다. 교재로는 동아일보와 일본소학교 1∼ 6학년 국어교과서가 쓰였다. 동아일보는 원형 그대로가 아니고 재편집한 것이었다. 광고란을 빼고 주로 사회면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지면이었다고 한다.
일본인화 교육(1981·7·4∼1983·3) : 동북리 2층3호 초대소에서 金양은 혼자 밀봉교육을 받는다. 김숙회와는 헤어진다. 여기서 金賢姬는 일본인 교사를 만나게 된다. 「리은혜」로 불리는 일본여자였다. 金賢姬는 32세 가량의 리은혜와 약 2년간 함께 기거하면서 일본어·일본풍습 등을 익히는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 교육규율은 ①모든 일상생활 용어는 일본어만을 사용한다 ②오전 중에는 리은혜가 작성한 강의 안에 따라 설명을 듣고 오후에는 복습하며 일본의 신문·잡지를 읽고 일본 라디오방송을 듣는다 ③매주, 매월에 필기시험 ④일본 영화와 텔fp비젼 프로를 비디오나 공작원 전용영화관을 통해서 관람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육의 목적은 金賢姬를 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金은 일본 노래도 배우고, 일본식 손님 접대법과 예절을 익힌다. 이런 머리로서의 교육은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실제생활과 동떨어진 격리공간에서 아무리 일본 공부를 해도 체험과 연결되지 않아 「아는 지식」에 머물렀지 「실천할 수 있는 행동양식」으로는 굳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교재로 쓰는 일본잡지도 동아일보처럼 재편집된 것이었다. 난잡한 기사나 나체사진들을 오려낸 것이었다. 金日成은 이른바 교시라는 것을 통해서 『공작원에 대한 교육은 철저하게 적구화(敵區化)돼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교육담당자들은 눈치를 봐서인지 공작원들에 대해서도 남한이나 자본주의국가의 사정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왜곡된 정보로 교육받은 공작원들은 실제로 그 나라에 가 보면 배운 것과는 너무 다른 데 놀라고, 배운 것을 써먹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金賢姬씨도 안기부에서 신문을 받으면서 북쪽의 형식주의적 교육이 효과가 없음을 비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리은혜 미스터리

金賢姬는 리은혜에 대한 기억을 상세히 진술하였다. 일본 경찰은 수사팀을 한국에 보내 金을 몇 차례 만나게 하여 리은혜가 납치된 일본여자라는 심증을 굳혔다. 일본 경찰은 우리 당국이 그려준 리은혜의 몽타즈로써 전단을 몇백만 장 만들어 전국에 뿌렸다. 리은혜는 북한에서 지어준 가명이고 일본에서의 본명은 알 수 없었다. 金양에 따르면 리은혜는 1989년 현재 32세 가량인데 도쿄출신의 이혼녀로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와 공작원 교육기관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키 165cm, 몸무게 56kg가량인 리은혜는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따르는 데 익숙해 있어 일본에서 그런 업소에 종사한 경험이 있지 않나 추정되었다.
金賢姬가 기억하는 리은혜의 행동 양식은 전형적인 일본여성의 그것이다. 예컨대 밥은 공기를 들고 젓가락만을 사용하여 먹고, 『조선사람은 食後에 입가심을 한 물을 마신다』고 흉을 보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어릴 때 조선 여자아이가 입고 다니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그런 것은 조선여자가 입는 것인데…』 하면서 화를 내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는 것이다. 리은혜는 1982년 2월의 어느 날 취중에 이런 푸념도 하더라는 것이다.
『김정일 동지의 생일(2월16일) 만찬에 일본인 여자로서 특별히 초대되어 갔었다. 나처럼 납치돼 온 것 같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이 사실은 절대로 알려선 안 된다』
리은혜는 술에 취하면 멍하니 앉아서 끌려 온 신세타령을 하며 자식들이 보고 싶고 일본에 가고 싶다면서 울기를 잘 했다고도 한다. 1991년, 金賢姬가 진술한 리은혜는 일본 경찰의 조사와 김현희의 사진 확인에 의하여 다구치 야에코로 밝혀졌다. 2002년 김정일은 방북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북한이 다구치 야에코를 납치했다고 고백하였다. 북한은 다구치가 죽었다고 발표하였으나 일본측과 김현희는 믿지 않는다. 金賢姬가 살아남아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례에 대하여 증언한 것은, 일본에서 납치자 구조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1985년 6월에 안기부가 붙든 북한 공작원 辛光洙는 1980년 6월에 조총련 실업인이 경영하는 중국 음식점의 독신 요리사 하라타다아키(당시 49세)를 미야자키 해안으로 유인, 북한공작원과 함께 납치, 자루에 넣어 船便으로 북한으로 싣고 갔었다고 자백했었다. 辛은 하라 타다아키의 이름으로 위조여권을 만들어 일본 안에서 하라타다아키 행세를 하면서 간첩활동을 했었다. 2002년 북한정권은 다구치 야에코가 이 하라 타다아키와 결혼하여 살았는데, 하라가 病死한 직후 다구치도 교통사고로 잇따라 죽었다고 믿기지 않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노동당에 입당하다

일본인화 교육을 받고 있던 1982년 3월 중순부터 약40일간 金賢姬는 동북리 2층3호 초대소에서 동북리 10호 초대소로 옮겨, 수용된다. 왜 갑자기 숙소를 옮겼는가. 안기부는 북한 공작원 辛光洙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그가 1982년 3월에 일단 북한으로 소환돼 평양의 동북리 초대소에서 3개월간 사상무장 재교육을 받았다는 진술을 받았다. 辛이 이때 머문 초대소는 金賢姬가 밀봉교육을 받고 있던 동북리 2층3호 초대소였다. 즉, 金賢姬는 辛에게 자기 방을 빌어주고 잠시 숙소를 옮긴 것이었다. 金과 辛의 진술이 일치한 것은 金賢姬가 진술한 내용이 아주 정확하며 金의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1982년 4월13일 金賢姬는 노동당에 입당한다. 이때의 선서문을 金賢姬는 기억을 되살려 안기부 신문관에게 정확히 진술하였다.
「경애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의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손수 창건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향도 발전시키는 조선노동당에 당원으로 입당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높은 긍지를 가지고 당과 수령님을 위해 생명을 다 바쳐 당의 명예를 지키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합니다」
입단보증인은 담당과장 오세영, 지도원 리명길로 돼 있었다고 한다. 입당한 지 이틀 뒤인 4월15일에 金賢姬는 리명길 지도원의 리드에 의해 학습실 벽에 붙어 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향해 선서식을 가졌다. 이 선서문의 내용도 金賢姬는 안기부의 신문 때 정확히 기억하였고, 1심 재판 때도 또박또박 진술했었다. 이 선서문은 노동당원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므로 소개한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 끝없이 충성을 다하는 『김일성 주의자』 『주체형의 공산주의 혁명가』가 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엄숙히 선서합니다.
첫째.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높이 우러러 모시고 따르며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사상과 교시 방침을 신조화 하겠다.
둘째,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말씀을 곧 법으로서, 지상의 명령으로 여기고 무조건 관철하겠다.
셋째,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보장하고 그를 훼손시키는 현상을 반대하여 투쟁하겠다.
네째, 우리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공산주의 혁명정신을 가지고 서로 돕고 이끌면서 집단주의 정신을 배양하겠다.
다섯째, 우리는 노동에 성실히 참여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혁명적 조직생활에 성실히 참가하겠다.
여섯째. 우리는 당의 유일적 지도체제를 철저히 확립하여 全黨·全民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강철 같은 규율을 확립하겠다.
일곱째,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고매한 공산주의 도덕품성을 따라 배워 언제나 겸손하고 소박하며 가장 높은 인간성을 지닌 공산주의자가 되겠다.
여덟째, 우리는 당의 유일 사상체계와 어긋나는 온갖 反黨-反혁명적 요소들을 반대하여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겠다.
아홉째, 우리는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 부분에 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교시와 말씀을 높이 받들고, 수령님의 사상과 이론으로 조국을 통일하는 길에서는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라는 혁명적 신념을 가지고 생명을 다 바쳐 끝까지 투쟁하겠다. 열째,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김일성주의화를 위하여 전세계 혁명적인 인민들과 피압박 인민들을 비롯한 혁명적 역량을 굳게 묶어 세워 지구상에서 제국주의 지배주의를 반대해서 견결히 투쟁하겠다」

金勝一의 등장

공작원 실무교육 : ( 1983·3∼1984·7) 1983년 3월 중순에 金賢姬는 리은혜와 헤어진다. 金양은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동 소재 용성40호 초대소로 옮겨 밀봉 수용된다. 이모(50세 가량) 지도원의 지도에 따라 간첩 실무교육을 받는다. 첩보영화나 첩보소설들을 많이 보고 읽었다. 미국영화 「나바론 요새」도 한 교재였다. 간첩들이 사용하는 A-2통신법, 산악 행군, 격술, 수영 등의 훈련도 받았다. 이런 교육기간에서도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金日成 사상 주입이었다. 세뇌관광은 金日成 생가, 金正日의 야영지 등 우상화 코스였다.
해외실습 : (1984·8∼10월) 84년7월 초순 金賢姬는 교육을 받은 지 5년만에 처음으로 실제 임무를 받는다. 金勝一 이란 70세 가량의 노인과 한 조가 돼 해외여행과 남한침투 실습을 하게 됐었다. 이 여행에서 金賢姬와 金勝一 은 일본부녀로 행세하였다. 金勝一은 하치야 신이찌, 金賢姬는 하치야 마유미였다.
1984년 8월15일 두 위장 일본인 부녀 관광객은 장(張)지도원과 함께 평양 순안 비행장을 출발하였다. 이 3명은 모스크바→부다페스트(헝가리)→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여행하였다. 오스트리아에 입국할 때까지는 북한의 公務여권을 사용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이 공무여권을 張모 지도원에게 반납하고 신이치와 마유미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받았다. 이 위조여권은 자본주의국가를 여행할 때 쓰도록 돼 있었다.
세 사람은 빈→코펜하겐→프랑크푸르트까지 여행하였다. 여기서 인솔자인 張 지도원은 마카오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두 사람과 헤어졌다. 金勝一, 金賢姬 두 사랑은 취리히→제네바→파리까지 여행하였다. 金勝一은 이미 여러 차례의 해외여행 경험이 있었다. 그는 앞으로 국제여자공작원이 될 金賢姬를 데리고 다니며 자본주의 사회와 생활을 견학시켰다. 두 사람은 9월 20일 파리의 드골공항에서 헤어졌다. 金勝一은 서울로 갔고, 金賢姬는 방콕→흥콩→마카오로 갔다. 金勝一은 일본에서 바로 서울로 들어가면 김포공항에서 검색·검문이 엄할 것으로 판단하고, 유럽관광여행 끝에 歸路에 서울에 들른 일본관광객으로 행세, 공항의 엄격한 검색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張지도원과 金勝一, 金賢姬 세 사람은 9월26일에 마카오에서 합류한다. 이때 金勝一은 서울에 잠입했던 결과를 차중에서 張 지도원에게 보고하였다. 이를 옆에서 들었던 金賢姬는 나중에 안기부의 신문을 받으면서 그 내용을 진술하였다. 이것을 실마리로 잡고 보강수사를 벌인 안기부 수사단은 金勝一의 한국내 행적을 이렇게 밝혀냈다.
<金勝一은 드골공항에서 9월20일 오후2시15분발 대한항공 906편을 타고 21일 오후 4시10분에 김포공항에 내렸다. 그는 서울 중구 을지로 1가 프레지던트 호텔 2502호실에 하치야 신이치의 이름으로 투숙하였음이 숙박부에서 밝혀졌다. 이 호텔에서 1박한 뒤 金의 행방은 묘연하다가 9월26일 오전11시에 홍콩행 태국항공기 (CX 421)편으로 출국하였음이 출입국관리기록으로 확인되었다. 그 사이 6일간 무엇을 했는지는 金勝一 이 마카오에 돌아와 張 지도원에게 보고한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서울로 만나러 갔던 대상자는 서울에 살면서 대구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그곳에 찾아갔으나,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안되어 접선하지 못하고 그대로 왔습니다. 9월24일 대구에 내려갔을 때 마침 그날 우리 공작원 한 사람이 대구의 미장원에서 자살한 사건이 터져 대구일원에 드나드는 사람과 모든 차량을 일일이 검문하는 바람에 혼이 났었습니다』>

『정을 뗄 때가 왔다』

金勝一과 金賢姬는 마카오에서 중국 광주로 넘어갔다. 이때는 다시 북한의 공무여권을 사용하였다. 광주→북경→평양으로 복귀하였다. 金勝一, 金賢姬는 이 해외여행의 비용으로 3만3000 달러를 썼었다. 두 사람은 상관들에게 줄 선물로서 양복지 네 벌, 여자 옷감 네 벌, 파카 만년필 3개, 가스라이터 10개, 볼펜 10갑을 샀다고 한다. 10월2일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마중 나온 崔 과장은 金賢姬에게 『자본주의 국가에서 보고들은 것들 중 좋은 이야기를 하면 곤란해진다』고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金賢姬는 총화보고서에서 「평소 교육받은 대로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돈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라는 인식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었다」고 썼다. 金賢姬는 金勝一과 함께 1985년 연말까지 동북리 2층2호 초대소에서 해외여행 실습과정에서 해이된 사상을 재무장하기 위한 정치사상 학습을 받았다. 金賢姬는 1985년 1월 평양시 문수구역 문수동 65반 무역부 아파트 7층1호의 집으로 휴가를 가 가족과 함께 이틀을 보냈다. 金은 8년간의 교육 기간중 네 번의 짧은 휴가를 얻었을 뿐이다.
중국인화 교육 : (1985·1∼6 월 중순) 용성 5호 초대소에 밀봉수용 된 金賢姬는 헤어졌던 김숙희와 다시 「배합되어」 중국어담당 교원 표모(63세)의 지도로 중국어와 중국의 문화·풍습을 배웠다.
중국실습 : (1985·7∼86·8월) 중국의 광주에 주재하는 공작지도원 박창해(47세)의 아파트로 보내어진 金賢姬와 김숙희는 현지실습교육을 받으면서 북경어뿐 아니라 광동어도 배웠다. 두 사람은 삼촌 집에 놀러온 조카의 행세를 하였다. 金賢姬, 김숙희는 평양중앙방송을 통해서 발신되는 간첩과의 연락방송을 듣고, 암호를 해독하는 실습도 하였다. 광주생활 중 두 북한 처녀는 어느 식당에 들른 적이 있었다. 종업원이 처음에는 남한에서 온 사람으로 알아보고 친절하게 대하더란 것이다. 나중에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니까 그 종업원은 갑자기 냉랭한 표정이 되어 선불을 요구하여 말다툼까지 벌였다는 것이다.
마카오 실습 : (1986·8∼87·1월) 金賢姬와 김숙희는 광주에서 마카오로 건너가 명주대 아파트 1동3층A호실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공작비로 4000 달러를 받았다. 여권은 金賢姬가 하치야 마유미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김숙희는 다카하시 게이코란 이름의 위조여권을 이용했다. 두 사람은 마카오와 홍콩당국이 쓰는 입 출국고무도장을 위조한 것을 지급받았다. 마카오에서 두 사람은 평양 중앙방송을 통한 지령수신 및 암호 해독법을 실습하였고, 미용실·은행·영화관·택시·환전소 등등 자본주의 편의시설의 이용법을 익혔다고 한다.
재무장교육 : (1987·2∼9월) 87년 1월에 평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용성43호 공작원 초대소에서 사상재무장 교육을 받았다. 이해 金日成 생일(4월15일)을 맞아 金賢姬는 집으로 휴가를 갔다. 金은 휴가 중 신혼생활중인 대학교 동창생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는 김책공대를 졸업한 남자와 결혼, 다른 신혼부부와 한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방 가운데 커튼 같은 것으로 칸막이를 해놓고 있더라는 것이다. 친구는 『부엌을 먼저 쓰려고 저 집과 다투기도 한다』면서 『차라리 이혼하고 싶다」고 불평하였다. 金賢姬는 『나는 시집 안 갈래…』라고 했다는 것이다.
金賢姬 가족이 살았던 방은 아파트 7층의 1호실이었다. 방 두 개에 화장실이 붙은 13평짜리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였다. 아침 점심 저녁 전후에 2∼3시간씩 제한급수를 받았다. 평양의 외곽지역에서는 1일에 3∼5시간씩 송전이 중단된다고 한다.

이틀 쉬고 金賢姬가 초대소로 돌아오는데 지도원이 데리러 왔다. 마침 그때 金의 아버지 金원석은 앙골라 주재 북한 대사관의 수산대표로 일하던 중 일시 휴가를 얻어 귀국해 있는 중이었다. 金원석은 술에 취한 채 지도원을 붙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우리 딸을 언제 돌려보내 주려고 합니까. 언제나 결혼을 시킬 수 있을 까요』 金賢姬가 초대소로 돌아갈 때 아버지한테 인사를 드려도 아버지는 외면하는 것이었다. 초대소로 돌아온 金양은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초대소 식모에게 눈감아 달라고 부탁한 뒤 몰래 외출하여 (이것을 「자유주의」라고 한다) 다시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이미 앙골라로 귀임한 뒤였다. 金양은 어머니에게 따져 물었더니 어머니는 『이제 너와의 정을 떼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 그러신 것이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그 몇 달 뒤 金賢姬의 남동생(13세)이 피부암으로 죽었다. 金양은 뒤에 소식만 들었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마카오로 가라!

마카오 파견 : (1987·9∼10) 1987년 9월20일 金賢姬, 金숙희 두 사람에게 중요한 지시가 떨어졌다. 李모 지도원은 이렇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최근 마카오 이민국에서는 대륙에서 밀입국한 난민들에게 곧 신분증(영주증)을 발급해줄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다. 동무들은 마카오 신분증을 얻기 위해 광주로 내려가 대기하도록 한다. 마카오 신분증에는 중국인으로 등록해야 하므로 각자 사용할 가명과 신원을 알려주겠다. 옥화(김현희) 동무는 우잉(吳英)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한다. 우잉은 현존하는 사람인데 오상시에 살고 있고 나이는 29세이며. 흑룡강성 오상현 오상시 성진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축공사에서 당서기로 일하다가 문화혁명시기에 반동분자로 몰려 끌려 다니다가 풀려났는데 우잉이 5세 되던 해 강에 투신자살하였다… 이렇게 알고 구체적인 성장 과정과 학·경력 등을 구상하여 제출하라』
이때 구상한 시나리오는 金이 폭파 사건 뒤 바레인과 한국에서 조사를 받을 때 거짓진술을 하는 데 이용되었다.
金賢姬와 김숙희는 87년 9월22일 광주에 도착 2년 전에 함께 머물렀던 북한공작원 아지트(아파트)에서 대기에 들어갔다. 북한의 對南 우회공작을 맡고 있는 노동당 對外정보조사부는 두 처녀가 마카오 영주권을 얻어 마카오사람 행세를 함으로써 자유롭게 또 합법적으로 한국을 드나들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장· KAL을 제껴라!

10월 4일 광주의 金賢姬에게 혼자서 즉시 귀환하라는 급한 전갈이 왔다. 金은 북경주재 북한 민항대표 朴모의 주선으로 평양행 특별 화물기 편으로 10월7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급박한 임무가 기다리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7일 저녁 金양은 용성 43호 초대소 학습실에서 자신이 소속된 대외정보 조사부 2과장 한모(54세)를 만난다. 한 과장은 金양을 데리고 다시 동북리 2층2호 초대소로 이동, 金을 인계하였다.
이곳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대외정보 조사부 1과 과장 崔모, 金勝一, 그리고 崔모 지도원이 들어왔다. 崔 과장은 『오늘부터 옥화동무는 다시 김승일 동지와 배 합된다. 임무는 곧 부장동지가 직접 오셔서 말씀해주실 것이다』고 했다. 이때가 밤 8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잠시 후 李모 대외정보 조사부장이 도착하였다. 그의 직급은 남한에 견준다면 국가안전기획부의 해외담당차장 정도이다.
노동당 대외정보 조사부는 납치, 테러, 해외첩보 임무를 맡고 있었다. 북의 당 정보기관으로서는 金正日이 관장하는 연락부, 작전부, 통일 전선부, 대외정보조사부가 있었다. 앞의 3부는 金正日의 관장하에 당의 對南 사업담당비서가 통제하고 對外정보 조사부는 金正日이 직접 통제했다고 한다. 李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金賢姬는 안기부에서 진술한 바 있다.
『이번 동무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는 남조선 비행기를 제끼는 것이다. 남조선 비행기 폭파 목적은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남조선 괴뢰의 두 개 조선 책동과 준동을 막고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임무는 중요하고 어려우며 특히 비밀이 담보되어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완전한 임무수행을 위한 준비사업을 철저히 하라. 이번 임무수행 과정에는 완전한 일본사람으로 위장해야 한다. 옥화 동무는 일본여자로 위장할 수 있도록 일본어 학습에 열중하고 임무수행 중에는 일본인 부자 집 딸처럼 행동하라』

김승일의 문제제기와 침투路 확정

崔과장과 崔지도원, 그리고 金勝一과 金賢姬 네 사람은 10월7일부터 11월12일까지 초대소에 밀봉 수용돼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두 崔씨는 안내, 두 金씨는 공작조였다. 崔과장은 공격목표가 「11월28일 바그다드발 아부다비 경유 서울행 남조선의 대한항공 858기」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金勝一은 이의를 제기했었다고 金賢姬는 기억한다.
『중동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공항의 검문·검색이 심하다』 이런 반론에 대해서 崔과장은 『이것은 金正日 동지의 친필비준이 난 계획이므로 수정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金勝一은 그래도 이의를 제기했다. 崔과장은 『이 비행기에는 남조선 노동자들만 타기 때문에 국제 문제로 비화되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나중에는 李 부장이 와서 『김정일 동지의 지시다』고 논란을 끝내게 했다. 테러단 네 사람이 한 달간의 회의와 토론 끝에 완성한 세부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1987·11월12일 08:30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공화국 공무여권으로 모스크바행 조선 항공기편으로 안내조인 최 과장, 최 지도원, 공작조인 공작조장 김승일, 공작조원 김옥화가 동행, 평양을 출발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모스크바에 도착 후 소련주재 공화국 대사관 초대소에 투숙, 2박3일간 체류하면서 현지 지도원과 협의, 11·14 09:00 모스크바발 부다페스트행 소련 항공기 탑승권을 구입한다.
11·14 09:00 소련 항공기편으로 모스크바를 출발 같은 날 11:00경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여 그 곳 주재 대외정보 조사부 초대소에 투숙, 4박5일간 체류하면서 현지 지도원과 함께 사증 없이 비엔나로 들어가되 이때부터 공작조와 본부 성원인 안내조는 별도 분리 행동 한다. 이때 안내조와 공작조가 헤어지면서 안내조와 공작조와의 연락 조직으로 비엔나, 베오그라드, 부다페스트 주재 공화국 대사관 전화번호를 알려 준다. 전화로 안내조를 찾을 때는 영어나 일본말로 「나카무라상」을 찾는다.
비엔나에서 공작조는 암파크링 호텔에 투숙하고, 안내조는 비엔나 주재 공화국 대사관에 투숙한다. 공작조는 비엔나에서 6박7일간 체류하는 동안 일본 여권을 사용하여 일본인 부녀관광객의 신분에 맞게 관광을 하면서 전투지 침투로 항공권과 복귀로 항공권을 구입한다. 침투로 항공권은 비엔나-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간을 구입하되 바그다드에서 대한항공 858편에 탑승하여 아부다비에서 내리도록 조직한다. 아부다비 바레인간 항공권은 위장항로이고 복귀로 항공권으로는 아부다비-암만-로마행을 별도 구입한다. 침투 및 복귀로 항공권을 구입한 후 비엔나 주재 공화국 대사관에 대기하고 있는 안네조인 최 과장에게 항공권 구입 상황을 전화 보고한다.
11·24 11:00경 오스트리아 항공편으로 비엔나를 출발, 같은 날 14:00경 베오그라드에 도착하여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투숙, 4박5일간 체류한다. 베오그라드에 체류하는 동안 타인으로 하여금 위장신분인 일본인 부녀관광객으로 인식하게끔 자연스럽게 관광하면서 로마에서 비엔나로 복귀하는 항공권을 구입하고,

11·27 19:00 메트로폴리탄 호텔에서 안내조인 최 과장과 최 지도원을 접선하여 대한항공 858기 폭파에 필요한 기재(폭발물)를 전달받는다.
11·28 14:30.경 디지(DG) 항공기편으로 베오그라드를 출발하여 같은 날 20:30경 바그다드 공항에 가서 그곳에서 대한항공 858편으로 갈아타기 위하여 두 시간 가량 대기하는 동안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작동시킨다.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작동조작은 작동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되어 있는 고정 위치에 스위치를 놓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상황이 변동되면 임의로 시간을 조정하여 작동시킨다.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작동은 김승일이 하되 김승일이 작동시킬 수 없을 상황이 생기면 김옥화가 대신한다.
11·28 23:45 바그다드에서 대한항공 858기에 탑승 후 폭파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액체폭약은 좌석 위 선반에 올려놓고 아부다비에서 내릴 때 그냥 두고 내린다. 혹시 내리기 전에 발각되면 내 짐이 아니라고 위장한다.
11·29 02:50 아부다비 공항 도착 후 대한항공 858편에서 내려서 현지를 이탈한다. 이때 폭파가 성공되면 아부다비, 바레인 등에서 수사가 이루어질 것이므로 바레인으로 가지 말고 보세구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같은 날 09:00 아부다비에서 출발하는 이태리 항공편으로 로마로 떠난다.
11·29 오후 로마에 도착하면 적당한 호텔에 투숙하여 2박3일간 부녀관광객으로 위장, 관광을 하면서 휴식하다가,
12·1 11:00 이태리 항공편으로 로마를 출발, 같은 날 21: 00 비엔나에 도착하여 비엔나 주재 공화국 대사관에 대기하고 있는 안내조인 최 과장과 최 지도원에게 전화하여 재합류한 후 최 과장의 지시에 따라 평양으로 복귀한다.

폭파용 시한폭탄은 내부에 폭약이 장치되어 있는 일제 파나소닉(PANASONIC) 에이엠, 에프엠 겸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모델번호 RF-O 82형으로 하고, 폭파시간 조작은 기본적으로 작동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한다. 유사시에는 임의 시간으로 조작하여 필요한 때 폭발하도록 한다. 작동 9시간 후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작방법은 ①폭파용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전면 우측 디지탈 시계 밑에 장치되어 있는 스위치 4개를 왼쪽으로 고정시킨 다음 ②얼람(ALARM) 스위치를 라디오(RADIO)라고 쓰여진 중간지점에 놓으면 작동시간으로부터 9시간 후에 폭발한다.
임의시간에 폭발할 수 있도록 하는 조작 방법은 ①위 폭파용 라디오 전면 우측 디지털 시계 밑에 있는 스위치 4개를 왼쪽으로 고정시킨 다음 ②디지탈 시계 밑 우측 3개의 버튼을 눌러 현재의 시간을 맞추고 ③디지탈 시계 밑 우측에 있는 디스플레이(DISPLAY) 스위치를 우측 끝, 즉 얼람(ALARM)이라고 쓰여진 부분으로 이동 고정시킨 후 ④디지탈 시계 우측 3개의 버튼을 눌러 폭발이 요구되는 시간을 맞추고 ⑤디스플레이 좌측에 있는 얼람(ALARM)스위치를 우측 끝, 즉 쳐프(CHIRP)라고 쓰여진 곳으로 이동, 고정시키면 요구되는 시간에 폭발한다.

“자살로 수령의 위신 지켜라”

金賢姬가 일본인 부자 집 딸로 행세하기 위해 휴대한 소지품은 장신구와 화장품 등 다양하였다. 일제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 리스트를 보면-. 가디간 곤색 쉐터(Racica), 구두(일제), 겨울용 코트(일제), 원피스(검은 벨트), 여자용 손목시계(일제 오리엔트), 인조가죽 손가방(일제), 브러시, 콤팩트(일제), 아이라이너 용액(일제), 립스틱 튜브(일제), 아이라이너 튜브(일제), 작은 연필(빨간색), 로션. 여행용 가방(일제), 생리대(일제) 7점, 콜셋(Double Swallow) 1점, 스타킹 1족. 잠옷(일제 상하) 1벌, 파카 볼펜(일제) 1개, 안경(일제 근시용, 프랑스제 선글라스) 2개, 팬티(일제) 3점, 콤팩트 크림(일제) 1점, 리바이탈 팩(일제) 1점, 파우더 콤팩트(일제) 1점, 아이세도우(일제) 1점, 향수병(초록색) 1병, 향수병(파나마제) 1병, 파우더 콤팩트 및 립스틱 튜브(일제) 1점, 리퀴드 메이크업(프랑스제) 1점, 눈썹올리개(Viny) 1개, 브러시(프랑스제) 1개, 눈썹연필(Vover) 1개, 헤어컬(일제) 1개 등등. 여비는 두 사람 몫으로 1만 달러였다.
11월6일 오후 동북리 초대소 2층2호 응접실에서 崔 지도원은 金勝一과 金賢姬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전투과업 수행 중 우리의 정체가 탄로 나게 될 경우에는 죽음으로써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 담배는 담배와 담배필터 사이에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데 앰플 속에는 액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깨무는 순간 기체화하여 자연적으로 들이마셔져 즉사하게 되어 있으므로 최악의 경우에는 담배를 피우는 척하면서 담배필터 앞쪽을 깨물면 된다.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이 담배 개비는 필터 끝에 담배가루를 붙여 놓았고 담배 갑 뜯긴 쪽에 놓여있으므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독약 앰플이 들어 있는 이 담배 두 갑은 김 선생이 보관했다가 최악의 경우 옥화동무에게도 한 갑을 주시오』
11월10일 저녁 무렵 초대소 응접실에 대외정보 조사부장 李모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폭파 팀 네 명을 불러놓고, 『알다시피 이번 임무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친필비준이 난 것으로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하는 것이다. 이번 일은 88서울올림픽 을 개최하여 두개의 조선을 책동하는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중대한 임무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李부장은 건배를 들면서 이들을 격려하였다. 11월12일 아침 6시30분경. 동북리 초대소 2층2호 응접실에서는 네 명의 폭파 팀이 선서모임을 갖고 「적후(敵後)로 떠나면서 다진 맹세문」을 낭독하였다. 기억력이 비상한 金賢姬가 진술한 맹세문은 이러했다.
「지금 온 나라가 80년대의 속도로 사회주의 대건설에 들끓고 있고 남조선 혁명이 고조에 이르고 있고 적들의 2개 조선조작 책동이 악랄해지고 있는 조건에서 전투임무를 받고 적후로 떠나면서 우리는 맹세합니다. 우리는 적후에서 생활하는 동안 언제나 당의 신임과 배려를 명심하고 3대 혁명규율을 잘 지키고 서로 돕고 이끌어서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마지막까지 친애하는 지도자 동치의 높은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지켜 싸우겠습니다. 1987·11·12 김승일 김옥화」

얼굴이라도 못 생겼더라면…

金賢姬의 심금을 울린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11월12일 동북리 초대소를 떠날 때 식모 아주머니가 한 푸념이다. 『차라리 얼굴이 못 생기고 공부를 못했더라면 아깝지나 않을텐데…』
이날 오전 8시30분 평양 순안 비행장에서 네 사람은 대외정보 조사부 부부장의 전송을 받으며 북한 여객기에 올랐다. 그날 오후 2시 그들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원래는 여기서 2박3일간 머물면서 계획을 점검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14일의 부다페스트행 여객기는 예약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오늘밤 12시에 출발하는 여객기로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현지 공작원의 조언에 의해 일정이 단축되었다. 이에 대하여 건강이 좋지 않은 金勝一은 『나는 그런 강행군을 못하겠다』고 대사관 내 초대소에서 드러누워 버렸다고 한다. 그 金을 설득하여 떠나기는 했는데 모스크바에서의 일정변경은 金勝一과 金賢姬의 운명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모스크바에서 2박3일간 머물렀다면 중동의 공항사정에 밝은 사람이 와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어, 나중에 아부다비 공항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차질은 예방되었을 것이라고 金賢姬는 생각하고 있다. 金勝一 과 金賢姬는 오스트리아에 들어온 뒤 공무여권을 북한 현지 지도원에게 반납, 신이치와 마유미 명의의 위조여권을 건네받았다. 10월27일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의 메트로폴리탄 호텔에서 崔 과장과 崔 지도원은 라디오 폭탄과 술병으로 위장된 액체 폭약을 金勝一에게 건네주었다.
金勝一은 金賢姬에게 『술병에 든 액체폭약은 이 라디오가 터지면서 함께 폭발하여 위력을 높이는 것이니 늘 같이 두어야 한다. 라디오에 들어 있는 배터리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으므로 잊어버리면 안 된다. 내가 먹고 있는 물약이 든 약주병과 폭약 술병이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 뒤 金賢姬는 라디오와 술병에 든 청색 비닐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역할을 했다. 베오그라드에서 바그다드행 이라크 항공기에 탈 때 이라크 항공기 여자 승무원에 의해 배터리 4개는 분리되었다.

온정주의가 사건 방조

28일 저녁7시경 이라크 항공기가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金賢姬는 배터리 4개를 돌려 받았다. 두 공작원은 바그다드 공항 통과 여객 대합실로 가는 보안 검색대에서 헤어졌다. 여자 검색대에서 여자검색원이 金의 몸수색과 휴대품 검사를 하다가 배터리 4개를 발견했다. 여자 검색원이 『배터리를 가지고는 비행기를 탈 수 없다』면서 4개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이 배터리를 돌려받지 못하면 라디오 폭탄을 터뜨릴 수 없기 때문에 金賢姬는 아주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 金勝一은 먼저 검색을 끝낸 뒤 여자 검색대 앞에서 金賢姬가 통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金賢姬는 쓰레기통에 들어간 배터리 4개를 끄집어내 재빨리 金勝一에게 주었다. 金勝一은 여자 검색원이 보고 있는 앞에서 라디오에 배터리를 끼운 뒤 작동시켜 소리 나는 것을 보여준 뒤 오히려 큰소리로 항의했다.
『이것은 순수한 라디오다. 휴대품 검색이 지나치게 까다롭다』
여자 검색원은 이를 묵인 金勝一이 배터리를 갈고 타도록 내버려두었다.
여자 검색원의 사소한 온정주의가 115명의 목숨과 맞바꾸어진 것이었다. 여자 검색원이 원칙대로 했다면 대체 불가능한 배터리를 달리 구하지 못해 858기 폭파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金賢姬는 라디오와 술병이 든 쇼핑백을 아예 金勝一에게 건네주었다. 金勝一은 쇼핑백을 들고 2차 검색대도 통과하였다. 그는 출국장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KAL 858편이 출발하기 20분 전인 28일 밤 11시5분경에 9시간 뒤에 폭발하도륵 시한장치를 조작하였다. 밤 11시10분쯤 두 사람은 대한항공 858편의 보통석 왼쪽 두 번째 줄 7B(金賢姬), 7C좌석에 자리 잡았다. 金勝一은 쇼핑백을 머리 위 선반에 올려놓았다. 밤 11시27분에 비행기는 바그다드 공항을 출발. 다음날 2시44분에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하였다. 두 사람은 쇼핑백을 선반 위에 둔 채 아부다비에서 내렸다.

아부다비 공항에서 장애물

11월29일 새벽3시 아부다비 공항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날 오전 9시에 로마로 출발하는 이탈리아 항공기로 갈아타기 위해 통과여객 대합실로 걸어갔다. 출구에서 공항 안내원이 항공권과 여권의 제시를 요구했다. 여기서 金勝一은 망설였던 것 같다. 탈출용으로 별도로 끊어둔 아부다비-암만-로마행 비행기표를 보일 경우, 아부다비가 출발지로 돼 있어 원칙적으로 통과 비자를 받아 일단 아부다비 공항바깥으로 나와 입국형식을 취한 뒤 다시 출국수속을 하여 비행기에 타야 한다.
평양에서 루트를 연구할 때 아부다비에서는 일본인이 통과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통과여객 대합실로 들어간다면서 아부다비까지 오게 된 과정이 명시되지 않은 아부다비-암만-로마행 항공권을 제시하면 의심을 살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타고 온 항공권(비엔나-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행)과 여권을 제시했다. 안내원은 여권과 항공권을 받아 탑승수속을 대신해주고. 바레인행 탑승 카드도 끊어주었다. 두 사람은 통과여객 대합실에서 대기하다가 11월29일 오전 9시에 마음에 내키지도 않은 바레인행 비행기에 올랐다.
두 사람은 수사가 시작될 때 아부다비에서 내린 탑승자가 추적대상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아부다비에서 내린 뒤 종적이 끊기도록 하여 추적을 따돌리려고 아부다비-암만-로마행 항공표를 따로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써먹지 못하고 아부다비-바레인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밟게 되었다. 북한의 폭파 팀은 아부다비의 통과 여객 수속과정을 잘 모르고 도상 연습식 계획을 짰던 것이다. 崔 과장이나 지도원은 아부다비 현장을 답사한 경험도 없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서 3일간 쉬면서 상세한 현지사정을 브리핑 받게 돼 있었으나 서둘러 모스크바를 출발하는 바람에 그것도 되지 않았다. 북한 공작기관의 허술한 국제 감각이 金勝一과 金賢姬의 운명을 결정해 버린 것이다. 두 사람이 로마로 가버렸다면 신원확인에 시간이 걸려 잡을 수 없었을지 모르고 그랬다면 858편 폭파는 영원한 미스터리나 남한 조작극으로 치부되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위조여권 뒤에 북한 간첩

1987년 11월29일에 KAL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상공에서 실종된 이후 안기부의 全조직에는 비상이 걸렸다. 안기부는 처음부터 공중폭파로 보고 정보망을 가동시켰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그 무렵에 여러 번 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수사의 정석대로 아부다비에서 내린 대한항공기 탑승자들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두 일본인의 이름이 떠올랐다. 바레인 입국카드에는 신이치, 마유미라고 적혀 있었다. 안기부에서는 이 표기방법에 주의하게 되었다. 일본인이라면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고 성명을 다 쓰든지, 하치야란 성만 쓰는 게 정상인 데 이름만 쓴 것은 도무지 일본인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바레인과 아부다비의 공관 및 대한항공 지점과 협조하여 두 사람의 여권기재 사항을 파악하여 일본경찰에 조회하였다. 하치야 신이치란 사람은 일본에 살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마유미의 여권번호를 알아보니 그 번호의 사람은 남자였다. 즉 두 여권이 모두 위조로 밝혀진 것이다. 하치야 신이치는 71세의 실존인물이었다. 그의 신원사항이 그대로 위조 여권에 적힌 이유를 일본경찰이 조사하였다. 진짜 신이치는 1983년 8월에 미야모토 아키라(65)라는 사람으로부터 전자사업 확장을 위해 동남아 여행을 같이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신이치는 여권발급에 필요한 서류와 인감을 미야모토에게 제공했다. 미야모토는 신이치의 여권발급을 대행하면서 그 기재사항을 북한에 제공, 金勝一의 위조여권에 써먹은 것이었다.
미야모토 아키라(宮本明)는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이미 한국과 일본의 공안기관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제주출신으로서 본명은 李京雨였다. 4·3폭동에 가담한 뒤 1949년경 일본으로 달아났다. 1964년에 처 양희현(66세)을 비롯한 가족을 북송시켰다. 그는 1970년경 일본에서 고즈미 겐조란 이름으로 활동한 북한 거물간첩 朴모에게 포섭되었다. 1985년 3월 일본경찰은 고즈미 겐조의 下部線인 김석두金錫斗를 간첩혐의로 체포, 조사를 하다가 미야모토 아키라라는 또 다른 하선이 있는 것을 알아내고 그 아지트를 수색, 암호문 등을 적발했다. 이때부터 안기부 對共수사 부서에서도 미야모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미야모토는 제주도에 高明允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위장 등재된 사실도 밝혀냈다. 여권위조의 과정을 추적하던 중 북한간첩 조직이 드러났기 때문에 안기부에선 바레인의 리전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 묵고 있던 신이치와 마유미를 북한 공작원으로 단정하였던 것이다.

독약 앰플을 준비하고

11월30일 밤 9시30분 바레인 주재 한국대사관 서기관 金정기씨(44)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인터컨티넨탈 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신이치가 받았다. 김 서기관은,『방문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金賢姬의 진술에 의하면 金勝一, 즉 신이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는 척하고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하더란 것이다. 金정기 서기관이 들어오자 金勝一은 『내 딸인데 여행중에 피곤해서 누워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金賢姬는 일어나 간단한 목례를 한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金勝一과 金정기 서기관은 영어와 한자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金 서기관은 『선생들이 타고 온 대한항공 858기가 버마 부근에서 추락하여 승객 전원이 사망하였는데. 그 일 때문에 찾아왔다』고 했다. 金 서기관이 돌아가자 金勝一은 『항공기 폭파 수사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니 내일 일찍 떠나면 된다. 걱정 말고 자자』고 했다. 金勝一은 천하태평인지 그냥 옆 침대에서 곯아떨어져 코를 골면서 자더라고 한다. 金賢姬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金勝一이 세상모르고 자는 것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金勝一은 나이 70을 넘은 데다가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시체를 한국으로 가져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한 결과 키 171cm 에 몸무게는 45.95k에 불과했다. 위 수술과 담낭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 특히 위의 거의 전부가 수술로 절제된 것이었다. 이 베테랑 공작원은 약을 갖고 다니며. 그의 마지막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에 金賢姬가 화장을 하고 옷을 다 입어도 金勝一이 일어나지 않아 깨웠다. 金勝一은 독약앰플이 들어 있는 말보로 담배 한 갑을 金賢姬에게 주면서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오전 7시경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30분 뒤 바레인 공항에 도착했다. 로마행 항공권으로 출국수속을 마치고 출국신고 카드를 작성하여 출국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그곳에서 대기중이던 일본대사관 직원(40세 가량)이 여권과 출국신고 카드의 제시를 요구했다.
두 사람은 이에 응하고 대합실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일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레인주재 일본대사관 직원이다. 하치야 마유미의 여권이 위조로 판명되었으며 두 사람은 이대로 계속 여행할 수 없다. 일본 대사관에 가서 일본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레인 경찰관 5명이 나타나 두 사람을 에워쌌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모든 게 끝장이다”

오전 9시쯤 金勝一은 金賢姬에게 귀속 말로 말했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일본에 보내어지면 우리는 이래저래 고생 하다가 죽게 된다. 차라리 여기서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
金賢姬는 『그러면 신호해 주세요』라고 한 뒤 자살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金賢姬는 나중에 이때의 심정을 회고하기를 『김일성 수령님의 지시에 따라 혁명가로 값지게 죽는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자꾸만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레인 경찰관이 휴대품 검사와 몸수색을 받으라고 하면서 공안 사무실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갔다. 검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대합실 의자로 돌아와 경찰관의 감시를 받으면서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기하였다. 金勝一은 세븐스타 담배 한 개비를 건네주었다. 金賢姬는 자신이 흡연자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독약 앰플을 깨물기가 쉽겠다고 판단하여 가방에서 가스 라이터를 꺼내 이 담배개비에 불을 붙여 물었다. 金勝一은 『나는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괜찮지만 젊은 마유미상한테는 정말 미안하다』고 속삭이듯 말했다. 金賢姬는 이것이 자살지시인 줄 알고 행동에 옮기려는 순간 경찰관이 가방을 달라고 했다. 金賢姬는 재빨리 가방 속에서 독약앰플이 든 말보로 담배 갑을 꺼낸 뒤 가방만을 건네주었다.
그 옆에 서서 이를 지켜보던 아람 하산이란 경찰관은 『그 담배도 달라』고 했다. 金賢姬는 독약 앰플이 든 담배 한 개비만을 꺼낸 다음 말보로 담배 갑만 건네주었다. 하산은 다시 『그 담배 개비도 달라』고 했다. 金賢姬는 金勝一의 눈치를 보며 함께 앰플을 깨물 타이밍을 맞추려고 주저하고 있는데 하산은 金賢姬가 쥐고 있던 담배개비마저 빼앗았다. 金賢姬는 반사적으로 경찰관의 손에서 담배개비를 낚아챘다. 담배개비가 반쯤 부러졌다.
金이 독약앰플 부분이 은닉돼 있는 담배토막을 깨무는 순간 하산이 덮쳤다. 완전히 깨물지는 못해 유리 앰플의 끝 부분만 깨어졌다. 청산액체는 기화되면서 金賢姬의 입속으로 들어갔고 金은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이때 무릎을 다쳤다. 金賢姬가 소동을 벌이는 사이에 金勝一 은 앰플을 와작와작 깨물어 담배개비째 삼켜버렸다.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박사는 뒤에 金勝一을 부검하여 기도에 들어있는 담배필터와 독약앰플 파편을 끄집어내었다. 金勝一의 뇌척수에선 6.21ppm, 폐에선 5.0ppm의 청산염류가 검출되었다.
한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테러리스트에게 잡히면 자살하라고 시키는 나라는 세계에서 북한뿐이다. 다른 조직에서는 잡히면 떳떳이 테러의 이유를 밝히도록 하여 선전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데 북한에서는 金日成 부자에게 누가 될까 싶어 자살을 지령하고 있는 것이다』 1983년 4월 대구시내에서 검거된 북한직파 간첩 丁海權은 붙잡힐 때 허리춤에서 독약 앰플을 꺼내 음독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는 이 후유증으로 복역중 사망하였다. 1984년 9월 대구에서 음식점 종업원 2명을 살해한 남파무장 간첩은 옷깃에 숨겨두었던 독약앰플을 꺼내 자살했다.
1985년 2월에 일본인으로 위장했다가 붙들린 辛光洙는 옷깃에 앰플을 숨겨두고 있었다. 金賢姬가 생의 미련을 갖고 있어 金勝一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앰플을 깨무는 척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안기부 수사관들은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먼저 앰플을 깨문 것은 金賢姬였고 분명히 죽으려고 깨문 것인데 경찰관이 덮쳐서 생명을 구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金勝一은 아주 냉정한 프로였다. 앰플을 깨물고도 확실히 죽기 위해 헉하고 들여 마셔 파편이 식도가 아닌 기도로 들어갔던 것이다.

바레인에 자료제시

국가안전기획부의 KAL 858 실종사건 수사담당 과장 韓씨는 두 사람이 음독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음독현장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신이치와 마유미가 사용했다는 독약앰플은 韓 과장 팀에는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2월2일 韓 과장은 한 동료와 함께 바레인 행 비행기에 올랐다. 辛光洙 사건의 자료에는 안기부가 압수한 辛의 소지품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독약앰플도 있었다.
이 자료와 함께 미야모토 아키라에 대한 수사 자료도 같이 가져갔다. 두 사람이 홍콩을 경유 바레인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간으로 새벽이었다. 아침에 바레인 대사관에서 대사가 주재하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韓 과장은 『신이치와 마유미가 북괴공작원이란 증거를 갖고 왔다. 이번 폭파가 저들의 소행임을 입증하면 우리가 피해당사국으로서 신병을 인수하게 된다. 이런 방향으로 일하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측에서는 바레인 당국이 이 사건 처리에 있어서 미묘한 국제관계에 관해 신경을 잔뜩 쓰고 있다고 했다. 한국측과의 접촉은 『대사하고만 만나겠다』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3일 아침에 韓 과장은 대사의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바레인 범죄 수사국 사무실로 갔다. 대사는 수사실무 책임자인 영국인 핸더슨씨를 만나러 들어갔다. 韓 과장은 대사에게『핸더슨씨에게 「한국에서 전문가가 한 분 왔는데. 이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만나보지 않겠느냐」고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韓 과장은 주차장에서 20분쯤 기다렸다.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핸더슨씨는 6∼7명의 참모들을 배석시킨 채 韓 과장을 맞았다. 바레인의 각 부처 장관은 왕족이 맡고 있지만 그 밑의 실무책임자는 영국인들이었다. 60대의 고참 수사관 출신인 핸더슨씨도 그렇게 고용된 영국인이었다. 韓 과장은 가져간 자료를 일일이 제시하면서 마유미와 신이치가 북한공작원임을 설명해 나갔다. 북한의 對南 테러전략과 역사, 붙들린 간첩들이 자살했거나 자살을 기도한 사례와 그때 사용된 도구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자신 있나?

韓 과장은 30여년간 對간첩수사 부문에서 일해온 사람이다. 그는 『북한의 테러에 관한 한 안기부의 對共수사전문가들이 세계 최고의 노우하우를 갖고 있다』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보이기도 했었다. 한 과장은 신이치와 마유미의 여권이 국가기관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핸더슨씨에게 주장했다.
『이 정도의 정교한 위조는 사조직의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 최신 인쇄시설을 갖추어야 하는 등 그 뒤에 굉장한 조직과 전문인력이 있는 그런 위조 여권이다. 더구나 여기에 기재된 내용은 북괴 간첩 미야모토 아키라가 실존 인물인 하치야 신이찌에게 만들어준 여권의 그것과 일치한다』
韓 과장은 『두 사람의 비행기표도 이상하다. 베오그라드에서 로마로 바로 가면 될텐데 왜 복잡한 경로를 거쳐 들어가려 하고 있는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아시아 남쪽을 도는 항로를 잡아야 하는데 왜 거꾸로 돌고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핸더슨씨 측에서는 韓 과장의 설명을 듣기만 하였다.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고 한다. 핸더슨씨는 韓 과장의 설명이 대충 끝나자 『신이치가 담배개비의 독약 앰플을 깨물고 죽었다고 보느냐』고 했다. 韓 과장은 『청산 알약은 먹기가 힘들다』면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한 자살도구의 변천사를 설명한 뒤 신이치가 깨문 담배개비 속 앰플의 성분과 형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핸더슨씨는 『그렇게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韓 과장은 『130퍼센트쯤 확신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라』면서 핸더슨씨는 회의실 같아 보이는 방으로 韓 과장을 데리고 갔다. 탁자 위에는 신이치와 마유미의 소지품들이 놓여 있었다. 韓 과장은 마유미가 깨문 담배개비 속 앰플을 집어들고 『바로 이것이다』고 했다. 핸더슨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다. 신병처리문제를 검토하여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핸더슨씨가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에 넘겨주는 방향으로 건의할 것이라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핸더슨씨는 헤어질 때 韓 과장에게 『당신이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연락하고 오면 만나주겠다』고 했다.

機內에서 흘린 눈물의 뜻

韓 과장이 바레인 당국의 협조를 받아 병상에 있는 金賢姬를 만난 것은 12월6일이었다. 韓 과장은 金의 그런 위장술보다는 손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관상이 한 인간의 역정과 운명을 알려주는 것처럼 손, 특히 여자의 손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엿보게 한다. 金의 손은 결코 평탄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 고운 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칠고 못생긴 손도 아니었다. 단련된 손, 그러나 여자의 부드러움이 그 굳어진 각질 밑에 숨어 있는 듯한 손이었다고 한다. 1987년 12월15일 서울로 실려오는 대한항공 특별기 안에서 金賢姬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金양이 자백을 시작한 뒤 수사관이 그때 흘린 눈물의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남조선 특무들에게 혹독한 신문을 당하고 개돼지 취급을 받은 뒤 죽을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울었습니다. 남조선 특무는 북한간첩을 잡으면 귀와 코를 자르고 눈을 빼는 등 몹쓸 고문을 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공작원으로 뽑혀 젊은 나이에 이렇게 인생을 끝내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공작원으로 선발돼 집을 떠나는 날. 어머님께의 표정도 떠 올랐습니다』
이 단계에선 아직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없었다.
안기부 수사단에선 끌고 온 金양을 신문실로 데리고 와 침대에 눕혔다. 신문실은 서너 짜리 큰 방. 한쪽에 목욕시설과 변기가 있었다. 신문실에는 탁자와 딱딱한 의자, 침대, 그리고 응접용 소파가 놓여 있었다. 창이 없었다. 金이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자 한 수사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편히 쉬도록 해. 울긴 왜 울어…』
金양은 바레인 공항에서 청산가스를 조금 들여 마신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 질 때 무릎을 다쳤었다. 이 상처는 12월15일에 김포에 도착할 때까지 낫지 않았다. 여자 수사관은 이 상처의 통증을 줄여주려고 찜질을 해주었다.
金賢姬는 『찜질을 해주는데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이라 미안하기도 하고 의외로 생각했었다』고 나중에 자신의 심경을 밝혔었다. 金賢姬가 자백을 하게 된 심리적 동기 중에는 수사관들에 대한 고마움과 신뢰감도 큰 몫을 차지했던 것 같다. 金을 다루는 데 있어서 맨 처음의 고민은 自害방지 마스크를 언제 제거하느냐였다. 이 마스크는 어린이들에게 물리는 고무젖꼭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다. 혀를 깨물지 않게 하려면 이것을 물려 입을 벌려놓으면 된다. 숨을 쉴 수 있게끔 구멍도 뚫려 있다. 이것을 떼 내버린 뒤 金이 自害행위를 하면 한국이 온통 고문조작의 누명을 뒤집어쓸 판이었다. 수사진의 입장에서는 『목을 거는 결정』이었다고 한다. 수사단에선 金이 서울에 도착한 그날 이 마스크를 떼버렸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간회복 유도

韓 과장은 金賢姬의 신문을 맡은 수사관들을 불러 이런 지침을 내렸다.
첫째 북한이 이 여자에게 교육한 허구를 타파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유도한다.
둘째, 한국말을 다 알아듣고 있으니 한국의 경제발전, 민주화의 과정, 우리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라. 이 여자가 북한의 교육이 만든 고정관념을 스스로 깨고 저절로 배신감을 갖도록 이끈다.
셋째, 인도적 대우로 일관하자. 우리도 같은 전통과 사고방식을 가진 동족임을 일깨워주자.
넷째, 절대로 윽박질러서는 안 된다. 마유미의 진술이 허위라는 것을 과학적 반증을 대어 반박하라. 안기부 수사단은 신문 팀을 구성할 때 ①북한 공작원과 북한 여자의 생리에 정통한 사람 ②중국어와 사투리 및 지리 풍습에 밝은 사람 ③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으로 혼합 편성하였다.
한 수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보통 간첩은 신문을 시작한 지 3일만 지나면 모든 것을 술술 불게 됩니다. 고문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럴 필요가 있어야지요. 그들은 확신범입니다. 그런 확신을 어찌 고문으로 꺾을 수 있겠습니까. 일시적으로 그를 굴복시킨다 해도 순순히 자백을 하겠습니까. 간첩들을 돌려놓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한국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면 2∼3일이면 사랑이 증오로 바뀌듯 순식간에 돌아서서 북을 욕하기 시작하지요. 북의 선전에 속은 데 따른 배신감과 남쪽의 진상을 확인한 충격으로 단숨에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굴레에서 탈출합니다. 金賢姬가 8일만에 자백한 것은 오래 걸린 겁니다. 여자이니까 그렇지요. 어머니, 아버지 생각에 연연하다가…』
다른 수사관은 金賢姬를 수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 국민과 언론, 그리고 고위 간부들이 잘 참아주었다고 말했다. 수사실무자들을 들볶지 않고 잘 기다려 주었다는 뜻이다. 수사에서는 상관이 아래 사람을 독촉하면 무리를 하게 만들어 수사를 망치는 수가 종종 있다. 상관이 수사현장에 나타나 신문에 간여하는 것도 금물로 돼 있다. 신문담당자들은 겉으로는 넉넉하게 金賢姬를 대했지만 속은 탔다. 그들은 이빨 닦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고 잠은 하루 2∼3시간에 그쳤다. 자백을 받아내는 것보다도 金의 신상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일이 더 괴로웠다고 한다.

漢字 시를 써 중국인 행세

金賢姬의 태도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빨리 죽여달라」는 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식사도 거부하며 눈을 감고 있었다. 1987년 12월18일 식사를 시작한 뒤에도 중국어와 일본어를 써가며 한국인이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한 수사관은 『우리는 마유미가 한국인이란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상관들 중에는 「정말 맞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첫 신문 때 자동 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와 金賢姬에게 주었더니 뜨겁다고 후후 불면서 마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고 했다. 그 이외에도 하체가 발달한 점. 소지품의 하나인 수첩에 적힌 점자 암호 표시, 자신의 침구를 군대식으로 정리하는 습관 등등이 金을 북한 공작원으로 확신하게 하였던 근거였다.
서울에 온 다음날인 12월16일부터 金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신문에 응했다.
『나는 흑룡강성 태생으로서 광주에서 살았다』느니 『86년 7월에 광주에서 마카오로 불법이주, 도박장 종업원으로 생활하던 중 하치야 신이치를 만나 그의 양녀로 입양돼 일본에서 살고 있다』고 사리에 닿지도 않은 거짓말을 계속하였다. 한자로 시를 써 보이며 중국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金賢姬에게 한 수사관이 『11월에 일본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때 일본 수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金은 나카소네라고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다케시타였다. 나리타 공항을 통해 출국했다고 하여 공항의 지리적 상황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일본 승용차의 운전석이 어디냐고 했더니 『왼쪽이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고 있느냐』고 다그쳤다. 金은 『외출을 거의 안 했고 할 때도 다른 사람을 따라서 땅만 보고 다녔다』고 변명하는 것이었다.
金은 일본에는 1년밖에 있지 않았다면서도 일본어를 곧잘 했다. 중국에는 20여년간 살았다면서 중국어 실력은 별로 좋지 않았다. 金은 흑룡강성에 태어나 그곳에서 오래 살았다면서 말은 북경어를 하는 것이었다. 金은 중국에서 호떡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호떡은 중국의 상류층에서나 가끔 먹을 수 있는데, 하류층 생활을 했다는 金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한 수사관이 이렇게 물었다.

『일본에서 텔리비전을 많이 보았을 텐데 그 상표가 뭐였지요』 金은 무심코 『쯔즈지』라고 했다. 쯔즈지는 진달래를 뜻하는 일본어인데 북한에서 생산하고 있는 수상기 상표가 쯔즈지였다. 어이없는 답변도 일단은 받아두고 『쯔즈지가 무슨 뜻인데?』하는 식으로 꼬치꼬치 캐물어 허위의 구조가 저절로 밝혀지게끔 파고들었다. 그러면 金은 몸이 아프다면서 드러눕기도 했다.

화려한 외출 직후 자백 시작

12월22일 저녁 6시 무렵에 수사관들은 金賢姬를 승용차 뒷좌석 가운데에 태워 외출을 나왔다. 광화문, 롯데호텔, 시청 앞을 지나 남산에 올라 연말의 부산한 서울야경을 내려다 보게 했다. 수사관들이 차중에서 소감을 물었더니 金은 중국어와 일본어로 『건물이 밝습니다』고 했다. 金賢姬는 자백을 시작한 뒤에는 더 구체적으로 소감을 피력하였다.
『그때는 건물보다는 행인들, 특히 여자들의 옷차림과 화장술 및 인상을 더 유심히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한결 같이 고급스럽고 세련된 복장이었으며, 명랑한 표정이더군요. 어린이들은 포동포동 살이 쪄 있고…. 저는 유럽에 가서는 그들이 우리보다 잘 살아도, 우리는 분단국가이니까 하면서 자위했었습니다. 남한사람들은 유럽 사람들보다도 더 잘 사는 것 같아 자랑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조선 인민의 반은 기아선상에 있다는 북한에서의 이야기가 완전한 허위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金賢姬가 한국말을 하면서 자백을 시작한 것은 서울야경을 본 다음날인 12월23일 오후 5시경부터였다. 그때의 신문은 응접용 소파에 金을 앉혀놓고 잡담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날의 서울구경으로 심경변화가 급속하게 진행중임을 눈치 챈 수사관들은 金에게 은근히 결단을 재촉하는 말을 툭툭 던지고 있었다. 金은 『내일 아침에 말씀 드릴께요』라고 했다.
『결단은 빨리 내릴수록 좋단다』
『이름만이라도 한번 들어볼까?』
金은 아주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끊어가며 얘기하였다.
『金…賢…姬…』

『언니, 미안해』

金은 그 말을 한 뒤 입을 손으로 가리고 다리를 꼬면서 부끄러워하였다. 공작원으로 선발된 지 8년만에 처음으로 본명을 말하니까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고 뒤에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 대해 한 수사관은 이렇게 받아주었다고 한다.
『너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인간회복을 한 거야』
수사관이 『어디서 살았느냐?』고 물었다. 金은 『평양에서 살았습니다』고 대답했다. 생년월일, 직업 등 구체적인 신원관계를 캐묻고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여자수사관이 방으로 들어왔다.
『저 애가 이제 한국말 하네?』
金賢姬는 부끄러워하는 몸짓을 하면서 여자수사관의 팔뚝을 툭 치며 말했다.
『언니, 미안해』
한 번 말문을 열자 金은 모든 것을 쏟아놓고 싶은 욕망에서 안달을 하기 시작했다. 수사관은 오히려 느긋하게 나왔다.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하자』고 여유를 보였다. 그러면서 타일렀다고 한다.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하였다. 이 결심을 변치 말고 정직하게 진술해주기를 바란다』
저녁식사 후 잡담 중에 金이 습관적으로 일본어를 쓰니까 수사관이 이를 꼬집었다. 金賢姬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비틀었다. 金賢姬는 자백을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거짓말도 한계에 이르렀고, 북에서 교육받은 남한의 사정이 모두 엉터리임을 깨달았으며, 남쪽 사람들도 동족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수사관들이 진실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金賢姬가 자백을 시작한 뒤 한 수사관이 꿈 이야기를 했다.
『며칠 전 꿈에서 내가 재떨이를 던져 동료를 죽게 했다. 회사 뒤의 숲 속에 파묻었는데, 이 사실을 숨기느라고 꿈속에서 무진 고심을 했다. 다른 동료가 죽은 친구를 들먹이면서, 「왜 그 친구가 나오지 않지. 자네가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으니 알 것이 아닌가」하고 추궁하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거짓말로써 위기를 모면하려고 진땀을 흘리는데 옆에 있던 아내가 흔들어 깨웠다.
깨고 나서도 꿈속인지 아닌지 한 참 어리둥절해 있었다. 꿈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얼마나 행복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金賢姬는 『거짓 진술을 한 8일간은 제가 꼭 그런 심정이었습니다』고 실토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는 나이고 이 세상은 나와는 별개로서 돌아가고 있다는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수사관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으며. 그들이 웃고 하는 것이 저와는 아무상관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됩디다』
자백을 시작한 뒤 金은 얼굴이 밝아지고 행동도 조선인으로 돌아갔다. 『종이 태운 것 아니냐』고 능청을 떨었던 김도 먹고, 『냄새 난다』면서 손을 휘휘 내저었던 마늘과 김치도 즐기기 시작했다.

자백 뒤에도 金日成 옹호

金賢姬는 거짓 진술을 하면서 버티는 가운데에도 수사관들의 거동을 분석적으로 관찰했었다고 한다. 金양이 서울로 붙들려온 다음날은 대통령 선거 날이었다. 투표를 하고 온 수사관들이 자기들끼리 『나는 ○○○을 찍었다. 너는 누구를 찍었느냐』고 잡담을 하는 것을 엿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독재치하에서 언론의 자유가 전혀 없는 나라라고 배웠는데 딴판이었기 때문이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의 자유로우면서도 투철한 사명감을 관찰하면서 북쪽의 지도원들과 비교하기도 했다고 한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상관이 내려 와도 일어서지도 않고 마치 동료를 대하듯 하는데 그러면서도 일에 있어서만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몰두하더라는 것이다.
북쪽의 지도원들은 상관 앞에서는 쩔쩔 매고 초대소에 와서는 대접받는 일에만 신경을 써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이었다. 수사관들이 운전수에게 존대 말을 하는 것을 보고도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북쪽에서 온 사람들은 안기부 직원들이 생각보다 끗발이 약한 것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차를 탈 때나 표를 살 때 줄을 서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초기 탈북자들 가운데는 『아파트 입주권을 하나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金賢姬씨는 수사관들끼리 주고받는 우스개를 들을 때가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다 알면서도 중국 여자 행세를 하려고 웃음을 참아야 했는데, 나중에는 화장실에 가서 입을 막은 채 웃고서 나왔다고 한다. 金賢姬는 신문을 받으면서 가끔 북한의 공작지도부에 대한 불평을 토로하더라도 한다. 수사관이 『폭탄과 같이 터져 죽는 방법을 택했더라면 완전 범죄가 되었을 텐데』라고 하니까 金은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했더라면 제가 잡혔겠습니까. 수사는 이렇게 치밀하게 하는데 계획은 순전히 형식주의로 했으니…』라고 했다.
金賢姬씨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성경이 어쩌면 그렇게도. 주체사상과 비슷한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먼저 공부하고 주체사상을 배우면 이해가 빠를 것 같아요.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이란 이름 대신에 金日成이란 이름을 집어넣어도 될 것 같아요』
金賢姬는 서울로 압송된 지 8일만에 자백을 시작함으로써 수사에 협조를 하게 되었으나 이것이 곧 金日成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金은 북한체제를 비판하면서도 한 동안 金日成을 옹호했다고 한다. 金日成이란 이름으로 부르지도 않고 「위대한 수령님」이란 수식어를 주로 썼다. 수사관이 金日成을 비판하면 『어디 그것이 수령님의 잘못 때문입니까? 밑의 부하들이 잘못한 때문이지요』라고 대들다시피 했다.

金日成 거부엔 시간 걸려

金賢姬는 한 번도 金日成을 직접 대면한 적은 없다. 중학생 때 어떤 행사에서 金日成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화동(花童)으로 뽑혔으나 옷의 칼러에 흠이 묻어 있는 것이 발견돼 그 행사 직전에 교체되었었다고 한다. 金賢姬는 안기부가 1988년 1월15일 사건 전모를 발표할 때도 金日成에 대한 외경심은 변치 않고 있었다고 한다. 金日成에 대한 비난은 기독교 신자가 예수를 욕하는 것과 같은 背敎 행위이므로 내면적인 정리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金賢姬를 26년간 덮어씌우고 있었던 「유일신 金日成」의 우상을 부수는 데는 수사관들의 끈질긴 설명이 필요했다.
수사관들은 중·고교 역사 교과서를 갖다 주고 읽게 한 뒤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 金日成의 허구를 지적해 나갔다고 한다. 『세종대왕을 봐라. 한글과 측우기를 만드는 등 얼마나 찬란한 업적을 남겼나. 그런데 우리 역사책에는 불과 몇 페이지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 역사책은 온통 김일성에 대한 기술로만 채워져 있지 않은가. 심지어 한국의 독립도 김일성의 덕분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김일성의 동상이 도대체 몇 개나 되나. 그것이 몇 억년이나 계속될 줄 아는가. 죽으면 다 없어질 것인데』

지구과학 교과서를 읽게 하고는 『김일성은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이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金賢姬는 인식의 혼란을 일으켰다. 1988년 10월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텔fp비전에 金日咸이 외국 방문객과 악수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金賢姬는 『나쁜 놈!』이라고 내뱉었다(金賢姬는 金日成의 뒷머리에 흑이 있다는 것을 서울에 와서 텔레비전에 비친 것을 보고 처음 알았다고 한다). 金씨는 그때 金日成이라고 존칭 없이 쓰니까 『무슨 불경죄를 저지른 것처럼 어색했다』고 말하였다.
金賢姬는 그 뒤 텔fp비전을 통해서 방영된, 북한의 金日成 우상화 집회에서 열광하는 군중들 모습을 보고는 퍽 쑥스러워 했다.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를 보고 어색해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북의 생활이 하나의 연극처럼 느껴졌다는 이야기이다. 북에서 온 사람들이 金日成을 욕하게 되면 수사관들은 그때부터는 안심한다고 한다. 金日成에 대한 외경심은 지독한 증오심으로 전환되는 것이 보통이다. 金日成은 북한 사랑들의 존재 이유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근거이고, 모든 가치의 근원이다. 金賢姬처럼 태어나서부터 金日成에 대한 맹목적 존경심을 강제 받은 세대일수록 金日成으로부터의 탈출에는 시간이 걸린다.
金日成을 거부한 뒤, 金賢姬는 삶의 근거를 잃은 사람처럼 허전해 하였다. 金日成이 金의 가슴속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너무나 컸던 것이다. 金賢姬의 종교에 대한 지식은 매우 얕았다. 예수는 모르고 「예수쟁이」는 알고 있었다고 한다. 종교와 미신의 해독성을 선전하는 영화에서 「예수쟁이」란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맹자와 공자의 이름만은 기억했다. 물론 유교와는 별개의 개념에서다. 부모들이 평소 대화에서 가끔 『맹자왈, 공자왈』 했으므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金양은 천주교와 천도교가 같은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김일성 우상화의 실상

1988년 10월 盧泰愚 대통령의 UN총회 연설은 時差관계로 밤늦게 한국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金賢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지 않고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다음날 金양은 수사관들에게 연설이야기를 꺼냈다. 수사관들이 『보지 못했다』고 하니까 『나라의 어른이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 안 들을 수가 있느냐』고 수사관들을 나무라더라고 한다. 金賢姬는 서열의식, 집단의식이 강하다고 한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단체나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키는 사고방식이 강해 수사관들은 『金이 우리보다도 훨씬 보수적이다』고 말하고 있었다. 金양이 한국의 현상 가운데서 가장 이해하지 못한 것은 데모였다. 『왜 저렇게 해서 나라를 못되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해방돼야 할 곳은 북한인데…』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金賢姬가 말한 「金日成·金正日 우상화 실태」는 이러하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은 각 가정과 직장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방에 의무적으로 부착토록 하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관리토록 하고 있다. 당에서 수시로 위생검열을 나와 사진 상태를 점검한다. 사진에 먼지가 쌓였거나 보존상태가 나쁘면 비판을 받게 된다. 주민들은 평소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 밑에 항상 조화(비닐꽃)를 꽂아두고 있으나 4·15(김일성 생일) 등 명절날에는 꽃병에 생화를 꽂고 그 앞에서 전 가족이 절을 한다. 특히 정월 초하루에는 『새해 설인사 받으세요』라고 인사한 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대개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섬기고 있다. 회의 등 모든 집회시작 전에는 반드시 주최측에서 선정한 김일성·김정일 찬양노래 두 곡을 순서대로 歌唱토록 하고 있다. 1986년경 김정일이 자신을 찬양하는 『향토의 별 김정일』이라는 디스코 풍 노래를 보급시키기 위해 『디스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 몸 푸는 데 좋다』라고 지시하자 한때 전국적으로 디스코 음악과 춤이 유행하였다.
당시 평양에서는 대학생을 중심으로 모란봉, 유원지 등 야외에서 중공으로부터 유입된 디스코풍의 노래와 춤이 성행, 기존의 김일성 부자 찬양노래가 퇴색하게 되자 김정일이 『디스코 춤과 노래를 없애라』고 지시하여 중앙당에서 각 대학을 대상으로 디스코 음악을 철저히 단속한 바 있다>

계속 신문받아

신문을 받을 때 金양에게는 화장이 허용되지 않았다. 로션 정도를 여자 수사관인 주면 바를 때는 있지만 눈 화장이나 입술 화장은 할 수 없었다.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는다고 하지만 구치소에 있지 않을 뿐 완벽하게 통제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정부가 金의 신병을 확보하고 金의 테러행위를 국제 사회에 계속해서 제기함으로써 북한측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에 대한 또 다른 테러를 북한이 시도할 수 없었으리란 분석도 있다.
金賢姬를 맡고 있는 한 여자 수사관은 『정말 그럴까, 설마 그럴까, 하는 심정으로 金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결론적으로는 북한이 과연 그렇구나 였다』고 말했다. 金賢姬의 진술기록을 보면 날짜나 장소가 소상히 적혀 있어 『정말 이렇게 기억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안기부 對共수사관들에 따르면 북한사람들은 생활이 남한처럼 번잡하지 않고 단순하므로 기억할 만한 것도 적어 잘 잊어먹지 않는다고 한다. 대학중퇴의 학력을 가진 金賢姬는 한국역사에 대한 지식이 남한의 유치원생보다도 낮았다. 金양은 나에게『남쪽이 북쪽보다도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더 아끼는 것 같다』는 감상을 말하기도 했다. 『북조선에서는 金日成 우상화에 방해가 된다고 민족정신의 뿌리를 오히려 말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선 역사적 인물이나 현존인물을 막론하고 김일성 父子 이외에 인민들이 숭배하는 인물이란 존재할 수 없다. 학생들이 감동할 만한 역사적 사건, 역사적 인물에 대하여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안기부 신문관들이 역사에 대하여 질문하자 김현희는 『차라리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 누구누구냐고 묻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라고 답하면서 창피해 한 적이 있었다. 金賢姬는 日蝕과 月蝕이란 말뜻조차 몰랐다. 수사관이 『아무렴 그런 것을 모를려고…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았나?』라고 의아해했다. 金양은 『우주의 신비를 가르쳐주면 김일성이가 죽으니까요』라고 답했다. 金賢姬는 『金日成은 인민을 무식하게 만들어놓고 지배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金賢姬는 6·25를 북침으로 알고 있었는데, 수사관들이 일본에서 나온 사진집을 갖다 주면서 『우리가 선수를 쳤다면 어떻게 부산까지 밀릴 수 있었겠느냐』고 설득했다. 金賢姬는 그러나 미국에 대한 반감은 완전히 씻지 못하고 있어 무심코 『미제놈!』이란 말을 쓰기도 했다.

여자로서의 金賢姬

여자로서 金賢姬는 그 정신연령이 공작원으로 뽑힌 18세에서 정지된 상태라고 한 수사관은 말했다. 연애의 경험이 없으니 이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같은 것도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했느냐』고 수사관이 물었더니 『당에서 정해주는 사람과 하면 되는 것이죠』하면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金은 『아마도 남자 공작원과 짝지어졌을 것이다』고 했다.
키 165cm 몸무게 54kg의 金賢姬는 늘 부끄러움을 타는, 남한에서는 보기 힘들게 된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이다. 金양은 그러나 남쪽 여성들처럼 다정다감하다든지 센스가 있다든지, 또는 마음이 여린 것 같지는 않았다.
1989년 현재로 金賢姬의 사랑은 주로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꽃 이름도 별로 아는 것이 없고 노래도 음치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배운 남한 노래로는「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하숙생」 「돌아와요 부산항」 등이 있으나 즐겨서 부르지는 않는다고 했다.
金賢姬는 여자공작원으로 단련되긴 했지만 벌레 하나도 죽일 수 없는 성품이었다. 그런 여자가 115명을 죽인 비행기 폭파범이란 사실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金은 주범인 金勝一의 수행원격으로 범행과 관련된 결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었다. 金은 金勝一 의 바람잡이 역할만 했었다. 이런 종속적인 역할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낀 데다가. 115명이 죽는 처참한 현장을 본 적이 없기에 비교적 덜 괴로워했었을 것이다.
폭탄을 비행기 선반 위에 두고 내려 버린 행위는 결과적으로는 115명을 칼로 찔러 죽인 것과 똑 같았으나 살인행위는 간접적이었으므로 양심의 가책도 간접적인 것이다. 사할린 상공에서 KAL 007편 점보기를 격추시킨 소련 요격기의 조종사는 미사일 발사 단추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행위만 했을 뿐이다. 그 결과는 269명의 생명을 권총으로 일일이 사살한 것과 꼭 같았으나 그 조종사의 심적인 괴로움은 한 사람을 직접 찔러 죽인 것보다도 덜했을지 모른다. 기계를 매개로 한 간접 살인이 무서운 것은 범행자에게 이러한 양심의 가책까지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한 수사관은 『金賢姬가 붙들리지 않고 북한으로 귀환했다면 영웅대접을 받고 영원히 양심의 가책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남한으로 붙들려와 비로소 자신의 범행이 몰고 온 참담한 결과를 인식하고 뉘우치게 된 것은 金을 인간으로 되돌린 셈이 되었다. 金賢姬에게는 다행한 일이었다. 당장 사형된다고 해도 인간의 모습을 되찾고 죽게 되었으니까』라고 했다. 1심 공판에서 金賢姬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 인민들은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저주스럽고 인민들은 불쌍합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유족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죽어서 유족들의 슬픔과 죽은 분들의 넋을 달랠 수 있다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金양은 1차 공판 때 유족들로부터 욕을 먹고 나서 안기부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독약을 먹고 죽었어야 했는데… 돌멩이로 맞아 죽어서라도 저분들의 분노를 풀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저를 이렇게 만든 김일성이가 저주스럽습니다』
金賢姬는 재판정에선 야유를 받으면서도 일곱 시간 꼿꼿이 앉아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진술하여 『역시 공작원으로 단련된 여자답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변호인이 『북한은 金피고인이 범인이 아닌데 남한 당국에 의하여 조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다. 金賢姬는 『북한이 나를 일본여자로 위장시키고 독약까지 주어 자살하도록 시켰으니 그런 식으로 뒤집어씌울 계획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겠느냐』 고 반문했다.
金賢姬는 1988년 11월29일 KAL 858편 폭파사건 1주년 행사로서 유족이 현장 부근에서 위령제를 올리기 위해 방콕으로 떠나는 장면을 텔fp비전으로 보면서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저주하였다. 金日成 체제에서 당과 金日成 부자의 지시를 무조건적 절대성으로 신봉하도록 교육받은 金양은 한국에 와서 비로소 비판적, 상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金양은 『비교할 눈을 가졌을 때는 이미 일을 저지른 다음이었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수사관들이 북한 사람들을 비판하면 『그 사람들 죄라야 그 곳에 태어난 것밖에 더 있어요』라고 톡 쏘기고 했다.

아시리아 浮彫 같은 얼굴

1989년 4월에 만난 金賢姬씨는 「이 여자가 115명을 죽게 한 항공기 폭파범」이란 사실을 깜박 잊게 만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쁘고 예절 바르고 수줍어하며 속이 깊고 시키는 대로 하는 여자였다. 햇볕을 받지 못하고, 화장도 못하며, 늘 죽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金賢姬의 얼굴은 어디서 봐도 예쁜데 특히 옆얼굴이 고대 아시리아의 浮彫처럼 완벽한 균형미를 갖고 말끔하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金賢姬의 얼굴은 어쩔 수 없이 처연하였다.
쌍꺼풀진 눈가에 서린 그림자는 115명의 죽음이 남긴 자취이리라. 일단 말을 시작하면 金賢姬의 얼굴에는 생기와 화색이 돌았다. 어머니가 개성출신이고, 유아기를 쿠바에서 보낸 金賢姬씨는 공작원 교육을 받으면서 상당히 남한화 된 탓도 있어 서울말씨에 가깝고 어휘력도 풍부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의 말은 그대로 옮겨도 문장이 될 정도였다. 金은 북한의 성 문제, 결혼, 가족계획 이야기가 나오면 손을 입으로 가리고 『아이, 그런 건…』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는 매일 자정이나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신다』는 말을 받아 한 수사관이 『혹시 외도하시는 것 아니냐?』라고 농담을 했더니 金賢姬는 『아버지는 그럴 분이 아니다』고 거듭거듭 해명하더라고 한다. 金은 여기의 중학교 국사교과서를 읽고는 『남한에서는 히스토리(History Story)를 가르치고 북한에서는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친다』고 했다. 金賢姬의 표현력은 정확하면서도 사물의 핵심을 찌르는 구석이 있다. 金양은 대부분의 귀순자들과는 달리 남북한에 전쟁이 터지면 남한이 이길 것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남한의 인력이 우세하기 때문인데, 머리수로서의 인력이 아니라 남한에는 현대전을 치를 만한 전문 기술 인력이 북한보다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金賢姬씨는 『성경은 읽을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힘과 용기를 주며 인생의 보람을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내세가 있고 공산주의 유물론은 내세를 부정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金양은 이렇게 답했다.
『북쪽에서는, 인간에는 두 가지 생명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부모가 주신 육체적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수령님이 주신 정치적 생명이랍니다. 육체적 생명은 죽음으로써 끝나지만 정치적 생명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다, 노동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적 생명을 얻게 된다, 따라서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육체적 생명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영혼이란 말을 쓰지는 않지만 성경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그 쪽에서는 종교라는 소리를 들으면 저 자신부터 무시무시해지고 속이 뒤틀릴 정도로 종교를 악선전하였는데 알고 보니 같지 뭡니까』

성경의 10계명과 유일사상 10대 원칙

『성경에 10계명이 있는 것처럼 주체 사상에는 10대 원칙이란 것이 있어 늘 외도록 하고 있습니다. 매주 올리는 예배는 북쪽에서 하는 주간생활 총화, 즉 자아비판과 매우 비슷합니다. 지난 한 주의 생활에서 잘못한 것을 金日成 교시에 비추어 비판을 합니다. 자기가 소속된 당 세포, 사로청, 소년단 등등의 조직별로 이루어지는데 저는 혼자 밀봉교육을 받으면서도 지도원 앞에서 1인 자아비판을 했습니다. 자아비판의 끝에 가서는 호상비판을 하며, 결함이 큰 사람은 사상투쟁이라 하여 모든 조직원들로부터 집중적인 성토를 당한 뒤 벌을 받게 됩니다.
성령, 성자, 성부의 삼위일체와 당, 인민, 수령의 全一體도 비슷하고 金日成의 무오류성은 하느님의 전지전능과 같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느님께서는 새한 마리도 의미 없이 죽게 하지는 않는다는 구절을 보고서 저의 기구한 생애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제가 독약을 깨물고 죽었는데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곤 합니다』
金賢姬는 다시 얻은 생명으로써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조국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겠다』는 다소 거창한 포부를 밝혔었다.
『여기 와서 보니 북쪽을 너무 모르더군요. 저는 북쪽의 진실을 알리는 데 노력하겠습니다. 북쪽의 진실을 알아야 올바른 대책을 세울 것이고. 그래야 통일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 노동자들을 죽이는 일인데도 아무런 고민 없었다”

1989년 4월 서울 안기부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지역의 安家에서 내리 4일간 金賢姬씨를 인터뷰하였던 나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들었다.
-KAL기에는 한국노동자들이 탄다는 것을 알았을텐데 金양을 포함하여 아무도 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데, 노동자의 나라에서 그럴 수가 있나요?
『리부장으로부터 대한항공기를 폭파하라는 지령을 받았을 때 저는 「과연 저 임무를 해낼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많은 공작원들 가운데서 제가 뽑혔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조국통일에 기여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기뻤던 것입니다. 바그다드에서 막상 KAL기에 타고 보니 많은 동족 노동자들이 보이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죽게 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조국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 한다, 나도 이미 희생을 각오하였다는 생각으로 자위했습니다. 저는 폭파대상으로서 KAL기를 선택한 것은 한국 노동자들만 타고 있으므로 폭파되어도 국제 문제로 커지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이 폭파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들었는가요?
『대외정보조사부 리 부장이 초대소에서 폭파 명령을 하달한 다음날 崔 과장이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988년 1월17일까지 세계 각국이 서울 올림픽에 참여하는지 여부를 확답하게 돼 있는데. 그전에 비행기를 폭파해야 다른 나라에서는 올림픽 참가를 꺼리게 될 것이고. 남한 내에서도 反정부 시위가 격화돼 올림픽을 치르지 못 하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崔과장은 함경도 사람인 듯했는데 코가 높고 다부지게 생긴 50대였습니다』
-지도원이 독약 앰플이 든 담배개비를 만져보게 한 뒤 일단 유사시에 金日成과 金正日의 권위를 훼손시키지 않도록 자살을 지시한 데 대해 인간적으로 너무하다는 생각도 안 해봤는지요?
『공작원으로서 비밀을 엄수하고 수령님의 권위와 위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를 자폭정신이라고 하는데 영화를 통해서도 이를 미화, 선전하고 있습니다. 영화 「조선의 별」 2부에는 金日成의 항일무장투쟁 시절 동지인 김혁이 적들에게 포위된 건물의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하면서 「金日成 장군 만세!」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자살 지시에 대해서 어떤 의문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당의 명령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동족을 떼죽음시키는 명령을 받았다 하더라도 김승일(金勝一)과 둘이서 자유롭게 여행하는 틈을 타서 망명하거나 신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나요?
『그 말씀이 이해는 됩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생활하시고 여기 기준으로 하신 말씀인데, 이해는 갑니다만 북한의 실정을 너무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이북의 교육과 그곳이 어떤 체제인가를 모르십니다. 저쪽에서는 머리를 갖고 있지만 자기류 대로 사고할 수가 없습니다. 계급교양을 통해서 저는 끊임없이 「적에게는 무자비하라!」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쪽에서 말하는 적은 미제와 거기에 빌붙은 남조선 괴뢰를 가리키는 것이지 불쌍한 노동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요?
『남조선은 우리의 적대국가라고 배웠습니다』
-국가와 국민과 지배세력을 구분할 텐데…
『…』
-KAL858기에 타서 귀국길에 들떠 있는 동족들을 보고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조국통일을 위해서는 이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는데, 그런 생각은 金賢姬의 자의적인 해석이었겠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저도 죽을 각오가 돼 있었는데…』
-나도 죽을 각오가 돼 있으니 너희 노동자들도 조국통일을 위해서 희생 돼야 한다고 합리화한 것이 아닌가요?
『그때는 잘못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대로 행동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나요?
『당의 명령은 비판과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집행할 뿐입니다』
김현희(金賢姬)는 바그다드에서 대한민국 영토의 일부인 KAL 858편 보잉 707기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기분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밤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스튜어디스가 「어서 오십시오」라고 상냥하게 인사했습니다. 金勝一이 이미 갖고 있던 폭탄이 든 쇼핑백을 위의 선반에 올려놓았고 멜 가방은 제가 갖고 앉았습니다. 제 옆에는 서양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여자와 함께 화장실에 다녀온 것밖에는 움직이지 않고 신문을 보는 척하다가 담요를 덮고 자는 척 했습니다』
金賢姬는 아부다비에서 내린 뒤에도 『두고 내린 폭파물이 제대로 작동할지 걱정이 되고 이 지역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불안했었다』고 한다.

“자살하려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1987년 12월1일 오전 바레인 공항을 빠져나가려다가 붙들린 金勝一과 金賢姬는 경찰관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의자에 붙어 앉아 있었다. 金勝一이 金賢姬에게 『…차라리 여기서 약을 먹고 죽는 게 낫겠다』고 했을 때의 심경을 물었다.
『저는 「할아버지, 제가 먼저 죽을 테니 저의 죽음을 확인하시고 하세요. 신호를 보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어머님 생각이 났습니다. 金日成이는 육체는 죽어도 정치적 생명은 영원하다고 했지만, 인생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끝내 이렇게 가누나 하고 생각하니… 그래도 살겠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독약을 안 깨물면 고문을 받고 더 큰 고통을 당하다가 비밀만 털어놓고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 여기서 죽는 길밖에 없다고 결심했습니다』
바레인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를 金賢熙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마유미!」라고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는데, 살아 있구나 하는 자각과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났다는 것이 그토록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金賢姬는 자살할 틈을 엿보았다. 『의사가 칼을 가져오면…』 하고 기다렸으나 온몸이 묶여 있어 소용이 없었다. 金은 혀를 깨물었으나 피만 나고 아픈데다가 잘리지도 않았다.
안기부 수사관들에 따르면 온몸이 묶여 있으면 이빨만으로는 혀를 자를 수 없다고 한다. 아래턱을 쳐 올리든지 하는 바깥 힘의 도움이 있어야 혀가 잘린다는 것이었다. 金賢姬는 바레인의 병원에 있을 때 남한사람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남조선사람이라는 말만 들어도 겁이 나서 눈을 꼭 감고 뜨지 않았다고 한다. 金은 金勝一 이 죽었으리라는 짐작은 했으나 간호원과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확실히 알게 되었다.

죽은 金勝一이 부러웠다

1987년 12월14일 저녁 바레인 경찰의 한 간부가 나타났다.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혹시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나에게 연락해달라』
金은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가 경찰차에 탔다. 경찰관들이 양쪽에서 金을 붙들고 있었다. 차는 어디로 달리는지 한참 뒤 멎었다.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부릉부릉 하는 소리가 나고 어둠 속에서 비행기가 대기중이었다.
金은 『이제 남조선으로 끌려가는구나』하고 공포에 휩싸였다.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누군가가 입을 막았고 조선말이 들려왔다. 비행기 안으로 들려 올라갔다. 金은 『비행기 안에서 저를 때리고 치고 할 줄 알았는데 침대에 눕히고 입마개를 밀어 넣습디다』고 했다. 누군가가 귓가에다 대고 누구누구는 귀순하여 잘 살고 있다느니 『너는 북한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로 날아가는 특별기 안에서 金양은 『이 중대한 비밀을 어떻게 지킬까』하고 머리를 굴리는 데 바빴다. 金은 그때 심정으로는 『죽은 金勝一 할아버지가 부러웠다』고 한다.
『고문 하다가 죽이겠지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심도 생겼습니다. 그때는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비밀을 지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특별기가 15일 오후에 김포공항에 도착, 바깥으로 나왔을 때 金賢姬는 확 밀려오는 寒氣를 느끼면서 「서울에서 죽게 되었구나』하고 생각했다. 『이름만 들어도 무섭던 서울, 그리고 살아서 나오기 어렵다는 남산 지하실…. 그 지옥 같은 취조실로 끌려갔는데. 뜻밖에도 저를 침대에 눕히고 「쉬라!」고 하면서 입마개를 뽑아줍디다. 수사관들이 저를 믿고 대해주는 것 같아서 저도 자살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자백할 때까지는 혹시 잠자다가 한국말로 잠꼬대를 할까봐 신경이 쓰였습니다』
-왜 자책감을 느끼게 되었나요?
『여기에 와서 여러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남한사람들이 동족이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남한사회가 북에서 알았던 그러한 사회가 아니란 것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상과 제도의 차이 때문에 남한을 증오해 왔는데 여기 와 보니 제도도 그런 제도가 아니고…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쁜 줄 알았지만 이쪽의 악독한 제도를 바로잡는다는 생각에서 참고했는데 저쪽 제도가 오히려 더 나쁘다는 것을 알고부터 죄책감을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자백한 뒤에 남한을 돌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꼭 내가 북한에 있는 것 같고 이따금 고향에 와 있다는 착각을 느낄 만큼 山川이 흡사한 데 놀랐고, 풍습과 음식이 같고 해서 한 핏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죄스러워지고…. 그러나 자백한 직후에는 남한을 확고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金日成수령님을 배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차츰 진실을 알게 되면서는 金日成과 金正日에 증오심이 더욱 끓어 올랐습니다』

사형집행이 된다면…

-주범 金勝一의 보조자 역할로서 죄책감이 덜하리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金勝一은 죽었고 저는 살아났으니.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책임져야 할 사람은 저 한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무렇게나 되어도 괜찮습니다. 유족들의 슬픔만 덜어줄 수 있다면…』
-일부 유족들이 『金賢姬는 범인이 아니다!』고 소리쳤는데….
『제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여기 인민들이 믿지 않아 섭섭하고 답답했습니다』
-사형구형, 사형선고 때의 감상은?
『저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려드리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죽었더라면 사건의 진상도 사라졌을 것이고 저는 金日成만 아는 상태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을 텐데 이런 사회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각오는 돼 있었지만 기분은 좋지는 않았습니다. 겁 같은 것은 없었으나 가족 생각이 나고…』
-가령 金賢姬씨가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할까. KAL858기 폭파에 성공하여 북한으로 무사히 탈출한 뒤 영웅대접을 받고서 金日成의 체제 아래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과 지금처럼 인간회복을 한 뒤 뉘우치고 사형집행을 당하는 길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는지요?
『…그때 북한으로 귀환했다면 최고의 영광을 누렸겠지요. 지금 이 상태에서는 저 개인으로서는 고통스럽지만 크게 봐서 민족 역사 통일에 대해서는…, 제가 기여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항소를 안 하려고 한 이유는?
『저야 뭐…, 처벌받아야 마땅하고 더 이상 변명도 하기 싫고…』
-항소를 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는?
『변호사님들께서 권하시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는 한 번의 재판으로 충분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더 밝혀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변호사님들에서 알아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만약 사형이 확정된 뒤 정부가 사면령을 내려 살려준다면?
『저는 재판받는 중이라서 그 뒤에 어떻게 될지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살아난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을텐데요?

『저쪽의 진실을 이쪽 사람들에게 똑 바로 알려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만약 정부가 金양의 사형을 집행한다면 억울하다고 생각하겠는지?
『저 죄를 알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金日成. 金正日이가 저를 살인자로 만든 데 대하여 저주하고 이쪽 인민들에게는 죄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김정일의 영원한 두통거리

나는 20년 전 金賢姬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썼었다.
<金賢姬를 자주 만난 사람들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토록 지독한 체제 안에서 어떻게 저런 인간형이 나올 수 있었을까』
어떤 자리에서도 단정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金양을 보면 알뜰했을 어머니와 단란했을 가정 분위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金은 전통적인 한국여자의 미덕을 두루 갖춘, 남쪽에서는 보기 드문 고전적인 용모와 품성을 갖고 있다. 안기부 수사관들도 『그 친구들이 잘 뽑긴 뽑았다』고 했다.
우리가 한시도 잊어선 안 될 것은 이 미모의 여자가 한 때는 인간폭탄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는 영화배우·음악도를 꿈꾸었고 커서는 아버지의 권유로 외교관이 돼 보겠다고 했던 이 처녀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공작원으로 뽑혔다가 지금은 사형수가 돼 버렸다. 한 여린 처녀를 흉악범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金日成 유일체제와 거기에 흘린 남한의 젊은이들에게는 「살아 있는 金賢姬」이야말로 영원한 두통거리일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이 두통거리를 말살하려는 기도가 정권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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