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등에 노을지다(2)

고래의 怪力과 다양한 용도

석유 발견으로 고래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것도 잡시, 「노르웨이」식 포경법의 보급으로 세계 대양에선 공전(空前)의 고래살륙전이 재개됐다. 인간들이 이처럼 고래에 탐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고래의 이용도가 너무 광법위하기 때문이다. 『고래는 버릴 것이 없다』고 한다. 고래의 난소는 난소 홀몬제로 쓰인다. 췌장은 인슐린, 부신은 코티손으로 가공되고 향고래 머리 껍질은 구두바닥, 허리띠가 된다.

고래의 생식선(生殖腺)- 갑상선 뇌하수체 등은 홀몬으로, 향고래의 뇌유 포장조직과 근육은 젤라틴으로 변해 아이스크림 과자 필름에 이용된다. 대왕고래 1마리에선 8 ~10t의 피를 봅을 수 있다. 이발고래의 이빨은 파이프, 브로치, 힘줄은 「테니스 라케트」의 줄로 변견한다.무하마드 알리 몸무게의 10배나 되는 간은 비타민 A의 보고다. 1g당 4천8백80 단위의 비타민A를 함유하고 있다(향고래의 경우) 고래턱뼈는 마작패의 자료가 되고 수염은 양산의 살데로도 쓰여졌다.

고래 기름의 용도는 굉장하다. 수염고래 종류의 기름은 비누, 마가린, 글리세린, 다이나마이트 제조에 사용된다. 향고래의 기름은 양초제조, 정밀기계의 윤활류, 다이나마이트 제조에 사용된다. 향고래의 기름은 양초 제조, 정밀기계의 윤활류, 화장품 크레용, 고약 의약품 합성세제 중합제, 가죽 세척제로 쓰인다.

18980년 독일 황제 「빌헬름」2세는 영국과의 군비 경쟁에 필요한 폭약을 새로 제조하기 위해 죽은 말에서까지 글리세린을 뽑아내도록 했다. 이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할트만 보일러」였다. 핀란드 기술자 크베너는 이 보일러를 개조, 고래기름을 짜내는 압력 보일러로 만들엇다. 「스멘 포인」의 포경포와 함께 크베너 보일러는 근대 포경의 필수품이 되었다. 이 보일러의 높은 효율에 힘입어 인간은 고래가 가진 마지막 한방울의 기름까지 짜낼 수 있게된 것이다.

석유 발견 이후에도 포경의 최대 목표물은 고래 기름. 길이 27m, 무게 1백22t의 대왕고래 1마리에선 22.7t의 고래기름을 뽑을 수 있다. 지방층에서 13.6t, 살코기에서 6백19t, 뼈에서 7.2., 배럴로 환산하면 1백62배럴. 매일 10마리의 대왕고래를 잡을 수 있다면 그는 日産 1천6백배럴의 작은 유전을 가진 셈이다(고래기름의 무게 단위가격은 석유의 5~10배나 된다) 76년에 장생포기지에서 잡은 고래중 가장 큰 것은 길이 20m의 참고래로 1천5백만원에 경매됐다. 이것을 기준하면 대왕고래는 1마리당 3천만 ~5천만원의 값어치를 갖고 있다. 반 이상은 기름값.

<1B = 2+1/2 = 6S> 이 유명한 공식은 고래 포획 쿼터나 자원량을 계산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이것은 고래 종류별 함유량을 근거로 한 공식. 기름의 多少가 고래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증거다. 여기서 B는 대왕고래(Blue Whale), F는 참고래(Fin Whale), H는 머리고래(Humpback Whale), Ssms 보리고래(Lei Whale)를 뜻한다. 고래고기중 가장 맛있는 부분은 등지느러미 조금 뒤쪽의 세로 斷面부분이다. 기름이 적고 부드러워 쇠고기는 저리 나가라는 별미다. 국내서 시판되고 있는 고래고기는 맛없기로 이름난 「밍크」고래에서도 가장 맛이 떨어지는 껍질주변의 고기다. 양질고기는 모두 日本으로 수출되고 있다. 대왕고래의 고기맛이 으뜸인데 단백질 함유량은 쇠고기의 약 2배다. 1백22 t 대왕고래 1마리의 고기를 전부 식용한다면 仁川 시민들이 모두 한끼를 회식할 수 있을 정도다(56t).

그러나 뭐니해도 「고래의 보석」은 용연향(龍涎香.Ambergis)이다. 捕鯨경력 40년 이상의 長生浦 사람들 중에서도 이것을 목격했다는 사람은 흔치 않다. 향고래는 길이 20∼30cm의 거대한 이빨로 심해(深海)의 대왕오징어를 포식한다. 길이 2∼10m의 대왕오징어는 향고래와 격투를 벌여 향고래의 뭉뚱한 머리를 상처 투성이로 만들어 놓는다. 이 오징어의 주둥이는 향고래 배속에서 잘 소화가 되지 않고 장내 분비물과 뒤엉켜 덩어리를 이룰 때가 있다. 이 덩어리는 향고래의 배설작용으로 바다에 떠다니기도 한다. 이 덩어리 즉 용연향을 줏는 포경선원은 그날부터 평생을 놀고 먹을 수 있다.

용연향은 지고한 냄새를 풍긴다. 사향냄새다. 한번 만졌던 사람의 손에서 몇 달을 두고 이 냄새가 난다고 한다.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없어지지 않더라고 張상호씨는 말한다. 「모슬렘」교도들은 이것을 차에 타 넣어 향미료로 이용했다. 최고급 향수제조에도 쓰인다. 심지어 최음제로도 사용됐다. 극히 일부의 향고래만이 용연향을 창자 안에 품고 있다. 아마도 소화기능에 장애가 있는 놈일 것이다. 그 값은 단위 무게로 따져 金보다 조금 비싸다.

용연향은 회색 흑색 갈색 황색 등 여러 가지 빛깔을 띠며 바위처럼 단단하기도 하고 「왁스」같이 물렁할 때도 있다. 섭씨 60도에 녹고 1백도에서 흰 연기를 내며 탄다. 알콜에 녹으면 신비스런 초록색 형광을 내뿜는다. 韓國에서 진짜 벌꿀을 구하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서양에선 진짜 용연향이 드물다고 한다. 분석실험실에선 진위판별을 위해 5가지의 「테스트」를 한다. 이 용연향은 「알콜·엠버레인」과 「그리세린·에스텔」의 혼합물질이다. 탈 때는 약한 청색의 불꽃을 내는데 재를 전연 남기지 않는다.

늙은 떠돌이 白鯨의 공포

고래가 집중 학살된 또 다른 원인은 그 덩치에 있다. 長生浦 포수들의 명중율은 50m 이내에서 쐈을 때 50∼90%나 된다고 60세의 현역포수 양기호(梁基昊)씨(蔚山시 長生浦동64의5)는 말한다. 이것은 순전히 표적의 거대함 덕분이다. 사상최대 고래는 英國 포경선이 남빙양에서 잡은 대왕고래 암놈이었다. 길이 34.6m, 무게 1백70t. 한국어른 약 3천명 분의 무게다. 객차보다 크고. 지질시대의 공룡이 고래보다 컷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래는 시대를 불문하고 지구 최대동물이다.

1926년 南氷洋의 한 포경기지에서 英國의 고래학자들이 대왕고래 수놈 한 마리를 해부실측, 내부기관을 관찰했다. 이 고래는 길이 27.18m, 무게 1백22t. 대왕고래 중에선 큰 축에 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고래의 입은 8t「트럭」이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을 정도다. 즉 턱뼈 길이 6.95m, 높이 3.1m. 혓바닥은 소형트럭과 맞먹는 3.16t, 허파와 간은 각 1t. 염통 무게는 한국어른 10명의 몸무게를 합친 것과 비슷한 6백31kg, 성기의 길이는 약 3m(암놈 대왕고래의 그것엔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다). 불알무게는 약 60kg이었다. 꼬리는 길이 5.9m, 전투기의 두 날개를 만들고도 남을 크기였다. 귓구멍은 연필심이 겨우 들어갈 정도였고 골의 무게는 사람의 그것보다도 가벼웠다.

고래의 성장도 경이적이다. 대왕고래의 갓난 새끼는 7m에 달한다. 어미의 자궁은 「트럭」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다. 대왕고래 새끼는 하루에 젖 1t을 빨아 마신다. 고래젖은 생식기 양쪽에 있는데 꼭지가 들쑥날쑥하면서 「호스」처럼 새끼를 먹인다. 대왕고래 새끼는 하루에 1백kg씩 몸무게가 붓고 키는 한달에 1m씩 늘어져 6개월 뒤엔 16m에 달한다. 고래의 무지한 힘은 꼬리에서 나온다.

고래꼬리는 물고기와는 반대로 水面과 수평이다. 이것이 상하운동을 하면 엄청남 추진력이 생긴다. 27m의 대왕고래 추진력은 2백t 어선과 맞먹는 5백 70마력쯤. 南氷洋에선 60kg의 작살을 맞고 수백kg의 살이 떨어져나간 대왕고래가 길이 27m의 포경선을 끌고 8시간동안 5「노트」의 속도로 달린 기록이 있다. 이 포경선은 끌려가지 않으려고「엔진」을 전속 후퇴시켜 놓았었다.

인간은 고래을 대량 살육하는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고래는 힘센 놈이니까. 애당초 고래는 동정을 받을 여지가 없었다. 「멜빌」이 白鯨을 흉포와 怪力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고 「에이하브」선장을 영웅으로 묘사한 것도 고래학살을 美化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白鯨은 무엇인가. 완전 백색의 고래로는 흰상광어(white whale)가 있다. 北氷洋에 사는 작은 고래인데 4∼5년생은 순백색을 띈다. 이밖에 「캐나다」의 「뱅쿠버」수족관엔 세계유일의 純白색 암솔피가 있다.

그런데 「멜빌」의 白鯨은 늙은 향고래를 가리킨 것이다. 향고래 늙으면 피부가 퇴색, 회색으로 변한다. 「멜빌」의 「모비·딕」은 외톨박이다. 향고래는 원래 떼를 지어 다닌다. 수놈 한 마리는 암놈 수 십마리를 거느린다. 이 떼를 「할렘」이라 하는데 반드시 「리더」가 있다. ―「리더」가 늙어서 정력이 떨어지면 젊은 수놈은 향고래가 「쿠데타」를 일으켜 지도권을 빼앗고 내쫓아 버린다. 하극상의 희생이 된 이 늙은 향고래 즉 白鯨은 바다의 방랑자가 되는 것이다.

향고래 큰놈은 길이 20m, 무게 50∼60t에 이른다. 몸 전체의 3분의 1은 머리. 토종무우처럼 생긴 고래다. 향고래 머리에 받혀 「스크류」가 부러지고 뱃전이 부서지는 일이 더러 있다. 늙은 향고래는 포경선의 습격을 여러 번 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다루기 어렵다. 작살을 맞고 나서부터 저력을 발휘한다. 다른 고래는 작살을 맞으면 곧장 앞으로 헤어나가지만 향고래는 수직으로 잠수하거나 뒤로 헤어가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한다. 「멜빌」이 「모비·덕」의 「힌트」로 삼은 것은 美國 포경선 「에섹스」호가 향고래에 받혀 침몰, 4명의 선원만 살아 돌아온 사건이었다. 물론 현대의 포경선이 이런 변을 당할리는 없겠지만 「모비·딕」얘기는 상당한 근거를 가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향고래의 머리뼈는 부숴지지 않는다. 이 속엔 뇌유(腦油)가 있다. 梁基昊씨는 日本 동해안에서 향고래잡이에 10여년간 종사한 사람인데 머리뼈를 깨고 腦油를 퍼내는 것을 우물 파기에 비유했다. 이 뇌유는 향고래가 1천m 깊이까지 40분간 잠수하고 바로 떠올라도 잠수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東海의 捕鯨戰

東海에서의 露·日捕鯨戰은 露·日전쟁의 試演이었다. 이 시합에 조역으로 등장한 것은 「흠·링어」商會. 이 회사는 日本 「나가사끼」에 있었는데 英國인과 「러시아」인이 손잡고 이 회사안에 포경조합을 설치, 1899년엔 부산과 元山항에 근거지 허가를 받아 동해에 출어했다. 「러시아」포경선단은 포경선2척 운반선 4척, 사무취급선 1척, 모두 7척, 총 「톤」수는 1천t이상이었다. 日本선단은 포경선 1척, 처리선 1척, 저장선 1척, 대형운반선 1척, 소형운반선 7척, 모두 11척에 총「톤」수는 5백여t으로 「러시아」에 뒤졌다. 「흠·링어」는 포경선 1척, 처리선 1척, 운반선 3척 모두 5척에 총「톤」수는 약 6백t. 이 3개 선단의 포수는 모두 「노르웨이」포수끼리의 기량경쟁이기도 했다.

1899∼1901년 사이 「러시아」선단은 동해에서 고래 3백89마리를 잡아 「흠·링어」(61두)와 日本(57두)을 압도했다. 1901년 여름 「흠·링어」는 경영적자로 동해포경에서 손을 뗐다. 日本遠洋漁業(株)은 1902년부터 급진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 그해 고래잡이철엔 89마리를 잡았다. 이것은 이 회사가 「노르웨이」에서 사들인 최신포경선 「렉스」호의 활약덕분이었다. 1903년엔 「렉스」호의 자매선 「레기나」호를 또 구입, 이젠 「러시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1904년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한 日本의 선전포고는 「러시아」포경선단에 대한 선전포고이기도 했다. 日本해군은 재빨리 太平洋捕鯨선단을 덮쳤다. 마침 출어중이던 「게올기」호만 上海로 달아나고 나머지 선박은 日本에 나포됐다. 「러시아」가 이 전쟁에서 패하자 太平洋捕鯨(株)도 폐업했다. 1905년 4월 18일엔 포경기지조차약정서도 폐기되고 말았다. 이제 東海는 日本포경선단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日本遠洋(株)의 후신인 東洋漁業(株)은 포경기지조차약정서가 폐기되자 太平洋捕鯨(株)의 3개 기지를 인수했다. 1904년부터는 長崎捕鯨(株), 1906년부터는 日韓捕鯨(株)이 동해에 진출, 3개 日本회사는 동해의 고래자원을 메말리기 시작했다. 日本선단은 동해에서 1904년에 3백73마리를 잡은 것을 비롯, 다음해에 3백24마리를 죽이고, 1906년엔 4백28마리를 포획, 최고기록을 남겼다. 지난 65∼74년 韓國포경선이 잡은 대형고래가 연평균 20여마리였던 것과 비교하면 당시의 마구잡이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만하다.

1907년 韓國정부는 고래자원보호목적으로 捕鯨業관리법을 공포, 여름철의 포경을 금지시켜야 했다. 동시에 기선포경 선수를 30척 이내로 제한하고, 사업근거지설치도 허가제로 했다. 1908년엔 韓國에 진출한 12개 포경회사(포경선 25척)들이 과열경쟁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해 東洋漁業(株)등 4개 회사가 합동으로 東洋捕鯨(株)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전체포경선의 70%를 소유하고 있었다. 합방 뒤엔 韓國에서의 포경을 독점했다.

외국포경선단의 東海고래자원에 대한 약탈적인 마구잡이는 현재의 자원고갈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한다. 고래 포획수 통계에서도 자원감소현상은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4∼15년까지는 매년 3백마리 이상 잡히던 큰고래가 1916∼30년 기간엔 연평균 2백마리, 1931∼44년 사이엔 연평균 1백마리 線으로 떨어졌다. 해방뒤엔 다시 1백마리線 이하로 전락 지난 72년엔 1마리, 73년엔 4마리가 잡히는 황폐상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1900년대에 집중살륙된 것은 귀신고래였다. 세계 1백여종의 고래중 유일하게 韓國産이란 명칭이 붙은 이 순박한 고래(The Korean Gray Whale)는 곧 멸종상태에 이르게 된다. 합방전 日本인의 수산자원남획은 비단 고래에 그치지 않았다. 19세기말 일본의 潛水器어업자들은 濟州島에 몰려와 전복을 쓸어갔다. 이 때 잠수기 1대로 하루 5백관의 전복을 따갔다는 전설같은 기록이 있다.

1883년 朝日通商章程의 체결에 따라 全羅, 慶尙, 江原, 咸鏡 4도 연안에서 조업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日本은 1904년 忠淸, 黃海, 平安도 연안의 통어권(通漁權)도 강탈해 갔다. 韓國해안에 몰려온 저질의 일본선원들은 그들의 조업을 막으려는 우리 어민들을 살해하고 濟州島에선 마을을 습격, 부녀를 강간하고 살상했다. 日本 어부들에게 어장을 뺏긴 韓國어민들은 그 어장에 출어하기 위해 日本인들에게 通稅를 바치기도 했다.(『皇城新聞』1902년 1월 26일자)

합방직전 韓國海에서 조업중인 日本어선은 3천4백여척, 어민수는 1만9천여명에 달했다. 1910년 日本 어부들의 韓國海에서의 어획고는 약 3백94만圓으로 韓國인의 어획고 약 3백92만9천圓을 앞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땅을 뺏기기에 앞서 바다를 먼저 앗겼던 것이다. 천년에 걸친 집권층의 끈질긴 어민수탈이 가져온 역사적인 귀결이었다.

南氷洋에 진출하는 韓國人

『흰색이 공포를 상징하는 줄 그때야 깨달았죠. 雪氷이 뻗어나간 저쪽 지평선, 다시는 떠오를 것 같지 않는 夕陽. 南極은 황량해요. 無의 大陸같아요』 지난 63년 韓國人으론 맨 먼저 남극 대륙을 밟았던 이병돈(李秉暾)박사(48·한국선박해양개발연구소부소장)의 남극인상이다. 이 南極대륙을 둘러싼 南氷洋은 인류의 마지막 「프론티어」라고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이 바다는 단백질의 보고. 사람도 먹을 수 있는 대형 「플랑크톤」인「크릴」의 1년 어획가능량이 2억7천만t. 美國 인구의 2년분 단백질 소모량이며 현재 세계어획고의 약 3배나 된다. 세계의 식량부족문제가 부각될수록 南氷洋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南氷洋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뉴질랜드」, 호주의 최남단을 연결하는 線으로부터 남쪽바다를 가리킨다. 대강 남위 50도 이하의 해양이 된다. 면적은 세계전해양의 약 10%, 용적 즉 해수의 총량은 세계해양의 약 23%다. 南極의 극점에 맨 먼저 도달한 사람은 「노르웨이」人이었지만 南氷洋에 맨 처음 포경선단을 보낸 것도 「노르웨이」였다. 1905년 「노르웨이」정부는 연안포경을 금지시켰다. 남획으로 고래의 연안회유가 줄어들자 고래떼에 쫓겨 연안에 접근하던 청어떼가 감소, 청어업자들이 고래잡이 금지를 요구했던 탓이었다.

「노르웨이」포경업자들은 할 수 없이 원양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래가 와글댄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南氷洋에 「노르웨이」 포경선단이 도착한 것은 1905년. 1910∼11년 사이의 漁期엔 52척의 포경선이 1만마리 이상의 고래를 잡았다. 「노르웨이」포경선단은 「사우드·세틀랜드」섬 등에 기지를 두고 조업했다. 그러나 英國이 이들 섬의 영유권을 주장 「노르웨이」에 대해 工船 1척만을 허가, 남빙양 포경을 견제하자 궁지에 몰렸다. 「노르웨이」人 「젤러」가 고안한 斜路(Skid way) 가 이 위기를 벗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南氷洋에서의 母船식포경을 가능케 했다.

斜路는 工母船에서 「캐처보트」가 잡아온 고래를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만든 경사진 통로에 불과하다. 이 간단한 고안으로 工母船上에서의 고래처리가 가능해져 육상기지가 필요없게 됐다. 「스벤·포인」포경포, 「커베너·보일러」와 함께 斜路발명은 포경업의 발전과 확대에 박차를 가한 기술 혁신이 된 것이다.

韓日합방 이후 韓國의 포경권을 독점한 東洋捕鯨(株)은 그 뒤 日本産業(株) 日本捕鯨(株), 共同漁業(株), 日本水産(株)으로 변천하면서 江原道 長箭, 慶北 九龍浦 慶南 長生浦 濟州島의 西歸浦 全南의 大黑山島 黃海道 大靑島에 처리장과 기지를 두고 조업을 계속했다. 기지주변의 한국인들이 포경선에 많이 고용된 것은 물론이다. 특히 최대포경기지인 長生浦에선 눈밝고 힘센 젊은이들이 대거 日本 포경선을 타기 시작했다.

1936년 봄 長生浦의 日本水産(株) 사무소에선 南氷洋에 갈 포경선원들을 회사 내에서 뽑기 시작했다. 남빙양에 가면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고 주저하는 선원들이 많았다. 대가 찬 金달호씨(72· 현재 長生浦洞구주) 徐인규씨(70·長生浦)등 10여명이 월급 많은데 흑해, 남빙양 파견을 자원했다.

1회 出漁기간은 6개월

1925년부터 斜路를 장치한 세계 각국의 母船式 포경선단이 南氷洋에 몰리기 시작했다. 1등은 못해도 모방을 잘하는 日本이 빠질 리가 없었다. 1934년 日本水産(株)은 「노르웨이」에서 9천8백66t의 工母船을 사들여 圖南丸이라 이름짓고 南氷洋에 보냈다. 이 처녀수출에서 대왕고래 1백25마리를 포함한 2백13마리의 고래를 잡았다. 86년엔 大洋漁業(株)이 1만6천7백64t급의 工母船 日新丸을 신조, 南氷洋에 파견, 38년엔 극양수산(極洋水産. 株)이 極洋丸(1만7천5백48t)을 가지고 南氷洋에 출어했다.

長生浦의 한국인들은 모두 日本水産 소속의 포경선단을 탔다. 金달호씨 등이 맨 처음 南氷洋에 갔다가 개선장군처럼 살아 돌아와 남빙양에서 이름 날린 활약상을 자랑하자 長生浦 사람들은 1937년부터는 앞다투어 南氷洋行 선단을 타게 됐다. 梁금식씨(71)는 37년에 南氷洋에 출어했다. 『蔚山군수봉급의 2배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들 선원들은 월급으로 85원을 받았다. 울산군수의 월급이 35원, 쌀 1가마니가 5원하던 때였다.

日本水産(株)의 南氷洋포경선단을 탄 한국인이 몇이나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8·15 해방 뒤 퇴직금을 받으려고 모여보니 한국선원들은 3백61명이더라고 한다. 南氷洋포경은 1회 출어에 6개월이 걸리는 지겹고 고된 작업이었다. 日本 선단은 매년 10월 5∼6일게 南氷洋으로 출항했다. 도중 호주남단에 잠시 기항, 보급품을 싣고 남위 60∼70도의 남빙양에 도착하면 11월초순, 늦은 봄이다.

남위 40도부터 빙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극에서 관측된 최대빙산은 1927년 「노르웨이」포경선「오쯔도」號가 목격한 것. 높이 31m, 길이·너비 각각 1백60km, 면적 3만4천2백89km. 慶尙南北도를 합친 것과 맞먹는 넓이다. 빙산과 「펭귄」을 배경으로 인간들은 11∼3월 사이 4개월간이 침묵의 바다에서 비정한 고래살육전을 되풀이했다. 12월 31일부터 3일간은 해가 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밤낮없는 고래 몰죽임이 자행된 것이다.

여름이라고 해도 南氷洋의 12월 평균수은은 섭씨0·08도, 정오의 평균기온0·03도. 바다로 떨어지면 익사하기 전에 동사를 먼저하는 살벌한 환경. 이곳에서 안개가 끼거나 폭설이 쏟아지고 강풍이 불면 포경선들은 氷原의 만입부(灣入部)나 氷山밑으로 피난한다.

長生浦의 노인들은 1938∼39년의 南氷洋을 잊지 못한다. 1939년 3월 10일 바다가 워낙 사나워져 각국 포경단들은 조업을 중지 피항에 바빴다. 日本大洋漁業(株)의 新丸선단소속 포경선 3척도 氷原의 오목한 곳에 접안했다. 이때 일이 터졌다. 氷山이 해류와 바람에 실려 氷原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는게 아닌가. 남빙양에선 고래떼가 이런 상황에서 목만 드러낸채 끼어 죽는다. 빙산접근이 너무 빨라 피할수 없기 때문이다. 포경선 3척은 氷原과 氷山에 꼭 끼여 포로가 됐다. 냉장될 위기에 놓인 선원 57명은 배를 버리고 빙원을 20km나 걸어 탈출했다. 이 포경선 3척은 그 다음해 李任用씨가 타고 있던 「캐처보트」에 발견됐다. 별다른 고장이 없어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미하리」의 悲哀

韓國선원들은 승진 땐 민족차별을 당했다. 포수나 선장은 될 수 없었다. 갑판장 기관장이 上限이었다. 韓國人으로 「캐처보트」의 선장이 됐던 사람은 日本人으로 귀화한 姜모씨(64·현재 日本 거주) 뿐이었다고 全찬일 교수는 증언한다. 왕복항해에만도 2개월 걸리는 南氷洋 포경에서 돌아온 한국 선원들은 長生浦에 1∼2개월 휴가를 받아와선 신나게 놀았다. 주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고 영웅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휴가를 같은 기간에 함께 받아 집에 다녀가곤 했기 때문에 다음 해엔 며칠 간격으로 長生浦의 여기 저기에서 아기 울음이 터지곤 했단다.

南氷洋 포경은 세계 포경사의 절정이었다. 1938년 南氷洋엔 6개국의 41개선단 2백56척이 출어, 1만4천9백마리의 대왕고래를 포함한 4만6천39마리의 고래를 죽여 55만6천7백21t의 기름을 빼냈다. 포획두수에서 南氷洋은 세계의 84%, 産油量에선 91%를 차지했다. 日本은 1940∼41년 「시즌」에 고래 9천9백48마리를 잡아 최고기록을 남겼다. 아무리 기름진 南氷洋이지만 이런 대량살륙을 계속, 지탱할 순 없으리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명백해졌다. 1941년 12월8일의 진주만공격은 다행히 수난의 고래가족들에게 잠시나마 숨돌릴 수 있는 시간을 주게 된다.

日帝에 끌려간 捕鯨선원들

태평양전쟁의 전단이 열리자 日本 海軍은 6척의 포경모선을 포함한 60척의 포경선을 징발했다. 南氷洋포경은 중단됐다. 모선 6척은 전쟁중 몽땅 격침됐다. 南氷洋에 나다니던 韓國선원들은 더욱 비참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팔팔한 30대초반의 그들은 전장으로 끌려갔다. 捕鯨선원들의 눈밝기는 이미 정평이 나있었다. 고래의 噴湖를 발견하려면 視力1·5이상의 눈이 필요했다. 그들은 쌍안경을 視野가 좁다고 팽개치고 맨눈으로 고래숨기둥을 찾아내던 이들이다. 그들중 20여명이 눈 밝은 죄로 日本 海軍에 「미하리」(見張) 요원으로 끌려갔다. 3개월간의 교육을 받곤 주로 수송선에 배치됐다. 「마스트」꼭대기의 둥지같은 관측대에서 적함이나 잠수함을 찾아내는게 일이었다. 20여명중 4명이 수송선 격침으로 수중고혼이 됐다.

얼굴의 뼈대가 확실하여 순박하고 건강하게만 보이는 金철쇠씨(66)는 長生浦에선 전설적인 인물이 돼 있다. 그도 「미하리」로 징용됐다. 원유수송선 第3總同丸(8천9백t)에서 長生浦의 고향 친구인 李화수씨와 함께 12시간씩 교대로 눈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1943년 12월 8일 하오 5시40분, 金씨는 「리스트」의 관측대에 있었다. 總同丸은 日本을 떠나 목적지인 「사이판」섬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金씨는 왼편 저쪽 해상에서 갑자기 흰거품이 부글 일더니 總同丸을 향해 4條의 흰 線이 부채처럼 퍼져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경보 「보턴」을 누른 金씨는 『좌현, 4천m, 어뢰다!』고 보고했다. 總同丸은 죽을 힘을 다해 避雷선회를 했지만 좌현복판에 한방을 맞았다. 기관실이 폭파, 기관부원 8명이 즉사했다. 배엔 화재가 발생했다. 승무원들은 진화작업에 死力을 다했다. 밤새워 불을 끄고 보수작업을 벌인 결과 겨우 항해를 할수 있게 됐다.

다음날 새벽 2시50분께 美國잠수함이 또 나타나 「必殺의 어뢰」를 발사했다. 기름「탱크」의 대폭발, 金씨는 본능적으로 물에 뛰어들었다. 기름 섞인 물을 잔뜩 마시고 떠오르니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장기판 3개를 붙여놓은 정도의 판자였다. 『그날은 풍랑이 셌어요. 기름을 마셔 속이 타서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저 판자만 죽어라고 붙들었습니다』 金씨는 표류했다.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죠. 꿈에 허깨비를 보는듯 몽롱한 상태였어요. 떠다니다가 기진하여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그게 잠이었습니다』 金씨는 바닷물을 마시지 않았다.

표류3일째 날치가 金씨의 목에 부딪쳐 판자 위에 뚝 떨어져다. 『이놈아 네가 나를 살리는구나』―金씨는 이것을 그대로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표류 4일째 밤에 金씨는 日本海軍 第301艦에 구조됐다. 總同丸승무원 1백26명중 1백20명이 죽고 6명만이 구조됐다. 李화수씨도 죽었다. 金씨는 구조되고 나서야 오른쪽 갈비뼈 2개가 부러져 있는 것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한창 몸이 좋았을 때야. 상어떼가 덤벼들지 않았기에 살 수 있었지요. 「훈도시」가 찢어져 너풀거렸는데 이것을 보고 자기보다 더 센 친구로 생각, 상어가 달려들지 않았는지 모르지』 金씨는 「사이판」해국병원에서 40일간 치료를 받았다. 눈은 바다에서 새어나온 기름에 묻어 20여일간 보이지 않았고 폐염까지 앓았으나 살아났다. 金씨는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맹세, 퇴원하여 제대하자 목발을 짚고 長生浦로 돌아왔다. 집에서 푹 쉬는 사이 옛날의 건강을 되찾게 되자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그는 다시 日本水産에 취직, 해방전까지 日本연안포경에 종사했다.

민족주체적인 捕鯨業의 시작

8·15 광복. 日本水産(株)은 한국에서 조업중이던 포경선과 포경기재를 거둬 담고 美軍진주 전에 日本으로 달아나 버렸다. 퇴직금을 받지 못한 한국선원들은 日本水産의 東京 본사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던 金玉昌씨를 대표로 뽑아 퇴직금 받아내기 운동을 벌였다. 金씨는 45년 12월 일본에 건너가 퇴직금조로 포경선 2척을 얻어왔다. 당시 長生浦 大黑山島엔 경험 있는 선원과 해부원들이 수백명 놀고 있었다.

포경선이 들어오자 日本水産의 전종업원 3백60여명은 朝鮮捕鯨(株)을 설립했다(1946년 9월 17일). 순수한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첫 포경회사였다. 종업원 모두가 주주이기도 했다. 그들은 박덕이(朴德伊)씨를 사장으로 뽑고 4명의 포수를 선발했다. 朴德伊씨 동생 先伊씨, 金철쇠씨, 金장화씨 徐龍伊씨 등 4명이었다. 제6征海丸(60·65t), 제7征海丸(45·11t)으로 이름붙여진 두 포경선은 그해 참고래 66마리를 잡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先伊씨는 『太平洋전쟁중 고래를 잡지 않아 자원이 불은 데다가 고래들이 포경선 무서운 줄을 모라 접근해도 달아나지 않는 등 좀 멍청해져 있었기 때문에 포획성적이 좋았다』고 말한다.

47년엔 참고래 44마리 포획. 이 해 10월엔 大同捕鯨(株)이 정어리 건착선(巾着船)을 개조, 포경에 참여했다. 東海捕鯨史上 최대인 길이 22m, 무게 60t의 참고래가 잡힌 것도 이 해였다. 48년에도 44마리, 49년엔 東洋捕鯨(株)의 설립으로 국내 포경선은 7척으로 늘어나 89마리를 잡았다. 50년엔 6·25사변으로 중단, 51년부턴 정상출어하여 55년엔 해방 뒤 최고기록인 1백94마리의 큰 고래를 잡았다.

그러나 이 「피크」를 넘어서자 참고래가 격감되기 시작했다. 64년에 1백마리가 잡힌 것을 마지막으로 65년엔 19마리, 22마리(66년), 21마리(67년), 25마리(68년), 35마리(69년), 25마리(70년), 25마리(71년), 1마리(72년), 4마리(73년), 52마리(74년), 10마리(75년), 올해엔 9월 15일 현재 30여마리, 이렇게 꾸준히 감소, 본격적인 捕鯨은 사실상 끝난듯하다.

長生浦에 있는 11개회사 21척의 포경선은 이제 대왕고래에 비교하면 올챙이 같은 「밍크」사냥에 열중하고 있다. 잡혀 올라오는 「밍크」 1마리의 평균무게는 2t. 몸에 겨운 45kg짜리 작살을 맞아야 하는 운명이 애처롭다. 포경업자들은 바다를 샅샅이 훑어 「밍크」를 잡는다. 대부분의 포경선이 음향발신기를 갖고 있다. 「밍크」에 4백m 이내로 접근, 이것을 작동시키면 고래가 자맥질 않고 뛴다. 놈이 싫어하는 소리가 수중으로 전파돼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쉽게 추격, 작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밍크」포획수는 65년의 2백47마리에서 계속 증가, 73년엔 8백82마리, 지난해엔 1천여마리였다. 75년의 수산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포경선 25척중 18척이 20∼50t, 9척이 선령 20년 이상으로 대부분 낡고 작은 배들이다. 74년 2월엔 京林産業公司 대표 金윤국씨(44)가 원양포경을 시도했다. 포경선 京林호를 「오끼나와」근해로 보내 향고래 4마리를 잡아왔다. 향고래를 잡은 것은 이것이 해방 뒤 처음이었다. 향고래를 처리하려면 현존처리장과는 다른 육상처리장이 있어야 한다. 수지계산이 맞지 않아 金씨는 1회의 시도로 원양포경의 꿈을 중단하고 말았다.

海洋汚染에 피해 받는 韓國고래

요즘 韓國고래들은 해양오염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고래배를 가르면 電球, 「비닐」봉지, 부대까지 튀어 나온다. 梁基昊씨는 아래턱에 쇠테(輪)가 잠겨 있는 「밍크」를 잡은 적도 있다. 「드럼」통 상부의 테두리로 보이는 이 케는 턱의 살속 깊이 박혀 있었다. 수염고래는 새우가 많이 모인 곳에 가선 입을 쫙 벌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바닷물을 잔뜩 들이켜 입속에 있는 수염의 「커튼」으로 새우만 걸려내 삼켜버리고 물은 뱉는다. 이럴 때 바다에 떠다니던 쓰레기가 고래 배속으로 들어가는 수가 있는 것 같다고 梁씨는 말한다. 쇠테는 이때 끼였는데 「밍크」가 자라는 바람에 살속을 파고 들어간 것 같다는 추리. 73년 7월 29일 독도근해에서 잡힌 기록적인 크기(22m 45t)의 참고래는 병들어 살점이 문들어져 있었다.

고래의 수난은 여러 방면에서 오고 있다. 2차대전 이후의 세계포경은 참고래, 南氷洋, 日本과 蘇聯으로 대표된다. 대왕고래 자원은 격감, 멸종직전에 몰렸다. 1933년에 1만9천마리나 잡혔던 대왕고래는 1952∼3년 漁期엔 4천2백18, 58∼59년엔 1천4백23마리 포획으로 격감했다. 1965년 이후엔 IWC(국제포경위원회) 결의에 따라 대왕고래 포획이 전면 금지됐다. 그대신 참고래가 집중포획돼 왔는데 올해 6월 21∼25일 「런던」에서 열린 28회 IWC총회는 참고래포획도 전면금지키로 결의했다.

IWC에 가입한 15개국중 소련과 日本을 제외한 나라들은 국내환경보호론자들의 압력을 받고 궁극적으론 포경의 전면금지를 겨냥, 해마다 허용포획 한도량을 줄이고 있다. 올해의 「쿼터」는 「밍크」 3천9백43마리. 향고래 3천78마리를 비롯하여 5종류에 2만5천2백92마리. 75년보다 약 4천백마리나 줄었다. 근대포경의 발상지인 「노르웨이」는 지난 69년 南氷洋등 원양포경을 종결시켰다. 美國은 자국선의 포경금지는 물론, 71년 이후 고래를 재료로 하는 어떤 제품의 수입도 금지시키고 있다. 환경보호주의자들은 英國에서 『日本 포경선에 쫓겨 달아나는 고래의 울음』을 녹음한 「레코드」를 팔기도 했다.(뒤에 이 울음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日本은 매년 12만t 내외(소 60만마리分)의 고래고기를 식용하고 있어 南氷洋포경을 계속하고 있으나 포경전면금지의 대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韓國捕鯨의 활로를 원양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리다. 우리민족은 세계 고래시장에 너무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귀신고래를 찾는 老교수

韓國捕鯨史는 뼈저린 반성으로 회고돼야 한다. 이것이 우리 捕鯨史의 교훈이다. 따지고 보면 주체적인 우리 捕鯨史는 해방뒤 3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까지 우리 민족은 우리의 고래자원을 외국에 앗기고 고용원을 자족했다. 그리고 고래에 대해 무엇하나 남겨놓지 못했다. 韓國産 고래에 대해 주요연구업적은 日本학자 아니면 美國학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美國인 「R·C·앤드류스」는 1909년 長生浦를 찾아 귀신고래를 면밀하게 측정, 「캘리포니아」産 귀신고래(克鯨)는 「캘리포니아」것과는 계통이 다른 별개의 종류라고 단정, 「韓國 귀신고래」로 분류했다.

이놈은 「오츠크」海와 巨濟島 사이를 왕래하며 길목인 長生庫 앞바다엔 봄과 가을에 나타난다. 최근 「리더즈·다이제스트」誌는 한국 귀신고래는 남획으로 멸종됐다고 썼다. 주한 美8軍에서 군의관으로 일하다가 돌아간 「S·L·보웬」씨도 미국 포유동물학회지(74년)에서 한국 귀신고래의 멸종설을 주장했다. 그는 1910∼37년 사이 長生浦 연안에서 귀신고래 1천4백74마리가 살육됐다고 주장, 지난 70∼72년 사이 韓國 동해안을 돌아다니며 포경선원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그 고래를 봤다는 사람이 없더라고 보고했다.

1933년이후 겨우 3마리의 귀신고래가 西太平洋에서 잡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東海에선 1948년에 2마리가 마지막으로 잡힌 기록이 있다. 정말 귀신고래는 멸종 됐을까. 아니라고 믿고있는 학자가 있다. 全찬일 교수는 지난 68년에도 귀신고래의 관측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長生浦에 기지를 둔 한 포경선이 黑山島에서 돌아오는 도중 남해 욕지섬 근처에서 새끼와 함께 북상하는 귀신고래 어미를 봤다는 것이다.

全교수는 최근 더 확실한 소식을 들었다. 美國 「T,미소니언」 연구소의 젖먹이 동물과장인 「로버트·C·브라우넨」씨(40)가 『소련 포경선이 「오츠크」海에서 귀신고래를 관측했다』고 알려왔다. 「오츠크」海의 이 귀신고래는 동해안에서 북상한게 틀림없다는 것이 全교수의 확신이다. 귀신고래는 東三洞 패총시대부터 불운의 세월을 보내온 우리 민족과는 친밀한 고래다. 이 놈을 찾아 代를 이어주자. 멸종책임을 세계환경보호주의자들로부터 추궁 당하는 수치를 면해보자는 것이 이 老교수의 소원인 것이다.

長生浦洞 경노당. 솔피 이빨로 만든 「파이프」를 지그시 문 梁금식氏가 솔피의 흉폭성을 얘기한다. 『南氷洋에서 대왕고래 한 마리가 버둥대고 있는걸 보았지. R,FtP 이놈은 껍질이 홀랑 벗겨진 채 꿈틀거리고 있더란 말이야. 솔피 떼의 소행이었어』

朴先伊氏가 말을 받는다. 『길이 10m 무게 20t 쯤 될 법한 솔피가 참고래의 혀를 잘라먹는 것을 봤어. 이놈은 막판엔 참고래 입 속으로 들어가 창자까지 물어뜯어 나오더군. 참고래를 깍 물고 몸을 세로로 빙빙 돌려서 10여관의 살점을 끊어내요』 고래를 잡아먹는 솔피는 「범고래」로도 불리는데 바다동물은 무엇이든지 공격하는 살륙자다. 대왕고래를 포위 공격하는 30∼40마리의 솔피 떼를 봤다는 張상호씨의 얘기.

솔피는 입체작전을 편다. 한 부대는 대왕고래가 잠수하여 달아나지 못하도록 밑에서 떠받아 올린다. 다른 몇 놈은 고래주위를 빙빙 돌며 물장구를 쳐, 혼을 빼놓는다. 공격부대는 맛이 좋다는 혀를 싹둑싹둑 잘라먹는다. 대왕고래가 죽으면 공격을 중지한다. 죽은 고기는 절대 안먹는다. 영화화 된『아가리』(Jews)란 미국 소설에 상어가 솔피를 공격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들 노인들은 『말도 안된다』고 부정한다.

7m짜리 솔피 배속에서 바다표범 13마리, 물개 14마리를 해치운 흔적이 발견된 적이 있다. 美國「프리비로프」섬에서 잡힌 솔피의 배에선 물개 새끼 60마리, 물개 14마리를 막 삼킨 증거물(뼈)이 나왔다. 그러나 인간은 이 솔피보다도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20세부터 40년간 고래 수 천마리를 죽였다는 梁基昊씨는 『새끼를 데리고 가는 고래가족을 발견하면 먼저 새끼를 쏜다』고 말한다. 그래야 어미 아빠고래는 도망치지 않고, 죽어가는 새끼 주위를 빙빙 돌아 夫婦 고래까지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숫놈을 먼저 맞추면 암놈과 새끼는 달아나 버린다. 경노당에 모여 앉은 老고래잡이 영웅들의 얘기는 이제 고래교미에 미친다. 남빙양에서 한쌍의 참고래가 헤어가다가 암놈이 쭉 앞으로 달려가더니 벌렁 누워버리더군. 이것을 수코래가 덮쳐 재미를 보는데…』 재미를 보는 데 작살을 날렸는지, 모른 척 지나쳐 버리는 「고래니즘」(?)을 발휘했는지 그 문제는 여기서 덮어두자.

고래잡이는 이제 說話가 되려 하고 80년 역사의 포경기지 長生浦엔 落照가 깃든다. 「韓國捕鯨史의 斜陽」―금세기 들어 2백만 이상의 동족을 학살당한 고래가족들에겐 반가운 소식일지도 모른다. (※필자註:이 글에 사용된 고래이름은 長生浦포경선원들이 부르는 이름에 따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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