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원자력 발전소 21基를 돌리고 있고, 9基를 건설중이다(계획 확정 포함). 수년 안으로 30基의 原電으로 발전량의 약59%를 맡게 된다. 현재도 한국은 발전량 면에서 미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에 이언 제5大 원전 大國이고, 운용기술은 세계 최고이다. 한국의 原電기술 자립 과정을 정리해본다(월간조선 吳東龍 기자의 기사를 참조).
1986년 한국電力은 영광 3·4호기를 건설함에 있어서 1차계통(원자로 등) 엔지니어링을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이하 CE), 2차계통(BOP) 엔지니어링을 서전 앤드 런디(이하 S&L)에 맡겼다. 이 결정과정에서 全斗煥 대통령과 朴正基 사장이 큰 기여를 하였다. 韓電은 두 회사에 기술 傳授(전수)를 조건으로 걸었다. 그해 12월, 韓電은 영광 3·4호기의 원자로 공동설계를 위하여 원자력연구소 등의 人力을 미국 코네티컷州 윈저의 CE 본사로 보냈다. 당시 韓弼淳 원자력연구소장은 ‘필(必) 핵증기 공급계통 설계기술 자립’이란 액자를 써 파견 연구원들에게 전달하며 “기술自立을 하지 못하면 태평양에 몸을 던지라”고 말하고 만세삼창을 불렀다고 한다.
현지에서 우리 기술자들이 공동설계 작업에 참여하려면 설계기술자 자격을 부여받아야 하기 때문에 설계 코드 교육, 원자로 설계 부문 교육을 먼저 받았다. 원자로 압력용기를 설계하는 기준인 미국기계학회(ASME) 코드, 전기관련 기술코드인 IEEE)드도 사전에 숙지(熟知)해야 했다.
당시 한국은 원자로의 爐心을 감싸는 格納용기 설계능력은 전무 상태였다. 核연료를 태우는 爐心계통은 민감한 부분이라 국내엔 설계코드도 없었고, 미국 原電 회사들도 주지 않았다. 韓電과 CE 사이 계약서에 따르면, 설계 책임자인 CE는 모든 책임을 지고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을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 직원들은 CE측에 일을 절반씩 나누어 하자고 제의했다. 한 연구원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일을 배우려면 설명만 들어서는 되지 않잖아요? CE가 처음에는 주는 일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는 핵심적인 일만 하고, 우리는 뒤치다꺼리만 하면 어떻게 기술습득이 되겠느냐’고 항의했어요. 그 다음부터 무조건 반반씩 일을 나눠 한 다음, CE가 우리가 한 일을 체크하고 가르쳐주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 외로 어려운 문제도 쉽사리 해내니까 CE 직원들도 상당히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CE의 각 부서회의에 우리측 대표자를 보내 기술적인 문제점이 나오면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이 설계팀은 2년 뒤 돌아왔다. 한 참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원자로의 핵심설계 기술인 NSSSD(핵증기 발생장치 계통설계)를 비롯해 많은 부분을 배우고 왔지만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귀국해 우리의 기술自立 프로그램에 따라 반복설계를 통해 다시 ‘복습’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울진 3·4호기로 한국표준형 原電(KSNP)을 만들 때 95%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1986년부터 영광 3·4호기 원자로 계통설계를 CE社와 공동수행해 발전로 설계분야의 경험과 기술자료를 확보했다. 이때의 공동설계와 試運轉 경험을 토대로 1995년 한국표준형 原電(KSNP·OPR-1000으로 불림)인 100만kW급 可壓經水型 原電을 독자적으로 설계하여 기술自立의 목표를 이뤘다. 이어 2002년에는 OPR-1000보다 안전성·경제성이 향상된 한국 新型 原電(APR-1400) 기술을 개발, 수출도 하기에 이르렀다.
金泳三 정부하 과학기술부는 G7 국가의 과학기술을 확보할 목적으로 ‘G7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G7 프로젝트에 '新型 원자로 설계'가 들어갔다. 정부는, APR-1400을 개발하는 데 연구개발비로 2000억원을 투입하였다.
1986년 5월12일, 정부는 원자력법을 개정, 방사성폐기물을 한국 에너지연구소(원자력연구소)에 맡겼다. 1990년대 들어 야당인 평민당을 중심으로 反原電 투쟁이 벌어졌다.
김대중 총재는 13대 국회 상공위에, 원자력 정책을 따지라고 曺喜澈(조희철) 의원을 배치했다. 曺 전 의원은 “1년여 조사를 해 보니 電力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代案은 없어 원자력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김대중 총재가 당무회의에서 原電 건설 반대를 黨論으로 정하려 의사봉을 두드리려는 것을 빼앗은 적도 있었고, 당내에서는 ‘韓電의 앞잡이, 배신자’로 불릴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상임委를 바꿔야 했다.
“일본 사회당 간부인 후쿠마(福間)는 저처럼 原電 반대를 愛國인 줄 알고 반대하다 찬성으로 돌아선 사람입니다. 그가 지은 <원자력은 악마의 앞잡이인가?>라는 책에 감명을 받아 번역까지 했습니다.”
그는 꾸준히 김대중 총재를 설득했다. 1989년 11월28일 김대중 총재가 목포를 방문했다. 지역주민들은 영광原電 건설에 대한 金 총재의 입장을 물었다. 金 총재는 “자원貧國인 우리나라는 原電을 건설할 수밖에 없으나 주민과 충분한 홍보와 협의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李宗勳 전 韓電사장은 “원자력界는 이를 김대중 총재의 ‘목포선언’이라 부르고 있다”면서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原電 건설이 순조롭게 될 수 있었던 데는 ‘목포선언’의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原電 건설과 김대중의 '목포 선언'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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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07, 1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