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IMF 사태의 내막 下 - 사대적 세계화(2)

세계화 선언이 IMF로 가는 길 열어

6.25 동란 중 주한미군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대장은 조종사인 아들이 북한에 출격하여 실종되자 부하들이 특별구조수색을 하려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순신(李舜臣)은 치명상을 맞고도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유신(金庾信)은 패전하고도 살아 돌아온 아들 원술과 부자(父子)의 인연을 끊어 자신의 장례식에 문상도 오지 못하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내가 저격자의 총탄을 머리에 맞고 병원으로 실려나가는 것을 보고도 연설을 계속하였다. 박정희가 공인이 아닌데도 그런 행동을 하였더라면 그는 「무정한 남편」으로 찍혔을 것이다.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포기하도록 한 공인으로서의 더 큰 의무, 이런 공인의 도(道)를 독서량이 절대 부족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을까.

돌이켜 보면 지난해 봄 한보사건으로 정치적 불구자(不具者)가 된 김영삼 대통령을, 국회가 탄핵하든지 본인이 스스로 하야하는 식으로 하여 국정의 키를 새 대통령에게 넘겼더라면 IMF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외국경제인들은 우리나라 정부를 「말은 많고 실천은 없는 정부」라고 평하고 있다. 조선조 선비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나라의 소위 문민 정치인들은 말을 엄청나게 크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한국건설」「제2의 건국」「상해임정 이후의 유일한 정통정부」「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세계화」「역사바로세우기」「대도무문(大道無門)」. 「개혁」으로 시작해서 「개혁」으로 지는 것이 김영삼 정부의 하루였다. 김영삼 정부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신인도가 떨어진 한 원인은 경제구조를 개혁하겠다는 말만 크게 해놓고 실천이 따르지 못하니 말의 신용을 잃은 것이었다.

원화의 신용실추는 말의 신용실추를 뒤따라 왔던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개혁과 세계화란 말을 가져가서는 이상한 의미로 쓰고 버렸다. 개혁은 정치보복으로, 세계화는 세계적이니 소비란 뜻으로 해석될 만한 행동을 보였다. IMF 사태로 가는 고갯마루를 넘은 것은 1994년 11월7일 김영삼 대통령이 「시드니 구상」이란 것을 발표하여 「세계화의 5개 방향」을 밝힌 때이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경제지표가 악화되기 시작한다. 세계화란 명분을 앞세운 김영삼 정부는 준비 없이, 즉 내부적인 구조개혁 없이 무방비 상태로 세계를 향해 우리나라 금융시장의 문을 열었다. 이는 독감에 걸리는 단초가 되었다. 해외여행자들이 더 많은 달러를 갖고 나갈 수 있도록 했고, 외환 채권 증권시장을 외국인들에게 더 개방하고, 외국인의 국내은행설립을 허가했다.

민족자본 유출에 대한 반성 없어

철없고 실력 없는 종합금융사를 야생마처럼 풀어놓아 단기외채를 빌어다가 인도네시아, 타일랜드에 장기로 빌어주는 위험한 게임을 방치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규제완화란 말에 취해서 규제완화가 감독의 포기를 의미한다고 스스로 규정하였다. 1996년 3월에는 드디어 일류 국가의 사교클럽이란 OECD에 가입신청을 했다. 가입 기준에 맞추기 위하여 또 문을 열었다. 멕시코가 1994년 OECD에 가입한 뒤 개방경제 체제의 부작용을 견디지 못하고 IMF 관리체제로 가버린 교훈은 태평양 건너 불이었다. 김영삼의 세계화는 일류국가의 논리인 시장원리에 이 나라의 국부(國富)를 갖다바치는 행동원리였다. 미국식 민주주의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김영삼 대통령은 이번엔 미국식 경제논리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그의 재임기간에 우리나라의 외식 비 지출은 가계지출의 7.3%에서 11.7%로 늘었다. 개인의 가처분소득에서 차지하는 신용카드 이용률은 1996년에 12.6%에 달하여 미국의 11.2%보다도 많고 일본의 4.2%보다는 근 세 배였다.

1997년 1월부터 10월까지 우리나라는 양주 2억4천만 달러어치, 보석류 1억4백만 달러어치, 모피 등 의류 11억7천만 달러어치를 수입하였다. 우리나라 관광객 한 사람이 외국에 가서 쓰고 오는 돈은 1천5백74달러로서 외국관광객 한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쓰는 돈보다 3백 달러나 많았다. 그 결과로 1996년엔 26억 달러의 여행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국제수지는 세계화의 흥청망청한 분위기가 나라를 휩쓸고 있던 1995년에 89억 달러로 늘더니 1996년에는 2백37억 달러에 달했다. 이런 때는 원화를 절하시켜, 즉 환율을 올려서 수입을 억제하여야 하는 것이 상식인데 김영삼 정부는 환율이 오르면 보유 외화를 풀어 끌어내리는데 열중했다. 국제수지가 적자인 상태에서 국내 자본시장을 개방하면 외환위기가 온다는 것은 경제학의 상식이다.

국제수지 적자를 단기 해외차입이 아닌 장기적 외국인 투자의 유치로 메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삼성이 영국에 큰 전자 공장을 지었는데 준공식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했다는 소식을 우리의 국가적 위신을 드높인 쾌거로 받아들인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우리나라의 고비용 저 효율 경제 환경이 민족자본을 해외로 유출시키고 있다는 반성이 없었다. 대통령이 「돈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이 공언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공직자 재산공개 때 재산이 가장 많은 것으로 드러난 검찰간부를 재산이 많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추방하는 나라에 외국투자가들이 들어올 마음이 생기겠는가.

위선적 명분론

우리나라 역사는 위선적인 명분론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약화시킴으로써 대외(對外)굴종을 결과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친명(親明)사대의 명분론으로써 광해군의 자주외교 노선을 무너뜨렸던 인조 반정파는 대책 없는 대청(對淸) 강경론으로 두 번의 전란을 불러 결국 청에 굴복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위선적 명분론도 같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IMF 사태를 당하고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 일본은행들의 결정적 역할이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9월 현재 우리나라의 공식 외채 약 1천2백억 달러 중 약 23%는 일본은행들로부터 빌린 돈이었다. 이 일본 비중은 미국(9.63%), 프랑스(9.74%), 독일(10.44%)보다도 엄청 높다. 일본은행들이 한국금융기관에 빌려준 외채에 대하여 상환기한을 연장해주지 않고 회수해간 것이 외환위기의 시작이었다.

재경원은 차관보를 일본에 보내 협조를 요청했으나 일본측은 『우리는 IMF를 통해서만 지원하겠다. 이것이 우리가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한국은행은 일본은행들을 비롯한 외국은행들이 회수해 가는 달러를 메우기 위하여, 또 올라가는 환율을 낮추기 위하여 11월1일부터 34일간 1백65억 달러를 쓰다가 손을 들어버렸던 것이다. 일본은행이 외채 회수에 들어간 것은 인도네시아와 타일랜드에 빌어준 돈을 많이 물려버린 데다가 일본 안에서도 금융기관이 잇따라 도산하여 일단 유동성을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외환위기, 예측 가능했는가」란 논문을 쓴 이영섭(숙명여대 경제학과) 이종욱(서울여자대학교) 교수는 「한국의 경제여건 아무리 좋더라도 일본의 내부적 문제 때문에 외채상환 연장 거부라는 사건이 발생하면 한국에 외환위기가 초래될 수 있고 이럴 경우에는 기업의 흑자 도산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두 교수는 지난해 11월의 외환위기는 예측이 불가능한 날벼락과 같은 천재(天災)였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두 교수가 지적한 것은 한국에 대한 최대 채권자인 일본은행들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나라를 부도위기로 몰고 갈 수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일본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말만 앞서는 강경론과 명분론으로 상대하였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그의 발언으로 하여 「버르장머리」라는 순 한글 단어는 많은 일본 지도층 인사들이 기억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유적을 일제가 만들었다고 하여 철거하고 일제가 박았다고 하지만 확증은 없는 쇠말뚝을 뽑고 산신제 지내는데 국가기관을 동원한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박정희(朴正熙),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시절에 이런 위기가 발생하였더라면 긴밀한 한일 친선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일본으로부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이 일본의 안보까지 담당해주고 있다」는 논리를 개발하여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으로부터 약 40억 달러의 경제협력을 고 자세로 뽑아낸 적이 있었다. 전두환식의 실리외교에 비교해서 김영삼의 대일(對日)외교는 감정의 낭비가 초래한 굴욕적인 것이었다.

일본은행의 「김영삼 버르장머리 고치기」

일본은행이 우리를 부도 직전으로 밀어붙여 놓으니 김영삼 정부가 드디어 도움을 요청했고 일본정부는 이를 냉정하게 거절해 버렸다. 「김영삼의 버르장머리를 고친 것은 우리다」고 그들은 기본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허세는 국력의 뒷받침이 없는 것이었다. 외교는 군사력과 경제력만큼만 나갈 수 있는 것임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일본의 한국어선 나포에 항의해도 결국은 우리 해공군이 자위대에 눌리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 어선단을 보호할 힘이 부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원한과 오기, 그 감정은 일본을 따라잡는 데 소중히 써야 할 우리의 자산이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을 때 거대한 민족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는 그 감정을 실익이 없는 구호나 저주로 낭비해 버리도록 부추긴 것이 김영삼 정부였다.

일제의 침략을 조용히 끊임없이 되씹도록 만들 조선총독부 건물을 광복 50주년 기념행사 때 푸닥거리하듯 없애버림으로써 후손들로부터 아픈 기억을 빼앗아버린 김영삼식 극일(克日)은 민족 감정의 낭비를 초래한 결과적 친일(親日)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행태-위선, 사대주의, 무지.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있어도 나라가 휘청거릴 터인데 세 가지를 다 가진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놓은 국민들은 당연히 그 대가(代價)를 치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국민들은 김영삼씨와 같은 정치문화 속에서 수십 년을 호흡해온 김대중 대통령이 「제2의 김영삼」이 되지 않도록 감시, 견제, 충고할 의무와 권리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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