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錄" IMF사태의 내막(下) - 지상(紙上)청문회 / 김영삼(金泳三)의 책임
사대적 세계화가 IMF로 가는 전주곡(前奏曲)
돈벌이와 집총(執銃)의 경험이 없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독서량이 절대 부족하여 균형감각에 문제가 있던 그는 아들이 구속된 이후에는 상심한 나머지 공직자의 기본 의무도 다하지 못하고 있다가 IMF 폭풍에 휩쓸렸다. 일본은행이 외채를 회수함으로써 시작된 외환위기는 그들이 김영삼(金泳三)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는 꼴이 되었다. 金泳三의 실패를 연구해야 김대중(金大中)의 실패가 예방될 것이다.
<1998년 4월 월간조선>
서로 덮기식 양김(兩金) 합작
지난 3월 초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조선일보(朝鮮日報)와 회견하면서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아니?주로 경제관료들에게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또 평생 정치동지로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을 배려한 발언이겠지만 경제 청문회나 감사원 감사가 대통령의 이런 태도에 영향을 받으면 경제관료들을 속죄양으로 만들고 전 현직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빠져버리는 식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다. 20여 개 투자금융사를 종합금융회사로 전환시켜주도록 재정경제원에 압력을 넣어 결과적으로 외환위기의 한 원인을 제공한 정치인들에 대한 조사를 생략하고 종금사로부터 떡값을 받은 공무원들만 처벌하는 식, 김영삼 전 대통령을 청문회로 불러내지 않고 강경식(姜慶植) 경제팀만 상대로 외환위기의 책임을 추궁하는 식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검찰과 감사원이 정치권의 하수인이 되어 이런 속죄양 만들기에 봉사하고 언론이 마녀사냥 식 보도로 이를 응원하면 음모는 성사된다. 경제팀을 속죄양으로 만드는 데는 전 현직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이 암묵적(暗默的)으로 합의할 가능성도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회의는 야당 시절에 노동법 개혁법안과 금융개혁법안에 반대하고 IMF에 재협상을 요구하여 외환위기에 직 간접으로 기여한 전과(前過)가 있다. 한나라당은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실책을 당시 여당의 책임으로 뒤집어쓰는 사태를 피하고 싶어할 것이다. 종금사 문제가 수뢰사건으로 확대되면 여야 정치인들이 많이 다칠 수도 있다. 대선(大選)비자금에 관한 한 공동운명체인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이 김영삼씨의 14대(代.1992년) 대선 자금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검찰이 김대중 당선자의 비자금에 면죄부를 주는 것을 허용하는 식으로 조용히 덮어버렸다. 서로 덮기 식의 양김(兩金) 합작이 이루어진다면 이번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규명, 진실규명도 정치적으로 처리되고 말 것이다.
김영삼(金泳三)의 인간 됨이 IMF 사태의 원인
19세기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黑船)이 일본 근해에 나타났을 때 정신을 차린 일본무사들은 명치유신으로 국가를 개조함으로써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룩했다. 먼저 근대화를 한 일본이 운양호를 끌고 강화도 앞에 나타났을 때 조선의 선비들은 고질적인 당파싸움으로 적전(敵前)에서 분열함으로써 식민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기 1274년 몽골-고려 연합함대 3만 명이 지금의 후쿠오카 부근에 상륙했을 때 개인기에 의존하던 일본의 카마쿠라 막부 무사들은 단체전의 도사인 몽골군에게 일패도지 하였다가 태풍의 도움으로 나라를 건졌다. 그 7년 뒤 몽골-고려 연합함대 15만 명은 다시 일본 원정에 올랐다.
이번에는 상륙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일본이 해안을 따라 성벽을 쌓고 단체전법을 강화하여 몽골군은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에 이미 패색(敗色)이 짙었다. 당파싸움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지 못하여 임진왜란(1592년)을 당했던 조선 지도부는 그 35년 뒤에는 정묘호란, 다시 그 9년 뒤에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어리석은 임금이 얼어붙은 삼전도(三田渡)의 땅바닥에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찧으면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구걸하였다. 한 번은 질 수 있지만 두 번은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역사적 체질이라면 적전분열과 역사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민족적 체질이 되었다. 이 체질이 이번 IMF 사태를 당하고도 개선될 기미를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사태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냉정하게 분석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자는 지난 두 달간 강경식 경제팀을 상대로 하여 외환위기의 원인을 캐내려고 했으나 벽에 부딪쳤다. 강경식(姜慶植) 김인호(金仁浩)씨는 자신들의 재임기간 8개월 분(分)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관련된 것이나 다른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의 원인을 강경식 경제팀 8개월로 한정하여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영삼씨가 내각제하의 상징적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중심제 하의 대통령이었던 것이 확실하다면, 또 IMF 사태가 그의 재임기간 전체의 실정(失政)이 누적되어 일어난 것이라면 그에게 원인을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지식 아닌 상식의 문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문회에 불려나오면 「경악할 만한 수준의 경제지식」을 보일 것이고 이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점잖은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그런 「경악할 만한 수준」, 그것이 바로 IMF사태의 원인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인물을 청와대로 보내 오늘의 국난(國難)을 자초한 유권자들은 인간 김영삼의 적나라한 모습을 직시(直視)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건 직시는 민주주의를 외쳤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우리사회에서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른바 문민정치인들의 실상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행태를 감시, 견제, 평가 할 수 있는 눈을 밝게 해주는 좋은 정치강좌도 될 것이다. IMF 사태의 원인을, 국정(國政)의 키를 잡았던 김영삼씨의 인간됨에서 찾는 것이 가장 본질적인 해명 법이다.
지금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우리가 일류국가의 꿈을 지녔던 시절, 21세기를 지향하면서 일류국가다운 국가경영 제도를 만들라고 청와대로 보냈던 김영삼씨가 역사의 소명(召命)을 배신하고 개혁과 세계화란 좋은 단어를 정치보복과 현대사 파괴, 낭비와 허례허식에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IMF 사태는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평생 돈벌이와 집총(執銃)을 해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평균적인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경험하게 되어 있는 이 두 가지를 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를 한국인의 생활정서로부터 유리된 존재로 만들었다. 그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26세에 국회의원이 됨으로써 밑바닥의 삶으로부터 일찍 졸업하였으니 세상물정과 민심이 도는 방향을 감지할 수 있는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의 이런 결점은 대통령이 된 뒤에 「돈의 소중함과 무서움을 모르는 행태」로 나타났다. 그는 서울시민들의 시야가 남산으로 향할 때 눈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서 1천5백억 원을 들여 아직도 튼튼한 남산외인아파트를 폭파시켰다. 약 1조원을 들여서 민족정기를 회복한다는 명분아래서 옛 중앙청을 철거했다. 지역주민들이 원한다고 너무나 쉽게 경부고속전철 대전역과 대구역을 지하로 내렸다. 약 2조원이 더 들어가는 설계변경이었다. 「대통령직을 걸고 막겠다」던 쌀 시장 개방을 막지 못한 무능(또는 그런 공약을 한 무모함)을, 농촌구조개선에 5년간 50여조 원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덮었다. 지금 이 돈이 농촌에서 어떻게 낭비되고 있는가를 아무도 알아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는 바로 이런 자세, 즉 국가예산을 목소리 높고 머릿수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하는 이런 나라에 IMF가 찾아온 것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이런 식의 예산낭비와 감정의 낭비를 선도하는 나라에서 경제가 잘 된다면 경제학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실패한 것은 경제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식이 없어서였다. 김영삼씨는 약 2천6백년 전 중국 제(齊)나라 명재상 관중(管仲)이 말한 정도의 경제상식만 갖고 있었더라도 족했을 것이다. 「재물이 많은 나라에는 먼데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 나라의 땅이 개발되면 사람들은 머문다. 식량창고가 충실해지면 예절을 알게 된다. 입고 먹는 것이 족하면 영욕(榮辱)을 분별한다. 법을 지키면 일복이 화합한다.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차리게 되면 임금의 명령이 먹혀든다」(관자(管子) 제 1권 1절).
국익(國益)을 버리고 사익(私益)을 취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극은 독서량의 부족이었다. 측근들은 활자를 싫어하는 대통령에게 좋은 책들을 대신 읽고 그 내용을 요약하여 올리더니 신문기사까지 요약하여 읽혔다. 독서의 부족은 교양의 부족을 결과한다. 독서 없이 이루어진 교양은 없다. 교양은 균형감각과 염치(廉恥)가 있는 인간을 만든다. 엄청난 예산낭비를 감행한 김영삼 대통령은 공무원들에게는 골프를 금지시켰고 자신은 점심을 칼국수로 때웠다. 이 우스운 불균형! 박물관을 새로 짓기도 전에 근사한 국립 박물관을 부수고 전시(戰時)가 아닌데도 민족의 유산들을 임시건물에 임시전시를 시키는 대통령한테 상식이 통할 방법이 무엇인가. 이런 인물이 자신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을 쓴다 한들 그 머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김영삼 대통령은 1987년에는 전술 핵을 원자로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고(관훈클럽 토론회) 1992년에는 「민족의 원수」김일성에 대한 평가를 유보했다. 북한의 1백만 대군과 맞선 대한민국의 최고사령관이 대북(對北)전략의 핵심인 김일성에 대한 도덕적 평가와 전술핵 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차라리 국민들의 비극이었다. 이런 대통령이었기에 강경식 경제팀은 「외환위기 중에 우리는 대통령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고 일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강경식 팀의 오산(誤算)이었다. 신념 없는 대통령은 「없는 대통령」보다 더 개혁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한국당이 「이제 우리는 여당이 아니라 다수당일 뿐이다」고 선언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을 버린 시점에서 외환위기가 닥치자 금융개혁 법안의 국회 통과에 모든 것을 걸고 있던 강경식 팀은 당황했다.
그들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김대중 총재한테 전화를 걸어 반대를 하는 것은 좋은데 국회에 참석하여 반대표를 던져달라고만 이야기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 대통령은 끝내 전화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인 숙적(宿敵)에게 아쉬운 말을 하기가 싫었을 것이다. 체면과 국익 가운데 그는 체면을 택한 것이다. 더구나 그 금융개혁법안은 대통령 직속 위원회에서 만든 것이었다. 자신이 만든 법안이 통과되든 말든 방관만 하겠다는 대통령은 이미 공인(公人)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외환보유고가 하루에도 최고 10억 달러씩 줄어들어 벼랑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단 한번 성난 얼굴로 텔레비전 앞에 나타나 국민들을 향해서 연설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연설 주제는 경제위기가 아니었다.
신한국당과 국민회의가 제기한 「청와대와 김현철 인맥에 의한 이인제 후보 지원설」에 대한 경고였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를 영어로 CEO(Chief Executive Officer)라고 한다. 사인(私人)인데도 오피서(Officer)라고 부르는 것은 경영자는 공직자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대한민국의 CEO」김영삼 대통령은 아들 김현철(金賢哲)씨가 구속된 이후 사람이 달라 보일 정도로 기가 빠지고 국정에 등한하더라는 증언이 많다. 소년소녀 가장도 부모가 없다고 세상을 살아가는 용기를 잃지 않는데 남북 무력대치상황에서 4천5백만 인구의 안위(安危)를 책임진 대통령이 아들의 구속을 놓고 그토록 상심한 모습을 주변에 보여주었다는 것은 그가 과연 공인으로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나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실록] IMF 사태의 내막 下 - 사대적 세계화(1)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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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9, 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