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조국과 운명을 같이한 월남군 장성들

1975년 월남패망시 자결한 5명의 월남군 장성들,우리는 그런 비극 되풀이 말아야

1975년 4월30일 월남공화국(남베트남)이 패망할 때, 월남군 제7사단장 등 몇몇 장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이대용 장군(전 주월공사)의 회고록에서 본 적이 있다. 늘 이름도 모르는 그들을 마음속으로 기리고 지냈는데, 우연히 조선일보의 한 블로그(메이저리그의 친구들 cafe.chosun.com/mlb)에서 그들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일부 문장을 손질해 여기 소개한다. 사라지는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한 진정한 군인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이 겪었던 비운을 우리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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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하여 세상에서 사라진 나라를 지키다 떠난 그들에게 진혼곡를 들려주고 싶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편에서 쓰여 진다. 사이공이 함락되고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월남(남베트남)에는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희망이나 긍지를 가진 지도층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군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미(美)대사관 옥상에서 나만 살겠다고 아우성치며 조국을 탈출하려는 대열에 끼어드는 대신,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어질 조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라이케이에 주둔 중이던 보병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젊은 사관생도들이 사이공을 지키겠다고 결사항전(決死抗戰)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사이공에 남아있는 패잔 병력과 합류하기 위해 5천명의 사단 병력을 이끌고 월맹 1군단 병력이 포위하고 있는 사이공 외곽 포위망을 뚫기 위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부대가 궤멸되자, 그는 4월 30일 사이공의 함락과 함께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했다.


 

 

 

 1972년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월맹과 베트콩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사이공에서 9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캄보디아 인접 도시 안록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바로 그 공격에서 안록을 지켜낸 영웅이 리반흥 장군이다.

리반흥 장군은 안록 전투를 끝낸 후 제4전선의 칸토로 부임했다. 칸토는 사이공 남부에 있는 농산물 집산지로 메콩 델타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그는 부임 후 지역을 평정하고 효과적으로 방어해서, 월맹군과 베트콩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용맹성은 널리 알려져 있었고 군내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해 4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의 부대원들은 마지막 한 방의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겠다는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4월 30일에 대통령은 항복선언을 했다.

리반흥 장군은 4지구 전선사령관 웬코어남 대장으로부터 항복명령을 직접 전화로 전달받은 후, 그동안 군인정신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패망한 나라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부하들과 처자식에게 안녕을 고하고 벨트에 차고 있던 45구경 권총으로 자결했다.


  4지구 전선사령관 웬코아남 대장은 부하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온 군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4월30일 밤 11시 30분쯤 리반흥 장군과 전화 통화를 했다.

'리장군, 덩반민 대통령에게서 항복 명령을 받았네. 이제 우리는 나라를 잃었어.'

리반흥 장군과 통화를 끝내고 난 후, 그의 방에서는 한 방의 총성이 들렸다. 그 소리는 명예로운 그의 생을 마감하는 서글픈 소리였다.


 사이공 남쪽에 위치한 수도를 지키는 보병 7사단장 탄반하이 장군은 호탕하고 솔직하며 청렴결백한 군인으로 군내부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7사단장이 되기 전 그는 특수부대장으로 상업지구 초론에 침투한 적을 소탕했고, 국가경찰국장 재직시에는 청렴한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도 사단장실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공수부대 출신인 2지구 전선사령관 판반푸 대장은 주월한국군이 철수한 지역을 지휘하던 총사령 관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던 캄보디아 국경 근처 풀레이크 전선이 붕괴한 후 사이공으로 후퇴했다.

주월미국대사관에서는 그에게 사이공 탈출을 도와주겠다고 연락해 왔다. 하지만 그는 “패전지장(敗戰之將)으로 나라를 잃게 했는데,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면서 미대사관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호옥칸 대령은 패망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군인들과 동렬에 놓이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수색정찰대 소속 장교로 군에 첫발을 디딘 그는 1974년 베트남 남쪽 깊숙한 추옹티엔성 성장으로 임명됐다. 성장으로 임명된 지 1년 후,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고 대통령은 항복을 선언한 상태에서 그는 항복을 거부하고 마지막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기관총을 들고 부대원들과 성청을 지켰다.

 전투가 끝난 후 월맹군의 포로가 된 그는 월맹군의 속칭 캉가루 군사법정에서 갖은 모욕을 감수하면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처형을 앞두고 노란 바탕에 세 줄의 적색 선이 그려진 조국의 깃발에 마지막 경례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 조국이여....'


당시빈 소령은 덩반민 대통령이 항복선언을 한 지 2시간 후, 가족들에게 수면제를 먹인 뒤에 집안에 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작은 사당에서 7명의 자녀와 아내를 차례로 사살하고 스스로 목숨도 끊었다. 그의 시신 곁에서는 현재 가치로 미화 500달러에 상당하는 월남돈과 함께 유서가 발견됐다.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존경하는 이웃이여,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와 저의 가족은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살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여기서 생을 마감합니다.

저희가 이렇게 떠나서 여러분에게 불편을 끼쳐 드리는 군요. 끝으로 적지만 제가 가진 전 재산을 남겨 놓고 떠나오니 저희를 매장하는 비용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시빈 올림>


 덧붙임) 사이공이 함락하기 전 수안록 마을에서 5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4만 명의 월맹군을 막아냈던 다오 장군은 월맹군의 포로가 되어 17년간 ‘정신개조 및 재교육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미국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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