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에 적혀 있는 통일대왕 文武王의 유언은 권력자의 유언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담담하다. 죽음을 맞아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담백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부를 소개한다.
<(前略) 山谷은 변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吳王(손권)의 北山 무덤에 금으로 채색한 새를 볼 수 없고 魏主(조조)의 西陵에는 오직 銅雀의 이름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機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만다. 초동 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 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는다. 한갓 자재를 낭비하여 虛事와 비방만을 책에 남기고, 헛되이 인력만 수고롭게 할 뿐 사람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은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므로, 죽은 뒤 10일이 되면 庫門의 바깥뜰에서 인도의 식에 따라 화장하여 장사지내고, 服의 경중은 규정이 있으나 喪의 제도는 애써 검약하게 하라. 邊城의 鎭守와 州, 縣의 과세도 꼭 필요치 아니하면 모두 헤아려서 폐하고, 율령과 격식중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널리 알게 하고, 소속 官員은 곧 시행하라>
문무왕의 인감됨을 느끼게 해주는 이 유언은 천하대란의 시대에 태어나 山戰水戰을 다 거친 대인물의 폭과 깊이를 드러낸다. 바로 이 문무왕이 모든 것을 걸고 對唐결전을 선택하여 唐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함으로써 한반도를 한민족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한 분이다. 50대에 죽은 문무왕 金法敏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그 재를 바다에 뿌리게 한 것은, 지금 권력을 잡았다고 오만과 위선에 빠져 있는 불나비 같은 인사들에게 주는 좋은 가르침이 아닌가. 민족사상 최대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無常의 겸허함! 4, 5년짜리 권력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전통과 人倫과 예절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덤비고 있는 몇몇 얼치기 인간들이 生의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671년 문무왕이 신라를 치려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答薛仁貴書는 유서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그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이 지방에 주둔한 唐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사실적으로 적고 있다(三國史記).
<6월에 先王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 총관은 나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역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에 군량이 다하였으나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勅旨를 어길까 두려웠고, 평양으로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노약자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풍설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군량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 하므로 신라의 병마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노상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 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인력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이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勸課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都護 劉仁願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육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당신들 唐軍의 皮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문무왕의 이 대목이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신라의 승리는 정치의 승리인 것이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명예심, 다양한 구성원의 통합, 특히 軍官民의 일체감이 장기간의 통일전쟁 중에서도 신라의 체제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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鄧小平의 감동적인 유언
조선일보 북경특파원을 지낸 朴勝俊 기자가 쓴 칼럼에 나오는 대목이다.
<93세에 세상을 뜬 덩샤오핑(鄧小平)은 1997년 2월19일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에 부인 줘린(卓琳)을 통해 유언을 남겼다. 줘린은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실로 편지를 보내 “이것이 덩샤오핑 동지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전했다. 부인이 전한 덩샤오핑의 유언은 이런 것이었다.
“유체(遺體·시신) 고별의식 같은 것은 거행하지 마라, 영당(靈堂·빈소)도 차리지 마라, 유체는 의학연구를 위해 해부용으로 제공하고, 각막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라, 화장한 뼛가루는 바다에 뿌려라.”
중국은 전통적으로 매장(埋葬)이었으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화장(火葬)으로 통일됐다. “사고행위가 끝난 육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회주의 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베이징(北京)에서 세상을 떠나면 권력자이건 보통 인민들이건 예외없이 베이징 장안가 서쪽에 있는 팔보산(八寶山)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거기에 있는 공묘(公廟)에 안장된다. 덩샤오핑의 유골은 유언에 따라 비행기에 실려 동중국해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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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正熙 이름으로 나온 여러 책들 가운데 1963년 9월1일 向文社에서 펴낸「국가와 혁명과 나」는 특별하다. 代筆者 朴相吉씨(청와대 대변인 역임)에 따르면 朴최고회의 의장(당시)이 일일이 읽고 고치고 했기 때문에 내용은 완전히 朴대통령 것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朴正熙가 5·16 군사혁명 때 가졌던 꿈을 잘 보여주는 이 책은 朴正熙의 인간성 그대로 소박하고 솔직하게 쓰여진 게 특징이다. 이 책에서 그가 반드시 이루겠다고 다짐했던 꿈들이 그의 18년 통치 기간중 그 이상으로 실천되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흥미롭다. 인용한다.
<나의 갈 길-경상북도 선산군, 이곳이 본인이 태어난 곳이다. 20여년간의 군대 생활, 그리고 소년시절에도 본인은 自立에 가까운 생활을 배워왔다. 그만큼 가난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환경이 본인으로 하여금 깨우쳐 준 바 많았고, 결의를 굳게 하여 주기도 하였다. 이 같이 가난은 본인의 스승이자 恩人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인의 24시간은, 이 스승, 이 恩人과 관련 있는 일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한국의 창건」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동시에 이것은 본인의 生理인 것이다. 본인이 특권계급,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하는 所以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본인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庶民의 人情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念願한다>
朴正熙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일부 상류층의 사치나 특권층의 권력남용에 대해 생래적 反感을 드러냈던 이다. 호화주택을 지어 朴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가 정치생명이 끝나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의 庶民性은 의료보험 도입, 근로자 야간 학교 설립, 社員持株制 도입 등 많은 親勞정책으로 나타났다. 그의 장례식 때 보여준 서민들의 애도, 지금도 국립묘지의 그의 묘소를 찾아오는 참배객의 행렬(대부분이 서민들이다)은 「서민의 인정 속에서 生이 끝나기를 염원했던」그의 꿈이 이뤄졌음을 말한다.
겸손한, 세 偉人의 유언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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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01, 08:28











